- 저자 : Ronald Purser
- 원문 : “The faux revolution of mindfulness: McMindfulness is the new capitalist spirituality”(2019.5.19.)) / 이 글은 독립 온라인잡지인 www.opendemocracy.net에 실렸다.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에스페라
우리는 현재 ‘마음챙김 혁명’(mindfulness revolution)의 한가운데 있다고 이 혁명의 지지자들은 말한다. 최근 ‘마음챙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카밧-진(Jon Kabat-Zinn)은 우리가 글로벌 르네상스의 직전에 있으며, 그래서 마음챙김은 “인종과 지구가 다음 몇 백 년을 견딜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라고 까지 선언한다.
정말일까? 혁명이라고? 글로벌 르네상스? 그러한 찬란한 시기를 얻기 위해 정확히 무엇이 뒤집히거나 무엇이 급격하게 바뀌었는가?
내가 지난번 뉴스를 보았을 때 월가(Wall Street)와 대기업들은 여전히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사업을 했고, 특수 이익집단과 정치권의 부패는 여전히 저지되지 못했으며, 공립학교들은 극심한 재원 부족과 무관심으로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었다. 현재 부의 집중과 불평등은 기록적인 수준에 있다. 대량 투옥과 교도소 과밀수용은 새로운 사회적 질병이 되었고, 한편 흑인들을 향한 경찰의 무분별한 총격과 가난한 사람들을 악마로 만드는 일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미국의 군사 제국주의는 계속 확산하고 있고 임박한 지구 온난화의 재앙들은 이미 그 끔찍한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마음챙김 ‘혁명’ 지지자들의 오만함과 정치적 순진함은 꽤 충격적이다. 선행을 베풀고 세상을 구하는 것에 너무 현혹되어 버린 이 진짜 추종자들에게는,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심이든지 간에, 엄청난 맹점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자주 마음챙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의 명령을 강화하는 상품화된 도구적인 자조(自助) 기술로 환원되어왔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카밧-진과 그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정해진 틀 속에서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 그러한 정치·경제적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알지 못하고 상황에 잘못 적응하는 개인들에게 있다. 행복하게 사는 것(복지)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스트레스를 개인적이고 병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11억 달러의 마음챙김 산업에 요긴한 것이 되어왔다.
이에 대응하여, 마음챙김은 대중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새로운 개별적 자아의 종교로 떠올랐다. 이 종교가 주장하는 혁명은 거리에서나 집단 투쟁과 정치적 항의 또는 비폭력 시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한 가지 반복되는 메시지는 ‘현재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정신적 반추에 빠지거나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이 우리의 불만족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카밧-진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사회 전체가 최고 수준의 주의력 장애를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스트레스와 사회적 고통은 엄청난 불평등, 불법적인 대기업의 사업 관행 또는 정치적 부패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 위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카밧-진은 이것을 ‘생각병’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그 자체가 본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경제 속에서 마음을 챙기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챙김 상인들이 우리가 스스로 만족해하며 생각있는 자본주의자가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상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음챙김, 긍정적 심리 그리고 행복 산업은 스트레스의 비정치화의 측면에서 공통적인 핵심을 공유한다.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이라는 문화적 메시지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스트레스는 개인적이라는 수사(修辭)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하게 할 만하다.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에서 지적한 것처럼, 스트레스의 사유화는 “공공 개념의 거의 완전한 파괴”를 이끌었다.
마음챙김 옹호자들은 스트레스는 우리의 마음과 몸을 황폐하게 만드는 해로운 영향이며 ‘마인드풀 업’하는 것(마음챙김을 향상시키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는 강력한 진실효과를 가지는 유혹적인 제안이다. 먼저, 우리는 스트레스 전염병이 존재하고, 그래서 그 병을 현대 시대에 단순히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어졌다. 두 번째로, 스트레스는 아마도 어디에나 있어서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제어하며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자본주의 경제의 노예 상태에 적응하는 것은 스트레스로 지친 주체인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마음챙김은 이러한 취약성을 목표로 삼고, 그리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자기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하기 위한 선의의 기술로 보인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한 나라: 이념으로서의 스트레스의 문제』(One Nation Under Stress: The Trouble with Stress as an Idea)에서 다나 베커(Dana Becker)는 스트레스 개념이 “적어도 현상유지로부터 얻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들을 불리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인 문제들을 개인적인 문제들로 환원하여 흐리거나 숨긴다고 지적한다. 사실 베커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보이는 긴장이 사회적인 강요와 연결되어 있고 주로 사회·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될 필요가 있다는 믿음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긴장들은 주로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개개인의 삶의 방식의 문제라고 여기는 현행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스트레시즘’(stress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스트레시즘’의 문화적인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챙김 운동은 하나의 과학적인 치료방법으로 열렬히 홍보되었다. 그러나 초점은 여전히 이른바 현대 문명의 ‘생각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개인에게 정면으로 맞춰있다. 마음챙김을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흘러가는 법을 배우면서 숙련되게 우리의 광적인 ‘실행모드’를 더욱 조화로운 ‘존재모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새로운 면역력이다. 즉 아마 우리가 현대 삶의 스트레스를 받는 중에도 잘 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의 백신인 것이다. 팀 뉴튼(Tim Newton)이 만들어 낸 “스트레스 핏”한(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개인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마음챙김은 종종 기량을 다지는 방법으로 광고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더욱더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행위자가 되도록 정신 건강을 향상시키는 유용한 기술로써 알려져 있다. 가장 성공한 마음챙김 명상 앱인 <헤드스페이스>(Headspace)의 유명한 구절이 “마음을 위한 헬스클럽 회원”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운동의 핵심 격언은 ‘현재 순간에 존재해라’이다. 마음챙김의 열성적인 추종자들에게 사회·정치적 변화는 주의가 산만해진 대중들로 하여금 이 격언을 따르고 ‘마음을 챙기며’ 살도록 만드는 환상에 달려있다. 이 운동의 ‘현재 순간’이라는 물신(物神)은 역사적인 기억의 집단 망각을 촉진하는 동시에 유토피아적 상상을 효과적으로 미리 차단하는, 사회적 기억 상실을 촉진하는 관행이다.
이러한 ‘현재 순간’주의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우리의 현재 순간을 더 견딜 수 있게 만들면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치료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현상유지를 견디는 능력은 현재의 마음의 방공호로의 영구적인 피난에 해당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희망을 잃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을 위한 살균된 완화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하기’ 식의 마음챙김인 것이다.
마음챙김 운동은 에릭 카즈딘(Eric Cazdyn)의 책 『이미 죽은 자들: 정치, 문화 그리고 질병의 새 시대』(The Already Dead: The New Time of Politics, Culture and Illness)에서 “새로운 만성질환”이라고 부른 것과 공명하며 작동한다. 카즈딘은 새로운 만성질환은 “현재를 미래로 확대하는데, 그 과정에서 종말의 힘을 감추고 마치 현재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저 현재 순간에 있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챙기며 삶으로써, 계속 진행 중인 그 어떠한 위기들도 연기하고, 피하고, 은폐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허위적인 마음챙김 혁명은 현재 순간의 취약함으로 도피함으로써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만성질환은 우리가 마음을 챙기며 현재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이는 체념하는 정치적 수동성에 만족하도록 부추기는 잔인한 낙관론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챙김은 개인적인 변화를 사회적 고통에 책임이 있는 역사·문화·정치적 상태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하는 것으로 향하게 하는 것 대신에, 유독한 구조를 관리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견디도록 하는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음챙김이 금지되어야 하고, 또 마음챙김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속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속임수를 피하는 사회적이고 시민적인 마음챙김의 형태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분별없는 이탈 보다는 비판적인 사고를 촉진하면서 사회적 정의 활동과 관조적 탐색을 통합시킴으로써 생의학이 개인의 병리학에 초점을 맞추는 데서 벗어나고 있다.
이 분야의 혁신가들은 억압에 저항하는 비판적인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마음챙김 교육 과정을 다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베쓰 버릴라(Beth Berila)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특권을 해체하고 버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마음속으로 억압을 받아왔는지를 드러내도록 돕는 마음챙김 방법도 발전시켜왔다. <이스트베이 명상 센터>(East Bay Meditation Center)의 선생님들과 함께 무심 패트리시아 이키다(Mushim Patricia Ikeda)는 유대와 마음챙김에 관련된 행동주의를 육성하기 위해 사회적 정의 문제들을 상호의존에 관한 부처의 가르침에 연결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그리고 영국의 <마음챙김과 사회 변화를 위한 네트워크>(Mindfulness and Social Change Network)는 사회·정치·환경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음챙김 수련을 실험하고 있다.
불만족, 걱정, 스트레스가 단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원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마음챙김은 저항에 불을 붙이는 연료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