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 가운데 맨 뒤에 달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9장 다중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무엇보다도 다중에 속한다.1)[정리자 주] ‘entrepreneurship’은 가장 포괄적으로는 기업가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며 ‘존재’에는 정신, 의지, 행동, 사고방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용어의 잘 알려진 우리말 옮김은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맥락에서는 이를 채택하지만 이 옮김이 잘 안 맞는 맥락에서는 가령 ‘기업가활동’과 같은 식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이 가진 협력을 통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능력을 가리킨다. 다른 많은 용어들처럼 이 말도 왜곡되었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두 경로 즉 간접적 경로와 직접적 경로를 통해 살펴본다. 전자는 징후적 독해로서 슘페터의 기업가론을 다루어 다중의 협력적 힘을 자본이 계속 강탈함을 밝힐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기업가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다중의 잠재력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로는 존재론적 독해로서 다중의 생산적인 힘을 직접 살펴보면서 다중의 리더십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리더십이 의미하는 바에 이런 맥락에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기업가가 되는가
기업가는 일이 되게 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의 본질은 기존의 노동자들, 아이디어들, 기술들, 자원들, 기계들 사이에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창출하는 것이다. 즉 기업가는 새로운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s)2)[정리자 주]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이다.를 창출한다. 이 배치는 역동적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은 단지 ‘변화에 적응하는 대응’만을 추구한다. 진정한 기업가는 ‘창조적 대응’을 수행한다.
결합의 본질은 협력이다. 생산성 증가의 열쇠가 기계 체계들과 연계된 노동자들의 협력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는 맑스에 가깝다.
맑스는 협력이 생산성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을 변형하고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노동자가 계획된 방식으로 다른 노동자들과 협력할 때, 그는 그의 개인성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그의 유적 능력을 발전시킨다.”3)[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1976, volume 1, p. 447. 인류의 힘은 협력 속에서 실현된다. 새로운 사회적 존재가, 새로운 기계적 배치가, 인간·기계·아이디어·자원 등등의 새로운 구성이 이 과정에서 창출된다.
슘페터가 잘 알고 있듯이, 기업가는 보수가 지급되는 협력 즉 노동자들의 협력 이외에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협력 즉 방대한 사회적 장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후자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력 혹은 폭력이 필요하다. 맑스도 협력을 감독하는 자본가를 전략을 지시하는 전쟁터의 장군에 비유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은 항상 무력의 위협 아래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슘페터의 비유는 기업가가 부과하는 협력이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서 (보수를 받든 안 받는 모든 인구에게) 효과를 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간다. 사회적 노동은 보수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특수한 생산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포디즘 모델의 위기 시에 외부화(+ 공장의 분산, 복합산업지대들의 구축)로 이어졌던 가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의 소프트웨어 테크놀로지 파크들까지, 북부 이탈리아와 바바리아의 혁신적 생산센터들에서 멕시코와 중국의 자유무역지대들 및 수출가공지대들까지, 방대한 사회적 장의 생산력을 관할하는 이 기업가적 ‘결합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업가들은 누구인가? 『경제발전의 이론』(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의 1911년 초판에는 들어있으나 나중 판에서는 삭제된 대목에서, 슘페터는 새로운 결합 및 기업가정신에 기반을 두어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눈다. ① 관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쾌락주의적’인 대중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다. ② 예리한 지성과 민활한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볼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다. ③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행동한다. 이들은 쾌락주의적 평형을 싫어하며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힘, 명령하고 지배하는 힘, 그리하여 ‘성공적인 행동’으로 이르는 힘, 특별히 빛나는 지성이 없이도 그렇게 하는 힘이다. 여기서 슘페터가 기업가정신은 리스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에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행동인’(Man of Action), 즉 복종을 요구하는 인격체이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슘페터는 노동자, 농민, 장인 등으로 이루어진 대중을 쾌락주의적이고 수동적이고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제시하는 것이다.
슘페터의 ‘행동인’의 인간학은 분명 조야하지만, 미디어가 주도한 오늘날의 기업가 열풍에서, 특히 닷컴들과 스타트업들의 디지털 세계에서 분명하게 공명된다.
그러나 그가 1934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개정했을 때 그는 기업가라는 영웅적 형상을 버린다. 그는 이제 기업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의 바람직함을 납득시키고 자신의 지도에 대한 확신을 창출하는 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창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 그는 그에게 돈을 대줄 은행가만 납득시키면 된다. 금융의 점점 더 강력해지는 지배가 기업가를 대중의 동의를 얻는 지도자에서 은행가에게 청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폐, 금융, 재산의 힘 및 그것이 배치하는 경제적 강요가 전통적인 권위와 동의의 방식을 대체했다.
40년대에 들어와서 슘페터는 대기업에 조직된 재산과 소유조차도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의 동의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재산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생명력을 빼낸다···. 탈물질화되고 탈기능화된 부재자 소유는 재산의 활력적인 형태처럼 인상을 강하게 주어 도덕적 충의를 끌어내는 식이 아니다. 결국 진정으로 사업을 지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거대 기업의 안에든 바깥에든.”4)[원주]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Harper, 1942, p. 142. 이 시점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진하는 유일한 길은 중앙집중화된 계획임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슘페터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그는 대중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생산적 협력이 분산된 다중심적 회로들의 형태로 사회적 장 전체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결합들이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서 점증적으로 조직되고 유지되고 있다. 고정자본을 재전유할 잠재력과 함께 다중이 생산적 협력의 생성과 실행에서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생산이라는 전장에 장군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군대가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방향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택할 수 있는 옵션
① 내적 지배 : 노동기율로 환원,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에 순응하도록 강요, 가령 디지털 테일러주의 같은 것으로 민중의 지성·창조성 및 사회적 능력의 삭감.
② 외적 지배 : 상대적 자율성을 띠며 사회가 생산하는 가치를 외부에서 추출. 금융.
다섯 번째 요청 : 다중의 기업가정신
슘페터의 생각에는 다중의 기업가, 즉 사회적 협력의 자율적 조직화가 잠재해있다.
생산양식이란 삶형태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의 형태의 생산을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사회적 생산에서는 상품보다도 사회 및 사회적 관계들이 생산과정의 직접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고 삶형태를 재생산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노동의 생산양식이 바로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등장하는 장(場)이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①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기업가가 되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빠져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활성화하는 협력의 메커니즘들과 관계들이다. 개인적으로 당신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이미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가하는 위협을 내화하고 순치하려는 시도이다.
② 또 하나 제거해야 할 신비화는 사회적 기업가정신이다. 이는 때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좌파 정치가들에 의해 지지된다. 사회적 신자유주의. 자선.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사회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기업가정신의 연계는 공동체 네트워크들과 자율적 협력양식들을 파괴한다.”
다중의 기업가는
①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이다.
②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
③ 사유재산의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와 공통적으로 되어야 한다.
생산적 협력의 네트워크들, 생산·재생산의 사회적 성격, 다중의 기업가로서의 능력들—이것들이 전략적 힘의 견고한 토대들이다.
사회적 생산→사회적 연합 →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
생산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① 과정이 협력적이다.
② 생산의 결과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 자체이다. ‘인간생성적’(anthropogenic) 혹은 ‘삶정치적’(biopolitical)
이 두 의미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곧바로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적 소유는 ① 그것이 생산을 낳는 협력의 관계를 봉쇄하고 ② 생산의 결과인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 생산에 점점 더 족쇄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가는 경로는 직접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를 천명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행동 기획들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생산이 창출한 잠재력은 사회운동들과 노동투쟁의 결합이 실현될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적 형태이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들이 연대하거나 사회적 연합(social union)이라는 형태의 혼합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정의가 극히 모호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 sindacalismo social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5)[원주]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La torsione neoliberale del sindicato tradizionale e l’imagginazione del ‘sindicalismo sociale’: Appunti per una discussione,” http://www.euronomade.info/?p=2482. 또한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eds, Sindacalismo sociale, DeriveApprodi, 2016, especially their introduction 참조. 노동투쟁과 사회운동의 교차 혹은 교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합주의는 한편으로는 노동 조직화의 힘을 회복하고 일부 기존 노조들의 보수적 행동을 극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수명과 효과를 강화할 희망을 제공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해묵은 관계를 전복한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경제투쟁(노조 투쟁)은 부분적이고 전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이 이끄는 정치투쟁과 연대하여 지도를 받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가 제안하는 양자의 연대는 전술과 전략의 관계를 뒤섞는다. 경제적 운동이 구성된 힘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를 ①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안정되고 발전된 조직 구조에 입각할 수 있게 하며 ② 노조의 투쟁을 임금과 직장을 넘어서 노동계급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대할 뿐만 아니라[사회적 영역의 확장] 노조들의 경직된 위계구조와 낡은 투쟁방식을 사회운동의 동학으로 부수게 해준다[방법의 쇄신].
영어권에서 사회적 연합의 고전적 사례는 1900년 남아프리카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3자 연합이다 : ①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②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③ the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1997 : Reclaim the Streets와 Liverpool 부두노동자들
· 1999 시애틀: Teamsters and Turtles(환경단체들) 사이의 짧은 협력
· Federation of Metal Workers(FIOM)과 교육, 건강 등의 부문의 풀뿌리 연합들(COBAS) 같은 이탈리아의 일부 역동적 노조들, 그리고 미국의 the 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이 계속 사회운동 연합을 실험해왔다.(성공의 정도는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적 연합주의도 변해야 한다. 이전에는 노조와 사회운동의 사이의 외적 연대 관계를 추구했는데, 이제는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내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조직화와 사회운동을 단지 친밀한 유대를 가진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보고 노동의 지형이 점점 더 삶형태의 지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를 이렇게 새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직장을 넘어가는 넓은 틀에서 사회적 생산·재생산을 이해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 자체가 이제는 공장이다. 더 정확하게는 공동으로(in common) 생산된 공간이며 미래의 공통적인 것의 생산·재생산의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수단과 삶형태에 동시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생산 및 재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가 불가분하게 엮이어 있음을 보여준다. 투쟁들은 ‘공통적인 것에의 동등하고 개방된 접근 + 공통적인 것의 집단적 자주관리’를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구축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이는 탈자본주의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2013년 헬스케어 예산삭감에 대항한 “marea blanca”(‘white wave’) 시위와 2015년 자치도시 선거에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여러 큰 도시들에서 헬스케어 및 기타 사회적 서비스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목적을 가진 선거연합들이 승리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선이 존재한다.
사회적 연합주의의 주된 무기는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다.조직된 노동거부는 처음부터 노동조합의 힘의 기반이었다. 노동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 지형에서 역사적이고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틀 안에서는 비고용 노동자들, 비임금 가사노동, 불안정 노동자들 및 빈자가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 공급의 중단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오래 전에 거부의 전략이 모든 사회 집단은 아니더라도 광범한 집단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적어도 순종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궁극적으로 누구나 자발적인 노역의 공급을 중단하고 사회 질서를 파열하는 위협을 가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 즉 공통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기반이 되고 생산적 협력의 회로들이 사회 전역에 확대된 시대인 오늘날에는 거부의 힘이 사회적 지형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다. 사회 질서의 파열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지는 구분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합주의가 여는 잠재력이다. 두 전통 즉 ① 노동운동의 산업생산 차단 ② 사회운동의 사회 질서 파열의 전통이 합쳐져서 화학변화를 일으켜 폭발적 혼합물을 창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총파업이라는 생각이 새로운 의미, 더 강력한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총파업은 거부일 뿐만 아니라 긍정이기도 해야 한다. 즉 협력의 회로들과 사회적 생산의 잠재적으로 자율적인 관계들—이 관계들은 임금노동의 내부와 외부에 공히 존재하며 공유하는 사회적 부를 사용한다—을 드러내는 기업가정신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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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 [정리자 주] ‘entrepreneurship’은 가장 포괄적으로는 기업가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며 ‘존재’에는 정신, 의지, 행동, 사고방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용어의 잘 알려진 우리말 옮김은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맥락에서는 이를 채택하지만 이 옮김이 잘 안 맞는 맥락에서는 가령 ‘기업가활동’과 같은 식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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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정리자 주]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이다. |
↑3 | [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1976, volume 1, p. 447. |
↑4 | [원주]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Harper, 1942, p. 142. |
↑5 | [원주]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La torsione neoliberale del sindicato tradizionale e l’imagginazione del ‘sindicalismo sociale’: Appunti per una discussione,” http://www.euronomade.info/?p=2482. 또한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eds, Sindacalismo sociale, DeriveApprodi, 2016, especially their introduction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