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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꼬, 주체와 진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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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  미셸 푸꼬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푸꼬의 일련의 꼴레즈 드 프랑스 강의 중 맨 마지막 강의(1984년 3월 28일)에서 강의안에는 있으나 강의를 하지는 못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진실의 용기』(Le Courage de la Véité), 309-11(영어본 The Courage of truth 338-340)에 각주로 달려있다. 푸꼬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주체와 진실의 관계

(가) 고대에서의 주체와 진실의 관계 연구. 더 정확하게는 고전 그리스에서 우리가 후기 고대라고 부르는 시기 혹은 기독교의 출발까지 걸쳐있는 긴 기간이 대상. 여기서 문제는 철학사가들에게 친숙한 사건―존재와 진실의 관계가 형이상학의 방식으로 정의된다―의 다른 측면이다.

(나) 나는 이 관계를 형이상학과의 관계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관계의 존재를 함축하기도 하는 독립성)의 측면에서 연구하려고 하였다. 나는 이 관계를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la pratique de soi)의 관점에서 연구하려고 하였다.

① 즉 분석의 방향을 주체를 영혼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가능한 한 다른 방향으로 잡음으로써, 그리고 자기의 문제, 자기와의 관계의 문제에 초점을 둠으로써. 물론 이 자기와의 관계는 종종 영혼과의 관계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다소 환원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프쉬케’(psukhe, 영혼)라는 용어에 주어지는 의미들의 다양성은, 영혼과의 관계는 사실 삶(bios)과의 관계, 신체와의 관계, 정념들과의 관계, 사건들과의 관계로 구성되는 집합의 일부라는 점을 이해할 때 이해 가능하다. 혹은 적어도 더 명확해진다.

② 그리고 나는 이 관계들을 실천의 테마로서 분석하려고 하였다. 즉 기술(技術)적 과정들에 따라 다듬어지는(정교해지는) 것들로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성찰하거나, 변경·완결시키거나, 가르치거나 사례들을 통해 전달하는 그러한 실천들이다. 우리의 실존 전체에 걸쳐서 그 어떤 특권적이고 선별된 순간에서든 아니면 규칙적이고 연속적으로든 실행하는 실천들이다. 이 실천들은 자기에의 몰두(la préooccupation de soi-même), 자기 돌봄(le souci de soi)에 다름 아닌 근본적인 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실천들의 목적은 어떤 에토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일정한 합리적인 원칙들에 상응하여 존재하고 행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자립으로 이해되는 자유의 발휘를 창출한다. 따라서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을 연구하는 것은 자기 돌봄이 그 에토를 창조하는 역할에서 취하는 구체적 형식들, 처방들, 기술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다) 자기와의 이러한 관계들이 필요로 하며 지주로 삼는, 그리고 이 관계들이 기대하는 특수한 효과들을 낳는 진실 게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문제에는 몇 가지 응답들이 있다. [첫째] 자기를 윤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주체 자신과 이러저러한 거리에 있으며 이러저러한 외연을 가진 도메인들과 관련되는 이러저러한 수의 이러저러한 정도로 복잡한 지식들의 획득을 전제한다. 세상, 삶, 인간 등에 대한 근본적 진실이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행하기에 적합한 것에 대한 실천적 진실들이다. 요컨대, 배워야 할 모든 것, 즉 마테마타(mathemata)이다.1)그리스어로 ‘ta mathemata’는 ‘배울 수 있는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정리자

그러나 [둘째] 자기를 윤리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일은 또한 또 다른 진실게임을 함축한다. 이제는 배우고 가르치는 도제관계의 게임이 아니다. 삶과 그 사건들에 대비하여 갖출 진실한 명제들의 획득이 아니다. 자기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자신이 획득한 자립의 정도에, 자신이 이루어야 할 그리고 이루게 될 진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게임이다. 이러한 진실게임은 마테마타에 해당하지 않는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연마행동들이다. 자기검증, 인내력의 시험, 재현을 확인하는 기타 방식들―요컨대 수련(askesis)의 차원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기에 관한 진실의 이러한 연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진실의 용기(le courage de la vérité))라는 태도가 있어야 가능하고, 거기서 그 토대를 발견한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면서 낳을 수 있는 위험에 관계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파레시아(parrhesia)라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원래는 정치적 개념인 파레시아는 이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 돌봄이라는 원칙과 합류하여 변화하게 된다. 파레시아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레시아적 게임은 다음의 두 모습으로 나타난다.

–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 자기를 형성하는 일을 내가 돕거나 이끌고 싶을 때 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

–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발현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이 지점에서 견유주의자가 등장한다. 견유주의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뻔뻔한 용기를 지녔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대담함을 지녔다. 견유주의자는 규칙들·관례들·관습들·습관들을 비판하고 주권자들(왕들)과 권력자들을 거리낌 없이 공격적으로 대하면서 정치적 파레시아의 기능들과 철학적 삶을 전도시키며 또한 극화한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면 고대 윤리학에서 견유주의에 결정적 위치를 부여하며 견유주의를 중심적 형상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견유주의는 적어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경계에 존재하는 주변적 형상으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사실 나는 견유주의를 가지고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라는 두 테마가 배치되어 있는 영역의 두 경계 가운데 하나를 탐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고대 철학은 자기 돌봄의 원칙(자기를 돌볼 의무)과 진실을 말할, 진실을 발현할 용기의 필요를 연결하였다.

사실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를 연결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가운데 두 개의 극단적 형태들, 서로 반대되는 두 양태들을 확실하게 식별해낼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쏘크라테스의 에피멜레이아(epimeleia, 자기 돌봄)와 파레시아(진실 맣하기)를 취하고 있다.

 

– 플라톤적 양태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마테마타의 중요성과 넓은 범위를 강조한다. 이는 자기에 관한 지식을 자기에 의한 자기에 대한 명상으로 보며, 영혼의 본래적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으로 본다. 이는 이중적 구분을 수립하는 경향이 있다. 영혼과 신체의 구분, 그리고 진실한 세계와 현상 세계의 구분. 요컨대 이 양태가 가진 상당한 중요성은 그것이 그런 형태의 자기 돌봄을 형이상학의 창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다른 한편 비교(秘敎)적 교습과 모두에게 주어지는 교습 사이의 구별은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했다.

 

– 견유주의적 양태

이는 마테마타의 영역을 가능한 한 엄밀하게 축소한다. 자기에 관한 지식을 무엇보다도 연마, 시험, 인내력의 연습으로 본다. 인간 존재를 군더더기를 다 벗겨낸 동물적 진실에서 발현시키고자 한다. 비록 형이상학과의 관계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고 형이상학의 위대한 역사적 후예들에게 낯선 것으로 남아있었지만, 견유주의는 특이한 삶의 양태를, 특이한 비오스(bios)를 서양의 역사에 유산으로 남겼으며, 이는 여러 상이한 양태로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와 견유주의는 서로 마주보고 있고 각각이 상이한 계보를 낳은 두 주된 형태들을 나타낸다. 한쪽에는 프쉬케, 자기에 대한 지식, 정화 작업, 다른 세상에의 접근, 다른 한쪽에는 비오스, 자신을 시험하기, 동물성으로의 환원, 이 세상에서의 세상과의 전투.

그런데 이 결론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의 수립에는 타자성의 정립이 절대 필수적이다. 진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다른 세계‘와 ‘다른 삶‘(l’autre monde et ··· la vie autre)의 형태로만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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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어로 ‘ta mathemata’는 ‘배울 수 있는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정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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