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Alexis Frasz / Holly Sidford
- 원문 : The Birth of a Theatre Commons: HowlRound from 2009-2017
(2018.10.03)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License (CC BY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의 공동저자인 알렉시스 프라즈(Alexis Frasz)와 홀리 시드포드(Holly Sidford)는 헬리콘 협력체(Helicon Collaborative)의 공동디렉터다. 헬리콘 협력체는 창의성, 형평성, 그리고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우리가 원하는 세계의 핵심적이고 상호관련된 요소들로 본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문화적 평등은 건강한 사회에 필수라고 보며,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고 한계를 넘는 아이디어를 개발 및 실현하는 것을 돕는다. 알렉시스 프라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재생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문화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문화, 환경 및 사회정의의 교차점에서 헬리콘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문화 부문에 깊게 뿌리박힌 불공평성에 대항하기 위해 헬리콘의 작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예술가 및 문화 지도자들이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에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홀리 시드포드는 관계들을 보고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숙련된 시스템 사상가다.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 통찰력 있는 지성, 탁월함에 대한 의지는 헬리콘의 모든 작업을 떠받친다. 그녀는 역사가로서의 교육과 프로그램 개발자 및 자금 제공자로서의 경험을 이용해서 예술가의 역할을 증가시키고, 창의적 표현의 완전한 다양성을 인식하고, 예술 및 문화를 공동체의 생활에 좀 더 중심적인 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헬리콘의 노력에 정보를 제공한다.
헬리콘 협력체에서 우리는 하울라운드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를 도우려고 왔을 때 들떴다. 우리가 하울라운드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들뜬 이유는 아니다. 마치 침술에서 침이 혈자리에 제대로 꽂힌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전해진 적절한 이야기는 시스템을 재등록하거나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특히 지금 이 순간과 공명하며, 극장 부문에서 그리고 그 외부에서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관행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왜 우리가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나눈다. (사례 연구 전문 읽기).
하울라운드는 비영리 극장 부문에서 형평성, 지속가능성, 타당성의 위기에 대응하여 2009년에 설립되었다. 그 해에 발표된 두 개의 연구조사인 토드 런던(Todd London)의 『충격적인 성쇠: 새로운 미국 연극의 삶과 그 시대』(Outrageous Fortune: The Life and Times of the New American Play)과 데이비드 다우어(David Dower)의 「기회의 문」(“The Gates of Opportunity”)은 아래의 것들을 찾아냈다.
* 거의 대부분의 지원금이 가장 크고 부유한 극장들로 가고 있었다. 그 극장의 관객들이 미국 인구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즉 그들은 나이 든 백인 부유층이었다.)
* 이러한 기관들은 최고 티켓값을 부과할 수 있도록 스타 출연자들로 블록버스터를 기획하는 식으로 그 기능이 상업적인 극장과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한편 엄청난 양의 활기찬 예술 창작 및 참여가 이런 기관들 바깥의 소규모 비영리 극장 또는 전국각지의 커뮤니티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전반적으로 연극은 예술적으로 성공적일 때조차도 자신의 작업으로 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땀의 지분’에 힘입어 굴러갔다. 많은 곳에서 생활비가 증가하자 이런 메커니즘은 특히 다른 재산이나 수입원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점점 더 유지될 수 없었다.
* 작품의 창작과 공유를 위한 재원, 정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은 주요 기관의 소수 ‘문지기’에 의해 엄중히 감시되었고, 다수의 예술가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들은 몇몇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부문의 사람들은 그러한 극장 모델이 예술적 가능성이나 공공이익을 실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정치조직가이자 작가, 그리고 활동가인 조너선 매슈 스먹커(Jonathan Matthew Smucker)가 지적하듯이 “사회 시스템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와 어떻게 시스템을 바꿀지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범주의 지식이다.” 같은 해에 설립된 하울라운드는 바로 연극 분야의 문제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대안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칼(P. Carl), 다우어(David Dower), 가흐론(Jamie Gahlon), 매슈(Vijay Mathew)―은 비영리 극장이 직면한 문제가 단지 ‘연극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우리의 현 시대는 권력과 부의 소수에의 집중, 저임금을 통한 노동자 착취, 기회와 자원에의 접근을 막는 구조적 장벽이 계급 및 인종의 선을 따라 확대되는 것, 재정이 부족한 공적·사회적 재화 및 서비스, 그리고 기업이익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철학자이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30년 이상 시장(시장가치)은 전에 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쓴다. 비영리 극장 부문은 이 추세를 받아들였지만 극장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었다. 극장 부문에서 잘못된 점은 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우리 사회가 가진 훨씬 더 큰 기능장애의 증상이었다.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 적어도 다른 무엇보다 이익과 자유시장을 우선시하는 가장 공격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는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미국 및 전 세계의 많은 저명한 경제 및 정치 지도자도 그랬다. 국제통화기금조차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득보다 해를 끼쳤으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지난 10년 동안 부자들 사이에서도 행복 및 웰빙의 감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조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우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현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불황 시기에 성년이 된) 18세에서 29세 사이 미국인은 자본주의(45%)보다 사회주의(51%)에 더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고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대로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번영, 예술적 창조성, 생태적 건강, 문화적 전통, 또는 대부분의 다른 사회적 결과와 관련해서라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대한 설계 결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체제를 개혁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실천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어서 종종 그것들이 ‘바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인이 된 훌륭한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은 이 역학에서 우리 자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다. 그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왕들의 신성한 권리도 그랬다. 어떤 인간의 권력도 인간에 의해 저항을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 체제가 우리 외부에 본질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에 여러 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체제에 변화를 일으킬까?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결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연극 현장의 모든 문제들을 적어도 한꺼번에 전부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종류의 연극관계자들이 소통하고, 일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민주적인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풀뿌리들의 목소리의 ‘소방호스를 열어서 우리 분야에서의 99%의 문제를 수렴함’으로써 분야 전체를 가시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그것이 연극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민주적 조직화를 위한 기초이며, 다른 더 큰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을 수 없게 단순한 개입은 다음을 포함한다.
* 어떤 연극인이든 기고할 수 있는 저널
* 누구나 자신의 연극 관련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무료 라이브스트리밍 TV 채널
*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는 모든 새로운 연극들의 지도(地圖)
* 현장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와 아이디어들을 논의하기 위한 연극인 직접 회의
그것은 연극 분야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 실험이었다. 이는 이익·위계·경쟁을 극대화하는 것을 강화하도록 설계된 제도적 극장 구조와 달리 개방성·협업·공동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한 실험이었다.
혁명은 종종 자기 시대의 기술적 진보에 도움을 받는다. 2009년 하울라운드의 출현은 새로운 기술 도구 및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에 의해 촉진되었고, 이는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조직하고 소통하고 규모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런 기술은 이미 언론에서 정치까지 정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많은 다른 장을 파열하고 있었다. 기술은 또한 점거운동 같은 일에 동력을 공급해서 개인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하울라운드는 무엇보다도 연극 분야에 유용한 도구세트가 되고자 했으며 그 목적을 실현했다. 수천 개의 글과 영상을 올렸고, 매달 45,000명 이상의 순방문자가 들어온다. 그러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설립자들은 ‘커먼즈’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려 했다. ‘커먼즈’란 다 소모되거나 열화(劣化)되지 않고 모두에게 사용되고 유익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조차도 사적소유나 시장의 힘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특정한 종류의 자원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 생각이 예스럽거나 대단히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우리가 이미 공기, 토양, 물과 같은 천연자원과 공원, 도로와 같은 공공재, 그리고 공익사업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비록 이들 중 많은 것들 역시 사유화되고 있긴 하지만.) 커먼즈는 항상 사적소유와 시장을 합리적으로 점검하고 공공자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문화자원 역시 상업화와 사유화로부터 보호되는 커먼즈에 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연극 분야의 기존 기반시설은 자원을 공유하거나 협업하거나 공동선 편에서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울라운드는 연극인들이 자원·작업·정보를 공유하고, 공유된 관심사와 목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며 가능케 하는 다른 종류의 기반시설이 되기를 추구했다.
하울라운드의 개입 결과로 연극 분야가 달라졌는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현장 리더들은 하울라운드가 짧은 활동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현장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데에 동의한다. 주류 극장의 문 바깥에 있는 목소리들의 ‘소방호스를 열’면서 하울라운드는 이전에 주변화되었거나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과 관점들을 드러내는 것을 도왔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하고 조직하도록 해주었다. 하울라운드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 관련 자료의 국내 최대 아카이브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연극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가르침 받고 연구되는가에 영향을 미쳐서 전통적인 ‘연극 센터’ 바깥의 예술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었다. 장기적인 영향은 아직 모르지만 시스템 전문가들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자기조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떤 체제에서든 변형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지렛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경쟁과 이익을 넘어 다양성·협력·참여를 중요시하고 지원하는 비영리 극장 시스템을 구현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10~15년 전보다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훨씬 커졌지만 이것은 아직 돈과 권력의 주목할 만한 재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돈과 권력이 여전히 극소수 기관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제한된 범위의 콘텐츠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비영리 구조가 커먼즈의 가치와 실천을 규모 있게 지원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커먼즈 이론가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는 우리가 이 가치들에 기반을 둔 ‘전혀 다른 일련의 기관, 법 체제, 사회적 실천’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우애가 사회부문들에서 커먼즈 지향의 행위와 구조를 장려하고 지원하는 데 더 강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 구조적인 부의 불평등, 추출적 경제 모델들, 커먼즈 자원의 광범위한 사유화 및 착취 등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사회경제 체제의 불평등과 장애를 다루지 않고 연극 현장에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이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우리는 연극 및 문화 제작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하는 많은 다른 새로운 경제 변화가들과 협력하여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에 가까워지는 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벅찬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하울라운드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현장의 많은 이들이 하울라운드가 연극계와 전체 사회에 더 큰 구조적 변화들을 야기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대화를 위한 촉매제이자 조직자, 그리고 진행자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울라운드가 미친 심대한 영향 때문이다.
하울라운드는 이미 다음 작업 단계를 논의하기 위해 현장의 이해관계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적절하게도 커먼즈의 다음 단계는 커먼즈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