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4/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9-10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지난번에 이어서 9-10절의 내용정리를 올린다.  이번에도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을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보기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보기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보기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보기
 5. The Columbian Exchange 보기
 6. “The Death Carts Did More…” 보기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보기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보기

 9.“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1.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 볼셰비즘과 스페인 인플루엔자(“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빠르고 파괴적이었던 팬데믹은 스페인 인플루엔자였다. 그 세 번의 유행 가운데 최초의 것은 1918년 3월 캔자스에서 시작되어 가을과 겨울에 한층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형태로 재발하였다. 이 전염병은 그 규모나 파괴성뿐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다른 유행병들과 구분되는데, 그것은 이후 세대들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기억상실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를 연구한 역사가는 이렇게 요약한다. “다른 무엇도 ― 어떤 감염도, 어떤 전쟁도, 어떤 기근도 ― 그토록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한 해 만에 2,200만에서 3,0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미국에서 50만 명이 죽었으며, 떠다니는 바이러스 시험관과 같은 조건에 젊은이들을 처박아놓고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으로 실어날랐던 미군함들이 인플루엔자를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로 옮겼다. 그 후 바이러스는 유럽 제국주의의 해로(海路)를 따라 라틴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인도(여기서 1,200만 명이 죽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태평양의 섬들로 퍼져갔다. 남북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스페인 인플루엔자의 연령별 사망률 곡선은 ‘U’가 아니라 ‘W’ 모양에 가까웠는데, 이는 어리거나 나이 든 사람들보다 젊은이들이 이 병에 더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성은 공식적인 거시기생체 기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이들이 생산, 재생산, 전쟁에 있어서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생산과 재생산이 걱정거리였다.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공화당 상원의원]는 군수품 공장들의 생산성을 걱정했다. 1918년 3월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가운데 1,000명이 병에 걸렸다. 필라델피아 조선소들의 공정률은 군수업자들 놀라게 할만한 속도로 하락했다. 미해군의 40%가 감염되었다. 37개의 생명보험사들이 그해 주식배당을 생략하거나 축소했다. 거시기생체들과 미시기생체들이 건강한 젊은이들의 신체를 두고 치명적인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obblies)에 대한 검열과 정치적 억압은 전염병에 대한 지식의 발달과 치료법들의 전파를 방해했다. 미국의 공공보건정책은 야만적인 법집행을 통해 모든 형태의 소통을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사추세츠주 브록턴(Brockton)의 소녀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에 맞춰 줄넘기를 함으로써 격리조치에 대응했다.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은 엔자(Enza)였어요
창문을 열자
엔자가 날아 들어왔지요(in-flew-Enza).

(소녀들의 노래는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도마뱀 이야기’였다. 1970년대에 오면 인플루엔자에 대한 연구가 새들의 이주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말이다.)

대규모 모임은 금지되었다. 공중전화부스에 자물쇠가 걸렸다. 공용 식수대(食水臺)는 폐쇄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은행 창구 직원들은 손 씻는 물을 가져다 놓았다. 애리조나주 프레스콧(Prescott)의 지방자치조례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어떤 신문에서 한 제안을 받아들여 악수를 범죄화했다. 미군 공중위생국장은 “지상(地上)에서 문명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W’의 중간 부분이 높아졌고[즉 청년 사망자가 더욱 증가했고] 그 결과 저 유명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에 속하는 절망한 미국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를 제외하면 누구도 스페인 독감에 대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대대적인 사회적 거부인가? 남성우월주의인가? 스페인 독감이 동반한 “심각한 체계적 우울”의 여파인가? 중요하지만 대답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다.

캐서린 앤 포터는 시대와 ‘새로운 남자’의 탄생과 ‘새로운 여자’를 종합했다. 남자들은 휴대용 술병을 들고 다녔고 ‘새로운 여자’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알코올과 니코틴, 이것은 1790년대 이래로 전염병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이었다. 전쟁채권으로 돈을 모으려는 정부의 움직임만이 집회 허용의 유일한 이유가 되었으며, 그러한 집회는 “아플 때까지 주라(Give ‘till it Hurts)”는 슬로건 아래 개최되었다. 군인과 ’새로운‘ 여자 모두에게 주어진 표어는 ‘희생’이었다. 돈을 주라, 너의 시간을 주라, 너의 노동을 주라, 너의 삶과 생명을 주라.

1918년 인플루엔자에 대한 항체를 찾으려는 미국의 노력이 거둔 한 가지 성과는, 보스턴 하버 디어(Deer)섬의 죄수들을 상대로 행해진 실험의 재앙적 결과들을 통해 인간은 실험용 동물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학자들은 다른 것도 발견했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정신, 연구, 지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피 안에 존재한다.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모든 인플루엔자 전염병은 “우리의 면역혈청에 발자국을” 남긴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스페인 인플루엔자가 한창인 상황에서 여성투표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인플루엔자에 대한 보상으로 투표권을 주는 거래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민지배를 받은 민족들의 자결권을 포함한 저 유명한 ‘14개 항’은 스페인 독감의 초기에 발표되었다. 전염병이 끝나갈 무렵 그는 파리에서 제국주의적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리자 쉬엄쉬엄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거부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볼셰비즘과 경쟁하고 있단 말이요.”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Pale Horse, Pale Rider)에서 캐서린 앤 포터는 이렇게 썼다. “더 이상 전쟁도 전염병도 없고, 육중한 포화들이 멈춘 후의 멍한 적막만이 감돈다. 그늘이 드리운 소리 없는 집들, 텅 빈 거리들, 죽음처럼 차가운 내일의 빛. 이제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렇다. 제정(帝政)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시간이, 아랍혁명을 위한 시간이, 남아프리카에서의 반란을 위한 시간이, 봄베이[현(現)뭄바이] 직물 노동자들의 기동(起動)을 위한 시간이, 아이티 반란을 위한 시간이, 멕시코 혁명을 위한 시간이, 베를린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위한 시간이, 포틀랜드 총파업과 피츠버그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을 위한 시간이, 가비(Marcus Garvey)의 범아프리카주의를 위한 시간이. 건강이란 이러한 파업, 반란, 봉기, 혁명 들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조립라인, 남아프리카의 금광, 봄베이의 스웻숍(sweatshop),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벨파스트의 조선소, 크론슈타트의 야금공장, 세계 곳곳의 슬럼들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거시기생체의 흡혈의 대상이 되었던 전세계의 숙주들이 ‘항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혁명들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도마뱀 이야기’가 실천되었던 것이다.

이에 맞서 거시기생체는 야만적인 억압으로 반격해왔다. 러시아의 침략행위들, 인도 펀잡(Punjab)주 암리차르(Amritsar)에서의 학살, 아이티와 털사(Tulsa)에서 이루어진 지상-공중 합동 공격, 시카고에서의 인종폭동, 백악관의 KKK,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가 그 사례들이다.

 

  1. 나의 투쟁과 터스키기(Mein Kampf & Tuskegee)

나치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미국의 인종정책을 칭찬하고 독일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20년대 히틀러와 나치는 매독에 대한 집착을 미국 의학계와 공유했다.

19세기에 미국에서 발전한 인종주의적 의학은 질병에 대한 면역성, 취약성, 상대적 심각성 등에서 인종들 간에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인종주의적 의학은 흑인들이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성적으로 문란함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인구조사 결과 19세기 후반에 흑인들의 출생률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자, 일부 의사들은 이것을 노예해방이 흑인종의 소멸을 낳는다는 인종주의적 믿음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매독은 “전형적인 흑인의 질병”으로 여겨졌다. 어떤 의사는 흑인이 “악명높게도 매독에 흠뻑 젖어 있는 인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백인 전문가들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섹스를 교육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9세기말-20세기초의 “사회적 위생”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공중보건국 내에 성병전담부서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성병 클리닉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건강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의 이러한 구조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적 의학의 치명적 가정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치 역시 매독을 피억압 소수자들, 즉 유대인들과 연결했다. 히틀러는 매독을 “유대인의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매독은 민중을 오염시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혔다. 히틀러는 도시의 성적 자극물들(영화, 광고판, 쇼윈도우 등)을 비난했으며, 이를 매독, 그리고 자신이 “유대화(Jewification)”라 부르는 과정과 연결지었다. 그 이름과 기원이 유럽의 정복활동, 대규모 이주, 노예제, 여성혐오적 가족정책과 분리될 수 없는 질병인 매독은, 이번에는 ‘청결’의 이름으로 매독환자의 ‘안락사’, 강제이주, 노예노동, 집단수용소 등을 제도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주의적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나치가 독일 의회에서 다수당이 된 해인 1932년에 미국 공중보건국은 “터스키기 흑인 남성 비치료 매독 관찰 실험(Tuskegee Study of Untreated Syphilis in the Negro Male)”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공식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집단학살 정책” ― 1972년 실험의 진실이 폭로되었을 때 한 비평가가 한 말 ― 을 실행했다. 앨라배마주 메이컨(Macon) 카운티에 거주하던 600여 명의 흑인 남성이 기만당해 실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이따금 더운 음식을 제공받고 뷰익(Buick, 자동차 브랜드)을 타고, 장례 보험을 보장받는 등의 ‘혜택’을 받고 실험에 참여했는데, 이 실험은 흑인 남성 매독 환자의 사망률이 백인 매독 환자의 사망률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

피실험자들은 자신들이 매독에 걸렸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도 매독에 감염되었다. 실험은 목표, 수단, 테크닉 모두에서 인종주의적이었다. “정부 소속 의사들”은 매독 3기 단계에 있는 흑인 남성들의 사망률이 통상 신경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고 믿어졌던 백인 남성 환자들의 경우보다 더 높은 심혈관계 발병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피실험자들은 가축처럼 취급받았다.

메이컨 카운티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나치 집단수용소와 유사해졌으며, 나치의 실험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듯이 저 실험들 역시 ‘남부 예외주의’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터스키기의 피실험자들이 북부로 이주하면 클리블랜드, 뉴욕, 디트로이트의 공중보건국 관리들 역시 치료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협조’를 제공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리고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 일을 금지하는 공중보건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터스키기 실험은 40년 동안 계속됐다. 나치 의사들에 대한 재판과 그 결과로 도출된, 인간 대상 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The Nuremberg Code)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도 공중보건국 관리들은 멈추지 않았다.(40년대 후반 미국 정부는 나치 의사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인간 대상 실험 규제에 관한 1964년 헬싱키 선언도 터스키기 프로젝트를 멈추지 못했다. 이 ‘연구’를 멈춘 것은, 나치를 피해 도망친 부모를 둔 내부고발자의 노력과 마틴 루터 킹과 로자 파크스의 변호사였던 프레드 그레이(Fred Gray)의 법률적 노력의 결합이었다. 물론 1972년의 그들 뒤에는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혁명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이 실험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1997년에 이르러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소수의 생존자와 다수 사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사과했다.]

심지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1988년 2월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의 책임자 앤써니 파우치(Anthony Fauci) 박사는 에이즈 백신을 테스트하기 위한 대규모 인체 실험을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자이르(Zaire)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에이즈 연구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로버트 라이더(Robert W. Ryder) 박사는 같은 달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 ― 이것은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요 ― 은 수천 명의 에이즈 감염자들을 추적 연구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낮기 때문이죠.”

그러한 연구는 특정한 경제적·인구학적 맥락에서 수행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세계은행>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세계은행>은 아프리카에서 인구억제정책을 장려했으며, “낡은 방식들”에, 즉 자신들의 토지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거시기생체적 농업산업에 방해가 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수를 줄이고자 했다.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유용하다. 국제의료기구들은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다는 인상을 서구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에이즈, 아프리카, 인종주의』(Aids, Africa and Racism)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구 의사들은 아프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모아놓고 다른 모든 의학적 가능성은 배제한 채 그들이 에이즈를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의사들은 자국에서 적용되는 윤리적 제약들 없이 소규모의, 신뢰할 수 없는 혈청역학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이 연구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믿었다. 이들은 어째서 혈청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질병의 증상을 보이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는커녕 의문을 품지조차 않았다. 이 의사들은 에이즈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파리 여행에서 수집해서 냉장고 바닥에 두었던 오래된 혈액 샘플들을 꺼내서 신뢰할 수 없는 테스트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또 다른 스토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서구 대중들에게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이것은 메이컨 카운티의 소작인들, 필라델피아의 자유로운 흑인들, 아이티의 황열병, 히스파니올라섬(Hispaniola)의 양치기 ‘매독’, 심지어는 투키디데스와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이것은 인종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일단 흑인은 더럽고, 병이 들끓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고, 어떤 식으로든 금방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생기면, 집단학살을 제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치의 “최종적 해결책”이 계획되고 터스키기 실험이 한창이던 1939년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은 1918년 이후 세계를 휩쓸었던 범아프리카주의에 몰두하여 모세 이야기를 멘투와 그의 “멋진 도마뱀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다시 썼다. 그때에 비하면 아프리카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졌다.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물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이 도움은 악어의 눈물을 동반하는 도움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을 구실로 우리의 질병을 관리하는 얼간이들에 맞서 우리 자신의 ‘도마뱀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도움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더 섞이고 교류할수록, 함께 음식을 먹고 잠을 잘수록 우리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파괴하는 미시기생체들이 거시기생체의 눈에는 ― 그것들이 혹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 신이 보낸 선물처럼 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거시기생체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우리가 ‘도마뱀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다. 이제 거시기생체들은 우리가 정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을 위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적 무질서’를 대가로 치르지 않고는 저 집단학살을 위한 미시기생체들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