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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1/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1-3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커먼즈의 역사가라 불리는 라인보(Peter Linebaugh)가 Against the Grain과 가진 인터뷰 “Peter Linebaugh on the Long History of Pandemics”(2020. 04. 08)의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정리하려다가 이 인터뷰의 원자료가 되는 팸플릿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1989. 02. 26)의 내용을 먼저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팸플릿은 에이즈 종식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적 풀뿌리정치단체인 <액트 업>(ACT UP,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1988년 창립)의 돌을 맞아 라인보가 일종의 생일선물로 작성한 것으로서 모세의 시대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닥친 역병들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제목의 ‘lizard talk’(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는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인 민중의 지식을 가리킨다. 이는 근대 이후로는 (특히 역병의 경우에) 과학적 지식에 의해 보완될 것이지만, 인류의 역사 내내 저류에서 존재했던 지식이다. (물론 망각되기가 십상이기도 하지만.) 라인보는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이 1939년에 출애굽기 이야기를 흑인의 관점에서 다시 쓴 소설 Moses, Man of the Mountain((http://onlinereadfreenovel.com/zora-neale-hurston/p/18/33960-moses_man_of_the_mountain.html))에 나오는 마구간지기 멘투(Mentu)를 이 지식을 전하는 사람의 원형으로 본다. 멘투는 모세에게 “만물의 시작에 대한 모든 것”을, 즉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를 말해준다. 어떻게 보면 이 팸플릿 자체가 하나의 ‘lizard talk’이고, 라인보가 멘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라인보 자신이 밝히듯이, 라인보가 이 팸플릿을 통해 전하려는 요점 가운데 하나는 아래로부터 역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위로부터 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현대의 주류 미디어는 거의 대부분 우리를 위로부터 보는 관점으로 세뇌한다.) ‘lizard talk’에 바로 이 아래로부터의 지식이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요점은 미시기생체(microparasite, 즉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인류를 공격할 때마다 거시기생체(macroparasite, 즉 각종 형태의 지배계급)는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배를 더 강화하려 하지만, 반대로 아래로부터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 기반을 두어 사회를 전복시킬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결코 먼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라인보의 ‘lizard talk’는 여기서 좀더 나아간다. 팸플릿의 맨 마지막 단락에서 그는 “우리가 더 섞이고 교류할수록 ··· 우리는 더 강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말한다. 병/병원체들과의 관계 역시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통스럽더라도 인류의 활력의 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이 팸플릿의 내용이 조금 많기 때문에 준비하는 시간도 있고 해서 네 번에 나누어서 올리려고 한다. 먼저 ① 서두와 1·2·3절을 묶어 올리고(정리자 정백수), 그 다음에 ② 4·5·6절을(정리자 정백수), 이어서 ③ 7·8 절(정리자 성철), 마지막으로 ④ 9·10절을 묶어 올릴 것(정리 영광)이며, 그 뒤에 앞에서 말한 인터뷰의 내용을 정리해서 올릴 것(정리자 정백수)이다.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은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5. The Columbian Exchange
 6. “The Death Carts Did More…”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9. “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서두]

에이즈도 그 이전의 전염병들처럼 분할(젠더들 사이의 분할, 인종들 사이의 분할, 민족들 사이의 분할, 대륙들 사이의 분할)의 원리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분할은 역풍을 맞았다. 이에 맞선 투쟁은 우리를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 모든 투쟁들이 에이즈에 맞선 투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보답하는 선물로 10개의 역병의 역사를 드리겠다.

HlV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 실질적으로 출현했다. 동시에 시카고에서는 한 경제이론이 퍼졌는데, 이 이론은 세계 전역의 가난, 기근, 질병 등을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조직했다. 지배계급의 막장 부패는 레이건이 상징했다. 시카고는 또한 법 해석에 자유시장경제 모델들을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는데(포스너Stephen Possner), 이는 정의로움에 신경 쓰기를 그치고 삶과 죽음의 비용편익을 수량화했다. 이런 법학자들이 정치적 우세함을 얻었다. 오래지 않아 인문학 분야의 개[犬]들도 베넷(William Bennett)의 멍멍거리는 명령 아래 ‘서양 문명’의 찬양에 동참했다. 시카고 역사가 맥닐(William McNeill)은 에이즈 팬데믹이 등장하기 조금 전인 1976년에 『역병들과 민족들』(Plagues and Peoples)를 냈다.

그는 우리의 생존이 ① 우리 몸에 사는 미시(微視)기생체들(microparasites, 박테리아, 바이러스)에 맞선 싸움과 ② 거시(巨視)기생체들(macroparasites, 여러 형태의 지배계급들)에 맞선 싸움에서 살아남는 데 달려있다고 본다. 기생체는 어떤 종류든 숙주에 의존한다. HIV든 지배계급이든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숙주를 완전히 멸절시키지는 않는 것이 기생체에 이익이다. 숙주는 기생체를 위한 잉여를 생산하는 정도까지만 살도록 허용된다.

맥닐은 『나의 투쟁』의 히틀러처럼 떠벌이지는 않지만, 질병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문제점을 보이기는 한다. 그는 질병에 대해 일반인이 가진 지식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시카고 사람이 가진 정도의 지식을 가가지고 있다. 역병과 역사에 대한 계급 관점에서의 분석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코뮤니즘의 상실된 역사(the lost history of our own communism)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도마뱀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다.

 

  1. 고대 이집트의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 in Ancient Egypt)

고대 이집트의 역병들은 루터교, 깔뱅교, 바티칸, 시온주의에서 ‘검디검은 아프리카’를 ‘영광의 그리스’로부터 구분하는 기초원리였다. 즉 관개의 제국에 기반을 둔 노예적 생산양식(고대 이집트)을 도시국가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노예적 생산양식(고대 그리스)로부터 구분한 것이었고, 고대의 제3세계를 고대의 제1세계로부터 구분한 것이었다.

구약의 역병들은 기원전 14세기에 일었다. 이는 출애굽기에 서술된 전염병들이다. 출애굽기는 적어도 300년 뒤인 솔로몬의 재위 시에 지어졌다. 출애굽기는 예배에서의 암송, 노래, 연대기를 요약한다. 고대 국가의 공식적 신화들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그에 맞추어 취급되어야 한다.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은 출애굽기의 역병들을 범아프리카적 이야기로 본다. 그 전염병들은 힘을 가진 지팡이―이는 노예들을 자유로 이끄는 뱀신(a serpent god)이다―를 지니고 있는 모세의 마법이 발휘된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의 억압자들 및 이집트의 신들과 싸워야했다. 파라오에게 이긴 것은 우월한 마법으로 인한 승리였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면 지팡이가 뱀이 된다. 그가 지팡이를 나일강의 물에 담그면 강물이 핏물이 된다. 그가 흐르는 강물 위로 지팡이를 뻗으면 개구리들이 땅을 덮는다. 그가 땅의 먼지를 치면, 구더기들이 올라와 인간과 짐승을 덮는다. 파리들, 우박들, 메뚜기들, 일식들, 전염병들―이 모든 것들을 모세의 지팡이가 불러오며 파라오의 마법사들은 항상 쩔쩔 맨다. 이런 식으로 야훼는 개구리신, 태양신, 가축신들을 물리친다.

허스턴이 발견한 바로는 이런 뱀-지팡이 힘은 아이티(Haiti)와 다호메이(Dahomey)[약 1600년부터 1904년 사이 오늘날 베냉 지역에 있었던 아프리카의 왕국]에서 살아있는 힘이다. 노예들과 무법자들(‘Hebrew’라는 단어가 가진 이집트어 의미들이다)의 지도자인 모세는 어떻게 그의 마법을 얻었을까? 그는 그것을 파라오의 마구간지기인 멘투(Mentu)[‘mentor’를 연상시키도록 고안된 이름이다]로부터 얻었다. 멘투가 모세에게 전해준 것이 바로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이다. 지식을 전수받는 대가로 모세는 멘투에게 파라오의 부엌에서 남은 음식들을 가져다준다. 예전에는 삶은 돼지머릿고기를 먹었는데 이제는 모세가 가져다주는 더 좋은 부위를 먹게 된다.

마법-지식의 계급적 특성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부엌과 마구간에서 만들어지며 대가를 받고 교환되며 그 다음에야 반란, 학살, 새로운 왕국이라는 익숙하고도 모호한 이야기가 오게 된다. “‘모래를 나르고 회반죽을 갤 일은 이제 없어! 파라오를 위해 돌을 가져오고 건물들을 지을 일은 더 이상 없어! 채찍을 맞아 등이 피가 낭자할 일도 더 이상 없어! 아직 어두운 아침부터 어두워진 저녁까지(from can’t see in the morning to can’t see at night) 노예로 일할 일도 더 이상 없어! 자유! 자유! 멍청해질 정도로(till I’m foolish) 자유야.’ 그들은 수 세기의 세월을 눈에 담고 그저 앉아서 울었다.”[이 대목은 Moses, Man of the Mountain에서 모세로부터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후 모세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여준다. 모세는 환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예상은 틀렸다.]

분명 이는 기독교, 유대교, 부두교(Voodoo)에 다 걸쳐있는 역사적 존재인 흑인의 해방 이후에만 가능한 버전이다. 여기서 이집트의 전염병들에 대한 독해는 자본주의의 신들이며 실로 ‘노동하라, 아니면 교수형이다’라는 복음을 전하는 루터와 깔뱅의 정반대이다.

 

  1. 이전에는 구석에서 했던 것을 ···”고대 그리스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귀족 가문 출신인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영광의 그리스’에 속한다. 그는 아테네 제국의 국경에 있는 금광의 관리자였다. 그는 실패한 장군으로서 20년 동안 유배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The Peloponnesian War)을 지었다. 이 책을 ‘서양 문명’의 일부로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해상 제국주의를 찬양했으며, 지중해의 패권을 쥐려는 아테네의 노력을 이야기했다. 그는 상품생산으로의, 화폐형태로의 이행기에 살았다. 이는 곧 해적질에서 상업으로의 이행이었다.

방법론의 측면에서 그의 책은 모세의 마법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설명한 소피스트 질병이론―증상의 관찰, 진행과정의 기록, 위기의 포착, 원인의 분석―이 이 책에 영향을 주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둘째 해인 기원전 430년에 스파르타인들이 아티카를 침입하여 은광산을 공격했다. 동시에 전염병이 아테네를 덮쳐 맨 먼저 항구도시 페이라이에우스(Peiraieús)를 공격했다. 소문에 따르면 이 병은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왔다고 하는데, 그 너머 에티오피아에서 애초에 발생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렇듯 이는 ‘타자’의 질병으로 간주되었다. ‘검디검은 아프리카’가 서양문명을 괴롭힌다는, 그리고 ‘서양문명’은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우리에게는 오래된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아테네에서 이 병은 병사들을 죽이고 도시 인구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스파르타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자 이 병은 맹렬한 속도로 퍼졌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염병의 증상을 염증, 갈증, 불면증, 설사라고 서술한다. 투키디데스로서는 이 병을 자연적 위기의 일부로서 보는 수밖에 없다. 새나 짐승도 감염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했다.

외교관들과 은행가들의 역사가이며 모든 정치가를 위한 핸드북을 쓰는 투키디데스는 이 유행병에 ‘자연적’ 측면을 조금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이름 모를 질병이 유발한 ‘극단적 무법’을 서술했다. “번영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고 아무 것도 없던 사람들이 그들의 번영을 이어받는, 급속한 변화를 보고 ··· 사람들은 이제 이전에는 구석에서 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행했다.” 질병의 사회적 동학은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걱정이 되었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든 인간의 법이든 그들을 제한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전염병은 또한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를 낳았다. 페리클레스는 비난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전염병에 굴복했다. 이것이 군사적 전환점이 되어서 스파르타인들이 아티카를 떠났다. 이 병은 모든 곳에서 계급투쟁을 격화시켰다. 코르큐라 섬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익숙한 가난을 제거하기를 바라고 이웃의 재화를 열렬히 탐낸 자들의 간악한 의지”와 “공정한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고 실로 지배자들의 오만한 대접만을 받은 피지배자들이 가하는 보복”이 투키디데스를 걱정시켰다. 그러나 노예들, 가난한 사람들, 피해를 입은 사람들 쪽에서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 바로 치료과정이 되었다.

 

  1. 기독교와 대탕녀 바빌론’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로마 시대의 거시기생체들은 공납, 세금, 십일조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 세계의 민족들을 먹이로 삼았다. 팔레스타인에서 포르투갈에 걸쳐 있는 가난한 서민들은 이방인들의 공격으로부터의 면역성을 시저와 네로의 문명화된 군대들에 돈을 지불하고 샀다. 이 ‘보호자들’은 그들의 ‘건강’을 아프리카, 인도, 북부 유럽까지 확대하여 네 개의 인간 질병 유전자풀(유전자급원遺傳子給源)이 지중해 세계로 합류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유행병이 반복적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홍역, 천연두,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이질, 볼거리, 말라리아가 정기적으로 찾아오면서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는 상업과 정복이 이 ‘알려진 세계’를 확대하면서 기원 후 543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역병[나중에 ‘흑사병’이라 불리게 된 ‘페스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지중해 질병 유전자풀의 형성은 힌두교, 불교, 기독교가 공고화되던 바로 그 세기들에 일어났다. 질병과 종교는 상호연관되어 있으며, 각 종교의 초월적 숙명론이 중국, 인도, 로마의 지배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의 위험을 감소시켰다.

제도화된 기독교인들이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으며, 죽음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정의는 저승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카이싸레아의 에우쎄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는 흐뭇하게 자신의 교회를 신뢰했으며, 카르타고의 주교는 죽음을 ‘유익한 떠남’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의 미생물학은 초기 교회 건립자들의 신학장사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대탕녀 바빌론’인 로마의 거시기생체는 파토모스의 요한에게 규탄을 받았는데, 요한은 「요한의 묵시록」에서 증거의 천막(the Tent of Testimony)에서 일곱 재난(Seven Plagues)과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 담긴 일곱 대접(Seven Bowls of the Wrath of God)을 갖고 나온 일곱 천사에게서 구원을 본다.

첫째 대접은 독한 종기를 쏟아냈다. 둘째 대접은 바닷물을 핏물로 바꾸었다. 셋째 대접은 강물과 샘물을 핏물로 바꾸었다. 넷째 대접은 불로 사람들을 태웠다. 다섯째 대접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자기들의 혀를 깨물게 했다. 여섯째 대접을 유프라테스 강에 쏟자 강물이 말라버렸다. 일곱째 대접을 쏟자 무게가 오십 근이나 되는 엄청난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이런 대목들은 중세(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에서 17세기(아비저 콥Abiezer Coppe)를 거쳐 20세기(피터 토시Peter Tosh, 밥 말리Bob Marley)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년 동안 천년왕국설 신봉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예언적 희망의 원천이 되어왔다.[피오레의 요아킴은 이탈리아에서 <피오레의 싼 조반니> 수도회를 창설한 사람이고 아비저 콥은 영국의 종교운동가이며 이탈리아의 피터 토시는 밥 말리와 함께 자메이카의 레게 음악가이다.]

「요한의 묵시록」전체에 담긴 계급적 분노가 이 묵시록을 대중을 위한 아편이라기보다는 전위를 위한 크랙[강력한 코카인의 일종]으로 만든다. 바빌론과 간통을 한 지상의 왕들과 바빌론의 부풀어진 부에 기반을 두어 부자가 된 세상의 상인들은 울며 슬퍼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제 상품을 사고 팔 수가 없었다. “그 상품에는 금, 은, 보석, 진주, 고운 모시, 자주 옷감, 비단, 진홍색 옷감, 각종 향나무, 상아 기구, 값진 나무나 구리나 쇠나 대리석으로 만든 온갖 그릇, 계피, 향료, 향, 몰약, 유향, 포도주, 올리브기름, 밀가루, 밀, 소, 양, 말, 수레 그리고 노예와 사람의 목숨 따위”가 있었다.[「요한의 묵시록」18장 12-13절]




코로나와 커먼즈

 



코로나와 커먼즈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에 현재의 ‘혼란한 이행기’와 ‘다음에 올 것’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목적으로 라모스(Jose Ramos)—앞으로 나올 세계-지역적 생산(cosmo-local production)에 관한 책의 책임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역사의 리듬 및 순환에 관한 문헌을 검토해오고 있었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1) 사회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단계에서 혼란한 이행들을 거쳐서 나아가며 이것은 인간의식과 사회경제적 구조 둘 다의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변이들이다.

2) 이 변화는 비선형이며 내부적이거나 외부적인 충격을 거쳐서 진행된다.

분명히 코로나는 외인성(外因性)―즉 예측할 수 없는 외적요인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파괴적인 우리의 생태적 관행들이 팬데믹 발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코로나는 내인성이기도 한 충격이다. 이것은 인간 삶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수요와 공급 모두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체제에 이중 충격을 일으키는 이중의 불운이다. (경제위기가 수요와 공급 어느 하나에서 통상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코로나가 본격적인 이행을 하는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커다란 가속기’는 될 것이며, 코로나는 이미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바꾸었다. 녹색/P2P/커먼즈 이행을 가속화하는 긍정적이기만 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거나 네이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옮긴이]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동명의 저서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과 같은 부정적이기만 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급진적인 변화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몇 가지 예비적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1) 시장은 그런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해법을 찾는데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며 대기업과 소기업의 90%는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파산할 것이다. (바로 지금 대형 은행들이 미국의 필수 의약품들의 값을 부당하게 올리도록 대형 제약회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이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많은 중소기업들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적정 비용으로 진단을 받지 못하거나 의약품이 부족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 때문에 인구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2) 국가들은 약하고 지도자들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국가라는 제도는 사회적 장이 단편화된 데서 오는 혼란한 반응들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이 훨씬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시장을 단속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드러났다.

3) 현행의 다자주의 체제(([옮긴이] 다자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544참조.))는 유용했지만 (가령 WHO) 또한 상당히 약하고 비효율적이며 적어도 임무를 수행하는데 불충분했다. 국가 및 다자 기구들의 결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들이 없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국가 및 다자 기구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초기 대응 지연과 초기 실수 이후로 대부분이 비교적 지각 있는 정책을 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맥락에서 국가 형태를 폐지하는 것이 심각한 재앙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이례적인 시민정신과 시민사회의 협력적인 기동(機動)을 보았는데 이것은 위기에 적응하는데 그리고 시장과 국가 실패를 완화시키는데 필수적이었다. 수많은 지역적 및 초지역적 집단들(local and trans-local groups)이 의료장비들—시장은 의료장비들을 비축하지 않았고 국가는 제때에 주문하지 못했다—을 신속하게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과학적인 커먼즈를 창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인공호흡기가 없다면 환자는 죽는다. 마스크가 없다면 의료인이 감염되고 시민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서로를 감염시킬 것이다. 대규모로 검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화에서 억제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 모든 노력에서 시민사회 집단들이 앞장을 섰다.

5) P2P/커먼즈/오픈소스의 노력을 통해 드러난 것은 초지역적, 초국가적 대응을 위한 새로운 기구들의 씨앗들이다. 이 씨앗들은 현시점에서 국가적/다자주의적 체제를 (비록 이 체제가 불충분할지라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이 체제를 크게 강화할 수는 있다. (우리는 앞으로 국제 및 다자기구들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한 초국적 기구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초국적 기구들의 경우에는 생태적•사회적 정의가 서로에게 강하게 의존적이기 때문에 인간경제가 지구의 경계 내에서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형평성 한도 내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배적이고 필요한 현 체제는 시장참여자들(market players)을 살리면서도 강압하는/동원하는 새 입법을 통해 현재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을 이리저리 부릴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 체제는 그 자체로 효율적일 필요가 강하게 있는 초지역적•초국적 전문지식을 갖춘 집단지성과 함께 일하며 이 집단지성을 기동하는 것을 도울 필요가 있다. ‘파트너 국가(partner state)’(([옮긴이] 파트너 국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468참조.)) 실행과 공적 커먼즈 프로토콜을 향한 이 과정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현 위기의 부정적인 결과들 중 하나일 수 있는 강압적•권위적인 국가 중심 모델의 대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커먼즈 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

1) 하나는, 상호부조적 자기조직화뿐만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실패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오픈소스 활동들을 통해서 이미 해왔던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입증하는 것이다.

2) 구조적으로 적응하고 개혁을 이루고자 노력하기 위해 이 교육적인 위기의 기회를 활용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지역적일 수만은 없으며 초지역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즉 기존의 제도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커먼즈 중심의 개혁과 변형 정책들을 제안하기 위해 제도적인 삶의 모든 수준에서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는 심각한 위기이지만 기후는 훨씬 더 심각한 위기이다. 역설적인 방식으로, 코로나에 대응하는 세계적 움직임은 그 취약성과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관들이 일단 우리의 생명과 그들의 합법성이 위험에 처하기만 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빨리 선택을 조정하고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후변화에의 적응과 생태학적 변형에도 좋은 징조이다. 그러나 실수를 하지 말자. 이것은 우리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는 위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새로운 삶으로의 분기를 위한 심층적인 변형은 우리가 유럽에서 11세기와 16세기에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의식의 변이’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그 변이가 전지구적이고 상당히 동시적일 필요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변이의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강한 선행조건들을 명확하게 눈앞에서 보고 있으며 현재의 위기가 바로 이 선행조건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자연의 한계들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다른 모든 생명형태들과의 상호의존성을 깨닫는 새로운 안정적인 시스템으로의 필요한 변형을 가져올 교육적인 재난들 가운데 첫 번째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하는 추출적인 체제들과 인간사회가 항상 강구해온 재생성적인 대응들 사이에서 진동해온 순환의 역사를 피할 필요가 있다. 대신에 우리는 수 세기와 수천 년을 지속할 수 있는 견실한 경제와 사회체제로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안(koan, 公案)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4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보기]
11장 Roaming [보기]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40장 The Fifth Dimension
41장 Towards Upward
42장 Offer a New Path . . .
43장 . . . before Opposing the Current Path
44장 Money Flows
45장 The Cascade of Change

 


19장 공안(公案)

크래플은 디날리에서의 셋째 시즌을 맞이하기 전에 큰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자신의 일차적 목표―맥킨리산(Mt. McKinley)의 ‘seasonal naturalist’가 되는 것[맥킨리산은 디날리국립공원에 있는 산으로서 디날리산이라고도 불린다―정리자]―는 달성하였기에 ‘다음 목표’가 관심사가 된다. 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은 비교신화학자인 캠벨(Joseph Campbell)의 『천의 얼굴의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이다. 이 책에서 캠벨은 ‘살아있음의 모험’(the adventure of being alive)을 개인이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인간 지혜를 신화들이 전해준다고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영웅 신화들은 결코 영웅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만화책·영화·동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경우와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삶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신화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크래플은 자신에게 어떤 신화적인 조우와도 같은 것이―아마도 갈색양진이(the rosy finch)의 경우처럼 자연과 관계된 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데, 그의 생각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블랙홀을 중심으로 계속 맴돌았다.

상승이 더 큰 하강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서만 살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이 그러한 것 이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크래플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생에게 태양은 결국 죽을 것이며 그러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도 끝장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줄곧 이 문제로 고민해왔다. 모든 것이 끝장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혼자 끙끙대왔던 것이다.

크래플은 고등학교 때부터 ‘엔트로피’니 ‘열역학 제2법칙’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 시작한다. ‘커먼즈의 비극’을 말한 것으로 유명한 하딘(Garrett Hardin, a prominent ecologist)이 열역학 법칙들을 요약한 말도 접했다. “이길 수도 없고 심지어 비길 수도 없다. 게임을 안 할 수도 없다.” [나중에 크래플은 하딘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변형시킨다.] 그러면 인간도 근본적으로 시체를 뜯어먹는 구더기와 같은 것인가? 생명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서로 뜯어먹으며 돌아가는 것인가?

크래플은 이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개관한다. 종교는 이 황량한 문제들로부터 안심 되는 보호처를 제공했으나 과학의 등장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으로 종교를 대체하여 종교가 제공한 보호처는 퇴출되었다. 과학혁명으로부터 동력을 받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물들을 내놓는 기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단순한 부품들을 결합하여 더 큰 것으로 만들어진 이 기계들이 우리의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은유가 되었다.

크래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 사는 것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자연을 공부해보니 과학이 관찰한 바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적 영혼에서의 분열”을 어떻게든 치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크래플 개인의 공안(koan, 公案)이 되었다.

‘공안’이란 말을 아는 것으로 보아서 크래플이 선불교에 대한 책을 읽었거나 한 것이 분명하지만, 측정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크래플이 이해하는 ‘공안’은 “선불교 전통의 일부”로서 “그 해답들이 학생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수준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거의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의미한다. 크래플은 ‘공안’의 한 사례로 ‘한 손으로 손뼉을 칠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가?’를 예로 제시한다. 어떻든 젊을 때 크래플은 이런 비교적(秘敎的)인 질문들에 끌리고 열역학 제2법칙을 자신의 ‘공안’으로 삼는다. [사실 여기서는 ‘공안’이라기보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우리가 크래플에게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포함하는 더 세밀한 이해를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공안에 대해 다소의 실망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집의 커피 마시는 탁자에 공안 하나를 그 답과 함께 적어놓은 그림책이 있었는데 공안은 대략 ‘당신은 창문이나 문이 없는 피할 수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있다. 뚫린 곳이 없으며 따라서 출구가 없다. 당신은 어떻게 나가겠는가?’이다. 책에 나온 답은 ‘자, 나왔다!’(There, I’m out!)이다. 이 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래플에게 공안은 그 신비한 동양적 매력을 다소 잃게 된다. [그러나 곧 보게 되지만, 나중에 크래플은 그렇지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답이 다시 공안이 된 셈이다. 사실 답이 뻔한 공안이라면 진정한 공안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공안의 핵심이 뭐냐에 대해서―선불교의 관점이 아니라 정리자의 관점에서―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이 미리 정해진 ‘정답’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여름 씨즌에 크래플은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최종 목표인 위커섐 벽(Wickersham Wall)―디날리 산의 북쪽 사면―등반도 달성한다. 이럭저럭 세 번째 여름 씨즌이 끝나고 나서 크래플은 그냥 공원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빙하가 흐르는 계곡 셋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넓은 공터에 앉아서 땋은 머리 모양의 물줄기들(braided streams)과 북향의 빙하벽을 올려다보던 크래플은 의식이 물질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이 뉴런들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에 토대를 둔다면?” 사람들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코드로 된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의식의 발전 가능성을 탐구할 때에는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사실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이 자연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 법칙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 세상은 꺼져있음과 켜져 있음이라는 두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상태들로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의식의 방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출현했는지도 모르며, 그 이후에 그 의식의 기본적 패턴들을 자기의식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만큼 소형화하여 담는 두뇌들을 진화시켜오고 그런 다음에 우리의 복잡한 뉴런 연결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의식이 오직 뉴런들과 함께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크래플에게는 자신이 앉아있는 세 빙하 계곡 사이의 이 공간도 의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이는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사유로서 발현된 것이다. 피상적이지도 않고 풍요롭고 상세하지만 영혼(spirit)을 결여한 [우리 식으로라면 ‘신명’이 없는] 사유이다. 세상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처럼 너무나도 작은 것으로 느껴진다.

9월에 집으로 돌아온 크래플은 책 한 권―재노프(Arthur Janov)의 The Primal Scream―을 읽고 ((재노프는 정신요법 의사로서 어린 시절의 어떤 원초적인 경험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그 경험들과의 감정적 연결을 끊으며 우리 자신을 천천히 우리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본다. 그의 치료의 목표는 환자들이 그 원초적 경험을 이번에는 어른의 관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겪어서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여태까지 닫혔던 길들을 다시 열도록 돕는 것이다. )) 거기서 실존주의적이랄 수 있는 지혜를 접한다. 비록 삶이 내적 의미가 없을지라도 열심히 살면서 어떤 존엄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크래플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크래플은 점점 더 나머지 삶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역할을 하기 위해 써야 할 가면처럼 느껴진다. 크래플은 가면을 쓴 자신은 행동을 하고 진짜 자기는 왼쪽 어깨 위에 앉아서 그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상상한다.

크래플은 삶이 어차피 무의미한다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공원에서 계절 관리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지원서도 보내고, 집에서 식구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가면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와 오래된 외딴 농가를 집주인 대신 봐주는 일(to house-sit an old isolated farmhouse)을 하며 지낸다. 근처 겨울산의 아름다움도 냉소적인 상태에 빠진 그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던 중 휘트먼 컬리지(Whitman College)가 1월 계절학기로 제공하는 강의들 중에 시애틀에서 온 무희단이 가르치는 ‘Contact improvisation(즉흥접촉)’이라는 댄스워크숍을 수강하게 된다. (강의들 중 다수가 마을 사람들도 수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강의에서 가르치는 춤은 접촉 지점이 늘 변한다는 점에서, 늘 변하는 눈과 땅의 상호작용이 곧 경로인 크래플의 표행과 좀 유사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춤은 근육을 풀어주고 습관적인 자세를 교정하여 몸이 더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강사들은 그룹으로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럴 경우 집단의 에너지가 서로긴밀하게 연관된 느낌을 남기며 끝났다.

둘째와 셋째 워크숍 사이의 저녁에 강사들이 대중 앞에서 춤공연을 했다. 한 여강사가 바닥을 굴러 가로지르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구르지 않았다. 그녀는 “‘굴러지는’ 듯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禪)적 자질(n ineffable Zen quality of ‘being rolled’)”을 보였다. 갑자기 ‘가능해’는 말이 크래플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자신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공안에 대한 답이 재노프의 설명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후에 강사들과 긴 대화를 가지면서 크래플은 세상이 가능성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왼쪽 어깨 위에 않았던 냉소적인 자아는 사라졌다. 의기소침함도 사라졌다. 갑자기 예전의 공안의 답이 생각나고 ‘자, 나왔다!’(There, I’m out!)라는 그 답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그는 왼쪽 어깨 위의 냉소적 자아가 지키는 논리의 독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제 그는 나왔다. 일단 나오니 반박할 수 없던 것 같던 그 논리의 힘이 무너져버렸다.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두는 논리를 외부에서 보는 것뿐이었다. 크래플이 갇혀 있었던 그 방, 그의 마음 안의 그 조그만 방은 그의 여생 전부와 우주 전체를 가둬 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빠져나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 가두는 힘은 무너졌다. 그것은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벽이란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크래플은 그날 노래 가사가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놀랍게도 가사가 음보와 운이 딱 맞으며 명쾌하게 흘러나왔다. 인도에 눈이 쌓여있었고 크래플은 균형잡힌 ‘발끝으로 돌기’를 했다. 미끄러질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19 끝>

 




표행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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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Ro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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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표행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크래플에게 ‘roaming’이란 실제적인 것인 동시에 비유이다. ‘roaming’은 사전적으로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을 말한다. 크래플이 실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할 때 ‘roaming’은 등산로를 벗어나(‘off the trail’) 산을 타는 것을 말한다. 주로 물줄기를 찾아 따라 올라갔다가 그 길을 그대로 되밟아서 내려온다. 앞으로 ‘roaming’은 ‘표행(飄行)’으로 옮기기로 한다.

디날리국립공원에서 “a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으로 일하면서 크래플은 5일 일하고 3일 표행을 했다. (평일의 마지막 날 일을 일찍 끝내고 표행을 시작한다.) “공원에는 등산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행이 적절한 단어다.”

크래플의 표행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온 길을 되밟아 가기’이며, 둘째 기술은 ‘staying found’[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이다. 만일 온 길을 되밟아 돌아갈 수 있다면, 거의 어디든 탐구할 수 있다.

항상 당신의 발을 안전한 위치에 놓을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당신 앞에 세상이 열리고 당신을 표행으로 초대한다. 당신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같은 길로 돌아와야 할 수도 있으며, 이는 아마 여러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올 가능성도 자신의 길을 찾는 표행의 일부이다. 그 시간은 낭비된 것이 아니다.

등산로를 따르는 산행과 표행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등산로는 당신을 예정된 장소로 데려다주지만 표행은 당신을 예측하지 못한 연결관계들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인다.

표행은 땅과 함께 춤을 춘다. 땅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땅 안에서 움직이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여러 개의 가능한 선들을,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본다. 나는 이것들을 ‘선들’(lines)이라고 부른다. ‘경로들(paths)’이나 ‘루트들(routes)’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서 표시가 된 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표행을 할 때에는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보는 것이 변하며 그에 따라 다음 내딛을 곳이 변하고 또 이에 따라 그 다음에 보는 것이 변한다. 이렇듯 걷기가 “계속적인 피드백 나선에 의해 형성된다.”

매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더 잘 반응할수록 이 나선은 더 살아있는 것이 되고 나의 표행도 더 살아있는 것이 된다. 내가 가는 경로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그 경로를 가로질러 강한 선이 지나가고 있다. 비탈들을 오르고, 작은 상류 유역을 유람하듯 둘러가며 구불구불한 하상(河床)을 따라가는 선이다. 매력, 아름다움, 즐거움에 의해 형성되는 선이다. “아름다움은 지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어느 날 크래플은 사면 유역(a side drainage)을 따라 낮고 완만한 고개를,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미리 가지고 넘어가다가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유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듯,

표행을 할 때 땅은 더 커진다. 내 머릿속 지도는 내가 작다고 생각한 곳들에서 계속 부풀어 커진다. 그 지역은 내가 등산로를 따라갈 때보다 그 안에 표행을 할 때 더 많은 차원을 가지게 된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땅의 모습에 잘 맞추어져 있고 능선, 물줄기, 표행자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꼬불꼬불한 선들로 엮는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을 잘 만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목적이 다르다. 인간의 길은 빠른 이동을 위해 만들어졌고, 동물들의 길은 그 지역에 사는 것을 돕도록 만들어졌다.

②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매우 좁다. 1피트가 넘지 않는다. 길이 오래 되어서 땅이 그 주위에 잘 적응되어 있다. 그 길을 다녀도 주위에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동물들의 길에 들어서면, 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길 안에서 걷는다는 느낌이 든다. 걸음걸음이 편리하게 경사지어진 땅을 딛게 된다.

땅은 선들로 가득 차있다.

① 등고선(contour lines)

② 경사선(fall line) : 공을 굴리면 굴러가는 공이 따르는 선. 등고선과 수직임.

③ 유역선(drainage lines) : 어떤 지역에서 짧은 경사선들이 합류하는 가장 긴 경사선. 경사선들 가운데 경사가 가장 완만하다.

④ 능선 : 유역선이 음이라면 능선은 양이다.

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의 선 : 에너지가 가장 덜 드는 경로이다.

⑥ 살아있음의 선 : “이 다섯 선들의 상호작용에서 내가 걷는 선이 나온다. 살아있음의 아름다운 선(a beautiful line of aliveness)이다. 이 선은 모든 다른 선들에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이 선은 그것이 어디로 이끌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어떤 선에 의해 내가 마침내 출발점으로 돌아올지를 모르면서 내가 실제로 따르는 선이다. 종종 그 공간의 아름다움과 그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그 안에 숨을 쉰다. 내 주위에 온통 아름다움 빛이 빛난다. 여기에, 이 공간에 있다는 데서 오는 풍요로운 만족감.”

마지막으로 크래플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표행’을 삶 전체를 비유하는 차원으로 확대한다.

삶은 표행이다. 만일 나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경로로 데려다줄 가능성이 매순간 열린다고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 가능성들에 더 맞추어 있게 되는 셈이다. 그 가능성들은 내가 내 앞의 선을 스캔할 때 나의 검색 이미지의 일부이다. 나는 새 관찰자를 만나서 그것을 계기로 알래스카에 가게 되었다. 한 삼림관리원이 죽은 사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를 제안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말해줄 내 생각이 변했다. 앞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무언가 예측 못할 일이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데려다주고, 이 모험이 다시 다른 예측 못할 조우로 나를 이끌기 때문에 당신은 이 이야기가 어디서 끝날지 잘 모를 것이다.

<11장 끝>




죽은 사슴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 저자  : Paul Krafel
  • 원문 :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크래플의 웹북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의 내용 소개를 시작해놓고 이런저런 일로 이어가지 못했다. 이제 이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장을 골라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8장부터 시작한다. 이번 것을 포함하여 앞으로 내용을 정리할 장들은 다음과 같다.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11장 Roaming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40장 The Fifth Dime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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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The Cascade of Change

 


8장 죽은 사슴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크래플이 디날리국립공원에서 일하던 어느 날 크렌쇼(Hugh Crenshaw)라는 구역담당 삼림관리원이 크래플과 같은 젊은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에게 방문객들에게 공원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공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해보라며, 예를 들어 죽은 사슴이 분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라고 권유한다. 차에 받혀 죽은 사슴이 생기자 크렌쇼는 크래플에게 통지해주며, 이에 크래플은 죽은 사슴이 구더기 떼에 먹혀 껍데기만 남아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다음 시즌에 방문객들에게 제공할 ‘사막에서의 죽음’(Death in the Desert)이라는 슬라이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다음 시즌에는 숙소에서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퓨마(mountain lion)가 사슴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먼저 검정파리들이 와서 새끼를 까고 그 수백만 마리의 유충들이 사슴을 파먹으며 눈에 보이는 구더기들로 성장한다. 그 다음으로 청딱지개미반날개(rove beetles)들이 와서 구더기들을 먹어댄다. 크래플이 그곳에 가볼 때마다 새로운 포식자들과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온다. 사슴 몸체가 구더기 몸체들로 전환되자 일정 시점에서 검정파리들이 떠난다. 전체적으로 구더기들이 먹히면서 몰려드는 동물의 절대수는 감소하지만, 덤벼드는 종의 수는 잠시 늘어난다. 말벌 한 마리가 사체 주위에 날아다니는 포식자 곤충 하나를 잡아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저 말벌의 유충들은 구더기들이 사슴 몸체를 다 먹어치우며 성장하듯이 그 곤충의 몸을 다 먹어치우리라.

일정 시점이 되자, 구더기들이 사체에서 떨어져 나와 기어가기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땅 속으로 들어가서 번데기를 거쳐 성인 파리가 되기 위해서이다.) 음식 역할을 한 구더기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몰려든 종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간혹 새로운 종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더 적은 수의 종의 더 적은 수의 개체들이 남아서 가죽과 골수에 남아있는 에너지만 수확한다.

크래플은 이 과정을 오덤(Odum)의 생태학 교과서를 통해 성찰한다. [본인은 자연에서 진실을 얻는다고 했지만, 이는 앎의 근본적 연원을 말한 것일 뿐이고, 사실 그는 책을 통한 지식과 연결짓기를 그치지 않는다.―정리자]

얼마나 다양한 곤충들이 각각 사체의 상이한 부분들을 전문적으로 먹어치우는가. 사슴 안의 분자들은 어떻게 재배열되어 수천의 새로운 곤충의 몸들이 되는가. 사슴의 몸에 집중되어 있던 에너지가 이제 어떻게 수천의 다른 생명체들을 관통해서 흐르고 있는가. 무언가 심오한 것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덤의 책 안에서 흘러다니는 수백 개의 화살표에 담긴 큰 진실이 바로 나의 눈과 코 앞에서 육화되고 있었다. 사슴이 죽은 지 몇 분 내에 일시적인 ‘생태계’가 사체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 생태계는 여러 날에 걸쳐 점점 더 복잡한 것이 되었다. 죽은 고기와 퓨마로 구성된 단순한 체계가 들끓는 구더기들, 구더기 포식자들, 포식자들의 포식자들로 구성된 체계로 다양화된 것이다. 사체가 먹히고 사슴의 분자와 에너지가 줄어들었을 때 구더기들은 성인이 될 준비를 하기 위해 꿈틀대며 빠져나갔다. 생태계는 해산되어 어딘가에 있을 또 하나의 사체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흩어졌다. 이것이 죽은 뒤에 몸이 가는 곳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부끄럼 없이 보여준다. 뼈, 가죽, 털 말고는 놀랍도록 빠르게 다른 생명체의 몸이 되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그의 망원경으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관찰하듯이, 나는 매료된 채 앉아서 한 개체의 죽음과 다른 개체들의 탄생 사이의 매우 중요한 이행을 나의 육안으로 관찰했다.

이 지점에서 크래플은 열역학 제2법칙을 떠올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피력한다.

태양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일부가 지구에 도달하여 지구를 비춘다. 또 그 일부가 광합성의 동력이 되고 먹이사슬을 통해 흘러내린다. 그러는 동안 물질대사를 위한 열이 우리의 대기로, 따라서 우주 공간으로 새어나오는데,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는 흩어진다. 임의적인 분자운동의 형태로 공간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변하거나 어떤 일을 할 잠재력이 없이.

사슴의 사체가 이 법칙을 예증한다고 본다. 사슴 안의 원자들은 일주일 후에 어린 곤충들로 이동하는 등 어디선가 돌고 있으며 결코 소진되지 않지만, 사슴 안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usable energy)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수천 마리의 구더기들을 키우는데, 그리고 구더기 포식자들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지만 결국에는 소진되고 만 것이다.

전문적 정확성 에너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가진,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유한하다. 더 나아가 모든 사용가능한 에너지는 덜 사용 가능한 형태의 에너지를 향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가서 결국 임의적인 진동만이 남는 경향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생물체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튀어가던 공이 결국 멈추는 것, 차에 휘발유가 다 떨어지는 것, 소리가 사라지는 것,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생긴 파문이 확대되다가 감지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는 것, 장난감의 태엽이 다 풀리는 것 등등도 이 법칙의 표현이다. 크래플은 이 책에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사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한다.

보통 에너지의 자연발생적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향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란 어떤 체계―‘계’―에서 사용될 수 없는 에너지의양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것을 우리는 시간을 x축(오른쪽이 미래, 왼쪽이 과거)으로 하고 엔트로피를 y축(항상 0보다 크다)으로 하는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사슴 사체의 경우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축에 숫자가 없는 이유는 어떤 시간 단위로 재든 엔트로피의 증가는 엄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법칙은 어떤 비율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폭탄의 폭발은 엔트로피를 폭발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막에 있는 뼈의 분해는 매우 느린 변화과정이다.

이론적으로는 증가율이 제로일 수 있다(실제로는 아니지만). 다만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간다면 그 방향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쪽일 수는 없다. 이 그래프는 이 책에서 나중에 다시 사용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무언가(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떨어져간다는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y축을 ‘엔트로피’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제 이 그래프는 무언가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우리의 감각에 부합한다.

사실 엔트로피의 증가, 즉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가 무엇을 함축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크래플은 처음에는 제2법칙은 ‘모든 것은 줄어들게 되어있다’는 의미라고 들었다. 나중에 그는 ‘닫힌 체계는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어있다’가 더 정밀한 의미임을 알게 된다. 이 닫힌 체계에서 생물체들은 죽어서 분해되고 박테리아들이 유기체 분자를 감소시키고 그 다음에는 박테리아도 죽는다. 수역(水域)은 파도 없이 잔잔해지고 평평해질 것이다. 그런데 빛이 사라지므로 이것을 볼 수도 없다. 별빛조차도 없다. 별이 보인다면 닫힌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젊은 크래플은 ‘체계가 닫히지 않는다면 제2법칙은 적용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생각이다. ‘닫힌 체계’는 제2법칙이 함축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이지 제2법칙의 진정한 핵심이 아니다. 이 핵심은 에너지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더 높은 엔트로피를, 더 낮은 사용 가능성을 향하여 흘러간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엔트로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제2법칙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증가가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가능하지만 사용가능한 에너지의 훨씬 더 큰 감소가 해당 체계를 둘러싼 더 큰 체계의 어디선가 일어나야 한다. 검정파리들의 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슴이 죽어야 한다. 아이가 성장하려면 엄마가 다른 생명체들을 먹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이 아래로 흐르는 열역학적 흐름 내에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즉 살아있기 위해서 계속 상류 쪽으로 헤엄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식물들은 햇빛을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의 저에너지 분자들로부터 고에너지의 당 분자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일을 한다. 우리 포유류는 어떻게 내부 열을 유지하는가? 옷을 입고, 더 많은 음식을 먹고, 벽을 둘러치고 불을 피우는 것이 그 일련의 일시적인 해법들이다. 이 해법들이 동이 나면 우리는 몸이 식어 죽는다.

생명[이런 경우에는 전체로서의 생명을 말함]은 상류 쪽으로의 헤엄치기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 생물학 교과서들은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생명체들은 주위의 에너지원의 수확을 통해 생존한다고. 식물은 햇빛을 수확하고, 초식동물은 식물을 수확하며 포식자들은 먹잇감을 수확하며 사첼ㄹ 분해하는 생물체는 모든 사체들을 수확한다. 이렇듯 다른 체계들의 희생이 있어야 우리 체계가 상류 쪽으로 나아가거나 적어도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크래플은 사슴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열역학 제2법칙의 근본적인 귀결, 즉 우리는 다른 것들을 수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유지한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제2법칙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 너머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수확하기를, 우리가 폐기물로 바꾼 것을 다시 그 경계 너머로 배출하기를 요구한다. 동시에 호랑이든 진드기든 식민화하는 국가든 외부에서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경계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경제적 활동 대부분은, 사라지는 시체를 서둘러 수확하는 구더기들과 똑같다. ‘청딱지개미반날개들이 잡아먹기 전에 주위 세계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될 수 있는 한 많이 취하라.’

크래플이 ‘사막에서의 죽음’이라는 슬라이드쇼를 디날리국립공원 방문객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방문객들은 이전에 지질학 강연을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수동적 수용의 태도로 등을 뒤로 젖히고 앉아있기보다는 기대하는 태도로 고개를 앞으로 빼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고 않아있게 사로잡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명강연가가 되기보다는, 아직 진행 중이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탐험을 서술했다.

이전에는 강연이 끝나면 박수가 나왔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직접적이고 활발한 관심을 보였다. 칭찬보다는 질문들이 크래플을 둘러쌌다. 지질학 강연 접근법이 에고의 영광을 증가시키는 데 더 이익이 되었지만, 크래플은 사람들이 어떤 복잡한 사안에 열렬히 참여하는 모습을 더 좋아했다. 이것이 그의 “교사로서의 길에서 평생 의미를 가지게 될 갈림길이었다.”

<8장 끝>

 




가이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

 



지난 8세기에 걸쳐서 영국정치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두 개의 북엔드가 있다. 한 쪽 끝에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심림헌장 관련 글로 http://commonstrans.net/?p=478,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961 참조.))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영국 총리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가 있다. 삼림헌장은 1215년부터 (1971년까지!) 생존을 위해 공통의 부에 접근하는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했고, 새처는 공통의 부를 훔치고 사유화함으로써 이 권리들을 없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사회제도를 1981년에 도입했다.

런던 소재 SOAS 대학의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최근 저서 『커먼즈의 약탈: 공적인 부를 공유하기 위한 선언』(Plunder of the Commons: A Manifesto for Sharing Public Wealth)에서 이 역사의 양끝 지점을 한데 모은다. 초점은 인클로저에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핵심, 즉 책이 선언하는 바는 요즘의 맥락에서 공적 자산 및 공공 서비스로서 주로 이해되는 커먼즈를 되찾는 것이다.

커먼즈는 영국의 ‘심층 역사’에서 거듭해서 등장했지만 대체로 커먼즈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커먼즈는 보통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의성 있는 정치 쟁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커먼즈를 그 원대한 역사적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시대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풍부하게 다룬 책을 마침내 우리에게 선물한 스탠딩에게 크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커먼즈의 성쇠에 관여된 아주 많은 다양한 가닥들—법률•토지•재산권•경제•문화•지식—을 종합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 커먼즈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적절하게도 스탠딩은 커머너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한 삼림헌장에 관한 장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스탠딩이 서술한 삼림헌장의 역사는 분명,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거의 잊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가장 간결하고 생생한 역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정의하는 많은 유형의 법(률)•인간권리•정치투쟁의 최초의 사례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술이다.

스탠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면에서 삼림헌장은 평민이 최초의 계급 기반의 요구사항들을 직접 혹은 그들을 대신하는 다른 세력을 통해 국가(국왕)에 제기하여 ‘자유인들’의 공통적인 혹은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서 간주될 수 있다. … 삼림헌장은 자유인들에게 생계수단에의 권리, 원료에의 권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정도로 생산수단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였다.

‘기원 서사’에 이어서 스탠딩은 교육•의료•토지•지식 등의 영역들에서 커먼즈가 오늘날 왜 그토록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그는 어떻게 토지 소유권이 부유한 소수들에게 집중되었는지를, 어떻게 공유림들이 목재를 약탈당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공원들과 공공장소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사유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커먼즈•사회커먼즈•시민커먼즈•문화커먼즈 및 지식커먼즈(스탠딩의 범주들)를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국가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적정 가격의 주택을 밀어내고 노숙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동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조금씩 진행되는 사유화’를 통한 국가의료서비스의 쇠퇴에 대해 알게 된다.

스탠딩의 이 저서의 큰 기여는 어떻게 인클로저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만연한 현상—그런데도 정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현상—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탠딩은 영리하게도 단지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유시장주의자들—토리당, 기업들, 투자자들, 새처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쟁점들을 부활시킨다. 『커먼즈의 약탈』은 800년 전에 국왕이 공유지를 몰수한 일에서부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새처/레이건의 잔인한 긴축정책들까지 직선을 그음으로써 사태를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1200년대에 영국 토지의 대략 50퍼센트는 공유지로 관리되었다. 오늘날 대략 5퍼센트가 공유지로 인정되고 있다. 예측 가능한 일단의 정치적 남용사례들과 부의 불평등 사례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중세 왕들과 현대 자본가들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양쪽 모두에게 커먼즈의 절도(竊盜)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진보’는 항상 민중의 부(富)의 강제적 강탈—자유시장 경제가 위장하고 탈명명화(ex‑nomination)하려고 (말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온 어떤 것—에 의존해왔다. 이것이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내가 커먼즈를 이해하는 바와 스탠딩이 이해하는 바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많은 ‘공공재들’과 정부 서비스를 커먼즈로 본다. 나는 고전적인 커먼즈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는 상향식 거버넌스(bottom‑up governance)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국가신탁 커먼즈’(state‑trustee commons) 또는 간단하게 ‘정부 서비스’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가 표면상으로 커머너들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혹은 (앞으로) 공유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해 나는 커먼즈를 국가가 아니라 커머너 자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살아있는 사회 체계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체제를 받아들이는 담론 내부에서조차도 공동자산으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연다. 그런 이야기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가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커먼즈의 약탈』은 두 개의 ‘커먼즈 헌장 조항’을 제안함으로써 커먼즈를 되찾기 위한 야심적인 어젠다를 제시한다. “사적인 부는 많은 것을 커먼즈의 존재와 약탈에 빚지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커머너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스탠딩은 쓰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커먼즈 펀드>(Commons Fund)를 설립하는 것으로, <커먼즈 펀드>의 기금은 사업에 사용된 공동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탁기금은 커머너들에게 배당될 배당금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은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 APF)로 입증되고 『자본주의 3.0』(Capitalism 3.0)을 포함하는, 피터 반스(Peter Barnes)의 많은 저서로 대중화된 구상이다.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은 광범하고 학구적이지만 서사들로 풍성하고 읽는 즐거움도 있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탁상공론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그의 책에는 시기를 딱 맞추는 미덕 또한 있다. 대다수 커먼즈의 운명은 영국정치에서 빠르게 국가적인 논의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만큼 공들여 잘 만들어졌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3)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당신은 어셈블리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하기와 번역이 의미하는 바의 변화를 언급하고, 말들의 전유(appropriation)를 중요한 정치적 행위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중의 기업가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정립합니다. 하지만 200년 넘게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왔던 기업가성(entrepreneurship)’과 같은 용어를 그렇게 전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한 전유 행위를 통해 비판이 약화되고 구분들이 흐려질 위험은 없을까요?

답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책이 출간되자마자 특히 이 이슈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의 작업에서 늘 말들을 되찾고 재사용하며 그 의미를 전도시켜왔습니다. 가령, 아마도 ‘제국’은 정치학의 역사에서 가장 학술적이고 전통적인 용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윤리의 일부인 말들을 전유해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되기는커녕,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언어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전도(顚倒)의 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위한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들을 되찾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업가성을 말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 혹은 ‘다중의 기업가성’을 말합니다.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을 말하는 것은, 노동의 거부를 말하는 것과 같은 잠재성과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결국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힘은 이와 같은 재전유의 행위에 있으며, 이때 전도(顚倒)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다중에게 군주론끝부분에서 제시된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으라고,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중으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요구이지요. 이때 본질적인 것은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to take power differently)’는 말입니다. 이 말로 당신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공통적인 것혹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르게는 평등 없는 자유인 권리개념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좌파가 제안하는 자유 없는 평등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라는 정식화는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바,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다중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을 코뮤니즘(communism)’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통주의(commonism)’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연대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답 : 왜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지 않냐고요? 아마도 그 말이 최근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남용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공통적인 것의 정치 기획을 다시 ‘코뮤니즘’으로 부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마이클이 아니라 다중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담론에서 연대가 어디에 위치하냐고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연대가 있습니다. 연대는 우리 담론의 원리적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대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중 세 가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1) 고독, 홀로 됨의 거부에 있어서 질료인으로, 2) 생산하는 협력에 있어서 작용인으로, 3) 사랑에 있어서 목적인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이론적 구성 전체의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이 다름 아닌 연대에 있습니다. ‘공통주의(commontismo, commontism)’는 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홀로 생산할 수 없으며, 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안들은 연대의 제안, 혹은 홀로 됨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제안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대를 정의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공통적인 것을 향한 발본적 이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대를 향한, 홀로 됨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와 끔찍한 공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거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끝장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진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면, 이 끔찍한 고독을, 그러나 또한 이 거대한 열망을 알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막은 모든 면에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다음 질문이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작(前作)들에서처럼,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오큐파이 운동들이 다중의 반란을 증명한다는 낙관적인 생각, ‘가능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아마도 처음으로, 오큐파이 운동들이 시도한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당신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향 전환, 즉 초기의 낙관주의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혁명의 이념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작업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해결방안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난 10년 간 오큐파이를 비롯한 여러 운동들이 부딪혔던 한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 운동들이 스스로를 제도로 번역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시도하거나 실제로 제도를 형성했던 곳에서도 모두 운동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로부터 탄생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출발한 상황을 배반하고 만 포데모스(Podemos)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모든 논쟁들을 자세히 따라가본 후 포데모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략과 전술 사이의 관계의 역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오직 전술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낙관적이냐가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하려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커먼즈 운동의 한계들을 살피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권력 장악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권력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했듯이, 이것은 온전히 ‘권력을 다르게 잡기’에 관한 것, 그리고 이 발본적인 이행/역전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포퓰리즘을 다룹니다. ‘피플(people, 국민)’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피플’ 개념은 홉스의 논리, 주권과 재현(대의)에 관한 부르주아적 노선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피플은 다중을 훼손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오직 그 목적만을 가집니다. 피플의 논리에 따르면, 다중은 주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사라지는 단일한 피플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합니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원본 표지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홉스에 맞서, 단호하게 다중(multitudo) 개념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질서가 형성될 때에도 다중의 자연적 권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에서 증명하려고 했듯이, 그리고 『어셈블리』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는 ‘다중’과 ‘공통적’(comunis)이라는 개념을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와 민주주의의 전체 이슈를 압축합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상력, 사랑 그리고 주체성이야말로 특이성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공통적으로 되는 특이성과 주체성, 스스로를 새로이 창안되는 제도로 번역하는 특이성과 주체성은, 공통주의를 요약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 현재의 디지털·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관련하여, 당신은 또한 비판에 대해, 당신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기술비관주의(techno-pessimism)라 부르는 것에 대해 숙고합니다. 당신은 근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은 오직 대공장 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발전국면과만 유효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의 비판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 비판의 한계는, 낭만주의 시기에 혁명적 이념과 해방의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계몽과 근대적 사유의 뒤집어진 상(), 계몽의 변증법역시 사로잡혀 버리고만 그 역상(逆像)과 관계된 것일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한계는 해방적인 근대 사유와 자본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까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의 대안적 근대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주요 용의자들로 간주했는데요 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가 그들의 비판적 작업에 빚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주의의 발전과정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1944)의 결론들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극단들, 극단주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당신은 한계로 데려가고 당신은 거기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밀폐된 우주를 개념화한 것입니다. 노동자주의는 이 밀폐된 우주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것을 부수어 열 수 있는지를 자문(自問)했습니다. 노동자주의 시절에 우리는, 그들이 멈춘 곳에서 멈추지 않고, 밀폐된 우주, 자본주의의 우주, 도구적 합리성이 넘쳐나는 우주, 통제와 억압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주를 출발점으로 삼되, 이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의 세계이며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이 밀폐된 우주를 강제로 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주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이 일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기 위한 쇠지렛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자식이지만, 또한 그것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주의에서(그리고 『어셈블리』에서도 역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에 맞서 재발견했던 것은 존재론, 계급투쟁, 주체화의 가능성입니다. 1968년 이전의 마르쿠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작업입니다. 그는 아도르노의 학생이었는데 197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형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작업인 『구성과 계급투쟁』(Konstitution und Klassenkampf)(사후 1971년에 출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하려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의 담론은 정치적 행동, 해방, 총체적 착취와의 단절을 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비물질적·지적 노동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치 역시 이러한 발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는 메를로 퐁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기원한 기본틀을 현상학과 맑스주의의 교차 속에서 발견합니다.

 

: 당신이 지식인, 사상가, 연구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미래 세대에게 과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답 :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 내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모든 것을 연결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 그것은 내가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철학자로서도, 사회학자로서도, 때로는 심지어 직업 정치인으로서도, 말하자면 내가 수행한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적으로 나의 코뮤니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맡지 않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코뮤니즘이 다시 사람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통주의 투사야말로 지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새로운 비주권적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란에서 대의정치의 위기


  • 저자  :  Rahman Bouzari
  • 원문 : An Iranian crisis of representation(2019. 11. 22)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 분류 : 번역
  • 정리자 : 에스페라
  • 설명 : [정백수]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주류 언론을 통해서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이 언론들은 거기에 봉사하는 개인들의 자질과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적인 눈멂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삶은 민중에게 있으며 국가는 이 삶을 돕거나 해치거나이다. 그래서 민중의 삶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국가의 움직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글에서 우리는 이란 민중의 삶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란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을, 국가들 사이의 이 ‘전쟁놀이’를 이란 민중의 삶에 중심을 두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라만 부자리(Rahman Bouzari)는 이란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 신문 가운데 하나인 <샤그 데일리>(Shargh Daily)의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다른 글로 “How the Mass Media Misread the Iranian Protests”(2018. 1. 24)가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일어난 봉기들은 이란의 정치 지형을 영구히 바꿔놓았다. 그때 이후로 이란은 아주 훌륭한 ‘유기적 위기’로 진입해오고 있다. 한 세기 전에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처음 소개하고 설명한 이 위기는 지배 계급들이 더 이상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광범위한 경제·정치·사회 그리고 이념의 위기이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그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정치 공백기에는 온갖 종류의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라고 썼다.

이란에서 나타나는 명백히 병적인 증상들에는 실업, 스태그플레이션, 통화문제, 부패, 그리고 환경악화가 있다. 그러나 인구의 많은 부분, 이주와 실업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젊은이들, 사회적 포부를 잃은 학생들, 방치된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체 직전에 있는 사회 구조를 가로질러 퍼지고 있는 다른 잘 안 보이는 증상들도 있다.

전국의 수십 개의 작은 도시와 큰 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일련의 시위들은 기본적으로 2017년부터 2018년까지의 봉기들에서 내세워졌던 것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의 연속일 뿐이다. 최소 106명의 사람들이 21개 도시에서 살해되었고 시위가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천 명이 다치거나 체포되었다. 살해된 시위자들이 그보다 훨씬 많아서 200명 이상에 이르리라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이 현장에 나돌고 있다. 이란 정부는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으며, 그 결과 이란에 대해서 국제 사회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이를 지켜보는 서양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이란의 시위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항들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기름값 때문만이 아니다.

첫째, 이란 문제에 대한 영어권에서의 보도에 널리 퍼진 오해는 정부가 기름값을 리터당 50% 올렸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배급된 휘발유의 가격을 50% 인상했지만, 이는 차량당 매월 60리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60리터를 넘으면 가격이 200% 올랐다. 이는 40년간 부패한 지배 계급을 이미 참을 만큼 참아온 사람들의 일상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둘째, 많은 방송 해설자들이 이란 휘발유 가격과 국제 휘발유 가격을 비교하면서 ‘가격 인상’ 대신에 ‘보조금 철회’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란의 휘발유 가격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성급하게 결론지었다. 여기서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란의 최저임금(한 달에 125달러)이 미국 달러로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수반되는 물가 상승과 다른 상품들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리알화로 (값싼 노동력, 값싼 기름 등을 사용해서) 휘발유를 생산해서 미국 달러로 파는 것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가격 체계에서는 항상 교환 비율이 문제다.

셋째, 휘발유 가격 인상은 정부의 예산 적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10명의 사람들이 이란 은행으로부터 빌린 총 92억 달러에 상응하는 엄청난 미상환 대출금이 투자된 집단시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가 하면 이란의 고위 공직자들이나 그들의 친척들이 횡령과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는 뉴스를 매일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휘발유 가격 인상 결정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 정부는 적자폭을 줄이기 위해 소수 세력의 채무변제를 요청하기보다, 공공 지출 요구에 맞추기 위해 겨우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박살내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 가격 인상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마지막 방아쇠였으며 노동자들과 중산층 하부가 궁핍화에 저항하게 되는 계기의 역할을 해 왔을 뿐이다. 시위가 매우 빠르게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은 2017부터 2018년까지 일어났던 진압된 봉기들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란의 유기적 위기는 기존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연료 가격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인종적·민족적 차별을 여성·무신론자들·소외계층들에 대한 성적·종교적·계급적 차별과 40년 동안 융합해 온 아파르트헤이트(분리주의) 정권이다.

개혁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된, 지난 40년 동안 이란을 통치해 온 정치 세력은 전체 구조를 둘러싼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는 이란의 현재 위기를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이란과 그 밖의 나라에서 많이 안다고 떠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새로운/낡은 수사(修辭)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기적 위기는 40년 동안의 이란의 정치경제에 그 구조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제재는 자라나고 있던 위기에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삐걱거리는 부적절한 연합

위기의 본질은 1979년 혁명 직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 엘리트 집단과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가까스로 나라를 운영하게 된 소수 금권세력 사이의 부적절한 연합에 기인한다. 1979년 혁명 직후, 종교 세력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대다수의 “외부자” 집단에 맞서는 소규모 집단인 “내부자(khodi)”를 만들어 냈다. ‘시아파-페르시아인-남성’ 소수자들로 구성된 이 내부자들은 약 2,300명의 정치적 인물들로서 약 40년 동안 모든 정치적 반체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란 정치를 주도해오다 1988년 정치범 학살에서 그 지배의 정점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이란 경제도 소수 금권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1980-88년의 이라크와의 전쟁 이후 이란의 재건이 일단 실행에 옮겨지자, 정치 엘리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장관이나 국회의원부터 성직, 법조, 군사 영역의 지도자들까지 대부분 지배 계층에 속하는 자리에 있는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이 등장했다. 서로 유착된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국가 자원 전체를 수십 년 동안 약탈했다. 사유화(민영화), 도시화, 개발계획, 탈산업화, 삼림파괴, 그리고 뱅킹시스템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과 긴밀히 내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은 친척들에게 재정 자원에의 접근권을 제공해주기 위해 법을 제정했다.

만약 혁명 이후의 정치경제의 구축 자체에 위기가 내장되어 있다면, 근본적인 해체가 필요할 것이다. 정말로 지금과 같은 낡은 사회·정치적 상황에서는 정권이 합의를 성취할 수도 없고 심지어 조작해낼 수도 없다. 2017-18년의 봉기들은 이념의 헤게모니 영역에 어떤 진공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이 진공상태는 이란 정치의 그 어떤 기존 세력에 의해서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위기

이런 상황의 주된 이유는 대의정치의 위기이다. 이란 혁명 이후 정치는 민중의 움직임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었다. 사실 “외부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개별화되고 주변화된 문화 활동을 제외하고는 대의될 여지가 거의 없다. 비록 나라가 온통 혼란 상태에 있고, 노동자들은 민영화, 규제 완화 그리고 금융화에 질려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제도권 정치영역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다.

2017-18년의 봉기 이후로, (가장 중요한 셋만 꼽자면) 화물차 운전기사들, 교사들, 노동자들에 의해 수백 차례의 시위가 발생했다. 2018년 5월 말에는, 이란의 지방 수십 곳에서 수천 명의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여 파업을 벌였고 미국의 가장 큰 노조 가운데 하나[the Teamsters]가 이 파업을 지지하기도 했다.

2018년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교육민영화와 저임금에 항의하는 교사들의 첫 번째 전국적인 연좌 농성이 열렸다. 11월 13일에서 14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두 번째 연좌 농성이 이어졌고, 그 결과 많은 교사권리 운동가들의 체포와 수사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란의 남서쪽에 위치한 후제스탄(Khuzestan)주에 있는 하프트 타페 사탕수수 공장(Haft Tappeh Sugarcane Company) 노동자들의 연속적인 파업이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노동자 자치평의회를 창출하고 설립하겠다고 결의한 마지막 파업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후 곧바로, 노동자 대표인 에스마일 바크쉬(Esmail Bakhshi)는 노동운동가들 및 노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바크쉬에게 내려진 14년형과 74회의 채찍형벌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는 총 1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될 것을 선고받았다. 동시에, 이러한 항거를 보도한 기자들은 강압적으로 감금당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경우에, <샤그 데일리>(Shargh Daily) 신문의 경제부 기자인 마르지 아미리(Marzieh Amiri)가 2019년 5월 1일 테헤란에 있는 이란 의회 건물 앞에서 벌어진 노동의 날 시위를 보도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녀는 결국 10년 반 동안의 투옥과 148회의 채찍형벌을 선고받았다.

휘발유 가격 인상에 대한 대응으로 최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들은 이란에서의 ‘장기간의 혁명 과정’을 암시하는 또 한 번의 조짐으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강제적 은폐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 횡령, 사유화(민영화), 규제완화, 그리고 하층민의 빈곤화에 대항하는 다면적인 투쟁인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정치단체, 시민사회, 자유 언론, 정당, (노동)조합, 그리고 지도자의 부재 속에서 일어났고 이제는 심지어 놀랍게도 인터넷 연결의 부재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들은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이 자신들의 연합조직 또는 자율적인 모임을 만들기 위해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 착수한 자발적인 기획들인 것이다.

 

잘못된 대의(代議)와 선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이란인들의 투쟁이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즉 국가에 의한 진압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국가 공권력의 작용범위를 좁히는 위험한 활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병적인 증상들이 또한 대의의 수준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를 늘 정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문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란의 현존하는 엘리트 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에 속하거나 그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논설, 기사 등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봐왔다. 이것들이 이란 정치와 서양 언론 모두에서 가시화되는 정도는 높다. 저널리즘의 핵심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약 40년 동안 말하지 못했거나 억눌려 왔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란에서 이러한 목소리들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이란 전역에 걸쳐 약 100개 도시에서 거리로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일반 대중들, 1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 최근 며칠 동안 체포되거나 다친 사람들, 시위 3일 동안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의 후견에서 벗어나 있기에 합법적으로 그들을 대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계속 진행되는 교착된 차단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개혁주의자들 또는 중도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어떤 구조변경도 거부하는, 스스로 결정하는 대안 세력의 형성이다. 이 형성과정은 자발성에서 조직화로 이행하는, 이미 탄생한 과정이다. 만약 위기가 광범하고 유기적인 것이라면, 해결책도 이념적·민족적·젠더적 다양성이 있는 이란 사회의 건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란 여성의 해방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널리 퍼져있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답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 ‘이슬람 공화국’(이란)을 넘어서 부와 힘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라건대 지역 민중의 결속, 즉 레바논·이라크·시리아·이란 민중의 결속을 낳아, 그들을 평생 괴롭혀온 부패한 지도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