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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koan, 公案)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4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보기]
11장 Roaming [보기]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40장 The Fifth Dimension
41장 Towards Upward
42장 Offer a New Path . . .
43장 . . . before Opposing the Current Path
44장 Money Flows
45장 The Cascade of Change

 


19장 공안(公案)

크래플은 디날리에서의 셋째 시즌을 맞이하기 전에 큰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자신의 일차적 목표―맥킨리산(Mt. McKinley)의 ‘seasonal naturalist’가 되는 것[맥킨리산은 디날리국립공원에 있는 산으로서 디날리산이라고도 불린다―정리자]―는 달성하였기에 ‘다음 목표’가 관심사가 된다. 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은 비교신화학자인 캠벨(Joseph Campbell)의 『천의 얼굴의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이다. 이 책에서 캠벨은 ‘살아있음의 모험’(the adventure of being alive)을 개인이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인간 지혜를 신화들이 전해준다고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영웅 신화들은 결코 영웅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만화책·영화·동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경우와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삶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신화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크래플은 자신에게 어떤 신화적인 조우와도 같은 것이―아마도 갈색양진이(the rosy finch)의 경우처럼 자연과 관계된 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데, 그의 생각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블랙홀을 중심으로 계속 맴돌았다.

상승이 더 큰 하강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서만 살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이 그러한 것 이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크래플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생에게 태양은 결국 죽을 것이며 그러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도 끝장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줄곧 이 문제로 고민해왔다. 모든 것이 끝장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혼자 끙끙대왔던 것이다.

크래플은 고등학교 때부터 ‘엔트로피’니 ‘열역학 제2법칙’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 시작한다. ‘커먼즈의 비극’을 말한 것으로 유명한 하딘(Garrett Hardin, a prominent ecologist)이 열역학 법칙들을 요약한 말도 접했다. “이길 수도 없고 심지어 비길 수도 없다. 게임을 안 할 수도 없다.” [나중에 크래플은 하딘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변형시킨다.] 그러면 인간도 근본적으로 시체를 뜯어먹는 구더기와 같은 것인가? 생명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서로 뜯어먹으며 돌아가는 것인가?

크래플은 이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개관한다. 종교는 이 황량한 문제들로부터 안심 되는 보호처를 제공했으나 과학의 등장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으로 종교를 대체하여 종교가 제공한 보호처는 퇴출되었다. 과학혁명으로부터 동력을 받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물들을 내놓는 기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단순한 부품들을 결합하여 더 큰 것으로 만들어진 이 기계들이 우리의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은유가 되었다.

크래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 사는 것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자연을 공부해보니 과학이 관찰한 바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적 영혼에서의 분열”을 어떻게든 치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크래플 개인의 공안(koan, 公案)이 되었다.

‘공안’이란 말을 아는 것으로 보아서 크래플이 선불교에 대한 책을 읽었거나 한 것이 분명하지만, 측정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크래플이 이해하는 ‘공안’은 “선불교 전통의 일부”로서 “그 해답들이 학생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수준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거의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의미한다. 크래플은 ‘공안’의 한 사례로 ‘한 손으로 손뼉을 칠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가?’를 예로 제시한다. 어떻든 젊을 때 크래플은 이런 비교적(秘敎的)인 질문들에 끌리고 열역학 제2법칙을 자신의 ‘공안’으로 삼는다. [사실 여기서는 ‘공안’이라기보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우리가 크래플에게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포함하는 더 세밀한 이해를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공안에 대해 다소의 실망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집의 커피 마시는 탁자에 공안 하나를 그 답과 함께 적어놓은 그림책이 있었는데 공안은 대략 ‘당신은 창문이나 문이 없는 피할 수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있다. 뚫린 곳이 없으며 따라서 출구가 없다. 당신은 어떻게 나가겠는가?’이다. 책에 나온 답은 ‘자, 나왔다!’(There, I’m out!)이다. 이 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래플에게 공안은 그 신비한 동양적 매력을 다소 잃게 된다. [그러나 곧 보게 되지만, 나중에 크래플은 그렇지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답이 다시 공안이 된 셈이다. 사실 답이 뻔한 공안이라면 진정한 공안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공안의 핵심이 뭐냐에 대해서―선불교의 관점이 아니라 정리자의 관점에서―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이 미리 정해진 ‘정답’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여름 씨즌에 크래플은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최종 목표인 위커섐 벽(Wickersham Wall)―디날리 산의 북쪽 사면―등반도 달성한다. 이럭저럭 세 번째 여름 씨즌이 끝나고 나서 크래플은 그냥 공원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빙하가 흐르는 계곡 셋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넓은 공터에 앉아서 땋은 머리 모양의 물줄기들(braided streams)과 북향의 빙하벽을 올려다보던 크래플은 의식이 물질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이 뉴런들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에 토대를 둔다면?” 사람들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코드로 된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의식의 발전 가능성을 탐구할 때에는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사실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이 자연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 법칙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 세상은 꺼져있음과 켜져 있음이라는 두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상태들로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의식의 방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출현했는지도 모르며, 그 이후에 그 의식의 기본적 패턴들을 자기의식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만큼 소형화하여 담는 두뇌들을 진화시켜오고 그런 다음에 우리의 복잡한 뉴런 연결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의식이 오직 뉴런들과 함께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크래플에게는 자신이 앉아있는 세 빙하 계곡 사이의 이 공간도 의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이는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사유로서 발현된 것이다. 피상적이지도 않고 풍요롭고 상세하지만 영혼(spirit)을 결여한 [우리 식으로라면 ‘신명’이 없는] 사유이다. 세상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처럼 너무나도 작은 것으로 느껴진다.

9월에 집으로 돌아온 크래플은 책 한 권―재노프(Arthur Janov)의 The Primal Scream―을 읽고 ((재노프는 정신요법 의사로서 어린 시절의 어떤 원초적인 경험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그 경험들과의 감정적 연결을 끊으며 우리 자신을 천천히 우리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본다. 그의 치료의 목표는 환자들이 그 원초적 경험을 이번에는 어른의 관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겪어서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여태까지 닫혔던 길들을 다시 열도록 돕는 것이다. )) 거기서 실존주의적이랄 수 있는 지혜를 접한다. 비록 삶이 내적 의미가 없을지라도 열심히 살면서 어떤 존엄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크래플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크래플은 점점 더 나머지 삶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역할을 하기 위해 써야 할 가면처럼 느껴진다. 크래플은 가면을 쓴 자신은 행동을 하고 진짜 자기는 왼쪽 어깨 위에 앉아서 그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상상한다.

크래플은 삶이 어차피 무의미한다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공원에서 계절 관리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지원서도 보내고, 집에서 식구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가면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와 오래된 외딴 농가를 집주인 대신 봐주는 일(to house-sit an old isolated farmhouse)을 하며 지낸다. 근처 겨울산의 아름다움도 냉소적인 상태에 빠진 그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던 중 휘트먼 컬리지(Whitman College)가 1월 계절학기로 제공하는 강의들 중에 시애틀에서 온 무희단이 가르치는 ‘Contact improvisation(즉흥접촉)’이라는 댄스워크숍을 수강하게 된다. (강의들 중 다수가 마을 사람들도 수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강의에서 가르치는 춤은 접촉 지점이 늘 변한다는 점에서, 늘 변하는 눈과 땅의 상호작용이 곧 경로인 크래플의 표행과 좀 유사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춤은 근육을 풀어주고 습관적인 자세를 교정하여 몸이 더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강사들은 그룹으로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럴 경우 집단의 에너지가 서로긴밀하게 연관된 느낌을 남기며 끝났다.

둘째와 셋째 워크숍 사이의 저녁에 강사들이 대중 앞에서 춤공연을 했다. 한 여강사가 바닥을 굴러 가로지르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구르지 않았다. 그녀는 “‘굴러지는’ 듯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禪)적 자질(n ineffable Zen quality of ‘being rolled’)”을 보였다. 갑자기 ‘가능해’는 말이 크래플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자신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공안에 대한 답이 재노프의 설명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후에 강사들과 긴 대화를 가지면서 크래플은 세상이 가능성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왼쪽 어깨 위에 않았던 냉소적인 자아는 사라졌다. 의기소침함도 사라졌다. 갑자기 예전의 공안의 답이 생각나고 ‘자, 나왔다!’(There, I’m out!)라는 그 답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그는 왼쪽 어깨 위의 냉소적 자아가 지키는 논리의 독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제 그는 나왔다. 일단 나오니 반박할 수 없던 것 같던 그 논리의 힘이 무너져버렸다.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두는 논리를 외부에서 보는 것뿐이었다. 크래플이 갇혀 있었던 그 방, 그의 마음 안의 그 조그만 방은 그의 여생 전부와 우주 전체를 가둬 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빠져나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 가두는 힘은 무너졌다. 그것은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벽이란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크래플은 그날 노래 가사가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놀랍게도 가사가 음보와 운이 딱 맞으며 명쾌하게 흘러나왔다. 인도에 눈이 쌓여있었고 크래플은 균형잡힌 ‘발끝으로 돌기’를 했다. 미끄러질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19 끝>

 




표행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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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표행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크래플에게 ‘roaming’이란 실제적인 것인 동시에 비유이다. ‘roaming’은 사전적으로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을 말한다. 크래플이 실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할 때 ‘roaming’은 등산로를 벗어나(‘off the trail’) 산을 타는 것을 말한다. 주로 물줄기를 찾아 따라 올라갔다가 그 길을 그대로 되밟아서 내려온다. 앞으로 ‘roaming’은 ‘표행(飄行)’으로 옮기기로 한다.

디날리국립공원에서 “a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으로 일하면서 크래플은 5일 일하고 3일 표행을 했다. (평일의 마지막 날 일을 일찍 끝내고 표행을 시작한다.) “공원에는 등산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행이 적절한 단어다.”

크래플의 표행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온 길을 되밟아 가기’이며, 둘째 기술은 ‘staying found’[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이다. 만일 온 길을 되밟아 돌아갈 수 있다면, 거의 어디든 탐구할 수 있다.

항상 당신의 발을 안전한 위치에 놓을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당신 앞에 세상이 열리고 당신을 표행으로 초대한다. 당신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같은 길로 돌아와야 할 수도 있으며, 이는 아마 여러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올 가능성도 자신의 길을 찾는 표행의 일부이다. 그 시간은 낭비된 것이 아니다.

등산로를 따르는 산행과 표행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등산로는 당신을 예정된 장소로 데려다주지만 표행은 당신을 예측하지 못한 연결관계들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인다.

표행은 땅과 함께 춤을 춘다. 땅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땅 안에서 움직이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여러 개의 가능한 선들을,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본다. 나는 이것들을 ‘선들’(lines)이라고 부른다. ‘경로들(paths)’이나 ‘루트들(routes)’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서 표시가 된 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표행을 할 때에는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보는 것이 변하며 그에 따라 다음 내딛을 곳이 변하고 또 이에 따라 그 다음에 보는 것이 변한다. 이렇듯 걷기가 “계속적인 피드백 나선에 의해 형성된다.”

매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더 잘 반응할수록 이 나선은 더 살아있는 것이 되고 나의 표행도 더 살아있는 것이 된다. 내가 가는 경로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그 경로를 가로질러 강한 선이 지나가고 있다. 비탈들을 오르고, 작은 상류 유역을 유람하듯 둘러가며 구불구불한 하상(河床)을 따라가는 선이다. 매력, 아름다움, 즐거움에 의해 형성되는 선이다. “아름다움은 지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어느 날 크래플은 사면 유역(a side drainage)을 따라 낮고 완만한 고개를,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미리 가지고 넘어가다가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유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듯,

표행을 할 때 땅은 더 커진다. 내 머릿속 지도는 내가 작다고 생각한 곳들에서 계속 부풀어 커진다. 그 지역은 내가 등산로를 따라갈 때보다 그 안에 표행을 할 때 더 많은 차원을 가지게 된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땅의 모습에 잘 맞추어져 있고 능선, 물줄기, 표행자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꼬불꼬불한 선들로 엮는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을 잘 만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목적이 다르다. 인간의 길은 빠른 이동을 위해 만들어졌고, 동물들의 길은 그 지역에 사는 것을 돕도록 만들어졌다.

②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매우 좁다. 1피트가 넘지 않는다. 길이 오래 되어서 땅이 그 주위에 잘 적응되어 있다. 그 길을 다녀도 주위에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동물들의 길에 들어서면, 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길 안에서 걷는다는 느낌이 든다. 걸음걸음이 편리하게 경사지어진 땅을 딛게 된다.

땅은 선들로 가득 차있다.

① 등고선(contour lines)

② 경사선(fall line) : 공을 굴리면 굴러가는 공이 따르는 선. 등고선과 수직임.

③ 유역선(drainage lines) : 어떤 지역에서 짧은 경사선들이 합류하는 가장 긴 경사선. 경사선들 가운데 경사가 가장 완만하다.

④ 능선 : 유역선이 음이라면 능선은 양이다.

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의 선 : 에너지가 가장 덜 드는 경로이다.

⑥ 살아있음의 선 : “이 다섯 선들의 상호작용에서 내가 걷는 선이 나온다. 살아있음의 아름다운 선(a beautiful line of aliveness)이다. 이 선은 모든 다른 선들에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이 선은 그것이 어디로 이끌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어떤 선에 의해 내가 마침내 출발점으로 돌아올지를 모르면서 내가 실제로 따르는 선이다. 종종 그 공간의 아름다움과 그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그 안에 숨을 쉰다. 내 주위에 온통 아름다움 빛이 빛난다. 여기에, 이 공간에 있다는 데서 오는 풍요로운 만족감.”

마지막으로 크래플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표행’을 삶 전체를 비유하는 차원으로 확대한다.

삶은 표행이다. 만일 나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경로로 데려다줄 가능성이 매순간 열린다고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 가능성들에 더 맞추어 있게 되는 셈이다. 그 가능성들은 내가 내 앞의 선을 스캔할 때 나의 검색 이미지의 일부이다. 나는 새 관찰자를 만나서 그것을 계기로 알래스카에 가게 되었다. 한 삼림관리원이 죽은 사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를 제안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말해줄 내 생각이 변했다. 앞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무언가 예측 못할 일이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데려다주고, 이 모험이 다시 다른 예측 못할 조우로 나를 이끌기 때문에 당신은 이 이야기가 어디서 끝날지 잘 모를 것이다.

<11장 끝>




죽은 사슴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 저자  : Paul Krafel
  • 원문 :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크래플의 웹북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의 내용 소개를 시작해놓고 이런저런 일로 이어가지 못했다. 이제 이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장을 골라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8장부터 시작한다. 이번 것을 포함하여 앞으로 내용을 정리할 장들은 다음과 같다.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11장 Roaming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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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The Cascade of Change

 


8장 죽은 사슴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크래플이 디날리국립공원에서 일하던 어느 날 크렌쇼(Hugh Crenshaw)라는 구역담당 삼림관리원이 크래플과 같은 젊은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에게 방문객들에게 공원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공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해보라며, 예를 들어 죽은 사슴이 분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라고 권유한다. 차에 받혀 죽은 사슴이 생기자 크렌쇼는 크래플에게 통지해주며, 이에 크래플은 죽은 사슴이 구더기 떼에 먹혀 껍데기만 남아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다음 시즌에 방문객들에게 제공할 ‘사막에서의 죽음’(Death in the Desert)이라는 슬라이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다음 시즌에는 숙소에서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퓨마(mountain lion)가 사슴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먼저 검정파리들이 와서 새끼를 까고 그 수백만 마리의 유충들이 사슴을 파먹으며 눈에 보이는 구더기들로 성장한다. 그 다음으로 청딱지개미반날개(rove beetles)들이 와서 구더기들을 먹어댄다. 크래플이 그곳에 가볼 때마다 새로운 포식자들과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온다. 사슴 몸체가 구더기 몸체들로 전환되자 일정 시점에서 검정파리들이 떠난다. 전체적으로 구더기들이 먹히면서 몰려드는 동물의 절대수는 감소하지만, 덤벼드는 종의 수는 잠시 늘어난다. 말벌 한 마리가 사체 주위에 날아다니는 포식자 곤충 하나를 잡아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저 말벌의 유충들은 구더기들이 사슴 몸체를 다 먹어치우며 성장하듯이 그 곤충의 몸을 다 먹어치우리라.

일정 시점이 되자, 구더기들이 사체에서 떨어져 나와 기어가기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땅 속으로 들어가서 번데기를 거쳐 성인 파리가 되기 위해서이다.) 음식 역할을 한 구더기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몰려든 종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간혹 새로운 종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더 적은 수의 종의 더 적은 수의 개체들이 남아서 가죽과 골수에 남아있는 에너지만 수확한다.

크래플은 이 과정을 오덤(Odum)의 생태학 교과서를 통해 성찰한다. [본인은 자연에서 진실을 얻는다고 했지만, 이는 앎의 근본적 연원을 말한 것일 뿐이고, 사실 그는 책을 통한 지식과 연결짓기를 그치지 않는다.―정리자]

얼마나 다양한 곤충들이 각각 사체의 상이한 부분들을 전문적으로 먹어치우는가. 사슴 안의 분자들은 어떻게 재배열되어 수천의 새로운 곤충의 몸들이 되는가. 사슴의 몸에 집중되어 있던 에너지가 이제 어떻게 수천의 다른 생명체들을 관통해서 흐르고 있는가. 무언가 심오한 것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덤의 책 안에서 흘러다니는 수백 개의 화살표에 담긴 큰 진실이 바로 나의 눈과 코 앞에서 육화되고 있었다. 사슴이 죽은 지 몇 분 내에 일시적인 ‘생태계’가 사체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 생태계는 여러 날에 걸쳐 점점 더 복잡한 것이 되었다. 죽은 고기와 퓨마로 구성된 단순한 체계가 들끓는 구더기들, 구더기 포식자들, 포식자들의 포식자들로 구성된 체계로 다양화된 것이다. 사체가 먹히고 사슴의 분자와 에너지가 줄어들었을 때 구더기들은 성인이 될 준비를 하기 위해 꿈틀대며 빠져나갔다. 생태계는 해산되어 어딘가에 있을 또 하나의 사체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흩어졌다. 이것이 죽은 뒤에 몸이 가는 곳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부끄럼 없이 보여준다. 뼈, 가죽, 털 말고는 놀랍도록 빠르게 다른 생명체의 몸이 되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그의 망원경으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관찰하듯이, 나는 매료된 채 앉아서 한 개체의 죽음과 다른 개체들의 탄생 사이의 매우 중요한 이행을 나의 육안으로 관찰했다.

이 지점에서 크래플은 열역학 제2법칙을 떠올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피력한다.

태양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일부가 지구에 도달하여 지구를 비춘다. 또 그 일부가 광합성의 동력이 되고 먹이사슬을 통해 흘러내린다. 그러는 동안 물질대사를 위한 열이 우리의 대기로, 따라서 우주 공간으로 새어나오는데,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는 흩어진다. 임의적인 분자운동의 형태로 공간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변하거나 어떤 일을 할 잠재력이 없이.

사슴의 사체가 이 법칙을 예증한다고 본다. 사슴 안의 원자들은 일주일 후에 어린 곤충들로 이동하는 등 어디선가 돌고 있으며 결코 소진되지 않지만, 사슴 안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usable energy)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수천 마리의 구더기들을 키우는데, 그리고 구더기 포식자들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지만 결국에는 소진되고 만 것이다.

전문적 정확성 에너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가진,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유한하다. 더 나아가 모든 사용가능한 에너지는 덜 사용 가능한 형태의 에너지를 향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가서 결국 임의적인 진동만이 남는 경향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생물체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튀어가던 공이 결국 멈추는 것, 차에 휘발유가 다 떨어지는 것, 소리가 사라지는 것,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생긴 파문이 확대되다가 감지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는 것, 장난감의 태엽이 다 풀리는 것 등등도 이 법칙의 표현이다. 크래플은 이 책에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사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한다.

보통 에너지의 자연발생적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향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란 어떤 체계―‘계’―에서 사용될 수 없는 에너지의양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것을 우리는 시간을 x축(오른쪽이 미래, 왼쪽이 과거)으로 하고 엔트로피를 y축(항상 0보다 크다)으로 하는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사슴 사체의 경우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축에 숫자가 없는 이유는 어떤 시간 단위로 재든 엔트로피의 증가는 엄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법칙은 어떤 비율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폭탄의 폭발은 엔트로피를 폭발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막에 있는 뼈의 분해는 매우 느린 변화과정이다.

이론적으로는 증가율이 제로일 수 있다(실제로는 아니지만). 다만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간다면 그 방향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쪽일 수는 없다. 이 그래프는 이 책에서 나중에 다시 사용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무언가(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떨어져간다는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y축을 ‘엔트로피’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제 이 그래프는 무언가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우리의 감각에 부합한다.

사실 엔트로피의 증가, 즉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가 무엇을 함축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크래플은 처음에는 제2법칙은 ‘모든 것은 줄어들게 되어있다’는 의미라고 들었다. 나중에 그는 ‘닫힌 체계는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어있다’가 더 정밀한 의미임을 알게 된다. 이 닫힌 체계에서 생물체들은 죽어서 분해되고 박테리아들이 유기체 분자를 감소시키고 그 다음에는 박테리아도 죽는다. 수역(水域)은 파도 없이 잔잔해지고 평평해질 것이다. 그런데 빛이 사라지므로 이것을 볼 수도 없다. 별빛조차도 없다. 별이 보인다면 닫힌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젊은 크래플은 ‘체계가 닫히지 않는다면 제2법칙은 적용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생각이다. ‘닫힌 체계’는 제2법칙이 함축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이지 제2법칙의 진정한 핵심이 아니다. 이 핵심은 에너지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더 높은 엔트로피를, 더 낮은 사용 가능성을 향하여 흘러간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엔트로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제2법칙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증가가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가능하지만 사용가능한 에너지의 훨씬 더 큰 감소가 해당 체계를 둘러싼 더 큰 체계의 어디선가 일어나야 한다. 검정파리들의 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슴이 죽어야 한다. 아이가 성장하려면 엄마가 다른 생명체들을 먹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이 아래로 흐르는 열역학적 흐름 내에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즉 살아있기 위해서 계속 상류 쪽으로 헤엄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식물들은 햇빛을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의 저에너지 분자들로부터 고에너지의 당 분자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일을 한다. 우리 포유류는 어떻게 내부 열을 유지하는가? 옷을 입고, 더 많은 음식을 먹고, 벽을 둘러치고 불을 피우는 것이 그 일련의 일시적인 해법들이다. 이 해법들이 동이 나면 우리는 몸이 식어 죽는다.

생명[이런 경우에는 전체로서의 생명을 말함]은 상류 쪽으로의 헤엄치기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 생물학 교과서들은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생명체들은 주위의 에너지원의 수확을 통해 생존한다고. 식물은 햇빛을 수확하고, 초식동물은 식물을 수확하며 포식자들은 먹잇감을 수확하며 사첼ㄹ 분해하는 생물체는 모든 사체들을 수확한다. 이렇듯 다른 체계들의 희생이 있어야 우리 체계가 상류 쪽으로 나아가거나 적어도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크래플은 사슴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열역학 제2법칙의 근본적인 귀결, 즉 우리는 다른 것들을 수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유지한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제2법칙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 너머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수확하기를, 우리가 폐기물로 바꾼 것을 다시 그 경계 너머로 배출하기를 요구한다. 동시에 호랑이든 진드기든 식민화하는 국가든 외부에서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경계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경제적 활동 대부분은, 사라지는 시체를 서둘러 수확하는 구더기들과 똑같다. ‘청딱지개미반날개들이 잡아먹기 전에 주위 세계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될 수 있는 한 많이 취하라.’

크래플이 ‘사막에서의 죽음’이라는 슬라이드쇼를 디날리국립공원 방문객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방문객들은 이전에 지질학 강연을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수동적 수용의 태도로 등을 뒤로 젖히고 앉아있기보다는 기대하는 태도로 고개를 앞으로 빼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고 않아있게 사로잡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명강연가가 되기보다는, 아직 진행 중이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탐험을 서술했다.

이전에는 강연이 끝나면 박수가 나왔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직접적이고 활발한 관심을 보였다. 칭찬보다는 질문들이 크래플을 둘러쌌다. 지질학 강연 접근법이 에고의 영광을 증가시키는 데 더 이익이 되었지만, 크래플은 사람들이 어떤 복잡한 사안에 열렬히 참여하는 모습을 더 좋아했다. 이것이 그의 “교사로서의 길에서 평생 의미를 가지게 될 갈림길이었다.”

<8장 끝>

 




가이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

 



지난 8세기에 걸쳐서 영국정치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두 개의 북엔드가 있다. 한 쪽 끝에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심림헌장 관련 글로 http://commonstrans.net/?p=478,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961 참조.))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영국 총리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가 있다. 삼림헌장은 1215년부터 (1971년까지!) 생존을 위해 공통의 부에 접근하는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했고, 새처는 공통의 부를 훔치고 사유화함으로써 이 권리들을 없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사회제도를 1981년에 도입했다.

런던 소재 SOAS 대학의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최근 저서 『커먼즈의 약탈: 공적인 부를 공유하기 위한 선언』(Plunder of the Commons: A Manifesto for Sharing Public Wealth)에서 이 역사의 양끝 지점을 한데 모은다. 초점은 인클로저에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핵심, 즉 책이 선언하는 바는 요즘의 맥락에서 공적 자산 및 공공 서비스로서 주로 이해되는 커먼즈를 되찾는 것이다.

커먼즈는 영국의 ‘심층 역사’에서 거듭해서 등장했지만 대체로 커먼즈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커먼즈는 보통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의성 있는 정치 쟁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커먼즈를 그 원대한 역사적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시대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풍부하게 다룬 책을 마침내 우리에게 선물한 스탠딩에게 크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커먼즈의 성쇠에 관여된 아주 많은 다양한 가닥들—법률•토지•재산권•경제•문화•지식—을 종합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 커먼즈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적절하게도 스탠딩은 커머너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한 삼림헌장에 관한 장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스탠딩이 서술한 삼림헌장의 역사는 분명,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거의 잊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가장 간결하고 생생한 역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정의하는 많은 유형의 법(률)•인간권리•정치투쟁의 최초의 사례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술이다.

스탠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면에서 삼림헌장은 평민이 최초의 계급 기반의 요구사항들을 직접 혹은 그들을 대신하는 다른 세력을 통해 국가(국왕)에 제기하여 ‘자유인들’의 공통적인 혹은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서 간주될 수 있다. … 삼림헌장은 자유인들에게 생계수단에의 권리, 원료에의 권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정도로 생산수단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였다.

‘기원 서사’에 이어서 스탠딩은 교육•의료•토지•지식 등의 영역들에서 커먼즈가 오늘날 왜 그토록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그는 어떻게 토지 소유권이 부유한 소수들에게 집중되었는지를, 어떻게 공유림들이 목재를 약탈당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공원들과 공공장소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사유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커먼즈•사회커먼즈•시민커먼즈•문화커먼즈 및 지식커먼즈(스탠딩의 범주들)를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국가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적정 가격의 주택을 밀어내고 노숙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동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조금씩 진행되는 사유화’를 통한 국가의료서비스의 쇠퇴에 대해 알게 된다.

스탠딩의 이 저서의 큰 기여는 어떻게 인클로저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만연한 현상—그런데도 정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현상—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탠딩은 영리하게도 단지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유시장주의자들—토리당, 기업들, 투자자들, 새처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쟁점들을 부활시킨다. 『커먼즈의 약탈』은 800년 전에 국왕이 공유지를 몰수한 일에서부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새처/레이건의 잔인한 긴축정책들까지 직선을 그음으로써 사태를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1200년대에 영국 토지의 대략 50퍼센트는 공유지로 관리되었다. 오늘날 대략 5퍼센트가 공유지로 인정되고 있다. 예측 가능한 일단의 정치적 남용사례들과 부의 불평등 사례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중세 왕들과 현대 자본가들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양쪽 모두에게 커먼즈의 절도(竊盜)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진보’는 항상 민중의 부(富)의 강제적 강탈—자유시장 경제가 위장하고 탈명명화(ex‑nomination)하려고 (말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온 어떤 것—에 의존해왔다. 이것이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내가 커먼즈를 이해하는 바와 스탠딩이 이해하는 바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많은 ‘공공재들’과 정부 서비스를 커먼즈로 본다. 나는 고전적인 커먼즈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는 상향식 거버넌스(bottom‑up governance)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국가신탁 커먼즈’(state‑trustee commons) 또는 간단하게 ‘정부 서비스’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가 표면상으로 커머너들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혹은 (앞으로) 공유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해 나는 커먼즈를 국가가 아니라 커머너 자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살아있는 사회 체계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체제를 받아들이는 담론 내부에서조차도 공동자산으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연다. 그런 이야기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가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커먼즈의 약탈』은 두 개의 ‘커먼즈 헌장 조항’을 제안함으로써 커먼즈를 되찾기 위한 야심적인 어젠다를 제시한다. “사적인 부는 많은 것을 커먼즈의 존재와 약탈에 빚지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커머너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스탠딩은 쓰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커먼즈 펀드>(Commons Fund)를 설립하는 것으로, <커먼즈 펀드>의 기금은 사업에 사용된 공동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탁기금은 커머너들에게 배당될 배당금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은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 APF)로 입증되고 『자본주의 3.0』(Capitalism 3.0)을 포함하는, 피터 반스(Peter Barnes)의 많은 저서로 대중화된 구상이다.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은 광범하고 학구적이지만 서사들로 풍성하고 읽는 즐거움도 있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탁상공론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그의 책에는 시기를 딱 맞추는 미덕 또한 있다. 대다수 커먼즈의 운명은 영국정치에서 빠르게 국가적인 논의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만큼 공들여 잘 만들어졌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3)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당신은 어셈블리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하기와 번역이 의미하는 바의 변화를 언급하고, 말들의 전유(appropriation)를 중요한 정치적 행위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중의 기업가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정립합니다. 하지만 200년 넘게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왔던 기업가성(entrepreneurship)’과 같은 용어를 그렇게 전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한 전유 행위를 통해 비판이 약화되고 구분들이 흐려질 위험은 없을까요?

답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책이 출간되자마자 특히 이 이슈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의 작업에서 늘 말들을 되찾고 재사용하며 그 의미를 전도시켜왔습니다. 가령, 아마도 ‘제국’은 정치학의 역사에서 가장 학술적이고 전통적인 용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윤리의 일부인 말들을 전유해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되기는커녕,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언어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전도(顚倒)의 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위한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들을 되찾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업가성을 말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 혹은 ‘다중의 기업가성’을 말합니다.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을 말하는 것은, 노동의 거부를 말하는 것과 같은 잠재성과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결국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힘은 이와 같은 재전유의 행위에 있으며, 이때 전도(顚倒)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다중에게 군주론끝부분에서 제시된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으라고,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중으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요구이지요. 이때 본질적인 것은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to take power differently)’는 말입니다. 이 말로 당신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공통적인 것혹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르게는 평등 없는 자유인 권리개념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좌파가 제안하는 자유 없는 평등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라는 정식화는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바,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다중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을 코뮤니즘(communism)’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통주의(commonism)’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연대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답 : 왜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지 않냐고요? 아마도 그 말이 최근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남용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공통적인 것의 정치 기획을 다시 ‘코뮤니즘’으로 부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마이클이 아니라 다중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담론에서 연대가 어디에 위치하냐고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연대가 있습니다. 연대는 우리 담론의 원리적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대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중 세 가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1) 고독, 홀로 됨의 거부에 있어서 질료인으로, 2) 생산하는 협력에 있어서 작용인으로, 3) 사랑에 있어서 목적인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이론적 구성 전체의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이 다름 아닌 연대에 있습니다. ‘공통주의(commontismo, commontism)’는 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홀로 생산할 수 없으며, 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안들은 연대의 제안, 혹은 홀로 됨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제안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대를 정의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공통적인 것을 향한 발본적 이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대를 향한, 홀로 됨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와 끔찍한 공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거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끝장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진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면, 이 끔찍한 고독을, 그러나 또한 이 거대한 열망을 알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막은 모든 면에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다음 질문이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작(前作)들에서처럼,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오큐파이 운동들이 다중의 반란을 증명한다는 낙관적인 생각, ‘가능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아마도 처음으로, 오큐파이 운동들이 시도한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당신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향 전환, 즉 초기의 낙관주의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혁명의 이념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작업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해결방안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난 10년 간 오큐파이를 비롯한 여러 운동들이 부딪혔던 한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 운동들이 스스로를 제도로 번역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시도하거나 실제로 제도를 형성했던 곳에서도 모두 운동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로부터 탄생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출발한 상황을 배반하고 만 포데모스(Podemos)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모든 논쟁들을 자세히 따라가본 후 포데모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략과 전술 사이의 관계의 역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오직 전술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낙관적이냐가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하려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커먼즈 운동의 한계들을 살피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권력 장악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권력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했듯이, 이것은 온전히 ‘권력을 다르게 잡기’에 관한 것, 그리고 이 발본적인 이행/역전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포퓰리즘을 다룹니다. ‘피플(people, 국민)’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피플’ 개념은 홉스의 논리, 주권과 재현(대의)에 관한 부르주아적 노선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피플은 다중을 훼손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오직 그 목적만을 가집니다. 피플의 논리에 따르면, 다중은 주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사라지는 단일한 피플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합니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원본 표지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홉스에 맞서, 단호하게 다중(multitudo) 개념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질서가 형성될 때에도 다중의 자연적 권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에서 증명하려고 했듯이, 그리고 『어셈블리』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는 ‘다중’과 ‘공통적’(comunis)이라는 개념을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와 민주주의의 전체 이슈를 압축합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상력, 사랑 그리고 주체성이야말로 특이성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공통적으로 되는 특이성과 주체성, 스스로를 새로이 창안되는 제도로 번역하는 특이성과 주체성은, 공통주의를 요약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 현재의 디지털·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관련하여, 당신은 또한 비판에 대해, 당신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기술비관주의(techno-pessimism)라 부르는 것에 대해 숙고합니다. 당신은 근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은 오직 대공장 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발전국면과만 유효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의 비판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 비판의 한계는, 낭만주의 시기에 혁명적 이념과 해방의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계몽과 근대적 사유의 뒤집어진 상(), 계몽의 변증법역시 사로잡혀 버리고만 그 역상(逆像)과 관계된 것일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한계는 해방적인 근대 사유와 자본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까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의 대안적 근대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주요 용의자들로 간주했는데요 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가 그들의 비판적 작업에 빚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주의의 발전과정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1944)의 결론들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극단들, 극단주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당신은 한계로 데려가고 당신은 거기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밀폐된 우주를 개념화한 것입니다. 노동자주의는 이 밀폐된 우주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것을 부수어 열 수 있는지를 자문(自問)했습니다. 노동자주의 시절에 우리는, 그들이 멈춘 곳에서 멈추지 않고, 밀폐된 우주, 자본주의의 우주, 도구적 합리성이 넘쳐나는 우주, 통제와 억압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주를 출발점으로 삼되, 이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의 세계이며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이 밀폐된 우주를 강제로 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주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이 일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기 위한 쇠지렛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자식이지만, 또한 그것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주의에서(그리고 『어셈블리』에서도 역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에 맞서 재발견했던 것은 존재론, 계급투쟁, 주체화의 가능성입니다. 1968년 이전의 마르쿠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작업입니다. 그는 아도르노의 학생이었는데 197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형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작업인 『구성과 계급투쟁』(Konstitution und Klassenkampf)(사후 1971년에 출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하려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의 담론은 정치적 행동, 해방, 총체적 착취와의 단절을 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비물질적·지적 노동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치 역시 이러한 발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는 메를로 퐁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기원한 기본틀을 현상학과 맑스주의의 교차 속에서 발견합니다.

 

: 당신이 지식인, 사상가, 연구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미래 세대에게 과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답 :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 내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모든 것을 연결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 그것은 내가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철학자로서도, 사회학자로서도, 때로는 심지어 직업 정치인으로서도, 말하자면 내가 수행한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적으로 나의 코뮤니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맡지 않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코뮤니즘이 다시 사람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통주의 투사야말로 지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