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한계


  • 저자  :  Oil Change International
  • 원문 : “The SKy’s Limit” (2016.9) 
  • 정리자 : 정백수
  • 아래는 Oil Change International에서 낸 “The SKy’s Limit”라는 제목의 보고서의 ‘핵심 요약’(Executive Summary)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Oil Change International은 화석연료의 진정한 비용을 폭로하고 클린 에너지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연구·소통·창도를 행하는 기관이다.

 

핵심요약

 

2015년 12월에 세계의 정부들은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2°C보다 훌쩍 낮춘 1.5°C에 묶어놓는 데 동의했다. 이 보고서는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을 위한 이러한 경계설정이 가지는 함축을 최초로 검토한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핵심사항들은 아래와 같다.

◎ 현재 세계에서 가동하고 있는 유전, 가스전(gas fields), 탄광에서 생산되는 원유, 가스, 석탄에서 나오는 잠재적 탄소 방출은 2°C 이상의 온난화를 낳을 것이다.
◎ 석탄은 제외하고 현재 가동하고 있는 유전과 가스전의 매장량만으로도 세계는 1.5°C 이상 올라간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기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산을 감소시키는 한편, 그에 상응하여 클린 에너지의 규모가 커지면서 에너지 관련 일자리의 총수가 확대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기후정책방침 가운데 하나는 가장 간단한 것이다―더 이상 화석연료를 파내지 말자.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 화석연료 추출과 수송을 위한 새로운 기반 시설을 짓지 말아야 하며, 정부들은 새로운 허가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
◎ 주로 선진국들에서 일부 유전, 가스전과 탄광을 그 자원을 완전히 개발하기 전에 폐쇄해야 하며, 후진국들에서의 비(非)탄소 개발에 재정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 모든 화석연료의 사용을 하루아침에 멈추자는 말이 아니다. 정부들과 회사들은 화석연료 산업의 관리된 감소를 행해야 하며, 그 산업에 의존하는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에게 공정한 이행을 보장해야 한다.

2015년 8월, 파리 기후회의가 있기 바로 몇 달 전에 태평양 섬나라인 키리바티(Kiribati)의 아노테 통(Anote Tong) 대통령은 새로운 탄광의 개발과 탄광의 확대를 중지하기를 요구했다. 이 보고서는 그의 요구를 모든 화석연료로 확대한다.

 

이미 충분하다

 

파리 협정은 세계로 하여금 기후변화의 가장 나쁜 결과를 피하는 것을 돕고 이미 상당해진 영향에 대응하는 것이 목표이다. 여기 관련된 기초적인 기후과학은 단순하다. 방출된 이산화탄소의 시간에 따른 축적량이 지구온난화가 어느 정도로 일어나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이다. 이는 얼마나 많은 양의 탄소가 위험한 기온 한도를 넘지 않고서 방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탄소예산(carbon budget)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한도인 2°C 아래로 지구온난화를 제한할 상당한 가능성(66%) 혹은 1.5°C 목표를 달성할 절반의 가능성(50%)을 제시할 탄소 예산을 검토하고 있다. 화석연료 매장량―이미 알려진 추출 가능한 화석연료의 지하 비축량―은 이 예산을 확연하게 초과한다. 2°C 나 1.5°C의 한도가 가능하려면 각각 68%나 85%의 매장량이 지하에 남아있어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이미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에 있는 유전, 가스전, 탄광의 대략 30%의 매장량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필요한 유전 등이 이미 천공이 된 (혹은 천공 중인) 곳, 탄갱을 굴착한 곳, 송유관, 처리시설, 철로, 수출 터미널들이 건설된 곳들이다. 이러한 개발된 매장량은 두 주된 비에너지 탄소방출원인 토지사용 및 시멘트 제조로부터의 미래의 방출량과 함께 그림에 상세히 나와 있다.

‘탄소포집 및 저장’(carbon capture and storage, CCS)의 전망에 주된 변화가 없을 시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 이미 가동되고 있는 유전, 가스전 및 탄광에 있는 원유, 가스, 석탄의 양은 온난화를 2°C 아래로 묶어놓으면서 태울 수 있는 양보다 많다.
◎ 원유와 가스만 잡아도 그 양이 1.5°C에 묶어놓을 수 있는 절반의 가능성에 해당하는 양보다 많다.

 

구덩이에 빠지면 더 이상 파지 말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후 정책은 대체로 방출 지점에서의 규제에 집중했고 화석연료의 공급은 시장에 맡겼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제 더 이상 지탱 가능하지 않다. 추출의 증가는 낮은 가격, 기반 시설 잠금효과(lock-in), 왜곡된 정치적 인센티브를 통해 바로 방출의 증가를 낳는다. 우리의 분석은 화석연료를 추출할 수 있는 양에 엄밀한 한도를 부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오직 정부들에 의해서만 시행될 수 있다.

◎ 화석연료 추출과 수송을 위한 새로운 기반 시설을 짓지 말아야 하며, 정부들은 새로운 허가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

계속 건설하게 되면 2°C 상승을 초과하게 만들고/만들거나 화석연료 생산을 갑자기 중단했다가 나중에 다시 사용해야 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음 20년 동안 새로운 유전, 가스전, 탄광, 수송용기반 시설에 투자할 것으로 계획된 액수는 14조 달러이다. 이는 화폐의 대대적인 낭비이거나 자본의 치명적인 투입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지금 관리된 감소를 시작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기후 변화를 통해서든 좌초자산(stranded assets)(([정리자] 좌초자산(stranded assets)은 뜻밖에 혹은 때 이르게 평가절하, 가치하락을 겪거나 부채로 전환되는 자산을 가리킨다.))을 통해서든 커다란 경제적 비용 및 사회적 비용이 불가피하게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화석연료 개발의 중지를 향한 발걸음이 이미 내디뎌졌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탄광개발의 일시중지를 선언했으며 미국도 연방 정부 소속의 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다. 이 세 나라가 현재 세계의 석탄생산의 대략 3분의 2를 담당한다. 2015년에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화석연료 중에 일부는 땅 속에 놔두어야 한다며 키스톤 송유관(Keystone XL tar sands pipeline)을 거부했다. 그리고 새로운 화석연료 기반 시설과 관련한 의사결정들에서 기후 테스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석탄 생산의 일시중지를 영속적이고 전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원유 및 가스의 개발도 중단시키는 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화석연료의 개발을 위한 새로운 건설을 종식시키면 우리는 탄소 예산 내에 머무는 데 더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 협정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동시설들 일부가 조기에 폐쇄될 필요가 있다. 이 일에서 모든 나라가 기후변화를 일으킨데 대한 역사적 책임과 함께 자신의 행동능력에 맞게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 산업화된 국가들(선진국들)은 그 인구가 세계 인구의 18%이면서도 오늘날 탄소방출의 60%를 차지하며 기후문제 해결을 위한 재정자원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기폐쇄는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일어나야 하며 석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로운 건설을 멈추는 접근법은 정치적으로 실용적이지만, 발전된 화석연료 산업들을 가진 나라들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 나라들이 감당해야 할 정당한 몫에는 화석연료 없이 발전하는 길을 가야 하는 다른 나라들을 지원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에너지에의 보편적 접근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 일부 유전, 가스전, 탄광들이 (특히 부유한 나라들에서) 그 매장량을 다 꺼내 쓰기 전에 폐쇄되어야 하며, 후진국들의 비탄소 에너지 개발에 재정적 지원이 제공되어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생산은 토착민족들을 포함한 지역민들의 권리를 해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곳에서는 중단되어야 한다.

 

관리된 감소와 공정한 이행

 

새로운 건설을 멈추는 것이 하룻밤사이에 꼭지를 잠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존의 유전들, 가스전들, 탄광들에는 추출 가능한 화석연료의 일정한 비축량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축량이 소진되는 사이에 (조기 폐쇄도 포함하여) 추출률이 수십 년에 걸쳐 감소하는 점진적 이행이 병행될 것이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능한 클린 에너지의 확장율과 부합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 에너지원을 2035년까지 재생 가능한 에너지 50%, 그리고 2045년까지 80%라는 두 시나리오 아래서 단순하게 모델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어느 경우든 석탄 사용은 강철 생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계적으로 줄여서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한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증가는 기존의 유전·가스전들에서 추출이 계획되어 있는 원유와 가스의 양의 감소에 대략 상응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기존의 유전, 가스전, 탄광들이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고갈되는 동안, 클린 에너지가 그에 상응하는 속도로 증가될 수 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가 이런 속도로 확대되려면 정책의 뒷받침이 필요한 한편, 이는 기존의 경향들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에서―크든 작든, 부유하든 가난하든―클린 에너지가 이미 일정한 규모로 사용되고 있다. 덴마크는 그 전기의 40% 이상을 재생 가능한 원천에서 만들어내고 있으며, 독일은 30% 이상, 니카라과는 36% 이상이다. 중국은 현재 재생 가능한 원천으로부터의 발전의 절대량이 가장 큰 나라이며 그 발전량을 재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풍력과 태양력의 비용이 현재 가스나 석탄의 비용에 접근하고 있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비용이 이미 더 낮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확대는 취약한 전력공급망(weak grids)(([정리자]웹을 검색해보니 전문가들은 이를 일본을 따라 ‘약한 계통’이라고 옮긴다. 정리자는 알기 쉽게 그냥 ‘취약한 전력공급망’이라고 옮겼다.))을 가진 후진국들에서 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비탄소로의 이행을 지원해줄 기후재정이 중요하다.

수송의 경우, 전기 자동차들이 현재 주류로 진입하고 있으며 곧 휘발유나 경유를 쓰는 차들보다 값이 싸질 전망이다. 충분한 정책지원과 투자가 있다면, 클린 에너지의 성장은 화석연료 추출과 사용에서 필요로 되는 감소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린 에너지가 확실한 장점들―낮은 비용, 더 많은 고용, 지역 오염의 감소, 더 많은 재정적 수익―을 가지기는 하지만, 이행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에너지 노동자들의 숙련과 주거 위치는 새로운 에너지 경제에 잘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공동체 전체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래서 기후행동의 부정적 영향들을 최소화하면서 그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조심스럽고 공정한 이행이 필요하다.

정부들은 영향을 받는 에너지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을 위해 훈련과 사회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들은 에너지 노동자들에게 비(非)탄소 영역들에서 일할 기회를 주도록 에너지 회사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정부들 또한 탄소에 의존하던 지역들이 새로운 경제적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투자를 시작하는 것을 공동체들과 협의해야 한다. 기다리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계획과 실행이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 정부들과 회사들은 화석연료 산업의 관리된 감소를 솔선해서 시행해야 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에게 공정한 이행을 보장해야 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2월 25일 게시글 “Andreas Weber’s “Biology of Wonder”: Aliveness as a Force of Evolution and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사오년 전에 안드레아스 베버를 만났을 때, 나는 다윈주의의 정통 견해들에 도전하는 그의 대담함에 놀랐다. 그는 매우 근본적이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고 있는 현상인 ‘살아있음’(aliveness)을 과학이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삶(생명)이 세련된 진화하는 기계들의 집합이며 각자의 기계들은 자연이라는 자유방임적 시장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무정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신다윈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 더 알고 싶으면 ‘살림’Enlivenment에 대한 베버의 환상적인 에세이를 참고하라.)[각주:1]

 

베버는 풍성한 과학적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진화에 대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개략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경쟁과 협동을 공히 행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본래적으로 표현적이고 창조적이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의 드라마의 핵심은 모든 살아있는 체계들이 자신들의 개별성을 펼쳐가면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표현하고 세계에 적응하려는, 그리고 세계를 바꾸려는 탐구적 노력이다.

 

몇 개의 에세이들과 대중강연들을 제외하면, 베버의 글들의 대부분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핵심적 아이디어들의 일부가 이제 영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짜릿한 기쁨을 준다. 뉴쏘싸이어티 출판사에서 막 출판된, 그의 서정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엄밀한 책인 『경이(驚異)의 생물학―생동성, 의식, 그리고 과학의 변신』(Biology of Wonder: Aliveness, Consciousness and the Metamorophosis of Science)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각주:2] 원래의 독일어 글을 베버가 직접 번역한 ‘원산 영어’를 개선하도록 베버를 돕는 데서 나도 좀 역할을 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이 책을 생물과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이론과 연구를 공고히 하고 설명하는 획기적 성취로서 돌아볼 것이다. 『경이의 생물학』은 로크, 홉스, 아담 스미스 같은 정치사상가들이 제공한 문화적 틀이 어떻게 생물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준적인 다윈주의 생물학 서사가 어떻게 자연선택 및 기계로서의 유기체에 대한 생각들을 인간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투사했는지를 설명한다. 다윈주의와 ‘자유 시장’은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이제는 바뀌고 있다.

 

19세기 이래 자연에서 정서를 축출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했던 생물학은 이제 감정을 삶의 토대로서 재발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유기체들의 구조와 행동을 발견하고 싶은 열의로 인해 유기체의 내적 실재라는 문제를 얼버무려왔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유기체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며 발달경로들을 해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상상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새로운 세부적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테크놀로지가 미시적 수준에서 삶을 연구할 수 있게 하면 할수록 삶의 복잡성과 지성의 증거가 더 강해진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기체들은 여기저기서 기계적 조각들을 모아 조립한 시계들이 아니다. 유기체들은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있으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좋고 나쁜지를 느끼는 통합체들이다.

 

진화의 거대 서사에서 감정, 정서, 도덕성, 심지어는 영성(靈性)(spirituality, 정신성)도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주된 행위―진화를 진전시키는 냉혹한 수단인 추잡하고 무자비한 경쟁―에 비해 사소한 여흥 정도로 치부되어져 왔다. 실로 근대에 들어와서 ‘적자생존’이라는 생각은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사고와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베버의 과학자로서의 놀라운 주장은, 생물학이 살아있는 체계들을 마치 그것들이 유전적 청사진에 의해 (이러저러한 정도로) 추동되는 ‘작은 기계들’인 양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감정 자체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베버는 말한다. 그러나 이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 먼저 계몽적 사고의 핵심적 전제들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체계들을 다른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해야 한다.

 

현재 생물학은 분석의 주된 단위로서 개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명확한 인과관계 패턴을 찾는다. 생물학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는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내적 감정들, 의식, 의미 감각을 망각되어도 좋은 현상으로 본다. 비합리적이고 비가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측정될 수 없고 합리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우주의 거대한 지리-물리학적이고 생-물리학적인 힘들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세포 수준에서 복잡한 인간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주관적 감정이 근본적인 동력”임을 균형 잡힌 확신을 가지고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을, 다소 설명 불가능하게 정신, 영혼 등으로 알려진 어떤 주체적 ‘x 인자’를 동반하는 생물학적 기계로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은 주체성을 자연 전체에 걸친 근본적인 원리로서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은 박테리아 세포, 수정란, 저습지의 선충류(線蟲類)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가치에 따라 행동함을 발견한다. 유기체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그것이 그들의 육화된 자아의 더 나아간 정합성에 대해 가지는 의미에 따라 평가한다. 고도로 구조화된 질서를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세포의 자기생식조차도 우리가 세포를 목표를 지속적으로 좇는 행위자로서 인식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점(視點)을 ‘시적 생태론’(poetic ecology)이라고 부른다. 감정과 표현을 유기체들의 실존적 실재의 필연적 차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즉 단순한 부수 현상이라거나 인간 관찰자의 편견이라거나 아니면 기계 안의 유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들의 실재에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측면들로 보기 때문에, ‘시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과학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다시 짜면서 이 책은 계시의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는 접근 가능한 생물학 연구 보고들을 그 자신이 일인칭으로 풀어내는 통쾌한 이야기들과 결합시킨다. 늑대들, 깊은 숲 및 기타 자연현상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들이다. 독자는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이원론은 환원적이고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그리고 인간 외부의 세계와도 또한 경험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베버는 자연 세계가 생물학적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과학적 사실로서―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청한다. 자연 세계는 살아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감각적이고 맥동치는 망(網)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을 타자로서 따로 분리하는 정신적 경계들을 우리가 일단 녹여버릴 수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그리고 살아있는 지구와 항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자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이 점을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잘 표현했다. 환경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책들을 입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 핵심은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자체를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것들이 생태론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은 몇 가지 놀라운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만일 감정이 물리적 힘이고, 이 감정의 표현이 물리적 실재이며 이 실재의 의미가 유기체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이오영역(biosphere)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점에서는 예술적 표현을 닮은 것으로 상상할 때 살아있는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귀결이 나온다. 예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예술은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의 목소리인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무런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메시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실재의 본질이다······ 감정은 결코 비가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의 모습을 띠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로서 발현한다. 따라서 자연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감정으로서,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실재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우리를, 합리적 개인을 지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계몽주의 윤리의 한계를 보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가진 신체들이 다른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신체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주관적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생태론적 윤리의 토대이다. “느끼는 신체가 모든 도덕성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모든 좋고 나쁜 것의 기원이다”라고 베버는 말한다.

 

『경이의 생물학』은 커먼즈에 대한 이해와 깊은 함축된 연관을 가진다. 만일 감정이 결코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를 띠고 발현된다면, 그렇다면 커먼즈가 우리의 생동성(살아있음)을 재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호관계를 더 해독 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며 전체(the whole)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길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생태론적 커먼즈에서는 상이한 개인들과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다중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쟁과 협동, 동업관계와 약탈, 생산과 파괴. 그런데 이 모든 관계들은 하나의 상위법을 따른다. 길게 보면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허용하며 그 자기생산을 차단하지 않는 행위만이 증폭된다는 법이다. 개체는 전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조건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다. 생태적 자유는 이런 형태의 필연성을 따른다. 체계 안의 연관들이 깊어질수록, 그 체계는 거기 속한 개체들에게 더 많은 창조적인 생태적 지위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윤리는 이미 다양한 커먼즈들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그램 GNU/리눅스의 한 버전인 우분투(Ubuntu)의 이름은 말 그대로 보면 ‘인간-됨’(human-ness)을 의미하는 반투(Bantu)어 단어에서 왔다. 그 정신은 또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짧은 블로그 글로는 이 중요한 책의 풍요롭고 자극적인 통찰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경이의 생물학』에는 매력적인 과학적 발견들과 베버 자신의 ‘바이오시적인’(biopoetic) 감성들이 가득하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축축한 감상성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의 옹호자이다. 일인칭 주체성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학이다.[각주:3] 진지한 경험주의는 적어도 이만큼을 요구하는 것이다.

 

삶의 본성 자체에 대한 이 지극히 창의적인 명상은 시적인 동시에 과학적이다.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앞으로『경이의 생물학』이 우리의 육화된 자아들 내에 세워진 오해의 벽들을 허무는 일을 돕기를 바란다. ♣

  1. 이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86 그런데 베버의 에세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볼리어의 소개글이다. 베버의 에세이는 다음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www.boell.de/en/2013/02/01/enlivenment-towards-fundamental-shift-concepts-nature-culture-and-politics
  2. 볼리어는 사실 “full disclosure”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취약점 분석을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컴퓨터 용어인데, 왠지 이런 맥락에서는 ‘깔때기를 대자면’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볼리어가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 볼리어나 베버가 어느 정도 이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푸꼬가 말년에 한 철학 작업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가 ‘주체성의 일인칭 형태의 진실 말하기’이다



퍼블렙 랩과 풀뿌리 맵핑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와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가 편집한 Patterns of Commoning(2015)에서 트리스턴 코플리-스미스(Tristan Copley-Smith)가 집필한 ‘Public Lab’에 관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잘 모르는 영역을 소개하는 내용이라서 번역어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출판되어 저작권이 부여된 자료들을 제외하면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가 적용된다.

 

퍼블릭 랩

퍼블릭 랩(Public Lab)은 저렴한 오픈소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도구들을 만들어내어 시민들이 함께 환경문제들을 문서화하고 조사하는 것을 돕는 단체이다. 퍼블릭 랩은 일군의 느슨하게 연결된 활동가들이 BP의 기름유출 이후에 루이지애나로 떠났던 2005년에 시작되었다. 거기서 활동가들은 연을 사용하는 로우테크(lowtech) 기술을 사용하여 해안 기름 오염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이 단체는 국제적 공동체로 성장했으며 그 회원들은 자연환경을 더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이해하고 환경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퍼블릭 랩은 스스로를 비영리 조직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체로 본다. 그 상점에서 저비용의 오픈소스 감시키트들을 판매하는데, 이는 법적으로 기부로 간주된다. 이것이 퍼블릭 랩으로 하여금 그 감시 제품들의 판매에서 수입을 얻으면서 기본 자금을 확보하게 해준다. 퍼블릭 랩은 오픈소스 하드웨어의 개발자로서 누구라도 집에서 무상으로 도구들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퍼블릭 랩의 진정한 가치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로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풍선 매핑 키트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대단히 낮은 비용으로 (기름 오염이나 해안 부식을 매핑하기 위한) 대단히 높은 해상도의 항공사진들을 찍을 수 있게 해준다. 이미지들은 퍼블릭 랩의 웹사이트에 업로드될 수 있으며, 거기서 사용자들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연결할 수 있고 지도들이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서 분석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나오는 이미지들은 (만일 충분히 좋다면) 심지어 구글에 의해서 수집되어 구글의 매핑 서비스에 추가되기도 한다. (이는 오픈플랫폼 기업들이 커먼즈들에서 산출된 것을 종종 자신의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왜 많은 디지털 커머너들이 지금 커먼즈 기반 상호 라이선스로 선회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 사례이다.)

 

퍼블릭 랩은 유용한 오픈소스 도구들을 갖춘 충실한 공동체가 어떻게 디지털 커먼즈를 가치 있는 데이터로 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 웹사이트는 마치 거대한 공적 위키와 노트북의 혼종체인 양 편집이 매우 자유롭게 가능해서 모든 사람의 작업이 문서화된다. 공동체는 호기심 혹은 관심사에 의해 동기화되며, 퍼블릭 랩 웹사이트는 조사를 돕는 데 필요한 도구들과 정보에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로 나오는 발견들은 문서화·공유될 수 있고 정치적 변화를 위한 압력행사에 사용될 수 있다.

 

퍼블릭 랩의 공동창립자들 가운데 하나인 제프 워런(Jeff Warren)은 이것을 “힘의 언어를 말하기”(speaking the language of power)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항의의 수단을 통해 변화를 탄원하는 대신에―이런 탄원은 당국이 존중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공식적인 조사가 개시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게 하는, 사실에 입각한 강력한 정당성을 퍼블릭 랩 공동체가 산출한 확연한 데이터가 부여해주는 것이다.

 

퍼블릭 랩은, 오픈 데이터, 오픈 하드웨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가진, 정부의 정책입안과 시행에 영향을 미치는 힘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중요한 공동체 행동주의를 자신들이 발전시키고 있음을 깨달은 일군의 활동가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진화해 나온 기획이다. ♣

 

 

* 위 글에 이어 http://unterbahn.com/thesis/에 있는 제프리 워런(Jeffery Warren)의 글 “Grassroots Mapping : tools participatory and activist cartography”의 1장을 우리말로 옮겨본다. 잘 모르는 영역을 소개하는 내용이라서 번역어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밑줄은 번역자의 강조를 나타낸다. 제프리 워런(Jeffery Warren)의 이 글에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license가 적용된다.

 

 

 

풀뿌리 매핑―참여 지향의 도구들과 행동주의적 지도제작

 

1장 서론

 

1.1 풀뿌리 매핑의 정의 ― 도구들, 실천들, 혹은 공동체?

 

풀뿌리 매핑(Grassroots Mapping)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MIT 오픈소스 라이선스에 따라 http://github.com/jywarren/cartagen 에서 구할 수 있는 일단의 코드인가? 페루의 리마 혹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사용된 바 있는, 일단의 매핑 실행들 혹은 도구들인가? 아니면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고 이들을 묶어주는 웹사이트, 위키, 메일링리스트인가?

 

근본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지도제작(cartography)에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서 일반 사용자들이 매핑을 더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어주려는 시도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지도들은 국가와 산업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간주될 수 있다. 내가 만든 도구들과 기술은, 데이터의 수집에서 디지털본 지도들과 인쇄본 지도들의 편집과 출판에 이르기까지, 지도를 만드는 수단을 단순화함으로써 지도제작의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로써 내가 바라는 것은, 광범한 대중이 적당한 비용으로 지도를 만드는 능력이 아래로부터의 지도제작 행동주의에 힘을 실어주고 기존의 지도제작의 권력구조를 우회했으면 하는 것이다.

 

풀뿌리 매핑 프로젝트의 핵심은 기술들의 새로운 결합을 특수한 각 공동체들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들은 풍선들과 연들을 사용하는 저비용 항공 이미지생성 기술과 그 결과로 나오는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연결하여 지도로 만드는 새로운 온라인 도구로 구성된다. 이 도구들의 성공은 페루 리마의 공동체들에서 그리고 멕시코만의 기름 유출 위기 시에 이 새롭고 낯선 도구들을 기꺼이 사용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사용 잠재력을 보았던 단체들과 개인들의 노력과 신념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만자니타 ‘A’의 카를라 델 카르피오(Carla del Carpio of Manzanita ‘A’), 약물남용 방지를 위한 정보 및 교육 센터(CEDRO)의 에르네스토 페르난데스(Ernesto Fernandez)(이 둘은 페루의 리마에서 활동했다), 또한 리마의 에스쿠에랩(Escuelab)의 대니얼 미라클(Daniel Miracle)을 비롯한 몇 명이 포함된다. 또한 뉴올리언스에 있는 루이지애나 버킷 브리게이드(Louisiana Bucket Brigade)의 크리스 안신(Kris Ansin), 섀년 도스마건(Shannon Dosemagen), 앤 롤프(Anne Rolfes)가 포함된다. 이 외에도 지치지 않고 연과 풍선을 날리고 날마다 수마일 길이의 끈을 풀고 감았던 수십 명의 참여자들이 포함된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도구들이 참여자들에 의한 지속적인 사용에 응하여, 그리고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결과 입력과 협동을 통해 발전하고 진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1.1.1 항공 이미지의 사용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환경감시, 토지 보유권, 저널리즘, 상업적 이용 등 다양한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 청년들의 워크숍에서 실제로 해보는 학습과 공동체 계획을 강조하며 많은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위기 상황과 갈등 지역에서는 주문에 맞추어 지도를 제작하는 도구들 특유의 능력이 탐구되었다. 이 기술은 낮은 비용 때문에 저소득 혹은 개발도상 지역에서 그리고 지역 수준의 도시계획에서 더 광범하게 사용될 잠재력을 가진다. 자신의 집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은 공동체·환경 및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사유와 토론을 개시할 수 있다. 지역 공동체들에 관여하면서 그 공동체들로 하여금 그 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매핑은 원격감지가 특징인 노력들―사람들을 데이터로 취급하고 지도제작의 인간적 측면을 그럴듯하게 가리는 노력들―보다는 인간관계에 더 적절한 연관성을 띠게 되었다.

 

1.1.2 교육으로서의 풀뿌리 매핑

이 프로젝트가 널리 사용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와 도구를 소유하고 있는 다양한 참여자들은 다양한 교육자료들― 설명서, 온라인 비디오, 워크숍―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발전시켰다. 이 자료들은 페루 리마의 10-15살짜리들에서부터 웨스트버지니아와 켄터키의 환경활동가들에 이르는 광범한 청중을 대상으로 했다. 이러한 문서화 작업은 지난해에 수십 개의 워크숍들에서 내가 참여자들과 협동하고 그들을 가르치면서 발전했으며, 프로젝트 위키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그들의 작업, 비디오들, 메일링리스트들을 모아놓은 블로그로서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프로젝트들이 토론되고 비판된다.

조지아주의 쌘트레디아에서 풀뿌리 매핑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

1.1.3 공동체로서의 풀뿌리 매핑

 

카타겐 맵 렌더링 틀(the Cartagen map rendering framework)과 항공 이미지를 보정하는 카타겐 니터(the Cartagen Knitter)와 같은 디지털 도구들조차도 결국 광범한 매핑 공동체에서 동료들과 기여자들의 도움과 지원으로 구축되었다. 테크놀로지 프로젝트에서 이것이 규범이 되었다는 것이 이 작업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강점 가운데 하나는 특수한 욕구를 가진 공동체들과의 협동에서 발전했다는 점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도구들을 구축하는 것은 더 추상적인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과의 지속적인 소통만이 아니라 일련의 타협과 실용적 결정이 디자인 과정을 이끌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매핑 프로젝트는 특수한 욕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전했으며, 고립되고 순전히 학술적인 작업으로 검토되기보다는 그것이 염두에 둔 특수한 이용의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캡처

보정

출판

2-3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수평방킬로를 매핑할 수 있다.

사진들을 분류하는 데 1시간 이상, 최대 하루까지 걸릴 수 있다.

카타겐 니터에서 내보낸 것이 TMS 혹은 인쇄 가능한 GeoTiff를 생성한다. 웹으로 접근하기만 하면 된다.

 

 

1.2 도구들, 테크놀로지들 그리고 청중

 

풀뿌리 매핑 기획의 일부로서 개발된 도구들은 경험과 전문지식이 거의 없어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지도제작 도구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율적인 매핑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하는 열렬한 참여자들의 욕구에도 응한다. 따라서 도구들 가운데 일부는 사용하기가 간단하면서도 ‘파워 사용자들’ 혹은 코드를 자유롭게 쓰고 편집하는 사람들에 맞추어져 있다. 카타겐 틀이 이 범주에 속한다. 항공 이미지를 캡처하는 풍선 및 연 플랫폼들과 같은 도구들은 더 광범한 청중에게 맞추어져 있다. 카타겐 틀의 특수한 응용프로그램인 카타겐 니터도 그렇다. 다양한 도구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풀뿌리 매핑 키트(Grassroots Mapping Kit)는 최초의 항공 이미지를 캡처하여 가공하고 결과를 조합하여 디지털본 및 인쇄본 지도들을 출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 절은 필요한 도구들과 관련된 틀짜기, 의도, 청중에 초점을 맞추며, 도구들에 대한 전문적 논의는 6장에 들어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도제작자들이 연, 풍선, 헬륨 탱크, 디지털 카메라, 최소 200미터의 끈 및 기타 각종 기자재들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하려는 장소를 방문한다. 끈을 묶은 풍선이나 연에 카메라를 부착하여 1-10초의 주기로 사진을 찍도록 카메라를 설정하고 지역의 규정에 따라 고도를 200에서 2000미터 사이로 올려서 이미지를 캡처하도록 한다. 지도제작자들은 묶은 끈을 감아서 카메라를 회수하며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사용하여 가장 좋은 이미지들을 카타겐 니터 웹사이트에 업로드한다. 이 웹사이트에서 새로운 온라인 지도를 만들어내는데, 오픈스트리트맵(OpenStreetMap) 벡터 데이터나 바둑판식 기본 레이어를 준거로 삼아 각 이미지가 보정될 수 있고 최종적으로 지도로 조합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사용 의도에 따라서 온라인에서 보기 위해서 다른 웹사이트에 끼워넣어질 수 있고, 바둑판식 지도 서비스(a Tiled Map Service, TMS)로 내보내질 수도 있으며 지리TIFF(Geographic TIFF, GeoTIFF) 파일로 인쇄될 수도 있다.

 

풀뿌리 매핑 키트 및 그와 연관된 기술들은 프로젝트 위키인 http://wiki.grassrootsmapping.org에 완벽하게 문서화되어 있으며 추가적인 지원과 토론은 프로젝트 메일링리스트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과거에 진행되었고 현재 진행 중인 매핑 노력들의 광범한 문서화와 함께 http://grassrootsmapping.org에서 볼 수 있다. 인쇄물 문서 역시 각 키트에 딸리도록 고안된 5쪽의 삽화를 넣은 설명서와 몇 가지 체크리스트의 형태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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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 아래는 카탈로니아 개방대학(Universitat de Oberta Catalunya)의 블로그에 「열린 사유」 시리즈의 일부로 게시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1월 5일자로 게시되기도 한 볼리어의 글 “The Shift from Open Platforms to Digital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카탈로니아 개방대학의 블로그는 여러 형태의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장점과 한계를 탐구하는 곳이다. 전문 용어의 옮김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옮김과 다를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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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옮긴이 : 정백수

오픈액세스 플랫폼에서 관리되는 디지털 커먼즈로―이는 네트워크 기반의 자율생산1이 자신에게 잠재한 엄청난 가치를 실제로 창출하려면 감당해야 하는 주된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픈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미망

 

우리는 오픈 플랫폼을 더 많은 자유 및 혁신과 동의어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등 첨단 거대기업들의 부상에서 보았듯이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오픈 플랫폼은 시장 규범들과 일정한 사업모델들의 경계 내에서만 ‘무상이다’(free). 그렇다, 오픈 플랫폼은 사용자들에게 그 어떤 (화폐 형태의) 경비도 지출하지 않게 하면서 많은 가치 있는 서비스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될 때, 그것은 실제로 사용자가 바로 생산물임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우리의 개인 관련 데이터, 관심, 사회적 태도, 삶의 스타일, 행동방식, 심지어 우리의 디지털 신원까지도 플랫폼의 소유자들이 ‘소유’하려고 하는 상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플랫폼들은 그렇게 자애롭지 않다. 다수가 멱법칙(power law)2의 구조적 동학에 의해 강화되어 있는 기술-경제적 요새들로서, 지배적인 기업들로 하여금 온라인 활동의 일정한 부문을 독점하고 화폐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플랫폼에 기반을 둔 시장력(market power)3은 그 다음에 사용자의 삶을 감시하는 데, 때로는 개방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과 공유에 반(反)경쟁적 방식으로 장벽을 치는 데, 그리고 사용자들이 그러한 플랫폼에서 가질 수 있는 내용과 ‘경험’을 소리 없이 조작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4

 

‘오픈 플랫폼’이 가져오는 그런 결과가 전적으로 놀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들에서 익히 보아온, 배타적 자산의 획득을 도모하여 그 자산을 화폐화하려는 노력들을 나타낸다. 이 경우에 자산의 원천은 우리의 의식, 창조성, 그리고 문화이다. 앞을 더 길게 내다보는 자본가들은 (정해진 참여조건으로)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이 내용에 대한 배타적 지적 재산권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들이 제공하는 협소한 상업주의적 ‘자유’를 넘어서) 기본적인 인간적·시민적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물음은, 양도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공유된 문화적 공간들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만일 네트워크의 지배적 장소들이 투자자들, 기업 중역진, 시장연구기관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면, 우리의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서로 연결하고 혁신할 자유가 번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시장 너머의 삶과 연관된 인간의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표준적인 형태의 ‘사적인’ 기업통제를 넘어서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양태들을 개발하는 데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라인 공유의 혜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개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개인정보와 디지털 신원을 그런 정보의 신뢰할 만한 지킴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제3자에게 강압에 의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양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플랫폼으로 이동해야 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리드(David P. Reed)가 1999년에 발표된 독창적인 글5에서 보여주었듯이, 네트워크에 의해 창출된 가치는 ‘최고의 콘텐츠’에 기반을 둔 방송모델에서 P2P거래 네트워크로 이동하면서 상호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방송모델에서는 가치가 시청자들의 수인 n이지만, P2P거래 네트워크에서는 가치가 ‘최대 회원수’에 기반을 두며 수학적으로 n2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가장 가치 있는 네트워크들은 공유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집단으로의 결집을 촉진하는 네트워크들이다. (나는 그런 집단들을 커먼즈라고 부른다.) 리드는 “집단 형성 네트워크들”(group forming networks)―여기서 사람들은 “공통의 목적을 위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사(結社)”에 쓰일 도구들을 갖추고 있다―의 가치는 2n임을 발견했는데 이는 환상적으로 큰 숫자이다. 그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사유(私有) 네트워크 플랫폼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참여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발전시키는 데서 제한된 도구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픈소스 도구들을 사용하면 사업 모델을 전복시킬 것이다) 극히 초보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커먼즈의 잠재적 가치가 고의적으로 억눌려 온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부는 그 초점을 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 이동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상호작용과 거버넌스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들의 협동과 공유의 결실들을 수확할 수 있어야 한다.

 

 

카피페어 라이선스(CopyFair license)를 향하여

 

커머닝의 수단으로서 오픈 플랫폼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법적·기술적 혁신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획들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매우 유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디지털 커머너들에게 시장의 포획에 저항하고 집단적으로 창출된 내용, 공동체 규범, 그리고 신원의 종획에 저항하는 힘을 부여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기업의 플랫폼들은 생산자/소비자 관계로만 이루어진 단일한 사회적 문화(social monoculture)6에, 그리고 플랫폼 소유 회사의 사업모델(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시장 관계들)에 맞춘 사회적 행동에 특권을 부여한다. 이와 달리,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먼즈는 더 풍요롭고 더 다양하며 의미 있는 유형의 자유와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기본적 문제는, 디지털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유지되기가 힘든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커먼즈들은 적절힌 조직적 구조와 거버넌스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절한 재정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혁신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

 

현재 탐구되고 있는 하나의 가능한 기획은 예를 들어 때로는 ‘카피페어’(CopyFair)라고 알려진 ‘커먼즈 기반의 상호 라이선스’이다. 저작권 소유에 기반을 둔 이 라이선스는 커먼즈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무상의 공유를 허용하지만, 공동체의 작업의 결과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용료의 지불을 요구한다. 이 아이디어는 현재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개방-농업 하드웨어 개발자들 등에 의해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일정 계열의 정보나 창조적 작품의 상업적 발전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비상업적인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선스와 달리, 카피페어 라이선스는 상업화를 허용하지만, 필수적인 (화폐화된) 상호성을 기반으로 해서 허용한다.

 

 

블록체인의 잠재력

 

오픈 플랫폼들을 디지털 커먼즈로 전환시키는 또 하나의 도구는 비트코인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소프트웨어 혁신의 사례인 블록체인 원장(元帳)이다. 비록 비트코인 자체는 익숙한 자본주의적 기능들(세금회피, 투기를 통한 사적 축적)에 복무하도록 고안되었지만, 블록체인 원장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서 극히 다양하고 신뢰할만한 집단행동이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는 디지털 객체(digital object)(현재로서는 비트코인이다)의 진정(眞正)성을 은행이나 정부와 같은 제3의 보증자 없이 확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특히 어려운 집단행동 문제를 개방된 네트워크의 맥락에서 해결한다. 당신은 일정한 디지털 객체―비트코인, 법문서, 디지털 증명서, 데이터군, 투표한 표, 혹은 어떤 개인이 주장하는 디지털 신원―가 위조된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들(즉, 비트코인들)을 계속적으로 추적하는 검색 가능한 온라인 ‘원장’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원장은 방대하게 분산된 수평적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는 일종의 영속적인 기록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중앙집중화된 장소에 보관되는 데이터보다 훨씬 더 안전해진다. 네트워크의 수많은 접속점들에 등록되는 특정 비트코인의 진정성을 부패시킨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 때문에 최근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분산된 협동 조직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CO, 때로는 ‘분산된 자율적 조직들’이라고도 불린다)이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7 이 조직들은 본질적으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온라인 커먼즈이다. DOC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조직 내에서의 명시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데, 이는 블록체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보장될 수 있다. 이 권리들은 다시 기성의 법체계에 연결되어 그 권리들을 법적으로 인지되고 시행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블록체인이 어떻게 커먼즈를 촉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미국 전 연방소통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의장인 헌트(Reed Hundt)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태양광 발전을 사용하는 주택들을 커먼즈로서 연계시킨 분산된 네트워크들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블록체인 원장이 특정의 주민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생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소비하는지를 추적하게 된다. 사실 이 체계는 탈중심화된 태양광 그리드들8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고 태양광 미시그리드들 혹은 네트워크들 내에서 교환 매체 역할을 할 ‘녹색 통화’(green currency)를 가능하게 한다.9 그러면서 태양전지판의 채택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 기반의 아키텍처(architecture)10에 해당하는 것이다.

 

 

스마트거래(Smart transactions)

 

이러한 실험의 장은 디지털 커먼즈를 만드는 데 사용될 또 하나의 획기적 도구를 산출할 수 있다. 바로 스마트계약(smart contracts)이다. 이는 (TCP/IP or http 같은) 공유된 프로토콜의 아키텍처에서 작동하는 동적 소프트웨어 모듈들로서,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새로운 유형의 집단 거버넌스, 의사결정, 규칙 시행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생각의 초보적―이며 기업지향적인―형태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디지털 권리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DRM)가 그 하나인데, 이는 사용자들이 합법적으로 구매한 테크놀로지(DVD, CD 등)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한하는 능력을 회사에 부여하는 암호화/인증 시스템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협동의 힘이 분명해지자, 이제 진정한 과제는 디지털 인공물들을 잠그고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픈 플랫폼들에서 (특정의 기여자 집단이나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시행 가능한 방식으로 신뢰할만하게 공유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임을 많은 기술 혁신자들이 인식하고 있다.

 

기존의 법 아래에서도 시행 가능한 법 업무를 보는 ‘스마트한’ 법무 대리인을 배치하는 기술 시스템들을 고안하려는 많은 활발한 노력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물론 이 ‘업무’는 새로운 유형의 시장들을 발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새로운 유형의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두 영역은 서로 혼합되어 공동체를 위한 일과 시장 활동을 결합하는 사회적 혼종들을 창출할 수도 있다.

 

이와 연관된 소프트웨어 혁신 영역에서는 잘 알려진 협동 구조들을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과 혼합하여 온라인 시스템을 통한 집단적 협의와 거버넌스―‘커머닝’―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실험들로는 루미오(Loomio), 민주주의OS(DemocracyOS), 리퀴드피드백(LiquidFeedback)이 있다. 이들 각각은 온라인 네트워크들의 구성원들이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다소 복잡한 논의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 그 다음에는 집단이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서 참여자들이 구속력 있고 정당하며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결정들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자율생산자들의 네트워크들

 

그런 능력의 자연스러운 확대인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OVN)은 경계가 확연히 지워진 네트워크들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크라우드펀딩, 지식의 크라우드소싱, 공동예산마련을 신원 확인이 가능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들이다. 엔스피랄(Enspiral), 센소리카(Sensorica)와 같은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종류의 조직을 위한 운영체제”이며 “새로운 경제를 위한 파일럿 프로젝트”라고 불려왔다. 경계가 뚜렷한 공동체들의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탈중심화되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거버넌스, 생산 및 생계의 새로운 양태들을 촉진하는 디지털 플랫폼들이 OVN들을 구성한다. 누구든 기획에 기여하고 그 기여에 기반을 두어 보상을 받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들이 조직된다. 보상은 실질적 기여, 경험 및 기타 집단적으로 결정되는 기준에 의해 측정된다.

 

시장 기반의 활동을 피하는 ‘전형적 커먼즈’와는 달리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시장에 관여하는 데 단서를 두지 않는다. OVN들은 커먼즈 기반의 자율생산자들로서의 조직적·문화적 온전성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대규모의 협동과 연계가 이루어지고, 개인이 자원에 접근하고 자원을 사용하고 저자로서의 지위와 소유권을 가지도록 허용되면서도 공유된 부와 자산의 책임 있는 파수(把守)가 이루어지며, 공통의 원장 체계를 통한 개인적 ‘투입과 산출’의 세심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개인적 기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보상의 분배가 이루어진다. OVN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몇몇 주목할 만한 키워드들은 ‘잠재력의 동등성’(equipotentiality)11, ‘반(反)자격증주의’(anti-credentialism)12, ‘자기선택’(self-selection), ‘공동의 확인’(communal validation), ‘홀옵티즘’(holoptism)13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플랫폼 협동조합주의를 위한 새로운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창출하고자 하는 이 기획들은 아직 출현 단계에 있으며 곧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것과 같은 모임들에서 토론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그 기능의 온전함과 규모의 확대를 기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실험들과 발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들은,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는 플랫폼들―이것들은 참여의 조건을 정하며, 커머너들 사이에서 혜택을 주고받는 것을 촉진하지 않는다―에 대한 매력적이고 잠재적으로 획기적인 대안들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이 새로운 형식들은, 진정한 커머닝과 사용자 주권 및 통제권을 위한 더 신뢰할 만한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써 디지털 커먼즈―그리고 사용자가 추동하는 혼종화된 형태의 시장들―가 기존의 오픈 플랫폼들의 가치창출 능력을 곧 능가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에서는 ‘peer production’을 ‘자율생산’으로 옮기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53#footnote_53_2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한글 위키피디아] 멱법칙(冪法則, power law)은 한 수(數)가 다른 수의 거듭제곱으로 표현되는 두 수의 함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특정 인구수를 가지는 도시들의 숫자는 인구수의 거듭제곱에 반비례하여 나타난다. 경험적인 멱법칙 분포는 근사적으로만, 또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적용된다. [본문으로]
  3. 시장력(market power)은 경제학적으로 엄밀하게는 “한 기업이 재화 혹은 서비스의 시장가격을 한계비용 이상으로 올려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능력”(위키피디아)이다. 여기서는 그냥 어떤 기업이 시장에서 가지는 힘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본문으로]
  4. 네이버를 보라!! [본문으로]
  5. [원주1] 또한 David Bollier and John H. Clippinger, The Next Great Internet Disruption: Authority and Governance 참조. [본문으로]
  6. ‘monoculture’는 원래 농업에서 한 가지 작물만을 재배하는 ‘단작’(單作)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지금처럼 사회적 관계에도 사용되고 컴퓨터에도 사용된다. 컴퓨터의 경우에는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컴퓨터들이 모두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보안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컴퓨터 공동체는 공격에 취약해진다. 공격이 성공하면 한꺼번에 다 무너진다. [본문으로]
  7. [원주2] 스웜 펀드(Swarm.fund), 하바드 버크먼센터(the Berkman 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 뉴욕 로스쿨(New York Law School), MIT 미디어랩(the MIT Media Lab)과 관련된 사람들이 낸 보고서 『분산된 협동 조직들― 분산된 네트워크들과 규제틀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istributed Networks & Regulatory Frameworks) 참조. 또한 Rachel O’Dwyer, The Revolution Will (Not) Be Decentralized 및 Morgen E. Peck, The Future of the Web Looks a Lot Like Bitcoin 참조. 블록체인 및 이와 연관된 법적 문제들은 필리피(Primavera De Filippi), 최(Constance Choi), 클리핑거(John Clippinger)가 주최하는 일련의 워크숍 「블록체인 혁명/진화」(“Blockchain (R)evolution”)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더 광범한 해설로는 John H. Clippinger and David Bollier, From Bitcoin to Burning Man and Beyond: The Quest for Identity and Autonomy in a Digital Society (ID3, 2014) 참조. [본문으로]
  8. grid : 여기서는 전기를 공급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상호연결된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발전, 변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일본에서처럼 ‘(전력)계통’으로 옮기는 것 같다. 여기서는 그냥 음역한다. ‘grid’는 원래 우리나라의 석쇠처럼 금속선(금속막대)이 격자모양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나중에 전기 분야에서 축전지 안의 활성물질의 지지물·도선으로서 쓰이는 금속판을 가리키게 된다. 여기에 다시 추가된 것이 위에서와 같은 전기 흐름의 네트워크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9. 자신이 소비한 양보다 많은 태양광 에너지를 생성한 사람이 그 차이만큼을 코인의 형태로 가지게 된다. 태양광 에너지 발전에서 생기는 코인을 ‘SolarCoin’이라고도 부른다. [본문으로]
  10. 컴퓨터나 네트워크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컴퓨터 시스템의 기능성, 조직, 실행을 서술하는 일단의 규칙들과 방법들”을 말한다. 특정의 실행이 아니라 컴퓨터의 능력과 프로그래밍 모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정의도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정보기술에서, 특히 컴퓨터나 최근의 네트웍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프로세스와 전체적인 구조나 논리적 요소들 그리고 컴퓨터와 운영체계, 네트웍 및 기타 다른 개념들 간의 논리적 상호관계 등을 생각해내고 정의하는 등, 모든 곳에 적용되는 용어이다.”(http://www.terms.co.kr/architecture.htm) [본문으로]
  11. 이는 원래 심리학자이자 행동주의 과학자인 래슐리(Karl Spencer Lashley)의 개념으로서, 뇌의 한 부분이 손상을 입으면 다른 부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2. ‘자격증주의’(credentialism)는 실제 능력이 아니라 자격증을, 즉 ‘대한민국’식으로 말하자면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3. 이는 ‘팬옵티즘’(panoptism)과 대립된다. 팬옵티즘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분산되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만 조직에서 진행되는 일의 전체를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홀옵티즘은 구성원들 누구나 수평적으로 다른 구성원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고 수직적으로도 기획의 목적과 연관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pan’이나 ‘hol’이나 ‘전체’(whole)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원의 접두사이며, ‘opt’는 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ὀπ), ‘보이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tos’(ὀπτός)에서 왔다. [본문으로]

 




폭스바겐 스캔들, 사유(私有) 코드(proprietary code)1의 위험을 확인해주다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9월 25일에 게시된 글 “Volkswagen Scandal Confirms the Dangers of Proprietary Cod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을 위주로 거칠게 번역된 것이며, 전문용어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번역어가 달리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폭스바겐 스캔들, 사유(私有) 코드(proprietary code)1의 위험을 확인해주다

옮긴이 : 정백수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에는 거의 모든 논평자들이 언급한 바 없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하나 있다. 만일 오염통제 장비의 소프트웨어가 오픈 소스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은 소프트웨어가 비공개이고 사유물이며 외부의 검사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소비자들을 속이고 규제자들을 기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누구도 소프트웨어가 회사측이 주장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집요한 검사자들이라면 실제적 가스배출량과 인공적인 규제 테스트에서의 배출량을 노력을 들여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폭스바겐측의 조작행위가 폭로되었다. 그러나 이는 조작자들을 밝혀내는 방법으로서는 비싸고 문제도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공중보건 및 환경과 엄청난 연관을 가진 소프트웨어가 애초에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가?’이다. ‘잠긴 상자’(locked box, lockbox)2는 기업의 무법적이고 무책임하며 지저분한 행위를 불러온다. 그것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거의 누구도 볼 수 없게 보장해준다. 폭스바겐은 다른 할 수 있는 일보다도 비밀이라는 가리개를 사용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이 교훈은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짐 다이어(Jim Dwyer)가 프리 소프트웨어 법률가 이븐 마글런(Eben Moglen)―<프리소프트웨어 재단>(the Free Software Foundation)의 전 법무총책임자며 <소프트웨어 프리덤 법 센터>(the Software Freedom Law Center)의 창립자―을 “예언자”로서 반갑게 맞이했을 때 절실하게 다가온다. 다이어는 마글런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우리 모두가 20세기 초부터 알아왔듯이, 승강기들이 검사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고 승강기의 제조업자들이 승강기들을 검사가 가능하게 제조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이 현명한 공공정책이다. 만일 폭스바겐측이 차를 사는 모든 고객들이 차량의 모든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속임수를 쓸 생각을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드가 사유화된 것이기에 속일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을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안다. 코드가 해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미국 환경보호국(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 새로운 차량의 10-15%를 테스트할 수 있는 기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알고 있다. “셀프증명”이 법집행의 주된 수단이라는 말이니,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쁜 것은,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소프트웨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the Digital Millennium Copyright Act)에 따르면 저작권이 있는 소프트웨어의 암호화된 상태를 풀고 그 소스 코드를 들여다보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지난해에 몇몇의 오픈 소스 옹호자들이 “기능불량, 안전상의 결함이나 취약점들을 정직하게 검사하고 밝혀내고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 저작권이 있는 소프트웨어의 조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고 『와이어드』지(誌)(Wired)는 전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자동차 업계는 이 아이디어를 짓눌러버렸다. 코드에의 공개적 접근은 “안전과 무사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폭스바겐 스캔들은 안전에의 실질적이며 더 큰 위협은 대기업들이 통제하는 사유 코드로부터 오지 코드의 공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기만술책을 숨기기 위해서 ‘잠긴 상자’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기업들을 단속하는 일에서 정치적으로 타협적이고 예산부족으로 절절 매는 정부기관들에 의존해야 하는가? (폭스바겐의 사기행위는 여러 해 동안 진행되어 왔다.) 왜 극도로 효과적이고 투명하며 실질적으로 무상의 단속형태인 ‘오픈 소스 코드의 의무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2008년 금융 사태 이후에 몇몇 총명한 사람들이 <증권감독위원회>(the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가 수행하는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감독에 대하여 마찬가지 주장을 했다. 왜 핵심적인 금융 통계들의 공개를 의무로 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공개적 데이터 분석법을 사용하여 금융시장에서의 위험한 경향들을   <증권감독위원회>보다 더 빠르게 포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폭스바겐 사태는 왜 오픈 코드가 자동차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더 환경친화적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비행기, 의료기기, 자동차의 ABS(잠김방지제동체계)와 스로틀 통제에도 오픈 코드를 쓰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마글런은 묻는다. 오픈 소스야말로 범죄적 해킹과 기업의 사기행위를 공히 막아주는 최고의 방책인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정부의 규제자들에게 보내는 메모 : 공공의 안전과 환경에의 순응을 현재의 비용의 몇 분의 1을 들여서 그리고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증진하고 싶은가? 중요한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오픈 소스 코드를 의무 규정으로 하라. ♣

 

  1. [위키피디아] 사유 소프트웨어(영어: proprietary software) 또는 클로즈드 소스 소프트웨어(영어: closed source software)는 저작권 소유자의 예외적 법적 권한 하에 허가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반대말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저작권을 갖는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특정한 조건으로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권한이 주어지는데, 수정, 다른 곳으로의 배포, 역공학과 같은 기타 이용은 제한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소프트웨어를 기술적으로 변형하거나 변조할 수 없도록 저작권을 통해 소스 코드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이진 파일 형태로만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보통 그러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는 제작사의 기업 비밀로 간주된다. 제 삼자가 소스 코드를 사용해야 할 때에는 비공개 협약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2. 여기서는 어떤 대상이 기업의 사유재산으로 규정되어 다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국가의 사멸 3.0

 


* 아래는 P2P 재단 블로그에 2018년 1월 25일 자로 게시된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의 글 “Withering Away of the State 3.0.”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 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를 따른다.


 

며칠 전에 우리는 프랭크 파스콸레(Frank Paquale)의 주목할 만한 발표를 소개했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우버 혹은 에어비앤비와 같은 새로 등장한 ‘넷지배’(netarchical) 기업들이 이전에 ‘국가’와 ‘정부’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공적 권력—그 책임성이 때로는 매우 미미했을지라도—을 그가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함을 보여주었다. 이 효과는 토큰화된 경제(the tokenized economy)의 출현 및 성장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 경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토큰 경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발자들과 창조계급이 시장 가치를 주식보유자들로부터 재포획하고 분산된 플랫폼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新)길드 체제를 창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토큰들은 실로 플랫폼들에서 디자인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시장가치를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큰 기반 기획들은 시장 경제의 추출적 기능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며 그 분산된 다자인에도 불구하고 멱함수 법칙(power law)의 동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등하기만 한 구조들은 희소한 자원을 위한 경쟁으로서 디자인된다면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과두제를 향해 진화한다(멱함수 법칙에 의한 집중, 즉 반복될 때마다 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앙집중화된 넷지배 플랫폼들과 비트코인 및 기타 많은 (모두는 아니다!) 토큰 기반 블록체인 응용태들과 같은 이른바 ‘분산된’ 아나키즘적-자본주의적 구조들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책임성 없고 비민주적인 사적 ‘화폐’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진보적 도시들과 쇠퇴하는 국민국가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초국적 권력을 가진 ‘기업 주권체들’(corporate sovereigns)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새로 출현하는 국민 포퓰리즘[우익 포퓰리즘]의 권위적인 해결책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복지 지향적인 국민국가를 부활시키고자 할 뿐인 좌익 포퓰리즘의 시도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특히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맥락에서 그렇다.

어떤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안쪽에는 밝은 희망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국가의 ‘사멸’을 둘러싸고 좌파의 해방론적 전통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에 새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곧바로 철폐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 대신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철폐하는 것은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군사화된 지배계급의 거친 권력(준군사적 군대 등)으로 대체하자는 처방일 뿐이라고, 내 생각에는 옳게,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상한 것이, 노숙자들이 경찰의 저지가 없이 빈 집을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소유자 계급이 고용한 준군사적 군대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국가의 사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점진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사회민주주의 버전)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국가기능을 점차적으로 대체한다는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는 맑스가 그의 2단계론에서 표현한 바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교환논리와 국가의 역할에 의해 공히 특징지어지면, 둘째 단계만이 별도의 국가기능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역설은 이 더 근본적인 시나리오의 메아리가 기업 주권체들과 자유방임주의적 정신을 가진 토큰 경제의 전술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유화된 상호화’ 모델이 가진 우월한 효율(즉 공급과 수요를 효과적으로 서로 맞추는 사적인 플랫폼들), 사용자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과 인간의 행위를 은근히 자극하는 능력, 그리고 이 플랫폼들에서 ‘잉여 가치’를 직접 빨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이전에 공적 부문이 담당했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라이드셰어링이 대중교통과 경쟁한다든지 아니면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공유가 규제를 받는 호텔 등을 대체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세계 전체가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나 기타 권리들은 사유재산의 절대적 권리를 통해 부식되고 있다.

‘국가의 사멸’은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적 시나리오에만 속하지 않는다. 사실 넷지배 플랫폼들의 침탈적이고 규제 받지 않는 관행들은 국가의 디스토피아적 해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P2P재단의 우리들은 더 나은 미래, 해방적 힘들이 환경 및 평등 문제를 풀어가면서 관료화된 국가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하도록 이 과정을 해킹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로 도시 삶의 사회적·환경적 평형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주도하는 기획들에서 이미 기능적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거버넌스와 소유의 협력적 형태들은 잉여를 스스로의 발전에 할당할 수 있고 기여자들의 생계를 창출하는 데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협력적 생태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면) 넷지배 플랫폼들을 협력 능력에서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의 최근의 보고서 『어번 커먼즈 이행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에서 개괄한 바 있다.

우리의 지도그리기와 플랑드르의 헨트(Ghent) 시의 500개의 어번 커먼즈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했듯이, 거의 모든 자급체계들(이동성, 주택 등)이 현재 아직은 주변적이지만 점증하는 새로운 커먼즈 중심적 대안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지역들처럼 헨트와 플랑드르에서도 커먼즈 기반 기획들이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그러나 사유화된 플랫폼들과 달리 이 기획들은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며 종종은 단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단편화를 해결할 것인가? 다음은 이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다.

· 모든 자급체계에 대해서 그런 자급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저장소가—무니라이드(MuniRide)와 페어비앤비(FairBnB) 유형의 해결책을 위한 일종의 깃허브(github)가—있다고 상상하자.

· 이 해결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들, 협동조합들, 심지어는 노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P2P 혹은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을 전지구적 규모로 키우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 지역적으로, 가령 도시나 바이조이역의 수준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연합들은 다중이해관계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창출한다. 이 플랫폼들은 전지구적 소프트웨어 저장소들을 사용하지만 이 저장소들을 지역의 맥락과 필요에 맞추며 또한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써 공통의 코드 베이스(code base)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플랫폼의 모든 잉여는 원거리 소유자들의 배당금으로서가 아니라 기반시설의 공동개발과 모든 기여자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재투자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넷째 층은 교환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산이다. 실로 이 단계에서 어번 커먼즈들은 재화를 다양하게 분배하지만 재화 자체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서술한 전지구적 커먼즈가 마이크로팩토리들(microfactories, 초소형 공장들)을 통해 재분포된 지역에서의 생산과 부합하는,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생산체계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이크로팩토리들은 열린 협동조합들이기도 하다. 즉 자신들의 구성원들로부터 가치를 포획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혜택을 주는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전념하는 협동조합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사유화된 플랫폼과 추출적 토큰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자연에 남기는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토큰을 기여상의 정의를 위해 다시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협력적 상호화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반시설의 상호화가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며, 이는 지식의 완전한 공유를 보장하면서도 보상의 더 정당한 분배와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성공의 열쇠는 초지역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의 공간적 혹은 지리적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역(local), 도시, 바이오지역의(bioregional) 기획들은 그 사용자 기층에 가까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교환한다.

· 그러나 초-지역적, 초-국가적 지식 베이스들을 사용한다.

· 참여자들은 지역의 수준에서 생산하지만 초-국가적이고 평등한 지식-길드들과 전지구적 이고 초국적인 덕행적(entredonneurial)(([옮긴이] ‘entredonneurial’은 ‘중간으로부터 취하는’(‘taking from in between’)이라는 의미를 가진 ‘entrepreneur’에 대응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으로서 ‘중간에 주는’(‘giving to the in between’)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전까지 일단 ‘덕행적’이라고 옮긴다.))연합들을 조직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진보적 다수의 역할은 이 지역적, 초-국가적 기반시설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환경적으로 균형을 갖춘 지속적인 자급체계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자급체계들은 그—이 경우에는 민주적이기도 한—기능적커먼즈 거버넌스 덕택에 사유화되고 추출적인 초국적 권력구조들을 수행의 측면에서 능가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영토의 수준에서 메타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파트너국가로 변형되어야 한다. ‘파트너국가’는 현재의 국가장치를 하루아침에 마법적으로 변형할 것을 필요로 하는 이행이 아니다. 이는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연계를 통해 관리되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적 거버넌스 배치를 진보적 연합들이 승인하고 촉진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파트너국가는 또한 커먼즈 지향적 대안에 공감하고 그것을 지원할 공무원들과 정치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행정 구조의 모든 틈새 영역에 모든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다. 파트너 타운들, 도시들, 바이오지역들, 혹은 더 광범한 초국적 구조들을 생각해보라. 공적 영역과 커먼즈가 연계한 협력적 형태의 자급이 개시되고 성장하는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참여에 뿌리를 둔 더 민주적인 형태들에 의해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능들을 사멸시키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우리가 국민국가보다는 새로운 초-국가적 구조들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실로

1.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국가-국민이 하나로 통합된 구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발굴한 이중 운동의 논리가 적용된다.

2. 시장 기능이 국가와 시민의 규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때면 언제나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것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함입시키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낳았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초-국가화된 자본의 경우에 국민국가의 규제는 미미해졌으며 우익의 국민 포퓰리즘과 좌익의 사회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을 실질적으로 다시 잡으려면 초-국가적, 초-지역적 수준에서의 대항-헤게모니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은 소식은 이 힘이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P 동학과 커먼즈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기타 전지구적 생산공동체들이 부상하고 있다.

· 전지구적 기업가 연합이 이 오픈소스 지식 베이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수가 의식적으로 생성적인 연합이 되어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커머너들의 생계에 대한 지원을 생성하고자 한다.

· 도시들의 (그리고 협동조합들, 노동조합들, 윤리적 자본의) 전지구적 연합은 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공통의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여 이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전지구적 기반시설들을 떠맡는 전지구적 트러스트들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사멸 3.0이다. 즉 국민국가 수준 너머에서 수립된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능적 거버넌스이다.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3년 5월 28일자로 게시된 글 “The Science of “Enlivenment” and the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의 전달을 위주로 했으며 세부에 완벽을 기하지는 못했다. 일부 중요한 용어들의 우리말 번역어는 잠정적으로 택한 것으로서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2013년 5월 28일

 

지난주에 열린 <경제학과 커먼즈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도발적인 논의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혼합한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에 대한 안드레아스 베버의 비판이다. 바이오경제학은 현재의 경제사상, 공공정책, 정치학에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다. 문제는 최근의 생물학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이 내러티브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자연계와 삶 자체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의 새롭고 더 존중할만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베버는 그 대신에 ‘인간 이상(以上)의 세계’(more than human world)라는 상이한 비전을 가리키고 우리의 정치경제를 조직하는 커먼즈 기반의 방식을 가리키는 ‘살림’(enlivenment)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안한다.1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독립 연구자 안드레아스 베버는 이론생물학자이며 생태철학자이다. 그는 ‘의미로서의 삶’(life as meaning)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탐구하는데, 이는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이라고 알려진 생물과학들에서 하위 분야에 해당한다. 그 아이디어는 이렇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은 외부의 다양한 비인격적인 힘들에 반응하는 단순한 자동기계들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유기체들이며, 여기서 그 주체성과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주체성이야말로 생물학적 진화의 불가결한 부분이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베버의 「살림― 자연, 문화, 정치라는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가 막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털어놓기 : 나는 이 텍스트에 대해서 베버에게 편집상의 조언을 좀 주었다.)

 

전통적 생물학에 대한 베버의 불만은. 그것이 다름 아닌 삶(life)을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전통적 생물학은 개인, 합리성, 경쟁이라는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삶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 문제를 다룰 수조차 없는 환원주의적 논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유기체가 “주체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의미를 생산하는, 물리적 차원 이상의 차원에 있는 정감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생물과학들은 다음의 물음들을 묻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적 욕구는 무엇인가? 자연의 질서와 우리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아니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욕구를 위해서 혹은 시장을 위해서 어떻게 물건들을 생산하는가? ······ 삶이란 무엇이고 거기서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결합한 ‘바이오경제학적 세계관’은 개인들, 경쟁, 효율, 성장이 자연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는 이 기본 전제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물권(biosphere)은 효율적이지 않다. 온혈동물들은 97퍼센트 이상의 에너지를 오직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비한다. 광합성은 7퍼센트라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은 효율을 달성한다. 물고기, 양서류, 곤충들은 수백만 개의 알을 낳는데 이 가운데 매우 소수만이 생존한다.”

 

생물권은 항상 증가하지도 않는다. 생물매스(biomass)의 양은 상당히 불변적이다. 경쟁이 새로운 종의 발생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 입증된 적도 없다. “종들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종들은 뜻밖의 변이를 통해, 그리고 공생과 협력을 통해 개체군으로부터 한 집단이 두드러지는 것을 통해 발전한다······” 바이오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처럼 자원의 희소성이 종의 창조적 다양화를 낳는 것이 아니다. 자원의 희소성은 다양성과 자유의 궁핍화를 낳는다.2

 

그런데 만일 표준적인 다윈주의적 내러티브가 불완전하고 그 방향이 비뚤어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진화와 삶 자체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베버는 자신의 대안을 ‘살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깊이 뿌리를 내린 ‘계몽’의 형이상학을 ‘업그레이드’한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인의 합리성과 경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가 ‘의미로서의 삶’이라고, 혹은 ‘바이오시학’(biopoetics)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이야기로 보강해야 한다. 새로 출현하는 생물학의 새로운 상(像)에서는 (점점 더 경험적 연구에 의해 확인되는 바이지만) “유기체들이 더 이상 유전자 기계로 간주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산출하는 물질적으로 구현된 과정들로서 간주된다. 각 세포는 ‘하나의 정체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가장 단순한 유기체도 자신을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여 스스로 더 충만한 삶을 창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물질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삶은 움직일 수 있을 뿐 수동적인 물리적 물질(inert physical matter that is animate)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해당한다. 그 요체는 “스스로를 산출하는 의미심장한 자아”이다. 삶은 특수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주체적/물질적 과정에 해당한다. “스스로를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자 하는 체계는 자동적으로 관심들, 일단의 관점들을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아를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체를 가진 주체가 된다.” 삶 자체는 주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역설이지만, 그 역설이 삶의 본질에 핵심적이다.

 

진화와 살아있는 체계들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힘으로서의 주체성―이것이 ‘살림’ 뒤에 있는 근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우리의 내적 삶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내적 삶은 진화의 거대한 서사에서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추동력이다. 만일 시장경제학과 근대가 우리의 주체성과 정신성을 마치 흔적기관처럼 주변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제쳐놓았다면, 바이오시학은 우리의 주체성이 진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우리의 창조성과 자유에 핵심적이고 삶 자체의 거대한 전진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경제학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광범하게 영향을 미치는 함축을 가진다. 자연을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조작할 수 있는 수동적인 죽은 물질로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이 타자가 아니라, 즉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오픈소스 커먼즈에 해당한다. 배타성이나 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실로 ‘개인’과 ‘집단’의 이분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통합되어 있고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은 더 작은 유기체들이 하나로 뭉쳐진 ‘초유기체’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깊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베버는 이런 생각들로부터 ‘사이존재'(interbeing)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이는 자연보호주의자 존 뮤어(John Muir)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는 생태학적 원리를 나타낸다. 물질적 자원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별도의 분리된 차원에서 외적인 힘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늘 정밀하게 다듬고 있는 (비물질적) 의미에 연결되어 있다.

 

‘살림의 경제'(enlivened economy)는 살아있는 자연과정들 사이에 이러한 종류의 관계들을 증진시키는 경제이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의 안정되고 장기적인 관계를 얻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커먼즈의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자연이 가진 인간 이상의 측면들에 관여하게 해줄 존중할만하고 지속 가능한 모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살림’에 대한 베버의 설명은 확실히 논쟁적이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적 전제들 가운데 일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과학, 정치, 경제, 그리고 커먼즈를 가로지르며 그 방식은 분명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글은 또한 오해될 가능성이 높고 그 함축들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 예의 컨퍼런스에서 한 질문자가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 한 사례이다. 물론 우리는 많은 중요한 의미에서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실질적인 생물학적 실존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의식, 도덕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살아있고 숨을 쉬는 물질적 유기체들에서 구현된다. 표준적인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는 이 영역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베버의 설명은 경제인(homo economicus)이나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생물과학들의 최근의 발견들은 커먼즈와 ‘인간 이상의 세계’가 삶 자체의 또 다른 측면들임을 확인해주는 듯하다. 한편 근대 문명의 형이상학은 자연을 ‘죽은 물질’로 본다. 이제 살아있는 것들의 내적 주체성을 인정하고 되찾음으로써 이 죽은 물질을 ‘살릴’ 때가 되었다.

 

이 게시글로는 71쪽이나 되는 논증을 담은,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베버의 글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다. 당신이 그의 글 전체를 다 읽는다면 세상을 결코 전과 같은 식으로 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을 읽으면서 로렌스의 무의식의 판타지아(Fantasia of the Unconscious, 1922)의 몇 대목이 떠올랐다. 로렌스는 과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기 바란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은 우리에게 그다지 열려있지 않은 거대한 과학의 장이 존재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내가 말하는 것은 삶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살아있는 경험과 확실한 직관의 데이터 위에 수립된 과학이다. 이것을 주관적 과학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불러라. 근대의 지식을 낳은 우리의 객관적 과학은 현상하고만 그리고 현상의 인과관계하고만 관여한다. 나는 우리의 과학[즉 객관적 과학]에 대해서 반대하고 싶은 게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나 앎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능성의 전체 범위를 과학이 다 포괄한다고 보는 것은 나에게 미숙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과학은 죽은 세계의 과학이다. 생물학조차도 삶을 고찰하지 않고, 삶의 기계적 기능과 도구만을 고찰한다.

삶 자체에 거대한 양극성이 있다. 삶 자체가 이원적이다. 그리고 이원성이란 삶과 죽음이다. 죽음이란 그냥 그림자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음성적 실재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물질’(Matter)과 ‘힘’(For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삶은 개체적이다.3 늘 개체적이었고 항상 개체적일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개체들로 구성되며 항상 모든 것의 시작에는 그랬다. 제1의 실재가 살아있는 온전한 개체들이 아닌 그러한 우주, 코스모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관념론자들이나 과학자들 ― 이들은 정말 똑같다―이 원자니 삶의 기원이니 우주를 이해하는 기계론적 단서니 하는 것들에 대한 허튼 전문용어들을 늘어놓기를 멈출 때이다. 그런 것은 없다.

나로서는 삶이, 삶만이 우주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살아있는 개체들이 삶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항상 그러했고 항상 그럴 것임을 안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enlivenment’는 뒤에 나오는 ‘Enlightenment’와 대조된다. ‘인라이븐’과 ‘인라이튼’으로 두운과 각운이 서로 다 맞는 단어들이다. 양자의 관계는 조금 뒤에서 설명한다(베버의 글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사 ‘enliven’은 ‘life’의 동사형이므로 말 그대로 하면 ‘살게 하다, 살리다’의 의미이다. 일반적으로는 ‘활기를 띠게 하다, 활기를 부여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베버에게서는 말 그대로의 의미가 더 맞다. 그래서 여기서는 ‘Enlivenment’를 ‘살리다’의 명사형인 ‘살림’으로 옮겼다. (여기에 맞추자면 ‘Enlightenment’는 ‘밝힘’이 사실상 ‘계몽’의 뜻― 어둠을 깨다―이 이와 유사하다.) ‘살림살이’의 ‘살림’이 어원상으로는 ‘살리다’의 ‘살림’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살림살이’의 ‘살림’은 이 글에서 비판하는 바의 ‘바이오경제학’에 종속된 말이 되어버렸다. 원래의 의미를 되찾는, 아니면 그 온전한 의미를 돌려주는 일이 ‘살림’의 경제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biopoetics’는 어원대로라면 ‘삶의 창조’라는 의미를 가진다. [본문으로]
  3. 로렌스에게 ‘individual’이란 말은 명사로 사용하든 형용사로 사용하든 ‘특이성’(singularity)의 의미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6?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블록체인(blockchain) : 온라인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인프라

* 아래는 2015년 3월 4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The Blockchain: A Promising New Infrastructure for Online Commons를 거의 번역에 가깝게 정리한 것이다.

블록체인(blockchain) : 온라인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인프라

비트코인(Bitcoin)은 투기와 일부 통화교환 회사들의 문제 있는 행동들로 인해 참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단점이 무엇이든, ‘분산된 원장(元帳)’(distributed ledger) 혹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알려진 그 ‘엔진’에는 상대적으로 거의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비트코인에 대한 피상적인 논의들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개방된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커머닝(commoning)의 미래에 엄청나게 중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상의 약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비트코인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 단체와 같은 제3의 보증자 없이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방된 네트워크 맥락에서의 골치 아픈 집단행동 문제(집단 내에서 개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해준다. 어떻게 어떤 비트코인이 가짜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 혹은 이 생각을 더 확대하면 어떻게 어떤 문사, 증서, 데이터집단이―혹은 투표나 어떤 개인이 주장하는 ‘디지털 신분’이―날조된 가짜가 아니라 ‘진짜’임을 알 수 있는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비트코인들의 모든 거래를 계속 추적하는 검색 가능한 온라인 ‘원장’을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원장은 시간당 약 6회 업데이트되며 업데이트될 때마다 ‘블록’(block)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일단의 거래들을 원장에 통합한다. 블록체인의 대단히 혁명적인 측면은 그 정보가 네트워크에 있는,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모든 이에 의해서 공유된다는 점이다. 원장은 방대하게 분산된 수평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는 영속적인 기록과 같은 것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이 기록을 중앙관리되는 장소에 보관되는 데이터보다 훨씬 더 안전한 것으로 만든다. 네트워크상의 그토록 많은 접속점들(nodes)에 분산되어 있는 원장을 손상시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비트코인이 진짜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커먼즈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있을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분산된 협동 조직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하는 중요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탈중심화된 자율적 조직들’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분산된 조직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그 조직 내에서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블록체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보증되는 것이다. 이 일단의 권리들이 다시 이 권리들을 법적으로 인정될 수 있게 만드는 기존의 법체계들에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는 보고서에는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 : 분산된 네크워크들 및 규제 틀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istributed Networks & Regulatory Frameworks.”)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보고서는 코인센터()에서 발표했으며 Swarm, the Berkman Center at Harvard, New York Law School 그리고 the MIT Media Lab과 관련된 사람들이 기고했다. (볼리어도 초고에 논평을 한 바 있다고 한다.) 이 파일은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디지털 통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테크놀로지는 시장에서든, 커먼즈에서든, 혹은 다른 상황에서든 일군의 사람들이 네트워크 플랫폼에서의 상호관계를 관리하는 신뢰할만한 체계를 원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다.

시드니 엠버(Sydney Ember)가 며칠 전에 <뉴욕타임즈>에 기사로 썼듯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새로운 장소로 가져가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비트코인 2,0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전 세계의 기업가들은 지금 그 테크놀로지를 비트코인 거래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서 사용하려고 작업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블록체인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금융체계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식 같은 금융자산들, 계약서들, 재산권증서들, 특허장들, 결혼허가서들을, 즉 확인을 위해서 신뢰할만한 매개자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내고 기록하는 방식을 수립할 수 있다.

“블록체인의 능력을 확대하는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개발자들이 비트코인 앱을 구축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신설기업인 체인닷컴(Chain.com)의 공동창립자인 애덤 루드윈(Adam Ludwin)은 말한다.

많은 블록체인 앱들이 금융 및 화폐에 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테크놀로지를 특허장, 권리증서, 금융데이터와 같은 문서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테크놀로지로 사용하고자 하는 많은 다른 사업들이 존재한다. FCC의 전 회장인 리드 헌트(Reed Hundt)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주택에서 태양광 에너지의 분산된 네트워크들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원장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어떤 가정이 발생시켜 공유했는가 혹은 소비했는가를 추적하고 그것이 분산된 태양광 에너지 그리드들의 효율적인 조직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헌트와 그의 두 동료들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분산된, 분해된 원장에 의해 가동되는 통화(通貨)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 크레딧과 기타 정부 보조금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은 태양광 에너지 미시그리드들이나 네트워크들 내에서 교환매체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그린 통화의 튼실한 생태계가 창출하는 네트워크 효과들은 태양전지판의 채택을 유기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거래들은 거의 즉각적일 것이며, 거래비용은 최소가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주류 세계는 대부분 이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세대의 닷컴 기업들을 위한 토대로서의 블록체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커먼즈 기반의 응용들 역시 매우 풍부하다. 다만 우리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기민해야 할 것이다. 며칠 전에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대한 논평에서 블록체인 테크놀로지 분야의 주도적인 기술/법 전문가 가운데 하나인 프리마베라 데 필리피(Primavera de Filippi)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연구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두는데, 특히 공동체 거버넌스와 관련된 데 초점을 둔다. CBPP 생태계에 큰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거버넌스를 실행하는 것을 블록체인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오랫동안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이 중앙집중화된 혹은 연방제 형태의(federated) 구조 주위에 제도화되어 왔는데, 이 제도들은 민주적 거버넌스, 유연성, 발전능력의 측면에서 중앙집중에 치우쳤던 것을 균형잡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대체로 이 제도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데 적절한 연계 메커니즘이 없거나 규모가 안 맞아서 서로 연계하기가 힘든 집단들의 연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제도들은 또한 충분히 자주 반복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는 집단들 사이의 신뢰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오늘날 공유된 공유재와 관계된 전통적 문제들(블로소득자 문제나 공유지의 비극)을 블록체인 기반의 거버넌스의 실행하여 투명한 의사결정 절차와 협동과 협력을 장려하는 탈중심화된 인센티브 제도의 도입을 통해 다룰 수 있다. 블록체인의 투명하고 탈중심화된 성격이 중소 공동체들이 합의에 도달하고 자치의 혁신적 형태들을 실행하는 것을 쉽게 만든다. 모든 상호작용을 부패될 수 없는 공적 원장에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일단의 특정한 규칙들을 코드화하여 이 상호작용들을 특수한 거래들에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암호화된 토큰의 할당과 같은) 새로운 세련된 인센티브 제도를 고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새로운 인센티브 제도는 전통적인 시장 기반의 메커니즘들과는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

탈중심화된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신뢰와 연계를 공유된 자원에 부여하여 비(非)위계적 거버넌스의 새로운 모델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 모델에서는 지성이 네트워크의 중심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가장자리로 퍼져나간다. 탈중심화된 유연한 조직들이 전적으로 현행의 중앙집중화된 형태들의 위계적인 포맷을 완전히 대체하여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로 하여금 더 탈중심화된 방식으로 작동되게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전통적인 하향식 의사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의사결정이 크라우드소싱의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며, 공동체의 집단지성에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감시하고 평가할 책임을 맡긴다.

온라인 공동체들이 이러한 새로운 장치를 실험할 최초의 공동체겠지만, 온라인 공동체들은 쉽게 오프라인으로 옮겨가서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할 새로운 조직들을 창출·구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 공동체들이 많은 분야에서 번성해왔지만, 관료적이고 중앙집중화된 제도들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규모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있어왔다. 내 희망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잡아서 이 공동체들의 더 분산되고 탈중심화된 방식의 작동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응용법들을 창출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비전이다. 볼리어는 새로운 세대의 블록체인테크놀로지들이 전통적인 제도들에 의해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많은 집단행동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프리마베라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도 굳어버린 관료들의 권력, 힘의 불평등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집단적 동의를 오프라인에서 조직하는 문제를 극복하기란 어렵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에서 목격했던 대로 (예를 들어 SEC, 평가기관들 그리고 다른 감시 당국들의 신뢰 불가능성처럼) ‘평판 있는’ 제3의 보증자의 신뢰성조차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감시하는 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현행의 많은 부패될 수 있는 제도들보다 더 진전된 것이다.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관리하는, 부패될 가능성이 덜한 알고리즘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알고리즘들이 전문가가 아닌 사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공동체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블록체인 시스템을 어떤 마법의 해결책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교활함과 속임수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커먼즈의 주위를 더 잘 보호하고 커머너들이 자신들이 운명을 결정하는 데 힘을 더해줄 더 굉장한 도구들을 제공한다. 미래에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의 내적 관계들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가능한 스마트 계약, 신뢰할만한 심의 및 투표제도, 공동체 통화(通貨)들과 기타 협동적 제도들을 통해서 개선된 모습을 상상해보라. Web 2.0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안전한 블록체인 기반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은 오늘날 훨씬 더 큰 규모의 커머닝을 위한 새로운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볼리어는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 즉 커먼즈들이 전통적 제도들에 만연한, 기능장애를 일으킨 정치와 대중을 배신하는 관료제를 타고 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기술을 통한 문제해결이 아니라 대안적 정치를 위한, ‘속임수의 가능성’이 덜한(less gameable)한 새로운 플랫폼인 것이다. 점점 더 네트워크 플랫폼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서, 블록체인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어떤 참신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유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아직 한참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탐구할 가치가 있는 풍요로운 지평이다. ♣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90?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Think Like a Commoner의 8장  The Rise of Digital Commons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임니다. 전문 용어의 우리말 역어는 기존의 것과 다를 수있습니다. 

디지털 커먼즈의 유형

연대 및 내역

프리 소프트웨어

1980년대, MIT 해커 Richard Stallman이 공유된 공동체 자원인 소프트웨어가 사유 재산으로 전환되고 있는 데 대해 격노. 인간의 기본적 자유인 창조성이 질식당하기 때문에. 시장윤리와 저작권법이 공유와 상호지원이라는 해커 윤리를 질식시킴. 그의 해법은 the General Public Licence (GPL), 1989년 처음 개시.

소프트웨어를 팔 수는 있지만, 코드에의 접근을 법적으로 금할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Linus Torvalds가 Linux를 GPL라이선스에 등록. 리눅스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존중받는 소트프웨어 가운데 하나가 됨.

현재 리눅스는 수백만의 웹서버들에 쓰이며 전 세계의 최상급 컴퓨터 사용자들 및 기업들(NASA, Pixar, IBM)이 조직의 기능에 매우 중요한 과제에 리눅스에 의존한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프리 소프트웨어와의 주된 차이는 후자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free’라는 말에서 벗dj나고자 한다는 것. 그 의미의 혼란과 낮은 질을 함축하기 때문에. 이들은 스톨먼의 프리 소프트웨어 운동의 정치적 차원에는 관심이 덜 했고 공유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실용적 효용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Creative Commons 라이선스

1990년대 후반 저작권법이 창조성을 질식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하버드 법학교수인 Lawrence Lessig가 소수의 법학 교수들, 컴퓨터 과학자들, 예술가들, 저자들 및 활동가들을 모아서 여섯 개의 표준화된 공적 라이선스인 Creative Commons 라이선스를 발명.

1) NonCommercial : 자유롭게 공유되지만 창작자의 허락 없이 상업적 사용은 금지. (NC)

2) No Derivatives : 자유롭게 공유 가능하지만 사진 잘라내기나 번역과 같은 파생작업은 허락을 얻어야 함.

3) ShareAlike : 파생 작품도 같은 라이선스 아래 공유 가능해야 함. (SA)

4) Attribution : 창작자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함. (BY)

모든 CC 라이선스는 창작자를 밝혀야 함. (BY)

* 볼리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음.

 

GPL과 CC는 디키털 커먼즈가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커먼즈를 종획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종의 법적 기반시설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교육, 학술연구, 정부 서비스에서 CC 라이선스는 공공제도의 작업을 무상으로 접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도왔다.

오픈 액세스(OA) 혁명

학술지 출판을 오픈액세스 (OA) 저널로 하는 기나긴 투쟁.

상업적 학술지 출판업자들이 저작권 소유를 주장함으로써 기생적 존재가 되었다. 정부, 재단, 대학에서 댄 기금을 기반으로 한 지식에 대한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이 상업적 저널들은 종종 저작권을 사용하여 대학 도서관들에 엄청난 액수의 구독료를 씌웠다. 1986년과 2004년 사이에 학술지 출판업자들은 미국 대학들의 구독료를 273%나 올렸다.

대학들이 개혁에의 요구 및 반격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2012년에 하버드 대학은 마침내 돈을 내야 볼 수 있는 학술지들을 출판하는 것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이 조치는 OA 출판모델로의 더욱 공격적인 이행을 시작할 때라고 미국 및 세계 전역의 많은 연구 도서관들과 대학들을 설득하는 것을 도왔다. 하버드의 동기는 주로 재정적이었다. 학술지에 할당되는 예산이 연간 375백만 달러에 육박했다. 일부 학술지 출판업자들에게는 자그마치 매해 4만 달러를 지불하고 있었다. 미국의 평균적인 대학도서관들은 예산의 약 65%를 연구 학술지에 지출했으며, 이 액수의 반 이상이 세 주요 출판사들인 Elsevier, Springer, Wiley에게로 돌아갔다.

OA출판운동은 2001년에 학술연구를 영속적으로 모두에게 무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자는 목표로 처음 조직되었다. 되돌아보면, 이는 공격당할 수 없는 기획이었다. 납세자들이 연구에 수십억 달러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OA운동은 출판업자들과 사정을 모르는 정치가들의 반대 그리고 학술공동체들의 순전한 타성으로 인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싸워야 했다. 학술지에 대한 새로운 수익모델을 개발하고 일부 오래된 학술 출판의 전통들을 분쇄해야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정년보장 및 승급 결정이 교수들의 연구결과가 실린 학술지의 질과 신망에 기초하기 때문에 젊은 교수들은 종종 덜 알려진 OA학술지에 발표하기를 꺼리고 『네이처』지나 『싸이언스』지와 같은 신망 높은 정기학술지에 내고 싶어 한다. OA운동은 또한 거대한 학술지 출판업자들로부터의 맹렬한 저항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납세자가 돈을 대는 연구는 OA프로토콜 하에서 출판되어야 하도록 정하려는 국가 정부들의 노력을 가로막았다.

그러한 저항과 잘못된 변명들에도 불구하고, 2013년 말 쯤에는 1만 개에 가까운 OA학술지가 출판되고 있었다. GPL이나 CC처럼 OA학술지들은 지식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출판업자들이 저작권 제한과 ‘디지털 권리 관리’를 통해 고안된 희소성을 부과하는 상황을 뚫고 말이다.

 

OER

하나의 커먼즈 기반 혁신은 다른 많은 커먼즈들을 계속해서 고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볼리어는 자신의 책을 Viral Spiral(『바이러스의 나선』)이라고 불렀다. GPL이 CC에 이르고, 다시 OA출판이 나타난 지점에서 방대한 ‘open educational resources’( OER)가 다음 번 나선으로서 등장했다. 모든 수준의 교육 및 학습 공동체들이 재산 관점에서 지식을 통제하는 것은 그 핵심적 가치들, 즉 참여와 공유를 통해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에 정반대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움터는 커먼즈이다.”(Academia is a commons)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들이 교과서 대금이 없어서 학교를 나가거나 교육을 연기하는 일이 속출.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중고 교과서를 못 쓰게 하려고 2-3년에 한 번씩 새 판을 냄. 여기에 먼 곳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교수들이 대응하여 the Community College Consortium for Open Educational Resources를 구성함. 여기서 개방 교과서들을 찾아서 널리 알리는 일을 도움. 이런 책들은 CC 라이선스 아래 있으며 주문형 서적(print-on-demand copy)의 비용으로 구입 가능하다. 이로써 학생들의 지출은 각각 수백 달러가 줄었다.

MIT는 2001년에 자유롭게 온라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일단의 교과 자료들―강의요목들, 독본들, 비디오들, 데이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OER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다. MIT의 혁신은 중국 및 많은 군소 국가들에서 물리학과 기타 과학 분야의 교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OpenCourseWare Consortium의 구성도 촉진하였다. 여기에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120개의 회원 대학들과 교육기관들이 들어있다.

Open Design Movement

나선은 계속 확산된다. ‘오픈 소스’라는 용어는 개방되어 있고 참여적이며 투명하고 책임을 지는 생산을 찬양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문화적 밈(meme)이 되었다. 이제는 튼실한 “open design movement”가 활성화되었다. 이는 옷, 가구, 컴퓨터 부품, 심지어는 자동차의 설계를 돕도록 권유한다. Arduino라고 불리는 그룹은 인쇄회로기판들과 컴퓨터 부품들을 수십 종 설계하고 생산하여 기술 덕후들이 값싸고 쉽게 조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Open Prosthetics Project라는 곳은 인공 장구의 설계에, 혹은 설계되어야 할 장구의 명세 작성에 누구라도 기여할 수 있게 한다. 설계품목 중에는, 암반 등반가를 위한 인공 장구와 낚시를 위한 의수가 있다.

더 매력적인 오픈네트워크 기획은 Wikispeed이다. 이는 시애틀에 자리 잡은 자동차 원형 설계 및 제조 기획으로서 15개국에 협동자들을 가지고 있다. 목표는 오픈소스 원칙을 사용하여 휘발유 1갤런으로 1백 마일을 갈 수 있는 경량의 modular(가변형?) 경주용 자동차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이다.

Open Source Ecology와 같은 공동체 네트워크들에서는 공유될 수 있는 염가의 장비를 제작하고 있는데, 그 기획 가운데 하나가 LifeTrac이다. 이는 염가의 다목적용 오픈소스 트랙터로서, 그 부품들이 교체될 수 있고 저렴하며 쉬운 제작·유지가 가능하다. 물리적인 물품들의 오픈소스 설계 및 제조는 거대한 규모에 도달해서 혁신가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연합을 구성했는데, Open Harware and Design Alliance가 바로 그것이다.

Crisis Commons

디지털 커먼즈는 가장 상상하기 힘든 곳에서도 불쑥 등장한다. Crisis Commons라고 불리는 자기조직된 집단은 전문적 기술을 가진 자원자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들은 자연재해에 대응하여 인간적 도움을 제공한다. 2009년 아이티 지진 이후에 Crisis Commons와 관련된 수천 명의 자원자들이 재빨리 웹 기반의 번역 도구, 사람찾기 기능, 빈 병상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지도들을 제작하였다.

eco-digital commons

‘eco-digital commons’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여기서는 인터넷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환경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을 돕는다. 일부 웹사이트들은 모바일 폰, 동작감지기들, GPS 추적장치 등을 사용하여 새들, 나비들, 침입종(侵入種, invasive species)이 발견되는 것을 모니터하거나 지역의 수자원의 오염수준을 모니터하도록 개인들에게 권유한다. 이러한 ‘참여감지’(participatory sensing) 기획들은 멀리 분산된 데이터 군들을 모으고 그러면서 정부의 정책입안과 시행의 질을 개선한다.

regional informational

commons

오스트리아의 인구 19만 명의 린즈(Linz)시는 도시 지역을 위한 가장 야심적인 디지털 커먼즈 플랜에 착수했다. 린즈 지역을 개방된 정보 커먼즈로 만들려는 플랜이다. 시는 이미 무상 와이파이 핫스팟들과 이메일 게정들을 모든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비상업적 내용에 웹호스팅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시는 전 지역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CC 라이선스, 개방된 데이터 플랫폼, 개방된 거리지도들 및 개방된 교육자료들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시의 공무원들은 지역정보 커먼즈들이 혁신가들로 하여금 지역에 유용한 정보 도구들을 생산하도록 자극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더 큰 참여와 더 튼실한 경제발전을 촉발하리라고 생각한다.

기업들의 커먼즈 이용

웹의 도움을 받은 car-sharing, overnight apartment rentals 등의 ‘협동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ption).

전문테크놀로지 회사들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이 자연스럽게 협력과 공유를 양성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들의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공동체들을 “화폐화하는”(monetizing) 데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이 공동체들의 장기적이거나 비(非)시장적 이익들에 봉사하라는 법은 없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많은 유용한 서비스들은 ‘무상으로’ 제공하지만, 또한 개인의 사적 정보를 공격적으로 캐내거나 극히 개인화된 광고들을 시장에 팔기도 한다. 구글은 서적디지털화기획(book digitization project)을 통해 공적 도메인 자료에의 특권적인 문지기로서 스스로의 입지를 세우며 경쟁자들과 대중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기업들은 돈을 벌 수 있을 경우에만 ‘공유’를 지원한다. 이는 커머닝이 아니다.

전위로서의 커머너들

그렇더라도, 온라인 공유 공동체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문화적 전위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실천과 기대를 (그리고 과도한 사유재산권에 대한 염증을) 삶의 다른 영역으로 가져가고 있다. 이것이 스웨덴에 원래 자리 잡은 해적당(Pirate Party)이 다른 여러 나라들에 수십 개의 해적당들이 생겨 선거에 후보들을 내도록 촉발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주요한 국제적 저작권협약인 ‘위조 및 불법복제 방지협약’(the Anti-Counterfeiting Trade Agreement)이 2012년에 자유로운 문화의 옹호자들, 프리소프트웨어 해커들, 오픈플랫폼 사업체들의 연대세력에 의해서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개방된 네트워크들과 디지털 커먼즈의 자유, 혁신, 책임성을 맛보았으므로 20세기의 ‘명령과 통제’ 모델로 돌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태어나면서 디지털인’ 세대에서는 사유재산권에 대한 많은 재래의 생각들―통제의 배타성, 상업적 동기들, 장기적으로 공동의 이익에 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 반사회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결정적으로 낡아버린 것처럼 보인다. 커머닝의 윤리가 어떤 대대적인 법적·정치적 변화로 전환될지를 알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인터넷의 도움을 받는 지난 수년 간의 운동들―아랍의 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indignandos), 점거 운동(Ocupy movement), 비밀리에 작성된 반(反)해적행위 협약인 2012년의 ACTA의 획기적인 패배―로 판단하자면, 이 윤리는 명확하게 감염적이다.”

해커란?

“해커들을 범죄자들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언론의 서술과는 반대로,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어려운 기술적 과제들을 쾌활한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윤리로 해결하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프로그래머들을 가리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