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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서 커먼즈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인터넷 문화에는 희망에 찬 실험과 정치적 해방의 꿈이 넘쳤다. 통찰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가 다음과 같이 웅대한 문장을 특징으로 한 유명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했다.

산업계의 정부들, 살과 강철의 지루한 거인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집인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나는 미래를 대표해서 과거에 속한 당신들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노라. 당신들은 우리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는 당신들에게 주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한 새내기들—그 당시에 우리 대부분이 새내기였다—에게 이 문장들은 인터넷을 통한 해방을 감동적으로 일별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의 파열적인 사회-기술적 혁신의 아찔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문장들은 꽤 신뢰할 만하다. 여러분이 30세 미만이라면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급증을 둘러싼 흥분, 특히 레니게이드 운영체제[주석1]로서 리눅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와 위키(들)의 등장을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토렌트(BitTorrent) 및 P2P 파일 공유의 가능성이 따분하고 착취적인 음악 산업을 뛰어넘어 도약하자 어디에서나 정치적 반란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한 저작권법의 재창조로 일반 사람들이 컨텐츠를 공유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인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여타 기술 혁신들이 협력 및 공유의 새로운 형태들을 촉진했다.
[옮긴이 주석: ‘레니게이드 운영체제’(renegade operating system)는 기존의 규범 혹은 표준에서 벗어난 운영체제(OS)를 가리킨다. 영어 명사 ‘renegade’는 ‘배반자’ 혹은 ‘배교자’를 의미한다.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커뮤니티나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모든 블로그들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이 인터넷을 상업적인 시장으로서 철저히 길들였고 식민화했으므로 발로우의 선언문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된다. (그의 동시대 동료들―크립토 세계―이 비슷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내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자본가/국가 동맹은 인터넷에서의 사용자 주권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길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온라인 삶의 지리적 위치 감시를, 온라인 피드 및 여론에 대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듬 조작을, 대안우파•러시아 및 여타 불량 집단들이 행하는 허위정보 공작과 해킹하기라는 조직적 활동을, 그리고 한때 단일했던 웹을 소규모 웹으로 분할하고 있는 기업의 페이월 및 국가의 방화벽을 생각해보라.

따라서 미국 웨스트조지아 대학의 지리학 교수인 하네스 게르하르트(Hannes Gerhardt)의 신간인 『자본에서 커먼즈까지: 자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탐색하기』(From Capital to Commons: Exploring the Promise of a World Beyond Capitalism)를 접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이었다. 빅테크의 독점, 순응적인 입법부,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인터넷과 해커문화에 널리 퍼진 증가 일로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분쇄했을지라도 게르하르트는 커머닝과 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들이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젠다를 ‘동료주의’라고 부른다. 이 동료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전략적 구상도 아니며 오히려 탈자본주의적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커먼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전망이다. 그는 책 첫 줄에서 자신의 임무를 요약한다. “커먼즈 중심의 협력적 생산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디지털 공간들에서 그리고 생물물리학계에서 커먼즈를 추진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전략에 관하여 더 많기 알기 위해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47)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하르트는 지난 50년간 인터넷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비평들, 역사들, 기술적 논쟁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인터넷에 관한 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 짓는 것은 과제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정치적 날카로움이다. 그는 “전지구적으로 디자인하고 지역에서 제조하는” 생산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한 장들, 그리고 배전망 및 인터넷 자체와 같은 “기반시설을 민주화하기”에 관한 장들을 제시한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과 다르게 게르하르트는 자연세계의 경계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재생자원으로서의 지역적 특성, 도시 폐기물 그리고 농업에 공간을 할애한다.

게르하르트는 “화폐와 가치”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 국가가 화폐 창출을 독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또한 할애한다. 근대적 화폐 창출이 대출을 통해 무(無)에서 돈을 창출하는 개인은행에 아웃소싱되었으므로, 게르하르트는 기본소득 요소를 좀 가지고 있는 탈중심화된 지역 크립토 통화(예를 들어 써클즈Circles, 매너베이스Mannabase, 및 스위프트디맨드SwiftDemand)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비트코인 같은 자본주의적인 모험적 투기를 피한다.
[옮긴이 주석: 써클즈(Circles)는 공동체가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 통화이다. 써클즈와 화폐에 대해서 http://commonstrans.net/?p=2306 참조. 매너베이스(Mannabase)는 전 세계 최초 기본소득 암호화폐용 온라인 플랫폼이다. 스위프트디메드(SwiftDemand)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이다.]

디지털 삶을 ‘공통화’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들은 게르하르트가 논의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 저작권과 특허권의 독점적인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 반트러스트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주제와 관련하여 레베카 기블린(Rebecca Giblin)과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의 『관문 자본주의』(Chokepoint Capitalism)를 참조하라—그리고 홀로체인 같은,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프로토콜과 플랫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이 기회들에 포함된다. 어떻든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전략적 기획들을 숙고하는 것은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하네스 게르하르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의 녹취록은 여기서 PDF 형태로 다운받을 수 있다.




인류세라고? 아니다, 우리는 생태세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아주 오만해서 지질학적 시기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류세’라고 명명했다. 확실히 인간 문명은 지구의 생태계를 크게 변형시켰고 불안정하게 했다. 그러나 ‘인류세’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추진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이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지구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산불, 홍수, 가뭄 및 극심한 더위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가이아(Gaia)이다. 가이아는 자신의 맹렬한,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이아는 인간이 문명,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질서의 틀을 파열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마니아 태생이며 벨기에에 기반을 둔 훌륭한 연구자인 미흐네아 타나세스쿠(Mihnea Tănăsescu)가 지구의 지질학적인 시대를 ‘생태세’(Ecocene)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얽혀있으며 자연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자연계와 문화적•경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지구 체계와 인간 체계를 함께 꽃피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22년 출판된 타나세스쿠의 저서에 『생태세 정치』(Ecocene Politics)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생태적 과정이 정치적 삶에 점점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특징을 띄는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치•경제•문화가 새로운 탈근대적 방식의 존재하기와 행하기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적절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과업이다. 붕괴하고 있는 근대 체계를 지탱하거나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타나세스쿠가 이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정확성과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Frontiers of Commoning)(에피소드#43)에서 타나세스쿠와 그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나세스쿠는 벨기에 몽스(Mons) 대학교 과학연구기금 연구교수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사회학•정치학 및 법에 깊이 기반을 두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타나세스쿠가 『생태세 정치』에서 씨름하는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덫―근대적으로 사고하고 근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인 대답은 “사회적 상호성, 책임감 및 취약성에 의거한 “상호주의의 회복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타나세스쿠가 말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환경의 변화―이 변화는 기후위기가 진행중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필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에 자신을 열어놓고,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향해서 변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이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음’이다.– 옮긴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영감을 얻은 타나세스쿠는 관계성에 기초를 둔 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커머닝이 분명하게 진전시키는 테마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개인주의, 합리성, 자연에서의 분리, 자본축적이라는 근대적 관념들을 넘어서 상호주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타나세스쿠는 “혁신하는 실천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어떤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의 불가능성 둘 다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관점전환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폴리아 지역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올리브 나무의 성공적인 재배는 매우 특별한 장소에 있는 사람과 올리브 나무들 사이의 공동-창조와 사랑이 구현된 복잡한 행위이다. 인간의 문화가 살아있는 식물 자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의 “풍경들과 미기후(微氣候)들의” 더 큰 “모자이크”에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은 지역이든 그것을 생성적인 상호작용의 역사의 외부에서 그리고 그 장소와의 친밀감의 외부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나무의 건강에 영양을 제공하는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가지치기의 행위”(나무가지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것)는 “매우 의식(儀式)화되어 있다”고 타나세스쿠는 말한다. 그것은 가지치기를 신성한 예술형태로서 이해하는, 신임을 얻은 연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얻기 위해 가지를 치지만 또한 자식들을 위해서, 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흙의 건강함을 위해서,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수명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대대로 공동으로 사용해온 땅에 대한 의무감에서 가지를 친다. 인간과 올리브 나무의 관계에서 가지치기의 핵심적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가지치기를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지치기는 단순한 합리성에 저항하고 그 합리성을 벗어나고 넘쳐흐르며 가지치기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풍성한 태피스트리를 향하고 있다.

근대 시기의 우화? 올리브 나무 가지치기라는 전통 문화에서 타나세스쿠는 인간-자연 관계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잘못되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통해 상호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윤리가 어떻게 개인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 둘 다에서 계발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타나세스쿠에게 이 책은 개인적인 오디세이였다. 연구자로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직장과 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그를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그는 몰개성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들의 제시만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전력으로 씨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독자는 항상 기존의 사고방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나세스쿠에게 ‘생태세 정치’는 끔찍한 생태적 현실 특히 기후변화 앞에서 인간의 실존, 경제, 문화 그리고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를 나타낸다.

상호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는 커머너들을 위한 몇몇 실천적이고 유용한 조언과 많은 풍부한 통찰과 지혜들을 제시한다. 가려 뽑은 몇몇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근대는… 상호성과 책임감의 유대로서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추방한다. 실천으로서의 상호관계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사회 기반시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급격히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자연과학을 통해 많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이 표현했듯이 ‘생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생명 자신의 진화에 뜻밖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상대적 자유가 협력적인 방식으로 종종 발현된다.”

“상호간의 베풂이 세상에서 조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호주의가 베풂을 받는 쪽의 완전한 목록을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정치윤리에 붙일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보존은 환경을 모조리 화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화폐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계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상호성을 위한 기반 시설을 살아있는 세계에 헌신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구축할 필요가 있다”

타나세스쿠와 함께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생태세 정치』는 Open Book Publishers로부터 무상의 오픈액세스 버전으로 구할 수도 있고 인쇄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 저자  :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 원문 :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5월호라고 하지만 3월 27일에 업로드되었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이런 일은 전례가 없다고 한다.) 본 블로그에 직전에 올린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와 싸샤 릴리(Sasha Liley)의 인터뷰에서 라인보는 이 글을 자신에게 생산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든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은 모두 네 명이다. 롭 왈리스(Rob Wallace)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의 자문역을 한 바 있는 진화전염병학자(evolutionary epidemiologist)이다. 리브먼(Alex Liebman)은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인문지리학 박사과정 학생이다.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질병생태학자이며, 코스타리카의 트레스리오스(Tres Rios)에 있는 <코스타리카 영양 및 건강에 관한 연구교육원>(Costa Rican Institute for Research and Education on Nutrition and Health)에서 상임연구원을 한 바 있다. 로드릭 왈리스(Rodrick Wallace)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뉴욕주립 정신의학연구소>(New York State Psychiatric Institute)의 전염병학과의 연구과학자이다. * 정리자의 논평이나 설명은 대괄호 안에 삽입하기로 한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계산

2002년 이후 가장 독한 호흡기증상 바이러스인 COVID-19는 이제 공식적으로 팬데믹이 되었다. 3월말 현재 도시들이 봉쇄되었고 환자들의 폭증으로 병원들은 응급실과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상황 생략]

임페리얼 컬리지(Imperial College)의 전염병학 팀은 최선의 완화(발견된 환자의 격리와 연장자들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누적환자수의 상승하는 그래프 곡선을 꺾어서 수평에 가깝게 만드는 것)를 이루는 캠페인을 하더라도 미국은 110만 명이 사망할 것이고 환자의 수는 미국에서 가능한 전체 중환자병상 수의 8배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질병을 진압하려면 환자격리와 (기관들의 업무정지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거리두기 쪽으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을 이런 조치의 대표로 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내의 사망자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다.[5월 2일 현재 미국의 사망자는 65,711명이다.]

임페리얼 컬리지 팀은 성공적인 캠페인을 적어도 18개월 동안 해야 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 동안 경제가 수축되고 공동체 서비스들이 쇠퇴할 것이다. 이 팀은 가용한 중환자병상의 수에 따라 공동체 격리의 시행을 탄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질병통제와 경제 사이의 균형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탈렙(Nassim Taleb)이 이끄는 팀은 임페리얼 컬리지의 모델이 접촉자 추적과 호별 모니터링을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모델은, 많은 정부들이 그런 식의 지역봉쇄를 기꺼이 행할 태도이지만 COVID-19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정부들을 제치고 발발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 기세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많은 나라들이 그런 조치들을 적절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는 너무 과격하다. 미국은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대응할 수 있는 더 온건한 바이러스가 필요하다.”

탈렙 팀은 임페리얼 팀이 어떤 조건에서 바이러스가 절멸(extinction)에 이르는지를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절멸이란 환자수 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환자들이 새로운 감염의 연쇄를 산출하지 않도록 충분한 고립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감염자와 접촉한 감염 가능자들 가운데 5%만이 나중에 감염되었다. 탈렙 팀은 장기적으로 질병통제와 노동력공급의 보장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마라톤에 들어가지 않고 전면적으로 신속하게 질병을 절멸하는 중국의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월러스(Rodrick Wallace)는 모델링 전체를 뒤집어엎는다. 비상상태의 모델링은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어디서 언제 시작할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원인들도 마찬가지로 비상상태의 일부이다. 이 구조적 원인들을 포함해야 경제를 단지 재가동하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최선의 대응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전염병 발발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는 12월 우한에서 COVID-19가 유출되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령 미국에서 실패는 트럼프가 팬데믹 준비팀을 해체하거나 CDC의 7백 개의 자리들을 채우지 않고 두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연방정부가 2017년의 팬데믹 씨뮬레이션의 결과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는 데 실패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미국이 바이러스 발발 몇 개월 전에 중국에 있는 CDC 전문가의 수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물론 중국 현장에 있는 미국 전문가와의 직접적 접촉을 상실한 것이 미국의 대응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미 사용 가능한, WHO가 제공하는 진단키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물론 초기 정보의 지체와 검사의 총체적 결여로 인해 많은 사람들, 필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것이다.)[42일 현재 미국 내의 사망자는 65,776명이다.]

실패는 수십 년 전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가 소홀히되고 화폐의 논리에 종속되면서 [즉 신자유주의의 시작과 함께] 실제로 프로그램되었다. 병상과 정상적 의료활동을 위한 장비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사례에 대응하는 개별화된 전염병학적 치료법에 의해 포획된 나라는 정의상 중국식 통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집결시킬 수가 없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또 한 사람인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숫자가 말하게 하기’는 이미 안에 함축된 모든 전제들을 가릴 뿐이라고 한다. 임페리얼 팀의 것과 같은 모델들은 분석의 범위를 지배적인 사회질서의 틀 안에서 협소하게 재단된 문제들에 명시적으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모델들은 그 의도상 전염병의 발발과 정치적 결정들을 추동하는 더 광범한 시장 세력들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 결과로 나오는 기획들―여기에는 질병 통제와 경제를 위한 통제해제가 교대로 일어나는 동안 죽음을 당할 감염에 취약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포함된다―은 모두의 건강의 확보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는다. 푸꼬가 말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구에 작용을 가하는 것은 영국의 토리 정부와 네덜란드가 제안한 집단면역(herd immunity)이라는 맬서스적인 정책―인구 전체에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의 (비록 더 자애롭지만) 갱신판일 뿐이다. 집단면역이 전염병의 발생의 중지를 보장하리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희망일 뿐, 그 증거는 거의 없다. 바이러스는 인구의 면역장막(immune blanket) 아래로부터 쉽게 진화해 나올 수 있다.

 

개입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나?

종합병원을 국립화한다. 검사의 양을 늘리고 소요시간을 줄인다. 약을 사회화한다. 의료종사자들의 보호를 극대화한다. 인공호흡기 등을 수리할 권리를 확보한다. 렘데시비르와 클로로콰인의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임상시험을 수행한다. 인공호흡기와 보건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개인보호장비를 생산하도록 회사들을 강제하고 가장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할당한다.

연구에서 돌봄까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대적인 팬데믹 인력을 바이러스로 인한 수요의 수준에 근접하도록 확충한다. 증가된 환자의 수에 병상과 의료진, 그리고 필요한 장비의 수를 맞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COVID-19의 계속적인 공격에서 그저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접촉자 추적과 환자격리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충분한 인력을 동원해서 가가호호 COVID-19를 포착해내고 마스크와 같은 필요한 보호장구를 갖추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탈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를 정지시킬 필요가 있다. 질병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이 실행될 수 있기까지 대다수의 인구가 대체로 방치될 것이다. 정부들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하도록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야 하므로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매일 새로 출현하는 상호부조단체들과 동네단체들에 참여해야 한다. 자원자들이 봉사활동을 하다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이 없도록 여력이 되는 전문적인 공공보건요원들이 이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바이러스의 구조적 기원을 비상상태 시의 계획과 연계시키는 것은 모든 발걸음이 이윤에 앞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된다.

많은 위험 가운데 하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규범화하는 데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사스(SARS) 바이러스가 야생의 은신처로부터 나와서 8주 만에 인간이 사는 곳에 전역에 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은 충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바이러스는 특이식품(exotic food)의 지역 공급라인의 한 쪽 끝에서 출현했으며 다른 쪽 끝인 중국 우한에서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감염연쇄를 성공적으로 개시했다. 거기서부터 전염병은 지역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비행기나 기차에 올라타기도 하면서 여행에 의해 구조화된 연결망을 통해 그리고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내려오면서 지구 전체에 퍼졌던 것이다.

야생식품시장을 전형적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보지 말라. ‘특이식품이 어떻게 더 전통적인 가축과 함께 우한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팔릴 수 있게 되는가?’라는 명백한 질문을 생각해보자. 동물들은 트럭에서 혹은 골목에서 팔리는 것이 아니다. 관련되는 허가증과 대금지불(그리고 그 규제의 완화)을 생각해보라. 전 세계의 야생식품에 투여되는 자본과 산업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비록 산출량의 크기는 어디에서도 비슷하지 않지만, 그 구분은 지금 더욱 불투명하다.

중첩되는 경제적 지리는 우한 시장에서부터 특이식품들과 전통적인 식품들이 재배되는 후배지들로 뻗어있다. 산업생산이 가장자리의 숲을 침범할 때, 야생식품업은 더 깊이 들어가거나 가장자리 지역을 공략해야 한다. 그 결과 가장 특이한 병원체들이, 가령 이번 경우에는 박쥐를 숙주로 삼는 SARS-2가, 식용동물들을 통해 혹은 그것을 다루는 노동자들을 통해 트럭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침투

어떤 병원체들은 바로 생산의 중심지들에서 발생한다. 살모넬라(Salmonella)와 캄필로박터균(Campylobacter)처럼 식품을 통해 감염되는 박테리아가 그렇다. 그러나 COVID-19를 비롯한 다수의 병원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프런티어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인간 병원체의 적어도 60%가 야생동물에서 해당 지역의 인간 공동체들로의 유출(spillover)에 의해 발생한다. 그 다음에 세계의 다른 곳으로 전파된다.

콜게이트-팜올리브(Colgate-Palmolive)와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이들은 기업식 농업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의 유혈 낭자한 가장자리를 밀어붙이는 회사들이다―으로부터 일부 재정을 지원받는 이들을 포함한 에코헬스(ecohealth)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이전의 전염병 발발에 기반을 두어 새로운 병원체들이 출현할 법한 곳이 앞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세계지도를 만들어냈다. 색깔이 붉은 색에 가까울수록 새로운 병원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이 지도에서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의 일부가 붉다. 그런데 이 지도는 절대적 지리(absolute geographies)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중대한 점을 놓쳤다. 발발 지역에 초점을 두는 것은 전염병학을 형성하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요인들이 공유하는 관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들에서 개발과 생산에 의해 토지사용과 질병출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후원하는 자본가 세력은 발발의 책임을 토착민들과 그들의 ‘더럽다’고 추정되는 문화적 관행들에 지우는 노력에 보상을 해준다. 야생동물고기를 먹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집에서의 시신의 매장이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두 가지 관행이다. 이와 달리 관계적 지리(relational geographies)의 관점에서 보면 갑자기 전지구적 자본의 핵심 원천인 뉴욕, 런던, 홍콩이 세계의 최악의 핫스팟 가운데 세 곳이 된다.

발발지역들은 심지어 전통적인 정치체들에 의해 조직되어 있지도 않다. 불평등한 생태교환이 (이는 산업화된 농업으로부터 온 최악의 피해를 글로벌 사우스에 돌린다) 이제는 국가가 주도하는 제국주의에 의한 지역 자원 약탈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상품이 관련되는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로 일어난다. 기업식 농업은 그 추출주의적 작업을 상이한 규모의 영토들을 가로지르는 공간적으로 불연속적인 네트워크들로 전환시켰다. 가령 일련의 다국적기업 기반의 ‘콩 공화국들’(Soybean Republics)은 현재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걸쳐있다. 이 새로운 지리는 회사관리구조, 자본조달, 하청, 공급체인대체, 임대 그리고 초국적 토지공동이용(land pooling)에서의 변화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 ‘상품 공화국들’은 여러 국경 사이에서 여러 생태들과 정치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전염병학적 현상들을 산출하고 있다.

전염병의 발발과 관련하여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이분법은 시골이 도시 주변의 ‘desakotas’(city villages, 도시 마을들)나 ‘zwischenstadt’(in-between cities, 사이 도시들)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 결과 병원체의 원초적 원천인 숲질병 동학은 이제 후배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적 현상들도 관계적이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스(SARS) 같은 것이 박쥐 동굴에서 나온 지 며칠 만에 대도시의 인간들에게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야생’ 바이러스들이 열대림의 복잡성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통제되었던 생태계들은 자본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와 공공보건 및 환경위생의 결핍에 의해 철저하게 간소화되고 있다. 많은 야생 조수(鳥獸)에서 발생하는 병원체들은 숙주와 함께 죽지만, 숲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퍼졌던 일부 병원체들이 이제는 감염에 취약한 인간집단(이들의 취약성은 종종 도시들에서 긴축정책과 부패에 의해 부실해진 규제에 의해 심화되고 있다)을 가로질러 증식하고 있다. 효과가 있는 백신이 있어도 발발한 전염병은 이전보다 더 큰 범위, 더 긴 지속기간, 더 큰 동력을 가진다. 한때 지역에 국한된 유출(spillover)이 지금은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유행병이 된 것이다.

이렇게 환경이 변한 것만으로 에볼라(Ebola), 지카(Zika), 말라리아(malaria), 황열병(yellow fever) 같은 예전의 전형적 병들이 (이는 비교적 진화를 적게 한다) 위협적이 되었다. 이 병들은 먼 마을들로 유출되고 다시 큰 도시들로 퍼져 수천 명을 감염시켰다. 오랜 동안 질병의 저장소였던 야생동물들도 블로우백(blowback)을 겪고 있다. 적어도 100년 동안 노출되어온 야생유형의 황열병에 걸리기 쉬운 토착 신세계원숭이들(New World monkeys)은 삼림파괴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서 그들의 집단면역 능력을 잃고 있으며 수십만 마리씩 죽어가고 있다.

 

확산

기업화된 농업은 여러 기원을 가진 병원체들을 가장 멀리 있는 저장소로부터 가장 국제적인 인구 중심지들까지 이동하게 하는 동력이자 그러한 이동의 연결망으로서 기능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병원체들이 농업 공동체들로 침투한다. 연관된 공급체인이 길수록, 그리고 연관된 삼림파괴의 범위가 클수록 푸드체인에 진입하는 동물원성 병원체들이 더 다양해진다. 최근에 (재)발생한 식품에 의해 전달되며 인간의 활동에 의해 유발되는 범주에 속하는 병원체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African swine fever, Campylobacter, Cryptosporidium, Cyclospora, Ebola Reston, E. coli O157:H7, foot-and-mouth disease, hepatitis E, Listeria, Nipah virus, Q fever, Salmonella, Vibrio, Yersinia ( 그리고 H1N1 (2009), H1N2v, H3N2v, H5N1, H5N2, H5Nx, H6N1, H7N1, H7N3, H7N7, H7N9, H9N2를 포함하는 다양한 신종들).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생산의 전체가 병원체의 유독성의 진화와 전염을 가속화하는 관행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 점증하는 유전자 단작(monoculture)―거의 동일한 게놈을 가진 식품용 동물과 식물―이 전염속도를 늦추는 방역 방화벽을 제거한다. 지금 병원체들은 평상적인 숙주 면역형질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구밀집이라는 조건이 면역반응을 억제한다. 농장의 동물 개체수의 크기와 밀집도가 더 신속한 전염과 반복적인 감염을 촉진한다. 산업생산의 특징인 큰 처리량은 취약개체들의 공급을 계속 갱신하여 병원체의 치명성의 상한선을 제거한다. 동물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는 것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변종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점점 더 빨라지는 도살 시기―닭의 경우에는 6주―는 병원체들이 더 튼실한 면역체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데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산 동물의 교역의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게놈의 다양성이 증가되고 연관된 병원체들이 교환되어 그 진화 가능성의 탐색 속도가 빨라진다.

병원체의 진화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개입은 심지어는 산업 자체가 요구하는 경우일지라도 (전염병이 발발한 비상상태에서 한 분기의 재정수익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 말고는)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다. 전체적인 경향은 농장들과 가공공장들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점점 더 줄어들고 정부의 감시와 활동가의 폭로에 반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며 치명적인 전염병 발발의 세부에 관해 미디어를 통해 보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농약과 식용돼지의 오염에 맞선 법정 싸움에서 최근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기업의 생산은 여전히 전적으로 이윤에 초점을 맞춘다. 전염병의 발발로 야기된 피해는 가축, 농작물, 야생, 노동자들, 지역 및 일국 정부들, 공공보건 시스템들에 외화되며, 자국의 우선성이라는 태도로 인해 해외의 대체 농업시스템들(agrosystems)로 외화된다. 미국에서 CDC는 식품에 의해 전달되는 전염병 발발이 여러 주들과 감염된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자본이 초래하는 소외는 병원체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공공 이익은 농장 및 식품공장의 문에서 걸러내어지는 한편, 병원체들은 산업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는 바이오안전을 지나쳐 퍼지고 공중에게로 되돌아간다. 매일 이루어지는 생산은 우리의 공유된 건강 커먼즈(health commons)를 갉아먹는 수지맞는 도덕적 해이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바이러스의 발생지에서 지구의 반만큼 떨어져 있는 뉴욕, COVID-19 때문에 이동제한이 걸려있는 뉴욕에 아이러니가 있다. 3년 전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제이피모건(JPMorgan), 아메리카은행(Bank of America), 시티그룹(Citigroup), 웰스파고(Wells Fargo & Co). 그리고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연방정부의 비상대출금의 63%를 취했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의 거대한 기업식 농업의 일부를 차지하는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의 주식 60%를 취했다.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는 미국에 본사를 둔 Smithfield Foods―세계에서 가장 큰 식용 돼지고기 생산회사―를 샀다. 또한 골드만삭스는 3억 달러로 푸젠성과 후난성―우한의 바로 아래 지역이며 도시의 야생식품 조달권 내에 있다―에 있는 10개의 가금농장의 소유권을 얻어냈다. 또한 도이체방크(Deutsche Bank)와 함께 같은 지역의 식용 돼지사육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렇듯 COVID-19의 발발의 원인들의 고리의 일부는 애초에 뉴욕에서 뻗어나가고 있다. 중국의 농업의 크기에 비해 골드만삭스의 투자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말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적으로 ‘중국 바이러스’ 운운하는 것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손가락질은 국가와 자본이 서로 전지구적으로 엮여있는 상황을 가린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발생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팬데믹은 체제의 관리자들과 수혜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2월 중순에 5명의 미국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은 팬데믹이 오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산업분야들에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백만 달러의 주식을 싼 값에 팔았다. 정치꾼들은 팬데믹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공적인 메시지가 계속적으로 나오는 가운데 대중에게는 발표되지 않은 정보를 기반으로 내부자거래를 했다. 미국의 부패는 이런 이기적인 탈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에 걸친 것으로서 자본이 빠져나갈 때 미국의 자본축적 사이클이 종말을 맞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생태학(그리고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의 현실보다 금융을 더 우위의 놓는 사물화된 태도를 중심으로 자본의 물줄기가 계속 분출되도록 하려는 노력은 무언가 좀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노력의 관점에서 보면 팬데믹은 가령 골드만삭스에게도 성장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살육에 섬뜩해진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와 다른 결론들을 낸다. 병원체들이 방사성 꼬리표(radioactive tags)[‘방사성 꼬리표달기’는 어떤 원소의 정상적인 동위원소를 방사성 동위원소로 대치하여 그 원소를 추적하는 것을 가리킨다]처럼 차례차례 표시하는 자본과 생산의 회로들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그룹은 치명적인 질병의 출현을 낳은 삼림파괴를 항상 토착민들과 지역 소자작농들 탓으로 돌리는―에코헬스(ecohealth)[Ecohealth Alliance를 말하는 듯하다]와 <원 헬스>(One Health)에서 발견되는―근대의 식민 의료를 넘어서는 모델을 도출하는 중이다. [주석으로 달린 “The dawn of Structural One Health: a new science tracking disease emergence along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일부 저자들이 이 글의 저자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서 두 글의 입장은 동일한 듯하다―은 ‘One Health’가 가축유행병 유출의 사회적 규정요인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이 결핍을 메운 자신들의 모델을 ‘구조적 원 헬스Structural One Health’라고 부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질병 출현에 대한 우리의 일반이론은 아래와 같다.

자본의 전지구적 회로가 근본적인 문제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독한 병원체들의 개체수의 성장을 억제하는 환경복합성을 파괴하는 식의 자본 배치가 문제다. 그 결과로 병원체가 유출되는, 즉 원래의 야생동물 숙주에서 나와 인간 공동체로 진입하는 사건들의 속도와 분류학상의 폭이 증가한다. 도시 주위의 확장된 상품회로들이 이 유출된 병원체들을 가축과 노동력을 매개로 후미진 지역에서 해당 지역의 도시들로 옮긴다. 증가하는 전지구적 여행(및 가축 교역) 네트워크가 병원체들을 이 도시들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재빠르게 배달한다. 이 네트워크들이 전염과정에서의 마찰을 낮추어 가축과 인간 모두에서 더 치명도가 높은 병원체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가축의 생식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즉석에서 (그리고 거의 무상으로) 질병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인 자연선택이 제거된다.

심층에 있는 전제는, COVID-19와 그와 같은 기타 병원체들의 원인은 어떤 한 감염원이나 그 임상과정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및 기타 구조적 원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고정시켜 놓은 생태계 관계들의 장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탈소외(disalienation)가 다음의 거대한 인간의 이행방향이다. 정착자 이데올로기를 버리는 것, 인류를 재생성의 순환으로 되돌리는 것,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 다중들 속에서 개인화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경제에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머리가 여럿인 히드라로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전유하고 내화하고 질서짓는다. 자본주의는 인종, 계급, 젠더가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있는 지형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우리는 탈소외를 통해 이 다양한 억압의 위계들과 이 위계들이 지역마다 특수하게 축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들을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의 확대되는 재전유의 반경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전체주의로 귀결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심지어는 지속 가능성 자체도 상품화된다. 그리고 이는 공장과 농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어디서나 온갖 방식으로 시장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 및 자본의 지역 대표자들과의 전지구적 규모의 충돌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기업식 농업은 공공보건과 전쟁을 하고 있으며, 공공보건이 지고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우리의 생태를 경제와 다시 연결하는 전지구적 물질대사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해결책들에 집중한다. 병원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숲의 복잡성을 보호한다. 가축 및 농작물의 다양성을 다시 도입하며, 병원체의 유독성의 증가와 범위 확대를 막는 범위의 동물사육 및 농작물 재배를 재도입한다. 동물들의 현장에서의 자연생식을 허용하여 병원체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게 하는 자연선택을 재개한다. 크게 보면,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가득한 자연과 공동체를 시장에 의해서 제압되어야 할 또 하나의 경쟁자로 취급하기를 그친다.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구이다. 지구로 되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또한 현재의 절박한 문제들의 다수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뉴욕에서 베이징까지 이동제한이 걸려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런 발발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전염병은 그간의 역사 대부분을 볼 때 때이른 죽음의 가장 큰 원천이었기에 언제나 위협이 된다. 우리는 1918년부터 지금까지의 100년의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팬데믹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조정하여 이 전염병과의 더 나은 휴전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4/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9-10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지난번에 이어서 9-10절의 내용정리를 올린다.  이번에도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을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보기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보기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보기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보기
 5. The Columbian Exchange 보기
 6. “The Death Carts Did More…” 보기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보기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보기

 9.“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1.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 볼셰비즘과 스페인 인플루엔자(“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빠르고 파괴적이었던 팬데믹은 스페인 인플루엔자였다. 그 세 번의 유행 가운데 최초의 것은 1918년 3월 캔자스에서 시작되어 가을과 겨울에 한층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형태로 재발하였다. 이 전염병은 그 규모나 파괴성뿐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다른 유행병들과 구분되는데, 그것은 이후 세대들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기억상실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를 연구한 역사가는 이렇게 요약한다. “다른 무엇도 ― 어떤 감염도, 어떤 전쟁도, 어떤 기근도 ― 그토록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한 해 만에 2,200만에서 3,0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미국에서 50만 명이 죽었으며, 떠다니는 바이러스 시험관과 같은 조건에 젊은이들을 처박아놓고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으로 실어날랐던 미군함들이 인플루엔자를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로 옮겼다. 그 후 바이러스는 유럽 제국주의의 해로(海路)를 따라 라틴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인도(여기서 1,200만 명이 죽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태평양의 섬들로 퍼져갔다. 남북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스페인 인플루엔자의 연령별 사망률 곡선은 ‘U’가 아니라 ‘W’ 모양에 가까웠는데, 이는 어리거나 나이 든 사람들보다 젊은이들이 이 병에 더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성은 공식적인 거시기생체 기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이들이 생산, 재생산, 전쟁에 있어서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생산과 재생산이 걱정거리였다.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공화당 상원의원]는 군수품 공장들의 생산성을 걱정했다. 1918년 3월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가운데 1,000명이 병에 걸렸다. 필라델피아 조선소들의 공정률은 군수업자들 놀라게 할만한 속도로 하락했다. 미해군의 40%가 감염되었다. 37개의 생명보험사들이 그해 주식배당을 생략하거나 축소했다. 거시기생체들과 미시기생체들이 건강한 젊은이들의 신체를 두고 치명적인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obblies)에 대한 검열과 정치적 억압은 전염병에 대한 지식의 발달과 치료법들의 전파를 방해했다. 미국의 공공보건정책은 야만적인 법집행을 통해 모든 형태의 소통을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사추세츠주 브록턴(Brockton)의 소녀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에 맞춰 줄넘기를 함으로써 격리조치에 대응했다.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은 엔자(Enza)였어요
창문을 열자
엔자가 날아 들어왔지요(in-flew-Enza).

(소녀들의 노래는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도마뱀 이야기’였다. 1970년대에 오면 인플루엔자에 대한 연구가 새들의 이주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말이다.)

대규모 모임은 금지되었다. 공중전화부스에 자물쇠가 걸렸다. 공용 식수대(食水臺)는 폐쇄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은행 창구 직원들은 손 씻는 물을 가져다 놓았다. 애리조나주 프레스콧(Prescott)의 지방자치조례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어떤 신문에서 한 제안을 받아들여 악수를 범죄화했다. 미군 공중위생국장은 “지상(地上)에서 문명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W’의 중간 부분이 높아졌고[즉 청년 사망자가 더욱 증가했고] 그 결과 저 유명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에 속하는 절망한 미국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를 제외하면 누구도 스페인 독감에 대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대대적인 사회적 거부인가? 남성우월주의인가? 스페인 독감이 동반한 “심각한 체계적 우울”의 여파인가? 중요하지만 대답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다.

캐서린 앤 포터는 시대와 ‘새로운 남자’의 탄생과 ‘새로운 여자’를 종합했다. 남자들은 휴대용 술병을 들고 다녔고 ‘새로운 여자’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알코올과 니코틴, 이것은 1790년대 이래로 전염병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이었다. 전쟁채권으로 돈을 모으려는 정부의 움직임만이 집회 허용의 유일한 이유가 되었으며, 그러한 집회는 “아플 때까지 주라(Give ‘till it Hurts)”는 슬로건 아래 개최되었다. 군인과 ’새로운‘ 여자 모두에게 주어진 표어는 ‘희생’이었다. 돈을 주라, 너의 시간을 주라, 너의 노동을 주라, 너의 삶과 생명을 주라.

1918년 인플루엔자에 대한 항체를 찾으려는 미국의 노력이 거둔 한 가지 성과는, 보스턴 하버 디어(Deer)섬의 죄수들을 상대로 행해진 실험의 재앙적 결과들을 통해 인간은 실험용 동물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학자들은 다른 것도 발견했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정신, 연구, 지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피 안에 존재한다.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모든 인플루엔자 전염병은 “우리의 면역혈청에 발자국을” 남긴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스페인 인플루엔자가 한창인 상황에서 여성투표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인플루엔자에 대한 보상으로 투표권을 주는 거래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민지배를 받은 민족들의 자결권을 포함한 저 유명한 ‘14개 항’은 스페인 독감의 초기에 발표되었다. 전염병이 끝나갈 무렵 그는 파리에서 제국주의적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리자 쉬엄쉬엄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거부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볼셰비즘과 경쟁하고 있단 말이요.”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Pale Horse, Pale Rider)에서 캐서린 앤 포터는 이렇게 썼다. “더 이상 전쟁도 전염병도 없고, 육중한 포화들이 멈춘 후의 멍한 적막만이 감돈다. 그늘이 드리운 소리 없는 집들, 텅 빈 거리들, 죽음처럼 차가운 내일의 빛. 이제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렇다. 제정(帝政)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시간이, 아랍혁명을 위한 시간이, 남아프리카에서의 반란을 위한 시간이, 봄베이[현(現)뭄바이] 직물 노동자들의 기동(起動)을 위한 시간이, 아이티 반란을 위한 시간이, 멕시코 혁명을 위한 시간이, 베를린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위한 시간이, 포틀랜드 총파업과 피츠버그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을 위한 시간이, 가비(Marcus Garvey)의 범아프리카주의를 위한 시간이. 건강이란 이러한 파업, 반란, 봉기, 혁명 들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조립라인, 남아프리카의 금광, 봄베이의 스웻숍(sweatshop),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벨파스트의 조선소, 크론슈타트의 야금공장, 세계 곳곳의 슬럼들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거시기생체의 흡혈의 대상이 되었던 전세계의 숙주들이 ‘항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혁명들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도마뱀 이야기’가 실천되었던 것이다.

이에 맞서 거시기생체는 야만적인 억압으로 반격해왔다. 러시아의 침략행위들, 인도 펀잡(Punjab)주 암리차르(Amritsar)에서의 학살, 아이티와 털사(Tulsa)에서 이루어진 지상-공중 합동 공격, 시카고에서의 인종폭동, 백악관의 KKK,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가 그 사례들이다.

 

  1. 나의 투쟁과 터스키기(Mein Kampf & Tuskegee)

나치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미국의 인종정책을 칭찬하고 독일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20년대 히틀러와 나치는 매독에 대한 집착을 미국 의학계와 공유했다.

19세기에 미국에서 발전한 인종주의적 의학은 질병에 대한 면역성, 취약성, 상대적 심각성 등에서 인종들 간에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인종주의적 의학은 흑인들이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성적으로 문란함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인구조사 결과 19세기 후반에 흑인들의 출생률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자, 일부 의사들은 이것을 노예해방이 흑인종의 소멸을 낳는다는 인종주의적 믿음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매독은 “전형적인 흑인의 질병”으로 여겨졌다. 어떤 의사는 흑인이 “악명높게도 매독에 흠뻑 젖어 있는 인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백인 전문가들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섹스를 교육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9세기말-20세기초의 “사회적 위생”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공중보건국 내에 성병전담부서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성병 클리닉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건강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의 이러한 구조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적 의학의 치명적 가정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치 역시 매독을 피억압 소수자들, 즉 유대인들과 연결했다. 히틀러는 매독을 “유대인의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매독은 민중을 오염시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혔다. 히틀러는 도시의 성적 자극물들(영화, 광고판, 쇼윈도우 등)을 비난했으며, 이를 매독, 그리고 자신이 “유대화(Jewification)”라 부르는 과정과 연결지었다. 그 이름과 기원이 유럽의 정복활동, 대규모 이주, 노예제, 여성혐오적 가족정책과 분리될 수 없는 질병인 매독은, 이번에는 ‘청결’의 이름으로 매독환자의 ‘안락사’, 강제이주, 노예노동, 집단수용소 등을 제도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주의적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나치가 독일 의회에서 다수당이 된 해인 1932년에 미국 공중보건국은 “터스키기 흑인 남성 비치료 매독 관찰 실험(Tuskegee Study of Untreated Syphilis in the Negro Male)”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공식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집단학살 정책” ― 1972년 실험의 진실이 폭로되었을 때 한 비평가가 한 말 ― 을 실행했다. 앨라배마주 메이컨(Macon) 카운티에 거주하던 600여 명의 흑인 남성이 기만당해 실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이따금 더운 음식을 제공받고 뷰익(Buick, 자동차 브랜드)을 타고, 장례 보험을 보장받는 등의 ‘혜택’을 받고 실험에 참여했는데, 이 실험은 흑인 남성 매독 환자의 사망률이 백인 매독 환자의 사망률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

피실험자들은 자신들이 매독에 걸렸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도 매독에 감염되었다. 실험은 목표, 수단, 테크닉 모두에서 인종주의적이었다. “정부 소속 의사들”은 매독 3기 단계에 있는 흑인 남성들의 사망률이 통상 신경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고 믿어졌던 백인 남성 환자들의 경우보다 더 높은 심혈관계 발병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피실험자들은 가축처럼 취급받았다.

메이컨 카운티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나치 집단수용소와 유사해졌으며, 나치의 실험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듯이 저 실험들 역시 ‘남부 예외주의’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터스키기의 피실험자들이 북부로 이주하면 클리블랜드, 뉴욕, 디트로이트의 공중보건국 관리들 역시 치료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협조’를 제공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리고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 일을 금지하는 공중보건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터스키기 실험은 40년 동안 계속됐다. 나치 의사들에 대한 재판과 그 결과로 도출된, 인간 대상 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The Nuremberg Code)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도 공중보건국 관리들은 멈추지 않았다.(40년대 후반 미국 정부는 나치 의사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인간 대상 실험 규제에 관한 1964년 헬싱키 선언도 터스키기 프로젝트를 멈추지 못했다. 이 ‘연구’를 멈춘 것은, 나치를 피해 도망친 부모를 둔 내부고발자의 노력과 마틴 루터 킹과 로자 파크스의 변호사였던 프레드 그레이(Fred Gray)의 법률적 노력의 결합이었다. 물론 1972년의 그들 뒤에는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혁명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이 실험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1997년에 이르러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소수의 생존자와 다수 사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사과했다.]

심지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1988년 2월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의 책임자 앤써니 파우치(Anthony Fauci) 박사는 에이즈 백신을 테스트하기 위한 대규모 인체 실험을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자이르(Zaire)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에이즈 연구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로버트 라이더(Robert W. Ryder) 박사는 같은 달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 ― 이것은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요 ― 은 수천 명의 에이즈 감염자들을 추적 연구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낮기 때문이죠.”

그러한 연구는 특정한 경제적·인구학적 맥락에서 수행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세계은행>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세계은행>은 아프리카에서 인구억제정책을 장려했으며, “낡은 방식들”에, 즉 자신들의 토지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거시기생체적 농업산업에 방해가 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수를 줄이고자 했다.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유용하다. 국제의료기구들은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다는 인상을 서구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에이즈, 아프리카, 인종주의』(Aids, Africa and Racism)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구 의사들은 아프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모아놓고 다른 모든 의학적 가능성은 배제한 채 그들이 에이즈를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의사들은 자국에서 적용되는 윤리적 제약들 없이 소규모의, 신뢰할 수 없는 혈청역학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이 연구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믿었다. 이들은 어째서 혈청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질병의 증상을 보이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는커녕 의문을 품지조차 않았다. 이 의사들은 에이즈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파리 여행에서 수집해서 냉장고 바닥에 두었던 오래된 혈액 샘플들을 꺼내서 신뢰할 수 없는 테스트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또 다른 스토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서구 대중들에게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이것은 메이컨 카운티의 소작인들, 필라델피아의 자유로운 흑인들, 아이티의 황열병, 히스파니올라섬(Hispaniola)의 양치기 ‘매독’, 심지어는 투키디데스와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이것은 인종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일단 흑인은 더럽고, 병이 들끓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고, 어떤 식으로든 금방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생기면, 집단학살을 제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치의 “최종적 해결책”이 계획되고 터스키기 실험이 한창이던 1939년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은 1918년 이후 세계를 휩쓸었던 범아프리카주의에 몰두하여 모세 이야기를 멘투와 그의 “멋진 도마뱀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다시 썼다. 그때에 비하면 아프리카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졌다.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물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이 도움은 악어의 눈물을 동반하는 도움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을 구실로 우리의 질병을 관리하는 얼간이들에 맞서 우리 자신의 ‘도마뱀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도움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더 섞이고 교류할수록, 함께 음식을 먹고 잠을 잘수록 우리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파괴하는 미시기생체들이 거시기생체의 눈에는 ― 그것들이 혹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 신이 보낸 선물처럼 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거시기생체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우리가 ‘도마뱀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다. 이제 거시기생체들은 우리가 정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을 위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적 무질서’를 대가로 치르지 않고는 저 집단학살을 위한 미시기생체들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관계


  • 저자  :  Antonio Negri, Carlo Vercellone
  • 원문 : “The Capital-Labour Relation in Cognitive Capitalism”(2007)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Carlo_Vercellone/publication/23530684_Il_rapporto_capitalelavoro_nel_capitalismo_cognitivo/links/55f2d64808ae1d9803921c27/Il-rapporto-capitale-lavoro-nel-capitalismo-cognitivo.pdf?origin=publication_detail )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운데 자본-노동 관계는 발본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 이 변형은 생산양식, 계급구성, 소득의 임금, 지대, 이윤으로 분배의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①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르는 과정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상기해보고 ② 현재의 노동을 자본-노동 관계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형론적 요소들을 분석한 다음 ③ 지대(자산소득)의 점증하는 중심적 역할이 왜 전통적인 적대, 즉 이윤과 임금 사이의 대립에 토대를 둔 적대의 조건들을 낡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대중노동자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형은 그람시가 1930년대에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서술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그러나 그에 비견할 중요성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전환점의 기원과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시기에 포디즘적 성장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 논리의 성취였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산업자본주의의 다음의 네 가지 주된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① 지식 형태들의 사회적 분극화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② 고정자본 및 관리조직화에 함입된 노하우들의 헤게모니 ③ 테일러주의 표준에 종속된 물질 노동의 중심성 ④ 소유와 기술 발전의 주된 형태로서의 고정자본의 전략적 역할

포디즘의 위기와 함께 이 경향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출발점은 대중노동자[포디즘 시대의 노동자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셈블리라인 앞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된다.―정리자]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토대를 부수고 복지국가의 보장과 서비스들의 엄청난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이는 포디즘과 양립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 결과 임금관계에 대한 화폐적 제한이 약화되고 생산의 지적 활력의 집단적 전유라는 강력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대적 동학을 통해 대중노동자는 포디즘 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노동의 존재론적 변형의 요소들을, 즉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을 자본의 심장부에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일반지성의 집단적 노동자라는 형상을 구축하고 지식의 추동적 역할에 기반을 둔 경제의 구조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구축했다. 그 결과로 노동의 인지적 차원과 확산된 지적 능력의 구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노동 관계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열렸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생과 성격을 적절히 특징지으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①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출현의 핵심 추동자는 산 노동의 힘에 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형성은 인지자본주의의 발생에 선행하고 그것과 (논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대립된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이 지식의 생산의 집단적 조건들을 기생적인 방식으로 흡수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재구조화를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일반지성의 사회에 각인된 해방의 잠재력을 질식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지적·비물질적 노동의 생산적 가치가 우세해지고 자본의 가치화의 중심축이 지대(자산소득)’를 수단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강탈하는 데 있으며 지식이 상품으로 변형되는 축적 체제이다.

② 정보혁명의 이론가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의 노동의 변형을 규정하는 요소는 정보통신테크놀로지(ICT)의 주도적 역할에 기반을 둔 기술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이론가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잊고 있다. ㉠ ICT는 살아있는 앎(un sapere vivo)이 없으면 정확하게 기능할 수 없다. 정보취급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conoscenza)’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는 노동이 없는 자본과 같다. ㉡ 따라서 ICT 혁명의 주된 창조력은 자본이 추동하는 동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의 수립에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생산의 연계 형태들로서 기업에 대한 대안과 동시에 시장에 대한 대안을 나타낸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특징들

 

1)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그리고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전도

인간에게 구현되는 무형의 요소가 자본의 성장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 확산된 지적 능력

이는 다시 네 개의 주된 함축을 가진다.

㉠ OECD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개발 실험실들이 지식 기반 경제의 추동부문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집단적 생산에 상응하며, 이 생산은 전통적으로 북지국가의 공통의 제도들(건강, 교육, 공적 및 대학연구 등)에 의해서 발현된다. OECD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때 우리는 이 제도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은폐는 삶정치적 통제와 복지제도들의 상업적 식민화가 인지자본에서 하는 역할과 연관이 있다. 건강, 교육, 훈련 및 문화는 생산의 점증하는 부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 여기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와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전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 예전에 불변자본이 수행했던 본질적 기능들의 일부를 이제 노동이 수행한다(생산의 조직화 수준에서 그리고 경쟁력과 지식향상에서 주된 요인으로서).

㉢ 노동력의 형성과 재생산의 조건들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나라의 부’의 원천은 점점 더 기업의 벽들보다 더 상류에 있는 협동에 놓여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지식 생산을 엘리트 노동이나 전문가 부문의 특권으로 보는 지식이론이 모든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가 이 부문에 상응한다. 그래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시간들(tempi sociali)의 체계 전체로 확대된다.

㉣ 복지국가가 제공한 이른바 고급 서비스들은 노동의 인지·소통·정동의 차원이 우세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발전할 수 있는 활동들에 상응한다. 이러한 자주관리 형태들은 사용자들을 긴밀하게 관여시키는 식으로 서비스들을 공동생산하는 데 기반을 둔다.

 

2) 인지적 분업, 노동계급 그리고 임금관계의 표준적 조건들의 탈안정화

둘째 특징은 테일러주의적 분업에서 인지적 분업으로의 이행이다. 이제는 생산의 효율이 각 과제에 필요한 작업시간의 축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형태에 의존하고 학습, 혁신, 연속적 변화의 동학에의 적응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다가성에 의존한다.

지식생산 및 데이터처리와 연관된 활동들의 확산은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을 포함한 모든 경제부문들에서 일어난다. 노동에서의 자율성의 일반화된 진전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전일적이지는 않다. 어떤 부문에서 몇몇 국면들은 인지원칙들에 따라 조직될 수 있고 다른 국면들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적 혹은 신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화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양적 수준에서 (적어도 OECD 국가들에서는) 자본의 가치창출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지노동이다. 따라서 인지노동은 필요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메커니즘들과 단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3)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인지적 차원의 성장이 자본-노동 교환을 지배하는 표준적 원칙들의 이중적 탈안정화를 어떻게 가져오는지를 강조해야 한다.

㉠ 한편으로 노동생산물이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전문지식 내에서의 활동에서는 이전의 임금계약 조건들이 문제시된다. 이전의 조건이란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주장을 임금을 받음과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연구나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같은 활동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된 물질적 생산물로 결정(結晶)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머릿속에 함입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의 인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회사가 왜 지적 재산권을 변경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문지식의 형태들을 전유하고 그것들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한편, 포디즘적 임금계약 규범을 구조지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과 동시성이 오늘날에는 크게 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에너지 패러다임에서는 임금이 인간의 시간의 잘 정의된 일부를 회사가 획득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대해 지불한 가격이었다. 회사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로부터 최대한 가능한 양의 잉여노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들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전문지식의 강탈과 일의 시간과 기능의 경직된 규정을 통해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원칙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되는 에너지의 단순한 소비로 축소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노동통제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식과 임금노동자의 생애를 가동하고 능동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기업의 목표들을 내화할 할 필요, 결과를 낼 의무, 고객들로부터의 압력은 순전히 불안정성과 연관된 억압과 함께 자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발견한 주된 수단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여러 형태들 또한 자본이 총체적인 종속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무상으로 이익을 얻어낼 도구이다. 불안정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지 않으며 고용계약에 통합되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며 양화되기 어려운 노동의 성장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포디즘 시기의 생산적 노동시간 개념과 임금 개념을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지식 자본주의에서 불안정성과 노동의 관계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단편화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와 같다는 발견을 설명해준다.

바로 같은 논리가 노동력의 탈숙련 과정이 왜 이제는 대대적인 지위 격하―이는 특히 여성들과 젊은 대학졸업자들에게 해당된다―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지위 격하란 보수와 고용의 조건들이 노동활동의 배치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숙련에 비해서 탈가치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3원 공식의 위기 : 지대(자산소득) 경제와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생산양식에서의 변형은 잉여가치 포획 및 소득분배 형태에서의 파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두 가지를 연구해야 한다.

1)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임금메커니즘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임금 메커니즘은 소득에의 접근이 낡은 포디즘적 체제 즉 고용의 유무에 달려있어서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실질임금의 정체와 생활조건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여, 시민권과 연결된) 객관적 권리들에 기반을 둔 사회적 혜택의 총량과 그 수혜자의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체계에서 워크페어국가(Workfare State) 체계로의 이동이다. 후자에서는 화폐로 환산하면 매우 낮고 강한 조건들에 종속된 복지혜택에 대한 강조가 수혜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2) 지대(rent)[전통적인 번역어를 따라서 일단 ‘지대’로 옮기지만, 노동이 아니라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 일반을 가리킨다―정리자]의 강력한 귀환.

지대는 잉여가치를 포획하고 공통적인 것을 탈사회화하는 주된 도구이다. 지대의 이러한 귀환의 의미와 핵심 역할은 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생산의 사회적 조직의 수준에서 작용한다. 지대와 이윤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의 적합성이 점점 더 감소한다. 구분의 이러한 흐려짐은 금융의 힘이 기업들의 거버넌스의 기준을 주주들을 위한 가치창출에 따라서만 재형성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마치 노동에서의 협력의 자동화가 화폐라는 추상적이고 유연하며 이동적인 형태의 자본의 자동화의 평행 운동에 의해 대응되는 듯하다. 이는 자본의 소유와 관리의 점증적 분리를 낳은 역사적 과정과 비교할 때 새로운 질적 도약이다. 인지자본주의 시기에는 베버적 기업가(기업의 소유와 관리 기능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다)라는 목가적 유형이 확연히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갤브레이스(Galbraith)의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혁신의 프로그래밍과 노동의 조직화에서 맡은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가져온다―의 불가역적 위기에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금융 및 투기 기능을 발휘하는 데 그 주된 전문성이 있는 관리에 자리를 내준다. 그 동안에 생산 조직화의 실제적 기능들은 점증적으로 피고용인들에게 할당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개별 회사들의 수준(여기서 우리는 절대지대에 관해 말할 수 있다)에서나 기업과 사회의 관계의 수준에서나 공히 관찰될 수 있다. 사실 회사들의 경쟁력은 내적[회사 내적] 경제들이 아니라 외적 경제들에 점점 더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영토의 인지 자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산잉여들을 포획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적 규모에서는 이것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사회의 일반적 전진’에서 나오는) 이 ‘무상의 선물’을 이윤의 정상적 원천으로부터 구분하고자 ‘지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지식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 양 무상의 혜택을 얻어낸다. 잉여가치의 이 부문이 바로 비옥한 땅의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차별지대에 비견된다.

㉡ 다른 한편, 현재의 지대의 발전은 종획의 역사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생의 바탕에 놓인 순수한 형태들과 기능들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지대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의 산물이다. 이 사유화가 자원의 인공적 희소성의 창출을 통해 생성되는 이윤을 수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재산의 투기로부터 오는 지대와 1980년대 이래 화폐와 공공부채의 사유화 덕분에 금융위기에서 그리고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해체시키는 데서 주된 역할을 한 금융지대를 한데 모으는 공통적 요소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재생산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산권을 강화하고 지식과 생명체들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주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법칙의 위기와 일반지성 시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의 또 하나의 발현을 본다.

임금, 지대, 이윤 사이의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계급구성 및 노동시장을 극히 이중적으로 분할하는 정책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첫째 분할부문은 종종은 노동력 가운데 (기업금융서비스, 특허를 노리는 연구활동,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전문적인 법활동 같은) 인지자본주의의 기생적인 활동에 고용되는 더 수입이 좋은 특권화된 소수이다. 이 이른바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자본 지대의 마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그 자격과 능력이 명시적으로 인정된다. 더 나아가 이들의 보수에는 금융자본의 배당금과 연금기금과 민영보험들의 체계와 연관된 보호 형태들로부터 오는 이익의 점증하는 몫이 포함된다.

둘째 부문은 그 자격과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지 노동 범주는 지위 격하라는 무거운 과정을 겪는다. 이 부문은 새로운 인지노동의 분야에서 가장 불안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 개인 서비스들의 발전과 연관된 새롭게 표준화된 서비스들의 신테일러주의적 기능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동시장과 소득분배의 이중화는 집단적 복지 서비스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현대 가정의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상업적 서비스들을 확대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대(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인지 지대, 임금 지대 등)는 소득의 분배와 인구의 사회적 계층분화에서 점점 더 전략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결과는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모래시계형’ 사회의 창출이다. 물론 가치의 창출이 이제는 임금노동자들의 창조성, 다재다능함, 발명의 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본이 노동에게 생산조직화에서의 점증하는 자율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실제로 이미 자율을 양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방법들을 선택하는 수준에 국한시키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결정하는 힘을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떼어내느냐 하는 것,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제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합의 동학 및 노동의 자기조직화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정복은 생산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소비의 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대안적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결정적 요소인 듯이 보인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생산(produzione dell’uomo per e attraverso l’uomo)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모델이다. 일반지성의 생산에서 주요 고정자본이 인간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 개념으로 가치법칙과 3원 공식(threefold formula, 임금-지대-이윤)의 위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보장소득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이며 1차적인 것으로 이해된 소득이다. 즉 이는 재분배로서가 아니라 가치 및 부의 생산의 점증하는 집단적 성격의 긍정으로서 이해된 소득이다. 이것이 자본으로부터 지대가 포획하는 가치의 일부를 빼냄으로써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임금관계가 부과하는 화폐적 제한의 약화는 상업주의와 종속된 노동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노동형태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인가


  • 저자  :  Murray Bookchin
  • 원문 : Utopia, not futurism: Why doing the impossible is the most rational thing we can do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민서
  • 설명 : 아래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1978년 연설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연설에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자신을 환경론자•미래주의자가 아닌 생태론자•유토피언으로 소개하며 환경론과 생태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환경론은 자연을 장악하고 자연에 생산을 강요하는 반면에, 생태론은 자연과 인류의 진정한 조화를 믿으며 이 조화는 근본적으로 인간 서로간의 조화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에 편하도록 연설투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 연설은 여기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으며, 이 연설의 편집된 텍스트는 ‘원문’에 걸린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편집자는 Constanze Huther이다.)

  1. 미래주의란 무엇인가?

미래주의란 오늘날 존재하는 바의 현재가 미래로 투사된 것입니다. 이러한 투사는 양적인 관점에서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들이 다우주적 기업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 다우주적 기업을 우주에서 키우고 싶어 하며, 달을 식민화하고 화성은 물론 목성에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미래주의입니다. 이러한 미래주의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미래가 오늘 존재하는 현재와 아주 다르게 보이도록 현재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를 바꾸어 미래가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주의입니다.

우선 저는 지구를 우주선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반대합니다. 지구는 우주선(([편집자주] ‘우주선 지구(호)’는 1960년대를 시작하는 유행어로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이 UN에서 한 연설로 유명해졌고 유명한 발명가이자 사상가인 풀러(R. Buckminster Fuller)가 종종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 당시 생태론적 의식이 증가하면서 이 용어가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유한성과 세계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북친은 풀러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수도 있으며 풀러는 그 당시에 강연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이 아닙니다. 지구에는 밸브나 지구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온갖 종류의 레이더 장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가 우주선처럼 발사체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배관시스템(plumbing)도 없습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성장하고 발전하는 중입니다.

둘째로 제가 보기에 전자기술의 언어는 생태론의 언어와 대조됩니다. ‘입력’(input), ‘출력’(output), ‘플러그인’, ‘피드백’ 등의 어휘로 구성되는 전자기술의 언어는 미래주의의 언어이며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언어이고, 조작의 언어이자 대중사회의 언어입니다. 사실 문제는 언어라기보다는 그 뒤에 자리한 감성입니다. 미래주의 언어의 뒤에 있는 감성이 저를 괴롭힙니다. 미래주의의 언어와 감성에서는 사람들이 분자화되고 원자화되며 종내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로 축소됩니다. 생태계도 에너지를 돌리고 필요할 때 밸브를 틀고 잠그는 배관시스템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에너지가 생태계를 통해 이동하는지를 알아야 하므로 저는 이것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생태계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식물에게도 고유의 삶이 있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에너지만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기에 우리는 이것을 죽은 것(무생물)과 구별되는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식민화해야 한다고 느끼는 곳으로 우주선을 타고 나가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먼 우주와 관계하거나 별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도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우리 자신의 지역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폐허가 되어 침몰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저 바깥에 우주정거장을 쏘아 올리는 방법과 지구촌(a global village)(([편집자주] 북친은 현대 대중매체로 인해 우리가 ‘지구촌’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주장을 가리키고 있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어떤 공동체도 없이 원자화 상태에서 살면서 전지구적으로 전자적으로 서로 소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좋은 물리학, 좋은 기계학, 좋은 역학일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유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생태론은 아닙니다.

 

  1. 생태론이란 무엇인가?

생태론적인 것은 발달과 성장입니다. 발달과 성장의 경우에는 그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중에 그 목표로 발달•성장해 나아갔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성장은 사업적인 의미에서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잠재력의 성장, 인간정신의 성장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태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입력•출력•피드백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진짜 문제는 토론과 대화, 개성의 인정, 성장과 발달입니다.

지구가 우주선이라고 믿는다면, 우주선이 배관시스템인 것처럼 세상이 시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뉴턴 식의 사고방식인 것이죠. 더군다나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들어올릴 수 있는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거나(([편집자주] 역시 풀러를 비꼰 것인데, 풀러는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미래의 주택 모델로서 종종 홍보했다. [옮긴이] 지오데식 돔은 다면체의 면을 분할해서 구면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돔을 말하는데 표면이 삼각형의 구면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결코 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어떤 유형의 전자통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변화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발달과 성장의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생태론의 출발점은 장소를 사랑하기,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사람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직접적인 생태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릴 자연이 없는데도 우주의 일체성과 우주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기만이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 땅, 공동체 및 집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기만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없고, 집에 대한 감각이 없고, 유기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1. 생태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생태론과 관련한 저의 고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태론적이지 않은 것이 생태론적인 것으로 둔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론적인 문제들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들로 축소되는 정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온갖 부류의 기술자들이 전자기술의 지식을 통해, ‘노하우’를 통해, 그들의 ‘피드백’과 ‘입력’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곳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생태론으로 오인될 때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는 우리가 처한 조건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 미래주의와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전제하고 그것을 미래로 투사합니다. 그리고 숫자게임을 합니다. 이러한 숫자게임, 인구게임(population game, 개체수게임),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등 독일 파시즘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견해들이 오늘날 생태론의 이름을 달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생태론적∙비유기적인 인구생태학적 발상들은 전체주의적인 미래 비전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인간적으로 생각하라

중요한 것은 ‘작게 생각’하는 것(think small)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think human)(([편집자주] 이것은 슈마허(E. F. Schumacher)가 집필한 대단히 인기 있는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1973)에 대한 언급이다. 이 책은 1973년에 출판되었다.))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들입니다. 그리고 그 생태계들의 온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흙,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가 일정한 파수(把守)의 책임을 느끼는 흙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것만이 아니라 생태론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적합성만이 아니라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입니다. 죽은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자처럼 되어서, 사람들을 우주선에서 조작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전자기기를 통해 연결되는 물건들로 보거나, 또는 사람들을 뗏목이나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발로 차서 쫓아버리는 존재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에코파시즘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을, 이런 가치를 담은 단어들 혹은 개념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1. 유토피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토피아 전통으로, 단어의 가장 풍부한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전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토피언이 되는 것의 의미는 ‘상상력에게 권력을!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하라,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프랑스 학생들의 발언에 들어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에는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것, 즉 지구 자체의 파멸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한다는 것은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개념을 창출하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은 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주의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비교적 소수의 그룹들로 구성된 생태론적인 공동체를 개발하는 것, 땅을 재개방하고 유기적인 텃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재사용하며, 우리 모두가 참가해서 원예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농업을 개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② 서로를 알 수 있는 공동체, 즉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 이런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 주민회의에서, 유토피아주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제도적 구조들에서 둘러앉는 것이 선행되어 합니다.

③ 우리 고유의 테크놀로지들을 개발하는 것.

④ 수도꼭지를 수리하는 법을 스스로 알고, 나아가 스스로 공동체를 창출하는 법을 아는 것.

⑤ 풍부하게 다양한 인간존재가 되는 것. 우리는 농부-시민이 되어야 하고 시민-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⑥ 벤 프랭클린(Ben Franklin)도 18세기에 믿었던 그 이상(理想), 즉 우리가 인쇄할 수도 있고 인쇄한 것을 읽을 수도 있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⑦ 단지 변화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성장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

⑧ 단어들의 마법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개념의 마법과 풍부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생태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대화 및 창조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로고스(이성)가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유토피아입니다.

⑨ 푸리에의 전통으로, 뉴잉글랜드 마을회의의 풍성한 전통으로, 그 안의 건강한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 그 전통을 되찾고 새로운 유형의 연합주의를 배우는 것.

⑩ 미래 운동들을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사이의 새롭고 풍성한 의사소통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것.

⑪ 전자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생각하기. 시계와 물리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삶)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단지 작고 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⑫ 미래주의자•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론자•유토피언•예술가가 되기.

 

* 북친은 질의응답시간에 청중들로부터 다음 두 가지의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답했다.

  1. 기술에 반대하는가?

저는 테크놀로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테크놀로지의 쓸모가 아주 크다고 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테크노크라시, 다시 말해 기술자들에 의한 지배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에게 비인간적이고 그 규모에서 비인간적이며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과학기술 장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생태테크놀로지, 해방적인 테크놀로지, 또는 대안적인 테크놀로지—은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단순성과 소규모입니다. 저는 모든 곳에서 이 단순성과 소규모가 가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구석기시대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정치적 입장은?

모호한 철학적 원칙들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고 확고하게 제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비위계적인 형태의 공동체들, 식품 협동조합들, 동호회들, 이런 유형의 모든 조직들, 마을모임들이 미국 전역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처음에는 지역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어쩌면 국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연합할 때, 바로 이 조직체들이 직접적으로 본보기가 되거나 교육을 통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이 감성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듯 먼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이후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반동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뿐만 아니라 현상유지라는 이름의 관료체제와 더불어 진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로 편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관료체제 형태로 편성된다면 지구 자체의 파멸이라는 궁극적으로 같은 결과로 끝날 것이므로 우리가 태양열 발전을 사용하든 신경가스를 사용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화석연료 대신에 태양열에너지•풍력•메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존재하는 바로 그 다국적•기업적•위계적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변명거리가 될 뿐일 것입니다.




축의 전환―트럼프의 쇠퇴, 녹색당의 부상 및 사회적 변화의 새로운 좌표

 


  • 저자  :  Otto Scharmer
  • 원문 : Axial Shift: The Decline of Trump, the Rise of the Greens, and the New Coordinates of Societal Change (2018년 9월 8일)
  • 분류 : 내용 정리
  • 옮긴이 : 민서

2018년 9월 7일에 있었던 미국 중간 선거가 미국이 좌파와 우파라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라는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오토 샤르머(Otto Scharmer)는 이 평가가 20세기 렌즈(즉 좌파냐 우파냐)로 21세기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와는 다른 시각으로 근본적인 축의 전환(axial shift)을 다루면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간의 좌표를 재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축의 전환은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좌표의 새로운 체계이다. 그에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중간선거는 물론 브라질•독일•이탈리아에서의 최근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갈등의 축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열린 쪽과 닫힌 쪽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축의 환은 정치에 국한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경제 및 교육 체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샤르머는 정치•경제•교육체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축의 전환—① 정치적 전환 ② 경제적 전환 ③ 교육의 전환—이 20세기의 전통적인 공적담론을 새로운 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전환>


그림 1 새로운 정치의 축

 

그림 1에서 가로축 방향은 20세기의 낡은 갈등선을, 세로축 방향은 부상하는 21세기의 양극성을 나타낸다. 가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예를 들어 ‘좌파’는 정부 서비스를 늘림으로써 문제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우파’는 개인들의 주도권을 촉진함으로써 같은 쟁점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세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열림(개방) 대 닫힘(폐쇄)라고 부른 것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새로이 선출된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를 통해 이 ‘닫힘’(Closed)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닫힘은 두려움•혐오•무지라는 세 요소를 증폭시키고 다섯 가지 행동 형태―① 맹목적임blinding(현실을 보지 않음) ② 감지하지 못함de-sensing(다른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함) ③ 결여됨absencing(자신의 최고의 미래와의 관련성을 상실함) ④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blaming others(반성할 능력이 없음) ⑤ 파괴함destroying(자연파괴, 관계 파괴 및 자기파괴)―로 나타나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샤르머는 이 다섯 가지 행동 형태들이 각본이 되어 지난 2년에 걸쳐 정치를 다시 만들었으며, 이는 이 행동 형태들이 마이크로 타기팅(micro-targeting)과 다크 포스트(dark post) 같은 소셜미디어 메커니즘들로 무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메커니즘들이 디지털 공명실(digital echo chamber)에서처럼 우리의 고립을 증가시키고 전례없는 수준에서 이런 치명적인 행동들을 증폭시킨 것인데 ① 미 연방 대법원에서의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인준 ② 학교, 종교기관 및 공공장소에서의 대량 총기 발사 ③ 기후변화가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최근 사례들에 해당한다. 한 가지 사례(기후변화)만 예를 들어보자.

 

과학적인 증거를 수용하지 않음(맹목적임). 특히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 희생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함(감지하지 못함).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을 해체함(결여됨). 기후과학과 기후 과학자들의 신뢰성을 적극적으로 약화시킴(다른 사람들을 비난함). 그리고 파리협약(Paris Agreement)에서 탈퇴함(문명을 자기파괴로 향하는 길로 몰아넣음).

 

그리고 샤르머는 이 사례들이 트럼프주의(Trumpism)의 각본이기도 해서 브라질의 트럼프로 평가되는 볼소나루가 선거운동에서 이 각본의 대부분을 따라할 만큼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에게 투표했는가? 샤르머는 이 물음에 낡은 체제가 유권자인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현 체제를 파열시키고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약속하는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 것이라고 답한다.

그림2: 두 개의 사회적 장: 함께 창조하기(현재화)의 주기 및 파괴하기(결여됨)의 주기

 

샤르머는 실제적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대안의 부재가 오히려 세로축의 위쪽 부분(그림 1, 2)에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활성화시킬 징후로 본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림1과 그림2에서 좌우 축의 바깥쪽과 위쪽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3 가량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했고, 독일에서 최근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도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D)과 중도보수당(CDU)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실패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한편 선거에서 부상한 두 주요 당선자는 세로축의 끝에 놓이는데 아래쪽 끝에는 난민에 반대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의 당선자가 놓이고 위쪽 끝에는 녹색당 소속의 당선자가 놓인다. 샤르머는 극보수주의적인 성향의 남부 바이에른에서의 독일 녹색당의 부상과 텍사스에서의 미국 민주당의 부상—민주당 소속의 베토 오르크(Beto O’Rourke)는 텍사스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테드 크루즈(Ted Cruz)와의 대결에서 선전했다—은 세로축의 위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총체적인 잠재성이 오늘날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샤르머는 정치부문에서의 축의 전환과 관련한 몇 가지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 브라질), 빅토르 오반(Viktor Orban, 헝가리), 야로슬라브 카친스키(Jaroslaw Kaczynski, 폴란드), 마테오 솔비니(Matteo Salvini, 이탈리아), 레제프 에르도간(Recep Erdogan, 터키), 블라지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그리고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의 부상은 (a) 세로축에서 아래쪽 끝에 위치하는 것으로 정의된 트럼프주의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b) 트럼프주의가 두려움•증오•무지의 확대를 가능케 한 소셜미디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그림 2).

 

– 독일에서의 녹색당의 부상, 미의회에서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여성 대표자들의 부상뿐만 아니라 동성혼 합법화를 주장한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알바라도(Alvarado)와 다수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조코위(Jokowi)의 승리도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무지•증오•두려움을 통해 호기심•연민•용기를 폐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연민•용기를 통해 정신•마음•의지를 열어젖힘으로써 현 정치 체제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드러낼 수 있음을 입증한다(그림 2).

 

–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세로축 주변에서 일어나는 열림과 닫힘 사이의 갈등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늘날 새로운 것은 다음의 3가지 조건들이다. ① 열림이냐 닫힘이냐라는 쟁점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 ② 우리에게는 지구가 가진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에 맞추어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변형시키기 위한 시간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③ 소셜미디어가 전례 없는 수준에서 치명적인 행동들(결여됨의 순환)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 트럼프하에서 미공화당(GOP)이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의 중심부에서 세로 스펙트럼의 아래쪽 끝에 있는 신민족주의적인 포퓰리즘(그리고 백인우월주의)적 견해를 충분히 수용하는 으로 움직였는데도 민주당은 더 좌파로 움직일 건지, 더 중도로 갈 건지, 더 포퓰리즘적이 될 건지 아니면 세로 스펙트럼에서 더 위쪽으로 움직일 건지를 논쟁하면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거운동은 미국 문명을 위한 더 대담한 새로운 내러티브(세로축의 위쪽 끝)를 제안할 기회를 놓치면서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주제(가령 헬스케어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낡은 렌즈를 통해 새로운 상황을 바라봄으로써 역사적 기회를 놓친 명확한 사례에 해당한다.

 

<경제적 전환>

 

경제적 좌표의 전환은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담론—어떻게 경제성장의 주기에 불을 가장 잘 점화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에 초점을 맞추는 담론—을 재형성하고 있다. 한 학파가 시장 메커니즘(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을 찬성했고 다른 학파는 정부 개입과 더 적극적인 거시경제적 운영(케인즈학파와 신케인즈학파)을 찬성했지만, 금세기 새로운 담론은 문제가 있는 성장패러다임이 모두를 위한 웰빙에 초점을 맞추는 탈성장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것인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림3: 새로운 경제의 축

 

샤르머는 그림 3에서처럼 낡은 담론과 낡은 패러다임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경제 담론의 새로운 좌표에서도 그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가로축은 경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정부중심적인 방식이냐 시장중심적인 방식이냐에 기초하지만 세로축은 더 많은 국내총생산이 더 많은 복지로 옮아가는 경향이 없다는 선진 경제의 경험적 발견에 기초한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국내총생산이 경제적 발전의 유익한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논의되는 대안 지표들로는 ⑴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NH) ⑵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 ⑶ 201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17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가 있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 좌표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 대부분의 낡은 패러다임들이 2008년도에 완전히 실패를 했지만 그 사고방식은 자본과 제도 속에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주류경제 담론은 여전히 20세기 경제사상인 가로축에 지배를 받고 있다.

② 세로축과 관련해서는 세로축의 아래쪽(즉 경제 민족주의)에서 그 사상이 더 역설되고 표현되는 반면에 세로축의 위쪽에서는 표현되더라도 규칙이 아닌 예외로 남는다(사례: 부탄, 코스타리카(([옮긴이] 코스타리카는 동성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부탄은 국민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이다.))).

③ 세로축의 윗부분의 특성은 많은 지역공동체들에서 발견되며 도시나 일국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지역 규모의 다부문 기획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④ 2030년까지 17개 지속가능한발전목표(SDGs)를 실제로 실행할 유일한 가능성은 공동작업과 민주적 참여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들을 지역 수준에서부터 창출하는 데 있으며, 그 목적은 모두를 위한 웰빙을 창출하기 위하여 즉 에고체계(ego-system) 인식에서 생태계(eco-system) 인식으로 (세로축의 아래쪽에서 세로축의 위쪽까지) 우리 경제의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의 전환>

 

교육의 새로운 좌표는 정보격차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네이오미 셰이퍼 라일리(Naomi Schaefer Riley)에 따르면 실제 정보격차는 “스크린 타임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과 더 많은 스크린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는 학교와 정치가들에게 속은 부모를 둔 아이들 사이에” 존재한다. 잡지『와이어드』(Wired)의 전 편집인인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도 “과거 정보격차의 핵심은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이었지만 이제 모든 사람이 테크놀로지에 접근하므로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새로운 정보격차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교육부문에서 대부분의 낡은 담론이 ‘공교육 대 사교육’—즉 좌파와 우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새로운 담론은 학습 유형에 더 중점을 둔다. 그림 4에서 보듯이 교육의 전환은 숫자•공식•사실을 외우기냐 아니면 전인교육의 관점에서 학습과 창의성에 접근하느냐(후자의 접근법은 생성적인 사회적 장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머리•가슴•손을 통합한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교육 좌표(그림 4)의 렌즈를 통해 드러나는 현 교육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림 4 새로운 교육의 축

 

① 현재 활동과 담론의 대부분은 낡은 사고방식의 축(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 등)의 손아귀에 아직 꽉 잡혀있다.

② 인공지능 혁명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재형성하면서 우리가 스펙트럼의 아래쪽(숫자•공식•사실 기억하기)에서 익히는 숙련도에 토대를 둔 일자리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인간 활동과 가치창출이 스펙트럼의 위쪽(인간적인 연민, 공감하는 인적서비스, 집단 창의성, 깊이 경청하기, 생성적인 대화, 집단적 공존, 공간 확보해주기, 내려놓기, 맞이하기(([옮긴이] 여기서 ‘공간을 확보해주기’(‘holding the space’)는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과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돕는 것이다. ‘내려놓기’(letting-go)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고 ‘맞이하기’(letting-come)는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이하는 것이다. 샤르머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기’와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는 ‘맞이하기’의 공존을 ‘presencing’(현재화)이라고 표현한다.)))을 향하도록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것이다.

③ 좋은 사립학교들이 학습 스펙트럼의 위쪽으로 도전을 해보기도 하지만 핀란드와 북유럽 국가의 교육 체계들을 제외하고 그런 시도를 해온 더 큰 학교 시스템의 사례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

 

샤르머는 시스템 변화에 기반을 둔 인식방법과 인식 도구를 제공하는 기반시설 및 현 세대의 변화 메이커들이 여러 시스템들·부문들·지형들에 걸쳐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을 주고 뒷받침을 하는 기반시설의 부족이야말로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이라고 진단한다,

 

정치와 경제에서의 축의 전환은 교육과 학습에서의 전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이 물음에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답한다. 20세기 담론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핵심이었지만 2018년에는 이데올로기는 없고 나-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로축에서의 차이—열림이냐 닫힘이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샤르머에 따르면 세로축에서의 차이는 의식, 다시 말해 우리가 연결되는 방식의 질의 차이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래쪽 두 개의 사분면에서 위쪽 두 개의 사분면으로의 전환은 자아체계 인식에서 생태계 인식으로의, 즉 나에서 우리로의 의식상의 전환인 것이다.

 

트럼프, 포퓰리즘 및 에고체계 인식에서 좋은 점은 현실화되고 있는 에너지와 주도권이며 나쁜 점(또는 그 한계)은 편협성이다. 이러한 ‘자잘한’ 자아는 상호의존으로 이루어진 우리 시대의 실질적인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복잡함과 상호의존은 정신의 개방, 마음의 개방, 의지의 개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이런 개방과정에 참여할 때—심판의 소리, 냉소의 소리, 두려움의 소리에 둘러싸인 그 모든 것에 도전할 때—우리는 근본적으로 에고에서 생태로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부터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속한 다른 모든 존재들의 관점에서부터 상황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르머는 셀 수 없이 많은 개인들, 집단들 및 조직체들이 에고체계 운영방식에서 생태계 운영 방식으로 옮겨가도록, 즉 세로축의 위쪽으로 옮겨가도록 요구하는 과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여정에서 그들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종종 혼자라고 느끼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우리가 열림(개방)과정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 열림(개방)과정—그리고 이 과정을 규모있게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에 바탕을 둔 방법들과 도구들—은 아마도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하지만 지원을 잘 받지 못하는 과정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들 때문에 종종 놓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고로 집중할 만한, 형성중인 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사회변형랩>

 

실제로 샤르머는 동료들과 <프레즌싱 인스티튜드>(Presencing Institute)를 운영하며 세로축의 위쪽 부분을 규모있게 활성화하기 위해 일하고 있고, 부문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수 글로벌 네트워크들 및 조직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변형랩>(Societal Transformation Lab)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획과 기반시설을 2019년 초에 출범시켰으며, 이 랩은 각자가 속한 조직체 및 생태계에서 지대한 혁신을 위해 일하는 팀들과 조직체들에게 필요한 다지역 혁신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을 올라간 2018년 9월 8일은 이 기획의 파트너들을 모집하기 위해 새로운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해서 샤르머는 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랩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 랩을 통해 세계 전역에서 변화 메이커들이 모일 수 있다. 팀들과 조직체들은 s.lab의 온라인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 플랫폼은 부문들, 시스템들 및 지형들에 걸쳐 있는 변화 메이커들이 서로의 학습, 리더십 및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을 지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홀로체인―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넘어서


  • 저자  :  Hank Sohota
  • 원문 : Beyond Bitcoin and Ethereum — a fairer and more just post-monetary sociopolitical economy (2019. 1. 2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화폐는 사회적 구축물로서 사람들의 신뢰에 의존한다. 그 기능은 ① 가치저장 ② 교환수단 ③ 회계단위, 이 셋이다. 그런데 화폐가 큰 규모로 작동하려면 표준화가 필요하고, 이는 불가피하게 중앙집중화를 낳는다. 불행하게도 중앙집중화는 ‘화폐의 경화적 성격’(hardness of money)[가치의 안정성(‘uninflatability’)]과 사람들의 신뢰를 침식한다. 의사결정이 소수의 손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수는 그들의 책임을 오용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폐의 경화적 성격과 신뢰의 수준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의식은,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 없이 어떻게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계하고 협동하고 협력하는가?’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나키’라는 성배(聖杯)를 나타낼 수도 있다. (여기서 ‘아나키’는 단순한 무법, 혼란, 무질서와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의 한계]

비트코인은 ‘경화( 硬貨)의 중앙집중화’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이다. 이는 더 큰 그림에 넣고 보면 좋은 출발점이다. 비트코인은 이 일을 위해 해시체인(hashchain) 블록들의 분산된 원장을 사용해서 변경 불가능성을 부여하고, ‘하드 코딩’을 통해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하며 탈중심화된, 그러나 온전히 분산되지는 않은 작업증명(Proof of Work, PoW)을 사용하여 단 하나의 네트워크 전체에 걸친 타임라인을 구축하고, 합의 메커니즘을 통해 검열 불가능성을 확보한다. 이렇듯 개별 주체나 행위자보다는 네트워크를 신뢰함으로써 ‘신뢰 부재’(trustlessness)의 한 형태가 형성된다.

그런데 실용상의 한계 및 철학적 한계로 인해서 이 접근법은 부분적이고 비실용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한다. 충분히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충분히 빠르지 않다는 것, 비용 효율이 충분히 높지 않다는 것, 충분히 규모를 키우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한계이다. 더군다나 비트코인은 앞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생성에 재정적으로 큰 혜택을 주지 못하는 한, 아니 더 나아가 녹색에너지 기반시설의 구축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한, 코인 채굴에 들어간 전력 소비 때문에 기후변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많이 밀어붙였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의 모든 중기 개선책들이 의도된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결점들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더라도 비트코인의 네 핵심 특성들―변경 불가능성, 가치 안정성, 검열 불가능성, 몰수 불가능성(unconfiscatability)―은 역사적 성취로 남아있다.

[이더리움의 한계]

이더리움은 반드시 비트코인이 해결하려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비트코인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장 기술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한계를 가진다. 여기에 더 추가할 것으로서, 권력의 중앙집중화 문제, 비트코인에 비한 암호화페로서의 단점들, 스마트계약의 문제점들, 지분증명(Proof of Stake, PoS)이라는 합의 메커니즘으로의 이동 시도 등이 있다.

이더리움이 한 일은 수 천 개의 대안코인들을 출시한 것인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또한 이 코인들이 주장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새로운 자산계층과 규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임을 감안하다면, FOMO-FUD라는 ‘서부’가 출현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FOMO (Fear Of Missing Out) : 코인이 막 상승 중일 때 지금 사지 않으면 돈을 못 번다는 일종의 강박감에 추격매수하는 것을 이르는 말; FUD (fear, uncertainty and doubt) : 하락장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팔아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 정리자]

[상호적 자기주권(mutual self-sovereignty)―공정하고 정당한 사회정치적 경제의 토대가 되는 핵심 구축물]

경제는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번영 가능성(thrivability)에 강하게 집중해야 한다. 다소 단순화하자면, 번영 가능성의 핵심부에는 집단의 유대(solidarity)와 개인의 주권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그런데 유대와 주권은 사실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 둘은 서로를 구성하며 공생적으로 함께 진화한다. 이 둘은 ‘변증법적 특이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상호적 자기주권을 통하여 조화에 도달한다. (음양의 상호작용과 같다.) 이 동학에서는 사회적 결속과 개인의 주권이 둘 다 강한 동시에 유동적이다. 이는 도교 철학에서 종종 물의 은유를 사용하여 나타내는 개념이다. 저자의 생각에 이 영속적인 동학을 통하여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이 높아진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영속적으로 출현/창발한다. [‘anti-fragility’ 개념을 만들어낸 탈렙(Nassim Nicholas Taleb)에 따르면 ‘resiliency’(복원력)는 실패로부터 회복하는 능력이고, ‘robustness’(튼실함)는 실패에 저항하는 능력이며,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은 스트레스, 휘발성, 소음, 실수, 외부로부터의 공격, 실패의 결과로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는 속성을 가리킨다.―정리자]

더 나아가, 그리고 더 중요한 점으로서, 그런 모든 게임에서 규칙들은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참여자들에 의해서 시행되고 운용된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거버넌스이다. 규칙들의 상대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전체적 합의는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런 합의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시 중앙집중화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특히 이들을 지탱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비판적이고 중요한 촉매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실제 작동에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비트코인의 분산된 원장 테크놀로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P2P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과제를 담당할 수단이 되리라는 생각에 고무된 사람들조차 지금은 그 한계를 인식하고 또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더리움 관련 개발자들 가운데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다.

[홀로체인]

이와 달리 홀로체인(Holochain)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 줄 것이다. 홀로체인은 인류의 역사에서 상호적 자기주권의 문제와 진정으로 씨름한 최초의 테크놀로지이다. 홀로체인의 효율과 효능은 네트워크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향상된다. 사실 홀로체인은 이더리움과 비트코인 이전에 이미 메타커런시(MetaCurrency)와 쎕터(Ceptr) 프로젝트의 필수적 구성부분으로서 등장했다.

홀로체인은 아나키를 출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기술―생체모방(bio-mimicry)에서 영감을 얻고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기술―을 제공한다. (여기서 아나키란 대규모의 중개/매개intermediation를 필요로 하지 않은 삶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홀로체인은 우리가 자산에 기반을 둔 수많은 상호신용 (암호)화폐―이들은 홀로체인에서 상호 운용 가능하다―를 통해 기존의 화폐가 지배하는 시기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통화(通貨) 정의는 훨씬 더 광범한 것이다. 통화는 가치·약속·평판의 흐름들을 형성하고 가능하게 하며 측정하는 형식적인 상징체계로서 정의된다. 저자 생각에 이는 하이에크의 사유에 대한 해석으로서 신자유주의적 해석보다 훨씬 더 계몽된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가치 흐름이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되기 전에 먼저 인정되어야 한다. (GDP 관련 흐름만을 가시화한 것은 인류와 지구에 재앙이 되었다.) 그렇게 인정될 때에만 우리는 상호연관된 긍정적 흐름들은 강화시키거나 증폭시키고 상호연관된 부정적 흐름들은 완화시키거나 제거하는 작업을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수를 위해, 심지어는 모두를 위해, 더 의미 있고 더 인간적인 부와 번영을 창출할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대규모 탈매개(Disintermediation)]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홀로체인이 가져올 경제적 및 사회정치적 혁명은 그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그것이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체인은 어떤 규모로든 빠른 속도로, 제로의 한계비용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에서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심지어는 서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컴퓨팅 장치에도 설치될 수 있다.

제일 처음 만들어진 h앱(hApp, Holochain dApp)은 홀로(Holo)이다. 이는 h앱들을 호스팅하기 위한 h앱으로서 홀로퓨얼(Holo Fuel)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상호신용 암호화폐를 포함하고 있다. 이 화폐는 h앱들에 여벌의 컴퓨터나 아니면 현재 쓰는 장치의 저장 공간을 제공해주는 홀로 호스트들에게 보상해주는 데 사용된다. 이로 인해 모질라(Mozilla)의 파이어폭스(Firefox) 같은 표준적인 브라우저를 사용하여 웹에서 h앱들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호스팅을 피할 수도 있다. 홀로체인을 돌리는 장치는 모두 사용자인 동시에 호스트이기 때문이다. 홀로의 목적은 현재의 서버 기반 웹과 미래의 (P2P이기에) 서버 없는 대안적 홀로체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메시 네트워킹(mesh networking)[각각의 노드가 직접, 수평적으로 네트워크에 데이터를 중개하는 네트워크 토폴로지. 모든 노드가 다른 모든 노드에 연결되는, 뿌리줄기적 연결방식이다―정리자]이 가능할 것이며, 이는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분산된 인터넷과 웹을 의미할 것이다.

더 나아가 홀로체인의 데이터 무결성 모델은 데이터 중심적(data-centric)이기보다는 행위자 중심적((agent-centric))이기를 지향함으로써 상호적 자기주권을 지원한다. 홀로체인은 소스체인(행위자가 소유하는 해시체인hashchains을 생각해보라)과 디지털 서명을 사용하고 분산된 해시 테이블을 확증한다(비트토렌트BitTorrent와 깃허브GitHub를 생각해보라).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와 기밀성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가치실현과 가치소유가 가치를 추출하여 화폐화하려는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귀속된다.

[궁극적 물음]

상호적 자기주권은 일단 작동 가능하고 실용적이며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사회적·정치적·경제적·예술적·문화적 측면)을 다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향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나 서로에게, 같은 세대 내에서나 서로 다른 세대 간에 하는 이야기들의 성격이 완전히 변할 것이다. 여기에 쎕터와 쎕터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은 말할 것도 없고 발전된 심층 및 강화 학습 인공지능이 가세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21세기에 인간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파악하고 다시 정의하게 될 것이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




팹아카데미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an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 (201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위 책의 1장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서설의 내용은 이 블로그의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1233와 http://commonstrans.net/?p=1246에 정리되어 있다. 이번 정리글의 핵심은 팹랩의 확산과 연계되어 발전된 ‘팹아카데미’라는 이름의 학습모델이다. 한국에서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정리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제도권 교육모델(대학 포함)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시대에 뒤쳐졌음이 확실하며, 제도권이 스스로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학습모델의 탐색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정리자 자신은 개인블로그의 글 「‘십오 소년 표류기’ 7」에서 리눅스 같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공동체들에서 파생된 학습모델인 ‘넷아카데미’를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팹아카데미’는 이 ‘넷아카데미’의 새로운 형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대학과 무관한 ‘넷아카데미’와 달리 ‘팹아카데미’는 대학과 대학 외부(지구 전역)에 걸쳐서, 양자를 가로질러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의 대학들―물론 정신을 차린 대학들―이 본받을 만한 사례일 듯하다.

[팹랩이란?]

팹랩(Fab lab)은 제작(fabrication)을 위한 실험실로서 MIT의 <비트와 원자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CBA)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CBA는 컴퓨터과학(‘Bits’)과 물리과학(‘Atoms’) 사이의 경계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CBA에는 낮게는 천 달러에서 높게는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팹랩은 만일 CBA의 도구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들이 외부로 널리 쓰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려고 했다. 2002년 칼박(S. S. Kalbag)이 학교에서 낙오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일부러 인도의 작은 마을 파발(Pabal)에 세웠다. CBA는 비싼 특수목적 랩 장비에 투자하기보다 농업테스트 같은 목적을 위한 랩 기구들을 이 학교에 만들어 주는 협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팹랩 제0호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보스턴의 공동체 활동가 킹(Mel KIng)의 <사우스엔드 테크놀로지 센터>(South End Technology Center, SETC)에 설치되어 2005년 온전한 공동체 팹랩으로 성장한 것이 제1호이다. 제2호는 보스턴의 가나인 공동체가 킹의 랩을 본 후 협동하여 가나의 해안에 있는 쎄스코디-타코라디(Sekondi-Takoradi)에 세운 팹랩이다. 새 팹랩을 열 때마다 또 필요한 누군가가 생겼으며, 이렇게 해서 팹랩은 10년 동안 매해 2.5배씩 늘어났다.

 

팹랩의 수가 두 배씩 몇 번에 걸쳐 증가한 2005년에 닐 거션펠드는 『랩』이라는 책을 썼다. 도어티(Dale Dougherty)는 ‘maker’(제작자)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새로이 출현하는, 팹랩에 있는 종류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컴퓨팅을 제작과 연결시키는 덕후들의 공동체를 지칭했다. 그는 2006년에 ‘메이커 페어’(Maker Faire)라고 불리는 모임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인 2015년의 것에는 145,000명이 방문했다.

 

2006년에는 뉴턴(Jim Newton)이 대부분의 개인들이 구할 수 없는 디지털 제작 도구들에의 접근을 제공하는 텍샵(TechShop)을 창립했다. 텍샵들은 회원제로 운영되었으며 2016년 현재 10개가 있다. 좀 덜 본격적인 것으로서 메이커스페이스들(maker space)이나 해커스페이스들(hacker spaces)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이 공간들은 제공하는 것은 공간마다 매우 다르지만 현재 수천 개가 있다.

 

2007에는 버닝맨 모임으로 가져간 이동형 팹랩이 처음 선을 보였다. (버닝맨 모임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 참조.) 이동형 랩은 나중에 시골 지역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네트워크 내에 네트워크를 심는 팹랩들이 되었다.

 

이 모든 팹랩들은 3차 디지털 혁명의 초기 발현형태들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생태계에서 팹랩들은 두 가지 변별적 특징을 가진다. ① 팹랩들은 각기 다르다기보다는 모두가 진화하는 일단의 핵심 능력들을 공유하여 팹랩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기획들이 공유될 수 있게 해준다. 멧 칼프의 법칙(Metcalfe’s Law):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가치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컴퓨터들의 제곱에 비례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운동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면, 혹은 팹랩에서 작업하면, 다른 컴퓨터들이 접속할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팹랩에서 같이 작업할 때 가치가 증가한다. 팹랩 네트워크에서는 사람도 기획도 모두 이동적이며, 개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② 다른 변별적 특징은 그 콘텐츠의 연계된 진화이다. 공동사용하는 기계들, 재료들, 부품들, 프로그램들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팹랩들에 의해서 그리고 팹랩들을 위해서 개발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위한 오픈 디자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팹랩이 또 하나의 팹랩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을 목표로 잡아서 가고 있다. 팹랩에서 사용하는 각 유형의 기계의 비용은 그동안 저렴해져왔지만, 팹랩에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포부 또한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서 전체적인 비용은 거의 비슷하게 공동체의 자원의 규모 정도에 머물러있다.

 

이 두 특징들로 인해서 팹랩들의 모음은 네트워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각 사이트는 개별적으로는 별 것이 없지만, 이 사이트들을 모아놓으면 중요한 덩치가 된다. 아무도 팹랩을 시작하라고 밀어붙이지 않는데, 사이트들이 계속해서 네트워크에 합류한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놀라움은 팹랩의 사용방식이 세계 전역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멜 킹이 이 점을 포착했다. 는 북극에 몇 시간 있더라도 거기서 도시의 랩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희망과 두려움을 인식하리라는 것이었다.

 

팹랩들에 공통적인 것은 노소가 혼합되어 있고 응용분야가 교육, 오락, 사업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팹랩들은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00년 무렵 카네기가 투자하여 공동체 도서관들을 세웠는데,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전국에 걸쳐 약 2500개가 세워졌다. 도서관의 전반적인 사명은 리터러시, 즉 지식에의 접근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도서관들은 이 사명의 달성에서 여러 목적들(사설보육소, 학교 수업, 연구, 시정市政)을 위해 사용되었다. 도서관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문명화된 공동체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팹랩들 또한 그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다만 이제 팹랩들은 비트에서 원자로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리터러시를 목적으로 한다.

 

 

[팹아카데미]

 

CBA가 디지털 제작 연구시설을 일단 갖추고 나자 생긴 문제가, 이 도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있고 또 그 작동 규모로 인해서 학생들이 그 사용법을 모두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 MIT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2001년에 편법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How to Make (almost) Anyth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강의를 개설했다. 디지털제작을 연구하는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강의에 뜻밖에 매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들으러 왔다. 그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지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학생들은 개별적인 기술을 마스터함과 아울러 이 기술들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들을 했다. 첫 해의 스타 가운데 하나는 켈리 돕슨(Kelly Dobson, 나중에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의 Digital+Media학과의 학과장이 된다)인데 그녀는 비명(screams)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내보내는 착용장치를 만들었다. 윤미진(Meejin Yoon, 나중에 MIT 건축학과장이 된다)은 센서들과 등뼈 모양의 구조물들로 가득하여 개인 공간을 방어할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기획들이 계속 이어졌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묻지 않았던 질문, 즉 디지털 제작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제작 방법을 묻고 있었지 이유를 묻고 있지는 않았는데, 학생들이 디지털 컴퓨팅의 킬러앱은 퍼스털 컴퓨팅이듯이, 디지털 제작의 킬러앱은 퍼스널 제작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핵심은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CBA의 연구도구 사용법 수업이 필요했듯이 팹랩들의 확산도 전지구적으로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똑똑한 아이들은 지역 교육이 주는 기회를 훨씬 앞서는 기술을 팹랩들에서 배우고는 그 다음에 급격히 능력이 하강하곤 했다.

 

브루볼트(Hans-Kristian Bruvold)는 노르웨이 북쪽의 한 지역학군에서 일종의 문제아였다. 이미 선생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마스터해서 주의집중을 잘 안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한 팹랩에 나가기 시작했고 거기서 저자를 만났으며 저자는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의 몇 가지 데모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다시 만났을 때 저자는 그가 장난감 로봇 트럭에 여러 기술을 통합해 넣은 것을 보고 놀랐다. 몸체를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모터와 제어장치를 통합해 넣고 방풍유리 디스플레이를 추가했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인종차별시기의 한 흑인거주구인 쏘샹구베(Soshanguve)에 팹랩을 열었을 때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 소녀인 모나헹(Tshepiso Monaheng)이 놀랍게도 랩을 이용하여 원격으로 MIT 수업 내용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라면 브루볼트나 모나헹 같은 똑똑한 아이들은 멀리 떠나서 더 나아간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동은 유용한 사람들을 그들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떠나보낸다. 우리는 처음에 세계 전역의 지역 학교들과 짝이 되어 이 진공을 채우려고 했는데, 기술적 숙련보다 훨씬 더 큰 한계는 학교의 엄밀히 통제되는 교육 접근법이 창조성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늘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팹아카데미(Fab Academy)라고 불리는 것을 시작했다.

 

팹아카데미는 원래 팹랩들이 원격으로 MIT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마련한 비디오 링크에서 자라나왔다. 직접 듣는 학생들보다 팹랩들이 더 많아지면, 원격 세션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분리했다. 원래 원격 학생들이었던 지역 멘토들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새 학생들은 지역 팹랩에 있는 작업그룹에 합류해서 멘토들, 동료들, 기계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비디오를 사용한 대화식 강의와 협동적 내용공유를 통해 모두를 전지구적으로 연결했다.

 

MIT를 컴퓨터 메인프레임으로 보면 된다. 잘 작동하지만 소수에게만 유용하다. 대형공개온라인 강의(massive open online classes, MOOCs)는 사용자들이 중앙메인프레임에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 있는 시분할 시스템(time-sharing, 각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자원을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으로서 출력이 사용자에게 표시되고 입력을 키보드에서 읽어 들이는 대화식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다) 시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팹아카데미 모델은 학습네트워크상의 노드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에 더 가까우며, 이 노드들은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확대된다.

 

처음에는 저자가 직접 모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팹아카데미 모델이 성장하면서 저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멘토들을 지도했다. 모델이 더 성장하면서 저자는 지역 랩들을 지도하기 위해 출현한 상위노드들(supernodes)을 지도했다. 이런 식으로 이 모델은 인터넷과 유사해졌다. 나무처럼 줄기, 가지, 잎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인터넷처럼 모든 노드는 다른 모든 노드와 대화할 수 있었다. 팹아카데미의 일주일 생활의 중심은 거대한 화상회의였다. 여기서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을 보고 다른 모든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이전 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포함되고 다음 주의 새로운 일감에 대한 대화식 소개가 포함된다. 이 모든 협동과정은 중앙사무실보다는 아씨나리(Luciana Asinari)가 이끄는 분산된 작업그룹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구조에서는 품질 통제를 위해 관계들의 망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edu’ 도메인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했다. 우리는 미래의 입학, 취업, 투자를 위해서는 미지의 단체로부터의 증명서보다는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콘텐츠를 만들고 평가를 하는 하나의 주기가 도는 데 약 8개월 걸리지만, 학생들의 진전은 수업을 들은 시간보다는 기술의 숙달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학생들은 모든 것을 완료하는 데 몇 년 걸렸다. 학생들의 수준은 홈스쿨링한 천재들, 대학생들, 대학에 가는 대신 이것을 배우는 사람들, 중견 전문가들, 말년에 재훈련하는 사람들, 퇴직 후 취미로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지역 학습 워크그룹들의 전지구적 연결은 팹랩들의 분산된 성격과 멘토링의 필요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좋은 멘토링이 부재하면 형편없는 생각들이 번성한다. ‘maker’라는 이름은 ‘열정적’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잘 모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가진다. 메이커운동의 기본 요소는 아두이노(20달러짜리 작은 컴퓨터 보드로서 센서 해독, 출력장치 통제, 네트워크와의 소통이 가능하다)이다. 팹아카데미는 아두이노를 소개한 다음에, 팹랩에서 몇 달러로 부품들을 조립하여 그런 보드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학생들은 쌀알만 한 크기에서 데스크탑을 돌릴 수 있는 사이즈의 다른 컴퓨터 칩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제작자운동의 또 다른 기본요소는 3D프린터이다. 팹랩은 학생들에게 3D프린터 사용법을 보여준 다음에 더 빨리 작동하고 더 크고 강한 것들 혹은 더 정밀한 것들을 만드는 모든 다른 디지털 제작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3D프린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례들 각각이 쉬운 기술을 배우는 데서 어려운 기술을 마스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로를 제공한다.

 

‘스스로 하기’(Do-it-yourself)는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기보다 자신의 발끝으로 서게 하는 방법이다. ‘같이 하기(do-it-together)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do-it-with-others)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밖에도 팹아카데미가 선순환의 심장부에 있음을 발견했다. 각 주기는 최고의 수행 사례들을 팹랩 네트워크 전체에 전파하면서 지역 멘토들로 이루어진 핵심 협동 공동체를 구축하고 나중에 새로운 랩들과 프로그램들을 돕게 될 훈련된 학생 무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팹아카데미는 디지털 제작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조합한 것의 많은 부분은 거기에만 맞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반시설은 원거리학습(distance learning)이 아니라 어떤 종류든 분산된 학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놓쳤지만 소통, 컴퓨팅, 제작, 학습 사이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해주고 디지털 컴퓨팅이 지식을 공유하게 해주는 한편 여기에 추가되는 디지털 제작은 아이디어들만이 아니라 사물들을 교환할 수 있게 해준다. 팹랩의 핵심적 도구들이 있으면,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캠퍼스를 효과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유력한 유전학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하버드 너머의 학생들과 만나는 데 관심을 가져서 ‘(거의) 모든 것을 키우는 법’(How to Grow (almost) Anything)이라는 이름의 분산된 학급을 팹랩 네트워크에 추가했다. 디지털 제작과 생물학적 제작을 결합시킨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바이오랩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데 팹랩을 사용할 수 있다. (생물학 장치들은 종종 가격이 센 편인 동시에 거추장스럽다.) 팹랩에서 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 DNA 증폭을 위한 열순환기나 액체를 다루는 로봇 같은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왔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생물학 자체가 제작에 사용될 수 있다. 생물학적 과정들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방식이며 우리는 팹랩들과 바이오랩들이 합류하면서 이 과정들을 프로그램하는 법을 점점 더 배우고 있다.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세계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처치처럼 그도 그의 영향력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 너머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왜’ 만드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드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과정이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 ‘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가’라는 이름의 다른 분산된 학급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저자의 학생 피크(Nadya Peek)가 이 점증하는 프로그램들을 ‘(거의) 모든 것의 아카데미’(the Academy of (almost) Anything)라고 불렀고 이 이름 혹은 그것을 줄인 ‘아카뎀애니’(Academany)라는 이름이 고정되었다. 현재 이 아카데미는 그레노블 팹랩(the Grenoble fab lab)을 시작한 몰레나르(Jean-Michel Molenaar)가 관리하고 있다. 제공하는 학습 각각은 지역 워크그룹의 모델을 따르고 멘토들은 대화식 강의를 위해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용을 협동적으로 공유한다.

 

팹랩들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동안 저자는 MIT에 새 건물이 짓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시작에서 끝까지 10년 걸렸고 1억 달러가 들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설이 제공된다. 지난 10년에 걸쳐 출현한 수 천 개의 팹랩들 각각은 약 100명의 사용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명백한 문제를 제기한다. 1억 달러 투자 대 10만 달러 투자의 차이를 정당화는 활동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존의 MIT 조직은 희소성의 전제에 기반을 둔다. ① MIT는 랩에 있는 도구, 도서관의 책, 교수들의 시간에 대한 접근을 관리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지원자들을 거절하고 캠브리지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다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② 온라인 학습플랫폼에 연결된 컴퓨터 앞에 학생이 홀로이 앉아있는 것을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③ 팹아카데미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학생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습공동체들 속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대안은 원격교육이 아니라 팹랩 아카데미가 보여주는 분산된 교육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물음은, MIT 같은 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의 어느 만큼이 이런 식으로 분산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욕구가 중앙집중화될 수 있느냐이다.

 

저자는 ‘반’이라고 말한다. 팹랩을 열 때마다 MIT에서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동료들, 멘토들, 도구들을 다른 데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팹랩에 그렇게 꾸준하게 나온다. 그래서 MIT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반 정도는 팹랩 환경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반은 더 많은 비싼 도구들(가령 분자 규모의 분자어셈블러를 개발하는 데 사용하는 나노과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비싼 도구들을 사용하는 기술과 지식은 너무나도 전문화되어 있어서 모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이 이루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유형의 공간은 대립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만 달러 제작 공간, 십만 달러 팹랩, 백만 달러 수퍼 팹랩, 천만 달러 연구랩들을 가진 하나의 나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위로 키우기보다 바깥으로 키워야 지구 전체의 브레인파워를 가져다 쓸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 있다.

 

페이퍼트(Seymour Papert)는 컴퓨터와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선구적 아동심리학자 삐아제(Jean Piaget)와 함께 연구했는데, 삐아제는 어린아이들이 과학자처럼, 즉 실험을 하고 이론을 테스트하면서 배운다고 주장했다. 그후 페이퍼트는 MIT에 와서 초기의 리얼타임 디지털 컴퓨터들에 접근하여 어린아이들에게 가능한 실험의 범위를 확대하고 싶었다. 이는 그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컴퓨터들이 너무 비싸고 너무 컸던 것이다. 그 대신에 페이퍼트는 컴퓨터에 연결된 로봇 거북이와 어린아이들이 그 거북이들에게 명령할 수 있게 하는 언어(로고, Logo) 개발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케이(Alan Kay)인데, 케이는 GUI와 랩탑의 컴퓨팅 패러다임들을 개발했다. 이 디자인 원칙들은 원래 사업가들로 하여금 스프레트시트를 작성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려고 의도된 것이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한 또 한 사람은 레스닉(Mitch Resnick)인데, 레스닉은 레고 마인드스톰(Lego Mindstorms, 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까지 할 수 있는 레고 모델)을 개발했다. 레스닉은 또한 아이들이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 스크래치(Scratch, 아이들에게 그래픽 환경을 통해 컴퓨터 코딩에 관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 및 환경)의 창출을 이끌었다.

 

팹랩이 두 배씩 증가하기 시작하고 팹아카데미도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페이퍼트는 저자를 찾아와서 팹랩에 대해 대화했다. 저자는 팹랩 전체를 역사상의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페이퍼트는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그는 아이들이 거북이의 움직임을 프로그램할 수는 있으나 막상 거북이 자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늘 골칫거리였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거북이를 만드는 것이 늘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팹랩에서의 학습은 그가 수십 년 전에 시작한 작업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앙컴퓨터를 가지고 놀러 MIT에 가는 것에서 컴퓨터를 탑재한 장난감을 상점에서 사서 노는 것으로, 거기서 다시 팹랩에 가서 컴퓨터를 만들며 노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다.

 

[참고] 팹랩 및 팹아카데미 관련 동영상

fablab
https://youtu.be/aPKH60sW_CM

https://youtu.be/sHb2YU0Nyv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