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




팹아카데미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an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 (201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위 책의 1장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서설의 내용은 이 블로그의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1233와 http://commonstrans.net/?p=1246에 정리되어 있다. 이번 정리글의 핵심은 팹랩의 확산과 연계되어 발전된 ‘팹아카데미’라는 이름의 학습모델이다. 한국에서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정리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제도권 교육모델(대학 포함)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시대에 뒤쳐졌음이 확실하며, 제도권이 스스로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학습모델의 탐색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정리자 자신은 개인블로그의 글 「‘십오 소년 표류기’ 7」에서 리눅스 같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공동체들에서 파생된 학습모델인 ‘넷아카데미’를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팹아카데미’는 이 ‘넷아카데미’의 새로운 형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대학과 무관한 ‘넷아카데미’와 달리 ‘팹아카데미’는 대학과 대학 외부(지구 전역)에 걸쳐서, 양자를 가로질러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의 대학들―물론 정신을 차린 대학들―이 본받을 만한 사례일 듯하다.

[팹랩이란?]

팹랩(Fab lab)은 제작(fabrication)을 위한 실험실로서 MIT의 <비트와 원자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CBA)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CBA는 컴퓨터과학(‘Bits’)과 물리과학(‘Atoms’) 사이의 경계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CBA에는 낮게는 천 달러에서 높게는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팹랩은 만일 CBA의 도구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들이 외부로 널리 쓰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려고 했다. 2002년 칼박(S. S. Kalbag)이 학교에서 낙오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일부러 인도의 작은 마을 파발(Pabal)에 세웠다. CBA는 비싼 특수목적 랩 장비에 투자하기보다 농업테스트 같은 목적을 위한 랩 기구들을 이 학교에 만들어 주는 협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팹랩 제0호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보스턴의 공동체 활동가 킹(Mel KIng)의 <사우스엔드 테크놀로지 센터>(South End Technology Center, SETC)에 설치되어 2005년 온전한 공동체 팹랩으로 성장한 것이 제1호이다. 제2호는 보스턴의 가나인 공동체가 킹의 랩을 본 후 협동하여 가나의 해안에 있는 쎄스코디-타코라디(Sekondi-Takoradi)에 세운 팹랩이다. 새 팹랩을 열 때마다 또 필요한 누군가가 생겼으며, 이렇게 해서 팹랩은 10년 동안 매해 2.5배씩 늘어났다.

 

팹랩의 수가 두 배씩 몇 번에 걸쳐 증가한 2005년에 닐 거션펠드는 『랩』이라는 책을 썼다. 도어티(Dale Dougherty)는 ‘maker’(제작자)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새로이 출현하는, 팹랩에 있는 종류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컴퓨팅을 제작과 연결시키는 덕후들의 공동체를 지칭했다. 그는 2006년에 ‘메이커 페어’(Maker Faire)라고 불리는 모임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인 2015년의 것에는 145,000명이 방문했다.

 

2006년에는 뉴턴(Jim Newton)이 대부분의 개인들이 구할 수 없는 디지털 제작 도구들에의 접근을 제공하는 텍샵(TechShop)을 창립했다. 텍샵들은 회원제로 운영되었으며 2016년 현재 10개가 있다. 좀 덜 본격적인 것으로서 메이커스페이스들(maker space)이나 해커스페이스들(hacker spaces)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이 공간들은 제공하는 것은 공간마다 매우 다르지만 현재 수천 개가 있다.

 

2007에는 버닝맨 모임으로 가져간 이동형 팹랩이 처음 선을 보였다. (버닝맨 모임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 참조.) 이동형 랩은 나중에 시골 지역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네트워크 내에 네트워크를 심는 팹랩들이 되었다.

 

이 모든 팹랩들은 3차 디지털 혁명의 초기 발현형태들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생태계에서 팹랩들은 두 가지 변별적 특징을 가진다. ① 팹랩들은 각기 다르다기보다는 모두가 진화하는 일단의 핵심 능력들을 공유하여 팹랩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기획들이 공유될 수 있게 해준다. 멧 칼프의 법칙(Metcalfe’s Law):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가치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컴퓨터들의 제곱에 비례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운동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면, 혹은 팹랩에서 작업하면, 다른 컴퓨터들이 접속할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팹랩에서 같이 작업할 때 가치가 증가한다. 팹랩 네트워크에서는 사람도 기획도 모두 이동적이며, 개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② 다른 변별적 특징은 그 콘텐츠의 연계된 진화이다. 공동사용하는 기계들, 재료들, 부품들, 프로그램들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팹랩들에 의해서 그리고 팹랩들을 위해서 개발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위한 오픈 디자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팹랩이 또 하나의 팹랩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을 목표로 잡아서 가고 있다. 팹랩에서 사용하는 각 유형의 기계의 비용은 그동안 저렴해져왔지만, 팹랩에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포부 또한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서 전체적인 비용은 거의 비슷하게 공동체의 자원의 규모 정도에 머물러있다.

 

이 두 특징들로 인해서 팹랩들의 모음은 네트워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각 사이트는 개별적으로는 별 것이 없지만, 이 사이트들을 모아놓으면 중요한 덩치가 된다. 아무도 팹랩을 시작하라고 밀어붙이지 않는데, 사이트들이 계속해서 네트워크에 합류한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놀라움은 팹랩의 사용방식이 세계 전역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멜 킹이 이 점을 포착했다. 는 북극에 몇 시간 있더라도 거기서 도시의 랩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희망과 두려움을 인식하리라는 것이었다.

 

팹랩들에 공통적인 것은 노소가 혼합되어 있고 응용분야가 교육, 오락, 사업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팹랩들은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00년 무렵 카네기가 투자하여 공동체 도서관들을 세웠는데,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전국에 걸쳐 약 2500개가 세워졌다. 도서관의 전반적인 사명은 리터러시, 즉 지식에의 접근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도서관들은 이 사명의 달성에서 여러 목적들(사설보육소, 학교 수업, 연구, 시정市政)을 위해 사용되었다. 도서관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문명화된 공동체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팹랩들 또한 그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다만 이제 팹랩들은 비트에서 원자로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리터러시를 목적으로 한다.

 

 

[팹아카데미]

 

CBA가 디지털 제작 연구시설을 일단 갖추고 나자 생긴 문제가, 이 도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있고 또 그 작동 규모로 인해서 학생들이 그 사용법을 모두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 MIT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2001년에 편법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How to Make (almost) Anyth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강의를 개설했다. 디지털제작을 연구하는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강의에 뜻밖에 매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들으러 왔다. 그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지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학생들은 개별적인 기술을 마스터함과 아울러 이 기술들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들을 했다. 첫 해의 스타 가운데 하나는 켈리 돕슨(Kelly Dobson, 나중에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의 Digital+Media학과의 학과장이 된다)인데 그녀는 비명(screams)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내보내는 착용장치를 만들었다. 윤미진(Meejin Yoon, 나중에 MIT 건축학과장이 된다)은 센서들과 등뼈 모양의 구조물들로 가득하여 개인 공간을 방어할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기획들이 계속 이어졌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묻지 않았던 질문, 즉 디지털 제작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제작 방법을 묻고 있었지 이유를 묻고 있지는 않았는데, 학생들이 디지털 컴퓨팅의 킬러앱은 퍼스털 컴퓨팅이듯이, 디지털 제작의 킬러앱은 퍼스널 제작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핵심은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CBA의 연구도구 사용법 수업이 필요했듯이 팹랩들의 확산도 전지구적으로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똑똑한 아이들은 지역 교육이 주는 기회를 훨씬 앞서는 기술을 팹랩들에서 배우고는 그 다음에 급격히 능력이 하강하곤 했다.

 

브루볼트(Hans-Kristian Bruvold)는 노르웨이 북쪽의 한 지역학군에서 일종의 문제아였다. 이미 선생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마스터해서 주의집중을 잘 안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한 팹랩에 나가기 시작했고 거기서 저자를 만났으며 저자는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의 몇 가지 데모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다시 만났을 때 저자는 그가 장난감 로봇 트럭에 여러 기술을 통합해 넣은 것을 보고 놀랐다. 몸체를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모터와 제어장치를 통합해 넣고 방풍유리 디스플레이를 추가했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인종차별시기의 한 흑인거주구인 쏘샹구베(Soshanguve)에 팹랩을 열었을 때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 소녀인 모나헹(Tshepiso Monaheng)이 놀랍게도 랩을 이용하여 원격으로 MIT 수업 내용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라면 브루볼트나 모나헹 같은 똑똑한 아이들은 멀리 떠나서 더 나아간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동은 유용한 사람들을 그들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떠나보낸다. 우리는 처음에 세계 전역의 지역 학교들과 짝이 되어 이 진공을 채우려고 했는데, 기술적 숙련보다 훨씬 더 큰 한계는 학교의 엄밀히 통제되는 교육 접근법이 창조성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늘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팹아카데미(Fab Academy)라고 불리는 것을 시작했다.

 

팹아카데미는 원래 팹랩들이 원격으로 MIT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마련한 비디오 링크에서 자라나왔다. 직접 듣는 학생들보다 팹랩들이 더 많아지면, 원격 세션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분리했다. 원래 원격 학생들이었던 지역 멘토들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새 학생들은 지역 팹랩에 있는 작업그룹에 합류해서 멘토들, 동료들, 기계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비디오를 사용한 대화식 강의와 협동적 내용공유를 통해 모두를 전지구적으로 연결했다.

 

MIT를 컴퓨터 메인프레임으로 보면 된다. 잘 작동하지만 소수에게만 유용하다. 대형공개온라인 강의(massive open online classes, MOOCs)는 사용자들이 중앙메인프레임에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 있는 시분할 시스템(time-sharing, 각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자원을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으로서 출력이 사용자에게 표시되고 입력을 키보드에서 읽어 들이는 대화식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다) 시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팹아카데미 모델은 학습네트워크상의 노드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에 더 가까우며, 이 노드들은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확대된다.

 

처음에는 저자가 직접 모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팹아카데미 모델이 성장하면서 저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멘토들을 지도했다. 모델이 더 성장하면서 저자는 지역 랩들을 지도하기 위해 출현한 상위노드들(supernodes)을 지도했다. 이런 식으로 이 모델은 인터넷과 유사해졌다. 나무처럼 줄기, 가지, 잎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인터넷처럼 모든 노드는 다른 모든 노드와 대화할 수 있었다. 팹아카데미의 일주일 생활의 중심은 거대한 화상회의였다. 여기서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을 보고 다른 모든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이전 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포함되고 다음 주의 새로운 일감에 대한 대화식 소개가 포함된다. 이 모든 협동과정은 중앙사무실보다는 아씨나리(Luciana Asinari)가 이끄는 분산된 작업그룹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구조에서는 품질 통제를 위해 관계들의 망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edu’ 도메인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했다. 우리는 미래의 입학, 취업, 투자를 위해서는 미지의 단체로부터의 증명서보다는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콘텐츠를 만들고 평가를 하는 하나의 주기가 도는 데 약 8개월 걸리지만, 학생들의 진전은 수업을 들은 시간보다는 기술의 숙달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학생들은 모든 것을 완료하는 데 몇 년 걸렸다. 학생들의 수준은 홈스쿨링한 천재들, 대학생들, 대학에 가는 대신 이것을 배우는 사람들, 중견 전문가들, 말년에 재훈련하는 사람들, 퇴직 후 취미로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지역 학습 워크그룹들의 전지구적 연결은 팹랩들의 분산된 성격과 멘토링의 필요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좋은 멘토링이 부재하면 형편없는 생각들이 번성한다. ‘maker’라는 이름은 ‘열정적’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잘 모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가진다. 메이커운동의 기본 요소는 아두이노(20달러짜리 작은 컴퓨터 보드로서 센서 해독, 출력장치 통제, 네트워크와의 소통이 가능하다)이다. 팹아카데미는 아두이노를 소개한 다음에, 팹랩에서 몇 달러로 부품들을 조립하여 그런 보드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학생들은 쌀알만 한 크기에서 데스크탑을 돌릴 수 있는 사이즈의 다른 컴퓨터 칩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제작자운동의 또 다른 기본요소는 3D프린터이다. 팹랩은 학생들에게 3D프린터 사용법을 보여준 다음에 더 빨리 작동하고 더 크고 강한 것들 혹은 더 정밀한 것들을 만드는 모든 다른 디지털 제작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3D프린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례들 각각이 쉬운 기술을 배우는 데서 어려운 기술을 마스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로를 제공한다.

 

‘스스로 하기’(Do-it-yourself)는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기보다 자신의 발끝으로 서게 하는 방법이다. ‘같이 하기(do-it-together)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do-it-with-others)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밖에도 팹아카데미가 선순환의 심장부에 있음을 발견했다. 각 주기는 최고의 수행 사례들을 팹랩 네트워크 전체에 전파하면서 지역 멘토들로 이루어진 핵심 협동 공동체를 구축하고 나중에 새로운 랩들과 프로그램들을 돕게 될 훈련된 학생 무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팹아카데미는 디지털 제작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조합한 것의 많은 부분은 거기에만 맞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반시설은 원거리학습(distance learning)이 아니라 어떤 종류든 분산된 학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놓쳤지만 소통, 컴퓨팅, 제작, 학습 사이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해주고 디지털 컴퓨팅이 지식을 공유하게 해주는 한편 여기에 추가되는 디지털 제작은 아이디어들만이 아니라 사물들을 교환할 수 있게 해준다. 팹랩의 핵심적 도구들이 있으면,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캠퍼스를 효과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유력한 유전학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하버드 너머의 학생들과 만나는 데 관심을 가져서 ‘(거의) 모든 것을 키우는 법’(How to Grow (almost) Anything)이라는 이름의 분산된 학급을 팹랩 네트워크에 추가했다. 디지털 제작과 생물학적 제작을 결합시킨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바이오랩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데 팹랩을 사용할 수 있다. (생물학 장치들은 종종 가격이 센 편인 동시에 거추장스럽다.) 팹랩에서 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 DNA 증폭을 위한 열순환기나 액체를 다루는 로봇 같은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왔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생물학 자체가 제작에 사용될 수 있다. 생물학적 과정들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방식이며 우리는 팹랩들과 바이오랩들이 합류하면서 이 과정들을 프로그램하는 법을 점점 더 배우고 있다.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세계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처치처럼 그도 그의 영향력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 너머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왜’ 만드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드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과정이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 ‘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가’라는 이름의 다른 분산된 학급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저자의 학생 피크(Nadya Peek)가 이 점증하는 프로그램들을 ‘(거의) 모든 것의 아카데미’(the Academy of (almost) Anything)라고 불렀고 이 이름 혹은 그것을 줄인 ‘아카뎀애니’(Academany)라는 이름이 고정되었다. 현재 이 아카데미는 그레노블 팹랩(the Grenoble fab lab)을 시작한 몰레나르(Jean-Michel Molenaar)가 관리하고 있다. 제공하는 학습 각각은 지역 워크그룹의 모델을 따르고 멘토들은 대화식 강의를 위해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용을 협동적으로 공유한다.

 

팹랩들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동안 저자는 MIT에 새 건물이 짓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시작에서 끝까지 10년 걸렸고 1억 달러가 들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설이 제공된다. 지난 10년에 걸쳐 출현한 수 천 개의 팹랩들 각각은 약 100명의 사용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명백한 문제를 제기한다. 1억 달러 투자 대 10만 달러 투자의 차이를 정당화는 활동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존의 MIT 조직은 희소성의 전제에 기반을 둔다. ① MIT는 랩에 있는 도구, 도서관의 책, 교수들의 시간에 대한 접근을 관리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지원자들을 거절하고 캠브리지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다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② 온라인 학습플랫폼에 연결된 컴퓨터 앞에 학생이 홀로이 앉아있는 것을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③ 팹아카데미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학생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습공동체들 속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대안은 원격교육이 아니라 팹랩 아카데미가 보여주는 분산된 교육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물음은, MIT 같은 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의 어느 만큼이 이런 식으로 분산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욕구가 중앙집중화될 수 있느냐이다.

 

저자는 ‘반’이라고 말한다. 팹랩을 열 때마다 MIT에서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동료들, 멘토들, 도구들을 다른 데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팹랩에 그렇게 꾸준하게 나온다. 그래서 MIT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반 정도는 팹랩 환경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반은 더 많은 비싼 도구들(가령 분자 규모의 분자어셈블러를 개발하는 데 사용하는 나노과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비싼 도구들을 사용하는 기술과 지식은 너무나도 전문화되어 있어서 모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이 이루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유형의 공간은 대립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만 달러 제작 공간, 십만 달러 팹랩, 백만 달러 수퍼 팹랩, 천만 달러 연구랩들을 가진 하나의 나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위로 키우기보다 바깥으로 키워야 지구 전체의 브레인파워를 가져다 쓸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 있다.

 

페이퍼트(Seymour Papert)는 컴퓨터와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선구적 아동심리학자 삐아제(Jean Piaget)와 함께 연구했는데, 삐아제는 어린아이들이 과학자처럼, 즉 실험을 하고 이론을 테스트하면서 배운다고 주장했다. 그후 페이퍼트는 MIT에 와서 초기의 리얼타임 디지털 컴퓨터들에 접근하여 어린아이들에게 가능한 실험의 범위를 확대하고 싶었다. 이는 그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컴퓨터들이 너무 비싸고 너무 컸던 것이다. 그 대신에 페이퍼트는 컴퓨터에 연결된 로봇 거북이와 어린아이들이 그 거북이들에게 명령할 수 있게 하는 언어(로고, Logo) 개발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케이(Alan Kay)인데, 케이는 GUI와 랩탑의 컴퓨팅 패러다임들을 개발했다. 이 디자인 원칙들은 원래 사업가들로 하여금 스프레트시트를 작성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려고 의도된 것이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한 또 한 사람은 레스닉(Mitch Resnick)인데, 레스닉은 레고 마인드스톰(Lego Mindstorms, 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까지 할 수 있는 레고 모델)을 개발했다. 레스닉은 또한 아이들이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 스크래치(Scratch, 아이들에게 그래픽 환경을 통해 컴퓨터 코딩에 관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 및 환경)의 창출을 이끌었다.

 

팹랩이 두 배씩 증가하기 시작하고 팹아카데미도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페이퍼트는 저자를 찾아와서 팹랩에 대해 대화했다. 저자는 팹랩 전체를 역사상의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페이퍼트는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그는 아이들이 거북이의 움직임을 프로그램할 수는 있으나 막상 거북이 자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늘 골칫거리였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거북이를 만드는 것이 늘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팹랩에서의 학습은 그가 수십 년 전에 시작한 작업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앙컴퓨터를 가지고 놀러 MIT에 가는 것에서 컴퓨터를 탑재한 장난감을 상점에서 사서 노는 것으로, 거기서 다시 팹랩에 가서 컴퓨터를 만들며 노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다.

 

[참고] 팹랩 및 팹아카데미 관련 동영상

fablab
https://youtu.be/aPKH60sW_CM




3차 디지털 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2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2018)의 서설(Introduction) 
  • 분류 : 일부 내용정리
  • 정리자 : 민서

3차 디지털 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 2

 

디지털 제작의 힘과 전망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3차 디지털 혁명에 동력을 공급하는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는 것과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해야 하는 사회체계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저자들 가운데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길잡이는 닐 거션펠드이다. 닐은 20년 동안 디지털 제작의 선구자로 일해오고 있으며 코앞에 와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에서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각하는 사물』(When Things Start to Think, 1999)에서 사물인터넷으로 알려지게 된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으며 『팹』(Fab, 2005)에서는 팹랩들과 메이커 운동들(maker movements)의 출현을 설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디지털 제작의 힘과 전망을 소개했다.

 

『현실을 설계하기』에서 닐은 이 추세가 어떻게 3차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졌는지를, 이 추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진화하는 연구 로드맵의 미래에서 이 추세가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사물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의 짜임새를 디지털화한다면, 『스타트렉』식의 복제기(물질재조합장치) 같은 것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닐은 팹랩 운동의 우연한 기원 이야기로 1장을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공동체 팹랩들이 전 지구적 네트워크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식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제작 과정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미 힘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부각시킨다. 노르웨이 북쪽 끝에서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시골 마을에서 불규칙하게 확대되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팹랩들은 혁신을 분출시켰고 디지털 제작의 힘과 잠재력의 초기 징후들을 제시했다.

 

3장에서 닐은 3차 디지털 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과학적 토대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탐구한다. 그는 이 토대가 어떻게 생명이 분자 제작을 위한 기계를 발전시킨 40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설명하고, 그 바탕에 있는 신뢰성, 모듈방식, 지역성 및 가역성이라는 원칙이 어떻게 디지털 통신기술, 컴퓨팅 및 제작을 통합하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로 기여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테크놀로지가 그 최종 형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포착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강조한다.

 

닐은 이 3장에서 라스의 법칙(Lass’ Law)을 소개하는 데 이것은 디지털 제작에 적용되는 무어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칙의 이름은 셰리 라시터(Sherry Lassiter, 일명 ‘Lass’)에게서 온 것이다. 선도적인 <팹 재단>(팹랩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과 함께 라시터는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팹랩 요청서들의 더미가 커져가는 속도를 보고 팹랩의 수가 1년 반마다 대략 두 배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팹』을 쓸 때 닐은 이런 급격한 성장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는 몇 개 안되는 최초의 팹랩들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닐에게 2003년은 팹랩의 시작점이고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팹랩들의 수는 두 배가 되었다. 이제 라스의 법칙을 적용하면 향후 10년 정도에 걸쳐 100만 개의 팹랩에 해당하는 능력이, 그리고 그 다음 10년에 걸쳐 10억 개의 팹랩에 해당하는 능력이 생성됨을 의미한다. 공간을 채우는 10억 개의 시설이 들어선다는 말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융합, 접근성 및 범위에서의 진전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규모가 커지면서 중요해진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바와 같은 팹랩이 아니라 물리적 형태를 제작하고 그 기능을 프로그램하는 능력이다.

 

닐은 팹랩에서 현재 사용하는 도구들의 목록과 그 도구들에 대한 설명으로 5장을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뚜렷이 구분되는 4단계를 개관한다. ① 공동체 제작(기계를 통제하는 컴퓨터가 추동함) ② 개인 제작(기계를 만들 수 있는 기계에 바탕을 둠) ③ 보편적 제작(디지털 재료로의 이행을 표시함) ④ 유비쿼터스 제작(재료가 프로그램 가능함).

 

그런데 3차 디지털 혁명의 핵심요소들이 랩에서 등장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우리는 이 영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회 시스템이 3차 디지털 혁명을 가속화하는 기술과 함께 효과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도록 안내하는 길잡이는 조엘과 앨런이다. 조엘과 앨런은 첫 번째 랩을 시작한 이후 팹랩 운동에서 닐과 함께하고 있다. 조엘은 일리노이 주 섐페인 어배너에서 팹랩을 시작하는 것을 도왔고 팹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새로운 이해관계자 연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주도했다. 앨런은 팹랩에 맞는 지속가능한 모형을 연구했고 그가 설립한 <이라인 미디어>는 <팹재단> 및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와 협력해서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자금지원을 받아 디지털 제작의 미래를 탐구하는 비디오 게임을 작업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할 때 조엘과 앨런은 전 세계 팹랩들을 방문했고 수십 명의 팹 선구자들을 인터뷰했으며 수백 명의 이해관계자들을 조사했다.

 

닐은 테크놀로지 로드맵을 연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만한 도구와 기술들을 제안한다. 조엘과 앨런은 사회적 로드맵을 연구하고 사회 시스템과 기술 시스템이 함께 진화할 수 있게 하는 방법과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2장에서 조엘과 앨런도 현재 구축된 전 지구적인 팹랩의 네트워크를 관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닐과 다르게 그들은 힘을 북돋고 즐거움을 주는 측면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팹랩 네트워크에 스며드는 긴장과 문제들도 부각시킨다. 개별 제작의 전망과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제작하는 개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제작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현실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팹에의 접근, 팹 리터러시 및 진정으로 민주화된 기술을 보장하는 생태계의 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팹 생태계 도처에 있는 분리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그 바탕에 함입되어 있는 전제를 그리고 상충하는 가치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현재의 작업흐름을 완전히 익히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오늘날 팹랩의 혜택들은 결과보다는 제작과정에서 나온다. 앞으로 디지털 제작이 우리가 소비하는 것을 만드는 데로 나아가려면 결과에 비중을 더 두는 방향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장에서 앨런과 조엘은 어떻게 무어의 법칙이 기술적 구축물 못지않게 사회적 구축물인지를 강조한다. 무어의 법칙은 결코 물리학 법칙이 아니며 관찰의 기록인데, 이것이 회사를 위한 핵심 사업전략이 되고 산업의 벤치마크가 되며 마지막으로 더 좋고 더 빠르고 더 값싼 디지털 기술을 활성화하는 틀이 된 것이다. 4장은 사회적인 변화와 기술적인 변화의 상호교직이 새롭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회과학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지배적인 관행은 테크놀로지의 공동창출보다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찰이다. 보다 진취적인 입장 취하기는 개인들·조직들·제도들이 변화의 속도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속도 제한장치와 속도 가속장치가 핵심적인 역할들을 할 것이며, 기술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를 효과적으로 함께 진화시키기 위해 디지털 플랫폼과 새로 출현하는 생태계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는 1, 2차 디지털 혁명에서 배운 교훈들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조엘과 앨런은 6장에서 디지털 제작의 미래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다섯 대륙의 팹 선구자들과 공동으로 만들어낸 야심적인 여덟 개의 시나리오를 설명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사회적 체계와 기술적 체계는 함께 진화한다.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미래를 위한 심상지도(mental maps, 인지지도)만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심상지도가 필요하다. 이 더 나은 미래를 현실로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조엘과 앨런은, 모든 사람이 3차 디지털 혁명에서 의미•목적•존엄성을 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틀을 제안하고 있다.

 

『현실을 설계하기』의 세 저자들은 3차 디지털 혁명에 과학•테크놀로지•사회과학•인문과학의 관점을 적용한다. 각 저자는 책에 상이한 렌즈를 갖다 댄다. 각 저자의 렌즈를 통해 어떤 것은 명확해지고 다른 어떤 것은 불분명해진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일치한 의견들보다 일치하지 않은 의견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서로 다른 분야들이나 영역들이 집단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복잡하고 급속히 바뀌는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다.

 

지금 우리는 가능성 높은 궤적들을 예견할 수 있으며, 아직 시기가 일러서 우리가 후회할 방식으로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형성하기 전에 우리가 테크놀로지의 형성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적 순간에 서있다. 3차 디지털 혁명의 임팩트는 1, 2차 디지털 혁명의 임팩트보다 크지는 않더라도 그 만큼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방식의 심장부로 파고드는 수많은 새로운 기회 및 도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애리조나 주립 대학의 리터러시 학자 제임스 폴 기(James Paul Gee)는 자신의 논문 「리터러시: 글쓰기에서 패빙으로」(“Literacy: From Writing to Fabbing”)에서 이 기회와 도전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팹은 우리가 현재 겪는 것보다 한층 더 심한 불평등의 세계, 다시 말해 몇 명만이 아이디어를 비트로 바꾸고 다시 비트를 원자로 바꾸거나 그 반대로 원자에서 비트를 거쳐 아이디어로 나아가는 과정을 행하는 연금술에 참여하는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질료—물건들, 세포들, 재료들—를 단지 몇 명이 소유하고 사용하는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팹은 새로운 리터러시이고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갈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특별하고 어떤 의미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우리 중 몇 명이 호모 파베르가 될 것인가? 인간은 항상 최고의 도구 제작자였다. 곧 모든 사람이 세계를 만드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도구의 가격은 저렴해 질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우리 중 몇 명 혹은 대부분 혹은 모두가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신과 같은 창조자가 될 때,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나쁜 세상을 만들 것인가? 팹과 리터러시의 관계는 불과 인간발전의 관계와 같다. 다시 말해 불은 길을 밝힐 수도 있고 태워 버릴 수 있는 도구이다.

 

불이 길을 밝히는 쪽으로 이용되도록 영향을 미칠 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디지털 제작이 민주화되면서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트를 지렛대로 삼아 원자를 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비유적으로나 말 그대로나 현실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3차 디지털 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1

  • 저자  : Neil Gershenfeld((닐 거션펠드(Neil Gershenfeld) : MIT의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CBA)의 책임자)), Alan Gershenfeld((앨런 거션펠드(Alan Gershenfeld) : <이라인 미디어>(E-Line Media)의 대표이자 공동 설립자)), and Joel Cutcher-Gershenfeld((조엘 거션펠드(Joel Cutcher-Gershenfeld) : 브랜다이스 대학(Brandeis University)의 사회정책과 경영을 위한 헬러 대학원(Heller School for Social Policy and Management) 교수이며 <노동과 고용 관계 협회>(Labor and Employment Relations Association)의 회장을 역임))

  • 원문 : Designing Reality: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2018)의 서설(Introduction) 
  • 분류 : 일부 내용정리
  • 정리자 : 민서

3차 디지털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

 

지난 반세기에 걸쳐 두 개의 디지털 혁명이 일어났다. 1차 디지털 혁명은 통신 분야에서 일어났으며 아날로그 전화에서 인터넷으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2차 디지털 혁명은 컴퓨팅 분야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에게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져다주었다. 현재 무어의 법칙(Moore’s Law)으로 알려진 무어의 예측―컴퓨팅 성능이 앞으로 10년 동안 계속해서 두 배로 증가한다―은 그가 처음 예상했던 10년 동안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50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컴퓨터는 이제 1965년의 컴퓨터보다 10억 배 가량 강력하고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며 팔목에 찰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를 따라 잡으려는 노력은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크게 뒤쳐져 있다. 고든 무어의 글이 출판된 지 반세기를 넘긴 오늘날에도 지구의 절반이 넘는 지역에서 아직도 인터넷 접속이 전혀 불가능하며 이에 더하여 수십억의 사람들이 제한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접속을 한다.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디지털 공명실과 ‘항상 대기중’인 소셜미디어에 추동된) 심화되는 소득•부의 불평등, 기술발전으로 인한 비고용, 그리고 사회적 양극화가 결합되어 사회의 짜임새 자체를 찢어발기고 있다.

 

1, 2차 디지털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은 단순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끈 것도 아니었다. 초기에 내려진 (혹은 내려지지 않은) 결정과 정해진 (혹은 정해지지 않은) 우선하는 것들이 테크놀로지가 개발되고 그 테크놀로지가 시장에 도입되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디지털 통신 능력을 구축했지만 시민담론을 강화할 수 있는 문화적 규범, 피드백 루프 및 알고리즘을 그 안에 구축해 놓지는 못했다. 우리는 엄청나게 효율적인 새로운 전자상거래 모형은 창출했지만 사생활과 안전에 새로운 위협을 도입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 때문에 사라진 일자리의 충격과 싸우면서도 우리는 디지털 자동화로 가능해진 진전을 중시한다.

 

1, 2차 디지털 혁명의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예견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개인들, 조직들, 제도들이 테크놀로지와의 동반 진화를 촉진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적극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생겨나는 피해를 완화시킬 커다란 기회들을 놓쳐 버렸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온다. 이 기회는 3차 디지털 혁명, 즉 제작 영역에서 생긴다.

 

3차 디지털 혁명은 비트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의 프로그램화 가능성을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세계로 가져옴으로써 1, 2차 혁명을 완성한다. 이 물질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엄연히 있으므로 3차 디지털 혁명이 미치는 영향은 이전 혁명들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이 혁명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디지털 과학 위에 구축된다. 다만 이제 그것은 비트와 원자 모두가 급격한 속도로 처리될 수 있게 해준다. 통신기술과 컴퓨팅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고 그 결과 개인용 컴퓨터, 모바일폰 및 인터넷이 생겨나면서, 제작의 디지털화는 수요가 생길 때마다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개인과 공동체가 제품을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개별 제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초기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매우 유사하게, 오늘날 대부분의 본격적인 디지털 제작은 선진적인 연구기관과 대기업에서 일하는 고도로 훈련된 조작자들이 가동하는 엄청나게 큰 기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곧 엄청나게 큰 이 기계 속에 있는 힘에 누구나 접근 가능해질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과거의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가졌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데이터를 사물로, 그리고 사물을 데이터로 바꿀 수 있고 비트와 원자로 이루어진 인터넷을 가로지르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미래가 코앞에 와 있는 것을 이미 볼 수 있다.

 

이 비전은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이것이 급격하게 현실이 되어가는 경로 위에 있다. 팹랩(Fablab)은 개인들이 디지털 제작에 필요한 강력한 도구에 접근할 수 있는 공동체에 기반을 둔 제작실로, 2003년에 첫 제작실이 설립된 이후 1년 반마다 그 수가 두 배로 늘고 있다. 그러나 1, 2차 디지털 혁명의 초기처럼 3차 디지털 혁명의 급격한 진행속도는 평범한 관찰자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자신의 책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기하급수적인 성장은 기만적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성장은 감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하고 그런 다음 불시에 맹렬하게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다시 말해 이 성장은 그 궤적을 조심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뜻밖일 수밖에 없다.”

 

『현실을 설계하기』(Designing Reality)의 핵심은 디지털 제작이 진행되는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사람들이 3차 디지털 혁명에 대비하는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책의 지식을 이용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혁명에 작거나 크게 기여할 행동능력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이 팹에의 접근 및 팹 리터러시(Fab literacy)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반세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아직은 3차 디지털 혁명이 초기 단계에 있다. 연구 우선사항들이 정식화되고 있고 핵심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팹에의 접근 및 팹 리터러시를 보편화하는 데 필수적인 조직과 제도들이 출현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 우리는 사실상 한계비용을 추가로 들이지 않고 음악•비디오•블로그•뉴스•이메일•문자메시지 및 다른 디지털 자료를 복제•변경•공유하는 우리 능력이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으로 경제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아왔다. 이 능력은 테크놀로지의 성격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디지털 제작은 디지털 통신기술과 컴퓨팅에 속하는 속성의 일부를 공유한다. 1, 2차 디지털 혁명에서 비트는 원자를 간접적으로 즉 새로운 능력과 행동을 창출함으로써 바꾸었다. 3차 디지털 혁명에서 비트는 사람들이 원자를 직접 바꾸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는 아직 원자 수준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실현에 필요한 것은 물질세계를 변경하기 위하여 디지털 설계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능력이다. 1, 2차 디지털 혁명으로 야기된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물질세계—도로•주택•기기들•교통기관•음식—는 현저하게 예전 그대로이지만, 3차 디지털 혁명에서는 물질세계가 구성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디자인(설계)을 공급받지만 제작은 지역에서 하는 방식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옷•가구•장난감•컴퓨터와 심지어 주택과 자동차도 제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혁신의 지속적인 흐름이 팹랩의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이미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3차 디지털 혁명은 인간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는 제작 욕망을 끌어내어 활용한다. 지하실 작업장이 있는 집에서 사는 기계 수리공이든 인도의 시골에 위치한 팹랩에서 일하는 농부든 <메이커 페어>(Maker Faire) DIY 모임에서 활동하는 12살 아이든, 제작은 취미생활자들•예술가들•발명가들•엔지니어들 및 광팬들(덕후들)을 깊이 만족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

 

이 책 곳곳에서 우리는 디트로이트의 <인사이트 포커스>(Incite Focus) 팹랩에 소속된 블레어 에반스(Blair Evans)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블레어는 디트로이트의 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30에이커의 땅을 개발했고, 모든 사람이 “적게 일하고 적게 소비하며, 더 많이 창조하고 더 많이 접속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형들을 연구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구축하는 것이 새로운 생각은 아니지만, 블레어와 그의 동료들은 디지털 제작 플랫폼들이 식품에서 가구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재화를 협력해서 생산하기 위해 사용될 때 이 플랫폼들이 어떻게 자급자족을 가속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 2차 디지털 혁명에서 등장한 큰 문제가 있다. 일자리들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및 빠르게 가속화하는 다른 테크놀로지 분야의 진전 때문에 일자리의 무려 절반이 머지않아 자동화될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공장일이나 트럭운전 같은 블루칼라 일자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 보조원의 일에서 방사선학과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이르는 화이트칼라 일자리들도 사라진다. 물론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연관된 새로운 일자리가 사라진 일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다른 예측도 있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더라도 (이는 결코 확실하지는 않다) 옛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과 널리 접근 가능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 사이에는 격차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진보로 인한 비고용, 소득과 부의 불평등,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추동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유독한 조합은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화나게 했으며 세계 도처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추동했다. 그러나 증가하는 제작 과정의 민주화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급자족이 전 지구적 독립과 지식공유—이는 두려움보다 능력에 기반을 둔다—와 결합하는 더 매력적인 미래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와 지역의 자급자족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허물어뜨리고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보다 지속가능하고 풍요로운 미래를 위한 토대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도시와 시골 규모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만나게 될 또 한 명의 팹 선구자인 토마스 디에스(Tomas Diez)도 바르셀로나 팹랩 소속으로 세계적인 ‘팹시티’(Fab City) 운동을 이끌고 있다. 토마스는 ‘팹시티’ 운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시가 추출적이기보다는 생성적이며, 파괴적이기보다는 복원력이 있고 소외시키기보다는 힘을 부여할 수 있기 위하여 생산을 다시 지역화함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그리고 도시의 사람 및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발명할 필요가 있다.”

 

알래스카에서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토착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팹선구자들도 있다. 이들은 지역의 자급자족과 공동체 건설에 적합한 고대의 관행들을 살아있는 채로 보존하기 위하여 진보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지역 문제를 협력해서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의 재료들을 사용하는 보다 효과적인 도구를 제공하는 것은, 전통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사회에 살면서 주변의 자연과 물질세계에 한층 더 연결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깊은 욕망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테크놀로지로부터 벗어난’ 학교에 보내는 실리콘 밸리 임원들에게서, 그리고 디지털로부터 자유로운 휴일이나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날’과 같은 기획들에서 가상 세계로 빨려들어 가는 위험에 관한 불안을 본다. 3차 디지털 혁명은 비트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와 원자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 사이에서 우리가 보다 건강하게 균형 잡힌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향으로 우리를 추동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고무하며 필요한 조직을 창출하고 물려받은 제도를 바꾸려는 우리의 열렬한 노력을 통해서만 이 야심에 찬 비전들은 실현될 것이다. 우리가 실로 3차 디지털 혁명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궤적을 이해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현실을 설계하기』는 3차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지를, 이 혁명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를,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일어나고 있는 이 혁명에 대비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당신이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강화되는 두 개의 극단적인 비전이 테크놀로지와 관련해서 존재한다. 하나는 테크놀로지가 미쳐 날뛰고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훔쳐도 인간은 무기력하기만 한 디스토피아적인 비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뒤로 물러나 앉아 있을 뿐이고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유토피아적인 비전이다. 우리가 1, 2차 디지털 혁명에서 보았듯이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결들로 이루어진다. 급속히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가지고 있는 혜택과 위험은 매우 실질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개인적·집단적으로 이 영향력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할 힘이 있다.

 

우리는 한층 자급자족적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창출하기 위해 3차 디지털 혁명의 궤도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행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될 수 없는 노동과 관련해서는 지속적인 고용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와 병행하여 디지털 제작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새로운 일자리들도 생길 것이다. 새로 출현하는 모형들에서는 개인과 공동체들이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을 직접 제작하게 될 것이고, 이는 우리의 일(노동) 개념에 도전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활동들 사이의 균형을 잡는 데 필요한 새로운 선택지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혼합된 사회적 배치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디지털 제작 테크놀로지의 능력 및 범위가 10억 배로 증가한다면, 우리는 더 많이 창출하고 더 많이 연결하면서 더 적게 일하고 더 적게 지출하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추출적이기보다는 생성적이며 파괴적이기보다는 복원력이 있고 소외시키기보다는 힘을 부여하는” 사회에 대한 ‘팹시티’ 비전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




탈중심화된 거버넌스를 위한 패턴들



 

탈중심화된 거버넌스를 위한 패턴들

 

제가 최근 더블린에서 개최한 레:푸블리카(re:publica) 학회에서 강연 하나 했습니다. 이런 ‘인터넷과 사회’ 학회에 매번 갈 때마다, 블록체인의 과장된 선전에 상당히 기분이 언짢습니다. 그래서 오늘 언짢은 기분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문명은 신뢰받는 데이터베이스들을 사랑한다.

일단 블록체인을, 아무도 소유하지 않고 누구나 신뢰하는 분산된 데이터베이스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를 작동시킨다고 신뢰받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전 기본적으로 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거래, 보험, 금융, 주식 시장을… 그리고 많은 정부 기능 역시, 예를 들어 투표자의 자격, 세금, 혜택, 법률, 시민권을…

우리의 정체성, 상호 작용, 금지 그리고 어포던스(Affordance)는 상당 부분 이 신뢰받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베이스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블록체인에 대해 열광하는 거죠. 분산되고 신뢰받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이 혁신은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암호 통화의 폭발적인 증가는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의 돈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건 이제 막 시작일 뿐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법률을 제정하고, 우리 자신의 선거를 치루고, 새로운 가치들이 있는 새 시장들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낡고 느리고 부패한 제도들을, 우리 자신을 만들 빛나고 새로운 제도들로 기본적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린 어떻게 권력을 탈중심화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기술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본다면, 만약 우리가 광범위한 사회에서 마주치는 도전들을 바라본다면, 사회 변화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만약 뒤로 물러서서 단지 한순간만 “어떻게 우리는 권력을 탈중심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더 좋은 데이터베이스를 건설하자”는 굉장히 힘없는 대답처럼 느껴집니다. 나에게는, 가장 위급한 권력 불균형이 성, 인종, 그리고 계급을 나누는 선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한 듯합니다.

권력의 탈중심화 기획에서, 블록체인은 대부분 실질적인 일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붉은 훈제 청어 역할을 합니다.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식민지화에 대한 배상을 받아내고, 임금 노예 제도를 종식시켜야 하는데 말입니다.(덧붙이자면, 우리는 파시즘도 다시 죽여야만 합니다).

기술을 탈중심화하는 것이 권력을 탈중심화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지 생각하면 나는 정말 가슴 벅찹니다. 블록체인 기업가들과 자금 제공자들에 대한 나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만약에 당신들의 계획이 권력을 탈중심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면, 제발 나에게 단지 효율성과 자금의 금융권 이탈의 관점보다 정의의 관점에서 설명해주기를 바랍니다.

기술이 얼마나 엄청난 규모로 권력을 탈중심화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10명이 함께 일하게 해보면, 당신은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작은 범위에서도 이런 인간적인 협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의 큰 범위의 개입이 정의와 평등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나는 더욱더 희망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10명 혹은 100명 정도의 범위에서 권력을 나누어 갖는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가 세우는 가상 정부가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정의롭거나 평등하기를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회 운동들에 핀테크로 힘을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에 여러분이 탈중심화된 기술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면, 제발 나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서 전 기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문제들을 한 번에 몽땅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일들이 돈, 법, 시민권을 재창조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단지 내가 묻는 것은, 만약에 당신이 권력을 탈중심화하는 일에 진지한 관심이 있다면, 탈식민화, 노동자의 권리들, 페미니즘 혹은 다른 사회 운동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서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Occupy 운동 또는 #IdleNoMore 운동 또는 #BlackLivesMatter 운동 또는 #WomensMarch 운동이 사회 운동에서 경제 운동으로 차차 변한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십시오.

권력을 탈중심화하기 위해 고안된 탈중심화 테크 프로젝트

한 공개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저는 명시적으로 정의 지향적이거나 커먼즈 지향적인 모든 탈중심화 프로젝트로 데려다주는 링크들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모은 것이 아래 있습니다. 더 추가해주세요.

faircoin: 협동조합적, 사회 정의적, 민주적, 생태적 윤리를 갖춘 암호화된 화폐

osm-p2p: 추출적 산업에 대한 토착민의 저항을 지원하는 매핑 도구

scuttlebutt.nz: 거대한 커뮤니티를 갖춘 가십 플랫폼

economic space agency: 공동체 지향적인 탈중심화되고 프로그램된 조직들을 만들기 위한 곳

social.coop: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마이크로 블로깅

redecentralize.org: 커뮤니티 + 앱 디렉토리

duniter: 기본소득이 내장된 암호화된 화폐

이런 프로젝트들을 칮아준 P2P재단 위키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유전학은 새로운 생명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유전학은 새로운 생명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많은 유기체들은 DNA(디옥시리보핵산)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통상적인 생물학 교육에서 DNA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살아있는 기능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생명체의 모태분자(master molecule)로 제시된다. 이 글의 저자인 조너선 레이섬은 DNA 모태분자론이 널리 알려져 있고 모든 대학과 고등학교에서도 가르치지만 정작 그 개념은 틀렸다고 말한다. DNA는 주(主)제어기(master controller)가 아니며 생물학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과학은 생명이 자기조직적임을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생물학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기다리고 있는 분야이다.

 

1. DNA를 신화화하기

 

매우 존경받는 과학자들이 DNA의 능력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캐리 멀러스(Kary Mullis)는 자서전에서 DNA를 “분자들의 왕”이자 “큰 것”(the big one)이라고 불렀다. DNA구조의 공동 발견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DNA: 생명의 비밀』(DNA: The Secret of Life)에서 “생명체의 바로 그 본질을 밝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분자를 DNA라고 부른다. 미국 국립보건원 웹사이트에서는 “유전자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현대 인간유전학 배후에 있는 유명한 학자이자 MIT의 <브로드 연구소>(Broad Institute)의 소장인 에릭 랜더(Eric Lander)는 『DNA: 생명의 비밀』의 추천사에서 “생명의 비밀”이라는 비유를 격찬한다. 유전학 교수인 메리-클레어 킹(Mary-Claire King)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 책은 DNA의 이야기이자 생명•역사•성•돈•마약 그리고 여전히 밝혀져야 할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쓰고 있다.

 

레이섬은 DNA 능력에 대한 강한 주장들뿐만 아니라 유전학에 대한 왓슨의 견해가 교육도 지배한다고 말한다. 미국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생명』(Life)은 DNA를 중심으로 생물학 전체를 구성함으로써 DNA에게 생명의 중심요소라는 생화학적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미국 국립보건원을 오랫동안 맡아 온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가 출판한 『생명의 언어』(The Language of Life), 『신의 언어』(Language of God) 같은 제목을 붙인 DNA에 관한 책들이 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DNA가 모태분자라는 생각은 지배적이었다.

 

레이섬은 일부 생물학자들이 말하듯이 이러한 견해들은 전형적이지 않고 극단적일 수 있다고 보고 왜 DNA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들이 대중담론을 지배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이 논문의 일부를 할애하지만, 논문의 주요 목적은 거의 모든 생물학자들이 DNA를 과장하여 설명하면서도 다른 생물학적인 분자들에 대해서는 협소한 과학적 논의만을 행하는 부조화를 짚어내는 것이라고 밝힌다. 뒤이어 그는 우리의 존재가 DNA 이외에 단백질∙지방∙탄수화물∙RNA(리보핵산)에 의존한다고 해서 아무도 ‘나의 단백질이 본질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데, 유독 DNA에 대해서만 ‘나의 DNA가 본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레이섬은 이 글의 목적이 ① DNA가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또는 ② DNA가 생물체의 중심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철저하게 살펴보는 것이라고 재차 밝히고 있다.

 

먼저 레이섬은 DNA가 왓슨, 랜더 및 콜린스가 주장하는 것들 중 어느 것도 아니며 통상적인 생물학자의 생명체에 대한 비교적 균형 잡힌 견해조차도 틀렸다고 말한다. 이는 여러 가지로 입증될 수 있는데, 특히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과학에 의해 입증이 가능하다고 레이섬은 주장한다. 이 새로운 과학은 DNA 중심적이고 유전자 결정론적인 생물학이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새로운 생산적인 방식들로 살아있는 존재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DNA는 신의 언어도, 심지어 생물학의 언어도 아니다.

 

2. 유기체는 체계(systems)이다.

 

DNA는 생물학적 제어기가 아니다. 생물학적 유기체가 복잡계(complex systems)라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가령 기후나 컴퓨터와 같은 복잡계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우위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잡계에서는 하위체계들 모두가 모여서 더 큰 전체를 구성한다. 각 하위체계는 특수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원인으로서 특권적 수준의 작용을 야기하는 하위체계는 없다.

 

개별 유기체의 생리기능에서도 우리는 전적이거나 특별한 원인으로서의 역할을 그 어떤 기관—심장, 간장, 피부 혹은 뇌—에도 부여하지 않는다. 신체는 모든 부분을 필요로 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더 작은 기관(器官)들의 수준에서도 서로 구분되는 세포 형태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유지하고 작동하고 복원한다. 마찬가지로 세포 수준에서도 세포 소기관과 기타 분자구조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상호작용하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위부분들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고분자 수준에 이르면 생물학자들이 체계론적 사유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 발생한다. 생물학자들은 체계론적 사유를 포기하고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RNA을 DNA가 만든다(Crick, 1970)는, 생물학의 유명한 중심 학설을 활용한다. 레이섬은 이런 정식화를 기점으로 DNA에서 시작하는 기원 설화가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는 중심 학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

① 첫 번째 오류는 DNA를 ‘중심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만약 유기체가 하나의 체계라면 중심은 없다.

② 두 번째 오류는 DNA가 설명되는 경로가 사실상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DNA가 무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경로는 고리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모든 DNA 분자를 만드는 데에 단백질∙RNA∙DNA가 다 필요하다. 더 넓게 보면, RNA나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 온전한 세포가 필요한 것처럼 DNA 합성도 온전한 세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한층 더 정확성을 기하고자 한다면 이들 각각의 구성요소를 만드는 데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가, 아니 하나의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구성하는 각각의 구성요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생태계에는 내장 미생물들과 양분 공급도 포함된다. 따라서 생물학의 중심 학설을 제대로 온전하게 정식화한다면, 그것은 상호관계들의 그물망에 함입된 고리형태가 될 것이라고 레이섬은 말한다. 하지만 해마다 수만 명의 학생들에게 가르쳐지는 중심 학설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생물학의 중심 학설은 첫째, 고리를 닫지 않음으로써 둘째, 고리 맨 앞에 DNA를 위치시킴으로써 자의적으로 DNA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생물학의 중심 학설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며, 자의적으로 구축된 재현물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학자들 및 다른 분야의 생물학자들은 DNA와 관련하여 극히 능동적인 동사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이런 해석을 그럴듯해 보이게 만든다. 그들에 따르면 DNA는 세포과정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조절한다.’ ‘발현’(expression) 같은 명사들 또한 DNA에 여러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다. 이처럼 생물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DNA에 극강의 힘을 부여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유전자들이 스스로를 발현하기 때문에 DNA가 배아 발달이나 유기체 건강을 통제한다는 순환논증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DNA가 이들 단어들이 암시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고 딱히 주장하는 과학은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정반대되는 상황들이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네이처』지에 최근 게재된 한 논문은 “세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단백질은 전사변이(transcriptional variation)로부터 보호된다”는, 즉 유전자의 직접적인 양적 영향력으로부터 차단된다는 “새로 출현하는 합의”(Chick et al., 2016)를 도출했다. 많은 실험들이 이런 완충 역할을 훌륭하게 입증하고 있다. 가령 한 실험은 박테리아들의 24시간 주기리듬(the circadian rhythm)이 DNA가 없어도 시험관에서 세 가지 단백질을 함께 섞는 것만으로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 리듬은 심지어 온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흘 동안 유지되었다(Nakajima et al., 2005).

 

DNA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언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지배하다’와 ‘통제하다’와 같은 단어가 말 그대로 DNA의 속성을 발명해낸다(Nobel, 2003)는 것이다. 레이섬은 세포들이 DNA를 주로 정보의 저장소로 사용하므로, DNA를 국회 도서관에 비유하는 것이 DNA에 대한 훨씬 더 정확한 은유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DNA와 관련하여 ‘지배하다’와 ‘통제하다’와 같은 동사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세포들은 단백질을 만들어 내기 위해 DNA를 이용한다” 같은 문장에서처럼 ‘이용하다’라는 보다 중립적인 동사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생물학자들이 신중하지 못한 은유와 중심 학설을 포기할 경우 한층 더 정확한 사고의 방법이 나올 수 있다. 즉 모든 분자와 모든 하위체계가 규모와 상관없이 다른 부분들을 제약하고 강화한다면 중심 제어기를 추론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럴 경우 ‘DNA 중심 모델’을 피드백 시스템 및 창발성(emergent properties)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관계 모델’(a relational model)로 바꿀 수 있다. 이 ‘관계 모델’에서 RNA는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투입물(input) 중 하나일 뿐이고 DNA도 RNA와 기타 등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투입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생물학의 알려진 사실들과 일치한다.

 

따라서 중심 학설과 생물학 교과서에 의해 요약된 정식화는 일종의 환상이다. 이것은 미생물학자인 카알 워즈(Carl Woese)가 ‘환원주의적 근본주의’라 불렀던 것의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환원주의적 근본주의는 단순한 환원주의와 다르다. 단순한 환원주의는 타당한 과학적 방법이다. 하지만 환원주의적 근본주의는 전체론적인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단순화된 설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선호한다. 옥스퍼드 대학 생리학자인 데니스 노블(Denis Noble)은 이 오류가 특권을 가진 원인으로서의 위치를 DNA에 부여하고 있다고 본다.

 

3. DNA가 ‘생체분자’가 아니라면 ‘생체분자’는 어디에?

 

식물을 감염시키는 많은 바이러스들에는 DNA가 없다. 그 바이러스들은 생명 주기의 기반을 단백질에 두고 있으며 RNA를 유전물질로 사용한다. 비로이드(viroid)라 불리는 식물 병원체들은 DNA와 단백질 둘 다 결여하고 있고 유일하게 비코드화 RNA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DNA나 단백질이 없어도 생물 형태는 존재할 수 있지만 RNA가 결여된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레이섬은 RNA가 여러 면에서 DNA보다 보편적인 생체분자로 더 합당하다고 여긴다.

 

DNA와 RNA의 구조적 차이를 살펴보면, 우선 RNA와 DNA는 화학적으로 매우 비슷해서 과학자들조차도 RNA와 DNA를 혼동한다. 하지만 그 둘 간의 약간의 화학적인 차이는 매우 다른 속성을 낳는다.

① RNA는 구조적으로 매우 유연성이 있는(휘는 성질이 있는) 반면에 DNA는 구부러지지 않는 성질이 매우 강하다.

② RNA는 불안정하고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반면에 DNA는 매우 비활성적이다.

③ 세포들이 네 개의 염기에 만들 수 있는 화학적 변형(modification)의 개수가 다르다. (뉴클레오티드 A, C, G, T를 염기로 가지고 있는) DNA의 경우에는 메틸화 및 아세틸화라는 두 가지 변형만이 대부분 세포에서 가능하다. DNA 염기의 속성을 바꾸는 이 두 가지 변형은 최신 과학인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주요한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RNA도 네 가지 염기(A, C, G, U)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포는 염기에 비견할만한 화학적 변형을 백 개 이상 만든다. 이 변형들이 하는 역할은 본질적으로 수수께끼이지만 아마도 그 변형들은 RNA가 세포 내의 많은 일을 수행하도록 도울 것이다.

④ RNA는 DNA와 단백질 사이의 중간 생성물일 뿐이라고 잘못 이해되고 있다. 전형적인 인간 세포에서 1% 미만의 세포가 단백질을 만든다. 나머지 99%는 엄청나게 다양한 구조적 기능, 조절기능 및 효소기능을 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RNA는 훨씬 더 흥미로운 분자로서 DNA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⑤ RNA가 DNA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 이 사실은 둘 사이의 차이를 심층적으로 설명한다. RNA는 엄청나게 오랫동안 생체에 깊이 구조적으로 함입되어 있어서 연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RNA에 관하여 많이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이유는 RNA가 중요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DNA와 다르게 RNA가 세포기능에 너무 중요해서 마음대로 선택하여 제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레이섬은 이러한 현재의 진화론적인 이해에 발맞추기 위한 적절한 방식은 DNA를 중심으로 한 일반 교육을 뒤엎고 RNA의 분화된 형태가 DNA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DNA는 유전자 정보를 안전하게 저장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보다 안정적인 사서(司書)로 만드는 구조적 견고함과 화학적 비활성을 점진적으로 발달시켰다. 진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DNA는 보다 훌륭한 사서로 선택되었고 단백질은 화학반응의 우수한 촉매제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는 생명체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데 기반이 되었던 생체분자는 RNA였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DNA와 마찬가지로 RNA도 제어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4. DNA는 진화의 중심도 아니다

 

DNA를 중심으로 생물학을 구성한 이유에 대해 흔히 하는 설명, 즉 생물학 교과서 『생명』의 저자들이 제시한 설명은 이른바 진화에서 DNA가 하리라고 생각되는 역할에 기반을 둔 것이다. 하지만 레이섬은 이 설명이 매우 의심스러운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진화 이론에 대한 만연한 오해의 사례들이다.

 

이유 1. 다윈 이론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

이유 2. 받을 자격이 없는 명성을 다시 한 번 DNA에게 부여하고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진화 이론이 생명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다윈이 말하는 진화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고 생명의 기본적인 패턴들 가운데 일부(세포, 단백질, 에너지 대사)는 DNA가 유전 분자가 되기 훨씬 오래 전에 등장했다(Carter, 2016). 이 구분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명’에 관한 교과서라면 다윈 이론이 설명하는 것을 쓸데없이 과장하지 (즉 혼동하지) 않기 위해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유지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생명』은 양자를 섞어버림으로써 대부분 생물학자들이 하는 오해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다윈이 말한 진화 이전의, 세포와 물질대사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은, 복잡계가 창발성과 자기조직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했다(e.g. Kauffman, 1993; Carter, 2016). 이 체계에 DNA가 출현함으로써 진화는 빨라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화가 창발적이고 자기조직화하는 속성을 없앤 것은 아니다. 오히려 DNA가 창발적이고 자기조직화하는 속성들과 공조했고 새로운 속성들을 창출하도록 도왔다. 다시 말해 창발성과 자기조직화가 광범위한 생물학 영역을 가장 진실에 가깝게 설명한다. 배튼(Batten)과 그의 동료들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거의 굳어져 버린 통상적인 진화 이론에 대한 대안을 “자기조직화는 자연 선택이 배제한 것을 채택한다”(“Self-organization proposes what natural selection disposes”)라는 말로 색다르게 요약하고 있는 것(Batten et al., 2008)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단백질 접힘은 고전적인 창발성에 속한다. DNA는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는 아미노산의 선형순차를 코드화하지만 모든 단백질은 매우 복잡한 3차원 형태 하나 혹은 일반적으로 둘 이상을 취한다(Munson et al., 1996). 대부분 이 형태들(+전하charge 및 용해도) 때문에 단백질 속성이 생겨난다. DNA가 단백질 형성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명시한다고들 하지만 레이섬은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 모든 단백질 형태는 DNA 외에도 다수의 정보 출처들을 통합하기 때문이다. ① 온도, ② 물과 무기질 이온 같은 다른 세포분자들, ③ 수소이온농도(PH), ④ 아데노신3인산(APT) 같은 에너지 분자, ⑤ 샤프론(chaperones)이라 불리는 단백질 접힘 조력자 등등이 이 출처에 포함된다. 많은 단백질들은 이 이외에 분자 채널(molecular channels) 및 펌프가 되는 것과 같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기능들은 상위 구조 수준에서만, 예를 들어 다른 단백질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능이다.

이렇듯 DNA는 매우 제한된 정도로만 단백질과 그 기능들을 명시한다. 레이섬은 모든 유전자 이외의 기여들을 무시하고 DNA에 단백질이나 과정(또는 온전한 유기체)의 모든 속성들이 있다고 보는 입장을 초결정론적(ultra-determinist) 입장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은 단백질 접힘 같은 창발성을 생명기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으로 기록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지 않은 극강의 힘을 DNA에게 부여한다.

 

창발성은 왜 DNA와 진화의 관계가 미약한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이섬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패트릭 베이트슨(Patrick Bateson)—그는 창발성의 관점이 아니라 동물 행동의 관점을 채택한다—이 “온전한 유기체는 차별적으로 살아남아 재생산하고 승자들은 유기체에 있는 유전자형(genotypes)을 끌어낸다. 이것이 다윈 진화의 원동력이다”라고 쓴 글을 인용해서 베이트슨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진화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레이섬은 DNA가 진화와 관련해서조차 ‘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찰스 다윈이 DNA가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진화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도 생물학자들은 유기체의 구성요소들 중에서 DNA가 진화에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5. 유전자중심 생물학을 설명하기

 

대부분의 세포분자들은 반응도가 높고 일시적인 화학물질들이다. 이것은 세포분자들을 추출하는 것도 어렵고 연구하는 것도 힘들다는 말이며 RNA 및 단백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DNA는 생물학에서 실제로 개입하기가 훨씬 더 용이한 대상이다. DNA는 추출되어 정확하게 복제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안정적이며 튼튼하고 단순하다. 고등학생들도 한 시간 동안 훈련을 받으면 DNA를 추출•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훈련을 할 경우 DNA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종(種)에서는 DNA를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아무 데서나 DNA를 해킹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레이섬은 우리가 유전자조절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른 생물학 분야를 이해하는 정도를 능가하는 것은 DNA가 추출•복제를 통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생물학의 낙과(落果)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6. DNA를 둘러싼 과학 내부의 이견

 

수리생물학자인 로버트 로젠(Robert Rosen)은 “인간의 몸은 물질대사∙복제∙복구를 통해 대략 8주마다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완전히 바꾼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당신의 모든 기억, 성격을 지니고 있는—당신이다···. 과학이 계속 입자들을 뒤쫓기를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유기체를 도외시하고 뒤쫓을 것이고 따라서 유기체를 완전히 놓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어떤 다세포 생물이라도 조사해보라. 그러면 비교적 고요한 표피 밑에 숨어 있는 순환계들, 소화 활동 중인 위장들, 림프 배수계들, 전기 자극들, 생체분자 기제들 등등을 발견할 것이다.

 

유기체의 모든 부분들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수축하고, 얽히고, 진동하고, 긴장하고, 성장하는 것은 이런 체계들 때문이다. 결국 살아있는 유기체들을 규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기체들의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본성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기체가 법적으로 죽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을 때 DNA를 조사하지 않고 심장박동이나 뇌기능을 측정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속성은 RNA와 단백질처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구성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생물학자들은 주로 DNA를 중심으로 생명을 이해함에 따라 (메리 클레어 킹의 주장인 ‘DNA는 생명이다’를 떠올려보라) 생명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본질을 가장 낮게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구성요소인 DNA를 선택해왔다.

생물학 분야 안에 반대자들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 모두는 DNA를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틀이 가능하게 하는 것보다 생물학이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e.g. Kaufman, 1993; Strohman, 1997; Rose, 1999; Woese 2004; Annila and Baverstock 2014; Friston et al., 2015). 이들 반대자들은 가령 인간 게놈의 순서배열 작업과 인간 DNA의 아주 작은 조각들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석 작업에 뒤따르는 의학-과학적으로 획기적인 성과가 대체적으로 없다는 데 주목한다(Ioannidis, 2007Dermitzakis and Clark, 2009Manolio et al., 2009).

 

비판의 수위가 좀 더 높은 사람들도 있다. 파스퇴르(Pasteur) 이후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세균학자인 카알 워즈(Carl Woese)는 유전자 결정론은 막다른 길이고 생물학의 상상력은 “소진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직공학 분야는 카알 워즈가 주장한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조직공학자들은 이식 등 의료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체외에서 인간의 온전한 인체기관을 만드는 데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진전을 이루어왔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이 기관들은 기능하지 못한다(Badylak, 2016). 그 인체기관에는 혈관•면역체계•신경망이 없다. 그 기관은 귀 모양을 한 골격이나 손 모양을 한 골격 위에 붙어있는 인간 세포일 뿐이고 그 결과 재생성적인 속성이 없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최소한 이 패러다임이 안고 있는 문제의 일부를 알아채고는 있지만 좀처럼 행동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유기체들이 대단히 복잡한 체계라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 ‘체계생물학’ 방면으로 얼마 안 되는 재원을 모아준 것이 유일하게 눈에 띄는 공식적인 반응이다.

 

이 체계생물학조차도 체계의 연구인 경우가 드물다. 생물학자들이 복잡계 이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환원주의를 확대하고 기계화하기 위해 체계생물학의 재원을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를 유전자조절 네트워크의 집합들로 간주하는 뿌리깊은 결점을 분명하게 표명하거나, 유전자조절 네트워크를 대체하기 위한 대안 패러다임(들)을 만드는 쪽으로 나아간 과학 전공분야나 연구소는 없는 실정이다.(Strohman, 1997)

 

레이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지적인 공백은 대부분 주변부에 있는 개별 과학자들에 의해, 유전학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장래성이 있고 심지어 혁명적이며 이론적인 개발과 실험 결과들로 꾸준히 채워지고 있다.

 

7. 대안적인 생명 패러다임으로의 간단한 안내

 

헬름홀츠 기계(Helmholtz machine)는 현실에 관한 예측을 하고 예측한 바를 그 현실에 비추어 재차 확인하는 감지장치이다. 이 기계장치는 예측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추정한다. 베이즈의 통계학은 이와 동일한 일을 하는, 즉 예측(기대값)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어림짐작하는 수학적 방법이다.

 

일명 베이즈의 뇌 이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경생물학 이론은 뇌를 생명체에서 차이를 추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제시한다(reviewed in Clark, 2013). 뇌는 예측을 하고 예측치와의 불일치를 측정하며 이 불일치를 상위의 신경회로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이 상위의 신경회로들이 그 과정을 반복하고 만약 불일치가 계속된다면 그때 이 불일치들은 한층 더 상위의 수준으로 전해진다.

 

베이즈의 뇌 가설은 ① 뇌 구조와 뇌 기능의 수많은 양상들을—예를 들어 어떻게 뇌가 서로 매우 다른 자극들(시각∙감각∙미각∙청각의 자극 등등)을 본질적으로 같은 신경메커니즘과 구조를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지를—설명하고 ② 어떻게 뇌가 행동과 지각을 통합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뇌 이론은 또한 학습에 대한 실질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즉 학습을 예측하는 모델의 갱신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레이섬은 이러한 베이즈의 뇌 가설이, 뇌가 진화하는 동안 예측 층위를 추가함으로써 고등한 의식 수준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베이즈 뇌 이론이 가진 특별한 장점은 그것이 영장류 피질 안에 있는 뉴런들의 실제적인 공간 조직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 공간 조직에서 “예측하는” 뉴런들과 “감각” 뉴런들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신호를 보내고 이로 인해 신호들이 (불일치인 경우는 제외하고) 서로 상쇄된다.

 

베이즈 뇌 가설이 제기한 구조기반 예측 학습체계도 흥미롭다. 이 체계가 의식을 포함한 많은 현상들에 대한 상세한 유전적 설명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기 때문이다(Friston, 2010). 유전자와 단백질이 세부적인 부분들을 채울지는 모르지만 뇌 기능의 많은 핵심 요소들, 이를테면 학습∙행동∙지각은 주로 구조에서만 나온다. 단백질 접힘처럼 그 핵심요소들도 조직화의 창발적 속성들이다.

 

창발성은 다른 생물학 분야에서도 중요하다.

① 식물의 관 체계(the vascular system).

나무는 포화되지 않은 수원에서 수백 피트 허공으로 물을 운반할 수 있다. 이른바 증산작용은 에너지 투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산작용은 물을 잘 흡수하는 물관부 조직들—관들—의 순수하게 물리적인 속성과 물 자체의 속성을 이용한다. 비록 아주 약하게나마 흙속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는 증산작용이 없다면 식물의 키는 2인치를 초과할 수 없으며 건조 상태도 견뎌낼 수 없다(Wheeler and Stroock, 2008). 이처럼 식물이 물의 간단한 물리적 속성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것은 광합성과 함께 식물을 규정하는 특징들 중 하나이다.

 

② 인간 발바닥에 있는 오목한 부분들(장심掌心).

이 오목한 부분들은 세로로 된 뼈들이 연결조직에 의해 가로로 이어져서 구성한 격막 구조물로서, 그 창발적 속성은 충돌에서 생겨난 힘을 분산시키고 충돌에서 생겨난 에너지를 전진 운동으로 바꾸기 위해 용수철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장심은 걷거나 뛰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줄인다.

 

③ 다효소복합체(metabolon)들.

생화학 분야에서 최근에 제기된 다효소복합체(metabolon)들의 존재도 창발성과 관련이 있다. 다효소복합체들은 효소의 3차원적 공간배열이다. 다효소복합체는 표면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은 대사 경로(metabolic pathway)의 생산물이지만 어떻게 그 생산물이 묘목 무게의 30%를 구성하고 그 결과 해충들을 쫓아버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Laursen et al., 2017).

 

④ 생체항상성(homeostasis)의 피드백 고리.

생체항상성의 피드백 고리는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자기조직화하는 속성들 중에서 보다 전통적인 부류에 속한다. 생체 항상성의 피드백 고리 역시 유전자 기능과는 대체로 무관하지만 살아있는 유기체의 활동과 속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상이다. 박테리아의 24시간 주기리듬을 재창조할 수 있는 세 가지 단백질이 그 한 가지 예이다.

 

⑤ 세포와 물질대사에 대한 통합적 이론들.

이 이론들 대다수가 생명을 기본적인 물리력의 작용에 결부시킨다. ⓐ 1972년에 사망한 니콜라스 라세프스키(Nicolas Rashevsky)는 이와 같은 모든 이론의 아버지이며, 그의 제자로 로버트 로센(Robert Rosen)과 AH 루이(AH Louie)가 있다. 그 밖의 학자들로는 ⓑ 물리학자이자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의 저자인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 『질서의 기원들』(The Origins of Order, 1933)의 저자인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 ⓓ 『생명선: 결정론을 넘어선 생물학』(Lifelines: Biology beyond determinism, 1997)의 저자인 스티븐 로즈(Steven Rose), ⓔ 『유전자의 예술』(The Art of Genes, 1999)의 저자인 엔리코 코엔(Enrico Coen), ⓕ 『생명의 음악』(The Music of Life, 2003)과 『생명의 멜로디에 맞춰 춤을: 생물학적 상대성』(Dance to the Tune of Life: Biological Relativity, 2017)의 저자인 데니스 노블(Denis Noble), ⓖ 그리고 생명은 열역학 제2 법칙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애닐라(Annila)와 베이버스톡(Baverstock)이 있다.(Annila and Baverstock, 2014; see also Friston et al., 2015). 이들과 미처 거론하지 못한 사상가들은 과학 혁명을 위한 잠재성을 지닌 원료—유전자조절 네트워크의 틀을 훨씬 벗어나는 원료—를 모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이론들 중에서도 유전자 결정론이 생명 개념으로서 잘못된 것임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데 가장 근접한 이론은 ‘RNA 세계’이다.

‘RNA 세계’라는 개념은 이른바 ‘현대의 DNA 세계’라고 여겨지는 것에 선행했던 것으로 이론화된다. 하지만 레이섬은 존재한 증거가 거의 없는 ‘RNA 세계’보다 새로운 이론인 ‘펩티드-RNA 세계’가 한층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펩티드-RNA 기원 명제(Carter, 2016)에 대한 핵심 증거는 오늘날 RNA와 단백질을 연결하는 효소가 (모든 유기체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1종 효소와 2종 효소라 불리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진화론적인 기원은 이상하게도 모순된다. 1종 분자와 2종 분자는 (서로 다른 아미노산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거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구조적으로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 공통점이 없다. 이 분자들의 활발한 촉매작용의 중심에 있는 아미노산들은 똑같은 작은 RNA 분자의 반대쪽 가닥에서 나올 수 있다(Carter 2016). 다시 말해 RNA로 하여금 모든 현대의 단백질을 만들게 하는 두 개의 단백질은 그것들을 공히 암호화했던 단일한 아주 원시적인 작은 RNA 분자가 가진 두 가닥에서 나온다.

 

이 말은 생명 기원의 아주 초기단계에서는 물질대사와 복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RNA의 역할은 원시 단백질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 원시 단백질의 목적은 촉매작용, 즉 물질대사를 이끌고 향상시키는 작용이었다. 따라서 펩티드-RNA 기원 명제가 제안하는 것은, RNA가 이미 선행했던 물질대사를 향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복제 우선 이론(a replication-first theory)인 RNA 세계를 물질대사 우선 이론(a metabolism-first theory)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8. DNA와 정치(학)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복잡하다. 모든 사람들은 이런 저런 형질 때문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유전자들은 삶(life)의 결과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은 유전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수십만 개의 독립된 요소들을 다룬다. 유전자는 절대로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유전자가 질병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우리에게 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전자가 질병의 실제 원인, 또는 병에 걸린 누군가의 실제 발병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생명 현상은 유전자 암호에 의해 직접적으로 조종되는 게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들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단백질과 세포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생겨날 것이다.”(Anand et al., 2008)

 

전설적인 게놈 순서 배열자인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의 이 인용문은 많은 유전학자들이 대안적인 패러다임의 명백한 필요성을 남몰래 인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와 동시에 벤터의 이 인용문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을 던지게 한다.

① 유기체가 생물학 연구의 주요 대상이라면, 그리고 유기체의 기원과 작용에 대한 통상적인 설명이 과학적으로 너무 취약해서 그 결함들을 은폐하기 위해 DNA에 ‘발현’과 ‘통제’라는 극상의 능력을 부여해야 한다면, 어째서 과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DNA에 매달렸던 것인가?

② 생물학에 필요한, 잠재적으로 생산적이고 통합적인 패러다임의 선구자들인 라세프스키, 카우프만, 노블 등을 칭송하고 이들에게 투자하기는커녕 왜 이들 연구자들이 주류 생물학으로부터 무시를 당해왔던 것인가?

 

레이섬은 마지막으로 유전자 결정론의 큰 매력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물음에 대한 답은 이 글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생물학의 편집증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며 그것은 두 번째이자 곧 나오는 논문, 「생명의 의미」(“The Meaning of Life”) 속에 정리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설명은 과학의 눈속임의 배후를 파헤치고 현대 정치 시스템 안에서 과학이 권력과 맺는 적극적이며 공생적인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제시될 것이라고 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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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현재로 돌아가다

‘1852년 이래 양봉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혁신’이라고 떠벌려진 플로우하이브(Flow Hive)는 2015년에 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양봉업자의 꿈의 제품으로 선전되었다.

“꼭지를 돌리고 순수하고 신선하며 깨끗한 꿀이 벌집 밖으로 바로 흘러나와 단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세요,” 그 웹사이트는 떠벌린다. “지저분하지 않고, 요란 떨 것 없고, 비싸지 않은 설비—게다가 벌들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포브스』(Forbes), 『와이어드』(Wired), 그리고 『패스트컴패니』(Fast Company)에 실린 열렬한 제품평의 도움으로 인디고고(Indiegogo)(([옮긴이] Indiegogo: 앞에서 말한 크라우트펀딩 싸이트이다.))에 선전된 플로우하이브는 꿈처럼 작용했다. 제품을 론칭하기 위해 7만 달러를 목표로 했는데, 글을 쓰는 시점에 6백만 달러 이상이 모였다.(([옮긴이] 2017년 11월 24일 현재 $13,287,603이다.))

너무 좋아서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가? 슬프게도 사실이다.

플로우하이브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자연 양봉업자들은 플로우하이브의 접근법을 ‘벌에 적용된 밀집사육(battery farming)’이라고 불렀다. 플로우하이브의 설계의 핵심부에 있는 모듈형 플라스틱 벌집(comb)은 벌을 사랑하는 인간들에게는 편리할지도 모르지만, 이럴 경우 벌들의 복지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커스턴 브래들리(Kirsten Bradley)가 설명했듯이, 플로우하이브의 벌집은 벌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들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정연하다. 그냥 맡기고 놔두면 벌들은 계절과 그 당시 군체의 특정 욕구에 따라 벌집을 구성하는 방들의 사이즈를 정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그 안에서 방들이 중앙 기관의 기능을 하는 초유기체의 일부인 것이다. 벌집은 벌들의 집이며 화학적으로 실현되는 그들의 소통체계를 뒷받침해준다.

환경에 적응하는 밀랍 벌집을 인공 플라스틱 벌집으로 대체하면 기능이 고갈된, 때로는 유독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표준화된 방들을 강요하면 벌들은 벌집 전체에 걸쳐서 수벌들을 기르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위의 벌 개체군들 사이에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되고 복원력이 감소된다.

플로우하이브의 발명자들은 벌 군체를 살아있는 복잡한 체계로 생각하지 않고 생산기계의 구성요소들로, 그래서 그 기계 안에서 이윤과 효율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되는 존재로 상상한 듯하다.

플로우하이브는 살아있는 건강한 체계들에서 요소들과 전체 사이의 상호연관을 방해하는 설계법에서 나온 수많은 인간의 발명품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부단히 질서와 통제를 추구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살아있는 것보다 우위에 놓고, 건강한 살아있는 체계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과 어긋나는 이상화된 해결책들을 부과한다. 우리는 역동적이고 항상 변하는 현실 세계의 생태와는 종류가 다른 완전하고 정태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해결책들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습관은 물리적 체계들의 엔지니어링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 자체에 대한 일부 비전들이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었다.

최근까지 보존연구는 연구단위로서의 개별 종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서식지 파괴가 개체의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종들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생태학자 제인 메멋(Jane Memmott)이 설명했듯이, 모든 유기체들은 적어도 다른 하나의 종에 중요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혹은 포식자나 먹이로서 혹은 꽃가루 매개자나 씨앗 전파자로서 연결되어 있다. 각 종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함입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종의 멸종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연달은 이차적 멸종을 유발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지를 우리는 이제야 막 이해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1980년대 이래 과학적 발견들이 그 어떤 유기체도 진정으로 자율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확인했다.

가이아 이론, 체계론적 사고, 복원력 과학에서 연구자들은 우리 지구가 상호의존하는 생태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물망임을 보여주었다. 근대 시기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사고를 형성해왔던 죽은, 기계론적 대상은 잘못 이해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초현미경적 바이러스들, 효모들, 개미들, 이끼들, 점균(粘菌)들 그리고 균근(菌根)들에서 나무들, 강들, 기후체계들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출현했다. 모든 자연현상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의 본질이 바로 우리를 포함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분자·원자·바이러스의 수준에서 인류와 ‘환경’은 말 그대로 서로 융합되어 당연하게도 생물학적 연합체를 구성한다.

비록 우리의 문화는 이 숨겨진 연관들을 파악하도록 우리를 잘 준비시켜주지는 않지만, 이 지식은 말 그대로 삶에 긴요하다.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같은 과학자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살아있는 것들—그리고 비(非)생물들—사이의 숨겨진 연관에 대한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카프라가 제기한 문제를 훌륭하게 이어받은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그의 책 『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에서 세계가 거시적 수준—대기, 대양, 지각(地殼)—에서만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다. 플랑크톤과 박테리아는 물방울의 핵 역할을 함으로써 구름의 형성에 기여한다. 균근은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협동한다.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 신호는 개미 군체로 하여금 초유기체로서 행동하게 한다.

공진화(co-evolution), 즉 바이오문화적 파트너관계의 형성이 바로 우리의 풍요로운 지구가 번성하는 방식으로 판명되었다고 하딩은 말한다. 우리가 이 관계들을 파열해오긴 했지만, 지금 다리를 놓아서 지구가 다시 한 번 건강하고 자기규제적일 수 있게 만들기에 늦지는 않았다.

이 과학적 발견들은 다른 누구보다 줄곧 철학자들의 화두였던 물음, 즉 ‘정신이 어디서 끝나고 세계가 어디서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준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경체계를 신체를 두뇌에 연결시키는 일단의 메시지 전달 케이블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미화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신과 세계의 경계는 구멍이 숭숭 나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인간 정신은 신경과 연관된 만큼이나 호르몬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의 사고와 경험은 두개골 안의 두뇌의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피부에 의해 울타리 쳐져 있지도 않다. 우리의 물질대사와 자연의 물질대사는 분자·원자·바이러스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신적 현상인 우리의 사유는 두뇌의 활동으로부터만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티드 락웰(Teed Rockwell)이 “신경체계신체환경을 포용하는 단일한 통합된 체계”라고 부른 것에서도 출현한다.

이 새로운 관점이 가진 중요성은 심대하다.

만일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두개골 상자 안에 똑딱거리는 시냅스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환경들에 의해서도 형성된다면 사유 자체와 자연 세계 사이의 분할—이는 바로 근대적 사상 전체를 뒷받침했던 분할이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근대 시기 전체에 걸쳐서 우리 자신을 자연 ‘위에’ 세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우리는 지금 근대 과학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

생태적 네트워크에는 사물들도 포함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물들이 생명이 없고 거칠며 활기가 없다고 인식하도록 배웠다. 자연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소풍 가기에 좋은 곳이다. 우리는 이런 세계상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땅·바다를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고 쓰레기로 채운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물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 ‘물활론(物活論)자들’(hylozoists)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물질이 살아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았다.

로마의 현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대작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물질과 에너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 또한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본래 역동적이라고 믿었다. 『도덕경』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연속적인 흐름과 변화에 함입되어 있다.

불교 텍스트들에는 ‘흐름’과 ‘머물지 않음’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무상(無常)과 부단한 운동의 상태에 있는 우주를 환기시킨다.

17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실존을 연속체로서, 신체·정신·생각·물질의 분리될 수 없는 얽힘으로서 파악했다. 그리고 바로 70년 전에 모리스 메를로뽕띠는 세상 안에 존재하기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기, 세상과 관계를 갖기,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세상을 모든 차원에서 인식하기를 옹호했다.

물질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말하자면 열-산업 경제(thermo-industrial economy)의 불[火]과 연기에 의해 흐려진다. 화석 연료가 19세기 이래 경제성장을 그토록 강력하게 추동하였기에 우리는 이 모델이 자원제한으로 인해서 한정된 지속기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야에서 놓쳤다.

이제 이 제한이 피부에 느껴지는 때이므로 이러한 생각들 가운데 다수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새 유물론’ 운동의 사유가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물질세계와 우리의 관계는 더 존중되고 기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확연한 중심이나 가장자리가 없는 방대한 상호연관의 분산된 그물망”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사물들’에 들어있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도—그녀의 말로 하자면 “우리의 쓰레기의 부름”에 응답하면서—물질의 진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리고 인간의 신체의 외부와 내부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힘들에 끈기 있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옹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내버린 것들, 쓰레기, 오물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다면 우리의 낭비적 소비패턴은 바뀌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철학자 피터 그래턴(Peter Gratton)은 “때로는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사람들이 무언가 깊은 것을 찾고 있다”고 해학적으로 말한다. 그는 묻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될 때 어떤 정치적·윤리적 귀결이 따르는가? 박테리아는 생명체로 간주되는가바이러스는로봇은생태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이거나 심지어 ‘그럴지도 모른다’라면,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세계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혁신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변화와 혁신은 더 이상 정밀하게 구축된 ‘비전들’을, 그리고 어떤 미래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거창한 디자인으로 그려지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약속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의 풍요로운 맥락에서 서로서로 그리고 생물권과 다시 연결될 때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제안이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복잡계들이 변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따르자면, ‘큰 것’을 형성하는 ‘작은 것’의 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심대한 변형은 다양한 변화들, 개입들, 그리고 종종은 작은 파열들이 일정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계론적 사고로부터 배웠다. 예측하기는 불가능한 어떤 순간에 체계가 변곡점 혹은 상전이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체계 전체가 변형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거듭거듭 확인해주는 가르침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드가 모렝(Edgar Morin)은 이렇게 썼다. “모든 거대한 변형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신념체계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실이 그것이 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아니다.”

생태철학자 조애너 메이씨(Joanna Macy)는 이 새 이야기의 등장을 ‘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식에서의 심대한 전환이며 우리가 식물·동물·공기·물·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의 각성이다.

이 이야기에는 영적 차원이 존재한다. (메이시는 불교학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과도 일치한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이 말한,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시·예술·철학에 의해서만큼 과학에 의해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되면, 지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죽어있는 자원의 저장소로 다가오지 않는다. 반대로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토양, 살아있는 체계들, 그리고 우리가 이것들이 재생성되도록 도울 수 있는 방식들 사이의 상호의존이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경제활동의 ‘근거’를 나타낸다.

이 새 이야기는 설계(디자인)에 대한 진취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며, 한 체계의 요소들 사이의 연관들과 상호작용들에도 이산(離散)된 구성요소들에 기울이는 것과 적어도 같은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플로우하이브에서 보았듯이 생산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에 들어있는 위험은, 그것이 (벌 군체나 초유기체와 같은) 공동체가 만일 건강하고 복원력을 갖춘 상태로 남아있으려면 항상 변해야 하는 상황에 너무 경직된 틀을 부과한다는 점이다.

점증하는 세계적 운동은 인간이 만든 세계를 새로운 렌즈를 통해 보고 있다. 자연적·사회적 생태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 운동들은 새로운 구성요소들을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원료를 추출하는 것을 맨 먼저 생각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자산—이른바 ‘순 현재자산’(net present assets)—을 보존·파수·복원하는 방식들을 찾고 있다.

설계자들과 제조자들은 이 운동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설계자들은 어떤 상황에 참신하고도 존중하는 시선을 집중하여 그 상황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명백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질적·문화적 자질들을 드러내는 매우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재생성적 설계는 지어진 세계를 얼어붙은 대상들의 풍경이 아니라 상호작용하고 서로 의존하는 생태들의 복합체로서 다시 상상할 수 있다.




왜 농업에서 오픈액세스 운동이 중요한가



 

오픈액세스(OA)를 중심으로 한 서구 담론은 대체로 학술계에 한정되어 왔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친구와 동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더 이상 학교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또는 온라인 논문 검색을 하다가 “정보이용 비용을 지불하려면 여기를 클릭하라”는 최후의, 사용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메시지에 도달했을 때 오픈액세스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은 이제 지식을 공유하는 무료 플랫폼을 제공한다. 우리 대다수가 학술적인 연구물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혹은 사회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가? 사회는 전 세계 과학•문학•예술의 성과에의 접근을 동력으로 하여 전진하지 않는가? 그 연구가 공적으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오픈액세스 운동을 추진하는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만약 우리가 학술계로부터 이 관심사를 이동시켜 자연•사회•테크놀로지처럼 상아탑을 넘어선 영역에, 궁극적으로는 이 영역들의 교차점인 농업에 적용한다면, 이 관심사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자원공유는 어떻게 생물다양성에 영향을 미치는가? 지식교환이 어떻게 공동체 복원력(resilience)을 추진하는가?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해서 가능하게 되는 정보에의 접근이 어떻게 불충분하게 대의된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 및 억압받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는가? 인구가 증가하는 지구를 먹여 살리는 능력은 어떻게 열린 문화에 달려있는가? 과거로 돌아 가보자.

2001년 12월 <열린사회 연구소>(Open Society Institute)는 오픈액세스를 홍보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서 그 당시에 프리 온라인 스칼라십(Free Online Scholarship)이라 불렸던 회의를 주최했고, 부다페스트 오픈엑세스 기획(the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에서 그 운동의 잠재력을 명확히 밝혔다. 오픈액세스 운동의 역사는 오픈액세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매체인 월드와이드웹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인터넷의 출현과 더불어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정보교환의 유례없는 가능성들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하면서 디지털 영역에 더 적합한 출판 모델을 만드는 대신에 우리는 인쇄용으로 개발되었던 바로 그 관행들을 적용했다. 한때 출판비용을 충당하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던 것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별 비용이 들지 않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그 선두주자인 오픈소스처럼, 오픈액세스는 사용자들이 적절한 출처를 밝히고 자유롭게 내용을 복사•수정 또는 배포할 수 있는 라이선싱을 장려한다. 대부분의 전문분야에서 저자들은 출판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오픈액세스로 출판을 한다고 해도 수익을 잃는 일은 없다. 하지만 오픈액세스 문헌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에 자유롭게 생산하거나 유지할 수는 없다. 오픈액세스의 큰 과제는 어떻게 학술적인 연구가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최종 사용자, 즉 독자를 위해 접근 비용과 장벽들을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훌륭한 많은 모델들이 제안되기는 한다. 그러나 ‘오픈~’ 운동은 오픈리포지터리(open repository)와 오픈저널을 열심히 후원하는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합적인 경제모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오픈액세스 운동은 학술연구물에 자유롭게 접근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학술연구의 구축과 개선을 위한 플랫폼으로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비용을 분산시키는 경제적 모델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존재한다.

하지만 “오픈/개방”의 에토스는 인터넷보다 심지어 우리 현대 문화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으며 중요하게도 라이선싱이 핵심은 아니다. 모두가 소유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진 농업 유산에 분명한 개방성의 증거가 보인다. 자연수분(受粉)(open pollination)은 식물들이 통제된 절차가 아닌 바람•벌레들•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번식하는 방법으로 그로 인해 광범위하게 다양한 유전자적 특징을 지닌 식물들이 생겨난다. 자연수분에서 보이는 유전물질의 끝없는 혼합이 식물의 전반적인 활기를 증가시키고 자연의 풍부함을 재생시킨다. 이것이 생태계의 생명 기능이며 적응과 진화의 기본 요소들이다. 그로부터 생기는 ‘잡종강세’(hybrid vigor)는 체계 전체의 복원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공생 균근 네트워크들(Mycorrhizal networks)(([옮긴이] 균근(mycorrhizal fungi)은 버섯 균사체와 식물 뿌리 사이의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공생 균근 네트워크는 개별 식물들을 함께 연결하고 물, 탄소, 질소와 다른 영양물과 미네랄을 옮기는 균근이 창출한 지하 균사 네트워크이다.)) 혹은 흔히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이라고 불리는 것이 점점 관심을 끌고 있는데, 여기서는 균류(菌類)가 개별 식물들을 서로 연결하고 물•탄소•질소 및 기타 영양물뿐만 아니라 정보를 옮기는 일을 한다. 자연은 우리가 지금껏 상상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열려있으며 그 개방성이 진화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 같다.

개방성의 긴 역사는 전 세계 수많은 전통 문화에도 있다. 종종 집단적으로 계승되고 구전(口傳)으로 공유되며 행정적•지리적 경계선들 너머로 퍼진 지역 지식은 농부들이 종자를 저장하고 종자를 교환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농업과 생물다양성 보존의 근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이루어져 왔다. 소유자가 불분명한 우리 농업 문화유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저작권•특허권•육종자권(breeders’ rights)이 토착 종자의 확산을 방해하고 지역 지식의 지속적 보호를 저해한다. 환경•농업•사회•문화•테크놀로지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자연적•인간적인 체계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독창성에 강박되는 것은 미숙한 일인 듯하다.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독창적이기 위해서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우리의 농업 유산은 우리 모두를 위해 차려진 잔칫상이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그 유산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오픈액세스 운동은, 공적으로 연구비를 받는 학술연구와 학문은 페이월(paywall)(([옮긴이] 유료 동의를 거치도록 해서 인터넷 내용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을 종종 페이월이라 부른다. 학술 논문들은 대체로 페이월의 대상이며 학술 논문들을 구독하는 학술 도서관을 거쳐서 연구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뒤에 갇힌 상태로 있어야 하고 제한적인 라이선싱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사유 생산물(a proprietary product)이라는 전제를 ‘공익’—사회에 이익을 주고 적절한 재사용을 위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전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선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랜 전통과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합류하여 유례없는 공익이 가능하도록 했다. 연구와 지식을 위해 과학자들과 학자들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학술지에 그들의 연구 결실을 출판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이 가능하게 만든 공익은, 동료의 평가를 거친 학술지들이 전 세계에 배포되고 모든 과학자들•학자들•교사들•학생들 및 기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자유롭고 제한 없이 그 학술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가리킨다.

개방성의 특성은 공동 창조, 공동체 소유 및 각자의 성공과 실패를 거름삼아 만들어가기이다. 개방성은 개인 소유자에서 공동체—즉 전체 체계의 안녕을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체계—로의 이동을 요구한다. 이는 다른 어디보다도 농업분야에 더 적중하는 말이다. 기원전 10,000년 무렵에 일어난 농업혁명 이후로 농업은 인간 사회와 자연의 교차점이었다. 농업의 역사는 파괴와 약탈로 가득하지만 재생과 치유의 역사로 존재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농업생태학—사회적•환경적 생태계들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생태론적인 농업 실천을 가리키는 용어—은 본질적으로 상리공생(相利共生)적이다. 사실상 농부들은 결과에 배타적으로 집중하기보다 농업 생태계의 전반적인 안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 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때 사회적•환경적 복원력이 생긴다.

 

개방성에서 자율성 찾기

개방성의 옹호자들은 우리에게 개방성은 개발 방법론이고, 공유와 협동은 번성하는 상리공생적인 생태계에서 그렇듯이 우리의 경우에도 사회적 유대를 낳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규제되지 않은 정보를 공유할 때 그 정보는 개선되며 한층 신뢰할 수 있게 되어 그 이후에 인류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개발주의적 관점은 대부분 정반대 접근법을 택한다.

국제개발은 대다수가 하향식이다. 자선—오늘날 우세한 가난 해결법—은 공동체들을 자기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참여자들로 생각하기보다 수동적인 수혜자들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식량 생산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법인 산업형 농업은 농부들을 장기간에 걸친 상호 의존성의 체계에 가두고 지구를 먹여 살린다고 허위적인 주장을 하면서 사회적인 계층화를 강화하는 경제모델을 추종한다. 대규모 단일경작 및 사유화된 화학제품과 방법으로 추진되는 산업형 농업은 기후변화에의 최대 기여자로서 현재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3 정도를 발생시키고 있다. 전 세계에서 번성하는 산업형 농업은 영농인 교육서비스와 국제개발업자들을 통해 가속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농촌의 생계를 파괴하고 있다. 사유(私有)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하향식의 사고방식)은 가난한 농업 공동체에 기술과 “전문적 지식”을 옮기는 선의의 개발 기관들 사이에서조차 널리 퍼져 있다. 이 “혁신들”이 거의 지속가능하지 않고 농부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혁신들은 대부분 비용이 너무 비싸고 지역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하는 자연세계는 농부들이 처한 수시로 변동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들과 더불어 영농(營農)을 지식 기반 숙련기술, 지략(智略)과 문제 해결 능력에 뿌리를 둔 다차원적인 전문업으로 만든다. 농부들은 주변 경관들, 가족들, 농지들, 공동체들 및 지역들과 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이 그 전 체계를 관리해야 한다. 더군다나 농업의 방대한 범위는 토양•물•에너지의 보존을 포함하며, 교란을 최소화하고 잠재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생태적인 관계들을 관리—통제가 아니라—하는 것을 포함한다. 농사는 생계이므로 농부들은 이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단일 작물, 단일 생산물이나 단일 소득원천에 결코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작물•토지사용•수입원천을 다양화하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농부들은 생산도구와 종자 같은 유전자 자원을 보존해야 하고 할 수 있을 때마다 지역 자원들을 활용해야 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농업부문에서 노동인구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토지에의 접근을 막는 엄청난 장벽에 부딪히며 농삿일 말고도 자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이러한 광범위함이 농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일이 고되고 지식 집약적인 전문업으로 만든다. 슬프게도 농부들은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일부이기 때문에 정보부족이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 지역 전체가 사유화에 기반을 둔 관행을 채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정보 접근성 부족은 농부들의 자율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개방은 환경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농사는 자원 집약적이지 않고 지식 집약적이다. 건강한 농업생태계의 기본 요소인 지역 지식은 해당 장소와의 깊은 협력작용을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된다. 공동체의 복원력에서 시간이 행하는 역할이 최근에 꽤 주목을 받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땅과 관련하여 실험하고 혁신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땅을 경험하는 농부보다 자연환경에 더 능숙한 사람은 없다.

만약 농부가 끊임없이 바뀌는 조건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복잡한 체계를 관리해야 한다면 그녀는 친구나 이웃과 상의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과학기술을 장소의 특수성에 맞도록 변경하고 개선하고 지역화하는 그녀의 능력이 필수적이듯이, 농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그리고 종자들—를 전달하는 농부의 능력도 필수적이다.

지역에의 이러한 맞춤들—또는 일을 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이제 이 분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지역혁신들(local innovations)이라고 부른다. 주류 산업부문의 사유화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지역혁신들은 다면적인 맥락에서 만들어지고 생겨나므로 대체로 한 장소의 범위를 고려한다. 요컨대 지역혁신들은 복원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역 농업기획들을 지원하는 국제적인 다수이해관계자 네트워크인 <프롤린노바>(PROLINNOVA)(([옮긴이] <프롤린노바>(PROmoting Local INNOVAtion=PROLINNOVA)는 생태학적으로 농업과 자연자원관리를 지향하고 남녀농부들이 농업연구와 지속가능한 생계를 위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는 혁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역혁신은 정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보통 각자의 기획에 따라 지역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한다—을 찾거나 개발하는 과정이다.

•지역혁신은 이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 지역에 새로운 농업기술 또는 일을 조직하는 방식들이다.

혁신들이 효과적이고 복원력이 있으며 농업 공동체에서 자랑거리로 판명된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혁신들이 현대과학과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향식 개발모델에서 공동체들•개발업자들•자선가들 사이에서의 참여관계를 우선시하는 모델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에의 집착을 떨치고, 아니 정말이지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우리의 정의 자체를 바꾸어서 다른 앎의 방법들을 수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 연구와 개발은 현실세계의 실천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연구와 개발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들과 함께 지식과 공동체 안녕을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

다행히 인터넷이 학문의 성격을 바꾸고 있으며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새롭고 포괄적인 작업 방식들을 촉진하고 있다. 일례로 동료평가(peer review)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비밀리에 판단을 내렸던 동료평가는 이제 공개적으로 조직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의 기록은 이기심이나 편향된 논점들을 드러냄으로써 학문을 개선할 수 있다. 이 열린 과정이 학력주의(품질 관리의 메커니즘)의 개념 자체를 바꾸고 디지털 지평에서 평등의 횃불이 된다. 앎의 다른 방식들과 공식적인 학문을 통합함으로써 연구의 신뢰성―즉 지식에의 주장들(knowledge claims)을 스스로 바로잡고 테스트하고 승인하는 과학의 능력―을 크게 개선한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이다.

 

디지털 시대에 지식은 비경합적이다

인터넷의 탄생은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했으며 인터넷은 이제 잠재적인 평등화 메커니즘 역할을 한다. 인터넷은 또한 지식을 비경합적으로 만들었다. 이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지식에 접근해도 다른 사람이 그 지식에 접근하는 능력이 손상되지 않는다.

학술 문헌—이는 예전에는 (한 번에 소수의 사용자들만이 접근했으며 사용에 따라 마모되는) 책•학술지•비디오 같은 물리적인 대상들 안에 저장되었다—은 이제 무한한 디지털 공간의 일부이다. 이 공간에서 지식이 고갈될 위험은 없다. 이것이 디지털 정보를 비경합적으로 만들며 우리에게 유례없는 개방성을 실현할 기회를 준다.

하지만 바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사용자들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은 서구의 몇몇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영토들에 재빨리 집중되었다. 한때 모든 사람에 의해 민주적으로 형성되는 위치에 있는 탈중심화된 기반 시설이었던 것이 대다수의 지역들과 인구들을―이 지역들과 인구들이 최대의 이득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경우조차도―주변화해온 것이다. 전 세계 후진국들에서 인터넷 접근을 통제하는 것은 주로 정부들이며 몇몇 정부는 인터넷을 언론의 자유, 항의, 그룹 조직화를 억압하기 위한, 심지어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 내지 기타 소수자들을 엄중히 단속하기 위한 무기로서 사용한다.

개방성은 포괄적인 인터넷 거버넌스 모델—차이와 무관하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모델—의 열쇠가 된다. 다른 장애물로는 과도한 특허등록처럼 개방적인 개발 모델에 크게 방해가 되는 것도 있다.

특허권, 육종자권 및 기타 지적 재산권은 혁신 체계에 심각한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산업농업 모델이 사유화된 테크놀로지—나중에 수수료를 받고 제공될 경쟁력 있는 지식의 집합체—에 뒤이어 생겨났다. 몇몇 농약 제품들은 식물과 동물 유전자로 특허를 얻었다. 바로 이 유전자들은 공개된 유전자 혼합을 통해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이제 자연의 살아있는 유기체의 유전자 구조를 소유하고 있으며 냉담할 정도로 잔인하게 이 “재산”의 보호를 수행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농부들은 그들의 일의 대상인 식물과 동물들을 집단적으로 번식시켰고 보호했으며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주었다. 현재 시행중인 지적재산권은 이 시스템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사실 지적재산권은 대규모 농업 독점체들, 산업 국가의 무역협정들과 배타적인 시장들에 복무함으로써 이 시스템들을 훼손한다. 결과적으로 시골경제가 고통을 겪고 생물다양성이 감소하며 농부들은 자율성을 박탈당한다.

농업 분야의 지적재산권은 두려워하고 의존적이며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일부 농부들은 영리목적의 회사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훔쳐 특허권을 얻을까봐 두렵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길 꺼린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토착 농부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식민주의의 긴 역사 속에 뒤엉켜 일어난, 지식의 부정 유용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제인 앤더슨(Jane Anderson)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 공공성, 개방성과 커먼즈의 에토스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응어리를 적절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재산에서 ‘공적 [이익]’이라는 개념 자체가 식민지 맥락에서 획득된 토착경험들과 상충되는 포용과 대표성 개념을 전제로 한다.

‘공적인 것’이 종종 차별적이었기에 개방성이 주변화된 사람들 모두에게 긍정적인 힘으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공개된 나의 지식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지?”라고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이것은 개방성을 크게 문제 삼는 것이지만, 사안의 복잡성을 재검토할 기회이기도 하다. 사유화에 기반을 둔 개발 모델과 지식 체계를 전복하고 개방된 틀을 택하는 것은 사회적•환경적 정의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런 갈등 해소가 생물군계(biome)에 대한 수용력과 복원력을 유지하는 지구의 능력을 결정할 것이다.

문화적 가치 체계들의 다양성, 광범위한 불평등 그리고 토착 주민들과 국민국가들 사이의 종종 해결되지 않은 주권 정치를 고려할 때, 우리는 지역 농부들을 혁신과정으로 끌어들여서 이들이 혁신과정을 사회환경적•문화적 현실에 연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류의 성공은 모든 사람의 인간다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진보는 사회정의•환경파수•시민자유 및 지역적·비판적 관점을 도외시하고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농업생태학—퍼머컬처(permaculture)(([옮긴이] 퍼머컬처(permaculture)는 생태농업으로 자원 유지·자족(自足)을 꾀하는 농업 생태계를 추구한다.)), 바이오다이나믹 농업(([옮긴이] 바이오다이나믹 농업(Biodynamic agriculture)은 유기농 농업과 매우 비슷한 대안농업의 한 형태이자 원예•식품•식생활에 대한 전체론적•생태학적•윤리적 접근법이다. 바이오다이나믹 농업의 원칙과 실천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실천적 제안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920년대 초부터 많은 농부들과 연구자들의 협력을 통해 발전되었다.)) 내지 재생성적 농업의 모습을 띠든지 아니면 또 다른 모델의 모습을 띠든지 간에—은 자연 과정을 모방하고 사회적•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농업체계를 공들여 만드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제 진보는 앞날을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생물체를 연결하는 정보와 자원을 공유하는 저 아래의 균류 네트워크 쪽을 가끔씩 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토지균등분할론자들과 옹호자들이 인식할 때이다. 이것이 오픈소스 패러다임이고 농업생태학은 그 에토스에 뿌리내리고 있다. ♣

 




아마추어 계급 혹은 웹의 예비군


  • 저자  :  바실리스 코스타키스 (Vasilis Kostakis)
  • 원문 :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 (2009)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Rethinking Marxism에 실린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의 논문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2009)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한 것이다. (초록抄錄은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정리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고문헌을 표시하지 않았다. 참고문헌을 보려면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초록

이 글은 웹의 새로운 버전에 의해 개시된 컴퓨터 산업의 변형을 다룬다. Tim O’Reilly (2006)에 따르면 사회적 웹 혹은 웹 2.0의 출현은 아마추어들이 웹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되면서 아마추어 계급의 형성과 새로운 착취 방식을 낳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서 웹 2.0의 기능은 아마추어들의 자발적 기여를 착취하고 가치화하는 것이다. 이 논문의 바탕에 되는 주장은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보여주며 아마추어들의 역할이 어느 한 쪽의 우위가 결정되는 데 작용한다는 것이다.

Key Words: Web 2.0, Amateur Class, Exploitation, Netarchists, Commons

 

웹 2.0과 집단 지성 및 창조성의 착취는 서로 엮여 있는 개념들이다. 웹 1.0의 내부에서 출현한 웹 2.0은 사회적 창조성, 협동 그리고 사용자들 사이의 정보공유를 촉진한다. 그 참여구조는 사용자들이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가치를 추가할 수 있게 한다. 웹 2.0의 출현은 eBay, Facebook, Flickr, MySpace, del.icio.us와 YouTube 같은 막대한 이윤을 발생시키는 기업을 낳았다. 이 기업들은 집단지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웹 2.0에 들어있는 일단의 참여활동과 도구들에 돈을 댄다.

그레엄(Paul Graham)에 따르면 웹의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역할이 있다. 전문가(professional), 아마추어. 최종 사용자이다.((D. Kleiner and B. Wyrick. 2007. InfoEnclosure 2.0. Mute. http://www.metamute. org/en/InfoEnclosure-2.0 (accessed 21 December 2007).)) 여기에 ‘해커’를 추가할 수 있다. 해커는 전문가의 특징(깊고 전문화된 지식)과 아마추어의 특징(낭만주의)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해킹을 제한을 받지 않는 순수한 실험적 활동으로 보는 워크(McKenzie Wark)에 따르면 해커는 사적 소유의 형태 너머에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적 아마추어”이다.((M. Wark, A hacker manifesto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아마추어와 해커의 핵심적 차이는, 전자는 플랫폼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되고 전문가들(해커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다)의 도움이 없으면 자유의 잉여―즉 진정한 커먼즈―를 산출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추어가 플랫폼 소유자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자도 아마추어 계급에게 의존한다. 사업에 가치를 추가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해커나 전문가가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아마추어 계급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아마추어 계급의 계급으로서의 형성이 웹 2.0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웹 1.0에서는 전문가, 해커, 최종 사용자의 역할이 정해진 반면 아마추어가 들어설 구체적인 공간이 없었다. 웹 1.0의 탁하고 복잡한 성격으로 인해 아마추어가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웹 1.0의 미로 속에서도 생산에 참여하고 싶은 잉여 인구가 있었는데, 이 웹 1.0의 예비군은 아직 아마추어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 느슨한 아마추어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아직 능력이 비물질적 생산에 참여할 정도로 진전되지 못한 아마추어들은 웹 2.0에도 존재하며 웹 2.0 노동인구의 잠재적 부분을 이룬다. 이 잠재적 부분은 아직 온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에 통합되지 않고 있다. 아마추어들은 직장―플랫폼들―에 위계의 형태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형태로 배치된다. 다른 한편 플랫폼들은 잉여 인구를 착취하기 위해 손쉬운 형태로 변형된다. 앞으로 새 버전의 웹은 해커나 전문가들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작은 돈을 받더라도 웹 생산에 참여할 큰 열성을 가진 아마추어들을 더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마추어는 금전상의 이득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고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가 시간에 창조를 하지만 (그리스어로 ‘아마추어’를 의미하는 ‘ερασιτέχνης’는 ‘애호가, lover’를 의미하는 ‘εραστής’와 ‘기예, art’를 의미하는 ‘τέχνη’가 합해진 것이다) 그 지식은 해커나 전문가처럼 전문화되어 있지 않다. 맑스는 인간의 자유에 채워진 족쇄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화폐라고 주장한다. 아마추어는 통상적인 인식과 단절하며 이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일어난다. 아마추어는 인간 노동의 소외된 본질인 화폐를 그 자체 목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마추어 계급의 생산은 화폐의 논리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유·존중·사회화·인정 같은 가치들에 기반을 둔다. 워크가 말하는 해커처럼 아마추어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창조한다. 둘 다 집단적 노동, 혁신, 자유의 옹호자들이다. 아비드슨은 아마추어가 참여하는 경제 유형을 ‘윤리적 경제’―인간들이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주체들이 서로 연결되는 질서를 창출하는 경제―라고 부른다.((http://www.p2pfoundation.net/Introduction_to_the_Ethical_Economy)) 이와 달리 근대 기업 자본주의는 윤리적으로 건전한 사회질서와 양립될 수 없다고 한다.

웹 2.0은 아마추어들의 예비군을 착취하는 조건을 창출했다. Flickr, MySpace, Facebook, del.icio.us와 YouTube가 그 대표적인 웹 플랫폼들이다. 이들은 아마추어들의 능력과 창조성에 대한 욕망을 활성화하여 포획한다. 아마추어의 자발적 참여가 플랫폼 관리자들에게서 (잉여) 가치로 변형된다. 아마추어들에게 생산수단이 이용가능해지지만 플랫폼들은 기업이 계속적으로 소유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새로운 표현이다. 산업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전문가들)이 보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판매한다. 창조·자부심·충족감은 느끼지 못한다. 회사는 부유해진다. 더욱이 생산과정이 경쟁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소외된다. 경쟁에 기반을 두지 않는 웹 2,0의 지적 생산에서는 아마추어들이 (때로 소액의 보수를 받고) 창조·소통·사회화·자부심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기업들은 이로부터 (주로 광고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2007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페이스북의 1.6% 지분에 해당하는 주식을 2억4천6백만 달러에 샀으며, 1년 후에 구글은 유튜브를 16억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보수가 거의 지불되지 않는 아마추어들의 웹 생산에서도 자본은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에서 자본 축적은 항상 자본의 자기확장에 충분한 수 이상의 노동 인구, 즉 과잉 인구를 발생시킨다고 맑스는 『자본론』에서 말했다. 그런데 아마추어 생산에서는 임금 의존성이 없으며 따라서 추가적으로 아마추어를 착취할 때 한계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래서 넷지배자들(netarchists 혹은 netocrats)―플랫폼들을 소유한 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려고 한다. 예비군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은 충분히 성취될 수 있는 목표이다. 넷지배자들은 그 투기적 성격 때문에 커먼즈 영역의 강화를 위한 여러 계획들을 위임받기에는 위험하다. 플랫폼을 소유하는 자본가들의 착취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커먼즈 영역의 창출과 강화의 이름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마추어들과 해커들의 손에 달려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우리에게 소통이 결핍된 것이 아니다. 사실 소통이 너무 많다.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창조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라고 썼다.((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108.)) 아마추어들은 창조하고 저항하지만, 그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 있다.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이 필연코 투쟁의 전술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웹의 생산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사회 계약이 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사회 계약 2.0’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생산과 소유의 새로운 의미들 및 방식들(피어 생산peer production과 피어 소유peer property)이 포괄되며, 이것들이 실질적 커먼즈 영역의 창출에 기여한다. 피어 생산에서 의사결정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참여와 협력에서 이루어진다. 이 생산양식은 등가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 생산이나 위계적 구조에 기반을 둔 계획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어 소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나 GPL과 같은 법적 형태 아래에서 자원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공동체적 공유의 형태를 띤다. 피어 소유는 사적 소유나 국가소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소유형태들이 배제적인(‘나의 것이면 당신의 것이 아니다’) 반면에 피어 소유는 포함적이다(‘나의 것일지라도 당신의 것도 될 수 있다’). 국가는 민중(국민)을 대신해서 공적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반면에, 피어 소유에서는 민중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관리한다. 즉 커먼즈이다. 따라서 피어 3요소(피어 생산, 피어 소유, 피어 거버넌스)에 기반을 둔 진정한 커먼즈가 넷지배 플랫폼들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 커먼즈에서는 집단적 지성과 사회적 창조성의 관리가 ‘넷지배적 이데올로기’―이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불린 바 있다((Barbrook, R., and A. Cameron. 1995. The Californian ideology. Alamut, August. http://www.alamut.com/subj/ideologies/pessimism/califIdeo_I.html (accessed 31 arch 2008).))―에 의해 추동되는 사적인 영리 기업들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넷지배자들은 참여를 포용하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를 인류 미래의 유일한 지평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 행한 넓은 범주화와 일반화가 특수한 사례들에서 해석의 오류를 낳을지도 모른다. 나[코스타키스]는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아마추어들이 어느 쪽이 우세한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정하게나마 조명했기를 바란다. 아마추어들이 창조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일정한 권리들을 플랫폼의 소유자들에게 양도해준 듯 보일 수도 있다. 넷지배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여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비물질적 가치의 생산이 임금 의존성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질서를,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생산하는 아마추어들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홍수 속에서 커먼즈의 강화를 향하는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은 성취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 이상의 것이다. “사회 변화의 핵심적 동인으로서 공유 및 커먼즈 공동체들의 지속적인 강화”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Michel Bauwens, “The social Web and its social contracts: Some notes on social antagonism in netarchical capitalism”, Re-public. http://www.re-public.gr/en/ p261 (accessed 25 July 2008).))♣

 

 




오픈 액세스의 개척자 PLOS



 

오픈 액세스의 개척자: 과학 공공 도서관(The Public Library of Science)

 

1990년대에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 해럴드 바머스(Harold Varmus)와 캘리포니아 과학센터의 과학자 패트릭 브라운(Patrick Brown), 마이클 아이센(Michael Eisen)은 과학연구를 공유하는 데 가해지는 많은 제약으로 인해 점점 더 좌절을 겪었다. 학술 연구자들이 (상당수가 납세자들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는) 돈이 많이 드는 어려운 과학연구를 하고 같은 전공자로서 연구물에 대해 리뷰를 하는 사람들임에도 상업적인 학술지 출판사들은 보통 출판된 결과물의 저작권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출판사들은 도서관들로서는 종종 감당할 수 없는 구독료를 부과하고 연구논문들에 접근·복사·공유하는 사람들의 권한에 법적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구독료는 10년 넘게 인플레이션율 이상으로 오르고 있으며 미국 대학들은 이제 학술지들에 연간 100억 달러 이상을 쓴다. 심지어 하버드대 같은 가장 부유한 기관들조차 이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http://isites.harvard.edu/icb/icb.do?keyword=k77982&tabgroupid=icb.tabgroup143448))

이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 바머스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 전역의 과학자들에게 그들 논문의 전문을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즉각 혹은 몇 달 간의 타당한 지연이 있은 다음에 이용하는 것을 막는 학술지들에는 더 이상 논문을 내지 않겠다고 서약하기를 청하는 온라인 청원서를 내놓았다. 또한 그들은 더 이상 그러한 학술지들을 구독하거나 그러한 학술지들을 위해 리뷰를 쓰지 말 것을 과학자들에게 촉구했다.((http://www.plos.org/about/plos/history))

그에 대한 응답은 신속했고 놀라웠다. 180개국 34,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그 공개 청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서명자들이 청원서의 목표를 실질적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는데, 그 이유는 논문들을 실제로 제공하거나 논문들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출판물들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 간극을 메우고자 바머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과학 공공 도서관’(www.plos.org)으로 알려진 새로운 출판벤처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논문들을 모두가 영구적으로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오픈 액세스” 출판 매체를 제공함으로써 과학자들과 연구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연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저자는 저작권을 가지며 자유로운 재사용·공유·배포가 가능하도록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어트리뷰션 라이센스(Creative Commons Attribution license) 하에 논문을 공개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에 관한 에세이를 보라.) 이 프로젝트는 런던에 기반을 둔 기업가 바이텍 트라츠(Vitek Tracz)와 1990년대 후반의 다른 혁신적 출판업자가 유사한 목적으로 주도했던 출판벤처인 바이오메드 센트럴(Biomed Central)의 개발을 참조하여 이루어졌다.

2003년 설립된 이래 플로스(PLOS)는 공동체의 저항에서 시작하여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직접적으로 접근가능하며 공개적으로 인준된 학문적 내용을 담은 세계 최대의 출판사로 성장했다. 최초의 플로스 학술지인 『플로스 생물학』(PLOS Biology)은 2003년 말에 첫 논문들을 출판했으며 순식간에 양질의 논문들로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 수년 간 그 프로젝트는 『플로스 의학』(PLOS Medicine)과 계산생물학, 유전학, 병원균, 도외시된 열대성 질환 분야의 연구에 각각 초점을 둔 네 학술지를 내놨다.

이 여섯 개의 학술지가 성장하면서 설립자들은 학적 소통에서의 변화를 촉진한다는 본래의 더 야심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목표로 나아가는 그 다음의 중요한 단계는 과학 전체를 포괄하기 위해 그리고 과학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개척하기 위해 2006년에 새로운 과학지 『플로스 원』(PLOS ONE)(www.plosone.org)을 만든 것이었다. 처음으로 출판되는 논문 수에 가해지는 어떠한 인위적 제한도 없게 되었다. 투고된 논문들은 예견되는 파급력이 아니라 과학적 타당성과 기술적 질을 기반으로 검토되었다. 관행적으로 연구자들은 가장 까다로운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갖게 되는 명망을 추구해왔는데, 이것이 이제 학술지의 명망이 논문의 질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논문 저자와 편집자 양자로 하여금 주의 깊은 증거를 제공하기보다는 가장 선정적인 주장을 하거나 그런 주장을 뽑는 비뚤어진 동기를 낳을 수 있다. 『플로스 원』은 적절하게 수행된 과학이라는 규준을 충족시키는 모든 투고논문을 출판하는데, 이것이 『플로스 원』을 2010년에 세계 최대의 학술지로 만든 출판전략이다. 모든 주요 출판사들이 곧바로 『플로스 원』의 “거대 학술지”(megajournal) 모델을 모방하여 논문 수를 인위적 제한하지 않는 광범위한 학술지들을 출판했다.

대규모 독자층과 투고논문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플로스 원』은 같은 전공자의 엄격한 출판 전 리뷰의 타당성에서도 선구자가 되었다. 통계적 타당성, 윤리적 리뷰, 보고 지침과 관련한 몇 개의 검증사항은 모든 학술지 가운데 가장 엄격하다.

플로스는 처음에는 자선기금에 의하여 그리고 고든 앤 베티 무어 재단(the Gordon and Betty Moore Foundation),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the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두 재단은 각각 인텔사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와 연결되어 있다―과 같은 박애주의적 기금으로부터 온 수입에 의하여 재정을 조달했다. 플로스는 2010년에 처음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했으며 비영리사업인데도 그때 이래 매년 흑자를 냈다. 플로스는 재정정보에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왔으며 그리하여 비영리단체에 대해서 정부가 요구하는 정보공개에 준하는, 세부 수입액·지출액 공개의 선구자였다. 2012년에 플로스 출판벤처는 총 3천 8백만 달러를 거둬들이고 거기서 7백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재정적 지속가능성이 일단 확립되자 학적 소통에서의 새로운 혁신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는 개별 논문들의 파급력과 쓰임새를 아주 세부적으로 측정하는 데 쓰이는 공개 데이터를 제공하는 도구인 논문수준표(Article Level Metrics)였다.((http://article-level-metrics.plos.org)) 이러한 혁신 이전에는 연구논문에 대한 평가가 전통적으로 그것 자체의 개별적 가치보다는 그것이 게재된 학술지의 평판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이 기획은 또 다른 영향을 미친 바 있으니, 10만 명 이상의 연구자와 400개 이상의 기관이 서명한, 연구평가에 관한 샌프란시스코 선언(the San Francisco Declaration on Research Assessment, DORA)이 바로 그것이다.((https://en.wikipedia.org/wiki/San_Francisco_Declaration_on_Research_Assessment)) 2012년의 이 성명은 자금을 댄 사람, 기관, 기타 출판사들이 학술지의 ‘피인용지수’(논문의 평균 인용 횟수)를 개별 과학자의 기여의 질과 혼동하지 않고 연구논문들을 그 자체의 장점을 기반으로 판단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연구 평가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고용·승진·해고를 결정하는 방식에 느리기는 해도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최근에 플로스는 윤리적인 혹은 기타의 고려에 따라서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게재논문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데이터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플로스는 연구의 정확성을 지속적으로 평가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논문들을 출판 이후 짜임새있게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들 또한 개발했다.

과학 분야의 출판을 커먼즈의 한 유형으로 다시 생각함으로써 플로스는 학적 출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선봉에 있어왔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플로스가 이제 수천의 오픈 액세스 학술지들을 포함하고 50만 편 이상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구논문들을 포함하는 과학 분야의 출판을 중차대하게 대변하고 선도적으로 혁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