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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 저자  : Peter Linebaugh, Sasha Liley
  • 원문 : Peter Linebaugh on the Long History of Pandemics (https://kpfa.org/episode/against-the-grain-april-8-202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Pacifica radio>의 프로그램 ‘Against the Grain’에서 2020년 4월 8일에 있었던 싸샤 릴리(Sasha Liley)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인터뷰 내용을 (약속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상황에서 라인보가 30년 전인 1989년에 쓴 팸플릿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인터뷰 당사자들에 의해 읽기 좋게 편집된 텍스트는 정리자가 알기에 현재로서 없으며, 정리자가 직접 팟캐스트를 듣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내용 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도록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미 정리해서 옮겼으니 서로 교차해서 참조할 수 있다.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싸샤 릴리(Sasha Liley)
인간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바이러스들과 기생체들이 인간을 괴롭혀왔습니다. 계급사회의 출현 이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에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기생체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가 피터 라인보(Perter Linebaugh)는 HIV 에이즈라는 유행병이 도는 와중에 이 역사를 추적한 바 있습니다. 라인보는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메이데이의 완결되지 않은, 진실하고 진정하며 놀라운 역사』(The Incomplete, True, Authentic, and Wonderful History of May Day) 등의 저자입니다. 가장 최근의 저서로는 『뜨겁게 불타는 붉고 둥근 지구』(Red Round Globe Hot Burning)가 있습니다. 라인보, 당신은 1989년에 <ACT UP>(the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민중의 힘을 촉발하기 위한 에이즈연합)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는데요,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라고 이름을 정한 팸플릿을 쓰게 된 맥락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
저는 보스턴에서 <ACT UP>이 한창 투쟁을 하는 가운데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저는 역병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 자체가 우리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세계사에 일어났던 10개의 역병들을 간단히 알아보는 일이, [COVID-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해온 싸움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질병을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동성애혐오증적 방식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데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성되는 공포가 불안정과 공포의 조건에서 번성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연결고리입니다.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역병이 도는 때는 민중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때이지만 동시에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대 그리스, 이집트로 가서 이 점에 대해 고찰합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이러한 사회 질서의 전복 가능성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민중이 겪는 공포, 혼란 그리고 가난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요.

라인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핵심은 전염병, 역병, 팬데믹이 치명적이라는 점, 즉 인간 개인들, 가족들, 공동체들을 파괴하며 때로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역병들은 사회적 삶의 재생산이라는 기획 일체와 필수적인 연관을 가집니다. 그래서 전염병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역사적인 힘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전염병들에 대한 여러 대응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령 대략 2000년 전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간의 질병 유전자풀이 지중해 지역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최초로 혼합된 것이지요. 아마도 이는 대륙간 통상의 한 측면일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종교들이 (일신론적 종교들입니다) 형성되었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기축시대’(axial age)를 말할 때 그는 이 종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Achsenzeit(Axial Age)’라는 말은 1949년 출간된 야스퍼스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 처음 등장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사이에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에서 병렬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등장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에는 도시국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도 형성되고 있었지요. 이때에는 사람들이 전염병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이 질병들을 발생시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박테리아도 알지 못했고 바이러스도 알지 못했으며 세포생물학도 없었습니다. 수천 년을 지나 바로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야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도시 전체가 지워져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위기에서 그에 대한 여러 계급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를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로 이끈 허스턴(Zola Neale Hurston)은 파라오와 맞선, 지팡이를 든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허스턴이 말하고 싶은 것은 역병·기근·기아를 마음대로 부리는 파라오를 물리치는 모세의 힘, 그의 대항마법(counter-magic)입니다. 이 대항마법은, 흑인 민속지식에 대한 허스턴의 지식에 따르면, 모세가 파라오의 마구간지기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 마구간지기는 이 마법을 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모세에게 공짜로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멘투(Mentu)가 해주는 ‘도마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들에게 전염병들을 아래로부터 보기를 권하기 위해, 파라오나 벼락을 던져대는 야훼를 제시하는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 보기를 권하기 위해 ‘lizard talk’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lizard talk’는 허스턴의 소설에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①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크게는 세상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작게는 인간의 여러 행동들에 대한 논평). ② 멘투가 도마뱀이 해주듯이 해주는 이야기(이야기의 내용은 ①과 같다). ③ 멘투가 해준, 도마뱀(및 기타 동물들)도 이러저러한 말을 한다는 이야기. 나중에 (멘투는 이미 죽고 없는 때이다) 모세는 ‘기억들의 보관자’(keeper of memories)인 ‘수염난 도마뱀’을 찾아간다. (이때 모세는 예전의 멘투처럼 도마뱀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모세는 우연히 만난 늙은 도마뱀에게 ‘수염난 도마뱀’이 시나이 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나이 산을 찾아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가 ‘수염난 도마맴’에게 들을 ‘liard-talk’는 기독교의 정사에 나오는 야훼에게서 받은 십계명과 대조될 터이다. 전자는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지식을 나타내고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지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마구간지기의 이름인 ‘멘투’를 다시 언급하게 되니 반갑군요. 제 의도는 지상의 힘, 우리 인간의 힘, 우리의 공통적인 힘이 지배자들의 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도 잘 모르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말입니다. 이는 팬데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물론 팬데믹에 대한 지식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여러 모습의 멘투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경험에서도 오지요. 어떻든 저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을 겪는 다중과 지배계급을 대조시키는 것, 힘의 두 형태를 대조시키는 것. 그것이 역사적인 역병들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라오를 다룬 다음, 투키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역병들을 다루고, 로마 시대의 역병들을 다루며 물론 중세의 중앙 유럽을 강타한 큰 역병들을 다룹니다. 이런 식으로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라인보=도마뱀=멘투]

제가 <ACT UP>에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은 <ACT UP>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ACT UP>의 현장 활동가들은 발견·조사를 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으며, 그 자신들이 깊이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치료를 낳을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공보건의 커먼즈’(the commons of public health)의 주된 원리입니다.

릴리
우리가 사회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함께 모여야 하는데, 무심코 행한 사회적 상호작용조차도 바이러스를 퍼지게 할 수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팬데믹의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모순입니다.

라인보
네, 정말 큰 모순입니다. 에이즈위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 그리고 이전의 전염병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도시봉쇄(lock-down)는 아니지만―집에 있으면서 외출을 자제해야 하고 공동체적 관계들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간호,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기, 죽은 사람들을 묻기와 같은 일들은 아무리 끔찍한 인간의 위기상황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애를 베푸는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은 대중모임의 금지나 기타 형태의 공동체적 활동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애의 엄청난 재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상업활동은 종종 가장 최소로, 혹은 가장 나중에 정지되지요.

릴리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팬데믹의 시기에 특징적인 것은,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고대 역사를 되돌아보며 말했듯이 상이한 이념들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아래로부터의 지식과 같은 것도 있고 반대로 우리를 일종의 숙명론이나 현실수용적 태도로 몰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뜻하는 것은 가령 당신이 언급한, 옛날의 종교들이 팬데믹 시기에 한 복합적인 역할들 같은 것입니다.

라인보
네, 그러죠. 계급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억압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도 적용되고 전염병들에도 적용됩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위로부터 사고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뉴스에서 들은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지는 멘투를 다시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팸플릿은 종교의 사회학이 아니며 분명 포괄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ACT UP>의 활동에 고취되고 역병의 역사를 다룬 맥닐(William McNeill)의 책[Plagues and Peoples, 1976]에 촉발되어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뉴요커』(The New Yorker)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이 우리가 읽을 책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동안 책을 읽으라는 거지요. 학자인 저도 책을 읽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은 도시를 도망칠 여유가 있던 부유한 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 부유한 층에 대해서 쓴 작품입니다. 『데카메론』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든 각본작가들의 책꽂이의 사전 옆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100개의 플롯들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위해 다시 다듬기 위해서죠. 이 이야기들은 선페트스(bubonic plague)가 돌고 있던 1340년대에 동포 인간들을 놔두고 피렌체를 도망친 사람들이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단으로서 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오락으로 의도된 형태의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에요. 물론 이 이야기들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대단한 이야기들이죠.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유행병의 문학은 도피의 문학이라고 썼습니다. 문학창작가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보수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대응은 그것이 존재할 경우에는 언제나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이런 동학을 거론했습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이 생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상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인보
물론이죠, 저도 넷플릭스(Netflix) 앞에 딱 붙어 있습니다만, 이는 저에게 특별히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공공보건 전문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저는 가령 핫스팟이 되고 있는 여기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계속 알려줄 수 있는 공공보건 간호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알싸이드 박사(Dr. Abdullah Al Said)가 COVID-19와 연관된 더 심층적인 하부구조 차원의 광범한 유행병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 공급의 거부, 삶에서의 안전의 거부, 주택의 거부가 바로 이 하부구조 차원의 유행병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저장소(fresh water reserve)가 있는 미시건 주인데 디트로이트에서는 물공급이 끊겼고 플린트에서는 물에 납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디트로이트 시 당국은 2014년부터 수도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들에 수돗물의 공급을 끊었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왔다. 한 미시건 지역 뉴스잡지의 2020년 3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2019년에만 23,000 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차단되었다. 시당국은 COVID-19 국면에서도 처음에는 이 물공급차단(water shutoffs) 정책을 유지하려 했는데, 손을 씻는 것이 COVID-19의 확산을 막는데 필수적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확정된 견해로 인해서 정책을 바꾸어 3월 9일에 수돗물 서비스를 재개했다. 월 25달러를 내면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수도료 지불은 팬데믹 국면 이후로 연기된다. 디트로이트 시장은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공급중지가 재개된다고 말했다. 한편 2014년 플린트 시는 수원을 디트로이트의 물(휴런Huron호)에서 플린트강물로 바꾸었는데, 물에 부식방지제를 넣지 못하여 오래된 관의 납이 침출되어 공급되는 물로 섞여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중금속 신경독을 발생시켰고 10만 명 이상이 주민들이 납에 노출되었다. 이와 관련된 본 블로그의 글로 http://commonstrans.net/?p=859 참조.]

이는 그저 악행이거나 사고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물에 대한 요구를 짓밟은 의도적 범죄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 신선한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 지붕으로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COVID-19의 가속적인 확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알싸이드 박사는 (그는 디트로이트보건국의 국장을 지낸 바 있으며 존경받는 전염병학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저도 과거의 역병들을 훑어보면서 각 역병이 그 당시에 인간이 창출한 사회·경제적 구조들과 특수한 연관을 가진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도시의 거주지이든 상업자본주의든 심지어는 미국과 같은 거대한 부르주아 공화국이든 말이죠.

아시다시피 미국은 인종주의 및 강도질[무엇보다 백인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을 가리킨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곳입니다. 인종주의와 강도질은 흑인들이 당시 수도인 필라델피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1793년 황열병이 돌던 때에 생겨나서 매우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때 흑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아픈 사람들을 간호했으며 시체들을 매장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면역력을 얻거나 황열병에서 살아남아서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로 악마화되었습니다.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은 1950년대에 오면 매카시즘의 ‘빨갱이’로 대체된다.] 이때 아이티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한창이었죠.

릴리
막 언급하신 시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8세기 말에 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황열병의 발발이 그 때의 정치를 아래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어떻게 형성했나요?

라인보
먼저 위로부터 일어난 일을 보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도시에서 도망쳤고요, 해밀턴(Alexander Hamilton)도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이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수도를 떠났어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군사 공화국을 보존하여 오하이오강 계곡(the Ohio river valley)을 포위하고 애팔래치아산맥을 넘고 포타와토미족(Potawatomi)[미시시피강 상부와 오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쇼니족(Shawnee)[오하이오 계곡 지역에 살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및 기타 그곳에 사는 많은 부족들로부터 땅을 훔치는 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황열병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흑인들을 악마화했던 것입니다.

이때는 세계사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두 일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 하나는 황열병이 강타하기 몇 달 전인 1793년 2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특정 주에서 다른 주 또는 영토로 도망간 노예의 반환을 규정한 법]이 조지 워싱턴의 서명으로 통과된 일입니다. 이로써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미국 전체의 노예들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확대되었습니다. 둘째는, 1793년 봄에 일어난 일인데요, 조면기(the cotton gin)의 발명입니다.[발명가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했으며 1794년에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술이 면화체제의 남부로의 확대, 인도의 면화생산의 파괴, 이집트와 오토만 제국의 면화생산의 파괴를 가능하게 하고 영국에서의 공장체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제 아래로부터 일어난 일을 봅시다. 우리 모두 1793년 황열병 발발 시 멘투가 누군지 알 것입니다. 한때 노예였던 압살롬 존스(Absalom Jones)와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입니다. 앨런은 아프리카감리교감독교회(AME Church,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만들었고 이 교회는 그 이후 일종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형태로서 존속했습니다. [존스와 앨런은 감리교에서 설교를 하도록 승인받은 흑인 목사 가운데 속했다. 존스와 앨런은 Free African Society (FAS)를 창립했으나, 1794년 이후 일의 방향이 달라서 각기 다른 길을 갔다. 둘은 평생 친구로서, 협력자로서 남아있었다.] 이는 백인우월주의가 가진 인종주의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배격당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분명 황열병의 결과로 아래로부터 일어난 다른 움직임들도 있을 것입니다.

릴리
남·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에 가져온 전염병이 끼친 엄청난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이른바 신세계의 발견과 남·북아메리카를 재형성하는 데서 질병과 정복이 교차하는 모습에 대해서요?

라인보
1420년과 1600년 사이에 14개의 유행병이 멕시코를 유린했고 17개가 페루를 강타했습니다. 대부분 천연두였습니다. 정복된 지 10년 만에 멕시코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1620년쯤에는 200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천연두 및 다른 두 전염병이 저지른 집단학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배운 것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광산에 가두고 과도하게 노동을 시킨 것이 이러한 거대한 말살을 거들었다는 점, 그래서 천연두의 확산과 착취의 형태들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매더(Cotton Mather)는 뉴잉글랜드에서 1616-1617년에 돈 전염병이 “저 해로운 자들을” 숲에서 몰아냈다고 했습니다. 집단학살에 전염병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이런 일은 한 세기 후인 1760년대에 앰허스트(Amherst) 장군에 의해서도 벌어졌는데, 그는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인 곳의 원주민들을 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로 잔뜩 감염시킨 자선 담요들을 원주민들 사이에 배포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전염병은 전쟁의 도구, 지배계급의 도구, 집단학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이런 부분을 보면 끔찍하고 극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계급파괴에 다시 한 번 굴복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꼭 붙잡아 기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계급파괴’라고 할 때 이는, 온갖 형태의 지배계급이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자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이른바 유럽과 아메리카의 최초의 조우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릴리
그것은 또한, 당신이 말한, 황열병에 의한 죽음과 노예상태와 광산에서의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죽음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회가 일종의 환경결정론[전염병은 자연적 환경에 의한 것이지 인재가 아니라는 생각]의 관점에서 전염병들을 받아들이도록 형성되어온 것으로 고대부터의 역사를 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결정들)의 역할을, 사태의 사회적 맥락을 잊을 수 있고, 이른바 자연적 재해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서 사회·정치적 맥락이 결정적임을 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라인보
물론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거시기생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시기생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사회·경제적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릴리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상기시켜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유행병들이 지배층의 정치와 지배층의 대응들을 형성해온 역사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당신이 “우리 자신의 코뮤니즘의 상실된 역사”라고 부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라인보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 삶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생존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건커먼즈에의 접근, 공기·물·주택의 커먼즈(공통재)에의 접근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이는 지배계급이 준 선물이 아닙니다.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해 모두가 향유해온 커먼즈입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지배체제 아래에서, 최근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수 세기 동안, 더 최근에는 우리의 생애 동안 강탈된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물, 주택, 신선한 공기를 뺏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긴 공급사슬로부터 생기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급사슬에서는 동력사슬톱에 굴복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에 굴복하는 숲으로부터 새로운 식품이 요구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태지대들이 파괴되면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들의 일부가 파괴됩니다. 이와 함께 예전의 숙주를 잃은 미시기생체들이 생기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최근에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 글을 실은 네 명의 과학자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by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이들은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우리, 즉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병 방어능력이 수십 년 동안의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공립학교들, 공립병원들, 공공주택, 물에 대한 권리, 공기에 대한 권리가 갑자기, 혹은 단계적으로, 혹은 부채라는 교활한 형태로 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미시기생체들에 취약해진 것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난주만 해도 공기가 좀 신선해진 틈을 타서 트럼프가 자동차에 대한, 내연기관에 대한 오염통제와 관련된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공기가, 우리의 폐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을 틈타서 몰래 해치운 것이죠. 이는 정말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파괴를 심화시킬 뿐입니다. 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이 네 명의 저자들, 이 전염병학자들 썼듯이 삼림과 그 생태의 파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폐만큼이나 삼림이라는 지구의 폐도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아마존의 파괴와 볼쏘나로(Bolsonaro)[브라질의 현 대통령]의 무지한 권력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릴리
이 팬데믹이 전지구적 위기가 되면서 일시적으로든 어떻든 다른 전지구적 위기, 즉 기후위기를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지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나 재택근무 등의 조치들이 자동차의 사용을 크게 막고 탄소방출 수준을 낮추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당신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오신 것으로 압니다만.

라인보
현 국면은 아이러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정치가들이 많은 수의 홈리스들에 눈물을 흘리는 반면 많은 호텔들이 손님이 없어서 연방정부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기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고 폐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으며 탄소방출과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현 국면은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집으로부터 쫓아내는 일의 중지를 원하며 부채의 탕감을 원합니다. 우리는 단일건강보험자체제(single payer health system)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주자들을 억류 상태에서 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이미 일부 수감자들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학자금 대출금의 탕감을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전반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맥락에서의 일입니다. 바삐 서두르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하늘에 비행기가 없고 거리에 차가 없다고 썼습니다. 물론 이는 비상조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가 새로운 세계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의 세계, 더 차분한 세계, 바삐 서두르는 조급함이 없는 세계, 모든 시간이 사업의 시간이 되는 일이 없는 세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수감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합니다. 이런 가능성들을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능성들은 바로 우리의 창문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릴리
팬데믹을 겪으면서야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것이 좀 놀랍습니다. 세상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쉽다고 종종 (필시 너무 많이)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자본주의는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상상력의 위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의 와중에서 (이 측면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 일상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고 어떤 일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어떤 일이 사용가치들을 창출하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돌봄노동, 쓰레기처리, 식량을 재배하고 공급하기―이런 일들은 중요한 반면 다른 일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상위 10%로의 부의 대대적인 집중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력적인 가능성의 순간입니다. 몇 달 만에, 불안과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런 순간이 온 것이죠.

라인보
물론입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아시다시피, 메이데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달 말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저는 1886년 시카고에서 전염병이 했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는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의 때였지요. 참, 이제는 옛날 일이네요. 요즘 누가 8시간 이상 노동을 하나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갑자기 0시간 노동을 강제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0시간 노동을 하는 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앞에서 저는 독서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우리는 정말로 속도를 늦추고 더 생각하기 시작할 수, 더 잘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나 연방정부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돌보는 일을 하려고 하며 저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이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노동을 중단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을 보호하는 도구로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총기판매점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바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적인 공포 속에서 사는 자들의 삶의 한 편린일 뿐입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음을 보는 것이 이토록 쉬운 때에 공포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릴리
물론 지금과 같은 순간에 우리가 맞서 투쟁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전염병을 인종화하는 경향, 질병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트럼프가 이런 경향에 부채질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인보
18세기 말에 개발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체제인 백인우월주의의 중심 개념인 인종 개념의 큰 부분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상이한 기생체들, 질병들과 연결되면 이것이 더 나아가 인종 개념을 구성할 요소들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저의 저작이나 다른 이들의 저작이 보여준 바지만, 이런 과정들 가운데 ‘타자의 악마화’를 포함한 다수가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하여 일어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냄새와 연관되고 때(dirt)와 연관되고 불결함과 연관되었습니다. 이렇듯 지배계급의 차별적 순결 코드가 모든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바로 이로부터 인종과 백인우월주의라는 변종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제 이것이 그 추한 고개를 다시 쳐들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가 알기로···[‘없는 듯합니다라는 말을 하려다 생략한 것으로 추정됨]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매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멘투들과 민중에 의해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신선한 물을 요구하는 엄청난 투쟁을 보세요. 디트로이트는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올리언스도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도시들은 흑인 문명의 수도들이며, 이로부터 모두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간접적인 것 말고는 지배계급[백인들]의 반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흑인 친구들과 동지들은 매우 옳게도 다소 걱정하고 조심하며 지냅니다.

릴리
당신이 언급한, 그리고 책에서 많이 다룬 메이데이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몇 주 후면 메이데이가 오는데요, 우리가 억압받지 않는 세상,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전과 관련하여 메이데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라인보
메이데이는 위대한 재생산의 순간, 지구의 재생산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위의 생명체들에서, 식물들이나 동물들에서 봅니다. 메이데이는 5월이고 봄이요 삶의 부활입니다. 또한 근대 세계의 역사에서, 끝없는 노동과 고역에 맞서 투쟁해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놀이와 투쟁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메이데이는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군사주의나 전체주의의 행사로서 퍼진 것이 아니라 집단성의 행사로서 퍼졌습니다. 올해의 메이데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전이 될 듯합니다. 확신컨대, 이 도전으로부터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것입니다. 되풀이하건대, 메이데이는 지구상의 기쁨의 순간이요 재생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는 출산이 고통을 동반하듯이 투쟁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거시기생체들에 맞서는 것입니다.((메이데이에 대한 라인보의 상세한 설명을 보려면 도서출판 갈무리의 신간 『메이데이』(2020)를 참조하기 바란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관계


  • 저자  :  Antonio Negri, Carlo Vercellone
  • 원문 : “The Capital-Labour Relation in Cognitive Capitalism”(2007)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Carlo_Vercellone/publication/23530684_Il_rapporto_capitalelavoro_nel_capitalismo_cognitivo/links/55f2d64808ae1d9803921c27/Il-rapporto-capitale-lavoro-nel-capitalismo-cognitivo.pdf?origin=publication_detail )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운데 자본-노동 관계는 발본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 이 변형은 생산양식, 계급구성, 소득의 임금, 지대, 이윤으로 분배의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①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르는 과정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상기해보고 ② 현재의 노동을 자본-노동 관계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형론적 요소들을 분석한 다음 ③ 지대(자산소득)의 점증하는 중심적 역할이 왜 전통적인 적대, 즉 이윤과 임금 사이의 대립에 토대를 둔 적대의 조건들을 낡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대중노동자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형은 그람시가 1930년대에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서술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그러나 그에 비견할 중요성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전환점의 기원과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시기에 포디즘적 성장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 논리의 성취였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산업자본주의의 다음의 네 가지 주된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① 지식 형태들의 사회적 분극화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② 고정자본 및 관리조직화에 함입된 노하우들의 헤게모니 ③ 테일러주의 표준에 종속된 물질 노동의 중심성 ④ 소유와 기술 발전의 주된 형태로서의 고정자본의 전략적 역할

포디즘의 위기와 함께 이 경향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출발점은 대중노동자[포디즘 시대의 노동자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셈블리라인 앞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된다.―정리자]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토대를 부수고 복지국가의 보장과 서비스들의 엄청난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이는 포디즘과 양립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 결과 임금관계에 대한 화폐적 제한이 약화되고 생산의 지적 활력의 집단적 전유라는 강력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대적 동학을 통해 대중노동자는 포디즘 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노동의 존재론적 변형의 요소들을, 즉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을 자본의 심장부에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일반지성의 집단적 노동자라는 형상을 구축하고 지식의 추동적 역할에 기반을 둔 경제의 구조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구축했다. 그 결과로 노동의 인지적 차원과 확산된 지적 능력의 구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노동 관계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열렸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생과 성격을 적절히 특징지으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①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출현의 핵심 추동자는 산 노동의 힘에 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형성은 인지자본주의의 발생에 선행하고 그것과 (논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대립된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이 지식의 생산의 집단적 조건들을 기생적인 방식으로 흡수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재구조화를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일반지성의 사회에 각인된 해방의 잠재력을 질식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지적·비물질적 노동의 생산적 가치가 우세해지고 자본의 가치화의 중심축이 지대(자산소득)’를 수단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강탈하는 데 있으며 지식이 상품으로 변형되는 축적 체제이다.

② 정보혁명의 이론가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의 노동의 변형을 규정하는 요소는 정보통신테크놀로지(ICT)의 주도적 역할에 기반을 둔 기술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이론가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잊고 있다. ㉠ ICT는 살아있는 앎(un sapere vivo)이 없으면 정확하게 기능할 수 없다. 정보취급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conoscenza)’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는 노동이 없는 자본과 같다. ㉡ 따라서 ICT 혁명의 주된 창조력은 자본이 추동하는 동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의 수립에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생산의 연계 형태들로서 기업에 대한 대안과 동시에 시장에 대한 대안을 나타낸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특징들

 

1)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그리고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전도

인간에게 구현되는 무형의 요소가 자본의 성장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 확산된 지적 능력

이는 다시 네 개의 주된 함축을 가진다.

㉠ OECD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개발 실험실들이 지식 기반 경제의 추동부문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집단적 생산에 상응하며, 이 생산은 전통적으로 북지국가의 공통의 제도들(건강, 교육, 공적 및 대학연구 등)에 의해서 발현된다. OECD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때 우리는 이 제도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은폐는 삶정치적 통제와 복지제도들의 상업적 식민화가 인지자본에서 하는 역할과 연관이 있다. 건강, 교육, 훈련 및 문화는 생산의 점증하는 부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 여기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와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전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 예전에 불변자본이 수행했던 본질적 기능들의 일부를 이제 노동이 수행한다(생산의 조직화 수준에서 그리고 경쟁력과 지식향상에서 주된 요인으로서).

㉢ 노동력의 형성과 재생산의 조건들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나라의 부’의 원천은 점점 더 기업의 벽들보다 더 상류에 있는 협동에 놓여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지식 생산을 엘리트 노동이나 전문가 부문의 특권으로 보는 지식이론이 모든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가 이 부문에 상응한다. 그래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시간들(tempi sociali)의 체계 전체로 확대된다.

㉣ 복지국가가 제공한 이른바 고급 서비스들은 노동의 인지·소통·정동의 차원이 우세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발전할 수 있는 활동들에 상응한다. 이러한 자주관리 형태들은 사용자들을 긴밀하게 관여시키는 식으로 서비스들을 공동생산하는 데 기반을 둔다.

 

2) 인지적 분업, 노동계급 그리고 임금관계의 표준적 조건들의 탈안정화

둘째 특징은 테일러주의적 분업에서 인지적 분업으로의 이행이다. 이제는 생산의 효율이 각 과제에 필요한 작업시간의 축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형태에 의존하고 학습, 혁신, 연속적 변화의 동학에의 적응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다가성에 의존한다.

지식생산 및 데이터처리와 연관된 활동들의 확산은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을 포함한 모든 경제부문들에서 일어난다. 노동에서의 자율성의 일반화된 진전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전일적이지는 않다. 어떤 부문에서 몇몇 국면들은 인지원칙들에 따라 조직될 수 있고 다른 국면들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적 혹은 신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화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양적 수준에서 (적어도 OECD 국가들에서는) 자본의 가치창출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지노동이다. 따라서 인지노동은 필요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메커니즘들과 단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3)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인지적 차원의 성장이 자본-노동 교환을 지배하는 표준적 원칙들의 이중적 탈안정화를 어떻게 가져오는지를 강조해야 한다.

㉠ 한편으로 노동생산물이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전문지식 내에서의 활동에서는 이전의 임금계약 조건들이 문제시된다. 이전의 조건이란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주장을 임금을 받음과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연구나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같은 활동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된 물질적 생산물로 결정(結晶)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머릿속에 함입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의 인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회사가 왜 지적 재산권을 변경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문지식의 형태들을 전유하고 그것들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한편, 포디즘적 임금계약 규범을 구조지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과 동시성이 오늘날에는 크게 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에너지 패러다임에서는 임금이 인간의 시간의 잘 정의된 일부를 회사가 획득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대해 지불한 가격이었다. 회사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로부터 최대한 가능한 양의 잉여노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들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전문지식의 강탈과 일의 시간과 기능의 경직된 규정을 통해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원칙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되는 에너지의 단순한 소비로 축소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노동통제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식과 임금노동자의 생애를 가동하고 능동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기업의 목표들을 내화할 할 필요, 결과를 낼 의무, 고객들로부터의 압력은 순전히 불안정성과 연관된 억압과 함께 자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발견한 주된 수단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여러 형태들 또한 자본이 총체적인 종속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무상으로 이익을 얻어낼 도구이다. 불안정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지 않으며 고용계약에 통합되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며 양화되기 어려운 노동의 성장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포디즘 시기의 생산적 노동시간 개념과 임금 개념을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지식 자본주의에서 불안정성과 노동의 관계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단편화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와 같다는 발견을 설명해준다.

바로 같은 논리가 노동력의 탈숙련 과정이 왜 이제는 대대적인 지위 격하―이는 특히 여성들과 젊은 대학졸업자들에게 해당된다―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지위 격하란 보수와 고용의 조건들이 노동활동의 배치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숙련에 비해서 탈가치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3원 공식의 위기 : 지대(자산소득) 경제와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생산양식에서의 변형은 잉여가치 포획 및 소득분배 형태에서의 파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두 가지를 연구해야 한다.

1)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임금메커니즘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임금 메커니즘은 소득에의 접근이 낡은 포디즘적 체제 즉 고용의 유무에 달려있어서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실질임금의 정체와 생활조건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여, 시민권과 연결된) 객관적 권리들에 기반을 둔 사회적 혜택의 총량과 그 수혜자의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체계에서 워크페어국가(Workfare State) 체계로의 이동이다. 후자에서는 화폐로 환산하면 매우 낮고 강한 조건들에 종속된 복지혜택에 대한 강조가 수혜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2) 지대(rent)[전통적인 번역어를 따라서 일단 ‘지대’로 옮기지만, 노동이 아니라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 일반을 가리킨다―정리자]의 강력한 귀환.

지대는 잉여가치를 포획하고 공통적인 것을 탈사회화하는 주된 도구이다. 지대의 이러한 귀환의 의미와 핵심 역할은 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생산의 사회적 조직의 수준에서 작용한다. 지대와 이윤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의 적합성이 점점 더 감소한다. 구분의 이러한 흐려짐은 금융의 힘이 기업들의 거버넌스의 기준을 주주들을 위한 가치창출에 따라서만 재형성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마치 노동에서의 협력의 자동화가 화폐라는 추상적이고 유연하며 이동적인 형태의 자본의 자동화의 평행 운동에 의해 대응되는 듯하다. 이는 자본의 소유와 관리의 점증적 분리를 낳은 역사적 과정과 비교할 때 새로운 질적 도약이다. 인지자본주의 시기에는 베버적 기업가(기업의 소유와 관리 기능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다)라는 목가적 유형이 확연히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갤브레이스(Galbraith)의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혁신의 프로그래밍과 노동의 조직화에서 맡은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가져온다―의 불가역적 위기에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금융 및 투기 기능을 발휘하는 데 그 주된 전문성이 있는 관리에 자리를 내준다. 그 동안에 생산 조직화의 실제적 기능들은 점증적으로 피고용인들에게 할당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개별 회사들의 수준(여기서 우리는 절대지대에 관해 말할 수 있다)에서나 기업과 사회의 관계의 수준에서나 공히 관찰될 수 있다. 사실 회사들의 경쟁력은 내적[회사 내적] 경제들이 아니라 외적 경제들에 점점 더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영토의 인지 자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산잉여들을 포획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적 규모에서는 이것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사회의 일반적 전진’에서 나오는) 이 ‘무상의 선물’을 이윤의 정상적 원천으로부터 구분하고자 ‘지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지식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 양 무상의 혜택을 얻어낸다. 잉여가치의 이 부문이 바로 비옥한 땅의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차별지대에 비견된다.

㉡ 다른 한편, 현재의 지대의 발전은 종획의 역사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생의 바탕에 놓인 순수한 형태들과 기능들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지대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의 산물이다. 이 사유화가 자원의 인공적 희소성의 창출을 통해 생성되는 이윤을 수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재산의 투기로부터 오는 지대와 1980년대 이래 화폐와 공공부채의 사유화 덕분에 금융위기에서 그리고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해체시키는 데서 주된 역할을 한 금융지대를 한데 모으는 공통적 요소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재생산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산권을 강화하고 지식과 생명체들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주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법칙의 위기와 일반지성 시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의 또 하나의 발현을 본다.

임금, 지대, 이윤 사이의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계급구성 및 노동시장을 극히 이중적으로 분할하는 정책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첫째 분할부문은 종종은 노동력 가운데 (기업금융서비스, 특허를 노리는 연구활동,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전문적인 법활동 같은) 인지자본주의의 기생적인 활동에 고용되는 더 수입이 좋은 특권화된 소수이다. 이 이른바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자본 지대의 마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그 자격과 능력이 명시적으로 인정된다. 더 나아가 이들의 보수에는 금융자본의 배당금과 연금기금과 민영보험들의 체계와 연관된 보호 형태들로부터 오는 이익의 점증하는 몫이 포함된다.

둘째 부문은 그 자격과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지 노동 범주는 지위 격하라는 무거운 과정을 겪는다. 이 부문은 새로운 인지노동의 분야에서 가장 불안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 개인 서비스들의 발전과 연관된 새롭게 표준화된 서비스들의 신테일러주의적 기능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동시장과 소득분배의 이중화는 집단적 복지 서비스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현대 가정의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상업적 서비스들을 확대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대(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인지 지대, 임금 지대 등)는 소득의 분배와 인구의 사회적 계층분화에서 점점 더 전략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결과는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모래시계형’ 사회의 창출이다. 물론 가치의 창출이 이제는 임금노동자들의 창조성, 다재다능함, 발명의 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본이 노동에게 생산조직화에서의 점증하는 자율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실제로 이미 자율을 양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방법들을 선택하는 수준에 국한시키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결정하는 힘을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떼어내느냐 하는 것,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제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합의 동학 및 노동의 자기조직화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정복은 생산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소비의 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대안적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결정적 요소인 듯이 보인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생산(produzione dell’uomo per e attraverso l’uomo)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모델이다. 일반지성의 생산에서 주요 고정자본이 인간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 개념으로 가치법칙과 3원 공식(threefold formula, 임금-지대-이윤)의 위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보장소득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이며 1차적인 것으로 이해된 소득이다. 즉 이는 재분배로서가 아니라 가치 및 부의 생산의 점증하는 집단적 성격의 긍정으로서 이해된 소득이다. 이것이 자본으로부터 지대가 포획하는 가치의 일부를 빼냄으로써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임금관계가 부과하는 화폐적 제한의 약화는 상업주의와 종속된 노동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노동형태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지구적 봉기



저자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 이미 추운 바깥은 더욱더 추워지고 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TV를 켜놓고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소파 위에 아늑하게 앉아있다. 또 두드린다. 앞문을 두드린 다음 옆문을 두드리고 다시 뒷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창문도 두드리고 지붕도 두드리며 벽도 두드린다. 이것들이 이토록 얇다는 것을 누가 알았던가. ···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문을 두들길 수 있는가?

집은 바로 신자유주의체제(혹은 이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바로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항의운동들이다. 지난 9월부터 지구의 거의 전역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알제리,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이집트, 프랑스, 독일, 기니, 아이티, 온두라스,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레바논, 네덜란드, 스페인, 수단, 영국, 그리고 짐바브웨 등. 이 투쟁들은 서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명분이나 구성의 면에서 서로 이질적이어서 그런지 저자는 이것들을 통합된 현상으로서 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개인 돈지갑 문제“pocketbook issues”를 원인으로 본 『뉴욕타임스』의 해석은 제외해 버린다.)

표면상으로는 이 운동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란에서는 50% 유가 인상이 원인이었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이 환경규제에 항의하여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홍콩에서는 범죄자를 중국 대륙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 불을 붙였다. 칠레에서는 교통비 인상이 불을 붙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억압적 범죄 법안이, 레바논에서는 모든 품목에 부과하는 새 조세 공지가 촉발제였다.

항의운동의 조직화는 일부는 조합과 정당에 의한 것이지만 다수는 지도자가 없는 수평적 종류의 것이다. 전체를 포괄하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없으며 전위당이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를 가르고 있던 ‘좌우’라는 축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곳의 민주적 열망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우익들과 미국 정부도 홍콩, 이란, 볼리비아의 시위들이 보인 민주적 열망에는 응원을 보냈다. (볼리비아의 경우는 어쨌든 모랄레스를 전복시킨 쿠데타 이전에는 그랬다.) 좌파 가운데 더 교조적인 사람들은 홍콩과 이란 항의운동 뒤에 제국주의적 개입이 있다고 보면서도 지구상의 모든 다른 민중운동의 유산을 긍정했다.

바리케이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를 보면 공통성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칠레에서는 지하철요금 3% 인상―이로 인해 교통요금이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월급의 21%가 되었다―에 대한 분노로 인해 민중이 개인돈지갑 문제에 발끈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긴축으로 진이 빠져있고 저임금, 긴 노동시간, 부채에 의해 쥐어짜이고 부유층의 탐욕과 맹목성에 신물이 나 있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릴 태세가 되어있다. 

이집트에서는 9월에 수천 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재무부장관이 “이집트 경제개혁의 과실이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라고 탄식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부과한 조치로 인해 실제로 인플레가 3년에 걸쳐 60% 상승했으며 수백만 명을 가난에 빠뜨렸다. 

엘리트 집단의 인식과 대중의 경험 사이의 분리는 근본적인 만큼이나 광범위하다. 최근에 민중봉기가 일고 있는 나라들 모두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모두 단 하나의 경제모델에 의해서 수십 년 동안 지배되어왔다. 이 모델에서 성장은 다수에게는 궁핍화를 의미했고 자본은 하수(下水)가 아래로 흘러가는 것만큼 확실하게 미국과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칠레가 악명 높은 최초의 실험실이었다. 피노체트 암살단이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팀을 이루어 운좋은 자, 신중하지 못한 자, 눈이 먼 자들이나 좋다고 할 ‘경제적 기적’을 창출하는 일을 했다. 볼리비아에서 민중이 11월 10일의 쿠데타를 좌절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이와 유사한 신의 행동(즉 기적의 창출)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압도적 불균형을 보존하는,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는 미시적으로는 도시 수준에서 작동하고(가령 공공교통체계의 쇠퇴), 거시적으로는 전지구적 규모로 작동한다(각국 엘리트 집단이 다국적기업 및 국제금융기관들과의 공모하여 노동력을 저렴하게 유지하고 부를 기성의 세력에게 한정시키는 것).

2000년대 초에는 중국 자본과 석유·광물·농산물 같은 상품의 높은 가격으로 인해서 가난한 나라들에게도 선택지들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연결된 ‘개혁’의 덫들―공공 부문의 삭감으로 이루어지는 긴축 정책, 국가 소유 자원의 사유화, 노동보호를 위한 제도들을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철폐하기―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부들이 승리했고 가난과 불평등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상품 붐은 꺼졌고 중국 경제는 멈추었으며 국제통화기금이 똑같은 해결책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각국의 엘리트 집단은 화폐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국의 국민을 난도질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지내왔다. 3월에 에콰도르의 대통령 모레노(Lenín Moreno)는 42억 달러의 대부를 받기로 국제통화기금과 계약했으며 10월에는 그 요건으로서 공공부문 임금과 연료보조금을 삭감했고 그 결과 경유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 이것에 촉발되어 주로 에콰도르 토착민들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모레노는 곧 자본을 도피시키고 긴축재정안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레바논에서는 수상 알하리리(Saad al-Hariri)가 110억의 대부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외국 대부자들이 요구하는 적자감축 종합대책의 일부로서 (연료, 담배, 인터넷 메시징 서비스를 통해 전화하기에 매기는) 새로운 소비세들을 공지했다. 레바논 인구의 무려 4분의 1이 참가한 12일 동안의 항의 투쟁 이후에 하리리는 사임했다. 그러나 투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이와 동일한 모델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란은 40년 동안 미국의 제재에 의해 타격을 입어서 긴축 조치를 시행하는 데로 돌아섰다. 그들은 그들이 약속했던 경제적 만병통치약을 제공하는데 실패했으나, 적어도 엘리트 집단을 보호하고 소모품으로 간주되는 계층에 고통을 전가할 수는 있었다. 저항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의자들의 요구는 원래 촉발제가 되었던 것을 훨씬 넘어서 거의 모든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홍콩에서 시위자들은 범죄자 송환법의 철회로는 ‘충분’ 근처에도 못 온다고 보았으며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 또한 원했다. (시의회 의석의 반수는 은행가들, 제조업자들, 개발업자들로 이루어진 ‘직능 선거구의 유권자들’functional constituencies에 의해 직접 선출된다. 불평등과 주택비용은 세계 어느 곳보다 높다.) 칠레에서 항의자들의 요구는 교통요금 인상을 철회하는 데서 피노체트 시기의 헌법을 폐지하는 데로 확대되었다. (두 요구 다 이룰 듯하다. 피녜라는 요금인상을 철회했으며 새로운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에 동의했다.)

레바논에서 항의자들은 그들의 운동을 혁명으로 간주할지 말지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다. (베이루트, 홍콩, 칠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사유화된 곳에 속한다.) 수단에서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 정부가 “국제 대부(貸付) 기관들의 제안으로”(『뉴욕타임스』) 밀 및 연료 보조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봉기가 30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권을 뒤엎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직도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티에서도 항의운동은 1년도 더 전에 모이즈(Jovenel Moïse)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연료 가격을 인상했을 때 시작되었는데, 항의자들은 곧 미국이 후원하는 모이즈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줄곧 이 요구를 해오고 있다.

아이티에서만이 아니라 에콰도르에서 짐바브웨에 이르는 적어도 12개 나라에서 항의운동은 휘발유 가격의 인상에 의해 점화되었다. 기후변화 때문에 우리가 화석연료 사용을 즉시 중지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지만, 이 나라들에서의 연료 가격 인상이 이산화탄소 방출의 삭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종종 대부를 에너지보조금 삭감과 연동시키며, 연료세는 공공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채택하는 역행적이지만 쉬운 방법이다. 이 두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서 가진 자들을 구제하는 전술들이다.

한편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항의운동이 기후정책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하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거나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경우처럼 취하는 정책들이 고통이 고르게 분담되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우 농민들은 살충제와 질소 방출에 대한 제한 조치에 수천 대의 트랙터로 고속도로를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경우 환경에 대한 고려로 제정된 연료세가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과 결합되어 1년 이상의 거리투쟁이 일게 되었다.

어느 쪽을 보든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첫째, 기후위기를 다루려는 시도일지라도 주민들의 압도적 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면 실패하게 되어있다. 둘째, 이 기본적 욕구에는 음식, 건강관리, 주택만이 아니라 존엄과 유대도 포함된다. 현 체제는 존엄과 유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체제이다.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는 많은 봉기들은 TV 뉴스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달 초에 소설가 에데(Dominique Eddé)는 레바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들에 대해, “마치 수십만의 외로운 사람들이 끝이 없는 듯한 겨울잠을 자고 난 후 깨어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발견한 것”과 같다고 썼다. 보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이같이 민중이 깨어 주위를 둘러보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와 냉전 2.0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중국이 6월 29-30일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관세전쟁과 중국의 수출 및 기술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완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시진핑 주석을 협박했다.

중국 지도자들과 미국 지도자들 사이의 만남이 실제로 일어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 협상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만남은 정상적인 경우 미리 계획된다. 전문화된 공무원들이 함께 작업을 해서 국가의 정상들에 의해 발표될 합의안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준비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다.

그는 협박으로 협상을 개시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으며 혹시 그에게 공짜로 생기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적어도 그는 모른다). 미국이 바라는 것을 충실하게 따르기로 동의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미국은 그 나라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협박 내용이다. 그런데 현재의 경우에는 바라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이어서 미디어도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곤란해 한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항복하라는, 그 어떤 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에서는 무역전쟁인 듯이 보이는 것이 본격적인 냉전 2.0이다.

미국이 바라는 것: 다른 나라들의 신자유주의적 굴종

걸려있는 것은, 중국이 과연 러시아가 1990년대에 했던 것―즉 옐친 같은 신자유주의적 계획자 역할을 할 꼭두각시를 세워서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정부로부터 미국의 금융 부문과 그 계획자들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을 하는 데 동의할 것인가 아닌가이다. 그래서 실제로 싸움은 중국과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이 어떤 종류의 계획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다. 더 제고된 번영을 가져올 정부들에 의한 계획인가 아니면 수익을 추출하고 긴축을 부과할 금융 부문에 의한 계획인가?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수출농산물, 미국의 석유(혹은 미국 대기업들과 그 연합세력이 통제하는 나라들의 석유), 정보, 군사기술에 의존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런 무역의존성으로 인해 미국 전략가들은 미국의 요구에 저항하는 나라들에게 제재를 부과하여 기본적인 식량, 에너지, 통신 그리고 교체용 부품들을 그 나라의 경제로부터 박탈할 수 있게 된다.

그 목적은 전지구적 자원에 대한 금융적 통제력을 획득하고, 무역 ‘파트너들’로 하여금 미국이 지적 재산에 대한 독점가격책정‘권’을 향유하는 생산품들에 대해 이자, 사용료 및 높은 가격을 지불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무역전쟁이 노리는 것은 미국이 통제하는 식량, 석유, 은행업 및 금융, 혹은 첨단기술 재화에 다른 나라들이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굴복할 때까지 긴축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트럼프에게 승리를 기꺼이 양보할 중국

협박 자체에는 비용이 별로 들지 않지만, 만일 트럼프가 이 협박을 밀어붙여서 중국에 부과할 관세로 인해 생활비용과 사업비용이 증가한다면 그는 선거 시에 농업경영자들, 월가, 증권시장, 월마트 그리고 IT 부문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의 외교적 협박은 실제로는 만일 중국이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미국의 수입업자들과 투자자들에게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미국 자신의 경제의 목을 베게 되는 그러한 협박이다.

중국의 응답이 어떨지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은 물러서서 미국이 자멸하도록 놔둘 것이다. 중국의 협상자들은 중국이 어떻든 계획했던 것을 매우 기꺼이 ‘제공할’ 것이며 트럼프가 그것이 자신이 얻은 ‘양보’라고 떠들어대도록 놔둘 것이다.

내 생각에는 시진핑이 제공할 큰 사탕이 중국에게 있다.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할 수 있다. 우리는 오바마가 가진 것을 그도 원한다는 것을 안다. 그가 더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어떻든 그는 유라시아를 결속시키는 것을 돕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를 이웃 나라들과 연합하도록 밀어붙이고 있으며 유럽에 손을 뻗고 있다.

트럼프는 이 말에 들어있는 아이러니를 깨닫기에는 너무 자기도취적일지도 모른다. 아시아와 유럽이 무역·금융·식량·IT에서 미국의 제재 위협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촉매가 되면 미국은 앞으로 출현할 다자주의 세계에서 고립되게 될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옐친에게 (그리고 러시아의 또 하나의 옐친에게) 바라는 것

좋은 외교관은 ‘No’가 대답일 수밖에 없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중국이 그 혼합 경제를 해체하고 자국의 경제를 미국이나 기타 전지구적 투자자들에게 내놓을 가능성은 결코 없다. 미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교육·도로·통신 및 기타 기본적인 기반시설에의 집중적 공공 부문 지원을 함으로써 세계 산업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데 성공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유화되고 금융화되었으며 ‘새처화’된 경제는 고비용 비효율 경제이다.

그런데 미국의 관리들은 중국의 어떤 신자유주의적 관리나 ‘자유시장’당을 밀어줘서 옐친과 그의 미국 조언자들이 러시아에 끼친 것과 같은 피해를 중국에 끼칠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다. 미국이 생각하는 ‘서로 이득을 보는’ 합의란, 중국이 독립적인 경쟁자가 아니라 미국의 금융 및 무역 위성국가가 되는 데 동의하는 한 성장을 허용받는 그런 합의이다.

트럼프는, 한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많은 곳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된 바로 그 경제전략을 다른 나라들이 쫓는다는 이유로 떼를 쓰고 있다. 미국의 협상자들은 미국이 산업 경쟁에서의 우위를 잃고 고비용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가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미국의 GDP는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자산소득, 이윤 및 자본이득으로 주로 구성되는 ‘텅 빈’ 것이다. 미국의 기반시설은 쇠퇴하고 있고 노동은 시간제 ‘긱’ 경제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역 협박이 발하는 효과는 경제적으로 자립적이 되려는 다른 나라들의 노력을 가속시키는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2016년 미국 대선


  • 저자  :  Michael Hudson, Ross Ashcroft
  • 원문 : (대담)  Prof. Michael Hudson on Hillary Clinton and the US Elections (2016. 10. 2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16년 미국 대선을 주제로 한, 미국 경제학자 허드슨(Michael Hudson)과 레니게이든(Renegades Inc.)의 애쉬크로프트(Ross Ashcroft)의 대담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대담은 선거 약 열흘 전에 있었다.

애쉬크로프트

두 명의 대선 후보 가운데 하나[힐러리 클린턴]는 월가, 특히 골드만삭스와 매우 친하고 다른 하나[트럼프]는 주요한 불로소득사냥꾼(rent-seeker)입니다. 둘 다 근본적으로 월가와 결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것을 알죠?

허드슨

제 생각에 힐러리는 반대율이 79% 반대이고 트럼프는 81%입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두 사람이 대선에서 붙은 것이죠. 미국인들은 ‘yes’, ‘yes, please’, ‘yes, thank you’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트럼프는 월가에 세금을 삭감해주겠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이 몇 번 파산을 해봐서 은행을 다루는 법은 알므로 자기를 뽑아달라고 했다면 그것이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동의하면서] 선거전략가가 되셨어야 했네요.

허드슨

다만 트럼프를 위해서 일했다면 나에게 친구들이 별로 없을 것이고, 그가 오늘 나에게 동의해도 내일 어떨지는 알 수 없겠죠. 그것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그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정당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애쉬크로프트

그래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가 더 낫다고 보시는 거죠? 그가 그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요. 그가 똑똑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형이 아니라서요. 대통령직이 워낙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요.

허드슨

힐러리도 트럼프도 선거의 관건은 ‘차악’(the lesser evil)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악일까요? 힐러리의 뒤에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소련에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네오콘들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누굴 임명해야 할지, 그와 함께 일할 사람들을 충분히 모을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미국의 방향이 군사적 적대에 기반을 두고 일극적 세계를 고수하는 것이라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덜한 후보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가 그런 ‘덜 악한’ 후보입니다. 그는 나르시시스트이고 정말이지 백지상태 같은 후보입니다. 차라리 뭐를 할지 모르는 후보를 뽑는 게 낫지요. 힐러리가 무엇을 할지는 우리가 이미 알잖아요. 그녀는 남편이 한 일을 이어서 할 것인데, 이 부부는 민주당을 타락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그녀에게 맞선 지점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버니는 매우 잘 했죠?

허드슨

매우 잘 했죠. 그런데 그는 민주당이 월가와 루빈 패거리―이들은 정말로 마피아 같습니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는 한에서는 노동조합이나 소비자들 혹은 99%에 의한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은행가 가운데 한 명도 감옥에 가는 일 없이 수십억 달러의 돈을 과징금으로 냈는데, 그것이 바로 범죄자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범죄자들이 사법체계를 장악하고 경찰력을 장악하여 판사들에게 뇌물을 먹이면 (1930년대에 헐리우드 영화들을 다 그랬죠), 그러면 범죄자들이 통제하는 것이 되고 금융 부문이 범죄화되는 것입니다. 나의 동료 빌 블랙(Bill Black, 캔자스시티 대학)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대 은행들(시티뱅크,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의 사업계획은 사기(fraud)라는 것을요. 사람들은 사기가 은행업의 관건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로 증거가 명백한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죠.

애쉬크로프트

힐러리는 어떤 종류의 대통령이 될까요?

허드슨

독재자요. 네오콘들을 국무부장관에, 국방부에 임명하면서 적을 응징하는 원한에 찬 독재자가 될 겁니다. 월가 사람들을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 기용할 것이고, 아주 명시적인 계급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버핏(Warren Buffet)이 “계급 전쟁이 존재하며, 우리는 승리하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아요.

애쉬크로프트

1%가 이기고 있다는 것이죠?

허드슨

그렇습니다. 그녀는 ‘국민 여러분, 여기는 볼 것이 없으니 계속 갑시다’라는 수사를 사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경제는 계속 망가지고 그녀는 늘 그랬듯이 더욱 많은 이득을 올리고 더욱더 부유해지겠죠. 만일 그녀가 대통령이 된다면 클린턴재단의 범죄적 이해관계충돌(대가성 기부)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클린턴 부부에게 돈을 대준 기업들이 정책에 관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를 살 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정책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지금 선거와 정치는 사유화되고 시장경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대 연방선거위원회(FEC) 건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또 하나의 불로소득사냥 사례이군요?

허드슨

네, 정치 헌금, 그것이 가장 큰 불로소득사냥이지요. 기본적으로 1센트를 내면 1달러 가치를 가진 특권을 얻습니다. ‘rent’[불로소득>금리>지대]는 기본적으로 특권에 대한 지불입니다. 민간부문에서 창출된 특권에 대한 지불입니다. 발자끄(Balzac)가 말했듯이, 모든 거대한 재산은 거대한 절도에서 기원합니다.[발자끄의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1835)에 나오는 말로서, 정확하게는 “명백한 원인이 없는 모든 거대한 재산의 비밀은 잊혀진 범죄이다”(Le secret des grandes fortunes sans cause apparente est un crime oublié)이다.―정리자] 시장의 일부가 되었기에 더 이상 거대한 절도로 간주되지 않는, 그저 세상 돌아가는 방식인 양 받아들여지는 재산이죠. 그래서 절도가 일어나면 클린턴 부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GDP는 성장하고 있어. 당신들 99%가 더 가난해지는 정도를 우리가 더 부자가 되어서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지.”

애쉬크로프트

세계정치와 관련해서 힐러리가 사용한 몇몇 수사(修辭)에 대해서 말해보죠. 그리고 오랫동안 숙적이었던 미소관계에 대해 말해보죠. 오랫동안 곰을 자극했다는 명백한 사실, 그러한 적대관계,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5년 동안 어떻게 될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허드슨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러시아는 실제로 신자유주의적이 되었으며 뿌띤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경제 체제의 충돌은 없습니다. 소련에 대해서 미국이 못 마땅해 하는 것은, 미국이 소련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살 수 없는 점, 소련의 자연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살 수 없는 점, 소련의 공익서비스(전기·가스·수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서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economic rent’는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가격에서 가치를 뺀 것(Price minus Value, P – V), 즉 시장가격에서 투입된 경비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땅과 관련된 ‘ground rent’는 ‘rent’의 한 형태일 뿐이므로 ‘rent’를 ‘지대’라고 옮기는 것은 맥락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불로소득’이라고 옮기기도 하고 또 맥락에 따라서는 ‘임대료’라고 옮기기도 하는데,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좋은 번역어가 필요하다.―정리자]를 부과할 수 없는 점, 그리하여 1994년에서 위기가 발생한 1998년까지처럼 계속적으로 러시아를 세계에서 가장 큰 증권시장 붐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양국의 갈등은 경제적 체제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저 미국이 다른 나라를 통제하고 싶은 것, 다른 나라를 달러의 영향권 내에 두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 전 세계가 달러로 저축을 한다면, 이는 미국 재무부 채권을 구입함을 의미하고, 이는 다시 소련이나 중국 등이 경상수지 흑자를 미국 재무부에 빌려줌을 의미합니다. 미국은 이 돈을 사용하여 이 나라들을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달러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하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에게든 이라크나 리비아나 아프가니스탄에게 했던, 그리고 지금은 시리아에게 하는 행동을 하겠다고 위협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미국은 ‘우린 너희를 박살낼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군대가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폭탄을 떨어뜨리고 금융을 사용하여 위협합니다. 핵심은 자연자원, 즉 물, 부동산, 공익서비스에 대한 통제권이지 경제 체제가 아닙니다.

애쉬크로프트

그럼 최종단계는 어떻게 될까요?

허드슨

하나는 세계가 붕괴할 때까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오바마는 비록 월가의 도구이지만 적어도 근동에서 싸우는 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힐러리는 근동에서의 싸우는 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못 하면 세상을 석기시대로 되돌릴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해야 하고, 세계에 대한 통제를 위해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끔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경제 철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지, 자연자원, 정부, 화폐시스템에 대한 소유로써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류 언론은 이 맥락을 설명하는 일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애쉬크로프트

선생님의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은 생각 있고 영민하며 국제주의적인 미국인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이번 선거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이 세계에서 더 인기를 잃을 상황에 대비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허드슨

그 결과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voting with their backsides’[엉덩이로 투표하다→투표에 참가하지 않고 집에 있다―정리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거마다 투표참가자수가 줄어왔습니다. 미국에는 제3의 당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부동산과 독점에 이익을 둔 월가의 재정 지원을 받습니다. ‘yes’와 ‘yes, please’가 두 당의 이름입니다. 대안이 없는 것, 선택지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통제의 목적이며 ‘자유시장’의 핵심입니다. 정부가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민중이 선택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비엔나의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전쟁을 하고 암살을 행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핵심도 이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운동 지도자들, 대학 교수들, 지식인들을 대량 학살한 칠레의 자유시장주의자들의 핵심입니다. 지금 미국은 기관총만 없을 뿐 상황은 똑같습니다. 실제적 대안은 없고 사실상 같은 두 차악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가상적 선택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는 미국 민중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8)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아래는 2015년 9월 21일 카운터펀치(CounterPunch) 라디오에서 방송된, 에릭 드레이처(Eric Draitser)와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의 인터뷰 중에서 오바마(Barack Obama)를 다루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에도 수록되어 있다. 마이클은 ‘맑스주의 경제학자이고 맑스(그리고 맑스가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자본 이론에 기반을 두면서도―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국의 경제정책입안자들에게 맑스의 『자본론』2권과 3권을 읽을 것을 권유하기도 할 정도이다―신자유주의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의 한 가운데를 거쳐 온 경력(체이스맨해튼 은행, 아서앤더슨 회계법인 등)으로 인해서 금융세력(월가)이 지배하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실상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금융세력의 지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현실진단은, 빚이 불어나는 속도가 경제성장의 속도를 능가하는 현재의 상태로는 미국의 경제가 붕괴를 맞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부채탕감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으로 그의 핵심적인 생각들을 기회가 되는 대로 소개할 생각인데, 우선 오바마 부분을 소개하는 것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그의 실제 정체와는 정반대로, 즉 ‘서민에게 잘 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해 매개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환경에서 이러한 기만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허드슨은 오바마가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에게는 부채를 탕감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약속을 어기고 자신에게 돈을 대준 월가를 위해 일한 자임을 폭로한다. 허드슨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유도 (물론 그 이유 가운데 일부겠지만) 이것과 연관짓는다. 힐러리가 ‘나는 오바마의 셋째 임기를 하겠다, 차악(the lesser evil, 덜 나쁜 후보자)인 나를 뽑아달라’라고 유권자들에게 말했는데, 유권자들은 실제 차악인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역사”(The History of Neoliberal Economics)라는 제목의 인터뷰의 말미에서 허드슨은 오바마를 이어받겠다는 힐러리가 차악이 아니라 “트럼프가 바로 차악이었음을 기억하세요”(Just remember that Trump was the lesser evil)라고 힘주어 반복한다. 힐러리와 트럼프가 맞붙은 대선에서 허드슨은 두 정당 모두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힐러리와 대선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허드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정치와 선거는 지금 사유화되어 시장경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트럼프가 힐러리보다는 차악이라지만, 두 당이 근본적으로 똑같이 신자유주의에, 금융세력에게 포섭당한 상황에서 미국 민중은 과연 어디서 새로운 정치를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상황은 과연 이것과 얼마나 다를까?

오바마가 루비노믹스 패거리를 위해 월가와 한통속으로서 한 선동가 역할

에릭 드레이처

2009년과 제너럴모터스의 붕괴를 돌이켜보면, 붕괴한 것은 제너럴모터스라는 자동차제조업이 아니었습니다. 그 금융 부문인 GMAC이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부채 담보부 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기타 이와 유사한 금융파생상품들로 빚을 내었다가 붕괴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바마가 들어와서 자신이 “제너럴모터스를 구했다”고 주장했을 때,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제너럴모터스의 월가 부문을 위했던 것이죠.

마이클 허드슨

맞습니다. 그는 월가를 위한 대통령 후보였고 클린턴의 재무부장관이었던 루빈(Robert Rubin)이 그를 밀어주었습니다. 미국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와 시티그룹(Citigroup)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드레이처

이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 첫 5일 동안에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JP Morgan),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시티(Citi)의 CEO 등속을 초청했습니다. 이 내용은 책들, 『뉴요커』(The New Yorker)지 및 기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바마는 이들에게 ‘내가 있으니 걱정마시오’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허드슨

써스킨드(Ron Suskind)가 이 일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오바마가 “당신들과 쇠스랑들[일반 국민을 건초 등을 집어올리는 쇠스랑에 비유한 것―정리자] 사이에는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의 흔적은 백악관 웹싸이트에서 재빨리 지워졌지만, 써스킨드의 책에는 있습니다. 오바마가 세기의 대 선동가 가운데 하나로서 출현한 것입니다.

드레이처

그의 정책과 행동이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행동이 필요했던 위기의 순간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올바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월가가 원하는 바를 행했습니다. 그는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과 구제금융 등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민주당원들이 그들의 대화에서는 피하고자 하는 어떤 것입니다.

허드슨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think)에 기반을 둔 수사(修辭)입니다. 그는 ‘희망과 변화’의 후보로 출마했는데, 그가 실제로 한 역할을 희망을 부수고 변화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한 대로 부채를 탕감하지 않고 그대로 놔둠으로써 그는 미국 경제의 파탄을 주관했습니다. 경제를 희생한대가로 은행, 증권소유자들이 구제되었습니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거대 부동산 세력을 위해 지역 조직가로 일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짓을 해서 가난한 흑인 동네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그 지역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이루는 것이었고 고소득 흑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재산가격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리츠커(Pritzker) 가는 수십억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래서 페니 프리츠커(Penny Pritzker)가 그를 루빈에게 소개했던 것입니다. 오바마는 민주당에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미국의 31대 대통령)보다 왼쪽에 있는 민주당원들을 죄다 당에서 몰아내기 위해 루빈에게 자신의 내각을 임명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오바마의 내각은 첫 수석보좌관은 사악한 반(反)노동론자 이매뉴얼(Rahm Emanuel, 현재 시카고의 시장입니다)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민주당을 오른쪽으로 밀어붙였고, 공화당은 오바마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차악’이 될 수 있는 큰 여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 같은 사람이 자기는 데니스 쿠시니치(Dennis Kucinich, 민주당에서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와 함께 가장 진보적으로 알려진 인물)가 찬성하는 것, 즉 단일보험자 건강보험(single payer healthcare program)을 찬성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이에 맹렬히 반대했고 제약 및 건강보험 부문의 로비스트들을 밀어주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의 편이라고 믿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사실 그는 그의 선거운동에 돈을 댄 월가의 특정 세력을 옹호하고 있는데 말이죠.

드레이처

맞습니다. 말 그대로 오바마가 행동을 취한 모든 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오바마케어(이는 정말이지 보험업에는 큰 혜택이죠)를 옹호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의 사유화, 부동산 등에 이르기까지요. 말 그대로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오바마는 금융자본의 하인이지 민중의 하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유권자들을 월가에 가져다 바치는 민주당의 현재의 실상입니다.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12장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2장의 뒤에 딸린 “Fifth Response”는 제외되어 있다. 다음에 따로 올릴 에정이다.

 

Chapter 12. Neoliberal Administration Out of Joint 207

 

화폐와 금융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계와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제도들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일반적 내러티브: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일국적)의 위기에서 나왔다.

보완적 내러티브: 일국 주권과 근대 행정은 외부에서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부패를 통해 공동(空洞)화되었다. 기업들의 로비 및 기타 합법화된 부패.

요컨대, 근대 행정과 일국 주권들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이미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내러티브들은 유용하다. 그러나 이는 전개과정을 위에서만 보기 때문에 이 시각은 부분적이고 본질적 요소들을 놓치고 있다. 8장에서 이미 말했듯이. 근대 행정을 위기에 빠뜨린 살아있는 동력은 아래로부터 왔다. 즉 생산적 다중의 창조적이고 협동적인 회로들이다. 그 증가하는 능력, 지식, 정보에의 접근, 그리고 고정자본의 재전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제도들과 실행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다중의 저항, 반란. 자유의 기획, 자율능력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만든 에너지와 능력을 봉쇄하고 수습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Neoliberal freedom 208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적 어젠다의 중심에 놓는 보수적·자유주의적 전통의 정점이다. 그 자유들 가운데 일부는 단지 신비화일 뿐이다.

 

개인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보면 자유는 노예상태를 의미한다. 작은 정부도 종종 재산의 보호, 안보장치들, 경계철책들, 군사프로그램들에 드는 예산의 증가를 의미하곤 한다. 즉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아니며 정부 활동이나 강압의 감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푸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개입은 다른 체계에서만큼이나 밀도 있고 잦으며 능동적이고 연속적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신비화된 자유 개념 아래에는 사회적 자율이 맥박치고 있다.

 

푸꼬 :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제 교환의 파트너가 아니라 개인 기업가이다. 기업가의 일반화.

 

이 기업가 형상은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점점 더 자율적이 되는 사회적 생산형태들을 굴절시켜 해석하고 전유한 것이다.

(푸꼬의 강의들 전체에 걸쳐 사회를 가로지르는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인식이 때로는 낮은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회에서 보이는 기업가 형식의 일반화는 사실 신자유주의와는 반대방향을 가라킨다. 즉 협동적인 사회적 주체성들의 자유와 자율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앞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발견한다.”

신자유주의의 자유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저항적 주체성들의 힘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기업가가 되고 자신의 삶을 관리할 자유는 실제로는 대부분 불안정성과 가난으로 옮겨간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푸꼬의 강의를 듣고 그의 비판적 목소리를 긍정으로 오인한 듯하다. 노동자들이 개인 기업가가 되는데 주된 장애는 안정된 평생보장 직업이라고 드러커는 주장한다. 노조가 깨지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야 노동자가 늘 자신의 삶에서 혁신하고 갱신할 테니까. 대학이나 정부도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안정 역시 자기혁신을 위축시키니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새처럼 자유롭다, 안정된 직업에서 자유롭고 복지 서비스에서 자유로우며 국가의 지원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자신의 불안정한 삶을 최선을 다해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다 하니 이 얼마나 멋진 위선인가!

 

일본에서 나온 프리터(freeter)라는 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전도된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프리터의 자유, 가난과 불안정의 자유이다.

 

신자유주의의 신비화에 분노하여 저 아래 있는 사회적 협동의 동학을 놓치면 안 된다. 다중의 기업가를 놓치면 안 된다.

 

테크놀로지 소비에는 계속적인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1인 관료제(a bureaucracy of one)를 창출한다. 자유와 제한을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개인적 자기관리의 구조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형태들은 생산과 협동의 자기관리와 자기조직화에 의존한다.

신자유주의 아래에는 자기관리와 협동의 사회적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여기서 나오는 가치를 추출하고자 한다.

 

자기(자주)관리는 식민화된 민족들, 페미니스트들, 인종적으로 종속된 사람들, 조직된 노동자들 등의 세계 전체에 걸쳐서 투쟁의 핵심적 요구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점에 달했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공동체 자기(자주)관리의 성공적인 실험 사례들 가운에 일부는 흑표범당의 해방학교 및 어린아이들을 위한 무상아침급식 프로그램; Gabriel Cohn-Bendit가 창립한, 학생과 선생이 함께 관리하는 학교인 Lycee experimental de Sainte-Nazaire; 2001년 경제위기 때 소유주에 의해 버려진 후 노동자들이 되살려 운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Bauen Hotel; Our Bodies, Ourselves를 출판한 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가 있다.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에 그러한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전유는 ① 자유와 자기관리 개념을 집단에서 개인의 규모로 축소한다. ② 다중의 지식과 능력을 포획하고 전유한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는 추출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유는 과거의 투쟁의 왜곡된 부호―의미 없이 되풀이 하는 옛날 단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의 지식, 자율, 집단적 자주관리를 가리킨다. 푸꼬의 말을 명심하라.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 열쇠는 그 자유를 찾아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 다음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Crisis points of neoliberal administration 212

 

8장에서 말했듯이, 근대의 행정은 지식, 능력, 정보에의 접근이 인구에 일반화되고 행정통제의 경계를 넘쳐흐를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계산하는 사회적 요인들이 점점 더 측정 불가능하게 될 때 무너진다. 행정은 이제 엄밀하게 합리적인 사회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동과 주체성의 생산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의 부의 포획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일국 및 초국적 수준의 행정 및 법 장치들은 점점 더 단편화된다.,

Andreas Fischer-Lescano and Gunther Teubner: 법의 단편화는 전지구적 사회 자체의 단편화를 반영한다.

버넌스의 한 양태로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흘러넘치고 측정불가능하고 단편화된 특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를 종식시키지 않는다. 정부와 달리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는 단편들 사이의 약한 양립 가능성에 의존하는 다수적이고 유연한 통제네트워크를 발생시키고 유지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열쇠는, 영속적인 위기의 상태에서 기능하고 명령을 행사하고 가치를 추출하는 능력이다. 그 아래 있는 생산적인 사회적 장을 궁극적으로 통제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위기점 가운데 첫째는 가치 측정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사회적·비물질적 생산물과 관련된다. 자본주의 회사들과 근대 행정이 산업 및 농업 생산물들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 어찌어찌 성공한 반면에, 사회적 생산물들은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간호사가 제공하는 돌봄의 가치나 컴퓨터 문제를 해결하는 콜센터 노동자의 지성의 가치 혹은 문화생산물, 아이디어 등의 가치를 어떻게 수량화할 것인가?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모든 결과는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특징을 띤다. 공유에 열려 있고 사유재산으로 폐쇄되기 힘들다. 모두가 사회적 삶형태들을 구성한다. 사회적 생산의 생산물들을 어떤 식으로든 있지만, 그것들의 가치는 할당된 양을 흘러넘친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본성상 측정 너머에 있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의 측정 불가능성이 자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측정 불가능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동원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파생상품들이 미지의 가치에 대한 벤치마크를 제공하고 하나의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 테크놀로지들도 전지구적 경제의 토대를 성공적으로 안정화하지는 못한다. 사실 더 휘발성 있게 만드는 쪽이다. 매일 아침 신문에는 경제의 불안정을 나타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이 불안정은 부분적으로는 범죄적 행위 때문이지만, 체제 차원의 단층선(systemic fault lines)의 징후이기도 하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 : “경제적·금융적 위기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가치의 불안정성이 한 유발 요인이다.”

금융자본의 지배 하에서는 거버넌스와 위기가 모순적이지 않다. 자본이 위기를 거버넌스의 한 양태로 채택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둘째 위기점은 정보와 소통에의 접근이다.

각 정부들의 통제 및 감시 노력.

비밀과 감시가 안보 주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아무리 댐을 튼튼하게 해도 인터넷 경찰은 항상 새로운 누수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10대가 노트북으로 장애물들을 제치고 금지된 사이트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 항상 일어날 것이다.

 

이주가 셋째 위기점이다.

2014년에 6천만 명이 강제로 이동.

오늘날 2억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태어난 나라의 바깥에서 산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10분의 1이 이주민들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국민국가들과 초국적 거버넌스 기구들이 무관심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많은 다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주민들은 자유롭고 유동하는 주체들이다.

돕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자주 그들을 희생자들로만 본다.

싼드로 메짜드라(Sandro Mezzadra) : “이주의 주체적 측면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온정주의적 시각을 넘어서 이주민들을 오늘날의 전지구적 변형 과정의 주인공들로 볼 수 있다.”

 

부와 가난의 역설을 한데 묶어서 보기.

① 삶의 발판들을 박탈당한 상태.

② 탈주는 자유의 행동이며 강함의 표현이다.

 

주체성의 관점에서 이주자들은 모든 행정적·자본주의적 척도 논리를 넘어선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영속적인 위기관리 장치의 형태를 띤다.

 

자유와 주체성이 생산, 정보에의 접근, 이주를 특징짓는다. “주체성의 생산이 행정의 기능에 필요한 척도의 경계들과 테크놀로지들을 항상 초과한다.” 위기관리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작동양태이다.

 

이렇듯 위기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규칙(규범)이지만 이것이 행정의 매끄럽고 성공적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결과로 규칙적인 위기를 낳는다. 다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①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하나의 척도에 종속시키지 못함 ② 정보의 통제 불가능성 ③ 이주의 봉쇄 불가능성 — 이 셋이 행정의 무력(효력을 내지 못함)에 추가되어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재앙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mptying the public powers 218

 

신자유주의 행정은 액체 거버넌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공적인 힘들(공적인 것)을 비워내고 행정 기능에 자본의 논리를 부과하는 프로젝트를 향해서 정렬된 분산되고 무질서한 연관들로 짜인 내구성 있는 직물과 더 닮았다. 그러나 주체성들은 결코 그 규칙에 맞추어져 기능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행정을 분석할 때 하나의 과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너머를 지향하는 저항과 반란의 잠재력이 아래로부터 출현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행정이 공적인 것을 비워내는 양태

①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의 부의 이전

민영화

국가부채

긴축정책이 국가 재산을 팔게 함. 예) 2015년 그리스의 부채 드라마.

불법적 수단을 통한 부의 이전. 공적 기금의 횡령, 공공 자산의 부적절한 판매, 허위 토목공사 도급, 뇌물 등.

드러난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부패가 신자유주의 행정의 거버넌스 및 규범적 구조의 구성적 요소가 되었다.”

② 다양한 내적·외적 압력을 통해 국가행정장치의 핵심 기능을 변형하기

외부 압력: 예를 들어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협박하여 일국의 결정능력을 압도하기

내부 압력 : 민영 싱크 탱크, 로비스트들의 입법 지시, 선거에의 합법적 기여

 

그런데 이 현상은 더 일반화된다. 행정력이 사유화되고, 시장의 척도가 행정수행의 벤치마크가 되며, 행정 결정에 경제적 기준들이 침투함으로써 정치적인 것 자체가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

Wendy Brown: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합리성이 정치적인 것에 위로부터 부과되는 것 + 경제적 논리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주체들의 창출>로 정의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호모 폴리티쿠스를 정복하기”이다.

법 실행과 법 이론이 신자유주의 행정이 부리는 무기들 가운데 일부이다.

 

우리는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전 지위를 복원시키려는 마음은 없다. 아래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 저항 행동들과 생산적 활동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매끄럽거나 안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항상 저항과 투쟁의 장소로 남아있다.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의 세 전선]

① 투명성

신자유주의 행정의 전략적 불투명성과 싸움.

② 접근

행정 및 기업 활동에 빛을 비추면 비리를 막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 지식과 정보를 사회 일반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생산 수단의 자유로운 사용.

③ 의사결정

의사결정에 관한 문제가 양자를 통합하여 우리를 정치적 지형에 세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바처럼 정치의 자립성을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구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종속에 맞서는 주체성들의 잠재적 생산을 지향하게 한다.

 

이 모든 전투에서 주된 전선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세계이다.

디지털 감시

신자유주의적 보안 장치들과 사회적 미디어 기업에 의한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 사이에는 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이중적 역할 : ① 사회적 생산이 포획과 신자유주의 행정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동시에 ② 다중으로 하여금 지식, 소통, 자기행정 능력에 접근하도록 허용한다. 7장에서 말한 고정자본의 재전유가 해방기획을 위해 이러한 힘들을 이용할 한 수단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다. 자본과 신자유주의가 가진 무기는 종종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낙관주의나 절망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명령과 단절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주체성과 사회적 삶의 생산을 위한 잠재력을 우리의 상황이 제공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IV부에서 다룰 과제는 이 지형 위에서 혁명적 과정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조직할 것인가이다.




공통적인 것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7-105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Third response: the common is not property 

 

공통적인 것은 생산에 열쇠가 되고 사유재산은 생산 능력에 족쇄가 된다.

공통적인 것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재산(소유)과 반대된다. 새로운 재산 형태가 아니라 비재산(nonproperty)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은 공유를 위한 사회적 구조이며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사적 소유는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것이거나 문명사회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와서 생겼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가부장적 위계적 분할 및 통제 방식을 가지고 있는 전자본주의적 공유 공동체 형태를 되돌아볼 필요는 없다.

공통적인 것의 이해는 사회적 부를 향한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칫솔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또한 당신이 만든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남들에게 권리를 줄 필요도 없다.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

① 지구와 생태계들

② 비물질적 부의 형태들―생각, 코드, 이미지, 문화산물들

③ 점증적으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들로서 공통의 사용에 열려야 하는 것. 그 계획이 가능한 한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들.

④ 메트로폴리스와 시골의 사회적 영토들. 환경 + 문화.

⑤ 건강, 교육, 주택, 복지가 목표인 사회 제도들 및 서비스들.

공통적인 것의 이해에 결정적인 것은 그 사용과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을 진심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우리[네그리와 하트]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안팎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표: 공통권과 사회권의 차이

사회권, 사회법

공통권(rights of the common)

정태적

생산적, ‘함께 있음’의 새로운 제도 구축

총체적 동원

아래로부터 관리되는 민주적 협동관계의 사회

개인들의 덩어리가 그 대상

특이성들의 협력

사회법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인간자본 관리로 변형

공통적인 것은 법의 매개 없이 전진하며 다중으로서 출현한다.

 

Fable of the bees; or, passions of the common 

오늘날 소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전]

재산은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사회주의 전통은 재산이 아니라 국가가 안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해왔다.

진정한 안보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려움을 물리치는 희망이다.

오늘날 안보는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에서 누리는 자유와 협동에서 나온다.

레베카 솔닛: 재난이 사회적 욕망과 가능성을 보게 해준다.

[번영]

사적 소유가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말은 이데올로기로서나 사용된다.

사적 소유는 욕구의 빈곤을 낳는다. 맑스가 말하듯 향유 능력 자체가 생산력이다. 생산성의 척도이다.

현대 사회에서 삶은 일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불안정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 또한 부의 결정적인 자원(resource)을 드러낸다.

주디스 버틀러: 취약성(vulnerability)은 강함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자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둘 다 억압적이다. 사적인 것은 자유를 파괴하고 공적인 것은 사회적 유대를 멸절시킨다.

특이성들은 자유와 협동이 내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탄생한다. “한편으로 자유의 확장만이 협력을 구축하고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며 사회적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협력의 규칙들과 민주주의의 규범들만이 자유롭고 능동적인 주체성들을 구축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낡고 파괴적인 짝을 넘어서 자유로운 인간의 공생공락(conviviality)을 구축한다.”

근대 주체론은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서 나왔다. C. B. MacPherson: 개인은 그가 가진 것에 의해 정의된다.

소유 논리는 사랑에 대한 생각에도 주입된다.

주체성은 공재에서 발생한다. “주체성은 가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같이-존재하기, 같이-행동하기, 같이-창조하기에 의해 정의된다. 사회적 협력에서 주체성이란 것 자체가 발생한다.”(Subjectivity is defined not by having but being or, better, being-with, acting-with, creating-with. Subjectivity itself arises from social cooperation.)

“그렇다면 이 모든 측면에서우리는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가진 덕을 알아보아야 한다. 비록 재산의 지배가 사회복지와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는 것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인식되고 공통적인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등장하는 역사적 시점에 도달했지만 사유재산은 (토머스 그레이Thomas Grey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스스로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고 마테이Ugo Mattei가 올바로 말했듯이 공통적인 것은 ‘자신의 공간을 되찾기 위해 길고 진한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된 대중운동의 물리적 존재로써만 방어되고 다스려질 수 있다.’ 인류가 절벽을 뛰어넘어 공통적인 것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미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