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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

 



지난 8세기에 걸쳐서 영국정치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두 개의 북엔드가 있다. 한 쪽 끝에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심림헌장 관련 글로 http://commonstrans.net/?p=478,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961 참조.))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영국 총리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가 있다. 삼림헌장은 1215년부터 (1971년까지!) 생존을 위해 공통의 부에 접근하는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했고, 새처는 공통의 부를 훔치고 사유화함으로써 이 권리들을 없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사회제도를 1981년에 도입했다.

런던 소재 SOAS 대학의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최근 저서 『커먼즈의 약탈: 공적인 부를 공유하기 위한 선언』(Plunder of the Commons: A Manifesto for Sharing Public Wealth)에서 이 역사의 양끝 지점을 한데 모은다. 초점은 인클로저에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핵심, 즉 책이 선언하는 바는 요즘의 맥락에서 공적 자산 및 공공 서비스로서 주로 이해되는 커먼즈를 되찾는 것이다.

커먼즈는 영국의 ‘심층 역사’에서 거듭해서 등장했지만 대체로 커먼즈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커먼즈는 보통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의성 있는 정치 쟁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커먼즈를 그 원대한 역사적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시대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풍부하게 다룬 책을 마침내 우리에게 선물한 스탠딩에게 크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커먼즈의 성쇠에 관여된 아주 많은 다양한 가닥들—법률•토지•재산권•경제•문화•지식—을 종합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 커먼즈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적절하게도 스탠딩은 커머너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한 삼림헌장에 관한 장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스탠딩이 서술한 삼림헌장의 역사는 분명,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거의 잊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가장 간결하고 생생한 역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정의하는 많은 유형의 법(률)•인간권리•정치투쟁의 최초의 사례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술이다.

스탠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면에서 삼림헌장은 평민이 최초의 계급 기반의 요구사항들을 직접 혹은 그들을 대신하는 다른 세력을 통해 국가(국왕)에 제기하여 ‘자유인들’의 공통적인 혹은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서 간주될 수 있다. … 삼림헌장은 자유인들에게 생계수단에의 권리, 원료에의 권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정도로 생산수단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였다.

‘기원 서사’에 이어서 스탠딩은 교육•의료•토지•지식 등의 영역들에서 커먼즈가 오늘날 왜 그토록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그는 어떻게 토지 소유권이 부유한 소수들에게 집중되었는지를, 어떻게 공유림들이 목재를 약탈당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공원들과 공공장소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사유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커먼즈•사회커먼즈•시민커먼즈•문화커먼즈 및 지식커먼즈(스탠딩의 범주들)를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국가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적정 가격의 주택을 밀어내고 노숙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동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조금씩 진행되는 사유화’를 통한 국가의료서비스의 쇠퇴에 대해 알게 된다.

스탠딩의 이 저서의 큰 기여는 어떻게 인클로저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만연한 현상—그런데도 정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현상—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탠딩은 영리하게도 단지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유시장주의자들—토리당, 기업들, 투자자들, 새처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쟁점들을 부활시킨다. 『커먼즈의 약탈』은 800년 전에 국왕이 공유지를 몰수한 일에서부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새처/레이건의 잔인한 긴축정책들까지 직선을 그음으로써 사태를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1200년대에 영국 토지의 대략 50퍼센트는 공유지로 관리되었다. 오늘날 대략 5퍼센트가 공유지로 인정되고 있다. 예측 가능한 일단의 정치적 남용사례들과 부의 불평등 사례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중세 왕들과 현대 자본가들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양쪽 모두에게 커먼즈의 절도(竊盜)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진보’는 항상 민중의 부(富)의 강제적 강탈—자유시장 경제가 위장하고 탈명명화(ex‑nomination)하려고 (말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온 어떤 것—에 의존해왔다. 이것이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내가 커먼즈를 이해하는 바와 스탠딩이 이해하는 바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많은 ‘공공재들’과 정부 서비스를 커먼즈로 본다. 나는 고전적인 커먼즈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는 상향식 거버넌스(bottom‑up governance)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국가신탁 커먼즈’(state‑trustee commons) 또는 간단하게 ‘정부 서비스’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가 표면상으로 커머너들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혹은 (앞으로) 공유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해 나는 커먼즈를 국가가 아니라 커머너 자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살아있는 사회 체계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체제를 받아들이는 담론 내부에서조차도 공동자산으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연다. 그런 이야기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가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커먼즈의 약탈』은 두 개의 ‘커먼즈 헌장 조항’을 제안함으로써 커먼즈를 되찾기 위한 야심적인 어젠다를 제시한다. “사적인 부는 많은 것을 커먼즈의 존재와 약탈에 빚지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커머너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스탠딩은 쓰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커먼즈 펀드>(Commons Fund)를 설립하는 것으로, <커먼즈 펀드>의 기금은 사업에 사용된 공동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탁기금은 커머너들에게 배당될 배당금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은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 APF)로 입증되고 『자본주의 3.0』(Capitalism 3.0)을 포함하는, 피터 반스(Peter Barnes)의 많은 저서로 대중화된 구상이다.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은 광범하고 학구적이지만 서사들로 풍성하고 읽는 즐거움도 있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탁상공론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그의 책에는 시기를 딱 맞추는 미덕 또한 있다. 대다수 커먼즈의 운명은 영국정치에서 빠르게 국가적인 논의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만큼 공들여 잘 만들어졌다.




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 저자  :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 원문 : “Left Should Stop Equating Labour With Work” (2018.3.1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Social Europe(socialeurope.eu)에 실린 원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여기저기에 정리자의 논평을 삽입한 글이다.

 

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신성화는 곧 자본의 신성화이고, 자본이 권력이라면 노동도 그 권력의 일부이다. 이러한 자본 중심적 도식에 따르면 ‘일자리’는 자본(불변자본)에 대해서는 ‘을’의 자리이면서 일자리 바깥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갑’의 자리가 된다. ‘너희는 을 속에서 갑을 추구하라’—이것이 바로 자본이 내리는 명령이다. 스탠딩은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 이러한 자본의 명령을 사회에 널리 퍼뜨리고 전도사로서 기여해 왔음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출발점의 필요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work’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임금을 버는 활동인 노동(labour)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만이 진정한 ‘일’로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20세기 내내 해온 일이 “일(work)의 의미를 노동(labour) 혹은 소득을 버는 활동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한다. (정리자는 앞으로 이것을 ‘일을 노동에 종속시킨 것’ 혹은 ‘노동의 규범화’로 바꾸어 표현할 것이다.)

그는 노동이 아닌 일과 노동인 일의 차별과 그 불합리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 지긋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6시간을 쓰면,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어휘에서는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임금을 받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이 지극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3시간을 쓴다면 이는 일로 계산되며, 당신은 ‘취업자’로서의 어엿한 위치로 격상된다. 그리고 노동 및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불합리하다.

스탠딩은 일의 노동에의 종속 혹은 노동의 규범화는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용안정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원래 19세기에 고용주들이 옹호했던 것이지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옹호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취업 중’(in employment)이란 말도 수십 년 동안 낮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부르주아지나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미혼 여성에게 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고 한다.

노동의 규범화와 관련하여 스탠딩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지만 노동의 규범화는 사실 매우 광범하게 일어났다. 소련 헌법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레닌의 문구로 노동이 병리적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민주주의에서 반(反)해방적인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예의 레닌의 문구는 한때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노동의 당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말로 바뀌어 주로 노조활동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노동의 규범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은 배제의 논리이다. “고용주를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 보이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과 결혼한, 이차적인 위치의 사람들, 혹은 그런 서비스를 오래 수행해온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안전의 어엿한 권리가 부여된다.

스탠딩은 노동의 규범화를 논리적 결론으로 다듬은 “사회민주주의의 영웅들” 가운데 웹(Beatrice Webb)과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를 거론한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어머니인 웹은 ‘징역소’(labor camp)를 (필요하면 강제력의 사용도 포함) 공개적으로 옹호하여 블레어 같은 수상들이 수 세대 이후 워크페어를 옹호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한심한 한국의 주류 언론은 워크페어를 “일을 통한 적극적 복지”라고 추켜세우지만 스탠딩이 보기에는 ‘강제노동’의 메커니즘이다.) 자유주의자 베버리지는—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그를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정리자]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8년 2월 20일의 강연의 제목은 “Beveridge Rebooted: a basic income for every citizen”이다.))—‘기아의 채찍’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제하리라고 믿었다. 스탠딩은 이런 관점은 기껏해야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이고 최악이면 반(反)해방적이라고 본다.

스탠딩이 노동의 규범화에 기여한 것으로 또 지적한 것은 ILO—이를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화신”이라고 부른다—의 1952년 조약이다. 이 조약은 “‘돈을 버는 남성 가장들’(breadwinners), 그에 딸린 아내들 그리고 보호의 권리를 버는 노동 ‘서비스’에 대해 말”함으로써 노동의 규범화를 낳은 “편견들”을 정식화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1930년대로의 후퇴”인데 어처구니없게 2001년에 와서도 유럽의 노동조합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이 조약이 현대적인 국제조약 가운데 하나로 보존되기를 요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의 흔한 뻔뻔스러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존엄’, ‘지위’ 그리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주장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뻔뻔스러움”에 응대한다.

그런데 나는 일자리를 가지기를 중단한 이후에 비로소 더 존엄이 생겼고, 사회에 더 통합되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개인 너머로 확대하여, 하수구에 내려가 파이프를 고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면 존엄을 얻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대답일 것이며, 아침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환자용 변기를 청소하러 가는 여성에게 당신은 사회에 통합되고 있으며 일자리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말하면 잔소리를 한 바가지는 들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직업(노동)을 다른 형태의 일보다 더 높일 정당한 이유는 없는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바로 이 ‘높이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적 입장이 아니라고 그는 확언한다. 노동을 ‘소외된 활동’이라고 부른 맑스가 옳았다는 것이다.

스탠딩이 이렇게 ‘소외된 활동’이라는 원론적 측면에만 기반을 두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동주의(노동을 규범으로 보는 사고방식)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동주의를 낳았던 현실을 구성하는 두 이분법 — ① 작업장(일터)과 기타 장소의 구분 ②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이 이제 사라지고 없는데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이분법들이 여전히 규범으로서 적용되는 것처럼 계속 주장함으로써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점증하는 프레카리아트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프레카리아트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포퓰리즘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새로운 진보적 운동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규범화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현실에서는 규범화된 노동만을 통계로 잡는 관행이 왜곡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정책을 관찰된 노동에 의거하는 것도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시적인 노동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길을 가장 멀리 간 것은 (스탠딩이 보기에는) 책임 없는 권리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 가난한 사람은 직장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입증하라고 주장한,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이다.

스탠딩은 워크페어를 노동주의 모델의 끝판으로 본다. 이는 자산조사나 노동시장유연성을 받아들인다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탠딩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렌지(Matteo Renzi)가 가장 최근에 이 길을 간 사람이며 그의 사회민주당이 가장 최근에 내파의 대가를 치르고 좀비가 된 당이다. 제3의 길을 만들어낸 빔 코크(Wim Kok)은 네덜란드 노동당이 나락에 빠지는 길을 마련했으며, 하르츠 IV 개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긴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 자산조사와 워크페어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진 신노동당(New Labour)은 영국 프레카리아트를 잃고, 보편적 신용(Universal Credit)이라는 유령이 출현하도록 허용했다(2013년 도입).

스탠딩은 노동주의에 헌신하는 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수명은 끝날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그 이유가 노동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분법들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가오는 생태적 위기의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좌파 일반, 그 가운데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생태학과 관하여 나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 창출과 환경 사이의 갈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자리에, 이른바 ‘노동계급’ 일자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을 옹호하기보다는 ‘외부성’과 오염통제를 다루는 군소 정책에 관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탠딩은 좌파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새로운 좌파는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주의적 접근법은 인간의 활동의 다른 형태들은 무시하고 노동만을 가시화하기에 자원고갈을 낳는 활동들에 큰 강조를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한다면 노동이 아닌 일의 가치(보통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것)가 적어도 노동의 가치와 동등한 무게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스탠딩은 이 접근법이 새로운 좌파—‘녹색 좌파’(Green-Left) —에게 놀라운 호소력을 가질 것으로 본다. 스탠딩은 ‘탈성장’의 정치는 가급적 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세련된 녹색주의자에게는 덕 있고 기율 있는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일반적인 투표자에게 먹힐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탈성장은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낮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원을 보존하고 우리 자신들·공동체들·커먼즈를 재생산하도록 설계된 활동들이 자원을 고갈시키는 활동들인 노동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는다면, 후자의 활동에서 전자의 활동으로 이동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탈성장’으로 다가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만일 통계에서, 진보적 담론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이 쓴 글과 책에서, 노동이 아닌 일에 동등한 (바람직하기로는 더 많은) 무게와 관심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성장’을 더 생태적으로 분별력 있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이 그저 더 빠른 자원 고갈, 지구온난화, 노동의 선호에 따른 일의 상실을 의미할 뿐이라면 좌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준케인즈주의자들과 좌파에 속한 다른 이들이 더 많은 성장을 요구하는 것에 불편해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민주주의 덫에 갇히면 탈출할 수 없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만일 당신이 매일 사무실에 가는 따분한 일을 하다가 동일한 시간을 나이 지긋한 친척들이나 지역공동체를 돌보는 데 쓰게 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을 낮추는 ‘나쁜’ 일로 간주된다. 그런데 만일 돌보는 일이 사무실에서의 일보다 가치가 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면 돌보는 일로 이동하더라도 성장은 낮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큰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