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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그나카르타만큼 중요한 삼림헌장에 대하여 결코 들어보지 못한 이유



 

지탄을 받던  존 왕이 사망하고 링컨 전투에서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이후인 800년 전 11월, 영국 정체(政體)의 주춧돌 중 하나가 마련되었다. 바로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인데, 이는 2년 전에 비해 짧아진 (나중에 ‘마그나카르타’라고 불리게 되는) 자유헌장(the Charter of Liberties)과 나란히 1217년 11월 6일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조인되었다.

삼림헌장은 통치권에 강제된 최초의 환경 헌장이었다. 삼림헌장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권리, 커머너의 권리 및 커먼즈의 권리를 가장 먼저 강력하게 천명했다. 삼림헌장은 또한, 생계자급 수단에 접근하고 재혼하는 것을 거부할 상부(孀婦)의 권리를 인정하는 페미니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진보를 이룩했다.

삼림헌장은 다른 어느 법안보다도 오랫동안 법령집에 올라 있던 영예를 갖고 있다. 삼림헌장은 754년 후인 1971년에 토리당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2015년, 마그나카르타 기념일을 축하하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던 정부는 상원이 제출한 서면 질의에서 올해 삼림헌장을 기념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법무부 장관인 폭스 경(Lord Faulks)은 삼림헌장이 중요하지 않다고, 세계적인 의의가 없다고 말하며 그 의견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러나 올해 초 <미국 법조협회>(American Bar Association)는 삼림헌장이 미국헌법의 토대였었고 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옳았다.

우파가 삼림헌장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삼림헌장의 핵심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경제적 권리를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고 토지 종획을 철회하여 커먼즈에 광활한 땅을 돌려주는 것이다. 삼림헌장은 놀랍게도 전복적이었다. 슬프게도 모든 어린 학생들이 마그나카르타에 관해 배우는 데도 삼림헌장에 대하여 들은 학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삼림헌장이 마그나카르타를 주도했다. 삼림헌장은 일 년에 네 번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낭독되었다. 삼림헌장은 왕, 귀족계급 및 신흥 자본가 계급에 의한 커먼즈의 종획과 약탈에 대항하는 투쟁을 고취했다. 잘 알려진 대로 17세기에 디거파와 수평파들의 투쟁에,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에 종획에 항의하는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쓰임이 사라져 버린 단어들이 해석되지 않는 한 이해하기 힘든 삼림헌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커먼즈이다. 즉 커먼즈를 보호하고 커머너의 손실을 배상할 필요성이다. 남아 있는 커먼즈를 민영화하고 상업화하고 있는 정부가 커먼즈를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1066년에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이 몰고 온 패거리들에게 공유지(커먼즈)의 일부를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드넓은 커먼즈 지대를 ‘왕의 삼림’ 즉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어 버렸다. 토지 대장(the Domesday Book)이 작성된 1086년에 그러한 삼림이 25개였다. 윌리엄의 계승자들은 왕의 삼림을 확장했고 전쟁자금을 조성할 수익 지역으로 전환시켰다. 1217년에 왕의 삼림은 143개였다.

삼림헌장은 역전을 이루어냈고 자유민들이 숲에서 생계를 추구할 권리를 군주가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삼림의 개념(([옮긴이] ‘삼림’(forest)은 ‘숲’(woods)의 의미 차이는 http://minamjah.tistory.com/search/마그나카르타 참조))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다트무어(Dartmoor)와 엑스무어(Exmoor) 같이 나무가 거의 없는 마을과 지역을 포함했다. 삼림은 커머너들이 협력해서 살며 일하는 곳이었다.

삼림헌장에는 17개의 조항들이 있다. 그 조항들은 자유민들이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위한 모든 요소들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일할 영원한 권리를 천명한다. 이 권리에는 과일을 딸 권리, 건물을 짓는 등의 목적을 위해 나무를 할 권리, 도구와 집에 필요한 땅을 파고 흙을 사용할 권리, 방목할 권리, 낚시할 권리, 연료용 토탄을 가져갈 권리, 물을 관리할 권리, 심지어 꿀을 딸 권리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삼림헌장은 원료와 생산수단을 획득하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천명하고 노동할 권리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우리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삼림헌장은 특히 삼림사법관(Verderer) 제도를 통해 지방 의회 및 사법제도의 발전을 준비했는데, 이 삼림사법관 제도가 치안판사 재판소로 가는 길을 다졌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삼림헌장은 종획을 반대함으로써 제도상의 자유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커먼즈의 관리와 관련하여 커머너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행위상의 자유도 확대했다.

삼림헌장은 공동 출자된 자산과 자원의 공동체적 파수라고 현재 불리고 있는 것의 토대를 마련했다.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자연 커먼즈를 자본화하고 거기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정부의 과시적인 <자연자본위원회>(Natural Capital Committee)와 대조를 이룬다. 커먼즈는 이윤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위해서 존재한다.

수 세기에 걸쳐서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 천만 에이커의 땅을 몰수해서 총신들에게 분배한 헨리 8세가 속해 있던 튜더 왕가가 가장 지독했는데, 이 총신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1845년의 종획법은 사유재산권의 주장을 모방하는 또 다른 대규모 토지수탈이었다. 1760년과 1870년 사이에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층이 도입한 4천 개가 넘는 의회의 법령에 의해 700만 에이커의 커먼즈가 몰수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토지소유권 구조는 조직화된 절도의 결과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박해를 견뎌왔음에도 불구하고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최근 정부들의 바탕이 된 신자유주의적 경제패러다임의 한 가지 특징이 커먼즈를 무시하는 태도인데현 영국 정부는 긴축정책이라는 용어를 핑계 삼아 이제는 무시의 태도에서 약탈의 태도로 전환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수만 에이커의 연방 커먼즈를 석유가스 산업 관련 기업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기 위한 준비를 조용히 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커먼즈는 가격이 없고 따라서 가치도 없다. 그래서 커먼즈는 뜬재물처럼 팔리거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지자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 삼림헌장은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할 권리를 천명함으로써 기성 체제에 대안이 되는 원칙을 인정했는데, 우리의 조상들이 바로 이 원칙을 용감하게 지켰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그렇게 해야 한다. 커먼즈의 약탈에 저항하고 커먼즈를 부활시켜야 한다.

한 단체가 그런 일을 하는 일련의 행사들을 조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전국 수준과 지역 수준의 <커먼즈 헌장>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기념일에 발표될 훌륭한 <나무•숲•인민 헌장>과 함께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 나름의 노력들은 삼림헌장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환경원칙들을 강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기본소득 운동을 뒷받침하는 생계자급권리가 이 전복적인 헌장의 핵심에 놓여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캠페인은 상징성을 담은 한 행사, 즉 9월 17일에 윈저에서 러니미드까지 가는 템스 강 바지선 왕복여행으로 시작되었다. 러미니드에서는 <커먼즈 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식 행사가 2500년 수령의 어마어마한 앵커위크 주목나무(Ankerwycke yew) 밑에서 개최되었다. 러니미드 목초지는 커먼즈를 상징한다. 이전에 토리당 정부가 그곳을 사유화하려고 했으나 영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조직한 점거운동이 성공적으로 경매를 막아냈다.

바지선 여행의 상징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가렛 새처는 1989년에 식수를 민영화했다. 그녀는 아홉 개의 기업들에게 지역 독점권을 주었고 커먼즈에 속한 40만 에이커 이상의 땅을 그들에게 양도했다. 오늘날 대부분 소유주가 외국인인 이 기업들은 영국의 상위 50대 토지 소유자들에 속한다. 그들은 삼림헌장의 원칙들을 조롱한다. <템스 워터>(Thames Water)는 외국인 주주들에게 16억 파운드를 배당금으로 지불하면서도, 하수 14억 톤을 처리하지 않고 템스 강에 흘려보낸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혼이 좀 났고 또한 새는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물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물은 공공재가 되어야 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재(再)국유화되어야 한다.

프래킹[수압균열법]((Fracking에 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01?category=452913 참조.))을 규탄하는 셔우드 숲에서의 행사뿐만 아니라 두 개의 헌장 초안 중 하나가 보관되어 있는 더럼(Durham)에서도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11월 7일에 영국 하원의 한 회의에서 <커먼즈 헌장> 초안을 논의할 것이다. 다른 원본 헌장이 보관되어 있는 링컨 시에서는 노동당(the Labour Party)이 11월 11일에 열릴 행사를 조직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www.charteroftheforest800.org에서 얻을 수 있다. 아직 접촉하지 않은 조직으로서 자신들의 어젠다가 이러한 행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는 모든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모든 커머너들이 일어나길 바라며, 커먼즈를 부활시키는 것이 미래를 회복하는 데 핵심임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기를 바란다.




800살 된 삼림헌장



 

2년 전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옮긴이]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에 작성되었다.))에 왕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고 법치를 확립하는 쪽으로의 전진을 나타내는 이정표로서 마그나카르타를 요란스럽게 찬양해대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 대헌장과 짝을 이루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에는 주의가 훨씬 덜 기울여졌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의 생계에 매우 중요한 삼림에 접근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하는 문서였다.(([옮긴이] 봉건 시대의 맥락에서 ‘삼림’(forest)은 ‘숲’(woods)의 단순한 유사어가 아니라 보통 왕의 관할 아래 둔 사냥터로서의 숲이라는 법적 의미를 가진다.))

이 권리는 왕과의 오랜 내전 끝에 확보되었다. 왕은 그 이전에는 삼림에 대한 배타적 통제력에 대한 주장을 무자비하게 확대하여 삼림 침범자들에게 벌금이나 투옥으로, 때로는 사형으로 처벌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800년 전인 1217년 11월 6일에 헨리 3세가 삼림헌장을 작성하여 커머너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를 문서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커머너들은 거의 모든 것을 삼림에 의존했다. 삼림은 불을 때고 집을 지을 나무를 공급했으며 양을 비롯한 가축을 키울 방목지를 제공했고 식량으로 삼을 사냥감을 제공했다. 삼림에는 버섯, 개암, 딸기류, 민들레 잎, 기타 수많은 초본이 있었다. 또한 삼림은 돼지를 먹이기 위한 도토리와 너도밤나무의 열매의 공급원이었고 빗자루를 만드는 나무를 공급했으며 온갖 종류의 병에 약초를 제공했다.

영국의 박물학자 리처드 메이비(Richard Mabey)는 “그 어떤 다른 종류의 풍경보다도 [13세기 영국 삼림]이 공동체적 장소인데, 그 구조에 여러 세대에 걸쳐 공유된 자연 및 인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

어떻게 이 삼림헌장이 거의 잊혀질 지경이 되었는가?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그의 놀라운 책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에서 이 두 자유의 헌장이 종종 공적으로 연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마그나카르타’라는 이름 자체가 1215년의 ‘대헌장’(Great Charter)을 2년 뒤에 선포된 ‘소’헌장인 삼림헌장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297년이 되어서야 에드워드 1세가 두 헌장을 나라의 단일한 법으로 취급할 것을 명령했다. 1369년에 에드워드 3세는 둘을 하나의 성문법으로 통합하는 법을 발포했으며 여기서 삼림헌장은 마그나카르타의 7장이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삼림헌장은 대헌장의 사소한 부분 집합으로 간주되었으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대영도서관이 관리하는 중세문서원본 블로그(Medieval manuscripts blog)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어떻게 우리를 과거에 연결해주는가」(“how our ancient trees connect us to the past”)라는 훌륭한 글이 올라있는데, 이 글은 삼림헌장을 언급하면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 헌장의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을 나에게 알려준 후안 카를로스 데 마르틴Juan Carlos de Martin과 우고 마테이Ugo Mattei에게 감사한다.) 이 글에 따르면 영국삼림트러스트(British Woodland Trust)의 <고령高齡 수목 목록>(Ancient Tree Inventory)에는 12만 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올라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1000살 이상이 되었는데, 이는 이 헌장이 발포될 때에 있었던 나무들이다.

이 글은 또한 어떻게 삼림헌장이 “삼림 영역을 땅이 불법으로 취해졌음을 입증할 수 있는 곳에서는 1152년 헨리 2세의 통치가 시작될 때의 경계로 되돌렸”는지를 말하고 있다. (“헨리 2세는 삼림의 경계를 압제를 발생시킬 정도까지 맹렬하게 확대했”던 왕이다.) 이는 커먼즈(공유지) 되찾기의 이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이 헌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년 전에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나는 베를린에 있는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지는 의미커먼즈 그리고 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나의 초점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 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충족시키는 데서 마그나카르타(즉 삼림헌장)가 법으로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점에 두어졌다.

이 헌장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이 물음에 대한 즉답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왕의 삼림’이라니. 그건 우리 것이야. 수세기 동안 우리 것이었어!”

커머너들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에 대한 권리—삼림을 사용할 권리, 나름의 통치 규칙을 자기조직화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남용을 막아줄 시민 자유권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잊혀진 유산이다. 이 모든 것들이 문서로 쓰인 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섰다. 그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오랫동안의 전통에 기반을 둔 인간의 권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권리들이 근대 국민국가 및 자본주의의 발생과 함께 계속 삭감되었고 많은 경우에 제거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광범하게 시행될 수 있는 권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이탈리아의 법학자 스떼파노 로도따(Stefano Rodota)는 이 원칙을 되살리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말이다.

근대에 커먼즈를 위한 법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커머너들이 무자비한 시장/국가로부터 지구의 생태계의 파수꾼들로서 행동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삼림헌장에 축배를 들고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기억하자.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위한 영감과 학습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업데이트 : 펠리시티 로런스(Felicity Lawrence)는 『가디언』지에 삼림헌장에 관한 글 「부의 공정한 공유를 위해서는 13세기로 돌아가자」(“For a fairer share of wealth, turn to the 13th century”)라는 글을 막 게재했다.((로런스의 글은 이 글보다 하루 늦은 2017년 11월 8일에 게재되었다.)) 또한 웹진 openDemocracyUK에 실린 <영국사회과학원>(UK Academy of Social Sciences)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훌륭한 글도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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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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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가이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

 



지난 8세기에 걸쳐서 영국정치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두 개의 북엔드가 있다. 한 쪽 끝에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심림헌장 관련 글로 http://commonstrans.net/?p=478,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961 참조.))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영국 총리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가 있다. 삼림헌장은 1215년부터 (1971년까지!) 생존을 위해 공통의 부에 접근하는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했고, 새처는 공통의 부를 훔치고 사유화함으로써 이 권리들을 없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사회제도를 1981년에 도입했다.

런던 소재 SOAS 대학의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최근 저서 『커먼즈의 약탈: 공적인 부를 공유하기 위한 선언』(Plunder of the Commons: A Manifesto for Sharing Public Wealth)에서 이 역사의 양끝 지점을 한데 모은다. 초점은 인클로저에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핵심, 즉 책이 선언하는 바는 요즘의 맥락에서 공적 자산 및 공공 서비스로서 주로 이해되는 커먼즈를 되찾는 것이다.

커먼즈는 영국의 ‘심층 역사’에서 거듭해서 등장했지만 대체로 커먼즈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커먼즈는 보통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의성 있는 정치 쟁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커먼즈를 그 원대한 역사적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시대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풍부하게 다룬 책을 마침내 우리에게 선물한 스탠딩에게 크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커먼즈의 성쇠에 관여된 아주 많은 다양한 가닥들—법률•토지•재산권•경제•문화•지식—을 종합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 커먼즈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적절하게도 스탠딩은 커머너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한 삼림헌장에 관한 장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스탠딩이 서술한 삼림헌장의 역사는 분명,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거의 잊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가장 간결하고 생생한 역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정의하는 많은 유형의 법(률)•인간권리•정치투쟁의 최초의 사례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술이다.

스탠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면에서 삼림헌장은 평민이 최초의 계급 기반의 요구사항들을 직접 혹은 그들을 대신하는 다른 세력을 통해 국가(국왕)에 제기하여 ‘자유인들’의 공통적인 혹은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서 간주될 수 있다. … 삼림헌장은 자유인들에게 생계수단에의 권리, 원료에의 권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정도로 생산수단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였다.

‘기원 서사’에 이어서 스탠딩은 교육•의료•토지•지식 등의 영역들에서 커먼즈가 오늘날 왜 그토록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그는 어떻게 토지 소유권이 부유한 소수들에게 집중되었는지를, 어떻게 공유림들이 목재를 약탈당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공원들과 공공장소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사유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커먼즈•사회커먼즈•시민커먼즈•문화커먼즈 및 지식커먼즈(스탠딩의 범주들)를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국가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적정 가격의 주택을 밀어내고 노숙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동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조금씩 진행되는 사유화’를 통한 국가의료서비스의 쇠퇴에 대해 알게 된다.

스탠딩의 이 저서의 큰 기여는 어떻게 인클로저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만연한 현상—그런데도 정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현상—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탠딩은 영리하게도 단지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유시장주의자들—토리당, 기업들, 투자자들, 새처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쟁점들을 부활시킨다. 『커먼즈의 약탈』은 800년 전에 국왕이 공유지를 몰수한 일에서부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새처/레이건의 잔인한 긴축정책들까지 직선을 그음으로써 사태를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1200년대에 영국 토지의 대략 50퍼센트는 공유지로 관리되었다. 오늘날 대략 5퍼센트가 공유지로 인정되고 있다. 예측 가능한 일단의 정치적 남용사례들과 부의 불평등 사례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중세 왕들과 현대 자본가들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양쪽 모두에게 커먼즈의 절도(竊盜)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진보’는 항상 민중의 부(富)의 강제적 강탈—자유시장 경제가 위장하고 탈명명화(ex‑nomination)하려고 (말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온 어떤 것—에 의존해왔다. 이것이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내가 커먼즈를 이해하는 바와 스탠딩이 이해하는 바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많은 ‘공공재들’과 정부 서비스를 커먼즈로 본다. 나는 고전적인 커먼즈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는 상향식 거버넌스(bottom‑up governance)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국가신탁 커먼즈’(state‑trustee commons) 또는 간단하게 ‘정부 서비스’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가 표면상으로 커머너들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혹은 (앞으로) 공유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해 나는 커먼즈를 국가가 아니라 커머너 자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살아있는 사회 체계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체제를 받아들이는 담론 내부에서조차도 공동자산으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연다. 그런 이야기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가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커먼즈의 약탈』은 두 개의 ‘커먼즈 헌장 조항’을 제안함으로써 커먼즈를 되찾기 위한 야심적인 어젠다를 제시한다. “사적인 부는 많은 것을 커먼즈의 존재와 약탈에 빚지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커머너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스탠딩은 쓰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커먼즈 펀드>(Commons Fund)를 설립하는 것으로, <커먼즈 펀드>의 기금은 사업에 사용된 공동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탁기금은 커머너들에게 배당될 배당금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은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 APF)로 입증되고 『자본주의 3.0』(Capitalism 3.0)을 포함하는, 피터 반스(Peter Barnes)의 많은 저서로 대중화된 구상이다.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은 광범하고 학구적이지만 서사들로 풍성하고 읽는 즐거움도 있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탁상공론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그의 책에는 시기를 딱 맞추는 미덕 또한 있다. 대다수 커먼즈의 운명은 영국정치에서 빠르게 국가적인 논의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만큼 공들여 잘 만들어졌다.




일반지성의 거처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2015)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bitazione del general intellect. Dialogo con Antonio Negri sull’abitare nella metropoli contemporane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4장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A Dialogue between Antonio Negri and Federico Tomasello on Living in the Contemporary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이다.

문[또마셀로]

1년 전에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 시작했고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로 계속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보자.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분석해보자. 이 테마를 고정자본과 ‘노동의 장소’에 일어난 변형을 고려하여 논의해보자. 오늘날 일반지성을 발휘하는 노동의 일부가 재택노동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공장-메트로폴리스의 유비(가치창조 메커니즘이 전체 메트로폴리스로 확대되는 것)를 집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삶과 거주의 기술에서 출발하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네그리]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항상 대략적인 근사치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문제에 접근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살아가기와 노동하기(vivere e lavorare)가 가치의 새로운 형태가 되는 곳이다.  사회의 디지털화와 도시의 컴퓨터화의 출현과 함께 건축술적 요소들과 소통네트워크들이 주택의 짜임새에 삽입되면 집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도시가 노동의 패턴과 관련된 수천 가닥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노동력의 불안정성과 이동성 때문만이 아니라 통신이 거주지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특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지성이 집을 발견하여 어디선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초라하다. 1973년의 위기 이래 도시의 리듬은 더 이상 포디즘의 리듬―8시간 노동, 여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협동의 도시 규모로의 일반화와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노동의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 공장이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일의 장소가 공장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현대적 삶형태를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생산이 이제 삶형태와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말이다. 노동형태와 삶형태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는데 특히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추상적 협동의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는 공장에서 우세했던 물리적 근접성과 크게 다르다. 상사는 물리적 근접성에 규율(훈육)을 행사할 수 있지만, 추상적 협동에는 기껏해야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세하게 지시를 받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자유의 환경에서, 삶과 노동의 체제(una costituenza di vita e di lavoro)에서, 자율적 기획의 장치(un dispositivo di progettualità autonoma)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집에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을 보호처(un riparo, a shelter)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들뢰즈가 말한 ‘훈육에서 통제로’라는 이행 패러다임은 우리가 논의한 공장-메트로폴리스와 집이 노동의 장소가 되는 현상을 서술하고 정의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가?

훈육과 통제를 병치하는 것은 줄곧 사태를 보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삶정치적 영역을 침범한 착취형태를 놓고 볼 때에는 좀 낡은 것이 되었다. 이른바 통제의 기능은 노동의 삶정치적 형상을 앞질러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bios)을 강조하는, 즉 순전한 통제의 규정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강조하는 삶정치적 통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확연한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적(macchinici, machinic) 도구들과 복지구조들 및 화폐와 관련된 조건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을 산업적 훈육과 삶정치적 통제의 구분으로 매개 없이 환원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경향이 가사활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편, 포스트포디즘적 가치창조가 삶정치적 차원과 결합되는 곳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불안정 노동형태에 종속되는 동시에 매우 낮은 임금의 조건에 종속되는 위기의 국면들에서, 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통제의 가장 명시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집은 노동의 장소이자 도구에서 부채라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금융적 착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정치적 영역은 욕망의 확장 공간이자 생산의 새로운 관행의 공간에서 감옥이 되고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한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모였던 페미니즘 투사들과 이론가들이 삶정치적인 영역의 이러한 모호성을 그리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훌쩍 앞서 나갔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삶정치적 영역이 사회적 노동의 핵심적 열쇠가 되기 한참 전에 이 여성들은 노동계급 임금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의 노예상태에서 삶정치적 영역이 행사하는 통제의 복잡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분배가 사회 전 영역을 가로질러 재조직화되어 여성들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것을 투쟁을 통해서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이 이윤에 맞추어진 사회에서 생존만이 아니라 해방 또한 보장하도록 의도된 임금이며 권리였다. 그 성공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나는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시기에 착취와 삶정치적 통제의 조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적대가 그 아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려고 이 사례를 활용할 뿐이다.

 

①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성(양가성)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개별화·착취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화·자율일 수도 있는 ‘장치’(dispositif)를 인지노동이 집에서의 노동이 되는 과정에서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② 메트로폴리스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는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기술적 수단이 집에 있어야 하고 이 수단은 공장의 외부로 이동된 것이기에 일부든 전부든 노동자에 의해 전유된 것이어야 한다. 이는 건축물 구조가 기계가 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거처)의 기계적 구조(una struttura macchinica dell’abitazione)의 문제이다. 여기에 일련의 귀결들이 따른다. ① 특수한 가사노동. ② 집의 기계화. 50년 전만 해도 집에 기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 집에서 애정이라는 외관 아래 여성들이 힘들고 반복적인 일상노동을 강제로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오늘날 완전히 변했다. 기계화의 확산을 통한 변형으로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그 긍정적, 진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이행이 공간과 가족관계의 실질적 변경을 낳았다. 이렇듯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 요소와의 관련에서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담론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해방의 일정한 물질적 가능성이 이 과정에서 주어지고 집에서의 고정자본의 (여성에 의한) 재전유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해방적 공간을 여는 한편 그 공간을 소비에 종속시킨 자본관계의 모호성을 숨기거나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호성은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가는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모호성이며 임금구조에 본질적인 것이고 노동과정에서의 집의 특수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탈본질화되었고(de-essenzializzato) 더 이상 단순히 젠더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남편의 임금에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은 않는 관계의 잠재성(virtualità)에 열려 있다. 이는 자유의 영역은 아니며 단지 해방의 가능성일 뿐이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부채 메커니즘이 더 확연한 성격을 띠고 그 지형에서의 투쟁이 더 의미심장해지는 장소이다. 아다 꼴라우(Ada Colau)를 바로셀로나의 시장으로 만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la Plataforma d’Afectats per la Hipoteca) 같은 경험이 그 사례이다. 이런 투쟁에 대해서 논평을 해 달라.

이제 문제의 핵심에 이르렀다. 집이 노동장소가 되는 경우 (착취장소이지만 동시에 가능한 해방의 장소가 되는 경우) 그 집이 직접 관여되는 주체화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강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이 가사노동을 착취에 종속시켰을 때의 그 이중성과 부합되는 이중성,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일반적인 이중성이다. 두 가지 방향의 착취가 있다. 하나는 이 기계화된 집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착취이다. 다른 하나는 집을 주요 활동장소로 삼는 노동자들이 종종 부채상태에 빠질 때 이루어지는 가치추출 메커니즘이다. 첫째 경우에는 노동자가,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가 소진(소비)된다. 둘째 경우에는 자본이 협동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를 금융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출한다. 그런데 자본의 상대로서 기능하는 노동의 자율성은 항상 증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해방을 위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중적이다. (이전에도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럴 수 있다.) ① 한편으로는 노동장소에서 착취에 맞서는 특수한 투쟁이 있으며 ②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추출주의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이 있다. 착취와 추출의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문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복잡해진다. 이 형상은 생산하는 공통적 생산 활동을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재화의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것, 집단적 가치와 생산적 특이성들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오늘날 추출적 착취란 공통적인 것의 착취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협동 네트워크들의 착취이다. 현재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투쟁은 이 새로운 지형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현재 투쟁하는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는 이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특히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접세와 간접세에 맞서는 싸움들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고 일반화된 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 특히 가사노동의 인정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 부채에 대항하는 싸움(특히 그것이 주택구매와 연관되는 경우)이 있다. 모기지 시스템에 맞서서, 달리 말하자면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 부과되는 불이익에 맞서서 아다 꼴라우가 이끈 투쟁 같은 것들이다. 이는 직접 행동을 통해 수행된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적 감성이다. 이는 더 이상 단지 철거에 맞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적 착취자들을 폭로하는, 철거 작전에 동원된 판사, 집행리(執行吏), 경찰, 은행가들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즉 특수한 재화의 방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많고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의 도전이 가늠된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공간 산출’의 특수한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최근에 널리 퍼진 도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식민화과정에 대한 논의와 교차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위에 이론을 세움으로써 문제들이 보통 잘못 제시된다. 문제가 개별적이면 이론도 개별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리고 건축가들 대다수의 머릿속에서는) 도시가 투기와 부동산 수입에 내맡겨진 대규모 서비스로서 제시된다. 메트로폴리스, 혹은 도시 일반은 식민화 혹은 공간성 산출의 지형이 된다. 공간은 계급적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고 세분된다.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여러 측면들에서 발현된다. 이는 도시 공간의/에서의 장소들(topoi)의 탈영토화 및 위계화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확산되는 시초 축적 같은 것이 추출적 폭력의 결정적 행사를 통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금융의 투기적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둘째로 이 새로운 도시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자의 관점에서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 생각에는 르페브르가 1970년대에 노동자들의 도시 진출을 정확하게 감지한 듯하다. ‘도시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 포디즘 시기의 주장이기에 아마 오늘날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도시의 거시적 계획과 거주되는 공간의 미시사회학 사이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도시의 향유로부터 집의 향유, 주택의 향유,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점을 가졌다. 그 관계를 전도시켜서 ‘삶의 향유’를 도시 전체를 (메트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목표로서 긍정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는 도시 공간 전체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화하였다)의 이론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자주 망각되는 개념을 르페브르는 극히 중요하게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단성으로서의 도시, 조우·지식·즐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개념이다. 물론 항상 변하는 곳이며 또한 불완전한 곳이지만, 도시의 인간적 복잡성에 대한 이 인식은 집 난롯가의 기쁨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투사되었다. 특히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유일하지는 않지만 특히 이주자들)의 거대한 층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근대적 스타일로 기계화되었고 어엿하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을 누린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로스(Kristin Ross)의 훌륭한 책 『꼬뮌의 상상계』(L’imaginaire de la Commune)를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빠리 꼬뮌의 72일을 다음 세기에 새로운 지식과 예술·교육·문학의 창조를 낳는 데 봉사한 사건으로서 기록하는 데 덧붙여서, 그 행위자들의 삶형태에 혁명적 행동이 반영되고 계속해서 번성하는 이레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상상과 행복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시에르)를 낳는다. 이는 도시에서의 그리고 도시의 ‘혁명적 풍요화’라고 할 수 있다. 종속된 민중의, 노동하는 민중 일반의 관점에서 도시공간의 산출을 생각할 때에는 ‘다중의 프로그램’(una programmazione moltitudinaria)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중의 욕구와 특이성의 기쁨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들의 종합에 봉사하도록 도시를 조직하는 능력(una capacità di tenere insieme bisogni della moltitudine e gioie della singolarità, ed organizzare la città al servizio di una loro sintesi)을 가리킨다. 나는 또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들은 도시의 문제에 행복한 집단적인 해결을 보고자 하는 민중의 압박 혹은 욕망에 밀려서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나 억압적 프로그램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노동이 겹쳐질 때, 도시-메트로폴리스의 문제는 생태와 생산의 겹침의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 도시 공간성의 중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로써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는 개념에 이른다. ‘스마트 시티’ 개념은 유한계급의 도시 이미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우리의 도시를 방대한 자본주의적 건설현장으로서 재형성하는 거대한 투자라는 물질적 벡터이기도 하다.

처음 ‘스마트 시티’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처음에는 사이버네틱 시스템들, 그 다음에는 디지털 시스템들이 완전히 가로지르며 재조직화하는 도시를 의미했다. 이 ‘스마트한’, 지적인, 영리한 도시 공간이라는 정의 뒤에는 두 개의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내러티브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낡은 실증주의적 전제들, 19세기의 기계론적인 지배자들의 실증주의인데, 이는 ① 도시가 위로부터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다는 생각과 ② 모든 도시적 관계들이 합리적이고 정보학-사이버네틱의 수단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내러티브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 이는 투기적이 아닐 때에는 상업적이다. 이는 좀 속임수이다. 생산물을 값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는 지성은 실은 통제일 뿐이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노동에 대한 통제, 사회적 착취에 필요한 통제, 질서가 부여된 과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통한 통제이다.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사회’는 내 생각에는 순전한 신비화이지만, 이것들은 소통의 흐름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에서 노동에 부여하는 새로운 중심성과 결부된 실재적 과정 속에 적대의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 소통의 구조적 연관의 증가는 자본에 의해 직접 추출되는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동시에 저항을, 따라서 자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것이 높은 정도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 저항은 의식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부정적 측면들과 연관된 일상적 파열 요소들의 연속(continuità di elementi di rottura quotidiani)으로, 분자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엿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20세기 초기의 1만 명 인구의 작은 시들의 고요함으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삶을 흔들어야 한다. 정신적 인도의 기능에서 교구 목사를 대신하는 텔레비전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고요함이다. 그래서 ‘스마트 시티’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해커들’을 필요로 한다. ‘해커들’이 없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저항과 조우의 가능성은 결코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 시티’의 반대쪽에 도시 주변부, 파벨라, 슬럼, 방리유들이 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공통의 노동 및 저항의 장소들이 가진 생산적 성격과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덧붙일 말은?

이러한 주변부들에 대해 말할 때 가령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작가들이 발전시킨 분석·연구·견해들을 인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구들은 주로 도시에서 빈자들의 소외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위험성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통제에 맞서는 도발로 간주하고 소외된 장소에서의 해방을 위한 ‘장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가난한 장소들은 소외가 아니라 도시 삶과 메트로폴리스 노동의 공통적 질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삭제하기가 힘든 어떤 것이다.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추방자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현상학들이 있으며 이것들 모두 방리유를 총체적 배제의 장소들로 본다. 방리유 연구자로서의 나의 경험은 항상 총체화를 피하도록 나를 이끌었으며 노동 능력의 풍요로움과 공존 및 협동의 능력(둘 다 창조적이다)이 항상 나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 방리유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흡수되거나 정기적으로 거부된다. 기업들은 노동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재화(특히 문화적 재화, 음악, 삶형태 등) 둘 모두의 관점에서 이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과 추방이, 흡수와 배제가 계속적으로 교대되며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축적된 비참과 반란의 결단 사이에서 방리유가 띠는 적대적 중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정치적 리듬은 갈등에 차 있으며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다. 삶이란 그 내부에서도 갈등으로 차 있으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당신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놓은 추출주의는 맑스가 ‘시초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부단함과 연관이 있다. 이 시초축적을 맑스는 잔인한 유혈의 수탈 과정으로 묘사한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와 유사한 폭력이 가치 추출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대 메트로폴리스가 행사하는 고유한 폭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포스트포디즘 메트로폴리스의 일부 이미지들을 왜곡했다. 특히 종종 반복되는 시초축적과의 유비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논의한 집의 특이화는 전적으로 추출 메커니즘들 내부에서의 일이며 금융자본의 순환에 메트로폴리스가 포섭된 상황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추출주의에 강하게 대립하는 다양한 반응들, 다양한 인식론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체제에서 ‘실질적 포섭’이라고 불렸던 것―가치화 과정의 전일적이고 밀도 높은 부과―이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명백한 공간적 불연속성들과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로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새로운 ‘시초축적’에 대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형식적 포섭’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구조의/구조 내에서의 최근의 이행이 부과하는 조건들 내에서의 일이다. 즉 원래적 의미의 시초축적 단계, 단순협업 단계, 그리고 대공업 단계 이후의 일이다. 만일 ‘시초축적’과 ‘형식적 포섭’을 상기시키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맑스가 150년 전에 서술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경된 새로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폭력이 행사되기는 하지만, 이 폭력은 지역 현실에 의해서, 생산적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고 상대화되고 조건지어진다. 이 생산적 협력은 영토 위에 분산된 노동력으로부터 도구들을 끌어온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일반지성과 대면할 때, 일반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 조직화와 대면할 때 가공할 한계를 만난다. 생산도구들 및 금융도구들과 아울러 치안도구들과 문화적 도구들을 통합적으로 이용하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통제가 재조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포의 산출이다. 띨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띠며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는 이 공포가 필시 현대 메트로폴리스에 행사되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 전염병에 대한 공포, 오염에 대한 공포 등등. 추출주의는 가장 최근의 폭력 형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고도의 폭력형태이며, 이전 단계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폭력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에는 불균형적인 결과를 낳는 폭력이다. 요컨대, 이 폭력은 예전의 내러티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다중의 힘 또한 자본이 명령을 발휘하기에 점점 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특히 그렇다.

 

젊은 맑스는 『자본론』24장을 쓰기 전에 이미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공유지였던 땅에서 농민들이 나무를 훔쳐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쓰면서 맑스는 사용의 문제, 민중의 관습적 권리를 언급했다. 이 사용의 문제가 그것이 공통적인 것과 가지는 관계라는 시점에서 추출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어떤 시의성을 가질 수 있는가?

사회형성체는 생산과정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산물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에 동반된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를 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통적인 것이 추출에 선행한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통적인 것 없이는 착취란 없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 노동을 공통화하는(comunalizzare il lavoro)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노동은 삶정치적 노동이다. 즉 얼마나 공통적이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협동적인지에 비례하여 가치를 획득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우리는 맑스가 시초 축적 및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 관련하여 분석한 것과는 정반대의 과정 속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순은 사적 부문의 명령을 받는 공적 부문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할 긴급한 필요 아래에서 조직된다는 데 있다. 공적 부문은 더 이상 사유화를 막아내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아니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를 위한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것(대법원)이 사적인 것(해당 다국적기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것(공간, 활동)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때 공적 부문은 보완적이었고 사적 부문의 보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적 부문이 손을 뻗지 않은 곳―건물 인프라, 철도, 공항, 학교, 병원 등―에서는 공적 부문이 앞서 나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서비스 구조들―자연 공통재를 통합한 공통적인 것―은 공적 부문에서 제거되어 다시 사유화되게 된다. 공통적인 것이 더 강한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사유화를 지향하는 명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의 지형이다.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투쟁의 지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이 세 번의 대화의 결론짓는 물음이다. ‘메트로폴리스적 정치’의 특수성을, 이 ‘공통의’ 총체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의 특수한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날 건축가들이 점점 더 ‘현장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노동자주의적 선택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그들의 작업 속으로 옮겨넣으려고 하는 동지들이 건축 분야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우렐리(Aureli)와 그의 그룹이다. 이들은 해방의 필요(다중의 욕구와 정치적 투쟁이 욕구)와 관련하여 보조적인 혹은 힘을 부여하는 위치에 스스로 자리하도록 건축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지금까지 건축의 보조적 성격은 항상 거대 부동산 자본주의의 특권으로서였다. 이제는 그것이 전문적 수준에서조차도 공통적인 것의 규범에 따라 지을 (순진하지도 않고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필요를 의미한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협동과 자유, 평등과 유대를 장려할 가능성, 자본이 도시에 부과하려는 강제된 동질화로부터 도시를, 그 특이성들의 다수성을 구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간과 이러한 매개변수 내에서 예를 들어 생태적 싸움은 자연의 방어로부터 ‘삼림헌장’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구축으로 돌아간다.[삼림헌장에 대해서는 이 블로글의 세 글 참조―정리자] 자본주의적 계획에 대안을 제안하는 방법은 여기서 적대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바로 이 지향 위에서 다중은 자신을 물리적이고 도시적인 캐릭터로서 조직한다. 훌륭한 옛 노동자주의의 관점을 따라서 나는 투쟁이 항상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가 중심적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급투쟁의, 그리고 또한 사회적 투쟁의 특권적 지형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실질적으로 공장인데, 다만 여기서 공장은 일반지성의 공장이다. 일반지성의 노동력은 노동계급의 노동력이 줄곧 그랬듯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유연하고 힘차다. 필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자. 나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미시와 거시가 기능적 관계에서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거칠게 맞서고 있음을 부각하면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나는 자본이 메트로폴리스에 부과하는 지배관계가 어떻게 저항을 받고 차단되고 대체적인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또한 고정자본에의 종속이 어떻게 전도되고 소외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슬픈 감정보다 우위에 서는지를 여러 수준에서 보려고 했다.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 나는 도시-메트로폴리스에서 추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가능한 공간 또한 보게 되었다. 기술적 변형에 의해 강화된 생산적 협동은 착취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강화되면 적대적 조직화와 근본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의 분석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2 이상이 극히 밀집된 메트로폴리스 지역에서 산다. 마키아벨리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서 서술했던 인류의 변형―‘짐승’에서 ‘시민’으로―이 이 지역에서 실현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현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의 생산자는 바로 자신들임을 발견하는 것, 도시에서 해석하고 건설하고 행동하는 데 대한 열쇠를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취받는 생산자의 상태에서 창조하는 생산자의 상태로의 유턴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쫓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길은 공통적이 되기(essere-comune)의, 공통적으로 살기(vivere in comune)의 근본적 변형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 자체가 혁명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삶형태(forme di vita mutualistiche), 사회적 연합들, 조우와 행동의 실험실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메트로폴리스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도시자치주의(자치도시들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는 프로그램)가 ‘어디서’를 가리켜준다. 이는 일반적이지만 종종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공장 투쟁과 옛 스타일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을 추출적 자본을 공격하는 양태로 옮겨놓기―이것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내일의 꼬뮌주의로 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맑스적 통찰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노동의 척도가 되기를 그치고, 노동이 부의 척도가 되기를 그칠 때, 그때 부는 더 이상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각자에게 진정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공통의 부에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꼬뮌주의 아래에서만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공통의 호화로움만이 진정한 호화로움일 것이다. [영역자 주석: Kristin Ross, Communal Luxury: 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Verso, London, 2015, p. 142.]

 

2015년 6월 파리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 [옮긴이]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9월 14일자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 위주로 서둘러 옮겨야 했기 때문에 정밀하게 옮기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누가 왕의 삼림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의미, 커먼즈 그리고 법

옮긴이 : 정백수

 

나는 요즘 법과 커먼즈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전략 메모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를 4회에 걸쳐 게시하기도 했다. 다음 강연은 9월 8일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한 것으로서 예의 메모와 짝을 이룬다. 테마는 ‘마그나카르타 800주년 축하와 그것이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가지는 의미’이다.

 

이 강연의 비디오 판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더불어 나의 동료 미셸 보웬스의 P2P개발에 대한 강연도 볼 수 있으며, 질케 헬프리히가 사회를 본 청중과의 토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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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800주년과 커먼즈에서 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오늘밤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아직도 경축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이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잊은 것에 대해서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입니다.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에 우리가 경축하는 것은 1215년 잉글랜드 러니미드(Runnymede) 들판에서 있었던 평화협정의 조인입니다. 이 협정으로 많은 경멸을 받은 존 왕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barons)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종식되었습니다. 휴전으로 의도되었던 것은 곧 거버넌스의 적합한 구조에 대한 더 큰 공식적 진술로 간주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중세인들의 생활방식을 많은 고어 단어들로 서술하는 가운데서도 이제 왕의 제한된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권리 및 자유권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술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긴 내전 이후에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인 것은 믿을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일이기에 쉽사리 망각될 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그나카르타의 지속성과 반향은 집중된 힘에 대한, 특히 왕권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권위가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되고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이 더 높아지는 새로운 순간을 나타냄을 상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억눌린 사람들과 동일시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권리와 자유권들을 보호한다고들 말하는, ‘법’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왕들조차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미국 법조협회는 1957년에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말이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를 러니미드에 세움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했습니다. 거대한 공적 행사들에―특히 올해에―판사들, 정치인들, 법학자들 및 저명한 비공식적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헌법에 기반을 둔 통치와 대의민주주의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는지를 공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말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마그나카르타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서로 연결되어있지만 구분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번 이야기는―이것을 ‘근대 시장/국가의 승리’라고 부릅시다―지금 제가 막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보통 유명한 엘리트들이 입헌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과 마그나카르타의 긴밀한 연관,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이념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1번 이야기는 입헌민주주의와 대의제가 마그나카르타에 담긴 권리들을 방어해줌으로써 실제로 자유와 법의 용감한 성채로서 기능한다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물론 대헌장은 왕정, 부족 제도, 그리고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것들은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한때 우세했던 것들입니다―너머로의 주목할 만한 전진을 나타냅니다.

저 자신은 마그나카르타 이야기의 무시된 측면, 그다지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2번 이야기라고, 아니면 ‘커먼즈를 위한 법’(Law for the Commons)이라고 부릅시다.1 이 무시된 두 번째 이야기는 800년 전에 일어난 마그나카르타의 조인을 핵심으로 한다기보다 그 원칙들을 민중의 삶 속에 현실화하는 지속적이고도 끝나지 않는 투쟁을 핵심으로 합니다. 2번 이야기에는 공직적인 주류 이야기가 가진 지적인 화려함이나 성스러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더 세속적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즉 커머너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2번 이야기의 본질적 핵심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서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기능적인 법적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2번 이야기는 ‘누가 왕의 삼림2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삼림’이 무슨 말이냐? 삼림은 우리 것이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 것이었다.‘ 커머너들도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망각된 유산입니다. 삼림을 사용할 권리, 자치 규칙들을 스스로 조직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유권들3과 권리들.

이 모든 것이 성문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이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기나긴 전통에 기반을 둔 권리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13세기의 커머너들이 거의 모든 것을 숲에 의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요리와 난방을 위한 나무를 숲에서 해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을 고기를 숲에서 잡았고 물고기를 강에서 잡았습니다. 소나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숲에서 도토리와 여러 식물들을 채취해왔습니다. 숲이 곧 우주였습니다. 봉건 영주들이 소유한 장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용 관습에 의해서 커머너들에게도 권리가 부여된 장소였습니다. 숲은 또한 그들의 상상력, 문화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형태를 부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존 왕이 삼림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많이 전유하기 시작하자, 이것이 봉건 귀족들에게만 심각한 압박을 준 것이 아니라―물론 봉건 귀족들은 곧 반발하여 반격했습니다―커머너들의 생존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이 숲을 탈취한 것은―이는 왕의 주장관들(sheriffs)에 의해 무자비하게 시행되었습니다―가축들이 숲에서 방목될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돼지들이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고, 커머너들이 나무를 해와서 집을 고칠 수도 없었으며, 과일과 물고기도 채취하고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댐이나 개인이 만든 방죽길 때문에 배들이 강을 오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이) 잉글랜드에서 길고 격렬한 내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마그나카르타라고 알려진 휴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평화의 조건은 왕의 절대 권력에 일련의 법적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민중에게 일련의 정해진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의 이야기에서 보통 잊혀지는 것이 2년 뒤에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자매 문서인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입니다. 이 문서는 커머너들의 관습적 권리들을 명시적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숲의 특수한 사용을 보장하는 일종의 인권 협정입니다. 돼지방목권, 에스토버4로서 땔감을 채취할 권리, 개방된 숲 사용권, 토탄채굴권 등 다수의 권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요컨대, 삼림헌장은 사유화에 가해진 최초의 법적 제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공식적으로 경축하는 자리에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로 커머너들을 이렇게 인정한 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인간의 생존에 근본적인 집단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공식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 헌장은 왕의 주장관들이 왕의 자의적인 종획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체포, 상해, 고문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오늘날 ‘국가의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들로부터 커머너들을 보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마그나카르타는 당시 그 원칙들을 스스로 시행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은 초월적 법5을 자기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정지시킨 결과로 나올 사회적·정치적 항의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1536년에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수도원들을 없앴습니다. 라인보에 따르면 이는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급 즉 종획을 수단으로 하여 땅을 취하고 땅을 수익을 내는 데 사용할 젠트리6가 들어설 문을 열어주었다”라고 라인보는 쓰고 있습니다. 수도원들의 해체는 잉글랜드의 토지를 상품으로 전환시킨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한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토지가 마법적 성격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17, 18세기에 의회는 출현하는 젠트리 계급을 위해서 4천 건 이상의 종획을 승인했으며, 그리하여 젠트리들에게 잉글랜드의 공유지 가운데 약 15%를 사적으로 강탈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종획들은 많은 커머너들이 토지와 맺고 있는 깊은 연관을 파괴했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산업화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임금노동자들, 소비자들, 거지들로 구성된 새로운 민중 계급도 창출되었습니다. 커먼즈를 박탈당한 민중은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서화된 법의 지고함은 법에 더 큰 지속성과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는 성문법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문화된 형식적 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거버넌스 규칙들이 더 영속적이고 심지어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분명 왕을 포함한 마그나 카르타의 옹호자들은 이런 생각을 장려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법이 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적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때―능동적 합의가 전문적 법률가들, 정치가들, 판사들에 의해 유린될 수 있을 때― 이는 새로운 종류의 폭정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성문법은 이러한 문제점으로 항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합법성(legality)과 정당성(legitimacy)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의 법인류학 교수 에띠엔느 르 로이Étienne Le Roy가 주장한 바입니다.) 성문법은 법을 인쇄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인공물―이는 전문적 법률가들과 법학자들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일단의 규칙들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로 만듦으로써 합법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통치 영역을 창출했습니다. 법 자체가 해석과 조작이 가능한 외적 대상, 민중들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법은 절대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떠받들어지는 우상, 엄격한 준수를 의무화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문화된 법은 법률가들과 판사들이 법을 해석하는 성직자들이 되면서 문구들의 조작과 속임수가 훨씬 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단지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그 외피가 형식적이고 문서화된 법과 일정한 그럴듯한 관련이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얻어지는 ‘정당성’은 축출되었습니다. 왕이 선언하는 바의 ‘법’은 자기충족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마음대로 시행할 강제력에 대한 독점권을 왕 개인이 (정말로 “개인”입니다) 편리하게 보유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마그나카르타의 거대한 원칙들이 인권의 보증자로서 줄곧 신뢰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미 잉글랜드에서 왕이 카톨릭 수도원들을 종획한 것과 17, 18세기의 종획운동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시대에 와서는 입헌 민주주의가 특히 9/11 이후에 법의 적정 절차, 공정성, 인권과 커머닝7의 용감한 방어자가 아님을 목도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권자―초국적 기업들과 손을 잡은 국민국가―는 입헌 민주주의와 사법 심사제의 제한장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회피하는 많은 길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의 자칭 국가안보가 어떻게 인신보호영장의 권리를 압도해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대와 CIA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수인들로 하여금 적정 법절차를 거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많은 중동 지역에 수천 번의 드론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사법 심리를 거치지 않은 무법의 사살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더 나열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미 수립된 입헌 통치와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이를 말없이 방조했으며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능욕하는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의 주권자들인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시장/국가―이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거대한 양의 불협화음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은 우리의 계몽된 근대적 질서를 관리하는 데서 수행하는 인정 많은 역할로 인해서 머리 위에 광륜(光輪)이라도 얹어놓을 필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올해 초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 유력한 정치인들과 골드만삭스, 바릭골드8 및 기업화된 로펌들에서 온 기업계 고위 인사들이 모여서 한 일이···다름 아닌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법치)를 경축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읍니다.9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마그나카르타에 매료된 것은 주로 염원의 표현이었다고 혹은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유용한 표지기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정말로 길들여져 있으며 인류에게 복무한다고 우리를 안심시키고―혹은 그렇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고―싶어 합니다.

 

물론 사실 국가에 의해 도움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는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있어서 존 왕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맹렬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국가와 기업계는 우리의 공통의 부를 ‘합법적으로’ 사유하는 데 법을 사용하기 위해 공모하기 일쑤입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부문의 약탈행위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지구의 대기가 주요 산업들, 특히 화석연료를 파는 산업들에 의해 무상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며 이에 대해 국가는 거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바이오테크 회사 및 제약회사들은 유전자에서 박테리아를 거쳐 양(羊)에 이르는 생명체들을 특허법을 통해 사적인 상품으로 전환시키도록 허용받습니다. 투자자들과 국부펀드들10이 전지구적 토지수탈의 일환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넓이의 땅을 사들여서 커머너들을 축출하고 미래의 기근(飢饉)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회사들은 바다에서 생선과 광물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광산회사들과 임업회사들은 야만스런 자국 자원추출11의 기획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풍경들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어, 색깔에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상표로 등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2초 지속되는 소리 조각들도 저작권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존 왕의 시대에는 종획이 거의 숲에 대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생명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종획의 대상입니다.

 

앞에서 제기한 ‘누가 왕의 숲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법은, 헌법·선거·법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커머너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주권자에 맞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대의 주권자들에 의해 포획되고 부패되었습니다. 주권자의 위치에 있는 시장/국가는 시장교환의 논리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을 집요하게 통제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부를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관리규칙들을 고안할 여지가―법적·문화적·경제적으로―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들과 그들 산하의 공복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사회적 정당성을 참칭하는 형식화된 합법성의 체계를 관리합니다. 내가 ‘토착법’(vernacular law)이라고 부르는 것―보통 사람들의 도덕적·정치적 권위, 거리의 규범들과 가치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합법성이 종종 사용됩니다. 한때 마그나카르타에 의해서 선언된 ‘커먼즈의 법’은 시장/국가의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인간들의 전(前)정치적 주권의 표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국가가 커머너들에게 속하며 국가에 선행하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기업들은 법적으로 인격으로 인정되어 실제의 개인들처럼 모든 시민권과 자유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커머너들과 지구는 감정이 없고 존엄이나 권리도 없는 자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나요? 마그나카르타에 포함된 삼림헌장이 커머닝의 정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닝을 범죄의 범주에서 떼어내어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사실 민중이 마침내 스스로를 다스릴 자유를, 공정하고 정당하며 그들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규칙들을 고안할 자유를 형식적 법의 형태로 현저한 정도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머닝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삼림헌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인정 받은 덕분에 왕은 절대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형식적 성문법 아래에서 커머너들은 주요한 도덕적 권리, 인간적 권리,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영원한 관습적 권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혹은 적어도 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버넌스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전진이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 

그런데 여기서 마그나카르타가 우리에게 다음의 과제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합법성을 정당성과 다시 통합할까요? 어떻게 우리 시대의 주권자인 시장/국가로 하여금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내 생각에 성문법을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공동체의 토착법과 다시 통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법적 구조를 다시 발명하고 그럼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현대에 실현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법을 다시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마그나카르타와 국가법의 전통에 의존해야 하면서도 민중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칙들을―민중이 보기에 공정하고 적절하면서도 정치체의 더 큰 원칙들을 따르는 규칙들을―만들 공간들을 의도적으로 분배해줘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민중이 커머닝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숲”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숲의 헌신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통찰과 상상력에, 그리고 관습적인 사회적 관행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공유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사물을 관리하는 고유한 관습들과 전통들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은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이 민중의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부른 것을 존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커먼즈를 관리하는 일과 병행하여 생기는 주관적 감정들, 정서들, 자긍심,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항상 자신의 공리주의적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계산하는 합리적 물질주의자들로만 보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커머닝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형식적 합법주의를 넘어서는 유형의 법이라는 점입니다. 커머닝은 자신들의 계속 변하는 지역 상황들과 씨름하는 커머너들로부터 출현합니다. 커먼즈 기반의 법은 내재적인 실천적 현실이지 고정되고 영원한 초월적 이상이 아닙니다. 라인보가 쓰듯이,

 

커머너들은 먼저 권리증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 거름을 줄 필요가 있는가? 거기에 무엇이 자라는가? 그들은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다. 둘째,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심어져있다. 그것은 밭, 고지, 숲, 습지,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실천 속에 내재한다. 공통권은 노동에 의해서 가지게 된다.12 

이는 법 자체에 대한 매우 상이한 존재론적 이해입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은 번쩍이는 추상들이나 문자로 된 문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머너들이 경험하는 바의 껄끄러운 개별적 현실들에서 시작하며, 커먼즈들이 자치의 체계를 고안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형식적 성문법으로 도약하면서 어떤 원리들을 문명의 기억에 소중히 안치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약은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졌습니다. 기억과 커머닝의 점진적 상실이라는 대가를.

마그나카르타를 채택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존 왕은 종종 의구심을 가진 커머너들과 국왕봉신들에게 자신이 계약을 실제로 지킬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많습니다. 존 왕은 민중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종종 마그나카르타를 화려하게 재공표하여 마그나카르타가 여전히 나라의 법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물론 종이 한 장으로 된 마그나 카르타는 사회의 문화와 정치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만큼만 강했습니다. 그리고 추상으로서의 마그나카르타는 지배자의 권력남용(abuses)을 중지시키는 데서 제한된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을 역사는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특히 삼림헌장을 우리 시대에 부활시키는 데서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커머닝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법체제를 고안하는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공간들을 뒷받침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커머닝은 중세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단지 골동품과도 같은 것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커머닝은 늘 갱신되고 있으며 점점 더 풍요롭고 튼실해지고 있는, 오래된 사회활동입니다. 지금 세계 전역에서 커머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커머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제 동료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저는 최근에 새로운 선집 『커머닝의 패턴』(Patterns of Commoning)을 같이 엮는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책은 10월에 영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출판될 것입니다. 50편 이상의 독창적인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협동하고 공유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민중의 욕망을 탐구합니다.

이 책은 토착 농업 커먼즈들과 공동체 숲들, 하이테크 팹랩들(FabLabs, fabrication laboratories)13과 케냐의 대안통화들, 오픈소스 농장설비 커먼즈들과 커먼즈들의 공동 맵핑(mapping), 기타 많은 것들을 서술합니다. 이 책은 또한 주류 경제학의 존재론적 전제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머닝이 가진 내적 동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단순히 이러저런 형태의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지리, 역사,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복합적이고 진화하는 존재입니다. 이 선집은 2012년에 출판된 선집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의 자매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2년에 걸쳐 『커머닝의 패턴』을 엮는 작업을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커머너들이 국가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커먼즈를 믿음직하게 보호할 고유한 법을 발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엄밀한 형태의 ‘커먼즈를 위한 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커머너들이 과연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법들을 발명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실제로 법 혁신이 지금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국가법 안으로 들어가서 커먼즈 법을 일구어낸14 초기의 사례들 가운데에는, 소프트웨어 관련으로는 GPL(General Public License)이 있고 내용 관련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양자 모두 공유된 부를 보호하는 법으로서 기가 막힌 묘수들입니다. 이 라이선스들은 누구라도 공유된 코드, 글, 이미지 혹은 음악을 탈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를 해나가면서 저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의도된, 말 그대로 수십 가지의 매력적이고 영리한 법의 묘수들을 만났습니다. 예를 들어 토착민들의 농경제적 지식과 전통을 보호하도록 의도된 ‘바이오문화 프로토콜들’(biocultural protocols)이 있습니다. 협동의 원칙들에 제정을 대어 사회적으로 쓰이도록 하기 위한 협동조합법의 새로운 형태들도 존재합니다. 수압균열법(hydro-fracking)15, 유전자조작 농산물들 및 기타 기업에 의한 종획들에 반대하는 지역 공동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법적 기획들도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stakeholder trusts)로 하여금 대기에서 광물을 거쳐 지하수에 이르는 공통재를 보호하도록 하는 제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활동, 이윤을 목적으로 하거나 관료적 성격의 활동에 맞서는 것으로서16 커머닝을 후원하는 목적으로 발명되고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저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커먼즈를 위한 법적 혁신의 사례들 60개 이상을 개관하는 긴 전략메모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덕분에, 사람들로 하여금 커먼즈 기반 법의 수십 개의 사례들에 접근하게 해주는 온라인 위키도 존재합니다. 이 자료들은 ‘커먼즈를 위한 법’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대화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에서 적집 나오며, 인권과 커머너들의 욕구를 깊이 존중하는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마그나카르타처럼 이 원칙들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단지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는 발상 및 그 발상의 변주된 형태들이 우선 우리 시대의 맥락에 맞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법과 거버넌스의 체제들이 엉망인―대중의 존중을 받지 못하며, 민중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때에 커머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은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커먼즈는 공정하고 개방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시장/국가 질서가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존엄·존중·평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는 또한 민중과 더 밀착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민중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생태계를 지키는 데서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존 왕이 강압에 의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우리시대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창조적인 법적 묘수,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다시 발명하는 일입니다. 법 형태의 장대한 언표만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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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특별히 유망한 법 기반의 커머닝의 한 영역은 디지털 영역입니다. 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오픈 디자인과 제작, 팹랩스 및 해커공간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원장, 그리고 도시들을 바꾸고 있는 개방된 데이터 네트워크들의 세계입니다. 이는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코드 자체가 법의 한 형식이 되며, 커머너들은 (종종은 국가의 법에 항의하며)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를 더 논의하기 위해서, 저는 연단(演壇)을, <P2P 재단>의 창립자이자 <커먼즈 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의 일원인 동료 보웬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넘기겠습니다. ♣

 

 

 

 

 

 

  1. ‘law for the commons’를 어색함을 감수하면서 굳이 “위한”을 넣어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고 옮긴 것은 볼리어가 서두에서 말한 전략 메모에서 ‘law of the commons’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볼리어는 법은 커머닝(common)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삼림’은 ‘forest’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forest’는 ‘woods’와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woods’는 말 그대로 자연적 숲을 가리키며, ‘forest’는 법적 개념으로서 ‘woods’ 이외에 목초지, 연못 등이 더해진, 울타리 친 소유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어떤 숲을 법적으로 소유지를 만드는 것 ‘forestation’이라고 하며, 반대로 소유지를 푸는 것, 그리하여 커머너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deforestatio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 지음, 『마그나카르타 선언』, 갈무리, 2012 참조. [본문으로]
  3. ‘자유권들’은 ‘liberties’를 옮긴 것이다. 당시 ‘liberty’는 주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되는 구체적인 권리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복수형으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라인보는 ‘에스토버스’(estovers)―복수형이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자급 일반을 가리킨다.”(69쪽) [본문으로]
  5. ‘초월적’이란 말은 커머너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져 시행되지 않고 국가의 법으로 커먼즈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커먼즈에 부과됨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6. ‘젠트리’는 일반적으로 작위를 갖지 않은 지주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7. ‘커머닝’(comnoning)은 동사 ‘common’의 동명사이다. 동사 ‘common’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커머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강연 내에서 설명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8. 바릭골드(Barrick Gold Corporation)는 금광을 채굴하는 미국의 광산기업이다. [본문으로]
  9. 지금 볼리어는,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자들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기는 자들인데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마그나카르타의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법의 지배’를 경축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본문으로]
  10.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SWF)는 정부 자산을 운영하며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기관을 말한다. 사실 데이빗 볼리어는 “sovereign investment funds”라고 했는데 이는 국부펀드의 발전된 형태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 맥락에서는 무시할 만하고, “sovereign investment funds”는 아직 번역어가 정착되지 않았기에 이미 정착된 ‘국부펀드’를 사용하여 옮겼다. [본문으로]
  11. ‘자국 자원추출’은 ‘neo-extractivism’을 옮긴 것이다. ‘extractivism’에는 ‘채굴주의’라는 번역어가 쓰이는데, 문제가 있다. 영어의 접미사 ‘-ism’은 우리말로 ‘-주의’ 혹은 ‘-론’로 옮겨지는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말 ‘-주의’나 ‘-론’은 이론, 학설, 주장, 견해 등에 쓰인다. 영어 ‘-ism’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만 이 이외에도 여러 다른 의미가 있으며 이는 ‘-주의’나 ‘-론’으로 옮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비판’ 혹은 ‘비평’으로 옮기는 ‘criticism은 완료된 행동이나 결과를 나타낸다. ‘exorcism’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야만’으로 옮기는 ‘barbarism’은 특정 집단의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낸다. 산업화 혹은 자본주의와 연관된 ‘extractivism’은 자연자원을 대량을 추출하여 가공하지 않은 채 혹은 제한된 정도로만 가공하여 수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는 식민주의 및 신식민주의적 약탈과 연관된다. ‘neo-extractivism’은 기본적인 성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원추출 및 수출의 주체만 후진국 자국의 정부(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로 바뀐 것이다. ‘extractivism’이나 ‘neo-extractivism’의 번역어는 이런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어야 한다. 여기서는 ‘-주의’를 빼고 전자는 ‘해외 자원추출’로, 후자는 ‘자국 자원추출’로 옮긴다. 만족스런 번역어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전까지는 임시로 여기에 만족하기로 한다. ‘채굴’은 광물에만 국한되는 말인데, ‘extraction’은 광물자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원래는 사탕수수에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채굴’을 쓰지 않고 더 넓은 ‘추출’을 택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마그나카르타 선언』 75쪽. [본문으로]
  13. 디지털 장치들을 제작하는 소규모 작업실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4. 볼리어는 사실 “Some of the earliest legal hacks of state law”라는 말을 썼다. 이는 만일 직역한다면 ‘국가법의 법적 해킹의 초기 사례들 가운데 일부’ 정도가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여기서 “hack”이란 단어가 맥켄지 워크가 그의 『해커 선언󰡕에서 제시한 ‘해킹’ 개념을 (‘hack’을 ‘hacking’과 같은 의미의 명사로 사용한다) 받아서 쓴 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직역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의역해놓기로 한다. 워크의 ‘hack’에 대해서는 http://trustsun.net/xe/bookreading/10096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5. 이는 압축된 액체를 바위에 나있는 구멍에 주입하여 바위에 균열이 가게 함으로써 생성되는 틈들을 통해 가스나 석유 등이 더 잘 흘러나오게 하는 기술이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수압파쇄법’이라 옮겼는데, 바위를 부순다기보다는 균열을 내는 것이기에 일단 ‘수압균열법’으로 옮기기로 한다. ‘htdro-fracking’ 말고 ‘Hydraulic fracturing’, ‘hydrofracturing’, ‘fracking’, ‘fraccing’으로 적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원문에는 “as opposed to business, bureaucratic or nonprofit activities”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nonprofit”은 “for-profit”의 오기인듯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