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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적 정치는 좌파에게 나아갈 길을 제공할 수 있는가?

저자: Sofa Saio Gradin
원문: Could pre‐figurative politics provide a way forward for the left? (2020년 1월 19일)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분류 : 번역
옮긴이 : 민서
설명 : 그래딘(Saio Sofa Gradin)은 레이크스태드(Paul Raekstad)와 함께 『예시적 정치: 미래의 오늘을 구축하기』(Prefigurative Politics: Building Tomorrow Today)의 공동저자이다. 지금 페이퍼백으로 나와 있다.


영화 <캣츠>(Cats),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시즌 8 그리고 2019년에 일어났던 많은 다른 일들처럼 좌파 측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 총선이 형편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훨씬 더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당이 의회 의석 650석 중에 365석을 얻었다. 이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토리당 의원들이 간통으로 집행유예를 받거나 지도부와의 불화로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의석수가 과반수를 훌쩍 넘겼기에 토리당은 제1당으로 남을 것이다.

2012년 이후로 영국에서만 1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미리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초래했고, 장애인들과 이주자들에게 아주 적대적이어서 그들 가운데 일부를 자살로 내 몰았으며, 그리고 자신들이 내건 위험할 정도로 한정된 환경 공약들을 이행하는 데도 실패한 정책들을 유지하고 있는 정당에게 이것은 완전한 승리였다. 한편, 노동당에게는 영국 국민들 대다수가 지지한 경제 정책들로 빼곡한 성명서가 있고, 엘리트주의적인 전통과 관계를 끊은 지도자가 있으며 노동당의 정직함이 돋보이는 선거 광고들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엘리트 권력을 위협할 때에 맞닥뜨릴 장애물들언론 편향에서부터 참정권 박탈 및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이르기까지―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 참담한 선거였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이것으로부터 배우고 정부 밖에서 조직화를 계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좌파에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당신에게 제공하도록 할 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증가한 것이다. 이 생각에서 가장 희망적인 조류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옮긴이]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97, http://commonstrans.net/?p=740, http://commonstrans.net/?p=1061 를 참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미래에 보고자 원하는 사회를 ‘지금 여기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정치이다.

노동당이 승리를 거머쥐었더라도 영국이 더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보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존 맥도널(John McDonnell)도 지적했듯이 가장 사회주의적인 정부들도 선거에서의 승리까지만 갈 수 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현장에서 조직화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노동자들, 거주자들 및 공동체 일원들—이다. 사회적 위계와 사회적 억압들은 정부정책만으로 초래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위계와 억압들은 법과 같은 형식적인 제도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행동들, 전제들 및 관계들 모두 다를 통해서 유지된다.

#미투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성희롱과 성폭행은 수십 년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허용되었고 심지어 몇몇 영향력 있는 남성성의 형태들에서는 권장되기조차 했다. 이것이 이제 사회운동들 덕분에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공식적인 정책입안을 거쳐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계급위계질서를 끝내고자 했지만 결국 극심한 분열•부패•편협성으로 끝나버린 역사 속의 많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시적 정치는 이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략들에 오늘날 우리가 붙이는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으로 우리의 공식적인 규칙과 정책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 규범 및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의롭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수학을 하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더 비슷한 활동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정치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시적 정치는 우리가 순수한 사고나 이론적인 규칙설정만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단지 추진력과 관련된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회이론에 빠삭하기 때문에 집단적인 의사결정에서 저절로 사려 깊고 마음이 넉넉한 참가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가부장제에 대한 모든 이론적인 분석을 읽었다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이 태어난 그날 이후로 배우고 연루되었던 모든 가부장적인 행위들•규범들•가설들에서 갑자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시주의(prefigurativism) 이념은 우리가 미래의 주류로서 보고자 하는 행위들 및 관계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새롭고 더 나은 행위들과 조직 구조들을 실험하고 배움으로써 우리를 재훈련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로 처음 사용된 1970년대 이래로 예시적 정치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이 슬로건은 정치를 단지 정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직면하고 있는 억압의 형태들—예를 들어 성폭력, 성희롱, 무보수 가사노동—을 은폐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적인 태도에 반대했다. 우리 개인의 삶과 일상의 행위들이야말로 실제로 정치투쟁의 현장들이다.

예시적 정치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권력과 의사결정의 중요한 많은 측면들이 정당이나 공동체 집단의 공식적인 정책들과 구조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 마시는 시간 동안에 생기는 일, 잡담을 할 때 생기는 일, 혹은 모임이 끝나고 생긴 설거지거리에 일어나는 일은 결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문서화된 어젠다나 규칙만큼이나 정치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평등주의적인 정당이나 집단이란 구성원들이 균등한 임금에 관한 정책을 작성하기 위해 만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귀가한 이후에 여성들에게 설거지와 청소를 하게 하면서 경쟁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의사결정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정당이나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가부장적이거나 기타 위계적인 행위 유형들에 관하여 함께 공부하고 그 유형들을 폐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나 집단이다.

내가 일원으로 활동해온 예시적 조직체들에서 이런 일은 일부는 훈련하기(가령 젠더 의식에 대해서는 역할놀이 연습이나 토론그룹활동)를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청소 당번 같은 조직적인 수단들, 프로그레시브 스택(progressive stacks) 같은 회의 진행 방법들, 및 다양한 과제들에 대해 역할과 책임을 교대로 바꾸어 맡기(여기에는 신입자들과 수다나누기 및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도와주기와 같은 비공식적인 역할들이 포함될 수 있다)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일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논의라고 불평하는 회의주의자들이 항상 있다. 몇몇 논평가들은 예시주의가 비공식적인 것에 주목할 경우에 활동가들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들을 위해 ‘나서서’ 싸우는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하기 보다는, 모임에서의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몰아붙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월가를 점거하라’처럼 예시적 조직체들이 (적어도 몇몇 비판가들에 따르면) 자기 속에 휘말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 있으며, 이 경우에 활동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위해서 조직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내부절차들을 토론하고 실행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일단 예시적 정치를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면 이것이 이런 종류의 정치를 실천하는 대다수 조직체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시주의로 유명한 조직체들—사파티스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스페인전국노동자연합(The Spanish National Confederation of Labour, CNT), 시리아의 침범 이전의 로자바(Rojava) 등등—대부분은 내부적 관심과 외부로 향하는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완벽할 정도로 잘 잡았다.

이 조직체들은 주변화된 집단들을 다양하게 향상시키기—예를 들어, 적당한 지대와 토지, 임금인상, 그리고 주변화된 공동체를 겨냥하는 군사공격에 저항하기—위해 싸웠고 동시에 그들의 비공식적인 불평등을 다루었다. 집단들이 주변화된 사람들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은 예시적 정치에의 헌신보다는 기본적인 목표들 및 인구 구성과 더 관계가 있다. 사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면 우리가 사회적 부당함들과 싸울 때 정부로부터 (바라건대)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코빈이 속한 노동당에 확 끌렸던 것은 노동당의 정책들 대부분이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 주식보유제도(worker shareholding schemes) 및 지역의회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단을 통해 노동자들, 지역주민들, 그리고 사회운동들에 권력 및 의사결정을 재분배하는 것 또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이 일단 정권을 잡았을 때 이 공약들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또는 고수했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선거를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은 닫히고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은 결코 열린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보수주의 토리당의 앞으로의 5년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그러는 동안에 취약한 삶의 조건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서 절망(체념)이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최근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처음으로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단체를 조직한 상황이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난 몇 년간의 선거사회주의의 고조로 활력을 얻었으며 활성화되었고 고무되었다. 그런 끔찍한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변화를 위한 전반적인 움직임에서 정부는 단지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코빈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 그러나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변화가 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진보적인 노동당 후보자들에게 계속 열심히 투표를 하자.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공동체 조직들, 노동조합들, 지역 의회 및 협동조합들에 있다. 그곳에서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