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3/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7-8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성철
- 설명: 지난번에 이어서 7-8절의 내용정리를 올린다. 이번에도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을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보기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보기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보기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보기
5. The Columbian Exchange 보기
6. “The Death Carts Did More…” 보기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9.“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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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열병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인종주의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갓 성체가 된, 피를 빤 적 없는 모기들이 세심히 준비된 흡혈 케이지 속에서 10분 동안 지원자들의 팔뚝에 방사된” “이집트-숲모기 연구”((이집트-숲모기는 황열병의 매개체가 되는 모기로, 학명은 Aedes aegypti이다.)) 캘리포니아 교정국, 「조사와 연구」(1971)
1790년대가 “혁명”의 십년이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이 시기에 백인 자산가 계급(the White Men of Means)이 미국 헌법의 5, 6조를 제정하기 위해 자신의 점포의 셔터를 내리고 스스로를 가둔 “필라델피아의 기적”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기적”은 1787년 5월 25일에서 9월 17일까지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필라델피아 대회의’를 가리킨다. 애초 이 회의는 연합규약의 개정만을 예정했었지만, 제임스 매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의도는 처음부터 현존하는 정부를 ‘수정’하는 게 아닌 새로운 정부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 결과 이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회의는 ‘필라델피아 제헌 회의’라고도 불린다.)) 또 프랑스 전역에 빨강, 하양, 파랑의 삼색으로 된 깃발들이 휘날렸으며 ,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퍼졌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 등이 있었다.((삼색기는 프랑스 국기를 가리킨다. 현재와 같은 삼색의 프랑스 국기가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은 1794년이다.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가로, 원래 1792년 스트라스부르의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이라는 군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가 출정을 앞두고 작사, 작곡하였고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러 쳐들어오는 외국군에 대항하여 자원병들이 파리에 집합할 때 마르세유에서 막 도착한 자원병들이 파리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눈 밝은 이가 이 십년의 일로 기억할 것은 서인도제도의 거대한 전쟁, 세 유럽 제국들을 격퇴하고 플랜테이션을 폐지했으며 콜럼버스의 첫 기항지에 독립국 아이티를 세운 노예들일 것이다.
18세기 카리브해 지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 유럽인들의 뒤섞임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의 대륙 간 유전자 혼합에 비견될만하다. 다만 지중해 지역에서는 수백 년이 걸려 일어난 일이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단 몇 년 만에 일어나서 1790년대에 인구학적·혁명적 정점에 도달했다. 따라서 정치 뿐 아니라 전염병학의 관점에서 아이티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주된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경험의 중심성이었다. 18세기 후반의 팬데믹들에서는 노예 경험이 최전선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고대의 유행병과 마찬가지로 이 팬데믹들 또한 유럽인들에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고대와 달리 이번의 유럽인들의 해석은 그 뿌리부터 인종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이와 대립하여 범아프리카주의가, 해방 전쟁의 경험이 그리고 흑인성(négritude)의 철학이 발전되었다.
차이는 더 있다. 1790년대는 자신의 투키디데스를 갖지 못했다. ((투키디데스와 고대 그리스의 전염병에 대한 설명은 이 글의 2절을 참조)) 대신에 성직자 토마스 맬서스 (Thomas Malthus)가 있었는데, 그는 그의 정원의 질서 정연한 관점에서 신앙심 깊은, 온통 수학적 집단학살로 가득한 글을 썼다. [『인구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맬서스는 주로 자신의 정원에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인구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한편 인구의 재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이 그의 “추론”의 전제란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어야만 한다. 증명 끝. [저자가 앞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수학적 집단학살로 가득한 글”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 역병, 기근은 “자연 법칙”이었고, 그는 이것들을 매질하는 농장주의 필요에 맞춰 그리고 1일 18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공장주에 맞춰 평가했다.
그의 관점은 ① 전세계적이었고 ② 야훼를 대자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이다. 친절하게 죽이니 말이다. 이는 여전히 공식적인 언론을 지배하는 관점이다. 그리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에이즈 팬데믹을 다루면서 단 한 번의 신문 칼럼에서 “자연”이란 말을 13번이나 언급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이다.)) 이처럼 사회적 지배층이 자연의 ‘법칙’을 사회 전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자연이 사회 아래에 포섭된 영역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소처럼 먹으세요.” 쟝 윌리엄 팝(Jean William Pape) 박사는 포르토프랭스[아이티 공화국의 수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팝 박사는 아이티의 공중보건 연구소인 GHESKIO의 창립자이자 소장이다. 특히 그는 HIV 바이러스와 관련된 활동으로 공중보건 전문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소모성 질환[체력을 소모시켜 몸을 전체적으로 쇠약하게 만드는 질병]을 앓는 환자들이 에이즈 치료실을 떠날 때마다 이 말을 반복했다. 이 처방을 이해하는 데 혹은 그러한 치료법에 함축된 정치적 암시를 이해하는 데 현대 과학의 그 눈부신 발전이 필요하진 않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새로운 수도였고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 헌법의 제정에서 1787년 ‘필라델피아 대회의’가 결정적인 계기였고 그 후 1790년부터 10년 간 필라델피아는 미 연방의 수도였다.] 그것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치며 민주주의의 노예적 기반을 가면으로 가리려 해도 그것은 누워서 침뱉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1793년 7월 서인도제도의 노예 반란에서 피난 한 백인, 흑인, 물라토 난민들을 실은 상퀼로트호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나라”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도망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상퀼로트(Sans-Culottes)는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중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명칭은 민중들이 귀족처럼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culotte)가 아니라 작업복인 긴 바지(pantalon)를 입은 것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겁을 먹었는데 그 배는 또한 새로운 모기 즉 황열병 바이러스를 옮기는 이집트-숲모기를 날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황열병은 “볼람 열병(the fever of Bollam)”, “바베이도스 열병(the fever of Barbadoes)”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아프리카의 혹은 카리브해의 혁명의 결과인 것처럼 보였다. 1793년 여름과 가을 내내 필라델피아 인구의 많은 수가 죽었다. 시계는 멈췄고 가난과 기아가 횡행했다. 아이들은 유기되었다. 연방정부의 신사들은 도망쳤다. ((1793년 필라델피아의 황열병 유행은 소설과 영화로 그려질 만큼 미국 역사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해 8월에서 11월 사이의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는 4044명이나 이는 무덤 숫자를 센 것에 기초하므로 실제 사망자수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인구수가 약 5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숫자이다. 또 유행병이 시작되고 11월까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같은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약 2만 명이 도시를 떠났다고 한다.))
이 유행병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은 병의 원인을 공기로 돌렸다. 공기 중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화약을 폭발시키는 것이 효과적인 예방책으로 추천되었다. 비공식적으로는 필라델피아의 부르주아지들은 카리브해의 풀려난 노예들을 탓했고 이 유행병의 종식을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서 필라델피아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에 대한 인종 공격을 방치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의 노동계급은 복수의 기회를 잡았다. 절반의 하인들이 자신의 주인을 버렸다. 수감자들은 석방되었다. 간호사들은 강도로 고발당했다. 다른 이들은 일당 3달러로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우리가 자주 보았듯이 이 유행병 속에서도 그것으로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시기생체를 처리할 기회로 삼았다. 그것은 가능성의 시기였다.
지도자들은 바로 이 고통받는 기층의 흑인들에서 출현했다. 노예로 태어난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유 아프리카 협회(the Free African Society)를 세웠고 후에 흑인들을 위한 첫 번째 감리교 교회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노예인 압살롬 존스(Absalom Jones)는 미 본토에 처음으로 흑인들을 위한 성공회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함께 이 유행병에 대처하여 치료와 위로를 위한 활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 앉았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들은 열병을 앓는 사람들의 이마를 닦았다. 그들은 영구차를 구했다. 그들은 관을 제작했다. 그들은 땅을 팠다. 부유한 이들이 두려움과 수치심 속에서 도망치는 가운데 그들은 아무 보상 없이 인류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 유행병은 집단적인 자기인식(self-recognition)과 집단적인 역사적 정체성의 구축을 위한 사건이 되었다. ((저자가 다음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지 확실친 않지만, 생화학 용어로서 ‘자기 인식’은 개체의 면역 계통이 자기의 화학 물질·세포·조직과 외계로부터의 침입물을 식별하게 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 산업화의 고딕식 가장가면들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콜레라나 장티푸스의 대해 우리는 대조군(백신을 맞지 않은 인구)의 25% 혹은 30%에서 질병을 낳을 생물체들을 사용할 것이다.” 메릴랜드 대학, 리처드 호닉(Richard Hornick) 박사. 메릴랜드 교정국, 「콜레라 및 장피푸스 연구」 (1971)
유행병 문학은 도피의 문학인데 왜냐하면 문필가들은 지배계급에 고용되어 있으며 이 지배계급의 유행병에 대한 반응이란 언제라도 가능할 경우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그 예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애드가 앨런 포(1809~1849)는 미국의 작가·시인·편집자·문학평론가이다. 특히 단편소설의 선구자이자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처음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들은 음산하고 괴이한 분위기로 인해 소위 고딕물(Gothic fiction)로 분류된다. 라인보가 이 장의 제목을 ‘산업화의 고딕식 가장가면들’이라고 하면서 포에 대해 다루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1842년에 「붉은 죽음의 가면극」을 썼다.((한국어본이 『붉은 죽음의 가면』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이 해는 중요한 해로서 우리는 조금 후에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이렇다. 프로스페로(Prospero) 왕자는 고딕풍 수도원의 높다란 담벼락 안으로 천 명의 신하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치명적인 전염병(“붉은 죽음”)의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바깥 세계의 일은 자연히 처리될 것이었다. 그 사이에 비통해하거나 고심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야기는 고딕풍의 분위기를 내는 것들로 가득하다. 관능적인 쾌락의 도구들이 기이하고 퇴폐적인 미의 길고 밀폐된 삶을 위해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진 일곱 개의 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오로지 매 시간 울리는 흑단같이 까만 시계의 알림소리만이 연주자들과 무용수들을 멈추게 했다. 그것은 환영의 집합체와 같았다. 이 섬뜩한, 자극적인 장면은 ‘붉은 죽음’이라는 무언극 배우에 의해 중단되는데, 그는 프로스페로의 방에 들어와서 그를 죽인다. “그는 밤에 도둑같이 왔다”고 포는 「요한의 묵시록」을 인용하여 말한다. ((이 구절은 그의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 등장한다. 한편 비록 「요한의 묵시록」에 ‘도둑같이 온다’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하긴 하지만 (3장 3절, 16장 15절) 정확히 이와 상응하는 구절을 찾을 순 없다. 오히려 성경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구절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5장 2절에서 발견된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포는 전염병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맞다면, 그가 또한 당시의 노동계급 혁명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 전염병은 붉은 전염병일까? 그리고 그는 왜 그 전염병을 유럽의 천년왕국설의 고전적 진술과 결부 지을까?[위에서 봤듯이 라인보는 포가 문제의 소설 구절을 「요한의 묵시록」에서 인용했다고 생각하는데 천년왕국설이 자신의 성경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다름 아닌 이 「요한의 묵시록」이다.]
여기서 실제 역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찰스 로젠버그(Charles Rosenberg) [미국의 의학사가]는 『콜레라의 해들』(The Cholera Years, 1962)에서 황열병과 천연두가 17-18세기의 고전적 유행병이었듯이 “콜레라는 19세기의 고전적 유행병이었다”고 말한다. 포의 세대에 충격을 주었던 팬데믹은 1831년과 1832년 사이에 동양에서 유럽을 거쳐 미국의 도시들로 퍼졌던 콜레라였다.
콜레라의 기원은 벵골(Bengal)지방으로 여기서 콜레라의 전파는 영국의 상업적·군사적 이동에 힘입었다. ((벵골지방은 원래 인도 북동부의 한 주였으나, 현재 일부는 방글라데시의 영토로 되었다.)) 실제로 인도 주민들의 도마뱀 이야기에 따르면 이 유행병이 암시하는 우주적 불균형은 영국 제국주의의 소란에 신들(시탈라, 마리암마, 올라 비비)이 진노한 결과였다.((이 신들은 인도 지역에서 숭배되는 여신들로, 시탈라(Sitala/Shitala)는 천연두의 여신, 마리암마(Mariyamma) 혹은 마리암만(Mariamman)은 비의 여신, 그리고 올라 비비(Ola Bibi) 혹은 올라데비(Oladevi)는 콜레라의 여신이다.)) 이 여신들의 변덕스런 화를 달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마을간 의례적(ritual) 식량교환은 영국인의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소통 네트워크를 설립했다. 피억압자들은 ‘건강’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소통망은 제 1차 인도 독립 전쟁 즉 1857년 대반란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이 독립 전쟁 혹은 대반란은 세포이(인도인 용병)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까닭에 우리에게는 주로 세포이 항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인도의 ‘미신’이 대개 콜레라라는 수인성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을지 몰라도 바로 그 ‘민중-구전’이 영국 거시기생체에 맞선 투쟁의 기반시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포는 1831년 웨스트 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나서 볼티모어에서 극빈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콜레라에 대한 소문과 공포에 민감했을 텐데 이 소문과 공포는 근대 역사에서 매 번 그랬듯이 당시에도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며 계급관계의 병리학(노동자는 병적이고 지배자는 건강하다)을 설립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언론은 콜레라가 무절제하고 방종한 생활의 결과라고 보았다. 신문들은 1,400명의 “파리의 외설적인 여성”들 가운데 1,300명이 콜레라로 죽었다고 보도했다. 그것은 일부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만족의 감정을 느끼는 또 다른 일부의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의 역병”으로 여겨졌다. 콜레라의 용도는 “인간 사회를 오염시키고 더럽히는 쓰레기와 오물을 배출하는 것”이었다. 볼티모어에서는 콜레라 희생자들의 대다수가 “가장 쓸모없는” 부류라고 보도되었다. 콜레라를 앓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일랜드인들과 흑인들은 운명으로 정해진 콜레라의 희생자처럼 보였”고 많은 도시에서 콜레라 발병률은 흑인들의 경우에는 두 배로 증가했다. 의사들은 남부의 노예와 북부의 슬럼 거주자들을 상대로 실험을 진행했다. 인종 의학(racial medicine)이 이 세기의 전반부에 탄생했다. 콜레라를 앓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단지 수동적인 희생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밤에 도둑이 되는 등 정의와 사회적 치료책에 대한 자신들의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뉴욕은 무단침입(Breaking and Entering)이라는 유행병으로 몸살을 앓았다. “의사들과 공무원들은 공격당하고 난폭하게 구타당했다.”
1832년 7월 23일자 「뉴욕 이브닝 포스트」지는 맨해튼의 악명 높은 파이브 포인츠(Five Points) 지역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파이브 포인츠에는 온갖 피부색, 연령, 성별, 민족의 사람들이,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일한 처지에 있으며 거의 모두 폭력적인 야만성을 지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한 집단이 이 도시의 가장 밀집되고 중심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언제쯤에나 우리가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천국으로부터 순수한 공기가 내려온다 한들 그들의 숨은 그것을 오염시키고 병으로 감염시킬 수 있을 것이다.”((파이브 포인츠 지역은 뉴욕의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에 있던 지역으로, 그 이름은 네 개의 거리(앤써니가(오늘날 워쓰가), 크로스가(오늘날 모스코가), 오렌지가(오늘날 백스터가), 리틀 워터가 (오늘날엔 존재하지 않는다)가 합류하는 지점인 데서 유래한다. 특히 이 지역의 이름을 딴 갱 집단(파이브 포인츠 갱)이 유명할 정도로 소위 도시의 ‘우범지역’이었다.)) 노동계급의 숨마저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은 젠더, 인종 혹은 연령에 의해 분할된 정도가 가장 낮은 경우에 가장 위험했다. 게다가 특히 파이프 포인츠의 노동계급은 허드슨 강 부두와 선창의 노동력을 공급했기에 국제 무역에서 전략적으로 핵심적이었다. 가치의 국제적 순환이 가장 민감하고 응축된 농도에 도달한 것은 바로 이 곳에서였다. 이런 이유에서 선택적인 집단학살이 “자연법칙”의 가면 아래에서 고려되고 실행되었다.
이것의 목적을 노동계급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노만 롱메이트(Norman Longmate)가 썼듯이 1831년 콜레라 유행병의 시기에 “부자들이 맬서스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인구를 줄이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그 질병을 퍼트리고 있다는 믿음이 전 유럽에 퍼졌다.” (『콜레라 왕 : 한 질병의 전기』(King Cholera: The Biography of a Disease (1996), p.4))
183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기계화였다. 이는 남성, 여성 그리고 아동들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막대한 수의 인구가 그토록 더럽고 그토록 악취가 진동하는 밀집 지역에 욱여넣어졌는데 이것이 맨체스터, 리버풀, 뉴욕, 보스턴의 ‘도시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노동조합들과 대중 정당이 형성되는 것에 더해 또 다른 사회적 동학이 자리 잡았다. 즉 한편으로 도시 공동체들의 격리와 그들의 계획된 고립(‘슬럼’)이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 음주, 절도 그리고 자포자기의 위험한 문화가 생겨났다.
찰스 마크스(Charles Marks)[‘Karl Marx’를 영어식으로 쓴 것이며 이어지는 인용은『1844년 경제철학 수고』의 한 대목이다]라는 젊은 혁명가는 1844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협잡꾼, 도둑, 사기꾼, 거지, 그리고 무직자. 굶어죽고 비참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노동자. 이들은 정치경제학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다른 눈들, 의사, 법관, 무덤 파는 사람 그리고 집달관 등의 눈에만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그러한 인물들은 정치경제학의 영역 밖에서는 유령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에게 노동자들의 필요란 단지 하나 뿐이다. 노동자라는 종족이 멸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한에서 노동자가 노동하는 동안 자신을 유지할 필요 말이다.”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즉 “정신적·육체적으로 탈인간화된 존재로서”의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포가 영국에서 「붉은 죽음의 가면극」을 출판한 해에 구빈법 위원회 위원(the Poor Law Commissioner)인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은 ‘공중 보건’ 운동의 청사진인 「대영제국의 노동인구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그것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절하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플랜테이션 노예와 마찬가지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세심하게 재생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는 도시 수도 공급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도시의 계급 관계의 ‘수리학’(hydraulics)을 제시했고 벤섬(Bentham)에 의해 시작된, 아프고 병든 사람들의 강제수용운동을 추진했다. 미셸 푸코라면 “임상적 시선(the clinical gaze)”의 확립이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임상적 시선은 근대 의학의 전개에 핵심적인 요소로 푸코가 그의 책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제시하는 개념이다. 질병의 치료의 시선이 ‘임상적 시선’으로 전환됨과 더불어 1) 질병 치료에서 더 이상 환자의 시선이 아니라 의사의 시선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며 2) 이 시선 하에서 환자는 더 이상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되고 3) 그에 따라 질병은 환자의 신체 전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특정 부분에 국한된 장애로 이해된다.))
산업도시들의 구조에 대해 보자면,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발전은, 가장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홈즈-왓슨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방식을 도입했다. 연역추리를 특기로 하는 뛰어난 탐정인 셜록 홈즈와 전통적인 신앙심을 가진 현실안주적인 의사인 닥터 왓슨은 19세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선 쌍둥이 조직―치안과 위생―을 요약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십 년 동안 ‘공중보건 운동’을 통한 노동계급의 수리학적 통제뿐 아니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배치된 새로운 경찰 부대의 무장순찰경찰(the armed-cop-on-the-beat) 제도의 확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힘을 합쳐 동종용법(homeopathic) 의학(이것의 기반은 가족농family farm이었다)을 파괴했고 질병을 통제하기 위한 도시 ‘개혁’을 채택했는데, 이에 따라 질병은 더 이상 엔데믹한 즉 한 지방 특유의(endemic) 것이 아니라 에반 스타크(Evan Stark)가 ‘엔도폴릭(endopolic)’이라고 부른 것 즉 도시 특유의 것이 된다.((‘엔도폴릭’이라는 개념은 에반 스타크가 1977년 그의 논문 「사회적 사건으로서 유행병」(‘Epidemic as a Social Event’)에서 제시한 것으로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질병이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정치·경제적 결정과 과정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19세기가 끝날 때쯤 자본은 이민·사회·교육·도시 정책을 통해 도시 대중의 생애 주기를 계획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려 하고 있었는데, 그러는 가운데 자본은 자신의 질병에 대한 승리가 자신의 거시기생체적 권력을 제한함을 알아차렸다. 히틀러는 “나에게 거대한 도시는 인종적 신성모독의 체현물로 보였다”고 썼다.((히틀러의 이 말은 그의 책 『나의 투쟁』에 나온다. 자본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제 도시의 리듬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구성되는바, 자본의 전제조건은 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이기에 자본은 전염병의 정복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미 보았듯이 대도시의 노동력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도시에서 다양한 인종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도시가 “인종적 신성모독의 체현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장 유용하고 치명적인 질병의 대다수는 다양한 미생물에 의해 초래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들[의사들]은 이 미생물의 수고를 무해하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황열병, 흑사병, 콜레라, 디프테리아를 비롯해 우리가 앓았던 거의 모든 귀중한 병들이 고작 한가한 시간의 오락거리가 되었고 정부에게 복통보다도 못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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