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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와 함께 네 개의 손으로 쓰다

 


  • 저자 : Michael Hardt
  • 원문 : Vierhändig schreiben mit Toni Negri https://taz.de/80-Geburtstag-des-Theoretikers/!506213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의 80세 생일을 맞아 마이클 하트가 둘의 공동작업에 대해 쓴 글이다. Genre, Volume 46, Nr 2, 2013에 처음 발표됐고 Thomas Atzert가 영어 텍스트를 독일어로 옮겼다. 아래의 정리에는 독일어본을 참고했다. 번역에 가까운 부분들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니니 인용이 필요한 경우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현에서 하트의 1인칭 관점을 유지했다.

 

나는 항상 네그리의 넓은 마음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지적으로 진지하다고 보았으며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것이 우리의 공동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공동의 집필이라는 놀라운 경험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만남과 공동작업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이 토니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나는 1986년 여름 파리에서 토니를 만났다. 그가 파리로 망명해있던 14년 가운데 세 번째 해였다. 일주일 동안의 방문은 스피노자를 다룬 그의 책 『야만적 별종』을 번역하던 중에 생긴 몇 가지 물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나에게 나중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파리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철학적 사유도 좀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던 시애틀로 돌아와서 논문자격시험을 접었다.

다음 해 여름 나는 아무런 재정수단 없이, 장학금이든 직업이든 숙소든 아무것도 없이 파리로 갔다. 다행히 나는 네그리의 뒷받침과 일부 이탈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파리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잡지 『전미래』를 위한 계획들이 구체화되었다. 네그리와 장 마리 뱅상(Jean-Marie Vincent)이 주도했으며, 랏자라토(Maurizio Lazzarato)와 나도 편집진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하자고 초청받았다. 잡지 편집 모임은 공동작업과 집단집필을 훈련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다.

 

집단작업

네그리는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파리에 오기 전에 가타리와 함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집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집단작업 능력을 갈고 닦은 것은 무엇보다도 6-70년대 이탈리아의 여러 정치 잡지들과 관련된 활동에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네그리와 나는 공동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후 지속된 공동작업의 시작이었으며 우정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전미래』 같은 정치 잡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공동집필의 방법은 집단실천이라는 형태에 기초한다.

과제들의 분배가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 본질적인 지적 분석이 집단의 정치적 논의에서 이루어지고, 주장들이 논의되며, 모든 기고들이 상세하게 스케치되고 공동으로 배치된다. 잡지의 계획된 출간 전체가 이렇게 일정한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때 비로소 개별 구성원들 사이에 과제가 분배된다. 누구는 이것에 대해 쓰고, 누구는 저것에 대해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제3의 주제에 대해 쓰고 등등.

이렇듯 집필은 정확하게 윤곽지어진 활동이 된다. 토론을 통해 이미 전개된 생각들과 주장들이 집단의 일부로서 지면에 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집필이 전적으로 의미가 있다. 많은 정치 잡지들과 팸플릿에서 기고문들이 익명으로 남더라도 말이다. 집단적 논의로부터 과제를 끌어내는 방법이 공동의 집필과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내가 함께 책을 집필할 때, 우리는 생각들을 모아서 오랫동안 논의한다.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집필과정이―이 단계에서 책의 체제와 개요가 그려지며 이는 다시 더욱 다듬어지고 세밀하게 전개되게 된다―논의를 더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논의의 진행이 모든 본질적인 논점들에서 명확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분업을 시작하여 실제로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간다. 각자 맡은 부분들은 짧은 토막들이며 많은 경우 단지 몇 쪽 정도이다.

그 후에 우리는 그렇게 해서 초고를 놓고 토론하고 편집하며,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퇴고 작업으로 넘어간다. 최초의 원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번, 그리고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공동의 논의 이후에 집필에 착수하는 방식은, 본질적인 지적 노동이 논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의 집필은 기계적인 작업일 뿐이라는 느낌까지 준다. 마치 “당신은 무엇을 말할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단순히 글로 적는다”는 모토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글 쓰는 이들은 말해야 할 것의 대부분이 집필과정에서야 생성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주장을 글로 정식화해내려는 노력에 이르러서야만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접근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테마가 미리 얼마나 뚜렷하게 설정되었는가와 무관하다. 글쓰기의 행복(과 고통)은 글쓰기가 늘 창조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해방으로서의 글쓰기

우리가 함께 하나의 주장을 글로 다듬을 때 일종의 연금술이 일어난다. 협동하면서 (맑스가 말했듯이) 개인적인 한계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공동집필에서 개인적인 한계들의 제거는 해방으로서 일어나며, 개별적인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의 발견에는 마법적인 무엇인가가 깃들어있다.

협동의 생산력은 내용과 관련하여 인식되는데, 그것은 집필 내용의 어조와 스타일을 모두 특징짓는다. 다른 많은 집단집필의 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동 텍스트는 개인적으로 작성한 텍스트들과 미미한 정도로만 같은 울림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어조의 변화가 아니며 융합도 아니다. 공동집필은 오히려 제3의 목소리를 발생시키며 이는 우리에게 속하는 만큼이나 그 자체로 자립적이다 .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많은 것과 결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단어나 특정 어구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가 사물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더 다듬어야 한다. 종종 상대의 단어를 받아들이고 그런 상태에서 새로 생성되는 텍스트의 일관성과 정확성을 주시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도 네그리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우리가 여러 언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어로 토론한다. 우리가 원고를 각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든 영어로 쓰든 말이다. 언어의 상이성은 어떤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 일정한 자율을 제공한다.

퇴고 과정에서 이탈리아어로 쓰인 것과 영어로 쓰인 것이 혼합된다. 물론 둘 모두 텍스트를 편집할 때에는 가능한 한 전체가 통일되도록 노력하지만 말이다.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원고는 통일된 언어를 얻는다. 이는 보통 영어인데, 이 경우 내가 책임을 지게 된다.

내용의 차원은 더한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특정의 주장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별로 없다. 현실적인 차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상대방의 생각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사유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공동집필은 일종의 계속적인 상호표절 과정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생각들이란 결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의 지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사이영역(Zwischenbereich)을, 즉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들을 창출한다. 아마 이것이 때때로 그 영역에 마법적인 어떤 것이 깃드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들이 고유한 것이 되기를 멈추며 공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상이한 사유방식의 상호작용

공동저술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는 각자의 몫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상이한 사유방식, 재능, 스타일, 기질이 공동의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본질적으로 잉여가 산출된다.

각자가 집필한 부분들을 합하여 회계원처럼 면수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필과정에서의 동등성이란 그러한 계산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함께 하는 작업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성패의 시금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즉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능력을 촉진시키느냐 아니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심지어는 대부분의?) 만남들이 사유를 촉진하거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데, 또한 주장을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개념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놓치지 말아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할 행운이요 선물이다. 공동집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동등함이란 양자가 동등한 정도로 이 경험을 한다는 데 있다.

공동집필에 요구되는 특수한 상황과 노력을 고려하건대, 그러한 공동집필을 보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함께 한 나의 경험은 모든 노력에 값하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나에게 주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3)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당신은 어셈블리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하기와 번역이 의미하는 바의 변화를 언급하고, 말들의 전유(appropriation)를 중요한 정치적 행위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중의 기업가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정립합니다. 하지만 200년 넘게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왔던 기업가성(entrepreneurship)’과 같은 용어를 그렇게 전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한 전유 행위를 통해 비판이 약화되고 구분들이 흐려질 위험은 없을까요?

답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책이 출간되자마자 특히 이 이슈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의 작업에서 늘 말들을 되찾고 재사용하며 그 의미를 전도시켜왔습니다. 가령, 아마도 ‘제국’은 정치학의 역사에서 가장 학술적이고 전통적인 용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윤리의 일부인 말들을 전유해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되기는커녕,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언어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전도(顚倒)의 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위한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들을 되찾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업가성을 말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 혹은 ‘다중의 기업가성’을 말합니다.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을 말하는 것은, 노동의 거부를 말하는 것과 같은 잠재성과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결국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힘은 이와 같은 재전유의 행위에 있으며, 이때 전도(顚倒)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다중에게 군주론끝부분에서 제시된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으라고,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중으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요구이지요. 이때 본질적인 것은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to take power differently)’는 말입니다. 이 말로 당신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공통적인 것혹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르게는 평등 없는 자유인 권리개념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좌파가 제안하는 자유 없는 평등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라는 정식화는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바,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다중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을 코뮤니즘(communism)’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통주의(commonism)’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연대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답 : 왜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지 않냐고요? 아마도 그 말이 최근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남용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공통적인 것의 정치 기획을 다시 ‘코뮤니즘’으로 부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마이클이 아니라 다중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담론에서 연대가 어디에 위치하냐고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연대가 있습니다. 연대는 우리 담론의 원리적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대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중 세 가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1) 고독, 홀로 됨의 거부에 있어서 질료인으로, 2) 생산하는 협력에 있어서 작용인으로, 3) 사랑에 있어서 목적인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이론적 구성 전체의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이 다름 아닌 연대에 있습니다. ‘공통주의(commontismo, commontism)’는 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홀로 생산할 수 없으며, 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안들은 연대의 제안, 혹은 홀로 됨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제안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대를 정의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공통적인 것을 향한 발본적 이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대를 향한, 홀로 됨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와 끔찍한 공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거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끝장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진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면, 이 끔찍한 고독을, 그러나 또한 이 거대한 열망을 알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막은 모든 면에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다음 질문이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작(前作)들에서처럼,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오큐파이 운동들이 다중의 반란을 증명한다는 낙관적인 생각, ‘가능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아마도 처음으로, 오큐파이 운동들이 시도한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당신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향 전환, 즉 초기의 낙관주의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혁명의 이념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작업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해결방안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난 10년 간 오큐파이를 비롯한 여러 운동들이 부딪혔던 한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 운동들이 스스로를 제도로 번역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시도하거나 실제로 제도를 형성했던 곳에서도 모두 운동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로부터 탄생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출발한 상황을 배반하고 만 포데모스(Podemos)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모든 논쟁들을 자세히 따라가본 후 포데모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략과 전술 사이의 관계의 역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오직 전술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낙관적이냐가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하려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커먼즈 운동의 한계들을 살피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권력 장악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권력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했듯이, 이것은 온전히 ‘권력을 다르게 잡기’에 관한 것, 그리고 이 발본적인 이행/역전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포퓰리즘을 다룹니다. ‘피플(people, 국민)’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피플’ 개념은 홉스의 논리, 주권과 재현(대의)에 관한 부르주아적 노선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피플은 다중을 훼손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오직 그 목적만을 가집니다. 피플의 논리에 따르면, 다중은 주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사라지는 단일한 피플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합니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원본 표지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홉스에 맞서, 단호하게 다중(multitudo) 개념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질서가 형성될 때에도 다중의 자연적 권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에서 증명하려고 했듯이, 그리고 『어셈블리』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는 ‘다중’과 ‘공통적’(comunis)이라는 개념을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와 민주주의의 전체 이슈를 압축합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상력, 사랑 그리고 주체성이야말로 특이성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공통적으로 되는 특이성과 주체성, 스스로를 새로이 창안되는 제도로 번역하는 특이성과 주체성은, 공통주의를 요약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 현재의 디지털·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관련하여, 당신은 또한 비판에 대해, 당신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기술비관주의(techno-pessimism)라 부르는 것에 대해 숙고합니다. 당신은 근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은 오직 대공장 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발전국면과만 유효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의 비판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 비판의 한계는, 낭만주의 시기에 혁명적 이념과 해방의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계몽과 근대적 사유의 뒤집어진 상(), 계몽의 변증법역시 사로잡혀 버리고만 그 역상(逆像)과 관계된 것일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한계는 해방적인 근대 사유와 자본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까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의 대안적 근대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주요 용의자들로 간주했는데요 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가 그들의 비판적 작업에 빚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주의의 발전과정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1944)의 결론들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극단들, 극단주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당신은 한계로 데려가고 당신은 거기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밀폐된 우주를 개념화한 것입니다. 노동자주의는 이 밀폐된 우주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것을 부수어 열 수 있는지를 자문(自問)했습니다. 노동자주의 시절에 우리는, 그들이 멈춘 곳에서 멈추지 않고, 밀폐된 우주, 자본주의의 우주, 도구적 합리성이 넘쳐나는 우주, 통제와 억압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주를 출발점으로 삼되, 이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의 세계이며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이 밀폐된 우주를 강제로 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주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이 일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기 위한 쇠지렛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자식이지만, 또한 그것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주의에서(그리고 『어셈블리』에서도 역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에 맞서 재발견했던 것은 존재론, 계급투쟁, 주체화의 가능성입니다. 1968년 이전의 마르쿠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작업입니다. 그는 아도르노의 학생이었는데 197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형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작업인 『구성과 계급투쟁』(Konstitution und Klassenkampf)(사후 1971년에 출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하려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의 담론은 정치적 행동, 해방, 총체적 착취와의 단절을 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비물질적·지적 노동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치 역시 이러한 발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는 메를로 퐁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기원한 기본틀을 현상학과 맑스주의의 교차 속에서 발견합니다.

 

: 당신이 지식인, 사상가, 연구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미래 세대에게 과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답 :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 내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모든 것을 연결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 그것은 내가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철학자로서도, 사회학자로서도, 때로는 심지어 직업 정치인으로서도, 말하자면 내가 수행한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적으로 나의 코뮤니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맡지 않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코뮤니즘이 다시 사람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통주의 투사야말로 지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

 

 




블록체인 경제 : 초보자를 위한 제도적 크립토경제 안내


  • 저자  :  Chris Berg, Sinclair Davidson, Jason Potts(([정리자] 저자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사회, 경제, 정치, 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세계 최초의 사회과학연구센터인 RMIT Blockchain Innovation Hub에 속해 있다.))
  • 원문 : “The Blockchain Economy: A beginner’s guide to institutional cryptoeconomics (2017.09.2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블록체인의 중요성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이 비트코인과 화폐의 역사에서 시작하는데 화폐는 블록체인의 최초의 사용사례일 뿐이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가능성은 낮다. 블록체인은 무엇보다 탈중심화된, 분산된, 디지털 형태의 원장이다. 회계와 연관된 원장이 혁명적 테크놀로지로 서술되는 것은 희한한 일일 수 있지만, 블록체인이 중요한 것은 원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늘 원장이 중심이다

규칙들에 의해 구조화된 데이터로 단순하게 구성되는 원장은 회계거래 기록 이상의 일을 한다. 우리는 사실에 관한 합의가 필요할 때마다 원장을 사용한다. 원장이 근대 경제를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기록한다.

원장은 소유권을 확인해준다. 쏘토(Hernando de Soto)((Hernandde Sotto, The Mystery of Capital: Why Capitalism Triumphs in the West and Fails Everywhere Else, Basic Books, 2007.))는 가난한 사람들이 원장에서 확인되지 않은 재산을 소유할 때 어떻게 고생하는지를 서술했다. 회사(firm)는 단일한 목적을 가진, 소유권·고용·생산관계의 네트워크로서 하나의 원장이다.

원장은 신분을 확인해준다. 사업체들은 정부 원장에 등록된 신분이 있어서 그 존재와 조세법 아래에서의 지위가 추적될 수 있다. 탄생·사망·결혼의 등록이 개인들의 삶의 주요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이 정보를 신분을 확인하는 데 사용한다.

원장은 지위를 확인해준다. 시민권은 누가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의무를 지는지를 기록하는 원장이다. 선거인명부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혹은 의무화하는) 원장이다. 고용도 고용된 사람들에게이 노동의 보수에 대한 청구권을 부여하는 원장이다.

원장은 권위를 확인해준다. 원장은 누가 국회의원석에 앉을 수 있고 누가 은행계좌에 접근할 수 있으며 누가 아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고 누가 제한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해준다.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원장들은 경제적·사회적 관계들을 맵핑한다.

사실에 관한 합의, 즉 무엇이 원장에 있는지에 대한 합의와 원장이 정확하다는 믿음은 시장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토대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유, 점유, 원장

결정적이지만 놓치기 쉬운 것이 소유(ownership)와 점유(possession)의 구분이다. 점유는 소유를 함축하지만 소유 자체는 아니다. 여권의 예를 들면, 디지털 이전의 세계에서 여행자가 소지한(점유한) 여권은 그의 여행할 권리의 소유가 원장에 등록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요즘의 여권은 당국이 소유를 직접 확인하도록 해준다. 관련 당국이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서 어떤 여행객이 여행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보여주었듯이 화폐도 원장이다.

은행권이라는 토큰의 점유는 곧 소유를 의미한다. 19세기에 은행권의 소지자는 그 은행권이 나타내는 가치를 인출할 권리가 있었다. 은행권들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에게 직접적 채무였으며 은행 원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점유가 곧 소유를 가리키는 체제는 은행권들이 절도되거나 위조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법정 통화는 중앙은행에서 금으로 교환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남아있어서, 지폐의 가치는 통화의 안정성과 그것을 발행한 정부의 안정성에 대한 합의에 의존한다. 은행권들은 부가 아니다. 지폐는 원장에 있는 관계에 대한 요구이며 그 관계가 붕괴하면 지폐의 가치도 붕괴한다. 짐바브웨, 유고슬라비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례를 보라.

원장의 진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원장 테크놀로지는 지금까지 별로 변화를 겪지 않았다. 원장은 문자 소통의 여명기에 등장한다. 원장과 글쓰기는 고대 근동(近東)에서 생산·교역·부채를 기록하기 위해서 동시에 발전했다. 설형문자를 넣어 구운 진흙판이 식량, 세금, 노동자들 등의 단위를 세세히 기록했다. 분산된 원장처럼 기능하는 동맹들의 구조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최초의 국제적 공동체가 마련되었다.

14세기에 복식부기(double entry bookkeeping)의 발명과 함께 원장에 최초의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복식부기는 차변과 대변을 모두 기록함으로써 다수의 (분산된) 원장들을 가로질러 데이터를 보존했고 원장들 사이의 정보의 조정을 허용했다.

원장 테크놀로지의 다음 단계는 19세기 대기업들과 거대 관료제의 발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중앙집중화된 원장들이 조직의 규모와 범위의 극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으나 중앙집중화된 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0세기 후반에 원장은 아날로그 형태에서 디지털 형태로 이동했다. 호주의 여권은 1970년대에 디지털화되었으며 중앙집중화되었다. 전산 가능하며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더 복잡한 분산, 계산, 분석 및 추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데이터베이스 역시 여전히 신뢰에 의존한다. 디지털화된 원장은 그것을 유지하는 조직의 신뢰 가능성만큼만 신뢰 가능하다. 블록체인이 해결한 것을 바로 이 문제이다. 블록체인은 원장을 유지하고 확증하는 신뢰받는 권위 있는 중앙에 의존하지 않는 분산된 원장이다.

블록체인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관들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구조는 원장들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발전했다.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은, 사람들이 시장, 회사 혹은 정부들에서 해당 조직의 상대적 거래비용에 의거하여 생산하고 교환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슨의 거래비용 접근법은 어떤 기관이 원장을 관리하고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한다.

정부들은 권위·특권·책임·접근의 원장들을 유지한다. 정부들은 시민권, 여행의 자유, 납세의무, 사회안전권, 재산소유의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는 신뢰받는 주체이다. 원장이 시행되기 위해서 강압이 요구되는 경우 정부가 필요하다.

회사들 또한 원장들을 유지한다. 고용과 책임, 물리적 자본과 인간 자본의 소유와 배치, 공급자들과 고객들, 지적 재산과 기업 특권을 기록하는 사유화된 원장들이다. 회사는 종종 ‘계약들의 연계’라고 불린다. 그러나 회사의 가치는 그 연계가 질서와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회사는 사실상 계약과 자본의 원장이다.

회사 및 정부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더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블록체인을 사용할 수 있다. 다국적 회사들 그리고 회사들의 네트워크들은 거래를 전지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블록체인이 이를 거의 즉각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정부들은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을 사용해서 재산권이나 신분기록의 정확성과 조작 불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을 바탕으로 잘 설계된 허가 규칙들은 시민들과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의 데이터에 대한 더 많은 통제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또한 회사들 및 정부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는 제도 차원의 테크놀로지이다. 그래서 블록체인은 회사들을 대체할 수도 있다. 계약과 자본의 원장은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탈중심화되고 분산될 수 있다. 신분, 허가, 특권, 권리의 원장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제도적 크립토경제학

제도적 크립토경제학(institutional cryptoeconomics)은 암호기술에 의해 안전해지고 신뢰와 무관해진 원장들이 제도의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한다. 고전주의 및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목적이 희소한 자원의 생산과 분배를 연구하고 그 생산과 분배를 받쳐주는 요인들을 연구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제도적 경제학은 경제를 규칙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규칙들(법, 언어, 재산권, 규제, 사회적 규범, 이데올로기)이 흩어져 있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을 서로 연계하도록 해준다. 규칙들이 교환을 (경제적 교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교환/교류도) 촉진한다.

크립토경제학이라 불리게 된 것은 블록체인을 받쳐주는 경제적 원칙들과 이론 그리고 대안적인 블록체인 실행에 초점을 둔다. 블록체인 메커니즘 설계의 경우에는 게임이론과 인센티브 설계를 고려한다.

이와 달리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블록체인과 크립토경제가 결합하여 가져올 제도적 경제학에 초점을 둔다. 그 사촌격인 제도적 경제학에서처럼 경제는 교환을 연계하는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규칙을 보기보다는 규칙들에 의해 구조화된 데이터인 원장을 본다.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원장들을 지배하는 규칙들, 그 원장들을 서비스하기 위해서 발전한 사회·정치·경제적 제도들, 그리고 블록체인의 발명이 어떻게 전 사회에 걸쳐서 원장들의 패턴을 변화시킬지에 관심이 있다.

블록체인의 경제적 귀결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블록체인 혁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도구를 우리에게 갖춰준다.

블록체인은 실험적 테크놀로지이다. 블록체인이 어디에 사용될 수 있는가는 기업가의 관점에서의 질문이다. 일부 원장들이 블록체인 위로 이동할 것이다. 일부 기업가들은 원장들을 블록체인 위로 이동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할 것이다. 모든 것이 블록체인의 사용 사례가 되지는 못한다. 블록체인의 킬러 앱은 아직 없다. 원장들, 암호기술, P2P네트워킹의 결합이 미래에 어떤 것을 낳을지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과정은 극히 파열적이 될 것이다. 추측컨대 전지구적 경제는 블록체인을 받쳐주는 사실들의 재구조화·해체·재조직과 관련된 긴 불확실성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의 최선의 사용이 ‘발견’되어 이미 원장에 대한 서비스를 하는 기관들이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체계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이 둘째 부분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원장들은 파급력이 크고 블록체인의 가능한 응용프로그램들도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제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의 일부가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날 것이다.

제도의 창조적 파괴

우리는 이전에 이런 혁명들을 겪어 보았다. 보통 비트코인의 발명과 블록체인을 인터넷과 비교한다. 블록체인을 인터넷 2.0이라고 부르거나 인터넷4.0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사업을 행하는 방식을 혁신한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 비교는 블록체인을 덜 쳐준 편이다.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소통하고 교환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전과 다르게 교환하도록 해준다. 블록체인에 합당한 더 좋은 은유는 기계적 시간의 발명이다.

기계적 시간 이전에 인간의 활동은 자연의 시간―아침에 들리는 닭의 울음과 저녁에 천천히 땅거미가 지는 것―에 의해 규제되었다. 경제사가 앨런(Douglas W. Allen)이 주장하듯이 문제는 가변성이었다. “시간의 측정에 너무나도 많은 가변성이 존재해서 많은 일상적인 활동들이 유용한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다.” “시간 측정의 가변성의 감소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모든 곳에서 감지되었다”라고 앨런은 쓴다. 기계적 시간은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경제적 조직화의 전적으로 새로운 범주들을 열어젖혔다. 교역과 교환이 먼 거리를 가로질러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루를 구조화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한 시간의 양에 따라 보수가 주어질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공정하게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용주나 피고용인이나 어떤 계약이 수행되는 것을 확증하는 독립적 도구인 표준을 볼 수 있었다.

완결된 스마트 계약과 미완결된 스마트 계약

윌슨과 (그와 마찬가지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코스(Ronald Coase)는 계약을 경제적 조직화의 핵심적 위치에 놓는다. 계약이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의 중심부에 놓여있다. 바로 여기서 블록체인은 가장 혁명적인 함축을 가진다. 블록체인 위에서 이루어지는 스마트 계약은 계약에 의한 합의가 자동적·자율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실행되도록 한다. 스마트 계약은 계약의 실행을 유지하고 시행하고 확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전체―회계사들, 감사들, 법률가들, 그리고 많은 법 제도들―를 제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 계약은 알고리즘의 세부에 의해서 제한된다. 경제학자들은 완결된(complete) 계약과 미완결(incomplete) 계약 사이의 구분에 초점을 두어왔다. 완결된 계약은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적시한다. 미완결 계약은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경우 계약조건의 재협상을 허용한다. 완결된 계약들은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며 미완결 계약들은 돈이 많이 든다. 블록체인은 스마트 계약을 통해서 많은 미완결 계약과 연관된 정보비용과 거래비용을 낮춤으로써 경제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시킨다.

이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의 정확한 세부는 기업가들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현재 오라클들―정보를 스마트 계약이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로 변환해주는 신뢰할만한 주체들―이 블록체인의 알고리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해준다. 블록체인 혁명에서 실질적으로 얻을 이득은, 미완결 계약들을 블록체인 위에서 실행되기에 충분히 완결된 계약으로 전환시킬 더 낫고 더 강력한 오라클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중세의 상인혁명은 상인 법정들[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 merchant law을 집행한다―정리자]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실질적으로 신뢰를 받는 오라클들에 해당하는 이 법정들이 교역자들로 하여금 사적으로 계약을 실행할 수 있게 했다. 블록체인의 경우에 이런 혁명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정부는 어디로?

블록체인 경제는 세금, 규제, 서비스 제공 등 많은 면에서 정부의 통치과정에 압박을 가한다.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금융기관들의 경우 그 안전성과 건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건전성 통제(prudential control)가 발전했다. 보통 이 통제(예를 들어 유동성과 자본 요건들)는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이 은행의 원장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은 회사의 관리에 기율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쓰임새 가운데 하나는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이 은행의 지불준비금과 대출을 계속 모니터하여 자신들과 은행 경영진 사이의 정보비대칭을 실질적으로 제거하게 해주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근거 없는 뱅크런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한다. 규제자의 역할은 블록체인이 정확하고 안전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공인하는 데 국한된다.

블록체인의 더 나아간 쓰임새는 크립토뱅크―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단기로 빌리고 장기로 빌려주는 자율적인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이다. 스마트 계약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크립토뱅크는 공적 블록체인 원장을 가진 은행만큼이나 투명한 속성을 가지면서도 규제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크립토뱅크는 스스로 청산할 수 있다. 크립토뱅크가 지급불능이 되면 그 바탕에 있는 자산이 자동적으로 출자자들과 예금주들에게 지급된다.

카우언(Tyler Cowen)가 타바록(Alex Tabarrok)은 많은 정부 규제가 정보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보가 어디에나 두루 퍼져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다.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은 이 정보의 편재(遍在) 경향을 주목할 만하게 증가시키며 그 정보를 더 투명하고 영속적이며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블록체인은 ’렉텍‘(regtech)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효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감사, 준법감시, 시장 감시라는 전통적인 규제 기능들에 테크놀로지를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블록체인 세계에서 새로운 소비자 보호나 시장 통제를 요구하는 새로운 경제적 문제들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 같은 기본적인 경제적 형태들의 재구조화와 재창출은 규제의 시행 방식만이 아니라 규제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할 것이다.

대기업들은 어디로?

블록체인 경제가 대기업에 미칠 영향도 마찬가지로 크다. 기업의 사이즈는 종종 기업 위계의 비용을 감당할 필요에 의해 추동된다. 이 비용은 미완결 계약과 대규모 투자의 기술적 필요에 기인한다. 이런 모델은 출자자 자본주의가 기업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임을 의미한다. 블록체인 위에서 더 복잡한 계약을 할 능력은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자신들의 인간 자본 및 이윤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것과 금융자본에의 접근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는데, 이제는 단절될 수도 있다. 인간 자본주의의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

기업가들은 가치 있는 앱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누구라도 쓸 수 있게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는 이에 대한 대가로 지갑에 마이크로페이먼트가 축적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설계자는 설계한 것을 개방하고 최종 소비자들이 3D 프린터에 그 설계를 다운받아서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사업모델을 채택하면 현재보다 더 (많은) 지역화된 제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들이 생산자들이나 설계자들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개인이 경제에서 하던 역할을 제한할 것이다. 물류회사들은 계속 번성할 것이지만, 운전자 없는 수송의 출현이 이 산업에도 파열을 가져올 것이다.

사업이 파열되면 회사의 조세 기반 또한 파열된다. 정부가 사업체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판매(소비)세에 그리고 심지어는 인두세[한국의 경우에는 주민세가 이에 해당된다―정리자]에 큰 압박이 가해질 수도 있다.

결론

블록체인 및 그와 연관된 테크놀로지 변화는 현재의 경제적 조건을 대대적으로 파열시킬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업모델이 위계와 금융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는 세계를 도입했다. 블록체인 혁명은 인간 자본주의 및 개인의 더 큰 자율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를 보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시행착오를 통해 불확실성을 해소할 것이다. 우리가 기여하는 바는 파열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모델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

[정리자의 덧글]

이 글의 저자들은 예를 들어 ’인간 자본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블록체인의 혁명성을 제도 차원에서 보면서도 그 관점이 확연히 탈자본주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어떤 글이든 중요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어휘나 관점을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이 글의 저자들이 블록체인을 ’국제상관습법‘의 새로운 버전으로 본 부분은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2004)과 『공통체』(2009)에서 ’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을 언급한 대목을 참조하면서 읽으면 유익할 듯하다. 『공통체』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아무도 가게를 돌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지구적 자본이 정치적·법적·제도적 규제와 지원 없이 기능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적 권력구조는 실제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의 서로 다른 층위들을 가로질러 기워 연결된 잠정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성격의 것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경제의 관리와 규제의 지형에서 발전되고 있는 특수한 메커니즘들의 일부—예를 들어 일국적 법체계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계약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옛 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을 재해석한 새로운 법적 관례—를 탐구한 바 있다. (382-383)

그리고 『다중』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이 포착해낸 이 “옛 국제상관습법을 재해석한 새로운 법적 관례”를 “자본의 자기지배”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는 블록체인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이 시점에서 (최초의 블록체인이 구상된 것은 2008년도이다) 다른 요인들을 고려한 것만으로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국제상관습법’ 안에서 발전된 이 ‘계약을 통한 법률’의 일반성과 기업화된 법률회사들의 관리 역량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자본의 자기지배(self-rule)라는 꿈은 매우 제한적이다. (『다중』, 233)

이제 위 게시글의 저자들에 따르면 블록체인 혁명은 국가를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자기지배(self-rule)라는 꿈”을 한편으로는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들을 대체함으로써 이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이다. 이 상반되는 두 경향의 공존이 어떤 귀결을 낳을 것인가에 대해서 위 게시글의 저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며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시행착오를 통해 불확실성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라면 여기에 걸려있는 매우 중요한 싸움의 결과는 다중/커머너들의 투쟁에 달려있다고 말할 것이다. 블록체인의 등장은 자본과 국가의 홈그라운드였던 법, 관례, 규제, 계약의 영역이 계급투쟁의 지형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이익의 분배(이윤 대 임금/복지의 비율의 결정)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이한 두 삶형태― 사적인 것(자본)과 공적인 것(국가)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삶와 공통적인 것(커먼즈)과 특이성(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다중)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삶,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동력으로서의 삶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사이의 싸움을 가리킨다. 이 싸움은 앞으로 인류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싸움이며 그 싸움의 의미에 걸맞은 자기인식이 긴요한 싸움이다. 따라서 돈을 더 많이 번다든가 생활수준이 더 높아진다든가 복지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데 국한될 수 없는 싸움이다. 위 게시글의 저자들이 말한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을 다중 혹은 커머너에서 배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만일 그것이 자본과 국가를 대체하고 자율과 협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당연히 다중 혹은 커머너로서의 행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다중 혹은 커머너는 일단의 개인들(개별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포괄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적 행동의 특정 성격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사실 네그리와 하트는 『집회』(Assembly, 2017)에서 생산의 지형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주체들로 ‘다중의 기업가’를 제시해놓고 있고(http://commonstrans.net/?p=982)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 등도 이윤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가치창출의 새로운 생태계를 제시하고 있다(http://commonstrans.net/?p=732).

 




Assembly(2017)의 맨 마지막 절


  • 저자  :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맨 마지막 절 “Exhortatio”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 정리해서 올리고 싶은 부분들이 남아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맨 마지막 절의 정리를 먼저 올리기로 한다. 

 

오늘날 집회의 자유(모일 자유)는 거의 모든 국가들의 헌법에 나와 있고 세계인권선언에도 나와 있는 권리보다 더 실질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오늘날 집회는 새로운 민주적 방식의 참여와 의사결정에 대한 점증하는 정치적 욕망의 징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정치적 권리의 전통적인 틀을 흘러넘친다. 오늘날 사회운동들은 모일 권리를 선언하고 이 권리를 새로운 사회적 내용으로 채운다. 이 운동들은 결사의 자유를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작업장에서의 파업이라는 전통으로부터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에 기반을 둔 사회파업 형태들이 출현하고 있다. 더 민주적인 모일 권리는 정치적으로만 이해되면 주권적 권력 앞에서 약하게 보일 수 있지만, 모임이 사회적 지형 위에 놓일 때에는 힘의 관계가 바뀐다. 여기서 집회의 자유는 사회적 협동에의 권리, 새로운 결합과 새로운 생산적 배치를 형성할 권리를 의미한다. 협동의 회로들이 점점 더 사회적 생산의 주된 발동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주된 발동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회로들에 기반을 둔 집회의 권리는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널리 보급된 일부 구체적 요구들이 확대된 집회의 권리를 이미 가리키고 있다. 가령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더 이상 급진 좌파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세계 전역의 여러 나라들에서 주류 논의의 주제이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을 제도화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형태의 가난과 혹사하는 노동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부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어떤 모일 권리도 불가피하게 공허한 것으로 남는다. 또한 기본소득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공통적인 것의 화폐와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더 실질적인 제도화를 이미 암시하고 있다.

오픈액세스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에 대한 요구 또한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사적 소유는 지구와 그 생태계를 보호하기는커녕 그 파괴를 촉진하고 있다. 사적 소유는 지식,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형태의 부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촉진하지도 못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추출 경제는 소수를 위해서는 이윤을 성공적으로 창출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회발전에는 족쇄가 되었다. 모이고 협동하고 사회적 삶을 같이 산출할 자유에는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을 지속 가능하게 돌보고 사용할 수 있는 관계들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은 사회적 생산에 필수조건이며 그 미래는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일단 우리가 생산을 삶형태의 창출로 이해한다면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수단을 재전유할 권리와 중첩된다. 모일 자유가 없이는 사회적으로 생산할 수가 없는 상황이 점점 더 되어가고 있다.

집회의 자유는 또한 주체성을 생산하는 대안적 방식을 나타낸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측면과 국가정책의 측면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생산, 즉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생산도 포함한다. 이 주체성이 경제와 국가정책을 뒷받침한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도 그 사회를 담당할 대안적인 주체성이 창출되기 전에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주체성은 점점 더 배치(([정리자] 여기서 ‘배치’(프랑스어로는 ‘agencement’)는 들뢰즈·가따리의 개념이다.))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재산이 아니라 연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협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지배적으로 되었다는 사실은 생산적 주체성들이 관계들의 확대된 망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배치의 논리는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만이 아니라 자연 및 다른 비인간적 존재들을 모두 협동적 주체성들 안에 통합한다. 풍요로워진 집회의 자유(모일 자유)가 협동적 네트워크들과 사회적 생산으로 구성된 새로운 세계를 활성화하는 주체성 배치를 생성한다.

따라서 집회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의 옹호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학정에 대한 보호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국가권력에 대한 균형추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고의 주권자(왕)나 대표자들이 양도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체제의 구성자들 스스로가 성취하는 것이다. 집회는 구성적 권리가 되어가고 있다. 즉 사회적 대안을 구성하는, 정치적 힘을 잡되 사회적 생산에서의 협동을 통해 잡는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모이라는 요청은 마키아벨리라면 ‘덕에의 요청’이라고 부를 그러한 요청이다. 이 덕은 규범적 명령이 아니라 능동적 윤리이다. 우리의 사회적 부에 기반을 두고 지속적인 제도들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구성적 과정이다. 다중이 모이면 무엇이 가능할지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5장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의 내용 전체를 정리한 것이다.

 

Chapter 5. The Real Problem Lies Elsewhere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앞에서 제기한 리더십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다음이 인식되어야 한다.

① 정치적 행동의 사회적 조건이 변한 정도

② 현재의 정치적 난국은 정치 영역의 자립성에 기반을 둔 순전히 정치적인 방식으로는 적절하게 타개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정치적 담론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숨겨진 거처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과연 (근대를 넘어서)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재생산하는 경로를 발견할 수 있을까?

 

Blow the dam!

 

중앙집중화된 지도와 권위를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구성(constitution)보다는 해체(destitution)가 필요한 때가 있다. 때로는 우리에게 다음의 경로가 필요하다 : ‘댐을 무너뜨려라!’

 

이것에 필요한 것.

① 자본주의 세력이 오늘날 사회·정치적 관계들의 총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욕망을 신비화하고, 우리의 생산성을 그들의 목표에 묶어놓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② 삶정치적 지배의 울타리, 화폐의 명령, 정치적 권위, 경제적 기율을 폭파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과정]

다양한 형태의 저항— 반식민·반제국주의 투쟁, 반인종주의 운동, 페미니즘 운동, 노동자들의 봉기, 자본주의적 기율과 통제를 거부하는 여러 형태의 운동 등등—에 대한 대응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지배의 구조들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효과 가운데 하나는, 주로 선진국들에서 공공지출이 그 한계를 넘고 공공 부채가 한 동안 발전과 사회불안에 대한 통제력 유지에 유일한 열쇠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는 확대된 사회적 억압과 사회질서의 재편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조직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가 핵심이었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가 탄생한다. 1973년 칠레의 쿠데타가 신자유주의적 실험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의 적용의 길을 열었다. 새처(Margaret Thatcher)와 레이건(Ronald Reagan)이 자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을 개시했다. 그런데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조금 나중에는 게르하르트 슈로더Gerhard Schroder)도 복지구조 및 노동보호를 파괴하고 전지구적 금융을 지배의 위치로 상승시킴으로써 그 전략들을 실제로 공고히 했다. 블레어, 클린턴, 슈로더는 자본가 계급을 위해서 ‘더러운 일’을 했으며 개량주의적 중도주의의 탈을 쓰고 “신자유주의 혁명의 승리(sic)”를 방관했다. 이 ‘더러운 일’이 공식적 좌파의 죽음을 나타냈으며, 오늘날 그 시체가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무겁게 누르고 있고 민중계급을 대표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봉쇄하고 있다.

 

그 당시 자본주의적 관계는 생산과정을 탈산업적. 삶정치적, 디지털 방식의 개혁을 가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력의 사회적 구성과 자본의 새로운 기술적 구성 사이의 갈등에서 이전에 존재했던, 생산적 사회와 자본주의적 정치 사이의, 저항의 형태들과 지배의 형상들 사이의 모든 상응관계들이 무너졌다.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늘날 점점 더 권력의 순전한 행사로 기능하며 사회적 불안을 엄정한 한계 내에 잡아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의 주권적 행사가 증가하면서 혜택과 특혜의 다양한 메커니즘들, 즉 부패가 증가한다.

 

이것이 1968년에서 1989년까지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구성과 자본의 정치적 구조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약사이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들이 중지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저항의 새로운 경로들을 여는 길을 발견했다. 1995년 치아파스에서 혹은 1999년 시애틀에서 탄생한 대안지구화 투쟁의 주기(cycle)는 9·11 공격 이후에 ‘테러에 대한 전쟁’의 부산물로 종식되었으나, 그 핵심 요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주기—야영과 도시공간의 점거로 특징지어지는 여러 ‘봄들’의 주기—가 2008년 이후에 탄생했다. 이 투쟁들은 타올랐다가 급속히 사라지는 듯했지만, 다른 곳에서 훨씬 더 큰 힘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이 투쟁들도 아직은 오늘날의 필요에 부합하는 새롭고 효과적인 조직형태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왜 투쟁은 그토록 풍성한데, 조직화는 빈약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에는 즉자와 대자의 변증법을 활용했다. 계급의 경험적 실존에서 의식화로. 지금은 이것이 낡은 것이 되었다. 이 변증법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은 의식, 정신, 이성에서 더 상위의 자연을 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의식, 정신, 이성이 삶, 신체, 열정, 존재 자체를 지배한다. 우리는 근대 정치사상의 켄타우로스(반인반수)로 되돌아간다. 오늘날 삶정치의 맥락에서는 조직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켄타우로스의 두 반절을 전복시키는 데서 시작해서 재빨리 그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서 끝나는 성찰이다. 욕구의 체제가 감각과 의식을 조직화하고, 상상력이 이성과 열정 사이의 관계를 가로지르면서 재설정한다. 그리고 성찰은 수행 과정들과 미래에 열려있는 장치들(dispositifs)의 구축을 통해 온다.

 

정치적 구성이 새로운 노동형식의 기술적 구성에 상응하거나 그로부터 직접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고맙게도 노동계급 혹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계급부문이 투쟁에서 다른 이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던 때는 지났다. 산업노동자들이 농민들 대표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등등의 주장을 할 수 있던 때는 지난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구조에 상응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조직화를 발명하는 것은 그것이 전복적인 형태일 때조차 공허한 몸짓이거나 더 나쁜 것이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들을 가로질러 뻗어가는 사회적 협동만이 조직에 적절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정치적 구성과 기술적 구성의 관계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문화 및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경제적 토대가 결정한다는 전통적인 규정(이는 맑스적이기보다는 엥겔스적이다) 또한 무너뜨린다.

 

그람씨와 알튀세르는 오래 전부터 이 틀을 정신주의 철학의 간접적인 산물이며 조야한 유물론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이는 실로 정신을 물질에서 분리하는 형이상학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탄생했다.

그람씨 : “만일 구조라는 것이 ‘사변적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분명 ‘숨은 신’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말고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인간들의 움직임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으로서, ‘문헌학’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객관적 조건들의 집합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원주4 Antonio Gramsci, Further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ed. and trans. Derek Boothma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5, p. 347 (Peter Thomas, The Gramscian Moment, Brill, 2009 p. 275에서 재인용)))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들은 순전한 환상들(‘오류’)이 아니라 제도들과 실천들 내에 존재하는 재현들의 집합들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상부구조에 등장하며 계급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원주5 Louis Althusser,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 Grahame Lock, New Left Books, 1976, p. 155.))

이런 대목들을 거쳐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넘어가는 것이 현 맑스주의의 오래된 경험(투쟁이 위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을 해석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새로운 특징들과 그것을 전복할 다중의 전략을 놓고 볼 때 훨씬 더 확연하다.

 

Second response: seek the plural ontology of cooperative coalitions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운동은 종종 지하로 숨었다 지상으로 드러났다를 반복하는 성격(a Carsic nature)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실천과 주체성의 축적을 발생시킨다. 흐름에서 사회적 존재의 지질학적 침전층들을 낳는다. 우리는 이 정치의 다원적 존재론을 특징짓는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흐름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존재론은 우리의 집단적 실존에 굳게 뿌리를 두고 형성되는 존재(현존재, Dasein, being there)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그런데 ‘역사성이란 상대주의를 함축하는데 역사에 뿌리를 둔 존재론적 방법을 어떻게 제안할 수 있느냐’는 이견이 가능하다. 존재는 필연적인 반면에 역사는 항상 우연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견은 확실성을 의식의 (초월적인) 토대나 초재의 숭고한 차원에서 찾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함축한다. 이와 달리 우리의 역사적 존재론은 경험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으면 경험의 역사성을 그 닻으로 삼고 있다. 현존재(Dasein)의 역사와 역사성은 무차별하거나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이 현상을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고 위에서 보면 상대화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에서 그 행동에 의해 진실한 표현들을 창출한다. 그 진실은 새로운 공통적 존재를 구성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며 그 허위성은 공통적 존재를 파괴하거나 제한하는 정도에 의해 규정된다.

 

딜타이 (하이데거에 응답하면서) : 경험의 영역, 존재자적인 것(the ontic)의 체험의 영역에서 인간 행동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표현 활동(expressive operation)이 실존의 진실을 구축할 수 있다.

 

여러 운동들—2011년 도시공간 점거운동들, 2013년 터키와 브라질의 점거운동, 2011년 여름 이스라엘과 영국, 2012년 퀘벡, 2014년 홍콩, 미국의 경우 2014년 Black Lives Matter 시위.

이 운동들은 상이한 정치적 맥락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상이한 삶형태를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운동들은 동일한 삶의 실재의 동일한 순환과 형상들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일까?

① 투쟁의 레퍼토리를 공유한다. 즉 동일한 악보로 연주를 한다.

② 새로운 민주적 제도를 위한 요구를 공유한다.

 

이 뒤에는 더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운동들이 표현하는 다원적 존재론(plural ontology)이다. 특수한 지역(동네) 문제들에 초점을 두는 소그룹들과 공동체들은 강력한 네트워크 형태로 서로 연결한다. 이 연결과 공통의 언어가 본질적이다. 운동들은 의식하든 아니든 연방 모델에 의거한다. 국가주권의 연방주의적 전통들에서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연합과 마디결합의 연방주의적 양태들이다. 광범한 그룹들과 주체성들이 각자의 자율과 차이를 포기하지 않고 연합을 형성하고 공통의 사회적·정치적 기획들에서 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억압적 힘들이 연합 논리를 깨는 데 집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종교적 광신주의는 종종 분할을 창출하는 효과적 쐐기가 된다. 브라질과 영국에서는 인종주의적 운동들이 종종 성공적으로 도시와 교외의 집단들을 분할한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일부 시위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자극들이 불화를 창출한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구태의연한 경찰의 억압과 언론 캠페인들이 연결을 부수는 도구들이 된다.)

 

이 운동들은 다원적 존재론의 맥박치는 심장을 긍정한다. 상이한 전통들에서 나오고 상이한 목적들을 표현하는 다원적 주체성들, 다수적 시간성 모델들, 투쟁의 다양한 양태들이 협동적 논리에 의해 묶이는 강력한 떼(swarm)를 형성한다. 그 목적은 차이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제도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성적 민주주주의 모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에 맞서고 금융의 독재에 맞서며 지구를 파괴하는 삶권력에 맞서고 인종적 위계에 맞서며 공통적인 것의 자주관리에의 접근을 찬성하는. 그래서 운동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활성화하고 육화하는 이러한 의지를 긍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축에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이 주로 ‘다원성의 정치’(politics of plurality)를 구축다면 이제 운동은 다원성의 ‘존재론적 기계’(“ontological machine” of plurality)를 가동시켜야 한다.

 

[다중]

우리는 이 다원적 존재론의 행위자에게 ‘다중’(multitude)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다중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 기획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의 근원적 다양성을 지칭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치적 기획으로 이해된 바의 다중은 다원적인 사회적 존재론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잇는 돌쩌귀( the hinge between the plural social ontology and the possibility of a real democracy)이다. 우리가 이 존재론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비전이 정치적 지형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강력한 시위들, 반란들, 봉기들을 분석할 때조차도 그렇다. 운동 자체는 다중의 일상적 실천과 능력에 구현된 더 깊은 사회적 실재의 징후,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회로들의 징후일 뿐이다.

 

Third call: take power, but differently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적 힘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힘을 거부함으로써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기존의 권력의 자리들을 단지 더 많은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의도가 훌륭한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비록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낫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를 낳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중구속에 잡힌 듯하다. 힘을 쥘 수도 없고, 안 쥘 수도 없다(we can’t take power and we can’t not take power). 그러나 이는 문제를 빈약한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힘을 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힘’이란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력과 활력]

많은 유럽 언어들에 힘을 나타내는 단어가 둘 있다.

 권력활력
라틴어potetaspotentia
불어pouvoirpuissance
독일어MachtVermoegen
스페인어poderpotencia
이탈리아어((네그리가 이탈리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정리자가 추가함.))poterepotenza
영어powerpower

별개의 용어가 따로 없고 그저 power 하나인 영어. 처음에는 영어의 빈곤함의 사례인 듯이 보인다. 과거에는 ‘power’(활력)와 ‘Power’(권력)로 구분하는 방법을 써봤다. 그런데 더 면밀하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 역설적으로 영어의 힘일 수도 있다. 힘의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할 수밖에 없게 해주기 때문이다.

 

① 마키아벨리의 힘 정의 : 동의를 필요로 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통치의 관계를 구축하고 정당화하는 데서의 결정과 덕, 간지(奸智)와 운으로서의 힘.

② 푸꼬의 힘 정의 : “힘의 행사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작용하는 양태.” 힘에 종속된 주체에게 자유의 여지가 있음을 강조.

― 이 두 정의(定義) 모두 힘이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 행위자들이 질적으로 상이하고 그 지위에 고정된 것으로 파악된다면, 즉 한쪽은 권위로 다른 쪽은 저항으로, 혹은 한쪽은 지배로 다른 쪽은 종속/동의로 파악되면, 그렇다면 권력과 활력 사이의 구분을 유지하고 분석의 초점을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대립되는가에 맞출 수 있다. 이것이 예를 들면 독단적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통설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힘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에 채택하는 해석틀이다. 한편에 자본이 있고 다른 한편에, 종속되고 적대적인 위치에 노동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관계가 고정되면 한 쪽의 우월성과 다른 쪽의 종속성이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식이라는 외적 요인을 들먹이지 않고서는 문제를 그 관계 내에서 해결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와 푸꼬로 되돌아가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힘의 관계가 어떻게 전복될 수 있고 어떻게 활력이 권력을 재구성할 수 있는지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열쇠가 되는 것은 권력(Power)이 그 자체로는 약하고 불충분하다는 것, 활력과의 관계로부터만, 피지배자들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들임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자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여우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힘(force)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간지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야수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인간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기술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기계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이 모든 이미지들은 권력이 살아있고 파괴 불가능한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런데 권력은 악한 실재일 뿐만이 아니다. 힘의 관계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에 맞서는 투쟁은 권력의 현재의 특징들(명령과 지배)을 탈구시키려는 노력일 뿐만 아니며, 권력의 구조적 (경제적/국가적) 골격을 부수어서 주체화와 노동해방의 과정을 가동시키려는 노력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권력과 활력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여 균형을 무너뜨리고 관계의 중심에 활력 개념과 실재를 세움으로써 활력에 우선권과 헤게모니를 주는 노정(路程)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셋째 요청에 도달한다.

① 첫째 요청: 전략과 전술의 전도

② 둘째 요청 : 대의와 규제를 넘어서는 제도의 구축.

①② 첫째 및 둘째 응답 : 사회적 생산의 협동적 네트워크에 토대를 두고 정치적 조직화의 연합들을 읽어낸다. 다원적 사회적 존재론을 창출한다.

③ 셋째 요청 : 정치적 힘을 쥐되 기존의 권력의 자리들을 더 나은 지도자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칭하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권력 자체를 변형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 수단을 포착하는 것이 IV부의 주된 과제이다.

 

II부에서 말할 내용 : 오늘날 다중은 자본주의적 명령 조직화에 맞설 뿐만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자본의 능력을 넘어서는 삶형태들과 생산 및 재생산 형태들을 발명한다.

III부에서 말할 내용 : 자본이 이러한 사태전개에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는가. 착취 메커니즘의 조정, 금융명령 양태들의 개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 그 반대쪽에서 벌어지는 저항과 투쟁의 분석.

IV부에서 말할 내용 : 새로운 지속 가능한 민주적 사회조직화―공통적인 것의 군주(the Prince of the common)―의 구축에 이르는 저항과 전복적 실천의 경로를 설명.

 

Marxism against Das Kapital

 

루카치가 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성취 : 맑스주의 정통성을 갱신하고 근대의 지배적인 권력관―권력을 분할할 수 없는 일자(“one and indivisible”)로 본다―을 극복한다. 로자의 뒤를 따라 서구 맑스주의는 제2, 3 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존재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운 정통성은 ‘『자본론』에 반하는 맑스주의’로 정식화.

 

루카치는 맑스를 읽고 헤겔을 재해석하면서 철학적 행동을 총체성의 해석으로 자리매김한다. 1917년 이후 총체성은 소비에트와 노동계급의 혁명 과정에 의해 재편된다. 이 과정은 총체성을 두 측면으로 변형한다. 총체성을 생산하는 측면과 총체성의 생산물인 측면, 즉 주체와 객체.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지배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윤리적·정치적 행동의 양태이기도 하다. 혁명적 실천은 투쟁 행동의 다양한 특이한 양태들의 연계된 힘을 드러낸다. 서구 맑스주의는 바로 이런 식으로 태어났다. 서구 맑스주의는 스딸린주의적 독단주의에 의해 질식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 그리고 특히 1968년 이후에 이전보다 더 강하게 재탄생했다.

 

서구 맑스주의에서 서구적인 면은 쏘비에트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가진 동구적 독단성과 대조되는 데 있다. 이 이외에 유럽 바깥에 비서구적이며 비동구적인 맑스주의의 강력하고 창조적인 흐름들이 있다. 브라질의 Roberto Schwartz, 불리비아의 Alvaro Garcia Linera, 중국의 Wang Hui, 인도의 Ranajit Guha와 Dipesh Chakrabarty, 미국의 Cedric Robinson, 가이아나의 Walter Rodney. Christine Delphy, Mariarosa Della Costa, Nancy Hartsock 같은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저자들도 유럽이나 미국에 있을지라도 맑스주의의 또 하나의 비서구적 영토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이례적으로 두드러진 기여를 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서구 맑스주의에, 그 이론적 풍부함과 한계에 논의를 국한하기로 한다.

 

루카치에 대한 비판은 많다. ① 노동계급을 일종의 프로메테우스로, 이상적인 혁명과정의 장본인으로 만든 점 ② 노동계급을 유일하게 가능한 해방의 주체로 본 것을 이유로 그를 책망하기도 쉽다. 그러나 루카치의 맑스주의 재발명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세계를 자유로운 생산으로 재구축하는 사회적 주체를 노동자들의 욕망의 총체로 본다. 삶의 전부를, 그 총체를 혁명화하려는 노동계급.

 

1968년 이후 서구 맑스주의는 총체성 개념을 강렬하게 회복하고 시간 속에서 전개시킴으로써 재탄생한다. 과정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연속적 변이.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 사이에서 주체성의 생산을 함축하는 운동으로서의 노동계급의 행동.

 

뽕띠(Maurice Merleau-Ponty)는 역사성의 새로운 경험—생산물이자 생산작용—을 언어와 20세기 후반부의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으로 옮겨놓음으로써 1968년을 앞질러 구현한다. 뽕띠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명시적으로 준거하면서, 역사의 주체성을 통합하고 주체화를 루카치의 프로메테우스주의로부터 (그 힘은 건드리지 않고 유지한 채) 해방시킨다.

 

뽕띠 : “루카치는 주체성을 부수현상으로 만들지 않고 역사 속에 통합하는 맑스주의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적들은 공격하려고 한다.) 그는 맑스주의의 철학적 정수를, 그 문화적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그 혁명적 의미를 보존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의식적 생산물과 의식적 생산성이라는 두 관계가 결합되어 있다.

 

뽕띠는 또한 루카치의 사상을 확대하고 심화함으로써 총체성 개념을 변형시킨다. 이제 관념적이고 총체화하는 퍼스펙티브는 자본의 신비화로서 제시된다. 이 신비화에 따르면 사회는 명령에 ‘포섭’된 것, 시장에서 ‘사물화’된 것으로서 재현된다. ‘실질적 포섭=삶권력.’ 그러나 명령에는 항상 저항이 있고 시장의 위계에 반하는 전복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즉 자본주의적 객관성을 내부로부터 뒤흔들어 혁명적 주체화의 장을 열려 하는 반란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뽕띠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이들은 루카치의 작업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듯하다)처럼 자본주의적 총체성을 신격화하지 않고, 어떻게 계급투쟁이 권력의 실재 총체를 뒤흔들고 연속적으로 다시 여는지를 부각시킨다. 그는 루카치의 담론에서 사물화된 총체성이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총체화되어 있기에 열려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질서를 복구하는 관념론적인 ‘지양’(Aufhebung)이 아니라 파열의 초변증법(hyperdialectic)이다. 뽕띠는 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을 정반합의 화해(pacification)로 보지 않고 환원 불가능한 갈등으로 보는 사고를 개시했다. 유물론적이고 신체적이며 살아있는 변증법이다.

 

1968년에 끝난 ‘단기 20세기’에 자본주의는 무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노동과 노동력의 변형은 삶정치적 생산의 시기를 낳았으며, 이 시기에는 주체성의 생산이 경제적 가치의 창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이 이행을 이해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더 촉진함으로써 그 생산성을 발전시킨다. 자본에 포섭된 사회에서 삶의 세계와 인간 자체의 사물화를 통해 종속을 이루는 자본의 관행은 노동력에 총체성 수준에서 구속복을 입힌다. 자본의 관리이론들을 보면 노동자들의 주체화를 지배하기 위한 이러저러한 정도로 명시적인 제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애원하면서 말이다.”

 

서구 맑스주의의 성취는 사회변형의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진리로서의 총체는 주체성의 해방적 차원에 우선권을 부여하면서 특이성들에 기반을 두어 총체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뽕띠에게서는 이 인식론적 모델이 소련식 독재에 대한 비판에 의해 틀지어져 있다. 소련식 독재는 주체성에 반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서 제시된다. 뽕띠: 코뮤니즘은, 근대와 단절한 변증법 개념을 통해, 통치를 혁명으로 대체하는 영속적인 위기와 계속적인 불균형의 사회가 된다. 이러한 의미의 코뮤니즘은 전통적인 진보관들이나 진보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시적으로 표현되는 적은 별로 없지만, 서구 맑스주의의 또 하나의 성취는 권력관을 갱신한 것이다. 권력은 초월적 통합성이나 신학적 연속성 없이 완전히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들뢰즈가 푸꼬의 권력관을 해석한 것과 호응한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원주16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p. 27.)) 권력은 피지배자(the dominated)에게 ‘삼투되어’(invested) 그들과 그들의 실천에 속속들이 작용한다. 그러나 피지배자도 또한 권력에 대한 투쟁에서 권력이 그들에게 행사한 온갖 실천들과 행위들을 이용한다. 권력을 말하는 마지막 말은 ‘저항이 먼저 온다이다. 들뢰즈: 푸꼬에게는 자본의 전략 이전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맑스주의로 보는 트론띠의 해석의 메아리가 있다. 권력은 다이어그램 안에 완전히 갇혀 있지만, 저항은 다이어그램이 그로부터 파생되는 “외부”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푸꼬에게서 저항이 완전히 횡단적인 다원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푸꼬가 서구 맑스주의의 최종 대표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맑스주의 재해석의 시기에 저항과 투쟁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리더십(지도)의 문제. 권력을 본질로 보는 것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총체가 단편화된 것으로 나타날 때, 운동이 스스로 혁명의 전략을 주장할 때, 리더십은 어디에 있는가?




정치는 과연 자립적인 영역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3장 뒤에 달린 글 “Against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정치적인 것의 자립성에 반대하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의 의미심장한 대표자 가운데 하나는 ‘Primat der Politik’(정치의 우선성) 테제의 레닌이다.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국가권력의 쟁취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귀결을 낳았다. 물론 레닌의 이러한 입장이 당시의 소련의 혁명 전통을 모두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블로그의 보그다노프 관련 글들(특히 http://minamjah.tistory.com/193)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치 영역과 사회·경제 영역이 분리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 공적인 영역(국가)과 사적인 영역(자본)의 짝이 사회적 삶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오늘날 우리가 대안근대의 새로운 삶형태를 그리는 데 필수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고 정치와 사회·경제의 연결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이 글은 엄밀한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은 이해하기 쉽게 ‘정치영역의 자립성’으로 옮기기로 한다.

 

 

정치 영역의 자립성에 반대하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좌파를 구원할 힘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저주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영역의 자립성’이란, 정치적 의사결정이 사회경제적 삶의 압박으로부터, 사회적 필요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전통적 자유주의]

오늘날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주장하는 가장 명민한 이론가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자유주의 사상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특히 정치 영역에 경제적 합리성을 부과한 것)로부터 구원할 수단으로 본다.

웬디 브라운(Wendy Brown) : 신자유주의는 사회정치적 삶을 경제적 계산에 종속시킨다.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있었다—케네스 애로우(Kenneth Arrow). 이런 경우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시장논리의 지배(자유시장에 기반을 둔 경제적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한 방법이다. 권리, 자유, 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아렌트와 공명하는 바가 많으며 적어도 밀(John Stuart Mill)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들 가운데 최고는 진솔하고 귀중한 노력을 보여주지만 민주주의 기획에는 부적절하다.

① 불평등과 비자유의 사회경제적 원천을 공격하지 않는다.

②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만 고려되는 한 민중의 자치능력이 영원히 모호하게 남는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고결하지만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나타난다.

 

[좌파]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측면(사유화, 탈규제)을 비판하고 국가 및 공적 통제의 귀환을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맞서서 케인즈적 혹은 사회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재천명하고 그럼으로써 금융과 기업의 괴물 같은 힘을 제어하고자 한다. Paul Krugman, Alvaro Garcia Linera, Thomas Piketty 같은 이론가들에게서 이런 주장이 보인다. 이들은 우리의 우군이고 (국가와 공적 권위의 문제를 잠깐 제쳐놓으면) 그들의 목적에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 케인즈적 혹은 사회주의적 국가에 대한 호소는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20세기에 기반을 두었던 사회정치적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노조들과 노동계급 조직들은 완전히 망가졌고 조합주의적으로 되었으며 복지구조도 알맹이가 다 빠져나갔고 전문직 연합들(과 시민들 자체)도 향수를 낳을 정도로 산산이 흩어졌다. 희망을 버리고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투항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다중의 생산과 재생산의 삶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조직과 협력의 능력을 인식하면서) 대안적인 출발점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수 지식인 집단]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전위적 형태로 주장하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다. 이 주장은 종종 오늘날의 수평적인 사회운동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된다. 지젝은 바디우를 따라서 “새로운 주인의 형상이 필요하다···좌파의 새처(Thatcher)이다. 새처의 제스처를 반대 방향으로 되풀이할 지도자이다”라고 언명한다.((Slavoj Zizek, “The Simple Courage of Decision: A Leftist Tribute to Thatcher,” New Statesman, 17 April 2013, http://www.newstatesman.com/politics/politics/2013/04/simple-courage-decision-leftist-tribute-thatcher)) 우리는 지젝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는다. 즉 어떤 좌파 지도자를 궁극적 권위의 지위에 올리자는 제안으로 읽지 않는다. 그의 언명들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좌절(그의 이 말은 Zuccotti Park, Tahrir Square, Puerta del Sol이 경찰에 깨끗하게 진압된 2013년 초에 나왔다)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의 형성에 대한 독단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생각들(우리는 이에 공감하지 않는다)에 의해 활성화된 자극적 몸짓들로 이해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에는 중앙 권위와 전통적 지도층을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회운동에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긍정하는 이런 여러 주장들은 신자유주의의 권위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홀려있다는 사실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주권이 좌파의 힘을 복원하는 처방이라는 믿음도 공유한다. 신자유주의가 전통적인 주권적 권력을 붕괴시킨 것은 맞다. 이는 2008년 이후 유럽에서 전지구적 자본이 위기를 관리해오고 금융자본의 지도자들이 부채 국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유럽 나라들에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해온 것을 보기만 해도 안다. 유럽 사회는 화폐의 권력이 창출한 위계적 기준들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금융자본은 대의정치의 전통적 구조들과 일국 정부들의 기능에 대응할 필요를 벗어던진 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맞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정치영역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은 곧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사고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다른 선택사항이 있다. 사회의 비주권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조직화가 가능하다.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부활시키는 대신에 정치영역이 사회영역으로 다시 흘러들어가고 사회영역에 의해 회수되어야 한다. 정치적 합리성과 정치적 행동은 사회적·경제적 삶의 회로들에 항상 완전히 함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역설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시위와 사회운동이 정치영역의 자립성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킬수록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정치영역으로의 복귀’를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이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이 아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주권적 정치권력을 사회적 지형에서 민주적 실험들과 발전들을 완결하고 공고화 하는 필연적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리 코뮌 노동자들의 이중구속(double bind)을 돌아보게 된다. 파리 코뮌 노동자들은 ① 중앙위원회를 해체하고 의사결정력을 모두에게 분산시킨 오류는 패배를 낳지만 ② 중앙위원회를 해체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전체 기획의 민주적 성격을 부정할 것이라는 이중구속에 잡혀 있었다.

우리의 정치적 대안들은 이 이중구속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 기획이 효과적으로 되는 데는 주권이 필요하지 않다. 비주권적 정치적 제도들 및 민주적 조직의 효율성과 그것을 뒷받침할 기존의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 이후의 장들에서 우리가 수행할 과제이다.

 

좌파 개념은 17세기 청교도혁명 신기군의 맹세에서 혹은 프랑스 혁명의 테니스코트 맹세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고 자유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고결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저 기획들과 오늘날 좌파라고 명목상으로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신좌파가 50년 전에 시작한 물음을 다시 한 번 재개하는 것이 이치에 닿을까? 좌파는 오늘날의 사회적 투쟁들에 기반을 둔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좌파라는 개념 자체가 뒤에 남겨져야 할 어떤 것인가?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든 아니든 오늘날의 운동은 새롭게 시작할 필요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할 필요를 여러 번 확인했다. 대안지구화 투쟁에서 보인 분배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서든, 지중해의 봄에서 보인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서든. 어떻든 분명한 것은 정치영역의 자립성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진보적 혹은 혁명적 기획을 양성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주된 장애물이라는 점이다.




사회적 가치를 포획하는 금융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0장 가운데 4개의 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0장 금융은 사회적 가치를 포획한다  

 

금융은 추상(abstraction)과 중앙집중화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금융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가치를 추출한다. 땅에 묻힌 물질의 가치들과 사회에 담긴 가치들 모두를 추출한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생산되며 그 추출(extraction)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로부터 본 금융과 아래로부터 본 금융

  

1970년대에 금융이 경제 및 사회 전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 금융의 발생은 (지구화에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힘의 결과이자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국가 재정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공공 부채를 민간은행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공 거버넌스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권을 금융시장이 쥐게 되었다. 부채의 구조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자 경제발전과 사회 정의가 전지구적 시장과 금융에 종속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인 행정이 금융메커니즘들을 사용하여 국가를 재조직하고 공공 부채와 국가 거버넌스의 이중 위기를 관리하게 된다. 금융화로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저항과 반란 →정부 지출 → 재정 위기 →금융화

 

이러한 진행의 더 작은 버전이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1960년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저항과 도시봉기들은 1967년 뉴어크(Newark)와 디트로이트의 봉기에서 그리고 마틴 루터 킹 2세의 암살 이후 널리 퍼진 봉기에서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일련의 봉기들을 뒤이은 것이 도시의 극적인 재정위기였다. 도시에서 재정 위기들은 증가된 지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주로 기인했다 : 공적 자원(자금)을 대도시 중심들로부터 먼 곳으로 옮긴 것, 도시로부터 빠져나오는 부유한 백인 인구들에 의해 세금 기반이 급속하게 감소된 것, 그 결과 건강에서 주택, 안전, 물 공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서비스들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 이 위기들은 민간 은행들, 금융펀드들의 개입으로써만 ‘해소’되었으며, 은행들과 펀드들은 ‘비상사태’를 활용하여 공적 재화의 큰 부분을 전유하고 공공 기관들의 민주적 기능을 무너뜨렸다.

1970년대의 뉴욕은 이 과정의 고전적 사례였다. 데이빗 하비 : “뉴욕 재정 위기의 관리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이 과정은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에서 국제적으로는 1980년대에 IMF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금융기관들에 의한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재정 위기의 ‘해소’가 오늘날 이 과정을 계속하고 있으며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고 있다.

 

[금융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

① 가치의 생산과 무관하다. 기존의 가치의 소유를 이동시킬 뿐이다. 선진국들은 현재 아무 일도 안 하며 ‘진짜’ 생산은 중국에서만 이루어진다. 금융은 도박이다.(카지노 자본주의).

② 어떤 학술적 주장들은 금융을 도박이 아니라 박탈(dispossession)의 장치로 본다. (금융이 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시초 축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 이런 견해들은 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견해는 부의 발생이 아니라 부의 이전에만 초점을 둔다.

 

아래로부터 보면 금융이 도박에 덧붙여 사회와 자연 세계로부터 (종종은 숨겨진) 가치들을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무게중심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있다. 금융이 자본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오직, 공통적인 것이 탁월한 생산력으로서 그리고 가치의 주된 형태로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추출

  

금융자본은 근본적으로 추상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을 통제하는 사람 사람의 거리가 증가한다.

 

추상은 중앙집중화를 함축한다.

힐퍼딩, 레닌: 중앙집중화는 경쟁을 제거하고 통제를 몇 개의 은행에 집중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금융은 독점을 낳는다. 생산을 지배하는 화폐의 독점.

 

화폐의 그리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의 은행에의 집중은 이윤율 균등화 경향을 낳는다. 이윤율 균등화는 ① 더 높은 이윤을 찾아다니는 회사들의 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② 그보다 더 낮은 정도이지만 일과 더 높은 임금을 찾아다니는 노동자들의 이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동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 맑스는 이를 “이러저러한 정도로 중요한 지역적 차이들을 산출하는 실질적 마찰들”이라고 부른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David Fernbach, Penguin, 1981, volume 3, p. 275.)) 그런데 화폐의 이동은 회사나 노동력보다 제한을 덜 받는다. 따라서 금융과 신용제도가 균등화 과정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금융자본이 최대한의 수익을 찾아 여기저기 흘러다니면 울퉁불퉁한 지형을 흐르는 물처럼 평평한 표면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은행들에 통제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이윤의 비교와 균등화를 향한 경향이 세계 시장의 창출에 기여하는 요인들이다.

 

금융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생산은 산업자본만큼이나 리얼하다. 주된 차이는 생산과 특히 생산적 협력이 지금은 자본의 직접 관여의 외부에서 조직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금융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부로부터 어떻게 가치를 추출하는가이다. 이것이 추상과 추출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이 1970년대부터 나란히 우세한 지위에 이르게 된 방식을 보게 해주는 창문 하나를 파생상품들의 작동이 제공한다. 특히 파생상품들이 척도와 측정의 메커니즘들을 창출하는 방식. 파생상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 지수(index), 증권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계약이다. 파생상품은 보통 미지의 미래를 참조하며 따라서 리스크를 방지하거나 투기의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파생상품들은 수 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쌀, 돼지, 밀 같은 상품들의 선물(先物)시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훈육에 기반을 둔 산업질서와 재정국가가 붕괴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파생상품 시장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기초자산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파생상품은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그 작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 훨씬 너머에 있다.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파생상품들의 척도로서의 역할에 집중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자본이 더 이상 가치를 (적어도 이전의 방식대로는) 적절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맑스와 리카도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노동시간의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분명히 더 이상 불가능하다. 노동이 더 이상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출하는 부가 이제는 (혹은 더 이상)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식, 정보, 돌봄이나 신뢰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서비스의 기본적 결과—이것들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적 생산성과 가치의 측정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파생상품이 측정 문제에 대한 자본의 반응의 일환이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으로부터의 추상이기 때문에 이 추상성으로 인해서 부의 광범한 형태들 사이의 전환의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파생상품들은 통화의 미래 가치나 수확의 결과와 같은 미지의 휘발적인 자산을 파악하여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

 

[Bryan and Rafferty]

이러한 거래의 수립 덕택에 파생상품들은 미지의 가치에 대한 시장 벤치마크를 제공한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Palgrave Macmillan, 2006, p. 37.)) 모든 파생상품은 자본의 형태 전환의 패키지이다. 이 상품들이 모두 합쳐지면 자본형태전환의 복잡한 그물망 즉 파생상품들의 체계(a system of derivatives)를 형성한다. 이 체계에서는 자본의 어떤 조그만 부분이든 다른 조그만 부분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Financial Derivatives and the Theory of Money,” Economy and Society, 36:1, p. 141.))

 

이렇듯 파생상품과 파생상품 시장은 계산의 계속적 과정을 작동시키고 동일 척도로 계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수립하여 이미 존재하거나 미래에 존재할 엄청난 범위의 자산들을 시장에서 서로 대비하여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Randy Martin]

파생상품들이 핵심적으로 하는 일은 미래를 현재에 묶고 상이한 위치, 부문, 특징을 가진 모든 종류의 자본들을 서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원주] Randy Martin, “After Economy? Social Logics of the Derivative,” Social Text, 31:1, Spring 2013, p. 88. 또한 Lawrence Grossberg, “Modernity and Commensuration,” Cultural Studies, 24:3, 2010, pp. 295−332 참조.))

 

그 가치들이 정확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제대로 된 물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맥락에서 측정(치들)이 정밀하고 효과적이냐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가치들은 미지의 것, 측정될 수 없는 것,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들은 그것들에 수량을 각인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의적이지만 실제로 효과를 발하는 수량이다.

 

금융은 (파생상품은 더욱더) 허구적이고 기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적 부의 총체를 놓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혹은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자들인 금융의 대장들과 중개의 군주들은 ‘맘대로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들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런 금융 메커니즘은 위기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킨다는 것을. 곧 살펴보겠지만, 금융의 휘발성이 영속적인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주된 양태로 만드는 한 요소이다.

 

추출의 여러 얼굴들

  

특히 자연자원의 추출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시계를 되돌린 듯하다. 오늘날의 토지수탈과 무자비한 자원 사냥은 뽀또시(Potosi)의 은광과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그리고 토착민으로부터의 토지절도를 상기시킨다. 실로 정복·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는 부를 추출하려는 탐욕에 의해 추동되었다. 인간 역시 노예로서 추출될 수 있었다. 토지에서 인간까지 모든 것이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의 보답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추출이 점점 더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되고 변형되어 사유재산으로 되므로, 오늘날의 추출을 이해하려면 추출이 의존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다.

추출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

② 사회적 부

이 두 형태가 추출주의(extractivism)의 여러 얼굴들을 이해하는 데 첫 가이드가 될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로부터의 추출

지구와 그 생태계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함께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추출은 불의(不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심지어는 파국적인 파괴를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 영향을 미쳐왔다. 추출주의는 어떤 점에서 이 파괴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본 대 지구— 둘 가운데 하나만 생존할 수 있다. 둘 다 생존하지는 못한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 환경과 사회를 파괴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점점 그 파괴의 크기와 빈도가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 Galicia, the Gulf of Mexico, Uzbekistan, Kuwait, Angola 등등. 석탄채굴과 금속 채굴도 광부의 건강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파괴했다. 추출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의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화석연료 회사처럼 행동하게 됨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스밤파(Maristella Svampa)가 경제의 ‘reprimarization’[채광, 석유, 목축과 같은 1차 부문이 다시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정리자]이라고 부른 것이 발생했다.

 

새로운 것은 추출주의 전선의 극적 확대이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채굴]

디지털 장비를 위한 금속 채굴.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석유 채굴을 위한 새로운 지형을 열었다(캐나다 앨버타의 타르샌드(([정리자] 타르샌드 →오일샌드(oil sands) : 신기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석유자원 가운데 하나로서 점토나 모래 물 등에 중질 원유가 10% 이상 함유된 것을 말한다. 원유가 굳어져 반쯤 고체 상태로 땅 표면 가까이 부존하는 경우 이를 역청(瀝靑)이라 부른다. 역청이 모래진흙 등과 섞여 있는 것이 바로 석유모래다. 석유모래에서 역청을 분리한 뒤 이를 가공하면 기름샘에서 뽑아 올린 원유와 성분이 같아진다. 이렇게 생산한 원유를 보통 원유(conventional crude)와 구분해 합성원유(synthetic crude)라 부른다. 오일샌드가 가장 많이 매장된 국가는 베네수엘라이며, 그 다음이 캐나다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유정, 미국의 fracking수압균열법) 이 방법은 새로운 지진 지대를 발생시키고, 대기와 지하수를 오염시켜서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농업]

대규모 농업도 여러 측면에서 추출 산업이 되었다. 옥수수나 콩이 식품이나 사료로 쓰이지 않고 에탄올과 플라스틱의 생산에 직접 투입될 때, 옥수수 밭이나 콩 밭은 유정과 다르지 않데 된다. 땅으로부터 부를 에너지와 산업자원으로서 흡수한다. 삼림파괴에서 농약의 사용까지 이것이 가져오는 환경파괴는 다른 추출과정의 경우와 맞먹는다.

 

[기후변화]

추출주의의 환경파괴 효과는 기후변화의 전망에 의해 한 등급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사고로 인해, 유정과 탄광으로 인해 생기는 오염과 파괴가 비교적 지역에 국한되고 잠재적으로는 역전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괴의 전망이 내재한다.

맥키븐(Bill McKibben) : 지구 기온이 평균 섭씨 2도가 넘지 않으려면 석탄 및 석유 매장량의 80%가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어야 한다. 화석연료 산업은 악당 산업이다. 공공의 적 제1호이다.

 

② 사회적 부로부터의 추출

현대의 추출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로부터 박탈한 가치만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른 범주인 사회적 생산 및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가치 포획도 알아야 한다.

 

㉠ 기업들은 인간 신체 자체를 부의 저장소=추출 대상으로 본다. 신체에 담긴 유전자 정보도 재산으로 추출되어 특허로 보호될 수 있다. 기업들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등이 ‘생물약탈’(biopiracy)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전통적인 지식—이는 오래 전에 전통적인 공동체에 의해 개발되어 공동으로 유지되던 것이다—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 데이터 채굴 혹은 데이터 추출. 오늘날 디지털 골드러시가 존재한다. 데이터의 채굴과 추출이란 거대한 데이터 풀(pool)에서 패턴을 찾음으로써 그리고 그 데이터들이 저장되고 팔릴 수 있도록 구조화함으로써 가치를 포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이터 개념은 가치가 생산되고 포획되는 방식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에서 우리는 구글의 PageRank 같은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의 지식과 지성에 의해 산출된 가치를 포획하는 방식을 서술한 바 있다. 소셜 미디어도 사용자들 사이의 관계와 연결로부터 가치를 포획하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했다. 달리 말하자면, 데이터의 가치 뒤에는 사회적 관계사회적 지성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추출의 다음 얼굴은 사회 영토 자체이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는 건설된 환경 이상의 것으로서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가마솥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동학, 사회적 관계의 패턴들, 혁신적 언어, 정동적 감성 등이 포함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도시 영토 자체에 함입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혈암에서 석유를 끌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금융이 지배하는 부동산 시장은 도시 및 시골 영토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가치를 추출하는 방대한 장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 추출의 그 다음 얼굴은 협력적 사회적 생산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는 다른 여러 측면들을 조합하는 측면이다. 예를 들어 애너 칭(Anna Tsing)은 야생버섯이 오리건에서 채취되어 일본에서 팔리기까지 과정을 추적하면서 자본이 자율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를 포획하는 능력을 짚어낸다. 자본가의 통제 없이 생산되는 가치를 이용하는 것을 그녀는 ‘salvage’(상품 수집[←고물 수집: 정리자])라고 부른다.(([원주]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 63. [정리자] 애너 칭은 이 저서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상품 수집(salvage)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근대적 역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상품 수집’은 실로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삶의 생산에서 산출되는 가치를 자본이 포획하고 추출하는 방식을 탁월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추출은 공통적인 것의 자국을 좇는다. 추출은 산업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자본의 관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부의 형태들에 의존한다. 자동차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석유와 석탄은 땅 속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추출 자체도 생산과정이며 추출된 재료는 정련되고 분배된다.) 이 구분은 사회적 지성, 사회적 관계, 사회적 영토와 관련하여 훨씬 더 명확해진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부과하는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협력하지만, 여기서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된다.

 

이렇듯 부활된 추출의 중심성은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 임대료, 이자)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맥락에 위치한다. 이윤이 목적인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자산소득자(rentier)는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며 생산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부를 축적한다. 자산소득자의 부활된 중심성은 단지 과거의 잔존이거나 역사적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추출주의의 여러 얼굴을 밝혀낸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발전과 역사적 진행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이 발전과 진행은 단순히 직선형도 아니고 순환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지리적·문화적 차이들을 통해 복잡한 혼종적 시간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금융은 현대의 추출주의와 이중의 관계를 맺는다.

① 토지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초기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이 추출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출 회사들과 그 기획들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금융의 통제력도 점점 더 커진다. 이는 앞에서 말한 사회적 장과 및 생물학적 장을 ‘채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② 금융은 또한 직접 추출한다.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로부터의 가치추출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한다.

 

[부채]

부채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는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홈 모기지, 임대사업, 폐쇄(foreclosures), 퇴거는 빈민과 중산층으로부터 부를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들이다. Matthew Desmond : 가령 페이데이론(payday loan)[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정리자]은 빈민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을 끌어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금융 테크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치들을 통해 추출된 사회적 가치는 비활성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회로들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Veronica Gago :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이주민 공동체들을 연구하면서 가치의 사회적 생산과 그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는 금융이 때때로 소비를 목적으로 한 미시대출을 통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때 드러난다. “위로부터 추동되는 금융화는 민중의 자율적인 생산·재생산 실천 형태들을 독해하고 전유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원주] Veronica Gago, “Financialization of Popular Life and the Extractive Operations of Capital,” South Atlantic Quarterly, 114:1, January 2015, pp. 11–28, quote on p. 16. 또한 Veronica Gago and Sandro Mezzadra, “Para una critica de las operaciones estractivas del capital,” Nueva sociedad, no. 255, January−February 2015, pp. 38–52 참조.))

 

금융은 그 자체가 추출적 산업이다. 추상과 중앙집중화의 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가치를 직접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이다. 아래에서 보면 이 과정은 사회전역에 걸친 수많은 상호작용과 협력에 의해 구성되는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출을 위로부터 이해하고 싶으면 화폐를 따르라. 그러나 아래로부터 포착하고 싶으면 공통적인 것을 따르라.

 

 

사회적 생산에서 금융으로

 

아래에서 보면 사회적 생산을 앞에서 말한 이중적 의미에서 인식하게 된다. 즉 ①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② 사회를 생산한다. 우리가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금융의 우세가 사회적 생산의 점증하는 중심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겼다는 것, 궁극적으로 금융은 (산업과 훈육의 체제의 기반을 파괴한) 저항과 봉기의 축적에의 대응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이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 나타내는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포디즘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업노동의 계획된 협력에서 생성되는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훈육체제 및 축적에 의해 구조화되었다면, 포스트포디즘 시기에는 생산적 지식과 협력의 사회적 능력이 사회에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금융이 사회적 생산을 통제하고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 발생시키는 가치를 자산소득의 형태로 추출하는 데 복무한다.

 

추출의 우세함이 착취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는 새로운 기준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맑스의 착취 개념이 가진 시간적 분석틀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일의 일부 동안 생산된 가치에 대해 임금을 받고 노동일의 나머지 시간 동안 생산된 가치는 자본가가 전유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착취와 생산조직화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착취와 생산조직화의 메커니즘들은 서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멀리서 가치를 추출하며 생산주체들을 추상적으로 덩어리로 보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자연이 주는 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파생상품 시장과 중개거래(arbitrage) 전략에 눈독을 들이는 그들은 더 이상 생산을 조직하고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며 노동협력을 발생시키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반대로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협력하고 생산을 계획할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면 하나의 열쇠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성과 그것을 활성화하는 노동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종종 지식, 지성, 인지 능력의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은 디지털 세계의 정점―가령 구글의 Alphabet―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노동의 상이한 층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러시아 인형처럼 차곡차곡 안에 넣어져 있다—건강, 교육, 가사 돌봄을 담당하는 핑크칼라 안에 공장의 블루칼라 안에 사무실 칸막이 안의 화이트칼라 안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칼라 없는 노동자—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 산업들 사이의 시차란 없다. 산업은 1930년처럼 기능하고 농업은 1830년대처럼 기능하는 식이 아니다. 나라마다, 그리고 전지구적 시장 전체에 걸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노동조건들과 과정들은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혼합된다. 금속노동자가 디지털 도구로 극히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고 인지노동자가 일관작업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조작하며 건강 및 교육 노동자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함께 지식과 돌봄, 지성과 정동을 사용한다.

Carla Freeman : 바르바도스의 데이터프로세싱 시설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교차의 탁월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보험회사를 위해 의료(보험)청구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디지털 과제를 수행한다. 이 시설은 노동이 멍하게 만들 정도로 반복되는 블루칼라 공장의 특징을 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처럼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작업은 상투화되었을지라도 칼라 없는 노동자의 경우처럼 지식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핑크칼라로서 명시적으로 여성화되어 있다.(([원주] Carla Freeman, High Tech and High Heels in the Global Economy, Duke University Press, 2000. See also Andrew Ross, No Collar, Basic Books, 2003.))

 

오늘날 스펙트럼으로 펼쳐진 노동—델리의 법률사무소들에서 스톡홀름의 편의점들까지, 상파울로의 자동차공장들에서 오리건의 반도체 공장들까지—은 모든 노동 체제들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전체에 걸쳐서 사회적 생산이 생산활동(지식과 협력의 사용)에서나 생산물(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구성요소들)에서나 점점 더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열쇠는 금융으로 하여금 부를 추출하고 모으게 하는 사회적 생산의 특징들 바로 그것이 또한 저항과 봉기의 씨앗과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맑스의 논의의 도움으로 이 두 날을 가진 성격이 세 단계의 논리적 과정— ① 추상에서 ② 사회적 생산을 거쳐 ③ 주체성으로—을 거쳐 발전함을 파악할 수 있다.

 

① 추상

맑스 :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관계는 노동이 예술/기예의 모든 특징을 잃는 데 비례해서 더 순전하게 발전한다. 그 구체적 숙련이 더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되면서. 점점 더 “순전히 추상적 활동”이 되면서.(([원주] Marx, Grundrisse, p. 297.))

사회적 생산에서 추상은 여러 면에서 극적으로 증가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지식을 내화하고 협력에서 그것을 발전시킬 때 그들의 노동과 그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는 더 추상적이 된다. 그러나 맑스는 ‘예술’의 상실을 향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특수한 예술이나 기술의 상실은 이득이기도 하다.

맑스 : “노동은 이런 노동, 저런 노동이 아니라, 순전한 노동, 추상적 노동이다. 그 특정의 규정성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지만 모든 규정성이 가능하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그렇다면 노동의 추상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 완전히 꽉 찬 것이다. 생산과정과 가치의 추상성이 더 높아지면 자본에 대한 저항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의 이례적 잠재력이 생긴다.

 

② 사회적 생산

노동의 점점 더 일반화되는 능력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전제한다. 특수한 개별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 정립된다. 맑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전제되며, 생산물들의 세계에의 참여, 즉 소비에의 참여는 서로 독립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172.))

그렇다면 생산과정의 점증하는 추상은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공유되는 지식, 문화, 협력의 회로들이 포함된다.

 

③ 주체성

셋째 단계는 이 사회적 토대를 주체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총체성에 노동의 총체성이 맞선다.

맑스: “노동은 물론 특수한 노동으로서는 특수한 자본을 구성하는 특수한 물질에 상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는 모든 물질의 특수성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특수성들 모두로부터의 추상인 동시에 그 특수성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자본에 맞서는 노동도 주체적으로는 동일한 총체성과 추상성을 자체 내에 지니게 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노동이 추상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주체화의 잠재성이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동질적이고 획일적으로 통일된 주체성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주체성들이 협력하고 갈등하는, 차이들의 열려진 장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 생산의 이 수많은 이질적인 주체성들로부터 구성된다.

 

공통적인 것에의 자본의 접근과 공통적인 것의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조직화는 서로 갈라진다. 이는 사회적 복지의 부분 즉 교육, 주택, 건강, 아이들 및 노인 돌봄, 과학적·의학적 연구에서 명백하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본주의적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들을 함축한다. 이 부문들에서 우리는 생산성에 대한 자본의 이해와 사회적 이해 사이의 점증하는 간격을 인식할 수 있다. 이 간격은 다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에서의 차이를 알려준다. 자본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로부터 최대의 이윤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구가 사용하고 인구에 복무할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적으로 적대의 선을 구성한다. 

맑스: 한편으로, 자본은 부의 창출을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노동시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을 살리고 사회적 결합과 사회적 교류의 모든 힘을 살린다. 다른 한편, 자본은 그렇게 창출된 엄청난 사회적 힘들이 노동시간에 의하여 측정되기를 바라고 그 힘들을 이미 창출된 가치를 가치로서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계 내에 가두기를 바란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하늘로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원주] Marx, Grundrisse, p. 706.))

 

주체성의 다수성과 이질성을 강조하게 되면, 상황은 훨씬 더 폭발의 잠재력을 갖게 된다.

 

사회적 생산의 다수적 차원이 일정한 폭발성(휘발성)을 함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노동력이 생산에서 헤게모니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생산과정에 들어있는 추상이 공통적인 것의 여러 형태들의 출현을 함축한다면, 그리하여 자본가로서는 생산자들의 종속(subjection)이 필요하고 생산자들에게는 주체화(subjectivation)의 잠재력이 열린다면—그렇다면 자본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만일 자본이 사회적 생산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면, 이는 완전히 생산과정을 봉쇄하는 데로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화폐라는 극단적이고 격렬한 형태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명령을 부과해야 한다. 이로써 가치의 금융적 추상이 구현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전복적 주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확연한 계급 분할의 진행이며 계급적대의 원천이 된다. ① 한쪽에는 금융시장에서 생성되는 이자로 먹고 살며 자신들이 축적한 사유재산에의 배타적인 접근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② 다른 쪽에는 집단적 지식과 지성 및 사회적 소통 능력, 돌봄 능력, 협력 능력을 통해 사회적 부를 생산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자유롭고 열려있는 접근을 통해 안전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전선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




번역으로서의 ‘말 잡기’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의 뒤에 딸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모든 사회·정치적 운동의 중심 과제는 새로운 주체성들이 발언권을 잡는 것, 혹은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말을 잡는 것(prendre le parole, 발언하다)이다. 예를 들어 2011년 이래 계속적으로 샘솟아오른 다양한 야영 및 점거 투쟁들은 난점과 결점을 안고도 효과적으로 ‘말 잡기’(taking the word)의 장소들을 구축했다. 그러나 말 잡기는 그저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말 잡기는 말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말에 새로운 사회적 행동논리와 결합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 잡기는 또한 당신의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고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타인들과 만나는 것, 그리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말 잡기는 번역의 과정이다.

 

첫째 의미에서의 말 잡기는 우리의 정치적 어휘목록에 있는 핵심적 용어들이 마치 우리가 오늘날 살고 행동하는 방식에 맞추어 번역할 필요가 있는 외국어인 양 취급한다. 이는 때로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함하지만 더 많은 경우 그것은 기존의 용어들을 돌려잡아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는 일이 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공화주의적’이라는 말이 18세기에 유럽과 북미에서 변형된 것, 혹은 1871년 이후 ‘코뮌’이라는 말이 유럽 전역에서 ‘사회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 혹은 ‘소비에트’라는 말이 1905년과 1917년 이후에 혁명과 민주주의의 밀도 있는 이론을 위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 용어들의 정치적 번역은 추상적으로 혹은 진공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실천 속에서 실현되었다. 이런 식으로 발언권 쥐기, 말 잡기는 현실에서 출현한다. ‘현실 잡기‘(taking of reality)를 산출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러한 번역 작업이 정치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왜곡하는 데 전략적으로 복무한 적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1997년 노동당선언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어휘를 수정했다. ‘사회적’이란 말이 완전히 중립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사회주의’는 ‘사회 서비스’와 혼동되었으며, ‘자유’(freedom) 개념은 사회적 투쟁과의 연결이 없는 ‘자유권’(liberty)으로 제시되었고, ‘당’ 개념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공통체에의 준거를 다 잃고 그저 개인들의 단체가 되었으며, 계급투쟁 개념은 소수와 다수의 대립이 되었다.(([원주] Paolo Donadio, “La nuova lingua del New Labour,” doctoral thesis, Universita Federico II, Naples, 2001))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전통의 언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는 주류 어휘 목록의 일부 결정적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와 결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번 장에서 기업가정신을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회주의 어휘 목록의 개념들을 번역해야 하는데, 신노동당과는 반대로 움직여서 계급투쟁개혁복지 그리고 혁명에 오늘날의 현실에서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한때 전복적이었던 어떤 용어들은 분명 의미가 잘못 사용되었거나 흐려졌거나 텅 비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이전에 가졌던 활력을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의미심장하고 유용한 것은 전통적인 개념들을 우리의 새로운 현실로 옮겨놓고, 단어들을 사회적 실천을 구성하는 관계로 가져와서 열정과 운동을 활성화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쇠로 만드는 노력이다. 정치적 사유에서의 모든 발본적인 기획은 우리의 정치적 어휘를 재정의해야 한다.

 

말 잡기는 또한 둘째 의미에서의 번역을 의미한다. 항상 다수의 말을 하는 주체성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 누구도, 모두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반복해야 하는 당 노선을 말하기 위해서 발언(말 잡기)하는 것을 바라거나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완전히 죽은 언어, 목석의 언어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방식의 말 잡기는 이질적인 목소리들과 (나오키 사카이의 용어를 쓰자면) ‘이질언어적’(heterolingual) 공동체들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이 목소리들과 공동체들은 각자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번역하고 소통할 수 있다.(([원주] See Naoki Saka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Sandro Mezzadra, “Living in Transition: Toward a Heterolingual Theory of the Multitude,” http://eipcp.net/transversal/1107/mezzadra/en; and Sandro Mezzadra and BrettNeilson, Border as Method, Duke University Press, 2013.)) 이는 자멘호프보다는 조미아(Zomia)의 세계이다. 즉 자멘호프가 발명한 에스페란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제임스 C. 스콧이 근대에 대한 대안적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문화가 혼합된 지역이다.(([원주] James C. Scott,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Yale University Press, 2009.)) 여기서 필요한 번역 과정은―이는 언어적인 동시에 문화적·사회적·정치적이다―특이성들을 공통적인 것 안에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커머닝이다. 그런데 앞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획일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그 반대다! 공통적인 것은 이질성을 위한 플랫폼이며, 구성적 차이들 사이의 공유된 관계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이주자들을 보자. 국경들과 나라들, 사막들과 바다들을 가로지르고, 게토에서 불안정하게 살면서 생존을 위해 가장 굴욕적인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며, 경찰 및 이주반대 군중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이 이주자들은 번역 과정과 ‘커머닝’의 경험 사이의 핵심적 연관들을 입증한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다중이 옮겨갈 때나 정지했을 때나 서로 소통하는 새로운 수단, 같이 행동하는 새로운 양태, 서로 마주치고 모이는 새로운 장소들을 발명한다. 요컨대, 이들은 특이성들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특이성들이 번역의 과정을 통해 함께 다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주자들은 장차 다가오는 공통체이며, 가난하지만 언어가 풍요롭고, 피곤에 짓눌리지만 신체적·언어적 사회적 협동에 열려 있다. 오늘날 정당하게 말을 잡으려 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성들은 이주자들처럼 말하는 (행동하는·살아가는·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레비아탄』의 원래 속표지 그림은, 홉스 자신이 직접 맡긴 것인데, 왕의 신체가 영국의 모든 남성 신민들의 신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 국가, 주권자(왕) 사이의 통일성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제 이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인종들과 젠더들의 특이한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더 나아가, 움직이고 서로 마주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그러면서도 공유된 관계에서나 갈등하는 관계에서나 협동할 수 있는 그런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그런 다중의 이미지가 번역의 과정― 말 잡기―이 어떻게 주권의 구조를 전복하고 공통적인 것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원주] Adolfo Munoz’s video installation “Midas” presents such an animated visual representation that transforms the frontispiece of Hobbes, Leviathan (http://amunyoz.webs.upv.es/blog/midas/).))




기업가로서의 다중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 가운데 맨 뒤에 달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9장 다중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무엇보다도 다중에 속한다.(([정리자 주] ‘entrepreneurship’은 가장 포괄적으로는 기업가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며 ‘존재’에는 정신, 의지, 행동, 사고방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용어의 잘 알려진 우리말 옮김은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맥락에서는 이를 채택하지만 이 옮김이 잘 안 맞는 맥락에서는 가령 ‘기업가활동’과 같은 식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이 가진 협력을 통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능력을 가리킨다. 다른 많은 용어들처럼 이 말도 왜곡되었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두 경로 즉 간접적 경로와 직접적 경로를 통해 살펴본다. 전자는 징후적 독해로서 슘페터의 기업가론을 다루어 다중의 협력적 힘을 자본이 계속 강탈함을 밝힐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기업가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다중의 잠재력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로는 존재론적 독해로서 다중의 생산적인 힘을 직접 살펴보면서 다중의 리더십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리더십이 의미하는 바에 이런 맥락에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기업가가 되는가

 

기업가는 일이 되게 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의 본질은 기존의 노동자들, 아이디어들, 기술들, 자원들, 기계들 사이에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창출하는 것이다. 즉 기업가는 새로운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s)(([정리자 주]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이다.))를 창출한다. 이 배치는 역동적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은 단지 ‘변화에 적응하는 대응’만을 추구한다. 진정한 기업가는 ‘창조적 대응’을 수행한다.

 

결합의 본질은 협력이다. 생산성 증가의 열쇠가 기계 체계들과 연계된 노동자들의 협력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는 맑스에 가깝다.

 

맑스는 협력이 생산성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을 변형하고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노동자가 계획된 방식으로 다른 노동자들과 협력할 때, 그는 그의 개인성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그의 유적 능력을 발전시킨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1976, volume 1, p. 447.)) 인류의 힘은 협력 속에서 실현된다. 새로운 사회적 존재가, 새로운 기계적 배치가, 인간·기계·아이디어·자원 등등의 새로운 구성이 이 과정에서 창출된다.

 

슘페터가 잘 알고 있듯이, 기업가는 보수가 지급되는 협력 즉 노동자들의 협력 이외에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협력 즉 방대한 사회적 장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후자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력 혹은 폭력이 필요하다. 맑스도 협력을 감독하는 자본가를 전략을 지시하는 전쟁터의 장군에 비유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은 항상 무력의 위협 아래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슘페터의 비유는 기업가가 부과하는 협력이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서 (보수를 받든 안 받는 모든 인구에게) 효과를 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간다. 사회적 노동은 보수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특수한 생산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포디즘 모델의 위기 시에 외부화(+ 공장의 분산, 복합산업지대들의 구축)로 이어졌던 가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의 소프트웨어 테크놀로지 파크들까지, 북부 이탈리아와 바바리아의 혁신적 생산센터들에서 멕시코와 중국의 자유무역지대들 및 수출가공지대들까지, 방대한 사회적 장의 생산력을 관할하는 이 기업가적 ‘결합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업가들은 누구인가? 『경제발전의 이론』(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의 1911년 초판에는 들어있으나 나중 판에서는 삭제된 대목에서, 슘페터는 새로운 결합 및 기업가정신에 기반을 두어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눈다. ① 관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쾌락주의적’인 대중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다. ② 예리한 지성과 민활한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볼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다. ③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행동한다. 이들은 쾌락주의적 평형을 싫어하며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힘, 명령하고 지배하는 힘, 그리하여 ‘성공적인 행동’으로 이르는 힘, 특별히 빛나는 지성이 없이도 그렇게 하는 힘이다. 여기서 슘페터가 기업가정신은 리스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에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행동인’(Man of Action), 즉 복종을 요구하는 인격체이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슘페터는 노동자, 농민, 장인 등으로 이루어진 대중을 쾌락주의적이고 수동적이고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제시하는 것이다.

 

슘페터의 ‘행동인’의 인간학은 분명 조야하지만, 미디어가 주도한 오늘날의 기업가 열풍에서, 특히 닷컴들과 스타트업들의 디지털 세계에서 분명하게 공명된다.

 

그러나 그가 1934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개정했을 때 그는 기업가라는 영웅적 형상을 버린다. 그는 이제 기업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의 바람직함을 납득시키고 자신의 지도에 대한 확신을 창출하는 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창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 그는 그에게 돈을 대줄 은행가만 납득시키면 된다. 금융의 점점 더 강력해지는 지배가 기업가를 대중의 동의를 얻는 지도자에서 은행가에게 청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폐, 금융, 재산의 힘 및 그것이 배치하는 경제적 강요가 전통적인 권위와 동의의 방식을 대체했다.

 

40년대에 들어와서 슘페터는 대기업에 조직된 재산과 소유조차도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의 동의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재산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생명력을 빼낸다···. 탈물질화되고 탈기능화된 부재자 소유는 재산의 활력적인 형태처럼 인상을 강하게 주어 도덕적 충의를 끌어내는 식이 아니다. 결국 진정으로 사업을 지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거대 기업의 안에든 바깥에든.”(([원주]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Harper, 1942, p. 142.)) 이 시점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진하는 유일한 길은 중앙집중화된 계획임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슘페터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그는 대중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생산적 협력이 분산된 다중심적 회로들의 형태로 사회적 장 전체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결합들이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서 점증적으로 조직되고 유지되고 있다. 고정자본을 재전유할 잠재력과 함께 다중이 생산적 협력의 생성과 실행에서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생산이라는 전장에 장군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군대가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방향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택할 수 있는 옵션

① 내적 지배 : 노동기율로 환원,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에 순응하도록 강요, 가령 디지털 테일러주의 같은 것으로 민중의 지성·창조성 및 사회적 능력의 삭감.

② 외적 지배 : 상대적 자율성을 띠며 사회가 생산하는 가치를 외부에서 추출. 금융.

 

 

다섯 번째 요청 : 다중의 기업가정신

 

슘페터의 생각에는 다중의 기업가, 즉 사회적 협력의 자율적 조직화가 잠재해있다.

 

생산양식이란 삶형태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의 형태의 생산을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사회적 생산에서는 상품보다도 사회 및 사회적 관계들이 생산과정의 직접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고 삶형태를 재생산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노동의 생산양식이 바로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등장하는 장(場)이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①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기업가가 되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빠져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활성화하는 협력의 메커니즘들과 관계들이다. 개인적으로 당신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이미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가하는 위협을 내화하고 순치하려는 시도이다.

② 또 하나 제거해야 할 신비화는 사회적 기업가정신이다. 이는 때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좌파 정치가들에 의해 지지된다. 사회적 신자유주의. 자선.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사회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기업가정신의 연계는 공동체 네트워크들과 자율적 협력양식들을 파괴한다.”

 

다중의 기업가는

①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이다.

②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

③ 사유재산의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와 공통적으로 되어야 한다.

 

생산적 협력의 네트워크들, 생산·재생산의 사회적 성격, 다중의 기업가로서의 능력들—이것들이 전략적 힘의 견고한 토대들이다.

 

 

사회적 생산→사회적 연합 →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

 

생산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① 과정이 협력적이다.

② 생산의 결과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 자체이다. ‘인간생성적’(anthropogenic) 혹은 ‘삶정치적’(biopolitical)

 

이 두 의미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곧바로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적 소유는 ① 그것이 생산을 낳는 협력의 관계를 봉쇄하고 ② 생산의 결과인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 생산에 점점 더 족쇄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가는 경로는 직접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를 천명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행동 기획들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생산이 창출한 잠재력은 사회운동들과 노동투쟁의 결합이 실현될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적 형태이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들이 연대하거나 사회적 연합(social union)이라는 형태의 혼합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정의가 극히 모호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 sindacalismo social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원주]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La torsione neoliberale del sindicato tradizionale e l’imagginazione del ‘sindicalismo sociale’: Appunti per una discussione,” http://www.euronomade.info/?p=2482. 또한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eds, Sindacalismo sociale, DeriveApprodi, 2016, especially their introduction 참조.)) 노동투쟁과 사회운동의 교차 혹은 교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합주의는 한편으로는 노동 조직화의 힘을 회복하고 일부 기존 노조들의 보수적 행동을 극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수명과 효과를 강화할 희망을 제공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해묵은 관계를 전복한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경제투쟁(노조 투쟁)은 부분적이고 전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이 이끄는 정치투쟁과 연대하여 지도를 받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가 제안하는 양자의 연대는 전술과 전략의 관계를 뒤섞는다. 경제적 운동이 구성된 힘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를 ①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안정되고 발전된 조직 구조에 입각할 수 있게 하며 ② 노조의 투쟁을 임금과 직장을 넘어서 노동계급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대할 뿐만 아니라[사회적 영역의 확장] 노조들의 경직된 위계구조와 낡은 투쟁방식을 사회운동의 동학으로 부수게 해준다[방법의 쇄신].

 

영어권에서 사회적 연합의 고전적 사례는 1900년 남아프리카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3자 연합이다 : ①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②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③ the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1997 : Reclaim the Streets와 Liverpool 부두노동자들

· 1999 시애틀: Teamsters and Turtles(환경단체들) 사이의 짧은 협력

· Federation of Metal Workers(FIOM)과 교육, 건강 등의 부문의 풀뿌리 연합들(COBAS) 같은 이탈리아의 일부 역동적 노조들, 그리고 미국의 the 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이 계속 사회운동 연합을 실험해왔다.(성공의 정도는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적 연합주의도 변해야 한다. 이전에는 노조와 사회운동의 사이의 외적 연대 관계를 추구했는데, 이제는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내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조직화와 사회운동을 단지 친밀한 유대를 가진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보고 노동의 지형이 점점 더 삶형태의 지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를 이렇게 새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직장을 넘어가는 넓은 틀에서 사회적 생산·재생산을 이해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 자체가 이제는 공장이다. 더 정확하게는 공동으로(in common) 생산된 공간이며 미래의 공통적인 것의 생산·재생산의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수단과 삶형태에 동시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생산 및 재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가 불가분하게 엮이어 있음을 보여준다. 투쟁들은 ‘공통적인 것에의 동등하고 개방된 접근 + 공통적인 것의 집단적 자주관리’를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구축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이는 탈자본주의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2013년 헬스케어 예산삭감에 대항한 “marea blanca”(‘white wave’) 시위와 2015년 자치도시 선거에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여러 큰 도시들에서 헬스케어 및 기타 사회적 서비스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목적을 가진 선거연합들이 승리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선이 존재한다.

 

사회적 연합주의의 주된 무기는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다.조직된 노동거부는 처음부터 노동조합의 힘의 기반이었다. 노동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 지형에서 역사적이고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틀 안에서는 비고용 노동자들, 비임금 가사노동, 불안정 노동자들 및 빈자가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 공급의 중단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오래 전에 거부의 전략이 모든 사회 집단은 아니더라도 광범한 집단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적어도 순종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궁극적으로 누구나 자발적인 노역의 공급을 중단하고 사회 질서를 파열하는 위협을 가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 즉 공통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기반이 되고 생산적 협력의 회로들이 사회 전역에 확대된 시대인 오늘날에는 거부의 힘이 사회적 지형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다. 사회 질서의 파열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지는 구분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합주의가 여는 잠재력이다. 두 전통 즉 ① 노동운동의 산업생산 차단 ② 사회운동의 사회 질서 파열의 전통이 합쳐져서 화학변화를 일으켜 폭발적 혼합물을 창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총파업이라는 생각이 새로운 의미, 더 강력한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총파업은 거부일 뿐만 아니라 긍정이기도 해야 한다. 즉 협력의 회로들과 사회적 생산의 잠재적으로 자율적인 관계들—이 관계들은 임금노동의 내부와 외부에 공히 존재하며 공유하는 사회적 부를 사용한다—을 드러내는 기업가정신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다중이 필요로 하는 무기는?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5장 1절 “A Hephaestus to arm the multitude”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정리자주] 헤파이스토스는 아킬레스를 무장시켜 주었다. 고유명사에 부정관사를 붙인 “a Hephaestus”는 여기서는 다중을 무장시켜줄 ‘우리 시대의 헤파이스토스’라는 의미이다.))

 

무장한 자기방어의 두 사례

① 1871년 파리 사람들은 프랑스 군대가 몽마르트르의 포대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꼬뮌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② 1967년 5월 26명의 흑표범당원들이 장전된 총을 들고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사당에 들어와서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흑인 공동체들을 방어할 권리와 의도를 선언한다.

 

다중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무기는 무엇인가? 오늘날 총알과 포탄이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종종 패배를 불러오고 심지어는 자살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무기를 쓸 수 있는가?

 

만일 방어적 무기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시작하면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치 투사들이 그 무기로 인해서 한갓 범죄자들로 변형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무기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우리는 게르니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을 원한다. 승리를 원한다. 우리는 무기 사용의 포기가 아니라 무기의 문제가 다른 식으로 제기되기를 바랄 뿐이다.

 

두 방향의 무기

① 외부를 향함. 적에 대한 방어

② 내부를 향함, 주체 자신의 변형

방어적으로는 전쟁의 거시적 폭력과 금융·가난·재산·젠더 억압의 미시적 폭력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는 또한 내적으로 자율을 구축하고 새로운 삶형태를 발명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

 

이 두 기능의 순위를 전도시키는 것이 열쇠다.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권을 가지고, 방어에의 적용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정치적 힘은 총열에서 나온다”(마오)라는 말은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적·정치적 힘,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나온다.

 

꼬뮌의 진정한 힘은 그 대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일상적인 활동, 그 민주적 거버넌스에 있었다. 로스(Kristen Ross)가 훌륭하게 기록했듯이, 정치적 혁신은 코뮌의 수립에 선행한 시기 동안 파리 인근 지역들의 친목모임들과 클럽모임들에서 준비되었다.(([원주] Kristen Ross, Communal Luxury, Verso, 2015, pp. 11–29.)) 마찬가지로 흑표범당의 힘도 총의 과시에 있지 않고 무료 아침식사나 무료 건강클리닉과 같은 사회적 프로그램들의 구축에 있었다. 사빠띠스따는 그들의 힘이 EZLN(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기와 군사적 명령구조에 있지 않고 공동체 평의회들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실험들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우선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전투를 해야 하고 일단 이렇게 평화와 안전을 수립한 다음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으로 시작하면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폐허에서, 현재의 혼돈과 폭력에서, 우리의 방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시키면서 구축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방어를 위한 무기의 효율성은 무엇보다도 구축하는 투쟁에 어떻게 복무하느냐를 놓고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몽마르트르의 대포나 흑표범당의 총이나 심지어 EZLN의 방어적 무기들을 이 기준으로, 즉 무기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복무했느냐 그것을 방해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다중에게 적합한 무기를 찾을 때 무기의 주체성 측면의 능력에,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유지(혹은 파괴)하는 데서 무기가 내는 효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무기와 군사적 행동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영감을 고취하는 무장투쟁의 사례들은 민주적 형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동시에 해낸다. 예를 들어 쿠르드족 운동은 2014년에 IS 전투원들의 전진에 맞서서 로자바(Rojava, 시리아령 쿠르디스탄)의 코바니(Kobane)를 방어하기 위해 총과 폭탄을 필요로 했다. 쿠르드족은 미국으로부터 제한적으로 도움을 받고 터키의 빈번한 방해를 받으면서 전통적 군사적 무기로 전투에서 이겼다.

 

이 승리를 전장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로자바의 쿠르드 공동체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고 있었으며 ‘민주적 자율’의 한 형태를 발명하고 각 포스트마다 두 명(남성 한 사람, 여성 한 사람)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자치 평의회들을 수립했다. 이렇듯 극단적인 혼돈과 폭력의 조건에서도 진정한 힘이란 낡은 사회질서를 변형하고 새로운 민주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공동체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이 경우들에 주체성의 생산은 단순히 의식고취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론적 침전으로서 사회적 존재를 지질학적인 침전의 양태로 층층이 구축한다. 이것이 삶정치적 변형이다.

 

해방된 지역에서 민주적 사회조직(종종은 직접 민주주의의 사회조직)의 구축을 무장투쟁과 병행했던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사례들이 있다.

 

시인 르네 샤르(René Char)가 말하는 사례

샤르는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이끌고 나치 군대와 프랑스의 파시즘 협력자들을 저지시킨 바 있다. 그는 어떻게 게릴라 잡색부대(a motley crew)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동학을 창출했는지를 설명한다.

 

시인 프랑코 포르띠니(Franco Fortini)가 회상하는 사례

1943년 8월 이탈리아 게릴라들이 발도쏠라(Val d’Ossola)에서 공화국을 창립하여 그 지역을 무장투쟁의 기지로 활용하는 동시에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성공했으며 곧바로 압도적인 적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발명의 환상적인 도가니였다.

 

저항투쟁의 끔찍하면서도 진실한 측면을 나타낼 말이 없다. 이 측면은 혼란스럽게 만들면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나타낼 유일한 말은 시의 말이다. 시의 말은 단테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다. ··· 역사학은 저 투쟁의 저 가장 끔찍하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측면들을 허용한다. 당신의 마음에 절절하게 다가간 유일한 진짜 게릴라 노래의 가사는 “중위도, 대위도, 대령도, 장군도 없었네”라는 것을 역사학은 누락한다. 이는 강렬한 아나키의 외침으로서 저 순간들에는 완전한 진실이었다.(([원주] Franco Fortini, Un dialogo ininterotto, Bollati Borighieri, 2009, pp. 63–64.))

 

이 노래가 공화국을 창립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이 프랑스 알프스 저지대와 발도쏠라의 해방된 지역들에 게릴라들이 무기를 들고 민주주의의 구축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코바니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독립전쟁 동안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

1961년 10월 항의하는 알제리 민간인들 수백 명이 파리에서 프랑스 국가에 의해 학살된 데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공동체들이 구축되었으며 이 공동체들이 한동안 해방된 알제리의 윤리적·정치적 심장부를 구성했다. 여기서도 무장전위들을 산출하는 다중의 저항과 다중을 고취하는 무장 전위들이라는 두 벡터들이 동등하게 교차하고 혼합된다. 그리하여 민주적 다중의 구성과 전투적 주체성들의 산출 사이의 견고하고 효과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러나 반(反)파시즘 저항의 영웅주의에 너무 빠지지는 말자. 아무리 극심한 조건에서도 새로운 민주적 형태들을 발명해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파시즘 체제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무기에의 호소는 반(反)생산적이고 자살적이다. 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력과 무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기의 내적 효과와 주체성 산출의 측면에 초점을 두면 무기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정하게 된다. 무기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기계와 공고하게 결합되는 지식, 정보와 같은 고정자본이 오랫동안 자본에 효과적 무기로서 복무해왔다. 맑스: “노동계급의 반란에 대응할 무기를 자본에 공급할 목적으로 1830년 이래 이루어진 발명의 온전한 역사를 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volume 1, p. 563.))

 

그 사례들

1970년대에 도입된 표준 컨테이너는 조직된 부두노동자들(전통적으로 가장 반란적인 노동부문)의 힘을 무너뜨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들이 채택하는 알고리즘들이 지성과 사회적 관계를 강탈함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구글의 PageRank 알고리즘. 이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지성을 고정자본의 형태로 추출하고 축적한다.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정리자주] ‘기계적’(machinic)은 들뢰즈·가따리에서 온 개념이다. 여기서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은 지식, 정보, 이미지 형태의 고정자본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즉 ‘고정자본’을 수식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긍정적으로 다중의 주체성을 수식하는 말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 “We, Machinic Subjects” 참조.))은 단지 중립적인 힘이 아니다. 산 노동을 통제하고 산 노동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재산소유자들이 행사하는 힘이다. 만일 우리가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되찾는다면, 우리는 지식과 지성을 축적한 기계를 산 노동의 손에 쥐어줘서 죽은 자본의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무기들을 쥐어서 중립화시킬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그것들을 공통적이고 모두의 사용에 열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디지털 알고리즘과 같은 삶정치적 무기들이 현대의 투쟁에서는 가장 중요한 급소들일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스에게 만들어준 방패의 전면에는 공동체 전체와 그 세계의 구성이 동심원들의 모양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아킬레스는 사실 공동체 전체에 의해 보호된다. 다중의 방패의 동심원들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형태, 인류의 새로운 형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들, 지구, 우주 사이의 돌봄의 새로운 관계들을 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