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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 바이든’?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October 16,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GxSN4ip_F6M&list=TLPQMTcxMTIwMjDZLmYzc8ZbYQ&index=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올해 10월 16일(대선 18일 전)에 The Sanctuary for Independent Media (in Troy, NY)에서 한 강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미국의 현실이 강연 내용에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소개한다. 강연이 제법 길고 질의응답도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몇 번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 올리는 것은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대립구도의 허구성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강연의 원고는 https://scheerpost.com/2020/10/19/chris-hedges-the-politics-of-cultural-despair/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9:35 지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위험한가요? 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부정직한가요? 네. 트럼프가 열린 사회에 더 위협이 되는가요? 네. 그러면 바이든이 해결책인가요? 아닙니다!

바이든은 변화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동일한 상태를 좀더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냉담과 혐오로 투표를 하지 않는 최대의 유권자층인 1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3일 실시된 미국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가 1억 6천만 2천 명 정도라고 하니 전체 등록유권자 2억 3천 900만 명에서 이 수를 제하면 등록유권자 가운데 대략 7900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헤지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투표율이 높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사기저하는 의도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의 대상의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미디어들은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2분 증오’(the Two Minutes Hate)의 소비자 버전입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선호와 습성에 관한 상세한 디지털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의 견해들과 편견들의 구미에 능숙하게 맞추고 이것들을 강화하며, 다시 우리에게 되팝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맞춤 분노 패키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대중은 조작된 분열을 가로질러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는 조작된 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싸구려 리얼리티 쇼가 됩니다. 시민들의 담론은 악담과 거짓으로 물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은 문제 삼아지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어집니다.

정치관련 보도는 스포츠 보도를 모델로 합니다. 세트는 일요일 미식축구 경기의 세트처럼 해놓았습니다. 앵커는 어느 한쪽 편이고, 각 팀에서 두 명씩, 4명의 해설자들이 나옵니다. 모니터에서는 득점이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정치적 정체성들은 쉽게 소화될 수 있는 상투형들로 환원됩니다. 전술, 전략, 이미지, 선거기부금의 월별 누적기록, 여론조사가 끝없이 검토됩니다. 진정한 정치적 이슈들은 무시됩니다. 이는 전쟁의 언어, 전쟁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두 정당이 거의 모든 주된 이슈들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주요 이슈들은, 금융기업의 규제완화, 무역협상, 경찰의 군사화(1990년 이래 국방부는 74억 달러 이상을 8천 개에 달하는 연방 및 국가 법집행기관들에 이전하여 군사장비와 병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폭증, 탈산업화, 긴축, 프래킹(fracking) 및 화석연료 산업 지원, 중동에서의 중단 없는 전쟁, 부풀려진 군비예산, 기업들에 의한 선거 및 매스미디어 통제,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감시(정부가 하루 24시간 당신을 감시하면 당신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등입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구의 일부분을 다른 일부분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적대를 부추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널리즘 정신에 의해서 추동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기업의 후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추동되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뉴스가 구현하는 분할구도는 기업수입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뉴스에 사용되는 틀은 프로레슬링에서 사용되는 단순화된 도덕극입니다. 미국에는 트럼프를 좋아하느냐 증오하느냐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치적 입장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각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든과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더라도] 무언가를 지지하며 던지는 셈이 됩니다.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 자신을 학대한 자들에게 맞섰던 애니타 힐(Anita Hill) 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굴욕을 승인하는 셈이 됩니다.
  • 중동에서 중단 없는 전쟁을 기획한 자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인종분리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한 대중의 대대적 감시를 그리고 적정절차(due process) 및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복지의 파괴와 사회안전의 삭감을 포함한 긴축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나프타, 탈산업화, 임금의 실질적 감소,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 수십만 개의 상실, 멕시코, 중국, 월남 등 낮은 보수를 받으며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로의 일자리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사들 및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과 연방기금의 영리적인 기독교 차터스쿨들(charter schools)로의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도소 재소자의 수가 두 배로 늘고 형의 선고가 세배, 네 배로 증가하는 데, 그리고 사형에 처해질 범죄들이 크게 확대하는 데 표를 던지는 셈이 됩니다.
  • 유색인이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군대화된 경찰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그린뉴딜과 이민법개혁에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프래킹[수압파쇄법] 산업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부유층이 교육의 기회를 받고 가난한 유색인들은 기회를 거부당하는, 차별적인 공립학교시스템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기혹한 수준의 학자금대출금과 파산을 하더라도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은행업의 규제완화와 글래스-스티칼(Glass-Steagall)법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정리자―글래스-스티갈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 중에서 4개 항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영리적인 보험업과 제약기업들을 찬성하고 보편적 건강보장을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모든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정리자―행정부와 의회가 재량권을 가지고 예산을 편성․심사할 수 있는 지출]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국방예산을 찬성하는 셈이 됩니다.
  • 과두세력과 기업이 돈으로 우리의 선거를 사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신용카드회사이며 바이든의 아들 헌터(Hunter)를 고용한 MBNA의 이익에 비열하게 복무했던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은 중동에서의 전쟁들을 기획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7조 달러 이상을 낭비했으며 수백만 명의 삶의 파괴하거나 멸절시켰습니다. 바이든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트럼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법 및 입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바이든은 제국전쟁과 기업에 의한 나라의 약탈을 기획하고 미국 노동계급을 배반한 죄목으로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지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붕괴의 해결자로서 내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과 이 당을 옹호하는 지유주의자들은 인종, 종교, 이민, 여성의 권리,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것이 그들의 정치인 척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들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윤리적인 이슈들입니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가령 예전의 복지제도를 파괴했을 때 전지구적 투기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계급이 경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민주당이 응원하는 척하는 바로 그 집단들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그 복지제도의 수혜자의 70%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은 그 입장대로라면 유럽에서는 극우당의 되리라는 점입니다.) 문화전쟁이 현실을 가립니다. 두 당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파괴하는 데서 완전히 한패입니다. 두 당은 미국 사회를 마피아 국가로 재편성했습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민주당, 2019년부터 연방 하원의장), 척 슈머(Chuck Schumer, 2016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 2007년부터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정치가들의 힘은 기업의 돈을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 즉 기업의 돈이 퍼부어지지 않는 체제에서라면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공통체’(commonwealth), ‘공공적인 것’(res publica)라고 부른 것, 혹은 민중의 재산을 전지구적 기업 과두세력을 위한 약탈과 억압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를 약탈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며 사법부, 미디어, 입법부를 왜곡시킨, 그리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금융 사기와 절도에 가담할 자유를 확보한, 부유하고 전능한 주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들입니다.

팬데믹의 와중에서 우리의 도둑정치가들이 한 짓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주관한 2008년 구제금융 이래 유례없는 규모인 4조 달러를 약탈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희생시켜 실컷 먹고 배를 불리고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급아파트, 궁전 같은 저택의 창문 바깥으로 고통 받고 경멸 받는 대중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지원금이나 세금삭감의 형태로 석유회사들, 항공산업체들(이들만 500억 달러를 경기부양금으로 받았습니다), 유람선업체들에게 수조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부동산업체들에게 1700억 달러를 안겨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사모펀드, 로비그룹들(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가들에게 선거기부금으로 1억910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정육업체들 그리고 미국에서 세금을 나내지 않기 위해서 해외로 이전한 기업들에게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소기업들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는 데 쓰여야 할 돈을 가장 큰 기업들이 집어삼키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기부양 패키지 하에서 백만장자들에게 80%의 세금삭감 혜택을 주었으며 가장 부유한 자들이 평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경기부양금을 받도록 허용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또한 4540억 달러가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에 할당했는데, 이는 트럼프 패거리들이 기업들에게 나누어준 막대한 비자금으로서 10대 1의 비율로 차입을 한다면 4조5천억 달러의 자산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에 1조5천억 달러의 대출을 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 돈이 상환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팬데믹 이후 4340억 달러만큼 더 부유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제프 베조스(그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에 연방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팬데믹 이후 자신의 부에 거의 720억 달러를 추가했습니다. 동일한 기간에 55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리자―강연 원고가 실린 사이트에 가보면 이 단락의 주요 항목마다 해당 자료로 가는 링크가 걸려있다.]

[34:00]




미국은 이제 시체다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America Is Now a Corpse (2020년 11월 5일)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20/11/05/america-now-corps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Common Dreams에 실은 2020년 11월 5일자 글 “America Is Now a Corps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어조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첫 단락만 번역이다.) 여기서도 헤지스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주류 혹은 준주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미국 제국 몰락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제도화된 체제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Chris Hedges: Revolutions Only Happen Through Movements 참조) 다만 미국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점―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파고든 정도가 미국에서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 현실(제도화된 기성 체제)의 비판에 치중하게 만든 듯하다. 긍정적인 움직임이 왕성한 곳에서라면 부정적인 측면의 비판에 과도하게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을 기고 기어서 비로소 수많은 촛불들이 삶을 밝히는 곳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헤지스가 대변하는, 미국 민중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되고 또 그렇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를 짚어보느라고 바쁠 일반 미디어들로서는 도저히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않는 저 아래의 영역에서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미국 민중의 주체성 형성의 새로운 큰 흐름이, 그 큰 흐름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보는 것이 중요하며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시체다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가 끝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록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빈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이지만, 적어도 점진적이고 점증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는 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체가 되었다. 상징과 수사(修辭)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수의 과두세력이 자금을 지원하는 공들인, 그러나 공허한 ‘리얼리티 쇼’이다. (바이든은 선거운동에 15억1천만 달러를 들였고 트럼프는 15억7천만 달러를 들였다.) 그 목적은 미국인들에게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트럼프와 언어 능력에 손상을 입은 바이든 사이의 공허한 대결은 진실을 가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과두세력이 항상 이긴다. 민중은 항상 진다. 백악관에 누가 앉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는 실패한 국가이다.”

미국의 ‘열린사회’를 살해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선거과정, 법원, 미디어를 사들인 기업과두집단(corporate oligarchs). 이들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입법을 하여 미국 민중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얻고 있다.
② 쓸모없는 부단한 전쟁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군사주의자들과 전쟁산업체들. 이들은 약 7조 달러를 탕진했으며 미국인들을 국제적 천민으로 만들었다.
③ 상여금과 보상 패키지를 수억 달러씩 받으며 일자리들을 해외로 보내고 우리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소득과 희망이 없는)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빠뜨려 놓은 CEO들.
④ 과학과 전쟁을 벌이며 인류가 멸종하든 말든 이윤을 추구하는 화석연료 산업체들.
⑤ 뉴스를 생각 없는 오락과 우리 당 응원하기로 바꾼 언론.
⑥ 대학으로 물러나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의 도덕적 절대성을 설교하지만, 다른 한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제전쟁과 시민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는 등을 돌린 지식인들.
⑦ 아무 것도 안 하고 말, 말, 말만 해대는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계층(liberal class).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수호한다는 가치를 그것이 불편해지는 순간 저버린다. 또한 자유주의 계층은 유럽에서라면 극우로 간주될 후보자와 정당의 치어리더들이며 검열자 기능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든에 의해서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에 의해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바이든과 민주당을 비판한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소외시키느라고 바빴다. 『인터셉트』(The Intercept)든 『뉴욕타임즈』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을 해칠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그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민주당과 그 자유주의적 지지자들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법치의 복원, 보편적 건강보장, 프랙킹 금지, 그린뉴딜, 시민의 자유의 보호, 노조의 구축,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의 보존 및 확장, 철거와 가압류의 금지, 학자금대출금의 탕감, 엄격한 환경통제, 정부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및 기본소득, 금융규제, 부단한 전쟁과 군사적 모험주의에의 반대―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망각되었다. 이런 이슈들을 옹호했다면 민주당은 산사태를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키우고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키며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민주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바이든은 아이디어들과 정책 이슈들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마치 그와 민주당이 아메리카의 영혼을 구한다는 약속으로 선거를 휩쓸 수 있다는 듯이. 적어도 신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적 확신들을 표현하는 용기라도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계층은 점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과잉을 개선함으로써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공격견 역할도 한다. 자유주의 계층은 ‘파워 엘리트’의 강력한 구성요소이다. 변화의 희망과 가능성을 아니면 적어도 변화의 환상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독재에의 투항이 권력 공백을 창출했고 그 공백을 투기자들,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내는 자들, 갱스터들, 킬러들이 채웠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운동을 위한 문이 열렸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계층과 그들의 가치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면서 부각되었다. 파시스트들이 약속하는 바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이지만, 자유주의 계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진실에 근거를 둔다. 자유주의 계층이 일단 기능하기를 그치면 억제하기 어려운 악들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트럼프주의의 질병은 트럼프가 있든 없든 정치체 안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트럼프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조롱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진 소외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획책한 것인데 이들은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주의는 또한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실제로 감소하였다.

19세기 말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쓸모없는 자유주의 계층의 행위가 피와 테러의 시기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지한 이상들을 지키지 못하자 불가피하게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대가 왔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자유주의 이념들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는 열정과 도덕적 목적을 피한다. 그는 합리적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의 이름으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권력구조를 수용한다. 지하생활자의 위선이 러시아로 하여금 파멸을 맞게 했다면, 이제 그 위선이 미국을 멸망케 한다. 신념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 분리가 핵심이다.

자유주의 계층은 기업이 권력을 시민들의 손에서 탈취했음을, 헌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법의 명령에 의해 철회되었음을, 선거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연출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함을, 미국 민중이 계급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에 더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대중은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발휘하는 한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풍부한 사례로써 보여준 것은, 일단 권력자들이 잉여적이 되고 무능력한데도 권력의 치장물들과 특권들을 틀어쥐고 있다면 무자비하게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그랬다. 내[헤지스]가 『뉴욕타임스』에서 취재한,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에서도 그랬다.

독일 역사가 슈테른(Fritz Stern)은 그의 책 『문화적 절망의 정치』(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에서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상승은 자유주의의 붕괴의 결과라고 썼다.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폭력, 문화적 증오, 개인적 원한에 중심을 둔 정치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많은 부분은 정당하게도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근대 사회―부르주아적 삶, 맨체스터주의[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적·경제적 운동=자유방임주의], 물질주의, 의회, 당.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의 주요 전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그들의 모든 내적 고통의 원천을 본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들을 상상적인 과거로부터,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뿌리뽑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증오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건강관리제도는 국가적 보건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건강관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종합병원들을 합병하고 폐쇄했으며 지역 공동체들에서 건강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일선 노동자들의 거의 반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약 4천3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고용주 제공 건강보험을 잃었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확립할 의도가 전혀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없이는 팬데믹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12월까지 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며 1월까지는 4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팬데믹이 소진되거나 백신이 확보될 때쯤이면 어쩌면 수백만 명이 사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팬데믹의 경제적 낙진인, 만성적 불완전고용과 실업—현재 직업을 구하기를 멈춘 사람, 일시해고되었으나 재고용될 전망이 없는 사람, 시간제로 일하지만 빈곤선 아래인 사람이 공식적 통계에 포함되면 20%에 가깝다—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낳을 것이다. 기아자의 수는 지난 해 이후 이미 세 배로 증가했다.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는 지난해보다 14배 늘었다. 푸드뱅크들의 식사 제공 능력은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으며 압류와 철거의 일시적 정지가 취소되어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다.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한 사회적 소요로 인해 국가는 그 주된 사회적 통제도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① 대대적 감시 ② 감옥 ③ 군대화된 경찰이 그 도구들이며 이것을 법체계가 지탱하고 있다. 법체계는 비판세력을 잔인하게 짓밟기 위해 인신보호영장과 적정 절차를 취소하기 일쑤다. 유색인들, 이주자들, 무슬림들은 토박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민주당에 대항하여 기업국가(corporate state)와 제국의 범죄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민주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계층의 무기력함은 널리 퍼진 배반감―바로 이 배반감으로 인해 투표자들의 거의 반수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저속하고 인종주의적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다ㅡ 에 땔감을 공급할 것이다. 기독교화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치장하고 있는 미국식 전제정치가 한 시기의 획을 긋는 미국 제국의 쇠퇴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 후기]

‘시체’의 이미지는 이미 로런스(D. H. Lawrence)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에서 사용한 바 있다. 로런스는 『모비 딕』(Moby Dick, 1851)의 피쿼드호가 침몰한 이후의 미국을 가설적으로 ‘사후효과’(post-mortem effect)로 본다. 피쿼드는 미국의 영혼의 배이므로 피쿼드호의 침몰은 영혼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로런스에게서 사후효과란 사람들이 영혼이 없이도 에고(ego)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로런스는 ‘에고’를 ‘자아’(self)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획당한 자아, 즉 담이 둘러쳐진 자아라고 이해하면 된다. ‘종획된 자아’의 이미지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본국인 미국에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로런스는 미국의 부정적 측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령 휘트먼에게서 ‘열린 길’(open road)이 제시되고 있음을 짚어낸다. ‘열린 길’은 미지(未知)로 향해있다. 영혼들이 미지로 향하는 이 ‘열린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성취될 목적이 따로 없고 여정(旅程)만이 있다. ‘열린 길’에서는 남녀관계든 동료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오직 영혼의 인정에 기반을 둔다. 영혼들이 유일한 부(富)이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제도만을 보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도란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는 한 사후효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의 바깥을 보고 제도의 아래를 봐야 한다. ‘열린 길’이라는 형태의 커먼즈가 어렴풋게나마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면···.




제국, 20년 후

 



20년 전 『제국』이 나왔을 때에 지구화가 중앙무대를 차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한 번 지구화가 중심적 이슈이지만, 지금은 여러 입장에 걸쳐있는 제도권 논평가들이 그 검시(檢屍)를 수행하고 있다. 우세해진 새로운 반동세력은 자국주권의 귀환을 요구하면서 무역조약을 깨고 무역전쟁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초국적 기관들과 전지구적 엘리트들(소수 지배세력)을 규탄하는 한편 인종주의의 불을, 이주자들에 대한 폭력의 불을 지핀다. 좌파에서도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 및 전지구적 엘리트들의 강탈행위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자국주권의 부활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는 죽었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덜 명료할 뿐이다. 전지구적 질서가 어디서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오늘날의 여러 위기들이 전지구적 구조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막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자본처럼 위기를 통해 기능한다. 말하자면, 위기를 먹고 산다. 이 질서는 여러 면에서 고장남으로써( by breaking down) 작동한다.[원주1: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자본주의적 기계의 분열적 성격의 일부는 그것이 ‘고장남으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Anti-Oedipus,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apolis 1983, p. 31 참조] 오늘날 전지구적 구조들이 덜 가시적이기에 지난 20년 동안의 트렌드들을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라는 면과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전지구적 구조들이라는 면에서 연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배와 착취의 주된 구조들을 전지구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반란과 해방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촉진하는 데서 핵심적이다. 제국이 아래로부터의 다중의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되었듯이, 다중이 자신들의 힘을 효율적인 대안적 힘으로 구성하고 대안적 사회의 조직을 향한 경로를 그릴 수 있는 한에서 제국은 다중 앞에서 몰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운동들은 여러 면에서 이미 이러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 서로 어긋나 있는 권역들

제국의 지속적인 위기가 하나가 다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권역들(spheres)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지구 규모의 네트워크들이 그 첫째 권역이며,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 그 둘째 권역이다. 이 두 권역은 점점 더 서로 어긋나고 있다. 첫째 권역은 ①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연결성이 높아지는 상호연결된 소통 네트워크들, ② 물질적·비물질적 기반시설들, ③ 육·해·공 수송로들, ④ 대양을 횡단하는 케이블들 및 위성 시스템들, ⑤사회적·금융적 네트워크들, ⑥ 생태계들, 인간들 및 기타 종들 사이의 다양하게 중첩되는 상호작용들로 구성된다. 지역화된 경제적 생산이 이 영역 내에 존속하지만 이는 점점 더 이 대륙을 가로지는 회로들에 흡수되어 역동적으로 되며 또한 많은 경우 이 회로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노동도 시장, 기반시설, 법, 국경체제[국민국가의 경계들로 지리적 구획이 지어진 체제]의 전지구적 웹에 흡수되고 제한을 받는다. 가치화 및 착취 과정들도 다양하지만 통합된 전지구적 어셈블리라인에 의해 지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기관들과 생태 신진대사의 회로들은 여전히 지역적일 수 있지만, 이들 역시 큰 역동적 시스템들에 점점 더 의존하고 종종 그것들에게 위협을 받는다.

이 지구 규모의 시스템들은 상이한 공간들과 시간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다양한 활동들을 실질적인 동시에 형식적으로 포섭한다. 이 권역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 있는 총체이다. 단일하고 밀도 있는 지구 규모의 집합체이다. 이 상호연결성은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가장 분명해진다. 가령 핵에 의한 파멸이나 기후위기에 직면하면 살아있는 생물들과 테크놀로지들의 웹 전체가 위협을 받으며 그 가운데 무사할 것은 없다.

첫째 권역을 둘러싸고 있는 둘째 권역은 상이한 여러 수준들에서 상호교직된 정치적·법적 체계들―일국 정부들, 국제적인 법적 협약들, 초국적 기관들, 기업 네트워크들, 경제특구들 등―로 구성된다. 이는 전지구적 국가(a global state)는 아니다. 일국 주권의 주장이 퇴색하면서 출현한 것은 이행적 거버넌스 체제들이다. 이 중첩되는 구조들이 혼합된 정치구성(a mixed constitution)을 이룬다. 이 권역의 표면을 가로질러 지배의 고비를 쥐고 있는 자들은 아래 세계의 소유자들―기업의 장들, 금융 거물들, 정치적 엘리트들, 미디어 거물들―이다.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이 진전되면서 이 두 권역들은 점점 더 어긋하게 되었다. 이 두 권역들은 별도의 분리된 축 위에서 돌면서 때로 서로 충돌한다. 20세기의 개혁 기획이 두 권역들 간의 관계를 안정화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하며 전지구적 체제의 모든 수준들에서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embedded liberalism'[‘내장된 자유주의, ‘묻어들어 있는 자유주의’ 등 여러 번역어가 있다]를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은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영역과 안정된 구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거버넌스 권역을 창출했다.

신자유주의의 제국적 거버넌스는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안쪽 권역으로부터 가치를 포획하고자 한다. 안쪽 권역의 생산 및 재생산 회로들이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영역이 그 명령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화폐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생산된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금융 및 부채의 도구들을 통해서 자산소득(rent, 지대)의 형태로 가능한 많은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위기들이 번성하지만, 이 위기들은 임박한 붕괴의 표시들이 아니라 지배의 메커니즘들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운수(運數)

두 권역들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각 영역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들이 어떻게 변했나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한다. 다중의 저항과 도전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오늘날 어떻게 열렸는지에 시선을 두면서 말이다.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동터옴을 선언했다. 그 당시 비판자들이든 지지자들이든 모두, 미국이 유일한 초강국으로서 당연히 그 유례없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행사할 것이며, 전지구적 사태에 대한 일방적 통제만큼이나 책임도 점점 더 많이 지게 되리라고 보았다. 10년 후 미국 군대가 바그다드로 진군할 때에는 아버지 부시가 고지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아들 부시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중동을 다시 만들 듯이 보였으며, 그곳에 순수한 신자유주의적 경제들을 창출할 듯이 보였다. 네오콘들이 슬슬 몸을 풀 때 비판자들은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를 규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일방주의적 힘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으며 워싱턴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헛된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다른 게 아니라 단지 그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의 불충분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미국은 탈레반(Taliban)과 바티스트(Baathist) 정권들을 전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요구되는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수십 년 동안의 실패 이후인 지금, 미국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체제가 혜택을 가져오리라고 믿거나 안정적 질서를 창출할 힘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잔존 여부에 대해 마음을 졸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만, 사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지배는 트럼프가 무대에 돌연히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지난 일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전지구적 질서를 일방적으로 조직하고 통제할 수 없다. 아리기처럼 중국과 같은 다른 국가가 미국이 했던 헤게모니적 역할을 계승하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쇠퇴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제도권 논평가들에게는 여전히 미국이 전지구적 패권국에 유일하게 걸맞은 국가이다. 이런 주장들에도 일리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나 중국의 역할이 일극적 패권국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mixed constitution)에서 벌어지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격렬한 경합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국가도 헤게모니적 위치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은 카오스와 무질서가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주권의 출현을 나타낸다.

 

  1.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

헤로도토스나 플라톤 같은 예전의 사상가들은 세 개의 기본적 통치 형태―군주제(1자의 지배), 귀족제(소수의 지배), 민주제(다수의 지배)―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각 정치구성의 상대적 장점을 분석했으며, 정치사를 하나의 정치구성에서 다른 하나의 정치구성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폴리비오스(Polybius)에 따르면 로마의 새로움은 그 혼합된 정치구성에 있었다. 통치형태들이 서로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했다.

20년 전 우리는 오늘날 출현하는 질서를 (이 전지구적 통치의 혼합된 정치구성을 가리키기 위해서) ‘제국’이라고 명명했다. 제국은 전지구적 국가도 아니고 통일되고 중앙집중화된 지배구조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지구화는 단순한 동질화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질화인 동시에 마찬가지 정도로 이질화인 과정이다. 모든 지리적 규모에서 경계들 및 위계들이 번성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난 20년 간 제국적 정치구성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이행들의 일부를 개략적으로만 살펴보겠다. ① 군주제의 수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태전개는 중심의 공동(空洞)화였다. 1990년대에 미국은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 도메인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폭탄(워싱턴), 달러(월가), 네트워크(헐리우드/실리콘밸리)는 군주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 도메인들에서 ‘일자의 지배’와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영역에서 미국의 우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지만, 그 토대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그 범위는 더 좁아진다.

㉠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다른 나라들보다 두드러지게 우월하다. 그러나 월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패배는 미국의 군주로서의 능력이 오늘날 미약해졌음을 분명히 한다. ㉡ 20년 전에는 견고하게 보였던 미국의 금융적·화폐적 헤게모니도 점점 더 약화되었다. 금융 헤게모니는 이미 불안했는데, 이는 1971년에 있었던, 달러화의 금표준으로부터의 분리로 소급한다.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에 따르면 1990년대에 미국의 금융 및 화폐체제는 ‘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토대는 2008년의 금융위기에 의해 확인되었고 이는 다시 미국이 군주 역할을 하는 능력을 문제시 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는 문화산업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도 축소되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 기업들은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 발휘를 위한 소프트파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점점 더 지구 규모로 작동하며 모호하게만 미국의 전지구적 이미지에 기여한다. 이렇듯 세 도메인 모두에서 미국의 군주적 힘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다른 후보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적 진공이 군주제의 수준에서 커지고 있다.

② 제국의 귀족제 수준에서는 흥하고 쇠하는 열강들의 열띤 경합이 일어나고 있다.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소수의 지배’는 주요 기업들, 선진국들, 초국적 기관들을 가로질러 행사되고 있다. 기업 대 국민국가, 국민국가 대 초국적 기관 등의 격렬한 경쟁이 그 특징이다.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위계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상승한 반면, BRICS의 다른 국가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애플과 알리바바가 제너럴모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갈등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은 실제로는 같은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은유를 바꾸자면,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기사도(騎士道)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질서에 복무하는 기사들과 같다.

귀족제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일반적 윤곽이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많이들 말하는 국민국가의 귀환은 전지구적 체제의 균열이 아니라 귀족 열강들 사이의 경합에서 구사되는 전술적 작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America first!, Prima l’Italia! Brexit!는 전지구적 체제에서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국가들의 애처로운 외침들이다. 사라진 나뽈레옹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해 동원되는 것으로 맑스가 그린 바 있는 프랑스의 보수적 농민들처럼, 오늘날의 반동적 민족주의자들도 전지구적 질서로부터의 분리를 노리기보다는 전지구적 위계에서의 재상승을 노린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 사이의 갈등―가령 2018년 유엔총회에서의 트럼프의 ‘글로벌리즘’ 비판―도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책이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을 주도하는 엘리트층 모두가 자본주의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바쳐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지시에 의해 추동된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명료한 혼합된 정치구성(‘다수의 지배’)은 방대한 세력들로 구성된다. 국민국가들 및 자본주의적 기업들, 방송과 미디어, 국가와 기업들을 지원하고 종종 이들이 손상시킨 바를 수리하는 NGO들, 종교단체들, 국가에 맞서거나 스스로 국가를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병(私兵)들. 이들은 가장 저급한 의미에서만 ‘민주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반체제적 운동이나 세력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세력은 군주제적·귀족제적 힘들에 저항하고 도전할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제국적 정치구성 전체를 지탱하는 데 복무한다. 푸꼬가 겉으로 보기에는 저항적인 형상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는 지배적 힘을 강화하는지를 인식하는 데 탁월했다. 물론 모든 저항 노력이 헛된 것이며 불가피하게 제국에 의해 포섭되어 대안을 위한 희망이란 것은 없다는 말은 아니다(푸꼬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곧 이 점을 다룰 것이다.

 

  1. 새로운 국제주의들

지구화를 위로부터 보면 왜곡을 낳는다. 지구화는 그 핵심에 있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세력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국제주의가 근대 전체에 걸쳐서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형태들과 과정들의 주된 추동자였다. 모든 근대 혁명은 깊은 의미에서 국제주의적이다. 아리기와 제임슨 같은 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읽기 덕분에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전개가 실제로는 1960년대의 반란, 해방투쟁, 혁명운동의 합류나 축적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권력 구조들을 ‘대응’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분석적 기능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가진다. 제국의 지배를 넘어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필연적으로 더 나아간 국제주의의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런 만큼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출현하는 새로운 국제주의들을 포착하고 양성하려는 노력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를 인식하는 한 방법은 투쟁의 국제적 순환의 전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각 투쟁이 지역에 집중될지라도, 투쟁의 불꽃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면 운동이 전지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2010년 11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러한 순환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나라들에서 일어나서 다음에는 스페인, 그리스, 미국으로, 그 다음에는 터키, 브라질, 홍콩으로 옮겨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폭력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미니즘 투쟁인 NiUnaMenos[영어로는 ‘Not one (woman) less’라고 옮겨지며 여성이 한 명이라도(una, one) 더 희생되지(menos, less) 말아야 한다(nie, not)는 의미이다]는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폴란드의 투쟁과 공명하여 혁신적인 방식으로 남북 아메리카 전역으로 옮겨갔으며 대서양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파업의 새로운 형태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이 형성되고 있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이지만 훨씬 덜 명료한 것으로, 이주(migration)가 국제주의의 주된 힘을 구성한다. 이주는 국민국가들의 국경체제들과 전지구적 체제의 공간적 위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반란이 된다. 2015년 여름, 걸어서 혹은 모든 가능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유럽을 향하고 또 유럽을 가로질렀으며 이제는 지중해를 건너기에 이른 대대적인 행렬이 유럽의 국경체제들을 위협했다. 이와 유사하게 2018년 가을 멕시코를 지나 미국 국경을 향해 움직인 중앙아메리카의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행렬은 미국의 국경체제의 지속적인 위기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디어가 매우 자주 다룬 이 사건들은 남에서 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나이지리아에서 남아프리카로,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중국의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다양하게 펼쳐지는 전지구적 이주의 정점들일 뿐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으로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이례적인 종류의 국제주의적 반란이다. 이주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자신들의 탈주의 정치적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국제주의적 투쟁의 일부로서 이해하지는 더욱 못한다. 실로 그들의 여정은 극히 개인화된 것이다. 마차행렬과 같은 명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도 드물다. 중앙위원회도 없고 강령도 없으며 원칙의 진술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주자들의 탈주선들은 국제주의적 힘을 구성한다.

이주자들은 전쟁이나 박해로부터 도망치는 경우든 단순히 모험을 추구하는 경우든 이동성의 자유를 긍정한다. 이것이 모든 다른 자유들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전지구적 이주가 지속적인 반란으로서 가진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걸음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이주자들의 반란의 힘은 이주자들의 통제에 발휘되는 잔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역반란 전략에 의해 확인된다. 리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미국 국경의 야만적 경찰들까지. 이주자들의 반란은 전지구적 체계를 분절하는 장벽들을 그저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 장벽들에 균열을 내고 그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1. 전지구적 자본과 공통적인 것

앞에서 말한 두 권역은 서로 어긋나 있긴 하지만 서로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일국의 자본이 그 이익을 위해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듯이, 전지구적 자본도 복잡한 전지구적 거버넌스 구조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권역을 구성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개별 자본가 기업들, 종종 서로 갈등하는 국가 자본들, 다양한 형태의 임금∙비임금∙불안정 노동, 항상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였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이다. 이러한 이질성에 가려 전반적 구도를 인식하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출현한 학술적·전투적 비판들 일부를 따라가봄으로써 자본의 발전에서 보이는 일부 핵심 방향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정치경제 비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회로들에서 저항과 자유의 씨앗들을 찾는 것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훈육체제에 맞서는 운동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으로서 기능해온 방식에 먼저 초점을 맞추겠다. 이는 (자본에 의한) 포섭과 포획의 이야기인 동시에 반란의 활력의 지표이다. 자본을 전진시킬 힘이 있는 곳에 자본을 전복할 잠재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자본이 자본에 맞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들을 창출하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원주 21 내용의 일부: 맑스는 반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은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혁명은 과거의 사회적 형태들로의 회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기의 성과―즉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토대로 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맑스는 썼다. Capital, Volume I, trans. Ben Fowkes, London 1976, p. 929.] [이때 수립되는 소유를 맑스는 ‘개인적 소유’(das individuelle Eigentum, individual property)라고 불렀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여러 모습―자연자원, 문화생산물, 생체측정 데이터, 사회적 협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한다.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중심적이 되지만(자본이 축적하는 가치가 점점 더 공통적인 것 안에 있게 되지만), 또한 공통적인 것은 자본으로부터의 사회적 자율의 잠재력, 반란의 잠재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 핵심 지형들―① 추출의 측면 ② 삶정치적 측면 ③ 생태계―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종류의 분석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대한 최근의 광범한 분석들은 넓은 의미의 추출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가치가 땅으로부터 직접 끌어내어지는 전통적인 추출주의적 관행의 확대만이 아니라 공적 부와 기반시설의 사유화에 의해 획득되는 축적방식들 및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전유되고 축적되는 새로운 형태의 추출이 이루어진다.

데이터 마이닝의 비유가 전통적인 추출작업들이 사회적 도메인으로 옮겨온 방식을 보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가령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을 수단으로 한 축적은 사용자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프로세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지식 및 사회적 관계들을 자본화하는 알고리즘적 수단을 창출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들은 ‘공유’를 (공동의 사용을 위해 재화를 제공하는 데서) 가치를 추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켰다. 금융 또한 그 추출방식을 통해 기능한다. 물론 금융도구들의 일부는 투기의 수단이며 ‘허구적’ 가치들만을 창출한다. 그러나 금융과 채무관계는 그 주된 측면에서는 금융자본의 직접적 관리 외부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들을 추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 구도에서의 이러한 사태전개를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한다. 산업자본이 대체로 생산과정을 관리하고 협력의 형태들을 운영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반면에 금융은 자신의 관리 외부에 있는 생산적 협력의 형태들을 통해 생산된 부에서 자산소득을 추출한다.

추출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하비가 말한 ‘강탈에 의한 축적’에 크게 상응한다. 그 과정은 주로 커먼즈의 새로운 종획을 통해, 그리고 땅과 공적 기반시설에 들어있는 부의 추출을 통해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추출형태는 그 직접적 관리영역 외부에서 생산되는 가치들을 끌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출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공통적인 것―생태적, 사회적, 삶정치적 형태―을 포식한다. 이러한 포식과정은 공통적인 것 안에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둘째 종류의 분석은 삶정치적 관계들―인지적 생산형태들, 정동과 돌봄의 생성―에서 공통적인 것이 하는 역할을 부각시킨다. ㉠ 인지자본주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지식, 지성, 과학의 역할을 분석하며 축적된 지식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게 된 것을 강조한다. ㉡ 다른 분석들은 사용자들의 주목이 생성하는 가치에 의존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들과 플랫폼들을 통한 가치생산에 초점을 둔다. ㉢ 지성 및 주목과 아울러 자본주의에서 정동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동의 생산과 관련된 직업들―간호사들, 방문돌봄 서비스 노동자들, 관리-지원 직원들, 임금을 받는 가사노동자들, 교사들, 음식서빙 노동자들―은 보수가 낮고 극히 불안정하며 따라서 압도적으로 여성들로 채워진다. 정동의 생산은 또한 젠더 분업으로 정의되고 있는 가사노동을 포함하는 비보수 영역에서 중심적이다.

이 분석들에서 우리는 삶정치적 통제의 새로운 형태들과 인간 실존의 더 많은 영역들의 식민화 및 상품화와 함께, 착취와 지배의 새로운 심화된 형태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력들이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 종획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해 노동하거나 종속되어 있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상태에 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는 여전히 착취·축적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성격을 인식한다. 지성, 지식, 주목, 정동과 돌봄은 모두, 집단적 행동과 상호의존에 의해 규정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능력들이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거대한 삶정치적 저장고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

셋째 종류의 분석은 자본의 발전이 지구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들과 관련된다. 특히 기후변화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화석연료의 추출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저자들이 인간이 기후변화를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에 진입했다고 말하는데, 이 인류세 담론은 인간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해당하는 자본가들이 기후변화의 책임자들임을 가린다. 지구의 장기적 건강을 보존하는 모든 기획에 필요한 선결조건은 자본주의의 지배의 우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빈자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받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기후변화에 굴복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잃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구축할 대안들에도 핵심적이다. 토착민들의 투쟁은 인간이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 모든 분석들에서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의 힘이 드러난다. 자본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을 포식하는 포획장치가 되지만, 공통적인 것의 영역들이 기동되어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는다면 자율의 잠재력 즉 자본주의의의 지배 너머의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1. 계급다중계급

다양체(성)(multiplicity)이 점점 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전적인 지평이 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운동들―코차밤바에서 스탠딩락(Standing Rock)까지, 퍼거슨(Ferguson)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까지, 카이로에서 마드리드까지―은 다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투쟁들에 특히 미디어가 종종 지도자부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운동들이 전통적인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하는 것은 맞지만, 지도자부재라고 하기보다는 다중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러한 이해가 투쟁들의 미덕과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을 공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운동들은 중요한 성과를 얻었고 종종 더 나은 대안적 세상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단명했고 때로 쟁취한 것이 잔혹하게 역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 더 필요했고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사고가 요구되었다. 우리는 그 다양체성을 버리고 (선거로 뽑는 정당이든 ‘국민’이든) 통일된 정치적 주체를 구축할 필요를 설파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전통적인 조직형태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지속적이거나 효율적인 운동을 낳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일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면서 실질적인 사회변형을 낳을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의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탐색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역사적·이론적 이행 즉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과 다중에서 계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얼핏 보기에는 왕복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정치적 진전을 표시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출발점의 계급과 도착점의 계급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중을 통과하는 과정이 계급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제시하는 조직화의 일반적 공식은 <계급―다중―계급′>(C―M―C′, class―multitude―class prime)이다. 맑스의 공식[『자본론』1권 4장에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M-C-M′)을 말한다. 물론 자본의 공식에서는 M이 Money(화폐)이고 C는 Commodity(상품)이다]에서처럼 과정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형이 중요하다. 계급은 다중적 계급, 교차적 계급이어야 한다.

계급에서 다중으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이 이제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일반적 인정을 나타낸다. 이 이행은 전통적인 당들과 노동조합적 기관들이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가진 힘이 소진된 것에 상응한다. 노동계급이 경험적 형성체로서 없었던 적은 없지만, 이제 그 내적 구성이 변했기에 계급구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힘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인구들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획일화된 대의를 거부한다. 노동의 여러 부문들 사이―가령 임금을 받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은 노동 사이, 안정 노동과 불안정 노동 사이, 합법적 노동과 비합법적 노동 사이―의 차이와 젠더, 인종, 민족 등의 차이들이 모두 표현을 요구한다. 이런 시점에서의 계급구성 연구는 교차적 분석(intersectional analysis) 안에 함입되어야 한다. 이는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의 계급이 아니라 다중,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이다.

이와 함께,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의 투쟁 및 반자본주의 투쟁 일반이 다른 지배의 축에 대한 투쟁들―페미니즘 투쟁, 반인종주의 투쟁, 탈식민 투쟁, 퀴어 투쟁 등―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 개념은 (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에서 출현한) 교차적 분석 및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다양체성을 정치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인종, 계급, 성, 젠더, 국민 위계들이 서로 맞물려있는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적인 단일축 분석틀들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첫째로 의미하는 것은, 지배의 그 어떤 구조도 다른 것보다 우선적이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구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성들도 다양체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정체성의 거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성을 다양체성으로 조바꿈을 하여 (즉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할 필요를 말한다.[원주32: 정치적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교차성이 핵심 개념이 되면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탕을 마련한 글들로 Kimberle Crenshaw, “Mapping the Margins”, Stanford Law Review, vol. 43, no. 6, 1991, and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no. 140, 1989 참조.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 대해서는 Jennifer Nash의 통찰력 있는 책인 Black Feminism Reimagined: After Intersectionality, Durham nc 2019 참조.] 교차적 다중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이 포함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反)복종 기획’(‘an antisubordination project’)이다. 즉 여러 전선들에서 동시에 전투 및 혁명을 전개하는 전략이다.

이 지점에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을 불안정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 고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 의미는 임금 및 노동관계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런 의미의 불안정성은 포디즘 경제의 규제적 이상(regulative ideal)이었던 안정된 고용계약―이는 제한된 수의 선진국 산업노동자들(주로 남성)에게만 현실로서 존재했던 규제적 이상이다―과 대조된다. 보장된 노동계약과 법은 점점 부식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적 단기노동계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노동배치는 물론 항상 인종화, 젠더화되어 있지만, 노동력의 모든 부문들이 이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의 노동 불안정화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이다.

둘째 의미의 불안정성은 첫째에 대한 유용한 보완을 제공하며 훨씬 더 광범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과 도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주디스 버틀러: 불안정성은 인구의 일정 부분이 사회적·경제적 지원네트워크들의 부실로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을 받으며 피해, 폭력, 죽음에 더 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정치적으로 야기된 상태를 가리킨다. 노동 불안정성은 분명 전체의 일부이지만, 불안정한 삶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법·경제·통치상의 변화들이 이미 종속된 인구들의 광범한 부분―여성들, 트랜스젠더들, 동성애자들, 유색인들, 이주자들, 장애자들 등―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목표로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언어를 말하는 불안정성이 있고 교차적 비전을 증진하는 또 하나의 불안정성이 있다. 이것을 합치면 다중을 이론화하는 좋은 토대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계급에서 다중, 혹은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이동을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미 지난 20년 동안 달성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쇠퇴와 상실로 간주한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획득된 것 또한 인식해야 한다. 상호구성하는 지배구조들의 다양체는 사회현실을 파악하는 데 더 나은 렌즈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에 대한 연구를 인종, 젠더, 성 위계의 제도적 구조들에 대한 동등한 분석으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실천의 수준에서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계급정치 기획이라면 반드시 페미니즘적·반인종적·퀴어적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을 다시 사고하기

다양체를 이론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하려면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 제기한 물음―다양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답하는 데 조직이 필요하다는 대답만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중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더 온전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바의 계급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서 계급으로 나아간다면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노동계급하고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양체인 계급, 다중의 성과를 이어나가는 정치적 형성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선 계급개념을 노동계급과의 관련을 넘어 인종, 젠더를 포괄하여 사용하는 이론가들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음벰베(Achille Mbembe) 같은 이는 유럽으로 이주하는 아프리카인들에 가해지는 현재의 통제방식들을 ‘인종적 계급’(racial clas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그 국경들을 군사화하기로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멀리 가져다 놓았다. 오늘날 유럽의 국경들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개별 아프리카인들, 인종적 계급으로서의 모든 아프리카인들이다. 이는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의 신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인간 신체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그리는, 학대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계적 신체(border-body)이다.

새로운 이동성의 체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낙인찍힌 인종적 계급’으로 변형된다고 음벰베는 주장한다. 그에게 계급개념은 사회경제적 범주가 아니거나 그런 범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에만 기반을 두지 않는 집단적 인종적 차이를 사고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이 인종적 계급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구조들과 제도들에서 탄생한다.

음벰베와 유사한 것이 델피(Christine Delphy) 같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성 계급’(sex class)이다. ‘성 계급’이라는 어구의 사용에 문제를 제기한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델피는, 계급개념이 사회적 주체들이 지배관계들에 의해 창출되는 방식을 다른 어느 것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런 관점에서 델피는 이렇게 쓴다. “집단들은 ··· 관계 속에 넣어지기 전에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가 바로 그들을 그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델피에게는 지배관계가 사회적 주체들 이전에 존재하며 이 주체들을 구성한다. 또한 델피의 어법에서 계급은 전적으로 경제적 위치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그 어떤 지배의 축에도 배치될 수 있는 분석의 절차와 관련된다.

음벰베와 델피를 거론한 것은 ① 첫째, 계급개념이 자본만이 아니라 모든 지배관계에 의해 창출된 종속의 효과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② 둘째 계급개념은 서술적으로만이 아니라 종속된 사람들을 계급으로서 투쟁으로 불러내는 정치적 요청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점인데), 병렬적으로 지배받고 투쟁하는 다수의 계급들을 인식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다중적 계급’(multitudinous class)’ 혹은 ‘교차적 계급’(intersectional class)은 더 나아간 단계를 필요로 한다. 즉 그 다양한 차이나는 주체성들의 투쟁에서의 내적 마디결합(internal articulation)이 필요하다. 교차적 분석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마디결합을 연합과 연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는 종종 추가의 논리에 기반을 둔 전략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교차적 분석이 정체성과 관련된 추가적 사고방식[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령 동일한 계급의식을 가진 집단으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할 때조차도 여전히 추가의 논리가 활동가들의 상상계를 지배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접근법의 한 약점은 유대의 관계가 외적이라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내적 유대이다.

내적 유대의 세 이론적 사례들.

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905년 봉기의 실패 후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동지들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표현했을 때 로자는 그 유대가 단지 외적인 관계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독일 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러시아의 사건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건이며 자신들의 투쟁에 내적인 사건들이라는 점,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② 아이리스 영(Iris Young)
로자처럼 영도 페미니즘 투쟁과 연대하지만 그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과는 분리된 것으로 보는 남성동지들을 비판했으며 그런 유대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남성사회주의자들에게 가부장제에 맞선 페미니즘 투쟁을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으로서 인식하기를 권고한다. 자본을 물리치는 것은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③ 키앙가-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
그녀는 계급지배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미국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들에게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녀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백인의 과제로 간주되고 반인종주의적 투쟁은 유색인들의 과제로 간주되는 분리현상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 노동계급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따라서 인종, 계급, 젠더 이슈들을 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사실 미국의 노동계급은 여성이고 이주자이며 흑인이고 백인이며 라틴계이고 기타 등등이다. 이주자 이슈, 젠더 이슈 그리고 반인종주의는 곧 노동계급 이슈들이다.” 이는 우군의 참여를 받아들이거나 연대를 표하는 문제가 아니다. 백인우월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의제기가 이 시점에서 가능하다: 모두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같이 투쟁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맞지만, 불안정성 및 지배의 양태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의 투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체라는 생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는 젠더나 인종 지배와 같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다른 것 아래 포섭되지 않는다. 동일성으로의 환원 대신에 투쟁하는 주체성들 사이의 마디결합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연합보다는 계급―다중적 계급(a multitudinous class)―이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다양체로 구성되고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에 기반을 둘 뿐만 아니라 투쟁들 사이의 내적 유대와 교차에 의해 마디결합되고 각자가 다른 것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그러한 계급 개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형된 개념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과정 전체는 <계급―다중―계급>이 아니라 <계급―다중―계급′, C―M―C’>이다. 이것이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어도 초기 단계의 이론적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자본,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및 기타 지배에 동등하게 맞선 투쟁을 지향하는 내적으로 마디결합된 다양체로서의 계급′이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응답이긴 하지만, 예의 정치적 기획을 사고하고 추구하기 위한 틀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대안지구화를 찬양하며

1994년 멕시코의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반란, 1999년 11월의 시애틀에서의 WTO회의 봉쇄투쟁,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2001년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2001년 제노아에서의 G8 정상회담 반대투쟁. 이렇게 이어져 온 대안지구화 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은 여러 패배를 겪었다. 그 유목적 성격과 정상회담을 쫓아다니는 실천은 여러 경우 지역에서의 지속적 조직화에의 참여를 희석시켰다. 이 투쟁들은 종종 비판을 받았는데, 운동 내의 활동가들 자신들에 의해서 가장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교차적 특징들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직적 취약성 때문에 투쟁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또한 9∙11 때문에 설치된 혹독한 보안체제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그 초점을 대안지구화에서 반전운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투쟁들의 이례적 미덕은 그 이론적 실천이다. 이 투쟁들은 전지구적인 비판적 비전을 구축했으며 전지구적 경제기구들이라는 상대적으로 불명료한 영역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명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투쟁들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출현하는 전지구적 질서의 성격에 대한 방대한 집단적 공동연구로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활동가들은 현재의 지배 구조들이 바로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각 투쟁은 새로이 출현하는 전지구적 권력구조 네트워크의 마디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했다. WTO, World Bank, IMF, G8, 무역협정들 등등. 이렇듯 대안지구화 운동의 순환은 대대적인 교육프로젝트였다.

국민국가 주권의 이데올로그들이 나팔을 불어댐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세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덜 명료하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배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를 연구할 지성을 가진 투쟁의 국제적 순환을 필요로 한다. 때로 사회운동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작업이 도서관에서 쓴 이론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의 비가시성을 역전시키는 것이 제국의 구조들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데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코로나와 커먼즈

 



코로나와 커먼즈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에 현재의 ‘혼란한 이행기’와 ‘다음에 올 것’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목적으로 라모스(Jose Ramos)—앞으로 나올 세계-지역적 생산(cosmo-local production)에 관한 책의 책임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역사의 리듬 및 순환에 관한 문헌을 검토해오고 있었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1) 사회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단계에서 혼란한 이행들을 거쳐서 나아가며 이것은 인간의식과 사회경제적 구조 둘 다의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변이들이다.

2) 이 변화는 비선형이며 내부적이거나 외부적인 충격을 거쳐서 진행된다.

분명히 코로나는 외인성(外因性)―즉 예측할 수 없는 외적요인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파괴적인 우리의 생태적 관행들이 팬데믹 발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코로나는 내인성이기도 한 충격이다. 이것은 인간 삶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수요와 공급 모두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체제에 이중 충격을 일으키는 이중의 불운이다. (경제위기가 수요와 공급 어느 하나에서 통상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코로나가 본격적인 이행을 하는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커다란 가속기’는 될 것이며, 코로나는 이미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바꾸었다. 녹색/P2P/커먼즈 이행을 가속화하는 긍정적이기만 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거나 네이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옮긴이]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동명의 저서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과 같은 부정적이기만 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급진적인 변화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몇 가지 예비적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1) 시장은 그런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해법을 찾는데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며 대기업과 소기업의 90%는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파산할 것이다. (바로 지금 대형 은행들이 미국의 필수 의약품들의 값을 부당하게 올리도록 대형 제약회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이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많은 중소기업들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적정 비용으로 진단을 받지 못하거나 의약품이 부족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 때문에 인구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2) 국가들은 약하고 지도자들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국가라는 제도는 사회적 장이 단편화된 데서 오는 혼란한 반응들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이 훨씬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시장을 단속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드러났다.

3) 현행의 다자주의 체제(([옮긴이] 다자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544참조.))는 유용했지만 (가령 WHO) 또한 상당히 약하고 비효율적이며 적어도 임무를 수행하는데 불충분했다. 국가 및 다자 기구들의 결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들이 없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국가 및 다자 기구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초기 대응 지연과 초기 실수 이후로 대부분이 비교적 지각 있는 정책을 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맥락에서 국가 형태를 폐지하는 것이 심각한 재앙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이례적인 시민정신과 시민사회의 협력적인 기동(機動)을 보았는데 이것은 위기에 적응하는데 그리고 시장과 국가 실패를 완화시키는데 필수적이었다. 수많은 지역적 및 초지역적 집단들(local and trans-local groups)이 의료장비들—시장은 의료장비들을 비축하지 않았고 국가는 제때에 주문하지 못했다—을 신속하게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과학적인 커먼즈를 창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인공호흡기가 없다면 환자는 죽는다. 마스크가 없다면 의료인이 감염되고 시민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서로를 감염시킬 것이다. 대규모로 검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화에서 억제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 모든 노력에서 시민사회 집단들이 앞장을 섰다.

5) P2P/커먼즈/오픈소스의 노력을 통해 드러난 것은 초지역적, 초국가적 대응을 위한 새로운 기구들의 씨앗들이다. 이 씨앗들은 현시점에서 국가적/다자주의적 체제를 (비록 이 체제가 불충분할지라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이 체제를 크게 강화할 수는 있다. (우리는 앞으로 국제 및 다자기구들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한 초국적 기구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초국적 기구들의 경우에는 생태적•사회적 정의가 서로에게 강하게 의존적이기 때문에 인간경제가 지구의 경계 내에서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형평성 한도 내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배적이고 필요한 현 체제는 시장참여자들(market players)을 살리면서도 강압하는/동원하는 새 입법을 통해 현재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을 이리저리 부릴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 체제는 그 자체로 효율적일 필요가 강하게 있는 초지역적•초국적 전문지식을 갖춘 집단지성과 함께 일하며 이 집단지성을 기동하는 것을 도울 필요가 있다. ‘파트너 국가(partner state)’(([옮긴이] 파트너 국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468참조.)) 실행과 공적 커먼즈 프로토콜을 향한 이 과정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현 위기의 부정적인 결과들 중 하나일 수 있는 강압적•권위적인 국가 중심 모델의 대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커먼즈 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

1) 하나는, 상호부조적 자기조직화뿐만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실패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오픈소스 활동들을 통해서 이미 해왔던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입증하는 것이다.

2) 구조적으로 적응하고 개혁을 이루고자 노력하기 위해 이 교육적인 위기의 기회를 활용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지역적일 수만은 없으며 초지역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즉 기존의 제도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커먼즈 중심의 개혁과 변형 정책들을 제안하기 위해 제도적인 삶의 모든 수준에서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는 심각한 위기이지만 기후는 훨씬 더 심각한 위기이다. 역설적인 방식으로, 코로나에 대응하는 세계적 움직임은 그 취약성과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관들이 일단 우리의 생명과 그들의 합법성이 위험에 처하기만 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빨리 선택을 조정하고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후변화에의 적응과 생태학적 변형에도 좋은 징조이다. 그러나 실수를 하지 말자. 이것은 우리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는 위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새로운 삶으로의 분기를 위한 심층적인 변형은 우리가 유럽에서 11세기와 16세기에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의식의 변이’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그 변이가 전지구적이고 상당히 동시적일 필요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변이의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강한 선행조건들을 명확하게 눈앞에서 보고 있으며 현재의 위기가 바로 이 선행조건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자연의 한계들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다른 모든 생명형태들과의 상호의존성을 깨닫는 새로운 안정적인 시스템으로의 필요한 변형을 가져올 교육적인 재난들 가운데 첫 번째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하는 추출적인 체제들과 인간사회가 항상 강구해온 재생성적인 대응들 사이에서 진동해온 순환의 역사를 피할 필요가 있다. 대신에 우리는 수 세기와 수천 년을 지속할 수 있는 견실한 경제와 사회체제로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이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

 



지난 8세기에 걸쳐서 영국정치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두 개의 북엔드가 있다. 한 쪽 끝에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심림헌장 관련 글로 http://commonstrans.net/?p=478,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961 참조.))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영국 총리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가 있다. 삼림헌장은 1215년부터 (1971년까지!) 생존을 위해 공통의 부에 접근하는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했고, 새처는 공통의 부를 훔치고 사유화함으로써 이 권리들을 없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사회제도를 1981년에 도입했다.

런던 소재 SOAS 대학의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최근 저서 『커먼즈의 약탈: 공적인 부를 공유하기 위한 선언』(Plunder of the Commons: A Manifesto for Sharing Public Wealth)에서 이 역사의 양끝 지점을 한데 모은다. 초점은 인클로저에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핵심, 즉 책이 선언하는 바는 요즘의 맥락에서 공적 자산 및 공공 서비스로서 주로 이해되는 커먼즈를 되찾는 것이다.

커먼즈는 영국의 ‘심층 역사’에서 거듭해서 등장했지만 대체로 커먼즈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커먼즈는 보통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의성 있는 정치 쟁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커먼즈를 그 원대한 역사적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시대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풍부하게 다룬 책을 마침내 우리에게 선물한 스탠딩에게 크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커먼즈의 성쇠에 관여된 아주 많은 다양한 가닥들—법률•토지•재산권•경제•문화•지식—을 종합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 커먼즈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적절하게도 스탠딩은 커머너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한 삼림헌장에 관한 장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스탠딩이 서술한 삼림헌장의 역사는 분명,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거의 잊혀진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가장 간결하고 생생한 역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정의하는 많은 유형의 법(률)•인간권리•정치투쟁의 최초의 사례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술이다.

스탠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면에서 삼림헌장은 평민이 최초의 계급 기반의 요구사항들을 직접 혹은 그들을 대신하는 다른 세력을 통해 국가(국왕)에 제기하여 ‘자유인들’의 공통적인 혹은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서 간주될 수 있다. … 삼림헌장은 자유인들에게 생계수단에의 권리, 원료에의 권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정도로 생산수단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였다.

‘기원 서사’에 이어서 스탠딩은 교육•의료•토지•지식 등의 영역들에서 커먼즈가 오늘날 왜 그토록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그는 어떻게 토지 소유권이 부유한 소수들에게 집중되었는지를, 어떻게 공유림들이 목재를 약탈당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공원들과 공공장소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사유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커먼즈•사회커먼즈•시민커먼즈•문화커먼즈 및 지식커먼즈(스탠딩의 범주들)를 조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국가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적정 가격의 주택을 밀어내고 노숙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동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조금씩 진행되는 사유화’를 통한 국가의료서비스의 쇠퇴에 대해 알게 된다.

스탠딩의 이 저서의 큰 기여는 어떻게 인클로저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만연한 현상—그런데도 정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현상—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탠딩은 영리하게도 단지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유시장주의자들—토리당, 기업들, 투자자들, 새처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쟁점들을 부활시킨다. 『커먼즈의 약탈』은 800년 전에 국왕이 공유지를 몰수한 일에서부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새처/레이건의 잔인한 긴축정책들까지 직선을 그음으로써 사태를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1200년대에 영국 토지의 대략 50퍼센트는 공유지로 관리되었다. 오늘날 대략 5퍼센트가 공유지로 인정되고 있다. 예측 가능한 일단의 정치적 남용사례들과 부의 불평등 사례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중세 왕들과 현대 자본가들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양쪽 모두에게 커먼즈의 절도(竊盜)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진보’는 항상 민중의 부(富)의 강제적 강탈—자유시장 경제가 위장하고 탈명명화(ex‑nomination)하려고 (말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온 어떤 것—에 의존해왔다. 이것이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내가 커먼즈를 이해하는 바와 스탠딩이 이해하는 바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많은 ‘공공재들’과 정부 서비스를 커먼즈로 본다. 나는 고전적인 커먼즈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는 상향식 거버넌스(bottom‑up governance)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국가신탁 커먼즈’(state‑trustee commons) 또는 간단하게 ‘정부 서비스’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가 표면상으로 커머너들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혹은 (앞으로) 공유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해 나는 커먼즈를 국가가 아니라 커머너 자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살아있는 사회 체계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체제를 받아들이는 담론 내부에서조차도 공동자산으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연다. 그런 이야기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가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커먼즈의 약탈』은 두 개의 ‘커먼즈 헌장 조항’을 제안함으로써 커먼즈를 되찾기 위한 야심적인 어젠다를 제시한다. “사적인 부는 많은 것을 커먼즈의 존재와 약탈에 빚지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커머너들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스탠딩은 쓰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커먼즈 펀드>(Commons Fund)를 설립하는 것으로, <커먼즈 펀드>의 기금은 사업에 사용된 공동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탁기금은 커머너들에게 배당될 배당금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은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 APF)로 입증되고 『자본주의 3.0』(Capitalism 3.0)을 포함하는, 피터 반스(Peter Barnes)의 많은 저서로 대중화된 구상이다.

스탠딩의 『커먼즈의 약탈』은 광범하고 학구적이지만 서사들로 풍성하고 읽는 즐거움도 있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탁상공론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그의 책에는 시기를 딱 맞추는 미덕 또한 있다. 대다수 커먼즈의 운명은 영국정치에서 빠르게 국가적인 논의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만큼 공들여 잘 만들어졌다.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전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권력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과정에서 경제가 금융화되고 난 후 우리에게는 플랫폼 경제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기업권력 층이 생겼다. 프랭크 패스콸레(Frank Pascuale)는 우리가 추천하는 아래 발췌한 글에서 이 과정을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 개념에 입각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녹화된 발표뿐만 아니라 전문(全文)을 꼼꼼히 읽어보길 바란다. 패스콸레가 설명하듯이, 넷지배 플랫폼(netarchical platform)들 즉 P2P 교환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개인 소유 플랫폼들은 우리의 데이터를 소유하고 우리의 행동을 부추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부문이 이전에 제공했던 여러 기능들을 제공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커먼즈에 기초한 공동생산•공동거버넌스•공동소유권의 민주적인 책무와 가능성들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무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음 편에서 우리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혁신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수립되는 전략을 제안할 것이다. 아래 발췌는 Open Democracy에서 가져왔다.

(미셸 바우엔스)

디지털 기업들이 방 임대에서 수송(운송) 및 상거래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게 되면서 시민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점점 더 기업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규제범위를 국가권력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단순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 공백을 싫어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국가 권한이 축소될 경우 민간 주체들이 그 공백을 메웁니다. 이들의 권력도 행정기관에 의한 흔해 빠진 민법 집행만큼이나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곳곳에 스며드는 효과를 가집니다. 로버트 리 헤일(Robert Lee Hale)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들이 언제 복종하거나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할 때는 언제나 통치가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고용관계에서 그리고 대규모 회사가 공급자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때 작동하는 이 권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분쟁의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그 분쟁을 결정하는 당국으로서 감히 사법 권력을 행사할 경우는 어떤가요? 대규모 디지털 플랫폼들이 상거래와 관련된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훨씬 더 일반화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주요 디지털 기업의 정체성과 야망에 대해 말해보죠. 그들은 더 이상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시장을 만드는 주체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규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길 열망하며 영토 주권의 논리를 기능적 주권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방 임대에서부터 운송(수송) 및 상거래에 이르는 기능적 장(場)들에서 사람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기업의 통제를 점점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에어비앤비가 방 임대, 그 다음에 주택 임대, 최종적으로는 도시계획 일반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을 둔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누가 도시 주택 규제기관을 필요로 할까요? 아마존이 그 자체의 관할구역이나 차터시티(charter city, 특별자치도시)를 갖도록, 또는 폭스콘(Foxconn)을 위한 특별 사법 절차를 제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어떤가요? 기능적 주권의 선봉에 선 일부 사람들은 온라인 등급제 평가가 국가의 직업관련 면허제도를 대신할 수 있고, 가령 정부 위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자격증을 주도록 하기 보다는 링크트인(LinkedIn) 같은 플랫폼이 그들에 대한 별점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바로 이 전환이 새로운 디지털 정치경제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법률 사상가들이 우리가 이 동학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리 밴 루(Rory van Loo)는 아마존 같은 플랫폼들이 구매자와 판매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해결절차를 실행할 때 그 지위를 ‘법원으로서 기업’(corporation as courthouse)이라고 불렀습니다. 밴 루는 아마존의 분쟁 해결 과정이 소액사건 법원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효율상의 이득과 소비자들이 놓일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들(예를 들어 불투명한 판결기준들 같은)을 모두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경제적인 고려사항들에 덧붙여 전자상거래 봉건주의의 정치경제학적 기원도 고려하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 권리가 위축되면서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역설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에 짓눌려있는 소액사건 법원보다는) 아마존에 맡기는 게 합리적입니다. 집단소송이 실질적 효력을 잃고, 중재(조정)와 표준문안계약(boilerplate contract)이 증가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소비자 분쟁에서 사법제도를 점점 더 흔적기관으로 만듭니다. 자유의지론적인 법적 교리가 국가로부터 질서를 부과하는 힘을 박탈했기에 개인들로서는 온라인 거인들에게서 이 힘을 찾는 것이 합리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이 거인들은 애초에 국가의 쇠퇴를 낳았던 바로 그 동학을 강화합니다.

이 약점은 최근에 아마존이 제2본사의 입찰 경쟁을 조장하기로 결정한 데서 농담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장들은 자신들의 시에 일자리가 생기도록 해달라고 비굴하게 간청했습니다.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의 독자라면 예측했듯이 경쟁으로 결정되는 동학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인센티브로서 너무 많이 제안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저널리스트 대니 웨스트니트(Danny Westneat)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것을 입증했습니다.

∙시카고 시에서는 아마존에게 노동자들이 내는 소득세에서 13억 2천만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레즈노 시는 아마존에게 아마존이 내는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특별 권한을 줄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다.

∙보스턴 시에서는 시 공무원들로 ‘아마존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아마존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조지아주의 스톤크레스트(Stonecrest) 시에서는 심지어 땅의 일부를 떼 내어서 베조스에게 ‘조지아주 아마존’으로 알려지게 될 345에이커의 부지의 시장이 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아마존의 예

아마존이 부상한 것은 교훈적입니다. 리나 칸(Lina Khan)이 “아마존이 전자상거래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아마존에 의존하는 다수의 다른 기업들에게 꼭 필요한 기반시설로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듯이 말이죠. ‘모든 것을 파는 상점’(everything store)은 경제에서 그저 또 하나의 서비스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가상 쇼핑몰이죠. 하지만 한 회사가 수천만 명의 고객들과 ‘마케팅 플랫폼, 배달 및 물류 네트워크, 지불 서비스, 신용 대출 기관, 경매 회사…하드웨어 제조업자, 그리고 클라우드 서버 공간을 제공하는 선도적인 호스트’를 결합시킬 때 이것은 칸이 말하듯이 단지 또 하나의 쇼핑 선택권이 아닙니다.

디지털 정치경제학은 플랫폼들이 어떻게 권력을 축적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온라인 플랫폼의 경우에는 ‘최상의 서비스가 이긴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는 20여 년 동안 사이버법(및 디지털 경제학)의 의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마존의 지배는 네트워크 효과가 어떻게 자기강화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죠. 상인들이 아마존에서 (또는 아마존에게) 팔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쇼핑객들은 가능한 모든 판매자들을 검색하고 있다고 그만큼 더 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쇼핑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판매자들이 아마존을 ‘꼭 필요한’ 장소로 여깁니다. 플랫폼 양쪽에 사람이 늘게 되면 가운데 있는 중개자가 점점 더 필수 불가결해집니다. 물론 새 플랫폼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만, 그 플랫폼이 아마존처럼 4억 8천만 개 품목을 (종종 대폭할인으로) 판매하는 데 도달할 때까지는 일반 소비자가 새 플랫폼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쓰레기봉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실제로 Target.com으로 옮겨가서 신용카드 정보를 다시 입력하여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쇼핑에 관한 세부 약관을 읽고 이 유통업체가 글래드(Glad)와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등, 이런 과정을 거치고 싶어 할까요? 또는 제가 썬스타인(Cass Sunstein) 식으로 제 과거 구매 습관을 상세하게 알아서 한번 클릭으로 만족하게 해주는 예측전문 조달업자를 원할까요?

인공지능이 향상되면서 아마존에서 습관화된 쇼핑 이력을 추적하는 것은 구매자들에게나 판매자들에게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밟아서 점점 뚜렷해지는 숲속의 오솔길처럼 그것은 자연스럽게 디폴트가 됩니다. 온라인 거대기업 속으로 돈, 데이터 및 상거래를 빨아들이는 여러 구심력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려면 온라인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것이 어떻게 아마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게임이론의 방식으로 생각해보세요. 온라인에서 한 상인과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일회성 구매자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수십 또는 수백 번이 넘는 거래를 통해 평판이 선 누군가로서, 또한 아마존에게 매년 수백 또는 수천 달러의 수익을 주지 않겠다고 확실히 위협할 수 있는 누군가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이 아마존에게 바치는 것이 많을수록 분쟁이 발생할 때 검색결과와 주목(그리고 어쩌면 선호도)에서 가시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브루스 슈나이어(Bruce Schneier)가 보안에 대해 말한 것이 온라인 상거래에도 점차적으로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무법의 영역에 질서를 가져오는 신봉건적인 한 거인들 가운데 하나에게 은총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디지털 영주들이 외관상으로는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데이터상의 이점들을 불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금세 할 것입니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 저자  :  Tim Dunlop

  • 원문 :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 (책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에서 저자 자신이 발췌한 대목들임) (2018.08.28)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가디언』지 편집자 설명] 자신의 새 책 『모든 것의 미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크고 대담한 생각들』(The Future of Everything: Big audacious ideas for a better world)에서 저자 팀 던롭(Tim Dunlop)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태짓는 방대한 기술적 전환을 살펴보면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는 데 이 전환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그는 미디어, 부의 창출, 노동, 교육, 그리고 통치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정부의 활동방식을 고치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투표에 의한 선출)를 임의선출(sortition)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을 뽑을 때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의회의 구성원을 선거로 뽑지 말고 적어도 그 일부는 임의적으로 뽑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이 나랏일의 운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그 효과로 정치와 통치가 변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도 선거권을 우리의 근본적 권리의 하나로 제시한다. 민중(국민)의 의지가 선거로 표현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오히려 민중의 의지를 침식해버렸다. 이제 민중의 의지를 회복할 제도가 필요한데, 임의선출이 바로 그 제도이다.

 

선거의 기원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기인 18세기로 소급한다.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선거를 엘리트 세력이 정치적 과정에 통제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성인들만이 선거권을 가졌다. 이런 제한을 싸워서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는 엘리트들이 ‘민주적’ 과정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퇴보해버렸다. 선거에서 뽑힐 시간과 자원을 가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된다면 다음 선거에 한번 출마해 보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일국의 수준으로 확대할 때 제기되는 첫 물음은 ‘우리 일반 시민들이 진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데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부터 엘리트들은 ‘군중의 지배’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대해 표현된다. 소셜 미디어는 민주적 군중의 무질서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민중의 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썰리번(Andrew Sullivan)은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민중의 의지와 권력의 행사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놓은 것을 찬양한다.

 

민중의 의지를 이렇게 얕보는 세력은 시민참여를 배제하는, 아니면 시민참여가 극히 어렵거나 불편한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참여결핍을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주류 제도에서 배제되고 통치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부터 배제된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의 새 플랫폼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현한다. 이 상대적으로 덜 규제되는 형태의 공적 표현은 분명 내용 없는 교류로 퇴락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일반인들의 참여의 부적절함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다. 이렇듯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실제적 참여를 배제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운전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이 신뢰를 잃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체제가 ‘보통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설계된 데 있다. 물론 선거에는 참여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정당의 통제 아래 있고 정당은 고유의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시 다른 주체들, 특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정치가들은 일단 당선되면 말로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국민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이로 인해 과정 전체가 시민의 관점에서는 소극(笑劇)이 된다.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실린 「제안된 상원 선거방식 변화가 호주의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다」(“The proposed Senate voting change will hurt Australian democracy”)라는 글에서 정치학자 드라이젝(John Dryzek)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의 연방 의회는 오늘날 ··· 안건을 숙의하는 곳이 아니라 여러 당에 속하는 정치가들이 대부분 의례적으로 자신의 말만 해대는 극장이다. 당 정치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드라이젝이 보기에 훌륭한 숙의의 본질은 참여한 사람들이 견해를 바꿀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진정한 숙의는 민중이 동등한 주체로 모여서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는 모든 사실적·정서적 요소들을 터놓고 다룰 때에만 생긴다. 당 정치로 인해 정치가들은 이러한 숙의의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나는 ‘시민의회’(People’s House, 민중의회)라 불리는 새로운 의회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곳이 상원이나 하원과 다른 것은 그 의원들이 임의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성인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회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배심원들이 범죄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듯이, 시민의회의 의원들은 입법과 관련하여 숙의하고 투표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의 정치체들에서는 시민 배심단,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혹은 기타 형태의 엘리트-대중 논의와 관련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의로 선출된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론조사는 정보에 기반을 둔 대중의 견해를 얻기 위해서 선출된 참여자들끼리 광범한 논의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 회사에서 임의로 선출한 참여자들을 이틀 동안 한 장소에 모아놓고 소집단을 이루어 서로 토론을 하거나 여러 견해들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게 한다.

 

1998년에 ‘호주가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한 공론조사가 행해졌다. 이 조사를 행한 기관―Issues Deliberation Australia―에 따르면 “호주인들은 참여할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 원래의 목표보다 47명 많은 347명이 최종 선출되어 10월 22일 캔버라(Canberra)에 도착했다.”

 

이 숫자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다룰 문제가 중요하며 논의의 자리가 믿을 만하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가진 것에 기뻐했으며 확신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받는 정보에 기꺼이 도전하려고 했다.

 

이런 포럼들이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더 평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포럼들은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참여자들 사이에 신뢰와 존중의 생성을 촉진하는 협동과 숙의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을 그저 무식하기만 한 존재로 보고, 시민들은 전문가들을 우월한 지식에서 나오는 힘을 주장하기만 하는 엘리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포럼은 서로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경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로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일반인 청중이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교훈은, 이것을 우리의 거버넌스 과정의 더 공식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유리되어 있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치 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일반인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경제와 대의제는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이런 분할을 넘어서 한데 모이기 위한 것이다. 임의선출은 기본 개념상 매우 직접적인 것이며, 그것을 가령 호주 상원에 다른 힘들을 그냥 둔 채로 도입하여 선거를 대체하는 것은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변화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수준에서는 그 잠재적 효과가 폭발적이다. 정당들과 그 많은 로비스트들의 힘이 일거에 삭감될 것이다. 미디어가 정치를 취재하는 방식도 변형될 것이다. 입법과정의 적어도 일부에 대한 통제력이 인구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질 것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방식으로 민중에게 힘이 부여될 것이며 우리의 정치 제도가 공통적인 삶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힘의 주된 원천이 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게 배웠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배운 것을 빨리 토해낼수록 더 좋다. 진정으로 대표적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를 원하면 그 정부를 선거가 아니라 임의선출을 통해 구성해야한다.




P2P 시대의 개방형 협동주의


  • 저자  :  Michel Bauwens
  • 원문 : “Open Cooperativism for the P2P Age (2014.06.16) / Attribution-ShareAlike 3.0 Unported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4년 전의 글이라서 더 정밀해졌을 현재의 바우엔스에는 못 미칠 수 있지만 협동조합이 나아갈 기본적 방향을 P2P 관점에서 잘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옮겨서 소개한다.

 

오래 버텨온 협동조합 기업들 가운데 일부가 실패하는 중인데도 협동조합 운동과 협동조합 기업들은 부활을 맞고 있는 중이다. 이 부활은 협동조합의 흥망성쇠의 한 국면인데, 이 흥망성쇠는 주류 자본주의 경제의 흥망성쇠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2008년도의 금융위기 같은 체제 차원의 위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대안들을 찾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옛 모형들을 찾아서 부활시키는 식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요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네트워크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포던스들(affordance)((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 옮긴이))을 고려해야 한다.

‘P2P’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해본다. P2P재단의 맥락에서 발전시켜온 것들이다.

첫째, 옛 협동조합 모형들의 비판에서 시작해보자.

협동조합들이 임금에 의존하고 내적인 위계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 기업들보다 더 민주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움직이는 협동조합들은 경쟁적 태도를 점점 더 가지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공동선이 아니라 회원들만을 위해서 움직인다.

둘째, 협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공통재)를 창출하거나 보호하지 않는다. 영리 기업들처럼 특허와 저작권을 따가지고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일쑤다.

셋째, 협동조합들은 회원 자격을 지역 혹은 일국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전지구적 무대는 영리를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지배하도록 열어놓는다.

이러한 특징들은 바뀌어야 하고 또 오늘날 바뀔 수 있다.

 

우리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영리 기업들과 달리 새로운 협동조합들은 공동선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이는 협동조합들의 정관과 거버넌스 문서에 포함되어야 하는 요건이다. 이는 협동조합들이 영리를 추구할 수는 없음을, 사회적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함을 의미하며, 이것이 그 정관에 기입되어야 한다. 북부 이탈리아나 퀘벡 같은 지역들에서 사회적 돌봄과 관련하여 이미 활동 중인 연대 협동조합들(solidarity cooperatives)은 올바른 방향으로 내딛는 중요한 발걸음에 해당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 모형에서 사회적·환경적 외부성(externalities)((여기서 ‘외부성’은 기업이 기업 외부 즉 사회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가리킨다―옮긴이))은 무시되고 외부에 있는 국가가 가하는 규제에 맡겨진다. 새로운 협동조합 시장 모델에서는 외부성이 정관에 통합되며 법적 의무가 된다.

2. 단일한 계층의 이해관계자들에서 회원을 끌어오는 협동조합들과 달리 새로운 협동조합들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운영에 포함시켜야 한다. 협동조합들은 다중 이해관계자들(multi-stakeholders)의 거버넌스에 맡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의 회원제가 다른 유형의 회원제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하거나 현재의 회원제 모형에 대한 대안― 가령 새로 제안된 페어셰어즈(FairShares) 모형―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3. 사실 우리 시대의 결정적 혁신은, 협동조합이 커먼즈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 커먼즈는 두 유형이 있다.

a. 첫째 유형은 비물질적 커먼즈이다. 열려있고 공유 가능한 라이선스를 사용하여 전지구적 인류 공동체가 협동적 혁신을 구축하고 다시 그것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2P재단에서는 커먼즈 기반 상호성 라이선스(Commons-Based Reciprocity Licenses) 개념을 도입했다. 이 라이선스는 윤리적 기업 및 협동조합 기업이 공동으로 산출하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윤리적 기업 및 협동조합 기업의 연합을 창출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이런 라이선스의 핵심 규칙은 이렇다 : ① 커먼즈를 비상업적 사용에 열어놓는다 ② 커먼즈를 공동선을 추구하는 단체들에 열어놓는다 ③ 커먼즈를 커먼즈에 기여하는 영리 기업들에 열어놓는다. 여기서 예외 조항은, 커먼즈에 기여하지 않는 영리 회사들은 라이선스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주된 목적이 소득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 경제에 상호성 개념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윤리적 경제, 비자본주의적 시장 동학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b. 둘째 유형은 물질적 커먼즈의 창출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 장비를 제조하는 데 기금을 댈 커먼즈의 창출이다. 클라이너(Dmytri Kleiner)의 제안을 따라서, 협동조합들이 증권을 발행하고 여기에 모든 조합원들(체계 내에 있는 모든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기여하여 제조를 위한 커먼즈 기금을 창출할 수 있다. 기금을 구하는 협동조합은 조건 없이 기계를 얻을 수 있지만, 협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유자가 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기금에 의해 생성된 소득으로 점차적으로 기본 소득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지구적인 사회·경제적 힘의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초국적인 인도전자 협동조합(Sociedad Cooperativa de las Indias Electrónicas)의 선도적 사례를 따라서 우리는 전지구적 부족(풀레, phyle)의 창출을 제안한다. 부족이란 커먼즈와 기여자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전지구적 사업 생태계를 말한다. 부족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움직인다. 개방형 농업기계들(혹은 다른 생산물이나 서비스)을 설계하는 전지구적인 오픈디자인 공동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기계들은 욕구가 있는 곳 가까이 존재하는, 일련의 개방되어있고 분산된 미시공장들(microfactories)에서 효율적으로 제조되고 생산된다. 그런데 이 모든 미시적 협동조합들이 고립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비물질적 생산에 초점을 두는’ 전지구적인 오픈디자인 공동체를 통해서만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미시공장들을 통합하는 전지구적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서로 연결될 것이다. 그런 전지구적 부족들의 결합이 새로운 형태의 전지구적인 사회·정치적 힘― 전지구적인 윤리적 경제를 대표하는 힘―의 씨앗이 될 것이다. 윤리적 기업가 연합과 부족들은 개방형 회계와 열린 공급망 제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 이후의 시장(post-market)에서 물리적 생산의 조정에 관여할 수 있다.

요약하면, 전통적인 협동조합들이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그 형태는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P2P와 커먼즈 생산의 측면을 도입함으로써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새 시대의 개방형 협동주의에 대해 우리가 권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협동조합들은 정관의 차원에서 (내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

2. 협동조합들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포함하는 거버넌스 모형을 가져야 한다.

3. 협동조합들은 비물질적·물질적 커먼즈를 공동으로 산출해야 한다.

4. 협동조합들은 비록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더라도 그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멕시코시티 : 변형의 씨앗들



 

2018년 6월 말에 나는 <도시랩>(Laboratorio Para La Ciudad, City Lab)을 통해 미래연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과제로 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멕시코시티(CDMX)에서 1주일을 보냈다.

가브리엘라 고메즈-몬트(Gabriella Gómez-Mont)가 설립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도시랩>은 시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멕시코시티 정부의 실험적인 부서/창조적인 싱크탱크이다. <도시랩>은 도시개발을 위한 기술과 전략 면에서 매우 혁신적이다.

<도시랩>은 도시의 모든 것에 대해 성찰하고 서반구에 위치한 가장 큰 메갈로폴리스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본(social scripts) 및 도시로서의 미래를 연구하는 곳으로 도시의 창조성, 이동성, 거버넌스, 씨빅 테크(civic tech, 시민을 위한 기술), 공적 공간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연구하고 있다. 또한 <도시랩>은 다학제간 협동을 수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으며, 이 실험을 실행할 때 정치적•공적인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민사회와 정부 간의 연결고리를 창출하려고 하고 있다.(([옮긴이] http://directorsfellows.media.mit.edu/fellow-profiles/gabriella-gomez-mont/))

나는 1주일 동안 <도시랩>의 <오픈시티> 팀인 란다(Gabriela Rios Landa), 델가도(Valentina Delgado), 무뇨스까노(Bernardo Rivera Muñozcano) 그리고 메이(Nicole Mey)와 함께 작업했다. 그들이 하는 일, 헌신 및 창조성에 굉장히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내가 요청받은 일은 매우 다양했으며 내가 전문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1. ‘열린 도시로서의 멕시코시티’라는 비전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소 사람들 및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비전만들기 워크숍을 운영하기. 이것은 포괄적이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2. ‘설계를 민주화하기’에 관하여 강연하기. 이 강연에서 나는 P2P 재단의 관점으로 설계와 코스모지역화(cosmo-localization)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들’을 논의했다.

3. 멕시코시티의 인공지능에 적용하기 위한 예측 거버넌스 전략을 개발하는 설계 세션을 운영하기

4. 또한 나는 커먼즈로서 도시와 공동-거버넌스, 비전 매핑 및 예측실험/브리지 방법에 관하여 <오픈 시티> 팀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한 한 주였다!

 

비전만들기

비전만들기 워크숍과 관련해서, 우리는 ‘비전 사이클’(vision cycles)이라 불리는 기술을 사용해서 워크숍을 시작했다. 이 기술은 발전의 토대가 된 이전의 비전들(‘사용된 미래들’로 간주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의 비전과 그 효과들 그리고 새로 출현하고 있는, 미래를 위한 모든 아이디어들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어떤 쟁점의 역사를 맵핑한다. 비전 사이클을 사용한 이후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미래도시를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되는 짧은 시각화 과정을 진행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소헤일 인나야툴라(Sohail Inayatullah)가 처음 개발한 통합적인 비전만들기 방법을 사용하여 선호되는 미래와 버려진 미래를 보고나서 그 다음에 통합된 미래를 개발했다.

세션에서 도출된 한 가지 통찰은 도시에는 많은 자아들이 있다는 것이며 무엇이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들이고 어떤 자아들이 버림받았는지를 따져 물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자아가 버림을 받고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자아의 행위는 침식적이고 파열적이며 선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와 버림받은 자아 사이의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갈등이 뒤따를 수 있다. 통합적인 비전 제시 방법은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와 버려진 자아의 통합이 어떻게 더 전체론적이거나 더 현명한 개발을 낳을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예측 거버넌스

인공지능 같은 쟁점의 경우,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잠재적인 영향은 크게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이 경계가 확연한 여러 영역들(기계 학습•신경망•알고리즘•로봇•자동화 등)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정의상의 모호성이 존재하며, 쟁점의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랩>은 이 다면적인 쟁점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방법에 대한 일단의 정책들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나에게 인나야툴라의 다층적 요인 분석(Causal Layered Analysis, CLA) 방법을 적용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인공지능에 적합한 예측 거버넌스 틀을 만들 수 있는 구성요소를 제공하기 위해 내가 개발한) 예측 거버넌스 설계 틀(Anticipatory Governance Design Framework)을 사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워크숍은 말할 필요도 없이 풍성했는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끌어 가는 몇몇 핵심 전제, 세계관 및 태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힘을 부여하는 길을 제공하는 새로운 신화 및 비유를 탐구했다.

 

발표들

이것 말고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발표했다.

커먼즈로서의 도시와 공동-거버넌스. 이것은 발표라기보다 대화였고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훨씬 더 많이 배웠다. 이 대화는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도시 커먼즈에 관한 크리스티안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셰일라 포스터(Sheila Foster) 등의 연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도시 커먼즈 관점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 관점이 볼로냐/바르셀로나/헨트(유럽에서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인구가 사는 중소도시들)의 맥락에서 멕시코시티(부자들/권한을 가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소외된 사람들로 계층이 크게 나뉜 2천4백만 명의 사람들)의 맥락으로 옮겨질 가능성에는 의문을 가졌다. 그들은 또한 단일한/획일적인 도시 비전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멕시코시티의 정신이 획일적인 방안을 거부한다고 느꼈고 헤테로토피아적 미래들(heterotopic futures), 즉 도시 내부에 있는 복수(複數)의 미래들을 위하여 어떤 기회들이 어디에 존재할지를 궁금해 했다. 무수히 많은 집단들, 콜로니아 지역들(colonias),(([옮긴이] 콜로니아(colonia)는 멕시코-미국 국경 지역을 따라 위치해 있는, 미국에도 멕시코에도 속하지 않은 저소득 주택지역이다. [위키피디아])) 공간들로 이루어진 도시로서 멕시코시티는 공간적 다양성과 함께 시간적 다양성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콜롬비아 이전 문명은 콜롬비아 이후의 것 그리고 전지구적/신자유주의적인 것과 중첩되고 맞물려 있다. 그래서 멕시코시티는 선형의 시간에 기반을 둔 단일 문화를 거부한다. 미래는 근대주의적인 용어들로 틀지어질 수 없으며 여러 비전들의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이 비전들의 생태계와 긴밀히 연결되는 것은 다소 유행에 따르는 스마트/디지털 도시 전략의 개시에 대한 우려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전략이 도시를 개방적•참여적으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멕시코시티 같은 장소에서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더해주는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열린 도시’는 핵심적인 불평등이 다루어지는 도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화에서 분명해졌다. 생존경쟁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임금보다 적은 돈을 벌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는 한 도시를 결코 ‘열린’ 것으로 경험하지 못할 것이며 도시에서 교외는 교외 분리 정책에 의거하여 부유층의 주거지로서 거의 제도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멕시코시티가 그 정치적 구성에 대한 역사적인 크라우드소싱(CDMX’s historic crowdsourcing of their constitution)을 한 것은 중요한 선례가 되었고 거기서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제기되었다(하지만 아무래도 입법과정을 통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재된 커먼즈-거버넌스의 핵심 원리 ―이를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와 함께 한 논문에서 최근에 발전시킨 바 있다―도 발표했는데 나는 삶의 모든 측면의 민주화에 대해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영향이 이 원리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출판 전의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

‘공통 관심사’라는 이 생각은 커먼즈와 커머너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다. 지구의 생명유지 체계의 경우, 커먼즈로서 이 체계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맥락 전환에 의해 활성화되어야 비로소 이 체계가 공동체에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함축되어 있다. 기후변화 같은 기본적인 쟁점과 관련해서 개인들이 각성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관심사의 커먼즈(commons of concern)로서 70억의 다른 인간들(및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들)과 대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일어난 일을 통해 우리 각자는 21세기의 이 공유된 관심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지구의 대기는 함축된 커먼즈에서 명시적인 커먼즈로 바뀌었다. 우리의 대기가 모두에게 생존문제가 되었고 갑자기 사람들은, 행동에 뒤따르는 책임감을 갖고서 자신들이 어떻게 이 공유된 관심사에 얽혀있는지를 보는 만큼은 커머너들이 되었다. 이것은 지구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민주화를 암시한다.

내재된 커먼즈-거버넌스의 이런 원리가 그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는 이것을 멕시코시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다.

비전 매핑과 예측 실험/브리지 방법. 나는 또한 비전 매핑—오픈스트리트맵(OSM)과 지도 인터페이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온라인상에서 편집 가능한 매핑과 비전만들기 과정을 결합시킨 것—에 관한 나의 연구도 발표했다. 연구소의 어떤 팀은 오픈스트리트맵을 이미 어떤 프로젝트에 사용하고 있었으며, 도시 지리와 상상계를 맵핑하기 위해 참여에 기반을 둔 방법을 활용하는 경우와 상당히 겹쳤다. 또한 나는 예측 실험/브리지 방법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방법은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접근법과 매우 일치했다. 이것은 명시적으로 이 연구소가 멕시코시티의 도시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계획하는 과업을 맡은 시 정부 소속의 실험적인 부서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지역화

나는 코워킹스페이스(coworking space, 개방형 사무실)인 ‘위워크’(wework)에서 코스모지역화에 대해 발표했다. <펩시티 멕시코시티>(FabCity CDMX)와 <미래학>(Futurologi)이 행사를 주관했으며 나는 이 행사에서 벨라스께스(Oscar Velasquez)와 또바르(Inga Tovar)를 만나게 되었다. 대략 50~60명의 사람들과 어울려 형편없는 내 스페인어와 완벽한 스페인식 영어를 자랑할 기회를 가졌다. 내가 P2P 재단에서 동료들과 함께 발전시켜 오고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코스모지역화를 “지역화된 생산을 할 수 있는 하이텍 및 로우텍 능력을 공히 갖추고 있는, 전지구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지식 및 설계’ 커먼즈들을 한데 모으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코스모지역화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끌어 낸 윤리적 전제–좀 더 효율적으로 생계를 창출하고 지역 환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지혜의 유산이 사람들과 공동체에 의해 보편적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지역 생산 및 혁신이 서로 지구 커먼즈의 웰빙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에 기초합니다.

나는 인류세(anthropocene) 맥락에서 심층적인 상호화라는 주제에 대해 말했다. 슬라이드는 여기 참조. 오디오는 여기 참조.

그 주 후반에 나는 또바르와 팟캐스트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쎈뜨로 유니>(Centro Uni)와 <미래학> 간의 협업인 코스모지역화 즉 ‘설계는 전지구적으로, 제조는 지역에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해당 주제에 관하여 한층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식의 팟캐스트였으며 오로지 스페인식 영어로만 진행했다(나는 청중들을 위해 스페인어로 말하려고 했으나 자꾸 영어로 되돌아가서 또바르에게 통역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디오는 여기 참조.

 

인상과 회상

전반적으로 말해서 나는 멕시코시티 전체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다. 멕시코시티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크라우드소싱하는 것에서부터 (이런 종류로는 아마 지금까지 최대 규모의 실험일 것이다) LGBT 친화적인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된 것, 보편적인 기본소득 창출을 시도하는 것, 그리고 물론 <도시랩>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지성과 진보적 정치의 오아시스이다. 나는 이 도시가 부활과 잠재적인 변형으로 나아가는 변곡점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매일매일 투쟁하는 대부분 사람들, 즉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희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멕시코시티의 경우, 커먼즈 거버넌스와 코스모지역화의 전망은 멕시코시티의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 수준에서 주변화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사실상 그 관건이다. 공동-거버넌스와 도시 커먼즈의 측면에서 보면, 멕시코시티의 개발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능력과 도구를 부여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원칙에 해당한다. 코스모지역화의 측면에서 원칙은 사업을 하는 모든 공동체가 자신들의 웰빙과 생계를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할 수 있도록 그 잠재력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내가 멕시코시티와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가족사에서 연원한다. 어머니는 콜로니아 지역인 로마(Roma)에서 태어나서 외할머니와 이모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첫 12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는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그녀의 가족에게 삶은 힘겨웠고 그들은 아주 아주 가난했으며 생존을 위해 밤낮 없이 싸워야 했다. 이것은 내 정체성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멕시코시티를 위해 외국에서 자문하러 온 미래학자라는 상대적인 특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극심한 빈민층 출신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다른 면에서 보면 내가 ‘하층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와 그녀의 가족에게 ‘출세’란 멕시코시티 중심부에서 부자들을 위해 하녀로 일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불평등과 가난의 흔적으로부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도시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번성할 도시의 미래에는 버려진 사람들도 통합되어야 한다.

 




긱 경제에 저항하기: 협동형 음식배달 플랫폼의 출현



 

영국의 노동 가구 중에서 7백만 명의 사람들은 빈곤하며 실질 임금은 지난 10년 동안 10.4%가 하락했다(유럽의 다른 어떤 곳보다 더 하락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1,000명의 사람들은 브렉시트 이후 수십억씩 돈을 더 벌었다.

플랫폼 기업들이 빈곤임금(poverty wage)을 지불함으로써 빈부 격차를 벌리는 데 일조하고 있고 부당하게 높은 자산 가격과 낮은 생산성으로 거품을 산출하고 있다. 영국에서 다섯 번째 부자인 알리셰르 우시마노프(Alisher Usmanov)는 처음에 철강과 철광석으로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스포티파이>(Spotify,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에어비앤비> 같은 회사에 투자함으로써 재산을 늘린다. <딜리버루>(Deliveroo, 영국의 온라인 음식배달 회사)는 자체 식당을 소유하지도 않고 배달원을 고용하지도 않지만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푸드 체인점인 <웨더스푼>(Wetherspoon) 이상의 가치가 있다.

2017년에 <딜리버루>의 회사 손실액은 300% 이상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 창업주는 450만 파운드를 이사들에게 주식보너스로 지급하고 자신의 봉급도 넉넉하게 22.5% 인상했다. 이와 달리 <딜리버루>의 배달원들은 최저임금, 병가 및 공휴일 추가근무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주식 소유권에서 오는 이윤이 소수에게로 가고 임금은 정체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자본 소유주들 간의 빈부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소득의 공정한 몫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유권의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때인데, 이 후자의 문제에서 주도적인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 협동형 음식배달 플랫폼이다.

 

유럽의 배달원들

2016년에 일어난 영국 <딜리버루> 배달원들의 첫 번째 파업 이후 그 물결이 프랑스,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퍼졌으며, 바로 2주전(([옮긴이] 이 글의 게재 날짜가 2018년 3월 22일이므로 3월 초에 해당한다.))에는 볼로냐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배달원들은 작년에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슴적인 <자유노동자연합>(Free Workers Union, FAU)과 함께 조직화를 시작했다.

FAU는 ‘배달연합’(Deliverunion) 캠페인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평적인 열린 공간으로서 기능했으며 직접행동에 100명이 넘는 배달원들을 모으고 킬로미터 당 보너스급여를 쟁취했다. 유급 간부나 조직자들이 없는 상태이므로 초등학교 교사들 및 간병인들 같은 다른 부문의 구성원들이 지원을 해 주었는데, 이는 노동조합이 자체적으로 행동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자원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FAU는 그 나름의 온라인 플랫폼을 창출하기 위해 일단의 개발자들을 끌어 모았는데 배달원들은 이 플랫폼에 접속해서 그들의 단체협약에 포함시킬 내용을 토론하고 그와 관련된 투표를 할 수 있다. 플랫폼이라는 도구로 인해 배달원들은 노동조합 모임에 물리적으로 참석하지 않고도 요구 사항을 표현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 도구는 또한 인원을 모아서 파업에 관한 투표를 하고 노동자 전체에게 메시지를 재빨리 퍼뜨릴 수 있게 해준다. 디지털 플랫폼이 고객의 요구가 있을 때 즉시 고객을 배달원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 플랫폼들이 ‘파편화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촉진하는 데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협동형 디지털 플랫폼들의 잠재력

조직화된 배달원들 사이에 이러한 협력적인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그들 나름의 음식배달 플랫폼을 공동 개발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이것이 P2P재단에게서 사용 허가를 받고 앱 개발자들과 앱을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배달원이 협력하여 관리하는 오픈소스 음식배달 앱인 ‘coopcycle.org’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유럽 전역에서 모인 음식배달원들로 구성된 포럼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 앱을 실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스페인의 배달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그들 나름의 협동형 버전의 <딜리버루> 앱을 만들어 내놓기 직전이다.

회사의 이익이 회사를 실제로 ‘이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노동자들이 더 나은 근로조건, 안전한 계약, 병가 중 급여, 그리고 무엇보다 존중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공동으로 소유되는 이 배달 플랫폼들은 <푸도라>(Foodora), <딜리버루>, <우버 잇츠>(Uber Eats) 등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공동소유권은 이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거버넌스와 책무는 물론 노동자들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투명성 및 배달원들의 일상 업무를 지시하는 알고리즘 기능의 투명성을 의미할 것이다.

협동형 사업은 또한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 <딜리버루>가 각 주문에 대해 터무니없이 높은 30% 수수료를 레스토랑에 청구하는 반면에 협동형 모형에서는 일단 핵심비용이 충당되면 이 요금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협동형 모형에서는 주문이 15파운드를 초과하기만 하면 배달원의 임금과 다른 지출을 부담할 정도가 되고 이는 그 액수를 넘어서는 주문들은 더 저렴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협동적으로 운영되는 이들 음식배달 플랫폼들은 실리콘밸리와는 다른 비전—소수의 부자들에게 단기간의 투기 이익을 내줄 벤처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집착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제시할 것이다. 플랫폼 경제가 곧 사라질 리는 없을 터이며 독점적인 디지털 플랫폼들은 노동자들의 몫을 더 한층 줄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프랑스•독일에서 출현하는 사례들은 긱 사업체 고용주들에게 반격을 가하고 배달 플랫폼 활동의 미래에 희망의 빛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힘이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