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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koan, 公案)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4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보기]
11장 Roaming [보기]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40장 The Fifth Dimension
41장 Towards Upward
42장 Offer a New Path . . .
43장 . . . before Opposing the Current Path
44장 Money Flows
45장 The Cascade of Change

 


19장 공안(公案)

크래플은 디날리에서의 셋째 시즌을 맞이하기 전에 큰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자신의 일차적 목표―맥킨리산(Mt. McKinley)의 ‘seasonal naturalist’가 되는 것[맥킨리산은 디날리국립공원에 있는 산으로서 디날리산이라고도 불린다―정리자]―는 달성하였기에 ‘다음 목표’가 관심사가 된다. 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은 비교신화학자인 캠벨(Joseph Campbell)의 『천의 얼굴의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이다. 이 책에서 캠벨은 ‘살아있음의 모험’(the adventure of being alive)을 개인이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인간 지혜를 신화들이 전해준다고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영웅 신화들은 결코 영웅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만화책·영화·동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경우와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삶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신화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크래플은 자신에게 어떤 신화적인 조우와도 같은 것이―아마도 갈색양진이(the rosy finch)의 경우처럼 자연과 관계된 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데, 그의 생각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블랙홀을 중심으로 계속 맴돌았다.

상승이 더 큰 하강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서만 살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이 그러한 것 이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크래플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생에게 태양은 결국 죽을 것이며 그러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도 끝장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줄곧 이 문제로 고민해왔다. 모든 것이 끝장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혼자 끙끙대왔던 것이다.

크래플은 고등학교 때부터 ‘엔트로피’니 ‘열역학 제2법칙’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 시작한다. ‘커먼즈의 비극’을 말한 것으로 유명한 하딘(Garrett Hardin, a prominent ecologist)이 열역학 법칙들을 요약한 말도 접했다. “이길 수도 없고 심지어 비길 수도 없다. 게임을 안 할 수도 없다.” [나중에 크래플은 하딘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변형시킨다.] 그러면 인간도 근본적으로 시체를 뜯어먹는 구더기와 같은 것인가? 생명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서로 뜯어먹으며 돌아가는 것인가?

크래플은 이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개관한다. 종교는 이 황량한 문제들로부터 안심 되는 보호처를 제공했으나 과학의 등장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으로 종교를 대체하여 종교가 제공한 보호처는 퇴출되었다. 과학혁명으로부터 동력을 받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물들을 내놓는 기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단순한 부품들을 결합하여 더 큰 것으로 만들어진 이 기계들이 우리의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은유가 되었다.

크래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 사는 것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자연을 공부해보니 과학이 관찰한 바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적 영혼에서의 분열”을 어떻게든 치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크래플 개인의 공안(koan, 公案)이 되었다.

‘공안’이란 말을 아는 것으로 보아서 크래플이 선불교에 대한 책을 읽었거나 한 것이 분명하지만, 측정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크래플이 이해하는 ‘공안’은 “선불교 전통의 일부”로서 “그 해답들이 학생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수준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거의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의미한다. 크래플은 ‘공안’의 한 사례로 ‘한 손으로 손뼉을 칠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가?’를 예로 제시한다. 어떻든 젊을 때 크래플은 이런 비교적(秘敎的)인 질문들에 끌리고 열역학 제2법칙을 자신의 ‘공안’으로 삼는다. [사실 여기서는 ‘공안’이라기보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우리가 크래플에게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포함하는 더 세밀한 이해를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공안에 대해 다소의 실망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집의 커피 마시는 탁자에 공안 하나를 그 답과 함께 적어놓은 그림책이 있었는데 공안은 대략 ‘당신은 창문이나 문이 없는 피할 수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있다. 뚫린 곳이 없으며 따라서 출구가 없다. 당신은 어떻게 나가겠는가?’이다. 책에 나온 답은 ‘자, 나왔다!’(There, I’m out!)이다. 이 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래플에게 공안은 그 신비한 동양적 매력을 다소 잃게 된다. [그러나 곧 보게 되지만, 나중에 크래플은 그렇지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답이 다시 공안이 된 셈이다. 사실 답이 뻔한 공안이라면 진정한 공안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공안의 핵심이 뭐냐에 대해서―선불교의 관점이 아니라 정리자의 관점에서―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이 미리 정해진 ‘정답’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여름 씨즌에 크래플은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최종 목표인 위커섐 벽(Wickersham Wall)―디날리 산의 북쪽 사면―등반도 달성한다. 이럭저럭 세 번째 여름 씨즌이 끝나고 나서 크래플은 그냥 공원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빙하가 흐르는 계곡 셋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넓은 공터에 앉아서 땋은 머리 모양의 물줄기들(braided streams)과 북향의 빙하벽을 올려다보던 크래플은 의식이 물질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이 뉴런들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에 토대를 둔다면?” 사람들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코드로 된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의식의 발전 가능성을 탐구할 때에는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사실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이 자연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 법칙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 세상은 꺼져있음과 켜져 있음이라는 두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상태들로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의식의 방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출현했는지도 모르며, 그 이후에 그 의식의 기본적 패턴들을 자기의식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만큼 소형화하여 담는 두뇌들을 진화시켜오고 그런 다음에 우리의 복잡한 뉴런 연결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의식이 오직 뉴런들과 함께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크래플에게는 자신이 앉아있는 세 빙하 계곡 사이의 이 공간도 의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이는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사유로서 발현된 것이다. 피상적이지도 않고 풍요롭고 상세하지만 영혼(spirit)을 결여한 [우리 식으로라면 ‘신명’이 없는] 사유이다. 세상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처럼 너무나도 작은 것으로 느껴진다.

9월에 집으로 돌아온 크래플은 책 한 권―재노프(Arthur Janov)의 The Primal Scream―을 읽고 ((재노프는 정신요법 의사로서 어린 시절의 어떤 원초적인 경험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그 경험들과의 감정적 연결을 끊으며 우리 자신을 천천히 우리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본다. 그의 치료의 목표는 환자들이 그 원초적 경험을 이번에는 어른의 관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겪어서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여태까지 닫혔던 길들을 다시 열도록 돕는 것이다. )) 거기서 실존주의적이랄 수 있는 지혜를 접한다. 비록 삶이 내적 의미가 없을지라도 열심히 살면서 어떤 존엄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크래플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크래플은 점점 더 나머지 삶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역할을 하기 위해 써야 할 가면처럼 느껴진다. 크래플은 가면을 쓴 자신은 행동을 하고 진짜 자기는 왼쪽 어깨 위에 앉아서 그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상상한다.

크래플은 삶이 어차피 무의미한다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공원에서 계절 관리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지원서도 보내고, 집에서 식구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가면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와 오래된 외딴 농가를 집주인 대신 봐주는 일(to house-sit an old isolated farmhouse)을 하며 지낸다. 근처 겨울산의 아름다움도 냉소적인 상태에 빠진 그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던 중 휘트먼 컬리지(Whitman College)가 1월 계절학기로 제공하는 강의들 중에 시애틀에서 온 무희단이 가르치는 ‘Contact improvisation(즉흥접촉)’이라는 댄스워크숍을 수강하게 된다. (강의들 중 다수가 마을 사람들도 수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강의에서 가르치는 춤은 접촉 지점이 늘 변한다는 점에서, 늘 변하는 눈과 땅의 상호작용이 곧 경로인 크래플의 표행과 좀 유사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춤은 근육을 풀어주고 습관적인 자세를 교정하여 몸이 더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강사들은 그룹으로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럴 경우 집단의 에너지가 서로긴밀하게 연관된 느낌을 남기며 끝났다.

둘째와 셋째 워크숍 사이의 저녁에 강사들이 대중 앞에서 춤공연을 했다. 한 여강사가 바닥을 굴러 가로지르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구르지 않았다. 그녀는 “‘굴러지는’ 듯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禪)적 자질(n ineffable Zen quality of ‘being rolled’)”을 보였다. 갑자기 ‘가능해’는 말이 크래플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자신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공안에 대한 답이 재노프의 설명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후에 강사들과 긴 대화를 가지면서 크래플은 세상이 가능성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왼쪽 어깨 위에 않았던 냉소적인 자아는 사라졌다. 의기소침함도 사라졌다. 갑자기 예전의 공안의 답이 생각나고 ‘자, 나왔다!’(There, I’m out!)라는 그 답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그는 왼쪽 어깨 위의 냉소적 자아가 지키는 논리의 독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제 그는 나왔다. 일단 나오니 반박할 수 없던 것 같던 그 논리의 힘이 무너져버렸다.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두는 논리를 외부에서 보는 것뿐이었다. 크래플이 갇혀 있었던 그 방, 그의 마음 안의 그 조그만 방은 그의 여생 전부와 우주 전체를 가둬 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빠져나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 가두는 힘은 무너졌다. 그것은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벽이란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크래플은 그날 노래 가사가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놀랍게도 가사가 음보와 운이 딱 맞으며 명쾌하게 흘러나왔다. 인도에 눈이 쌓여있었고 크래플은 균형잡힌 ‘발끝으로 돌기’를 했다. 미끄러질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1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