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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새로운 비주권적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란에서 대의정치의 위기


  • 저자  :  Rahman Bouzari
  • 원문 : An Iranian crisis of representation(2019. 11. 22)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 분류 : 번역
  • 정리자 : 에스페라
  • 설명 : [정백수]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주류 언론을 통해서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이 언론들은 거기에 봉사하는 개인들의 자질과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적인 눈멂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삶은 민중에게 있으며 국가는 이 삶을 돕거나 해치거나이다. 그래서 민중의 삶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국가의 움직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글에서 우리는 이란 민중의 삶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란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을, 국가들 사이의 이 ‘전쟁놀이’를 이란 민중의 삶에 중심을 두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라만 부자리(Rahman Bouzari)는 이란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 신문 가운데 하나인 <샤그 데일리>(Shargh Daily)의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다른 글로 “How the Mass Media Misread the Iranian Protests”(2018. 1. 24)가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일어난 봉기들은 이란의 정치 지형을 영구히 바꿔놓았다. 그때 이후로 이란은 아주 훌륭한 ‘유기적 위기’로 진입해오고 있다. 한 세기 전에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처음 소개하고 설명한 이 위기는 지배 계급들이 더 이상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광범위한 경제·정치·사회 그리고 이념의 위기이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그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정치 공백기에는 온갖 종류의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라고 썼다.

이란에서 나타나는 명백히 병적인 증상들에는 실업, 스태그플레이션, 통화문제, 부패, 그리고 환경악화가 있다. 그러나 인구의 많은 부분, 이주와 실업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젊은이들, 사회적 포부를 잃은 학생들, 방치된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체 직전에 있는 사회 구조를 가로질러 퍼지고 있는 다른 잘 안 보이는 증상들도 있다.

전국의 수십 개의 작은 도시와 큰 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일련의 시위들은 기본적으로 2017년부터 2018년까지의 봉기들에서 내세워졌던 것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의 연속일 뿐이다. 최소 106명의 사람들이 21개 도시에서 살해되었고 시위가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천 명이 다치거나 체포되었다. 살해된 시위자들이 그보다 훨씬 많아서 200명 이상에 이르리라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이 현장에 나돌고 있다. 이란 정부는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으며, 그 결과 이란에 대해서 국제 사회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이를 지켜보는 서양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이란의 시위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항들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기름값 때문만이 아니다.

첫째, 이란 문제에 대한 영어권에서의 보도에 널리 퍼진 오해는 정부가 기름값을 리터당 50% 올렸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배급된 휘발유의 가격을 50% 인상했지만, 이는 차량당 매월 60리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60리터를 넘으면 가격이 200% 올랐다. 이는 40년간 부패한 지배 계급을 이미 참을 만큼 참아온 사람들의 일상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둘째, 많은 방송 해설자들이 이란 휘발유 가격과 국제 휘발유 가격을 비교하면서 ‘가격 인상’ 대신에 ‘보조금 철회’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란의 휘발유 가격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성급하게 결론지었다. 여기서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란의 최저임금(한 달에 125달러)이 미국 달러로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수반되는 물가 상승과 다른 상품들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리알화로 (값싼 노동력, 값싼 기름 등을 사용해서) 휘발유를 생산해서 미국 달러로 파는 것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가격 체계에서는 항상 교환 비율이 문제다.

셋째, 휘발유 가격 인상은 정부의 예산 적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10명의 사람들이 이란 은행으로부터 빌린 총 92억 달러에 상응하는 엄청난 미상환 대출금이 투자된 집단시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가 하면 이란의 고위 공직자들이나 그들의 친척들이 횡령과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는 뉴스를 매일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휘발유 가격 인상 결정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 정부는 적자폭을 줄이기 위해 소수 세력의 채무변제를 요청하기보다, 공공 지출 요구에 맞추기 위해 겨우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박살내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 가격 인상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마지막 방아쇠였으며 노동자들과 중산층 하부가 궁핍화에 저항하게 되는 계기의 역할을 해 왔을 뿐이다. 시위가 매우 빠르게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은 2017부터 2018년까지 일어났던 진압된 봉기들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란의 유기적 위기는 기존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연료 가격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인종적·민족적 차별을 여성·무신론자들·소외계층들에 대한 성적·종교적·계급적 차별과 40년 동안 융합해 온 아파르트헤이트(분리주의) 정권이다.

개혁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된, 지난 40년 동안 이란을 통치해 온 정치 세력은 전체 구조를 둘러싼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는 이란의 현재 위기를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이란과 그 밖의 나라에서 많이 안다고 떠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새로운/낡은 수사(修辭)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기적 위기는 40년 동안의 이란의 정치경제에 그 구조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제재는 자라나고 있던 위기에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삐걱거리는 부적절한 연합

위기의 본질은 1979년 혁명 직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 엘리트 집단과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가까스로 나라를 운영하게 된 소수 금권세력 사이의 부적절한 연합에 기인한다. 1979년 혁명 직후, 종교 세력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대다수의 “외부자” 집단에 맞서는 소규모 집단인 “내부자(khodi)”를 만들어 냈다. ‘시아파-페르시아인-남성’ 소수자들로 구성된 이 내부자들은 약 2,300명의 정치적 인물들로서 약 40년 동안 모든 정치적 반체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란 정치를 주도해오다 1988년 정치범 학살에서 그 지배의 정점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이란 경제도 소수 금권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1980-88년의 이라크와의 전쟁 이후 이란의 재건이 일단 실행에 옮겨지자, 정치 엘리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장관이나 국회의원부터 성직, 법조, 군사 영역의 지도자들까지 대부분 지배 계층에 속하는 자리에 있는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이 등장했다. 서로 유착된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국가 자원 전체를 수십 년 동안 약탈했다. 사유화(민영화), 도시화, 개발계획, 탈산업화, 삼림파괴, 그리고 뱅킹시스템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과 긴밀히 내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은 친척들에게 재정 자원에의 접근권을 제공해주기 위해 법을 제정했다.

만약 혁명 이후의 정치경제의 구축 자체에 위기가 내장되어 있다면, 근본적인 해체가 필요할 것이다. 정말로 지금과 같은 낡은 사회·정치적 상황에서는 정권이 합의를 성취할 수도 없고 심지어 조작해낼 수도 없다. 2017-18년의 봉기들은 이념의 헤게모니 영역에 어떤 진공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이 진공상태는 이란 정치의 그 어떤 기존 세력에 의해서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위기

이런 상황의 주된 이유는 대의정치의 위기이다. 이란 혁명 이후 정치는 민중의 움직임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었다. 사실 “외부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개별화되고 주변화된 문화 활동을 제외하고는 대의될 여지가 거의 없다. 비록 나라가 온통 혼란 상태에 있고, 노동자들은 민영화, 규제 완화 그리고 금융화에 질려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제도권 정치영역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다.

2017-18년의 봉기 이후로, (가장 중요한 셋만 꼽자면) 화물차 운전기사들, 교사들, 노동자들에 의해 수백 차례의 시위가 발생했다. 2018년 5월 말에는, 이란의 지방 수십 곳에서 수천 명의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여 파업을 벌였고 미국의 가장 큰 노조 가운데 하나[the Teamsters]가 이 파업을 지지하기도 했다.

2018년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교육민영화와 저임금에 항의하는 교사들의 첫 번째 전국적인 연좌 농성이 열렸다. 11월 13일에서 14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두 번째 연좌 농성이 이어졌고, 그 결과 많은 교사권리 운동가들의 체포와 수사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란의 남서쪽에 위치한 후제스탄(Khuzestan)주에 있는 하프트 타페 사탕수수 공장(Haft Tappeh Sugarcane Company) 노동자들의 연속적인 파업이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노동자 자치평의회를 창출하고 설립하겠다고 결의한 마지막 파업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후 곧바로, 노동자 대표인 에스마일 바크쉬(Esmail Bakhshi)는 노동운동가들 및 노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바크쉬에게 내려진 14년형과 74회의 채찍형벌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는 총 1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될 것을 선고받았다. 동시에, 이러한 항거를 보도한 기자들은 강압적으로 감금당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경우에, <샤그 데일리>(Shargh Daily) 신문의 경제부 기자인 마르지 아미리(Marzieh Amiri)가 2019년 5월 1일 테헤란에 있는 이란 의회 건물 앞에서 벌어진 노동의 날 시위를 보도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녀는 결국 10년 반 동안의 투옥과 148회의 채찍형벌을 선고받았다.

휘발유 가격 인상에 대한 대응으로 최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들은 이란에서의 ‘장기간의 혁명 과정’을 암시하는 또 한 번의 조짐으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강제적 은폐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 횡령, 사유화(민영화), 규제완화, 그리고 하층민의 빈곤화에 대항하는 다면적인 투쟁인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정치단체, 시민사회, 자유 언론, 정당, (노동)조합, 그리고 지도자의 부재 속에서 일어났고 이제는 심지어 놀랍게도 인터넷 연결의 부재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들은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이 자신들의 연합조직 또는 자율적인 모임을 만들기 위해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 착수한 자발적인 기획들인 것이다.

 

잘못된 대의(代議)와 선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이란인들의 투쟁이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즉 국가에 의한 진압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국가 공권력의 작용범위를 좁히는 위험한 활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병적인 증상들이 또한 대의의 수준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를 늘 정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문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란의 현존하는 엘리트 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에 속하거나 그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논설, 기사 등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봐왔다. 이것들이 이란 정치와 서양 언론 모두에서 가시화되는 정도는 높다. 저널리즘의 핵심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약 40년 동안 말하지 못했거나 억눌려 왔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란에서 이러한 목소리들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이란 전역에 걸쳐 약 100개 도시에서 거리로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일반 대중들, 1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 최근 며칠 동안 체포되거나 다친 사람들, 시위 3일 동안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의 후견에서 벗어나 있기에 합법적으로 그들을 대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계속 진행되는 교착된 차단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개혁주의자들 또는 중도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어떤 구조변경도 거부하는, 스스로 결정하는 대안 세력의 형성이다. 이 형성과정은 자발성에서 조직화로 이행하는, 이미 탄생한 과정이다. 만약 위기가 광범하고 유기적인 것이라면, 해결책도 이념적·민족적·젠더적 다양성이 있는 이란 사회의 건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란 여성의 해방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널리 퍼져있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답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 ‘이슬람 공화국’(이란)을 넘어서 부와 힘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라건대 지역 민중의 결속, 즉 레바논·이라크·시리아·이란 민중의 결속을 낳아, 그들을 평생 괴롭혀온 부패한 지도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예시적 정치는 좌파에게 나아갈 길을 제공할 수 있는가?

저자: Sofa Saio Gradin

원문: Could pre‐figurative politics provide a way forward for the left? (2020년 1월 19일)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분류 : 번역

 옮긴이 : 민서

 설명 : 그래딘(Saio Sofa Gradin)은 레이크스태드(Paul Raekstad)와 함께 『예시적 정치: 미래의 오늘을 구축하기』(Prefigurative Politics: Building Tomorrow Today)의 공동저자이다. 지금 페이퍼백으로 나와있다.


영화 <캣츠>(Cats),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시즌 8 그리고 2019년에 일어났던 많은 다른 일들처럼 좌파 측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 총선이 형편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훨씬 더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당이 의회 의석 650석 중에 365석을 얻었다. 이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토리당 의원들이 간통으로 집행유예를 받거나 지도부와의 불화로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의석수가 과반수를 훌쩍 넘겼기에 토리당은 제1당으로 남을 것이다.

2012년 이후로 영국에서만 1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미리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초래했고, 장애인들과 이주자들에게 아주 적대적이어서 그들 가운데 일부를 자살로 내 몰았으며, 그리고 자신들이 내건 위험할 정도로 한정된 환경 공약들을 이행하는 데도 실패한 정책들을 유지하고 있는 정당에게 이것은 완전한 승리였다. 한편, 노동당에게는 영국 국민들 대다수가 지지한 경제 정책들로 빼곡한 성명서가 있고, 엘리트주의적인 전통과 관계를 끊은 지도자가 있으며 노동당의 정직함이 돋보이는 선거 광고들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엘리트 권력을 위협할 때에 맞닥뜨릴 장애물들언론 편향에서부터 참정권 박탈 및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이르기까지―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 참담한 선거였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이것으로부터 배우고 정부 밖에서 조직화를 계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좌파에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당신에게 제공하도록 할 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증가한 것이다. 이 생각에서 가장 희망적인 조류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옮긴이]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97, http://commonstrans.net/?p=740,

http://commonstrans.net/?p=1061 를 참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미래에 보고자 원하는 사회를 ‘지금 여기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정치이다.

노동당이 승리를 거머쥐었더라도 영국이 더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보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존 맥도널(John McDonnell)도 지적했듯이 가장 사회주의적인 정부들도 선거에서의 승리까지만 갈 수 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현장에서 조직화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노동자들, 거주자들 및 공동체 일원들—이다. 사회적 위계와 사회적 억압들은 정부정책만으로 초래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위계와 억압들은 법과 같은 형식적인 제도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행동들, 전제들 및 관계들 모두 다를 통해서 유지된다.

#미투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성희롱과 성폭행은 수십 년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허용되었고 심지어 몇몇 영향력 있는 남성성의 형태들에서는 권장되기조차 했다. 이것이 이제 사회운동들 덕분에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공식적인 정책입안을 거쳐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계급위계질서를 끝내고자 했지만 결국 극심한 분열•부패•편협성으로 끝나버린 역사 속의 많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시적 정치는 이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략들에 오늘날 우리가 붙이는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으로 우리의 공식적인 규칙과 정책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 규범 및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의롭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수학을 하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더 비슷한 활동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정치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시적 정치는 우리가 순수한 사고나 이론적인 규칙설정만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단지 추진력과 관련된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회이론에 빠삭하기 때문에 집단적인 의사결정에서 저절로 사려 깊고 마음이 넉넉한 참가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가부장제에 대한 모든 이론적인 분석을 읽었다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이 태어난 그날 이후로 배우고 연루되었던 모든 가부장적인 행위들•규범들•가설들에서 갑자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시주의(prefigurativism) 이념은 우리가 미래의 주류로서 보고자 하는 행위들 및 관계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새롭고 더 나은 행위들과 조직 구조들을 실험하고 배움으로써 우리를 재훈련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로 처음 사용된 1970년대 이래로 예시적 정치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이 슬로건은 정치를 단지 정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직면하고 있는 억압의 형태들—예를 들어 성폭력, 성희롱, 무보수 가사노동—을 은폐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적인 태도에 반대했다. 우리 개인의 삶과 일상의 행위들이야말로 실제로 정치투쟁의 현장들이다.

예시적 정치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권력과 의사결정의 중요한 많은 측면들이 정당이나 공동체 집단의 공식적인 정책들과 구조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 마시는 시간 동안에 생기는 일, 잡담을 할 때 생기는 일, 혹은 모임이 끝나고 생긴 설거지거리에 일어나는 일은 결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문서화된 어젠다나 규칙만큼이나 정치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평등주의적인 정당이나 집단이란 구성원들이 균등한 임금에 관한 정책을 작성하기 위해 만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귀가한 이후에 여성들에게 설거지와 청소를 하게 하면서 경쟁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의사결정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정당이나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가부장적이거나 기타 위계적인 행위 유형들에 관하여 함께 공부하고 그 유형들을 폐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나 집단이다.

내가 일원으로 활동해온 예시적 조직체들에서 이런 일은 일부는 훈련하기(가령 젠더 의식에 대해서는 역할놀이 연습이나 토론그룹활동)를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청소 당번 같은 조직적인 수단들, 프로그레시브 스택(progressive stacks) 같은 회의 진행 방법들, 및 다양한 과제들에 대해 역할과 책임을 교대로 바꾸어 맡기(여기에는 신입자들과 수다나누기 및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도와주기와 같은 비공식적인 역할들이 포함될 수 있다)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일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논의라고 불평하는 회의주의자들이 항상 있다. 몇몇 논평가들은 예시주의가 비공식적인 것에 주목할 경우에 활동가들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들을 위해 ‘나서서’ 싸우는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하기 보다는, 모임에서의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몰아붙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월가를 점거하라’처럼 예시적 조직체들이 (적어도 몇몇 비판가들에 따르면) 자기 속에 휘말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 있으며, 이 경우에 활동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위해서 조직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내부절차들을 토론하고 실행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일단 예시적 정치를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면 이것이 이런 종류의 정치를 실천하는 대다수 조직체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시주의로 유명한 조직체들—사파티스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스페인전국노동자연합(The Spanish National Confederation of Labour, CNT), 시리아의 침범 이전의 로자바(Rojava) 등등—대부분은 내부적 관심과 외부로 향하는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완벽할 정도로 잘 잡았다.

이 조직체들은 주변화된 집단들을 다양하게 향상시키기—예를 들어, 적당한 지대와 토지, 임금인상, 그리고 주변화된 공동체를 겨냥하는 군사공격에 저항하기—위해 싸웠고 동시에 그들의 비공식적인 불평등을 다루었다. 집단들이 주변화된 사람들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은 예시적 정치에의 헌신보다는 기본적인 목표들 및 인구 구성과 더 관계가 있다. 사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면 우리가 사회적 부당함들과 싸울 때 정부로부터 (바라건대)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코빈이 속한 노동당에 확 끌렸던 것은 노동당의 정책들 대부분이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 주식보유제도(worker shareholding schemes) 및 지역의회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단을 통해 노동자들, 지역주민들, 그리고 사회운동들에 권력 및 의사결정을 재분배하는 것 또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이 일단 정권을 잡았을 때 이 공약들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또는 고수했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선거를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은 닫히고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은 결코 열린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보수주의 토리당의 앞으로의 5년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그러는 동안에 취약한 삶의 조건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서 절망(체념)이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최근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처음으로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단체를 조직한 상황이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난 몇 년간의 선거사회주의의 고조로 활력을 얻었으며 활성화되었고 고무되었다. 그런 끔찍한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변화를 위한 전반적인 움직임에서 정부는 단지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코빈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 그러나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변화가 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진보적인 노동당 후보자들에게 계속 열심히 투표를 하자.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공동체 조직들, 노동조합들, 지역 의회 및 협동조합들에 있다. 그곳에서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