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으로서의 ‘말 잡기’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의 뒤에 딸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모든 사회·정치적 운동의 중심 과제는 새로운 주체성들이 발언권을 잡는 것, 혹은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말을 잡는 것(prendre le parole, 발언하다)이다. 예를 들어 2011년 이래 계속적으로 샘솟아오른 다양한 야영 및 점거 투쟁들은 난점과 결점을 안고도 효과적으로 ‘말 잡기’(taking the word)의 장소들을 구축했다. 그러나 말 잡기는 그저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말 잡기는 말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말에 새로운 사회적 행동논리와 결합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 잡기는 또한 당신의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고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타인들과 만나는 것, 그리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말 잡기는 번역의 과정이다.

 

첫째 의미에서의 말 잡기는 우리의 정치적 어휘목록에 있는 핵심적 용어들이 마치 우리가 오늘날 살고 행동하는 방식에 맞추어 번역할 필요가 있는 외국어인 양 취급한다. 이는 때로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함하지만 더 많은 경우 그것은 기존의 용어들을 돌려잡아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는 일이 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공화주의적’이라는 말이 18세기에 유럽과 북미에서 변형된 것, 혹은 1871년 이후 ‘코뮌’이라는 말이 유럽 전역에서 ‘사회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 혹은 ‘소비에트’라는 말이 1905년과 1917년 이후에 혁명과 민주주의의 밀도 있는 이론을 위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 용어들의 정치적 번역은 추상적으로 혹은 진공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실천 속에서 실현되었다. 이런 식으로 발언권 쥐기, 말 잡기는 현실에서 출현한다. ‘현실 잡기‘(taking of reality)를 산출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러한 번역 작업이 정치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왜곡하는 데 전략적으로 복무한 적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1997년 노동당선언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어휘를 수정했다. ‘사회적’이란 말이 완전히 중립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사회주의’는 ‘사회 서비스’와 혼동되었으며, ‘자유’(freedom) 개념은 사회적 투쟁과의 연결이 없는 ‘자유권’(liberty)으로 제시되었고, ‘당’ 개념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공통체에의 준거를 다 잃고 그저 개인들의 단체가 되었으며, 계급투쟁 개념은 소수와 다수의 대립이 되었다.(([원주] Paolo Donadio, “La nuova lingua del New Labour,” doctoral thesis, Universita Federico II, Naples, 2001))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전통의 언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는 주류 어휘 목록의 일부 결정적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와 결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번 장에서 기업가정신을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회주의 어휘 목록의 개념들을 번역해야 하는데, 신노동당과는 반대로 움직여서 계급투쟁개혁복지 그리고 혁명에 오늘날의 현실에서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한때 전복적이었던 어떤 용어들은 분명 의미가 잘못 사용되었거나 흐려졌거나 텅 비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이전에 가졌던 활력을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의미심장하고 유용한 것은 전통적인 개념들을 우리의 새로운 현실로 옮겨놓고, 단어들을 사회적 실천을 구성하는 관계로 가져와서 열정과 운동을 활성화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쇠로 만드는 노력이다. 정치적 사유에서의 모든 발본적인 기획은 우리의 정치적 어휘를 재정의해야 한다.

 

말 잡기는 또한 둘째 의미에서의 번역을 의미한다. 항상 다수의 말을 하는 주체성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 누구도, 모두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반복해야 하는 당 노선을 말하기 위해서 발언(말 잡기)하는 것을 바라거나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완전히 죽은 언어, 목석의 언어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방식의 말 잡기는 이질적인 목소리들과 (나오키 사카이의 용어를 쓰자면) ‘이질언어적’(heterolingual) 공동체들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이 목소리들과 공동체들은 각자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번역하고 소통할 수 있다.(([원주] See Naoki Saka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Sandro Mezzadra, “Living in Transition: Toward a Heterolingual Theory of the Multitude,” http://eipcp.net/transversal/1107/mezzadra/en; and Sandro Mezzadra and BrettNeilson, Border as Method, Duke University Press, 2013.)) 이는 자멘호프보다는 조미아(Zomia)의 세계이다. 즉 자멘호프가 발명한 에스페란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제임스 C. 스콧이 근대에 대한 대안적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문화가 혼합된 지역이다.(([원주] James C. Scott,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Yale University Press, 2009.)) 여기서 필요한 번역 과정은―이는 언어적인 동시에 문화적·사회적·정치적이다―특이성들을 공통적인 것 안에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커머닝이다. 그런데 앞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획일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그 반대다! 공통적인 것은 이질성을 위한 플랫폼이며, 구성적 차이들 사이의 공유된 관계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이주자들을 보자. 국경들과 나라들, 사막들과 바다들을 가로지르고, 게토에서 불안정하게 살면서 생존을 위해 가장 굴욕적인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며, 경찰 및 이주반대 군중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이 이주자들은 번역 과정과 ‘커머닝’의 경험 사이의 핵심적 연관들을 입증한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다중이 옮겨갈 때나 정지했을 때나 서로 소통하는 새로운 수단, 같이 행동하는 새로운 양태, 서로 마주치고 모이는 새로운 장소들을 발명한다. 요컨대, 이들은 특이성들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특이성들이 번역의 과정을 통해 함께 다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주자들은 장차 다가오는 공통체이며, 가난하지만 언어가 풍요롭고, 피곤에 짓눌리지만 신체적·언어적 사회적 협동에 열려 있다. 오늘날 정당하게 말을 잡으려 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성들은 이주자들처럼 말하는 (행동하는·살아가는·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레비아탄』의 원래 속표지 그림은, 홉스 자신이 직접 맡긴 것인데, 왕의 신체가 영국의 모든 남성 신민들의 신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 국가, 주권자(왕) 사이의 통일성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제 이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인종들과 젠더들의 특이한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더 나아가, 움직이고 서로 마주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그러면서도 공유된 관계에서나 갈등하는 관계에서나 협동할 수 있는 그런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그런 다중의 이미지가 번역의 과정― 말 잡기―이 어떻게 주권의 구조를 전복하고 공통적인 것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원주] Adolfo Munoz’s video installation “Midas” presents such an animated visual representation that transforms the frontispiece of Hobbes, Leviathan (http://amunyoz.webs.upv.es/blog/mid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