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바우엔스와의 대담 – 문명 이후와 P2P



 

[이름표기에 대하여]

커먼즈 운동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Michel Bauwens는 벨기에 사람이다. 벨기에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가 공용어이다. 지금까지는 이름인 ‘Michel’ 때문에 성을 프랑스어 식으로 ‘보웬스’라고 표기해왔는데, 최근에 유튜브에 있는 한 대담을 들어보니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 발음이 ‘바우엔스’이거나 ‘바우웬스’였다. 네덜란드어 식 발음이다. ‘w’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어에서는 ‘w’가 대부분 발음이 되지만 (입 뒤쪽에서 형성되는 약한 ‘ㅂ’이다) 이렇게 ‘u’ 다음에 오는 경우에는 드물게도 묵음이 된다는 것(본인들은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묵음으로 들린다는 것)도 알았다.(http://www.heardutchhere.net/silentW.html) 이러한 확인에 따라 앞으로는 ‘미셸 바우엔스’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이 블로그의 이전의 다른 글들을 미처 다 손볼 수 없으니 (언제 다 손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독자들께서는 ‘보웬스’라고 되어 있어도 양해하고 ‘바우엔스’로 읽기 바란다.

 

라자니 칸스

P2P란 간단히 말해서 뭔가요?

미셀 바우엔스

피어2피어(Peer to Peer)란 모든 개인이 다른 모든 개인과 연결되는 것을 ‘특별한 허가 없이’ 허용하는 관계 동학입니다.((바우엔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들뢰즈·가따리가 ‘뿌리줄기’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에 대해서는 『천 개의 고원󰡕 1장 참조.)) 원한다면 ‘네트워킹의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줄곧 소집단들의 특징이었지만 최근에는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큰 규모에서도 가능하게 되어 (위계를 특징으로 하는 국가와 자본주의적 시장 동학의 능력을 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과 맞먹는) 전지구적인 ‘오픈소스’ 시민네트워크들과 생성적((‘생성적’(generative)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속성인 ‘추출적’(extractive)에 대응되는 속성이다.)) 경제조건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서버가 자율적인 새로운 컴퓨터 구조에서 도출된 이 P2P 개념이 지금 두 가지 경합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제가 사용하는 의미인데요, 커머닝의 능력, 즉 자원을 한데 모으고 상호화하고((‘상호화하다’(mutualize)는 자원을 공유하여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것을 가리킨다. ‘상호화’는 다소 어색한 번역어이지만 동사와 명사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정하였다. ‘상호화’는 사실상 ‘사적 소유’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의 능력으로서의 피어2피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나키-자본주의적이고 자유의지론적-사유재산적 비전으로서 사회를 개인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입니다.((이는 원래 독일 오르도자유주의(신자유주의적 선구적 형태)의 비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푸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참조.)) 전자의 커먼즈 견해와 후자의 극단적 시장론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칸스

이와 관련된 개인사를 설명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제가 거부한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집단적 투쟁을 떠나게 된, 전형적인 향수에 찬 좌파입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저는 모든 지구상의 생태적·사회적 지표들이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쪽으로 수렴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 자신의 활동에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문제의 일부인가 해결의 일부인가?’라고요.

큰 기업에서 일하면서 여러 경우에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저는 변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수평적으로 추동되는 집단지성의 능력을, 즉 위치와 무관하게 실시간으로 (혹은 비동기화된 시간으로) 협동하는 능력을 거대하게 증가시킨 1993년의 월드와이드웹 발명은 신의 출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5세기에 있었던 인쇄의 발명처럼 이것도 변화의 추동력이 되리라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논리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회변화를 위한 새 받침점, 즉 규모 있게 수평적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네트워킹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죠.

따라서 저는 보수가 좋은 회사의 중역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태국에서 휴식하는 2년 동안 역사적 상전이(phase transitions, 이행)를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보며 지냈습니다. 이 새로운 피어2피어 구조라는 받침점이 지구상의 긴급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세상을 창출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친연성과 공유된 목표에 기반을 두며 지역을 넘고 국가를 넘어 움직여 전지구적 변형에 복무하는, 신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유형의 ‘부족들’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가? 제가 태국으로 이사한 것, 그리고 제 아내의 대가족에 편입된 것이 저로 하여금 따스한 가족생활과 친연성에 기반을 둔, 지역을 가로지르는 공동체들에서의 활동가로서의 활동을 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칸스

어떤 영감을 받아 그렇게 정리한 것인지요?

바우엔스

여러 상이한 것들의 결합입니다. 제가 이사하기 전에, 90년대 중반 이래 사회적 삶의 상이한 도메인들에 피어2피어 논리가 보급되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례들을 발견하는 대로 특별히 마련한 위키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법론은 다소 단순합니다. 늘 경험적일 것, 늘 일관될 것, 사회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치에 닿는 가장 통합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역사적 이행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전의 사라져가는 문명모델들의 위기 시에 공존한 씨앗형태들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 씨앗형태들이 새로운 사회적 논리를 담지하는지를 (이 씨앗형태들이 이전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다음 저는 오늘날 씨앗형태들의 거버넌스 메커니즘들과 소유 메커니즘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커먼즈를 가진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그 공동체들을 둘러싼 기업연합들을 보기 시작했고 나중에 도시 커먼즈와 물리적 생산을 담당하는 커먼즈의 출현으로 관심을 확대했습니다. 이것이 이 새로 출현하는 미시적 네트워크들이 어떻게 전체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에 더 면밀하게 주목하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커먼즈와 공적 영역이 서로 연관되는 제도적 과정과 커먼즈와 시장이 서로 연관되는 동학 모두에 주목함을 의미했습니다. 핵심을 말하자면, 저는 국가와 시장이 커먼즈를 포획한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을까를, 즉 커먼즈와 커머너들이 어떻게 시장과 영토 거버넌스를 커먼즈를 확대하는 쪽으로 작동하도록 변형할 수 있을까를, 그리고 지구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커머너들의 생계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왔습니다. 더 최근에 저는 재분배(redistributive) 경제—이는 인간 및 자연의 가치를 우선 추출하고 나중에 재분배하는 것입니다—에서 선분배(pre-distributive) 경제로의 이동, 생태에 끼치는 피해의 제한에서 재생성적(regenerative, 다시 살리는) 실천으로의 이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대한 실용적 이론으로서, 저는 이 이론이 커머너들과 그들의 경험에 기반을 둔 이행을 가속화하는 데 유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P2P재단이 오늘날 사회변화의 강력한 주체인 자율적인 불안정 노동자들의 집단지성이 되었으면 하고 그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의 집단학습의 속도를 증가시킨다는 의미에서 촉매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커먼즈는 변화의 중심 범주입니다. 즉 시민들이 커먼즈에의 기여자들로서 사회적 가치를 직접 생산하게 되었으며, 피어2피어는 커먼즈가 규모나 능력에서 시장과 국가를 능가하게 만들 수 있는 핵심적인 사회적 관계입니다. 인류의 본래 상태가 긴밀한 유대로 묶인 부족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공유된 가치의 공동구축에 기반을 둔, 긴밀하고도 공감적인 새로운 부족으로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칸스

‘커먼즈’ 경제란 어떤 것인지요?

바우엔스

커먼즈 경제는 공유된 자원을 중심으로 핵심적인 가치창출이 일어나며 기타 교환도 욕구에 따라 일어나는 경제입니다. 커먼즈 경제는 통째로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전까지 진행된 이행의 논리에 맞추어 재편성한 것입니다. 오늘날 가치는 시장에서만 창출되고 그 다음에 재분배된다고 생각됩니다. 커먼즈 경제에서는 커먼즈 수준에서든 사회 수준에서든 모든 기여가 인정되며 기타 교환과 분배도 공동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공동체들에 복무하도록 재설계됩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상호화된 기반시설을 사용하여 기도를 최대화하는 사업들의 성공사례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와 동등한 것으로, 그러나 삶을 부정하는 복종과 금욕은 없는,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모든 자원조달 체계들을 상호화하여 인류가 지구에 남기는 열역학적 발자국을 근본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커먼즈 경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비물질적 공통재(커먼즈)와 지역적으로 재상호화된 물리적 기반시설들이 교차하는 열린 생산공동체들입니다. 이 생산공동체들은 뚜렷한 목적과 사명을 갖추고 있고—‘중간에서 취하기’보다는 ‘중간에 주는’((우드(J. Wood)가 “COMMENT: The Socially Responsible Designer”(1990)라는 글에서 ‘기업가’를 의미하는 단어인 ‘entrepreneur’가 (원래 프랑스어이므로 프랑스어로) ‘가운데로부터 취하는’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에 대응시켜 ‘가운데에 주는’이라는 의미의 ‘entredonneur’가 만들어졌고 이를 여기서 ‘덕행가’로 옮겼다. 바우엔스의 이 대담에서는 둘 다 형용사형으로 쓰이고 있다.))—비자본주의적인 덕행가(entredonneurial) 연합들과 상호작용하며, 협력의 기반시설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이고 비영리적인 기반시설 조직들의 지원을 받습니다. 이는 거시적 수준에서 생산적 시민집단, 윤리적 경제, 파트너 국가를 구성하는 데로 작용합니다.

 

칸스

이 비전에 장애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우엔스

상호화 자체는 문명이 과도한 상황에서는 매우 불가피하며 역사적으로 여러 번 일어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상호화 자체가 내부적·외부적 추출 세력에 의해서 포획되는가 아닌가, 민주적인 커먼즈가 주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지금까지 기록상으로는 (문명을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라고 정의했을 때) 문명 이전에 상호화의 긴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수렵 및 채취에 기반을 둔 평등 사회들에서는 수만 년을 갔고 문명사회들에서는 성공이 더 제한되었습니다. 중세의 민주적 코뮌들은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3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우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챈들러(Keith Chandler)가 그의 책 『문명을 넘어서』(Beyond Civilization)에서 시사한 대로 우리가 계급 사회를 완전히 넘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최선은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선호하는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 축을 상상해봅시다. 풍요 대 희소성, 그리고 평등 대 위계. 제1시나리오는 우리가 원하는 시나리오, 즉 성공적인 상호화에 기반을 둔 풍요 속의 평등이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제2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평등입니다. 쿠바가 이런 유형의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풍요 속의 위계라는 제3시나리오를 상상해봅시다. 이는 지금 인지자본주의의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과 함께 정보와 서비스에서의 새로운 봉건주의(돈을 가진 사람만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체제)로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4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위계로서 라투르(Latour)가 지난번 책에서 ‘엘리트 생존주의’로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라투르의 2017년 책 Où atterrir ?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직 영어로도 옮겨지지 않은 책인데, 라투르의 프랑스 사이트에 보면 영어로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라고 옮겨놓았다. 이 사이트에서 이 책을 영어로 소개한 한 대목(http://www.bruno-latour.fr/node/754)은 이렇다. “이 세 현상[① 폭발적인 불평등 ② 대대적인 규제완화 ③ 지구화의 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악몽으로 전환되는 것—옮긴이]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생태위협은 실질적이며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나머지 세상과 공통의 미래를 공유하는 척 하기를 그치는 것이라는, 소수 강력한 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확신이다. 그래서 이들은 해외로 달아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다.” 지금의 라투르는 ANT(actor-network theory)의 라투르에서 달라진 듯하다.)) 인구가 대대적으로 삭감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내몰려서 생계가 막연해지며 새 엘리트가 첨단 생존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엘리트층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멸절주의 기획은 매우 위험합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인가요?

바우엔스

제가 유토피아에 반대할 마음이 없고 가능한 것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사람들에게 고취하는 데 유토피아가 필요할 듯도 하지만, 제 작업은 분명 유토피아적이지 않습니다. 저의 방법은 실제 삶의 실천들과 사례들을 보는 것이며, 약한 신호들이 충분히 잡힐 때 그것이 실질적 경향임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이 씨앗형태들의 심층 논리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그 지점에서부터 한 사회가 거시적 수준에서 그와 동일한 논리를 보여줄 때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 비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현상들이 주변부에서 출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세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장기적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유토피아주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데 대해서 두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것은 종종 매우 리얼합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사회를 꿈꾸었던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실제로 공동체들을 일구었고 실험을 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 탓으로 돌리는 끔찍한 일들—가령 종교재판이나 스딸린주의— 은 권력이 자신의 공고화를 위해서 유토피아적 비전을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선전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들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적 현실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해온 30년 동안의 반(反)유토피아 이후에 유토피아적 사고가 적어도 조금은 부활하는 것이 실제로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칸스

사회주의 같은 고전적인 대안경제들과는 어떻게 비교되나요?

바우엔스

피어2피어와 커먼즈 접근법은 19세기의 시민사회의 전통에 매우 가까우며, 시민사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시장과 국가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교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주류 사회주의 전통은 스탈린주의적·전체주의적 형태에서든 사회민주주의적 형태에서든 국가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시민사회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민들(이는 주어진 시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이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즉 사회를 위한 가치를 생산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집단적 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리적 영토 수준에서든 ‘버추얼’ 수준에서든 공동선을 중심으로 삼는 기관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커먼즈 공동체들조차도 우선은 자신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생태계 전체에 대해 먼저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개인들 사이에서든 공동체들 사이에서든 상호계약의 표현일 뿐인 사회에 대해서는 (좌파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믿지 않습니다. 메타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특히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럴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 없이도 우리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설군대의 용병들에게 더 자유를 주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커먼즈의 기능적 거버넌스가 그 복잡성이 높아져서 국가를 노후하게 만들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서 여러 사회와 경제의 상호연계 능력이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일을 돕는 메커니즘들과 기반시설 조직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저는 ‘파트너 국가’라고 부릅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그 의사결정이 단지 사적인 이익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관심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칸스

당신의 비전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이 있나요?

바우엔스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성에 대한 일면적 비전을 장려하며 사회적·생태적 외부성을 무시합니다. 이는 위험한 수준의 불평등을 낳고, 따라서 사회적 불안을 낳으며,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항상적인 파괴를, 지금은 극적이고 삶을 위협하는 데 이른 파괴를 낳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해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입니다. 총체적 불안과 모두의 모두에 대한 투쟁을 낳기 때문입니다. 400년 동안의 실험은 이제 거의 끝났지만 자본주의는 좀비 체계처럼 존속하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쁠 수 있는 어떤 것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중의 투쟁들이 모든 종류의 대항적 경향들을 창출하였음을, 민중이 계속해서 비자본주의적 형태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복잡한 사회를 창출해놓았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접근법은 ‘교육, 건강, 주택, 이동성을 계속 진전시키자, 그러나 이것들을 상호화하여 그 기능이 지구의 존속과 양립될 수 있도록 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탈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합니다.((‘반자본주의적’이기보다는 ‘탈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저항, 즉 ‘맞서는’ 투쟁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모델들의 창출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칸스

어떻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당신의 이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바우엔스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전략은 기획들과 사람들을 가열차게 상호교직하고 이해와 상호조직화의 수준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주류가 단계적으로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들이 사회적·정치적 힘을 강화하고 강력한 끌개가 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커머너(commoner)를 새로운 주체로 봅니다. 커머너란 공통적인 사회적 목표들에 기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사회 제도들의 변형을 위해 싸워서 커먼즈에 복무하는 사람이죠.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본에 의존하는 노동자로 보기를 멈추고 자신의 생계를 구축하는 커머너로 보게 된다면 많은 수의 커머너들이 존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용하고 싸워야 할 곳에서는 맞서 싸우고요.

지금 국민국가는 더 이상 변화의 핵심적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지성의 초국적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즉 정신권(noosphere)에 부합하는 정신정치(noopolitik)를 해야지요.((‘정신권’과 ‘정신정치’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49 참조.)) 우리는 또한 초국적 덕행가 연합 즉 커먼즈를 중심으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생계조직들과 선분배적이며 생태적으로 재생성적인 코스모-지역적인 생산단위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발표를 위한 청사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직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의 접근법을 충분히 잘 설명하리라고 봅니다.

 

칸스

현재 당신의 비전을 뒷받침하는 운동으로 뭐가 있나요?

바우엔스

제 생각에는 여러 상이한 운동들과 기획들로 구성된 세 강력한 ‘흐름’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과 사물을 공유하려는 운동입니다. 즉 오픈소스 운동들과 진정한 ‘공유’ 운동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둘째는 환경과 지구를 돌보려 하고 이를 위해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공정함, 평등, 유대, 협동주의를 위한 운동들입니다.

모두 뭉치는 것이 과제입니다. 평등과 생태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회가 더 불평등할수록 지배자들이 경쟁자들과 경합하면서 지구의 한계를 더 강력하게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이 더 부드러운 하강을 보장할 것이고 앞으로 수십 년이면 닥칠 불가피한 재난 이후에 지구의 더 빠른 치유를 보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슈를 지식과 자원의 강력한 상호화 없이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해결책이 사유화되어 이윤에 종속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업은 가능한 통합적 내러티브를 제공하여 더 많은 상호연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이 내러티브가 산업사회의 ‘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란 자본 대 노동의 변증법적 관계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변증법의 항상적인 결말은 자본의 영원한 지배이다. 이미 레닌의 라이벌인 보그다노프가 노동의 관점에서 진정한 대립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대립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인간의 자연 정복을 말하기보다는 맑스가 『1844년 경제철학수고』에서 말한 ‘자연의 인간화’이자 ‘인간의 자연화’인 과정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몸’으로 즉 ‘몸 외부의 몸’으로 보는 사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큰 몸으로 보는 사고가 들어있다. 이런 사고가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의 탐욕에 가려진 결과 지구의 삶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야 할 일이 모두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작은 규모로 너무 느리게 그리고 노력이 심하게 파편화되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공통의 이야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의 DNA 자체를 바꾸려는 구조적 노력에 합류하면 할수록, 서로 연계를 더 잘할 수 있고 전지구적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규모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칸스

세계의 현재의 위기를, 그 원인 등을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시사한 세 가지 사회적 폐해의 합류입니다. 1) 현 체제는 자연자원과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풍성하게 존재하며 단기적인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현 체제는 본성상 풍요롭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인 인간 문화나 지식이 인공적으로 희소하게 만들어져야 하며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범죄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자본주의는 희소성을 할당하는 체제가 아니라 희소성을 조작해내는 체제죠. 3) 이 모든 것이 증가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생계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불안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의 문제들이 정말로 체제 차원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장 최근의 계급사회로서 그 폐해를 보인 자본주의만 거부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계급 사회 자체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 균형과 집단지성을 위한 대대적인 상호학습에 기반을 둔 더 상위의, 더 복잡하고 더 평등한 사회형태를 재창출해야 합니다.

 

칸스

관심이 있을 사람들을 위해 주 저서들을 말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지금까지 세 언어로 책을 냈습니다. 네덜란드어 책 De Wereld Redden과 프랑스어 책 Sauvez le Monde를 냈는데((두 책 모두 그 제목이 ‘세상을 구하라’라는 의미이다.)) 이 두 책 모두 ‘P2P 및 커먼즈와 함께 탈자본주의 사회로’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이 책들은 사회변화에 관한 역사적·철학적·경제적·정치적인, 심지어는 정신적인 이념들과 제안들을 설명하는, 읽기 쉬운 대화들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책은 학술적인 성격의 것이며 경제적 측면에 집중합니다. 커머너들 및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작동할 수 있게 변형된 시장형태와 커먼즈의 상호작용을 다룹니다. 이는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추출적인 지배적 모델들과는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 책은 열린 협동조합들과 플랫폼 협동조합들과 같은 대안적 행태들을 설명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세요.

내년 봄에는 웨스트민스터프레스에서 우리 생각을 더 자세히 제시하는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우리는 P2P랩과의 집단연구에 기반을 두어 소규모 책자들을 냈습니다. 우리 서재를 보세요. ‘가치 주권’, ‘열린 기여기반 회계,’ 커먼즈와 공적 영역의 협동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아시려면 이 서재에 가보시면 됩니다. P2P랩은 우리의 가설들을 실제 공동체들과 함께 하는 실제 삶에서의 행동탐구를 통해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동료평가되는 학술논문들도 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보세요.

 

칸스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있나요?

바우엔스

네. 주된 참조 사이트는 우리의 위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블로그로 연결됩니다. 커먼즈 이행에 관한 더 읽기 쉬운 글을 보시려면 우리가 특별히 개발한 사이트로 가시면 됩니다.

 

칸스

관심 있는 사람이 당신의 기획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나요?

바우엔스

우리를 돕기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이는 우리가 네트워크이거나 아니면 조직이거나 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조직된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능력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식 커먼즈의 공동구축을 통해 기여하는 데 동의하고 우리의 자원 베이스에 기꺼이 기여하고 싶으시면 먼저 연결 방법을 찾아야 하실 것이고 그 다음에 이 열정적인 일을 중심으로 생계를 창출하는 방법을 찾으셔야 할 것입니다.

 

칸스

지금까지 P2P의 성취는 무엇인가요?

바우엔스

우리는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직접 하기보다는 지식공유의 촉진자로서 뒤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취를 돕습니다. 우리는 잘 사용되는 점증하는 지식 베이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찾은 사람이 연인원 6천만 명에 달하고 하루에 적어도 2만 명이 이용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국가지식커먼즈 구축과 관련하여 에콰도르 정부에게 컨설팅을 해주었고 ‘커먼즈 이행 계획’과 관련하여 헨트 시에 컨설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바티칸, 중국 같은 몇몇 영향력 있는 곳들 및 여러 정치운동들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바르셀로나의 공동작업 공간들에 대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거론되었습니다. 우리는 협동조합들, 커먼즈들 등 많은 합류하는 사회운동들에서 작업했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았습니다. 멜버른에 있는 <커먼즈이행연합>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다양한 ‘커먼즈 의회들’ 같은 구체적인 지역 기획들이 우리의 생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합니다. 에콰도르에서의 작업이 그 사례인데요, 여기서는 정부가 우리가 추천하는 바를 문서화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더 추출적인 정책으로 나아갔습니다. 트로이카((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EU)으로 구성된 삼두체제.))에게 고개를 숙인 시리자도 실패 사례입니다.

지금 저는 협동조합주의적/상호주의적 운동인 SMart와의 연합에 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자율적인 노동자들(프리랜서들)을 위한 유대를 조직하는 데 집중합니다. 또한 토착민 운동들과의 연합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이 운동의 스터디그룹들이 우리 생각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연합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에서는 생산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영향력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조그만 점에 불과하지만, 사회주의 이후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사회변화운동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목소리입니다.

 

칸스

가장 가까운 미래에 세상이 가장 잘 될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추측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몇 개의 시나리오를 개괄했을 때 이 점을 논의했습니다. 바라건대 최선의 것은 우리의 문명이 큰 재난들에 대비하는 짧은 막간(幕間) 시기에 P2P 및 커먼즈와 함께하는 사회세력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복원력 있는 경제와 대안적인 사회형태들에 활발하게 관심을 가질 사람들을 끌어모을 씨앗형태들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태는 많이 악화된 다음에야 좋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먼즈의 ‘잠재적 성충세포들’((‘잠재적 성충세포’(imaginal cell)는 유충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나중에 새로운 형태와 구조를 창출하게 되는 세포를 가리킨다.))이 이행기에 피해의 양을 감소시킬 두드러진 요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에서 인종, 계급, 젠더 그리고 문화는 어떻게 배치되나요?

바우엔스

오늘날 서로 다른 종류의 커먼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인 커먼즈는 수는 많지만 자본주의의 맹공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편 선진국의 디지털 커먼즈와 도시 커먼즈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찾는 것이 지구상의 후진지역에서의 노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서구 나라들에서는 피케티(Thomas Piketty)가 ‘브라만 좌파’(Brahmin left, 지식좌파)라고 부른 층((‘브라만 좌파’는 인도 브라만 계층 가운데 맑스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모양인데, 지금 바우엔스가 쓰는 말은 이와는 무관하다. 여기서 ‘브라만 좌파’는 피케티의 용어로서 이에 대립되는 말은 ‘상인 우파'(Merchanr rifht’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http://piketty.pse.ens.fr/files/Piketty2018PoliticalConflict.pdf 참조.)) —높은 교육자본을 가지고 있지만 금융자본이 별로 없는 시민들로서 많은 도시 커먼즈들을 개척하고 있습니다—과 민족적·종교적 공동체들에 국한된 훨씬 더 수가 많은 이주민 커먼즈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사이에도 강력한 연결이 창출되어야 합니다.

문화가 결정적입니다. 현재의 커먼즈들이 정의상 열려있고 자치적이지만, 친연성에 기반을 둔 결집(커먼즈판 필터 버블((‘필터버블’(filter bubble)은 구글의 경우처럼 개인에게 맞춘 검색의 결과로 지적으로 협소해지고 고립된 상태를 가리킨다. 일반화하자면, 서로 다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인 셈입니다)이 항상 공동체를 통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먼즈의 강점은 공유되도록 의도된 목표들을 중심으로 공동의 노력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현저하게 극복하게 해줍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커먼즈가 지역의 가치흐름을 대대적으로 재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의미있는 활동을 창출하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트럼프의 광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대답은 보호주의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 수준에서는 초민족(국가)적이고 초지역적인 협동에, 그리고 바이오지역적(bioregional) 수준에서는 재지역화된 생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원자화 이후에 협동을 재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화적 진화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우리는 강한 정신적·생태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인간 이상의 커먼즈’(웹진 『애로우』의 잭 월시Zack Walsh의 생각입니다((https://arrow-journal.org/contemplating-the-more-than-human-commons/ 참조.)))를 위한 협동의 문화를 다듬어내서 계몽주의가 도입한 주객 분리를 (인간의 평등을 위한 열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능장애를 일으킨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훨씬 더 나쁜 계급착취로 대체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커먼즈 이행을 지역 정서로 되돌아가는 과정의 일환인, 전지구적 친연성 부족들의 창출과정으로 봅니다. 즉 고도의 솜씨를 첨단기술에 의해 가능해지는 ‘공생공락적인’ 집단지성과 결합하는 ‘고풍 혁명’(archaic revolution)— 맥케너(Terence McKenna)가 말한 바의 것((이런 생각이 담긴 맥케너의 책 제목은 The Archaic Revival: Speculations on Psychedelic Mushrooms, the Amazon, Virtual Reality, UFOs, Evolution, Shamanism, the Rebirth of the Goddess, and the End of History이다. 흥미롭게도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농촌공동체와 공존하는 사회체제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오래된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며 혁명적 성향이 있다는 의심을 결코 받을 수 없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한층 더 상위의 차원]는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된’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입니다. P2P는 상실된 황금시대나 이전에 존재했던 계급착취의 형태들을 지향하는 반동적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문명 이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주기에 부합하는, 브라만[지식]과 노동자의 종합입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유럽중심적인가요?

바우엔스

우리 기획은 세계중심적이며, 여러 문화적·영토적·초지역적 맥락에서 채택되는 가능한 공통체들의 다수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에서 발전되었으며 다른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발전된 유사한 전통과 연결될 수 있는 해방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저는 때로 ‘신전통적’(neotraditional)이라고 부릅니다.

챈들러가 『문명을 넘어서』에서 시사한 대로, 이는 모두 계급 문명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심대한 경향의 표시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보존하려면 이 문명의 주기가 끝나야 합니다. 인종화·젠더착취를 극복하고자 하고 인간을 균등한 잠재성을 가지고 기여하는 동료들로 보고자 하는 현재의 경향들은 환경 및 모든 생명체들과 균형을 맞추는 따스한 사랑의 공동체를, 모두가 공동선에의 기여를 인정받는 그런 공동체를 갖고자 하는 인간의 심층적 열망에 상응합니다. 이는 현재의 불평등한 문화에서도 인간의 깊은 곳에 살아있는 열망입니다. 저는 제 생각에 대한 가장 열렬한 반응을 에콰도르의 토착민 공동체들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국가의 사멸 3.0



 

국가의 사멸 3.0

 

며칠 전에 우리는 프랭크 파스콸레(Frank Paquale)의 주목할 만한 발표를 소개했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우버 혹은 에어비앤비와 같은 새로 등장한 ‘넷지배’(netarchical) 기업들이 이전에 ‘국가’와 ‘정부’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공적 권력—그 책임성이 때로는 매우 미미했을지라도—을 그가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함을 보여주었다. 이 효과는 토큰화된 경제(the tokenized economy)의 출현 및 성장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 경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토큰 경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발자들과 창조계급이 시장 가치를 주식보유자들로부터 재포획하고 분산된 플랫폼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新)길드 체제를 창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토큰들은 실로 플랫폼들에서 디자인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시장가치를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큰 기반 기획들은 시장 경제의 추출적 기능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며 그 분산된 다자인에도 불구하고 멱함수 법칙(power law)의 동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등하기만 한 구조들은 희소한 자원을 위한 경쟁으로서 디자인된다면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과두제를 향해 진화한다(멱함수 법칙에 의한 집중, 즉 반복될 때마다 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앙집중화된 넷지배 플랫폼들과 비트코인 및 기타 많은 (모두는 아니다!) 토큰 기반 블록체인 응용태들과 같은 이른바 ‘분산된’ 아나키즘적-자본주의적 구조들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책임성 없고 비민주적인 사적 ‘화폐’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진보적 도시들과 쇠퇴하는 국민국가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초국적 권력을 가진 ‘기업 주권체들’(corporate sovereigns)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새로 출현하는 국민 포퓰리즘[우익 포퓰리즘]의 권위적인 해결책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복지 지향적인 국민국가를 부활시키고자 할 뿐인 좌익 포퓰리즘의 시도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특히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맥락에서 그렇다.

 

어떤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안쪽에는 밝은 희망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국가의 ‘사멸’을 둘러싸고 좌파의 해방론적 전통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에 새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곧바로 철폐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 대신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철폐하는 것은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군사화된 지배계급의 거친 권력(준군사적 군대 등)으로 대체하자는 처방일 뿐이라고, 내 생각에는 옳게,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상한 것이, 노숙자들이 경찰의 저지가 없이 빈 집을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소유자 계급이 고용한 준군사적 군대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국가의 사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점진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사회민주주의 버전)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국가기능을 점차적으로 대체한다는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는 맑스가 그의 2단계론에서 표현한 바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교환논리와 국가의 역할에 의해 공히 특징지어지면, 둘째 단계만이 별도의 국가기능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역설은 이 더 근본적인 시나리오의 메아리가 기업 주권체들과 자유방임주의적 정신을 가진 토큰 경제의 전술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유화된 상호화’ 모델이 가진 우월한 효율(즉 공급과 수요를 효과적으로 서로 맞추는 사적인 플랫폼들), 사용자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과 인간의 행위를 은근히 자극하는 능력, 그리고 이 플랫폼들에서 ‘잉여 가치’를 직접 빨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이전에 공적 부문이 담당했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라이드셰어링이 대중교통과 경쟁한다든지 아니면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공유가 규제를 받는 호텔 등을 대체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세계 전체가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나 기타 권리들은 사유재산의 절대적 권리를 통해 부식되고 있다.

 

‘국가의 사멸’은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적 시나리오에만 속하지 않는다. 사실 넷지배 플랫폼들의 침탈적이고 규제 받지 않는 관행들은 국가의 디스토피아적 해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P2P재단의 우리들은 더 나은 미래, 해방적 힘들이 환경 및 평등 문제를 풀어가면서 관료화된 국가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하도록 이 과정을 해킹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로 도시 삶의 사회적·환경적 평형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주도하는 기획들에서 이미 기능적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거버넌스와 소유의 협력적 형태들은 잉여를 스스로의 발전에 할당할 수 있고 기여자들의 생계를 창출하는 데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협력적 생태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면) 넷지배 플랫폼들을 협력 능력에서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의 최근의 보고서 『어번 커먼즈 이행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에서 개괄한 바 있다.

 

우리의 지도그리기와 플랑드르의 헨트(Ghent) 시의 500개의 어번 커먼즈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했듯이, 거의 모든 자급체계들(이동성, 주택 등)이 현재 아직은 주변적이지만 점증하는 새로운 커먼즈 중심적 대안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지역들처럼 헨트와 플랑드르에서도 커먼즈 기반 기획들이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그러나 사유화된 플랫폼들과 달리 이 기획들은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며 종종은 단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단편화를 해결할 것인가? 다음은 이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다.

 

 

 

· 모든 자급체계에 대해서 그런 자급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저장소가—무니라이드(MuniRide)와 페어비앤비(FairBnB) 유형의 해결책을 위한 일종의 깃허브(github)가—있다고 상상하자.

· 이 해결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들, 협동조합들, 심지어는 노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P2P 혹은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을 전지구적 규모로 키우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 지역적으로, 가령 도시나 바이조이역의 수준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연합들은 다중이해관계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창출한다. 이 플랫폼들은 전지구적 소프트웨어 저장소들을 사용하지만 이 저장소들을 지역의 맥락과 필요에 맞추며 또한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써 공통의 코드 베이스(code base)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플랫폼의 모든 잉여는 원거리 소유자들의 배당금으로서가 아니라 기반시설의 공동개발과 모든 기여자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재투자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넷째 층은 교환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산이다. 실로 이 단계에서 어번 커먼즈들은 재화를 다양하게 분배하지만 재화 자체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서술한 전지구적 커먼즈가 마이크로팩토리들(microfactories, 초소형 공장들)을 통해 재분포된 지역에서의 생산과 부합하는,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생산체계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이크로팩토리들은 열린 협동조합들이기도 하다. 즉 자신들의 구성원들로부터 가치를 포획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혜택을 주는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전념하는 협동조합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사유화된 플랫폼과 추출적 토큰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자연에 남기는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토큰을 기여상의 정의를 위해 다시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협력적 상호화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반시설의 상호화가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며, 이는 지식의 완전한 공유를 보장하면서도 보상의 더 정당한 분배와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성공의 열쇠는 초지역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의 공간적 혹은 지리적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역(local), 도시, 바이오지역의(bioregional) 기획들은 그 사용자 기층에 가까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교환한다.

· 그러나 초-지역적, 초-국가적 지식 베이스들을 사용한다.

· 참여자들은 지역의 수준에서 생산하지만 초-국가적이고 평등한 지식-길드들과 전지구적 이고 초국적인 덕행적(entredonneurial)(([옮긴이] ‘entredonneurial’은 ‘중간으로부터 취하는’(‘taking from in between’)이라는 의미를 가진 ‘entrepreneur’에 대응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으로서 ‘중간에 주는’(‘giving to the in between’)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전까지 일단 ‘덕행적’이라고 옮긴다.))연합들을 조직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진보적 다수의 역할은 이 지역적, 초-국가적 기반시설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환경적으로 균형을 갖춘 지속적인 자급체계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자급체계들은 그—이 경우에는 민주적이기도 한—기능적커먼즈 거버넌스 덕택에 사유화되고 추출적인 초국적 권력구조들을 수행의 측면에서 능가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영토의 수준에서 메타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파트너국가로 변형되어야 한다. ‘파트너국가’는 현재의 국가장치를 하루아침에 마법적으로 변형할 것을 필요로 하는 이행이 아니다. 이는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연계를 통해 관리되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적 거버넌스 배치를 진보적 연합들이 승인하고 촉진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파트너국가는 또한 커먼즈 지향적 대안에 공감하고 그것을 지원할 공무원들과 정치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행정 구조의 모든 틈새 영역에 모든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다. 파트너 타운들, 도시들, 바이오지역들, 혹은 더 광범한 초국적 구조들을 생각해보라. 공적 영역과 커먼즈가 연계한 협력적 형태의 자급이 개시되고 성장하는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참여에 뿌리를 둔 더 민주적인 형태들에 의해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능들을 사멸시키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우리가 국민국가보다는 새로운 초-국가적 구조들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실로

 

1.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국가-국민이 하나로 통합된 구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발굴한 이중 운동의 논리가 적용된다.

2. 시장 기능이 국가와 시민의 규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때면 언제나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것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함입시키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낳았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초-국가화된 자본의 경우에 국민국가의 규제는 미미해졌으며 우익의 국민 포퓰리즘과 좌익의 사회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을 실질적으로 다시 잡으려면 초-국가적, 초-지역적 수준에서의 대항-헤게모니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은 소식은 이 힘이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P 동학과 커먼즈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기타 전지구적 생산공동체들이 부상하고 있다.

· 전지구적 기업가 연합이 이 오픈소스 지식 베이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수가 의식적으로 생성적인 연합이 되어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커머너들의 생계에 대한 지원을 생성하고자 한다.

· 도시들의 (그리고 협동조합들, 노동조합들, 윤리적 자본의) 전지구적 연합은 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공통의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여 이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전지구적 기반시설들을 떠맡는 전지구적 트러스트들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사멸 3.0이다. 즉 국민국가 수준 너머에서 수립된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능적 거버넌스이다.




바우엔스,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 테제에 대한 비판



 

전도된 사회적 다윈주의로서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옮긴이] ‘enlivenment’에 대한 설명은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참조.))테제에 대한 비판

 

우리는 안드레아스 베버의 뛰어나고 재미있는 글 「살림: 자연, 문화, 정치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 Heinrich Boell Foundation, 2012)를 다음 게시글로 재출판할 것이다.

나는 위 텍스트의 내용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의 주체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세상에 관한 우리의 사유와 느낌-사유에서 생명 및 의식과 다시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그 책의 취지에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베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에 기고한 글, 특히 「낭비의 경제: 커먼즈의 생물학」(“The Economy of Wastefulness: The Biology of the Commons”)이 그 증거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수십억 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커먼즈 경제 즉 생물권(biosphere)이 있다. ···…나는 자연이 탁월한 커먼즈 패러다임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이, 압도적일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커먼즈 원칙에 따라 함께 살아왔다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주장은 한층 더 복잡하다. 나는 자연 내부에서의 생태학적인 관계들도 커먼즈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자연과정을 경제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 이미 문제이지만, 어떻게 ‘경제학’을 정의하는지에 따라 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커먼즈 경제’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확장인 것 같다. 오스트롬 학파와 그 이후 커먼즈 운동은 커먼즈를 항상 그 사용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공유재(a common pool resource)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그 거버넌스의 민주적인 성격(그것이 아무리 넓게 정의되더라도)을 강조한다. (공유 자원의 독재적 관리는 사실상 사용자들을 수탈할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오픈 액세스 자원들은 커먼즈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즉 “생물권”에 그러한 거버넌스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대담한 가설이며 자연 속의 사용자들이 실제로 그런 민주적인 협력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만물의 국회’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베버는 우리의 자연관이 빅토리아 영국의 인간관에서 유래되었다는, 바꾸어 말해서 문화의 투사(投射)라는 매우 가치 있는 주장을 한다.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빅토리아 산업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그러한 이론 중 일부를 변경해서 자연 변화와 발전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에 적용했다. 그 여파로 “생존투쟁,” “경쟁,” “성장”, “최적화” 같은 개념들이 암암리에 자기이해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 즉 사회는 생물학적•과학기술적•사회적 진보가 개인 이기심의 총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경쟁에서 환경에 적합한 종들(강력한 기업들)은 틈새(시장)를 개척하고 그들의 생존율(수익)을 증가시키는 데 반하여 약한(덜 효율적인) 종들은 멸종한다(파산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경제와 자연의 형이상학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기보다 사회가 자신의 고유한 전제들에 관해 가지는 견해이다. ······우리는 생물학과 경제학의 이런 연합을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이데올로기가 다시 사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관점에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베버의 판단에 충분히 동의한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우리의 사회 조직의 성격에 대하여 이런 결론들을 도출한다.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황야를 배제했다. 즉 자기성취적이고 그 어떤 존재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으며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종획되지 않은 자연을 배제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 가운데 경쟁과 최적화라는 원칙을 넘어가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일반적인 정당성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멋진 환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생존투쟁에서 작동하는 심층적인 힘들에 대한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잘 맞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협력은 기본적으로 자원경쟁에서의 전략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자연 그 자체는 커먼즈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임에서는 독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픈 소스이다. 유기체 영역의 본질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모든 것에 열려있는 유전 정보의 소스코드이다. ···…죽음에 이른 모든 개체는, 햇빛이라는 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체들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선물로서 자신을 내놓는다.

(······)

생태계 커먼즈에서 수많은 별개의 개체들과 서로 다른 종들은 서로 다양한 관계—경쟁과 협동, 협력과 포식(捕食), 생산성과 파괴—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들은 한 가지 상위법을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촉진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어로서 “커먼즈”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세계를 묶어주는 요소를 나타낸다. 자연을 그 진정한 질의 측면에서 커먼즈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사회적 삶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삶에서—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연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 생산적인 관계를 이루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커먼즈 경제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

  따라서 커먼즈 개념은 자연과 사회/문화 사이에 있다고 상정되는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통합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할을 없앤다.

나의 이의제기는, 이 설명에는 빠진 것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전도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설명에는 창발(emergence)이 빠져있다. 즉 복잡성(complexity)을 가진 새로운 층들이 새로운 실재와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빠져있다. 삶(생명)은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고, 의식도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며 인간 문화 또한 그렇게 한다. 각각의 창발적인 층은 비록 그 층보다 앞서는 어떤 층에 함입되어 있고 그 선행하는 층의 제약을 받아야만 할지라도, 혁신과 ‘새로운 자유’(예컨대 동물은 자신의 의지로 이동할 수 있지만 식물은 이동할 수 없다)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는 인간문화와 그 선택들은 자연법칙에서 파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적인 것에 함입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연 전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안드레아스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연은 “경쟁과 협동이고 협력과 포식”이다. 인간사회는 이런 충동들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베버가 커먼즈로 보는 자연 속의 포식관계가 인간의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충동을 알고 인식해야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충동을 조절한다. 인간의 영역 외부에서 자연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커먼즈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커먼즈는 인간의 법이다. 커먼즈는 사회와 자원이 여러 선택들 사이에서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비전이다. 자연에는 소유(재산) 개념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소유(재산) 개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개념을 적용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리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연이 우리에게 포식이 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예를 들어, 약탈적인 충동을 관리하고 승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함입시킬 수 있는 만큼은—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커먼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된 자연주의, 즉 반(反)다윈주의이다. 안드레아스 베버 입장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베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최근에 인간이 발견한 것, 즉 자연 또한 협동체계라는 것과 우리가 자원을 커먼즈로서, ‘자연의 특성’으로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에 투사한 다음 “하하, 자연은 커먼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커먼즈임에 틀림없다”라고 결론 내린다. 사실 자연과 사회 둘 다 다양하고 우리는 자연과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하여 민주적인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은 계몽의 기획이었고 안드레아스 베버가 진술하듯이 일면적이었으며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살림’은 필요한 보완요소이다. 하지만 전도된 투사 메커니즘을 실행하는 ‘살림’은 그런 요소가 아니다.

우리의 ‘살림’은 자연의 이상화, 자연 신비주의, 인간 중심적 투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안드레아스에게 미안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커먼즈가 아니며 오직 인간만이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도입할 수 있다. ♣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를 역사화하는 것, 즉 커먼즈의 진화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래는 최초의 예비적 시도이다.

우선 커먼즈를 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데이빗 볼리어 등이 부여했으며 엘리너 오스트롬을 비롯한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서 나온 정의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따르면 커먼즈는 공유된 자원을 그 사용자들 그리고/혹은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체들이 그 규칙 및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소유하고/소유하거나 공동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커먼즈는 ‘사물’, 활동(자원의 유지와 공동생산을 하는 커머닝), 그리고 다스림(거버넌스)의 방식의 결합이다. 이는 사적 형태의 자원관리 및 공적/국가적 형태의 자원관리와 구분된다.

그런데 커머닝을 자원의 결실을 분배하는 네 가지 양식 중 하나로, 즉 하나의 ‘교환양식’(mode of exchange)으로 보는 것도 유용하다. 이는 의무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 기반의 재분배 시스템과도 다르고 상품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과도 다르며 특수한 존재자들 사이에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선물(膳物)경제와도 다른 교환방식이다. 커머닝은 자원을 한데 모으기(pooling)/공동으로 사용하기이며, 이를 통해 개인들은 생태계 전체와 교류한다.

관계를 규정하는 여러 문법들, 특히 피스크(Alan Page Fiske)의 『사회적 삶의 구조』(Structures of Social Life)에 제시된 것이 이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피스크는 권위의 서열화(서열에 따른 분배), 동등하게 응답하기(선물에 선물로 응답할 사회적 의무로서의 선물 경제), 시장에서의 가격매김, 그리고 공동체적 공유라는 네 가지를 구분해낸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世界史の構造)는 교환양식의 진화를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훌륭한 시도이다. 초기의 부족적·유목적 형식의 인간 조직에서는 ‘한데 모으기’가 주된 양식이었다. ‘소유하기’는 유목민들에게는 반(反)생산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물경제는 더 복잡한 부족적 배치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특히 농경으로의 정착 이후에 가장 강해진다. 선물과 답례의 사회적 의무가 사회를 창출하고 관계를 평화롭게 한다. 계급사회의 등장과 함께 ‘권위의 서열화’ 혹은 재분배가 우세해지며,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에서 시장 체제가 우세해진다.

이제 이것을 문명의 역사, 즉 계급의 역사에 맞춘 가설로 다시 정식화해보자.

자본주의 이전에 출현한 계급사회들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커먼즈들이 존재했다.(([옮긴이] ‘commons’는 ‘means’(수단, 방법)처럼 단수로도 쓰이고 복수로도 쓰인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자연자원 커먼즈들로서 오스트롬 학파의 연구대상이 된 것들이다.(([옮긴이] 밑줄 강조는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이 커먼즈들은 문화적으로 전승된 더 유기적인 커먼즈(민속 지식 등)와 공존했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사회들은 매우 착취적이었지만 사람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구조적으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유럽 봉건주의에서 농민은 공유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및 시장체제가 처음에는 도시 내의 하부체계로서 출현하고 진화하면서 둘째 형태의 커먼즈, 즉 사회적 커먼즈가 중요해진다. 서양 역사에서는 수공업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연대제도인 길드 시스템이 중세의 도시들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복지’(welfare)시스템이 공동으로 이용되고 자율적으로 관리되었다. 시장 기반의 자본주의가 우세해지면서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여기서 자연자원 커먼즈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가 구축될 필요가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 소비조합, 공제조합 등을 커먼즈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사회적 커먼즈를 관리하는 법적 형태로서 간주될 수 있다.

복지국가에서는 이 커먼즈들 대부분이 국유화되며 (즉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며) 더 이상 커머너들 자신들에 의해서 관리되지 않는다. 사회안전제도들이 민주적 정치체에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커먼즈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복지국가의 위기와 함께 ‘커먼페어’(commonfare)(([옮긴이] ‘welfare’가 ‘잘 살기’를 의미한다면, ‘commonfare’는 ‘공동으로 살기’를 의미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풀뿌리 유대시스템들이 다시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지제도의 신자유주의화와 관료화는, 공적인 부문(국가)과 커먼즈의 파트너관계에 기반을 둔 복지제도의 재(再)공통화(re-commonification)에 대한 요구를 야기하는 충분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터넷의 출현, 특히 웹의 발명 (웹브라우저는 1993년 10월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래 우리는 셋째 유형의 커먼즈인 지식 커먼즈의 탄생과 급속한 진화를 목격하고 있다. 분산된 컴퓨터 네트워크들은 P2P 동학의 보편화를 가능하게 했다. 즉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peers’)이 공유된 지식 자원(지식, 프리 소프트웨어, 공유된 디자인들)의 공동의 창출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열린 기여 체계들을 가능하게 했다. 지식 커먼즈는 인지 자본주의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즉 지식이 생산과 경쟁에서의 장점의 일차적 요인이 되는 동시에 ‘사유재산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대안―지식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이 생산요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본주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인지 혹은 네트워크 기반의 자본주의가 특히 지식 노동자들의 경우 봉급 기반의 노동을 무너뜨리고 불안정노동을 보편화하는 바로 그 만큼,(([옮긴이] 원문 “To the degree that cognitive or network-based capitalism undermines salary-based work and generalized precarious work, especially for knowledge workers, these knowledge commons and distributed networks become a vital tool for social autonomy and collective organisation”에서 “generalized”는 ‘generalizes’의 오류로 보고 고쳐서 옮겼다.)) 이 지식 커먼즈와 분산된 네트워크들은 사회적 자율과 집단적 조직화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지식에의 접근이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더 안정된 생계를 창출할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지식 커먼즈들은 일반적으로 자본과 서로 의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의 새로운 층인 ‘넷지배’ 자본(netarchical capital)은 커먼즈와 인간의 협력으로부터 직접 가치를 추출한다.(([옮긴이] 넷지배 자본은 지적 재산의 소유나 미디어 벡터의 통제에 의존하지 않고 참여 플랫폼들의 개발과 통제에 의존하는 자본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wiki.p2pfoundation.net/Netarchical_Capitalism 참조.))

그러나 우리는 지식이 물질적 실재의 재현이며 따라서 지식 커먼즈의 출현은 생산양식과 분배양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놓을 가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한 국면, 즉 ‘디지털’(즉 지식)과 물리적인 것(the physical)의 증가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피지털(phygital)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최초의 장소는 어번 커먼즈이다. 나는 네 달 동안 벨기에의 헨트 시에서 보낼 기회를 가졌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급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영역(식품, 주거, 수송)에서 거의 500개에 달하는 어번 커먼즈들을 찾아냈다.(([원주] 자급활동에 따라 분류된 커먼즈의 디렉터리로는 네덜란드어로 된 싸이트 http://wiki.commons.gent 참조.))

우리의 큰 발견은 어번 커먼즈들이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커먼즈 공동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커먼즈들이 다음의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 열린 생산공동체

2) 커먼즈의 기반시설을 유지하면서 이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반시설 조직

3) 커머너들의 사회적 재생산(즉 그들의 생계)을 확보하기 위해서 커먼즈와 시장/국가 사이를 매개하는 (최선의 경우에) 생성적인 생계 조직.

적어도 두 개의 연구에 따르면(([원주] 그 중 하나는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며, 무어(Tine De Moor)가 2013년 8월 30일 <역사적 관점에서의 집단적 행동 연구소>(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한 「협력인」(“Homo Cooperans”)이라는 제목의 강연 텍스트를 실은 소책자이다. http://www.collective-action.info/sites/default/files/webmaster/_PUB_Homo-cooperans_EN.pdf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를 대상으로 한다. Burgercollectieven in kaart gebracht. Van Fleur Noy & Dirk Holemans. Oikos, 2016: http://www.coopkracht.org/images/phocadownload/burgercollectieven%20in%20kaart%20gebracht%20-%20fleur%20noy%20%20dirk%20holemans.pdf)) 급격한 성장의 국면을 거쳐가고 있는 이 어번 커먼즈들은 (지난 10년 동안 10배 성장했다) 우리가 보기에 커먼즈의 더 나아간 발전을 위한 전제로서 한층 더 심화된 새로운 물질적 실현의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비물질적, (공동)생산됨/전승됨이라는 두 축을 따라 네 유형의 커먼즈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오스트롬이 연구한 커먼즈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물질적 커먼즈(자연자원)이다. 문화나 언어 같은 물려받은 비물질적 커먼즈는 보통 인류의 공통 유산이라는 각도에서 고찰된다. 지식 커먼즈들은 공동으로 생산되는 비물질적 커먼즈이다. 마지막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커먼즈라는 대체로 그 사례를 찾기 힘든 범주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전통적으로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자본을 위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이라는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그 논리를 한번 보자.

토지가 주된 생산요인이었던 전자본주의적 계급형성체에서 자연자원은 커먼즈 생계에 필수적이었으며, 커먼즈가 토지와 연결된 자연자원의 공동 관리라는 형태를 띤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토지와 생산수단에의 접근에서 분리된 자본주의에서는 커먼즈가 ‘사회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회적 커먼즈는 노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연대제도이다. 자본의 지배 동안 생산을 상이한 토대 위에서 조직하려는 시도들이기도 하다. 즉 생산과 소비를 위한 협동조합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인지 자본주의의 시기에 지식은 생산과 부 창출의 주된 자원이자 요인이 되며, 지식 커먼즈는 그 논리적 결과이다. 그러나 안정된 봉급을 받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이 지식을 ‘먹을’ 수는 없다. 따라서 커먼즈는 또한 도시 기반시설과 자급 시스템의 형태를 띠며,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물리적·물질적 커먼즈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잠재적으로 현재의 종합국면에 적합한 생산양식의 형태이다. 필요한 생태적 이행 및 사회적 평등의 제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장과 국가가 실패한 시기에는 커머닝 기반시설이 자원과 서비스에의 접근을 보장하는 데 필요하게 된다. 접근의 불평등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인간의 물질적 생산이 생태계에 남기는 발자국을 줄이는 매우 힘있는 수단으로서도 그렇다.

따라서 현재의 어번 커먼즈 및 생산 커먼즈들은 현 체제의 문제―물질적 생산에서의 사이비 풍요가 지구를 위태롭게 함과 아울러 지식 교환에서의 인위적 희소성이 해결책의 확산을 방해하고 있다―를 풀어줄 새로운 체제의 맹아적 형태들이다.

인지 자본주의의 지식 커먼즈들은 탈자본주의 시기의 생산적 커먼즈로 이행하는 과도적 형태일 뿐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지식 커먼즈에 의해 형성되고 모델화되는 이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커먼즈(따라서 ‘피지털’)에서는 생산수단 자체가 공동의 이용을 위해 한데 모은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공유된 전지구적 지식자원(예를 들어 공유된 디자인들 같은 것이 있으며 ‘모든 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고 공유된다’는 규칙을 따른다)과 지역에서 협동적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미시적 공장들(‘모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라는 규칙을 따른다)이 결합되는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DGML: design global, manufacture local) 생산 및 분배양식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옮긴이] ‘DGML’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797 참조.))

· 프로토콜 협동조합주의 : 바탕이 되는 비물질적이고 알고리즘적인 프로토콜들이 공유되어 오픈소스가 된다. 카피페어(copyfair) 원칙을 따른다(자유롭게 공유되지만 상업화는 상호성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 열린 협동조합주의 : 커먼즈 기반 협동조합들은 사회 전체를 위해 공통의 재화를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자본주의’와는 구분된다. 플랫폼 협동조합들에서는 플랫폼 자체가 커먼즈이며 요구될 수 있는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관리하는 한편 추출적인 넷지배 플랫폼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는다.

· 열린 기여기반 회계 : 모든 기여를 인정하는 공정한 분배 메커니즘들이다.

· 열린 공유된 공급망 : 상호 조정을 가능하게 한다.

· 배타적이지 않은 형태의 소유 : 생산수단이 생태계 내의 모든 참여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으로 점유·운영된다.

우리 견해로는 현재 어번 커먼즈들의 급속한 성장의 파도는 앞으로 올 더 거대한 파도, 즉 탈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치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할, 규모가 커진 물질적 커먼즈들의 출현의 파도를 예시한다. ♣




Equipotentiality


  • 다음은 미셸 바우엔스의 ‘Equipotentiality'(잠재적 균등성) 개념에 관한 정백수의 설명이다.

 

Equipotentiality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는 P2P 관계가 ‘등가의 법칙’(law of equivalence’)을 극복하는 원리로서 미셸 바우엔스가 제시하는 개념이다. 아래 두 사이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https://blog.p2pfoundation.net/harry-walker-on-a-anthropology-of-the-common/2015/07/10

https://wiki.p2pfoundation.net/Equipotentiality

‘등가의 법칙’이란 맑스라면 ‘일반화된 교환의 법칙’이라고 불렀을 것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되는 데 작용하는 법칙이다. 가따리는 ‘일반적인 등가물로서의 자본’ 혹은 ‘일반적인 등가관계’라는 말로서 자본의 핵심을 표현하곤 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는 상업적 교환을 삶의 핵심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 팽크스(Pancks)를 등장시켜서 그 인물의 다른 잠재된 요소(이는 ‘보시바라밀’에 버금가는 것이다)가 발현되어 (물론 상황의 악화도 한몫한다) 이 사고방식을 파훼하는 방식으로 이 법칙을 비판했다.

상품들 사이의 교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품들의 질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양에서의 차이만 확정하여 교환비율을 정해야 한다. 이 교환비율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교환가치이며 교환가치의 내적 실체를 이루는 것이 (고전적인 자본주의에서는) 가치(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다. 교환가치가 현실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가격이다. 상품들은 바로 이 가격에 따라 서로 교환된다. 이러한 등가관계는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면서 인간의 사회적 삶 전체에 퍼지고 심지어는 사회적 삶에 영향을 받게 마련인 인간의 정신에도 새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상품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들이 일정한 비율로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환상적 생각 속에서 살게 된다. 이 환상은 근대를 구성하는 독특한 물신의 하나로서 대안 근대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된다. 따라서 대안 근대를 향하는 운동은 이 등가의 법칙의 극복이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직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상당한 양의 임금과 교환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이것이 굳어져 물신(物神)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가령 무조건 모두에게 일정 양의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 같은 기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림이 있을 수 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상품화된 노동과 교환된 임금으로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관계가 존재한 시기는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노동자는 생각조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바우엔스의 생각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위에 제시된 첫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바우엔스는 P2P 관계가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equipotentiality’가 바로 이 등가의 법칙을 극복하는 원리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어떤 기획에 협력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 어떤 권위도 협력의 능력을 미리 판정할 수 없으며 기여를 통한 협력의 질은 나중에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동료들(peers)의 공동체에 의해 판정됨을, 즉 ‘공동체의 비준’을 받음을 의미한다. 잠재력 균등적 기획에서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기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모듈[기획을 구성하는 부분들―옮긴이]을 자율적으로 선택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능력들의 다양한 집합으로 간주되는데, 이 능력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특정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한 순위가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우엔스는 인류학자 해리 워커(Harry Walker)가 「공통적인 것의 인류학」(“Anthropology of the Common”)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등가의 법칙’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강연의 내용은 볼리어의 블로그에서도 소개되었으며 여기에 옮겨져 있다.

 

[위에 제시된 둘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여기서 바우엔스는 찰스 리드비터(Charles Leadbeater)가 요하이 벤클러의 설명을 요약한 것을 인용한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이 서로 연계하는 방식에 대한 벤클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협동의 원료는 창조적 재능이다. 그런데 창조적 재능은 극히 가변적이다.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각기 다르며 또 각기 다른 식으로 잘한다. 외적으로는, 가령 시간이나 움직임 연구에 의해서는 누가 더 효율적인 창조적 노동자인지를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에 대해서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언제 창조될 필요가 있는지를 자세히 밝히는 상세한 직무기술서와 계약서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은 ‘때 맞춰’ 배달될 수 없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은 창조성과 질을 평가하는 어려움을 의사결정을 개인들과 소집단으로 탈중심화(분산)함으로써 해결한다. 이들은 무슨 일에 집중해야 할지를 무엇이 행해질 필요가 있고 그들의 숙련된 기술은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한다. 이미 직원이 잘 배치되어 있거나 당신의 기여가 별로 표가 나지 않는 기획에 집중하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 동료들의 눈을 속이기는 매우 어렵다. 당신이 하는 기여가 일정 기준에 실제로 못 미치면 그들이 곧 발견할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집중한다. 훌륭한 중추적 디자인 규칙들이 전체가 합쳐지도록 해준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에서의 일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상이한 과제에 스스로를 분산시킬 때 이루어지며,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동료들에 의한 열린 평가에 맡겨서 질을 유지하고 생산물은 모듈로서 디자인되어서 개인들의 기여가 쉽게 서로 맞춰지도록 한다.

중간에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은 생략하고 마지막으로 바우엔스가 인용하는 조지 페러(George Ferrer)의 대목을 우리말로 옮긴다.

통합적이고 육화된 정신성(spirituality, 영성)이 비교에 기반을 둔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은 경쟁, 겨룸, 시기, 질투, 갈등 그리고 증오를 쉽게 낳는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진정한 강력한 잠재력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서로 풍요롭게 하기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출현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욕구와 결핍을 서로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현재 우세한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는 역설적이게도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들에도 매우 확대되어 있다―에서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전체적으로든 특정의 특권적 측면에서든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는데, 만일 비교하는 정신을 [전원 내리듯이―옮긴이] 끈다면 이런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해체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만이나 정신적 나르시시즘은 말할 것도 없고 참되지 못하고 보람 없는 관계들을 낳는) 이 위계적 모델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양한 숙련과 노력의 영역에서 (지적, 정서적, 예술적, 기계적, 인간관계적 등) 자신들보다 우월한 동시에 열등하며 이 숙련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높거나 더 낫지 않다는 의미에서 동등한 존재로 경험하는 ‘나-너’ 방식의 조우에 자연스럽게 길을 내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조우를 단순하게 동등하기만 한 것으로 평범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면 인간의 평등을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의미와 자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의 상호작용에 가져올 것이다. 모두가 우리로부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진정으로 열려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인의 통합적 발전은 “사랑의 수평화”를 낳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나 겨루는 상대로 보기보다 내재적 차원에서나 초월적 차원에서나 ‘신비’(Mystery)의 특유한 육화로 볼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줄 수 있고, 우리 또한 그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볼 것이다. ♣




미셸 바우엔스 서울 초청 강연

Main theme

There are alternatives to the more commercial forms of the sharing economy, which are based on the urban commons and the communities that support and use them. Michel Bauwens will explain the experience of the 500 urban commons in Ghent, as well as his proposals to the city for new public-commons institutions to facilitate the cooperation between citizens and their city.

 

Keyword

#P2P foundation #Commons #Peer production #Platform Cooperativism #Sharing economy #Sharing city #Open cooperativism

Date : September 19(Tue) 5 PM ~ 7PM
Venue : Seoul Social Economy Center (684, Tongil-ro Eunpyeong-gu Seoul)
Language : English, Korean

 

Program time table

* The Fourth Wave of Commoning, transforming cities through urban commons by Michel Bauwens

* Round Table with Guest speakers- Michel Bauwens & Gibin Hong

* Q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