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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굴의 디오니소스와 공통적인 것의 화폐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mebly의 15장 2절, 3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A three-faced Dionysus to govern the common

 

군주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삶의 조직화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군주는 왕좌 위에 앉아있는 존재일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지배의 구조를 변형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은 후 새로운 사회조직 형태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중은 새로운 군주를 민주적 구조로서 구성해야 한다.

 

각자 가능성과 함정을 지닌, 세 개의 경로가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한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한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이 경로들을 교직하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세 얼굴을 가진 디오니소스’(“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른다.

 

[① 엑서더스]

이 전략은 유토피아 공동체 전략의 계승자이다. 기존의 사회관계의 외부에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삶형태,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들과 푸리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에 이르는 이론적 탐구들의 풍요로운 역사가 대안적 외부를 창출하는 힘을 입증한다.

 

오늘날 가장 영감을 주는 엑서더스 실천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의 형태를 띤다. 비민주적 조직형태를 통해서 민주적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자기패배적이라는 논리. 활동가들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운동 내부에 창출된 축소된 사회는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미리 구현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실적 가능성과 바람직함의 입증으로서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예시적 정치가 특히 번성한 곳은 신좌파 여러 부문들, 특히 페미니즘과 학생운동에서이다. 여기서 참여민주주의는 운동 자체의 내적 조직화의 으뜸가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970년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점령된 사회센터들에서는 자율적 거버넌스 구조와 지배적 사회 내부에서 그 사회에 반하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실험이 행해졌다. 예시정치는 최근에 들어와서 확장되었다. 2011-2013년에 타흐리르 광장, 뿌에르타 델 쏠 광장에서 주코티 공원 및 게지 공원에 이르는 다양한 점령 캠프들은 무상 도서관, 음식, 의료서비스의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대규모로 민주적 의사결정의 실험을 한 감격적인 사례들이다. 예시적 정치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관한 광범한 사회적 논쟁을 개시하는 능력이었다.

 

 

예시적 정치의 단점은 그 내적 동학과 사회적 효과에서 명백하다. 지배적인 사회의 일부이면서 예시적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힘들다.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회주의 사회와 같다. 공동체에서 남과 다르게 살라는 것은 대체로 도덕의 수준에서 작동하며 지배적인 사회에서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을 거스르기도 한다. 그 결과 도덕주의와 내적 치안이 그런 활동가적 공동체에서의 삶의 경험을 망치는 경우가 잦다.

 

더 중요한 것은 예시적 경험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생성하고 그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큰 성취이이지만, 예시적 경험은 그 자체로는 지배적 제도들에 관여할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지배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생성하는 것에 크게 못 미침은 말할 것도 없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기존의 제도들에 관여하여 안으로부터 개혁하기. 적대적 개혁주의는 단지 현 체제의 병폐를 보정하고 그 피해를 개선하는 데 복무하는 협조적 개혁주의와는 다르다. 적대적 개혁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조준한다.

 

두치케(Rudi Dutschke)의 어구 “제도들을 거쳐 가는 대장정” (Der lange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은 마오의 항일 유격전 이미지를 지배 질서에 대한 내부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기존의 제도 내부에서의 유격전이다. 또한 두치케의 어구는 그람시의 진지전의 핵심— 문화, 사상의 영역 그리고 현재의 권력구조의 영역에서의 정치투쟁 수행—을 표현한다. 두치케에게 목표는 운동의 자율을, 그 전략적 힘을 긍정하고 운동이 대항권력의 구축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도 그람시를 해석하여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를 제안하지만 반대경로를 생각한다. 운동을 당의 명령에 종속시킨다.

 

적대적 개혁주의와 사민주의적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강한 개혁주의와 약한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두치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최고이고 똘리아띠의 경우에는 최소이다.

 

선거과정이 적대적 개혁주의의 장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뽑아준 사람이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최근에 오바마, 꼴라우(Ada Colau) 등 여러 진보적 정치가들이 실질적 변화를 약속하며 선출되었고 이들의 성공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의 타성이 변화를 위한 정치적 기획보다 더 강력했던 경우도 있고 반면에 실질적인 변화들이 성취된 경우도 있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또 다른 장은, 소유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적 위계의 힘을 상쇄시키고 가난과 배제를 완화시키는 법 기획들이다. 빈자를 위한 주택 기획, 노동자의 권리 등.

 

이 이외에도 적대적 개혁주의가 발휘될 수 있는 다른 법적·제도적 장들이 있다 — 환경 문제, 성폭력 방지, 노동자권리 긍정, 이주민 돕기 등등. 적대적 개혁주의를 가늠하는 기준은 실행되는 개혁이 기존의 체제를 뒷받침하는가 아니면 권력구조의 실질적 변형을 가동시키는가이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일부 기획들이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길게 보면 의미심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대장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백하다. 대장정은 종종 기존의 제도들 속에서 길을 잃으며 바라는 사회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도를 바꾸겠다고 제도 속에 들어가지만, 제도가 당신을 바꾸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 개혁주의의 기획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를 부각할 뿐이다.

 

[③ 헤게모니 잡기]

예시적 전략과 달리 이 전략은 지배적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분리된 소규모 공동체들의 구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사회 전체를 직접 변형하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제도들은 행동의 장이 아니라 ‘해체적’(destituent) 사업의 대상이다. 기존의 제도를 전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이 세 경로들 각각은 상이한 시간성을 함축한다.

①은 사회변형을 미래—소규모가 대규모로 달성되는 날— 로 미룬다.

②는 점진적 변화라는 느린 시간성을 산다. “한 번에 벽돌 하나씩”

③은 ‘사건의 시간성’(the temporality of event)에서 살며 사회적 수준에서의 신속한 변형을 가져온다.

 

③에도 분명 많은 함정들이 있다.

1) 새 체제는 낡은 체제의 주된 특징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③이 현재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③은 권력을 변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분쇄하는 것”(smashing the state)이 필요하다. 우리는 비국가적인 공적 힘을 창출해야 한다.

2) ③은 (가령 일국 수준에서는) 환경에 의해 극히 제한된다. 전지구적 자본의 압박, 주도적 국민국가들의 반응, 다양한 비국가적 외부세력들이 가하는 제한 등.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경험, 지난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이 이 제한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해도 결국 이루는 것은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1) 첫 응답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이 세 전략들을 (잠재적으로) 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점만 달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변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해서든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권력을 잡는 것은 자율적이고 예시적인 실천들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공간을 여는 데 복무하고, 장기적으로 계속될 제도들의 변형을 천천히 양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엑서더스의 실천들도 다른 두 기획들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방식들을 발견해야 한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연계를 통해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기존의 지배체제 내에서 그 체제에 거슬러 권력의 이원주의(a dualism of power, 두 정치적 힘의 공존)를 실질적으로 창조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리얼리즘(현실주의)이다.

 

2) 둘째 응답 (더 심층적이다)

시야를 정치에서 사회적 지형으로 확대한다. 우리[네그리·하트]는 이 책에서 줄곧 정치를 자율적인 지형으로 보는 것은 재난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퍼즐은 사회적 관계의 변형을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사회적 삶에의 평등한 참여를 방지하는 주된 메커니즘은 바로 사적 소유의 지배이다. 공통적인 것의 수립은 사적 소유의 장벽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창출·제도화한다. 사회적 지형으로 초점을 확대하면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는 광범하게 퍼진 능력을 포착하게 된다. 다중의 기업가 정신/활동이 이 확대된 능력의 한 얼굴이다. 생산하는 삶을 조직하고 협동의 미래 형태들을 계획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능력이 바로 필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그리고 삶정치적 맥락에서 사회적 조직화는 항상 흘러넘쳐서 정치적 조직화로 확대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여기서 우리가 서술하는 경로와 같은 것을 규정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순전한 정치적 범주(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번역)도 아니고 순전한 사회학적 범주(헤겔의 ‘시민 사회’)도 아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당 측면(더 정확하게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에 살을 부여하는 구성적 힘)과 사회를 변형하는 사회 투쟁의 측면을 다 포함한다. 그람시가 그의 글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합리화가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과정에 상응하여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출할 필요를 낳았다고 썼을 때, 우리는 이로부터 이 새로운 유형 즉 포디즘 노동자는 경제적 위기와 기술의 변형에서 그가 배운 것을 되돌려 위기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저항과 투쟁의 존재론적 축적은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상에 접근하여 ‘일반지성’의 패러다임을 해석하게 될수록 혁명적 실천에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 중첩, 적대적 개혁과 헤게모니 잡기의 이 중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다중적 민주주의의 구축이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상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2장에서 옹호한) 전략과 전술의 전도—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운동의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가능성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다중의 전략능력의 수립이다. 전략능력이란 억압의 구조들을 샅샅이 해석하고 효과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신중하게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직화하는 능력이다. 다중은 정치적 기업가가 될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지도부의 행동의 유용성과 필요성은 특히 긴급한 상황에서는 분명하다. 수립되어야 할 것은 지도부가 자신들이 환영받는 시간 이상을 남아있지 않게 할 방비책이다. 다중의 전략적 힘이 유일한 보증자이다.

 

 

A Hermes to forge the coin of the common

 

금융의 지배 하에서 화폐가 발휘하는 힘과 폭력의 비판자들 다수는 화폐의 힘을 제한하는 것을 주된 과제라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부유층의 금융권력을 제한하고 은행의 권력을 감소시키고 심지어는 화폐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모든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첫 걸음일 뿐이다.

 

화폐를 폐지하자는 더 발본적인 주장은 자본주의적 화폐를 화폐 자체와 혼동하고 있다. 화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11장에서 말했듯이, 화폐는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한다. 화폐는 강력한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다른 테크놀로지의 경우처럼 문제는 화폐가 아니라 그것이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에서의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가 창출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분명 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만큼이나 일반적이고 강력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한다. 어떻게 우리는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화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화폐는 재산에 대한 익명화된 권리증서(자본주의적 화폐)가 되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서의 다원적이고 특이한 사회적 유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폐의 창출은 사유재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화폐정책 및 사회정책의 구체적 전환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화폐(a money of the common)를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1) 온건한 제안은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for the people”)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889 참조)) 전통적으로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여러 수단을 써서 화폐공급을 증가시켜서 소비와 생산을 자극하고자 하는 화폐정책이다. 프리드먼이 ‘헬리콥터가 뿌리는 돈’이라고 부른 이 돈은 소비의 욕구에 따라 분배되지만 결국 재계로 돌아간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나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같은 몇몇 급진적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목적으로 화폐를 공급하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이다. 화폐를 찍어내되 민중에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경우에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자율적 기획들과 실험들(규모가 작든 크든)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은 진정한 대항권력의 구축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운영하는 유용한 플랫폼을 창출하지만, 작은 걸음일 뿐이다.

 

2)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우리를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소득의 일차적 원천으로 만든다면 소득을 임금노동으로부터 분리하고 공유된 부를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협력적 회로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주조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베르첼로네는 자본주의적 명령으로부터의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것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라고 부른다. 기본소득이 사회적 삶을 생산·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약화시키면 부와 사유재산의 관계가 무너지고 공유된 부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임금체제 외부에 사회적 협동의 새로운 형태들을 열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적 삶을 상상하기를 촉진한다.

위크스(Kathi Weeks)는 기본소득의 반(反)금욕적 효과를 강조한다. 검소, 저축, 양보, 희생의 윤리를 설교하기보다 욕구와 욕망의 확장을 촉진하고 노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은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도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적 화폐를 변형하고 사유재산을 제거하며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그 방향을 향한 강한 몸짓이다.

 

이런 정책 제안들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 쪽으로 끌고 가려면 11장에서 이루어진 화폐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 이는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관계들을 역동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욕구를 해석하고(스피노자라면 이를 윤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향에 대한 분석을 그것을 가로지르고 변조시키는 힘들에 대한 인식과 결합시키는 화폐의 정치를 구축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포착해 낼 것은 ① 금융 자본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의 화폐적 형태 ② 이 생산양식의 발전에 상응하는 (상응해야 하는) 소득의 다양한 형태들 ③ 각 화폐적 형태에 상응하는 “미덕의 체제”이다. 우리의 문제틀은 산업자본의 명령에서 금융자본의 명령으로의 이행을 포착하면서 사유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추출 양태들은 사회적 협동에 의존한다. 잉여 가치는 사회적 가치의 추출을 조직하는 금융 테크놀로지를 통해 전유된다. 어떤 면에서는 “총자본”(collective capital) 자신이 역설적이게도 사유재산의 해체와 공통적인 것의 인정을 현재의 생산양식의 토대로 인식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투쟁의 직접적 목표는 불평등을 줄이고 긴축의 체제와 단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는 특히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본의 권력에 저항하는 다중에게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해체중인 정치적 구성과 새로이 출현하는 기술적 구성―이 일종의 공위상태를 이루며 공존하기 때문이다. 노조 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통들을 결합하는 사회 파업(Social strike)이 이 지형에서 투쟁의 특권적 형태이다. 궁극적으로 긴축과 불평등의 거부는 협동의 화폐(a money of cooperation)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적 협동의 생산성에 상응하는 소득―임금의 요소와 복지의 요소를 모두 가진 소득―의 형태들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한다. 협동의 화폐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넘어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연합이 ‘정치적 소득’―자본주의적 발전 및 계급관계들과 양립 불가능하게 되는 소득―을 부과할 수 있는 지형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긍정되는 미덕은 사회적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의 투쟁의 관점에서는 평등이다. ‘모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서’(맑스의 슬로건)는 모두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하고 배치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공통의 생산은 또한 다중적이기 때문에 즉 일단의 특이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력의 재생산은 대중화(massification)의 형태로는 성취될 수 없다. 사회적 차이들과 그 혁신의 힘이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에 필수적이 되었다. 따라서 협동의 화폐에 특이화의 화폐(a money of singularization) 및 특이화의 소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권리를 지원하며 아래로부터의 다원적 표현을 뒷받침한다. ‘모두로부터는 그 능력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abilities)는 따라서 특이성의 덕을 긍정하는 ‘모두로부터는 그 차이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로 옮길 수 있다. 특이화의 소득은 사회적 생산자들과 재생산자들의 자기자치화를 증진해야 할 것이다.

 

신케인즈적 거버넌스 구조와 ‘위로부터의’ 유효수요 창출을 다시 제안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열을 향하는 사회적 힘들을 주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지형에서 우리는 스트라(Pascal Nicolas-Le Strat)가 ‘공통적인 것의 노동’(le travaille du commun)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선(front)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서비스의 협동적·민주적 플랫폼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역 공동체들을 위한 실험적 통화들을 창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출현하는 다중이 가진, 사회적 관계를 자율적으로 창조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적 능력이다. 자기가치화는 정치적 자율과 자치의 능력을 함축한다.

 

근대 부르주아 체제는 사적 소유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그 관계를 보장하는 반면에 자율적인 사회적 생산의 체제는 공통적인 것에 토대를 두며 공통적인 것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6장에서 말한 심연 너머로의 도약, 사적 소유의 지배 너머로의 도약이다.

 

화폐의 첫 두 형상(협동의 화폐와 특이화의 화폐)은 사회적 생산과 일반 지성의 시대에 (새로 출현하는) 기업가적 다중이 가진 자질과 능력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a money of social and planetary investment)를 필요로 한다. 점증하는 자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육·연구·수송·건강·통신을 통해 사회의 확대를 보장할 화폐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들 및 생태계들에 대한 돌봄의 관계들을 통해 삶을 보존할 화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문제는 소득이 아니라 사회 자원을 미래를 위한 민주적 계획에 바치는 것이다. 자본은 지구에서의 사회적 삶의 번영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계획을 짤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국가도 더 나은 점이 없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실패했다. 사려의 미덕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유일한 경로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화폐가 제도화하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세 개의 국면―① 시초 축적 ②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③ 사회적 생산―으로 나누어 스케치했다.((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81의 맨 뒤에 달린 부록 참조)) 공통적인 것의 화폐가 산출할 잠재적 사회적 관계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의 표에 넷째 단을 추가하여 공통적인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시간성, 가치형태들, 거버넌스 구조 등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일 듯하다.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비자본주의적 화폐이기 때문에, 또한 그 사회적 관계가 비소유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실질적 역사적 파열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평등, 차이, 사려를 증진하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제안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인가? 협동, 특이화,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대 사회의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향을 인식하는 데, 그 안에 담겨있는 욕망을 조명하는 데, 그런 다음에는 미래를 현재로 가지고 오는 데 있다. 결국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관계―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이 관계를 수립하는 데 복무한다―가 실제로 온전하게 구현될 때에만 대세가 될 것이다.




지도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Assmebly의 1장 3절 “Leaderless movements as symptoms of a historical shift”(‘역사적 전환의 징후로서의 지도자 없는 운동’)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오늘날 운동에 지도자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산발적인 일도 아니다. 대의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에의 열망으로 인해서 사회운동 내에서 위계적인 구조들이 전복되고 해체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지도 문제는 심오한 역사적 변형의 징후이다. 근대적 조직형태들이 파괴되었지만 적절한 대체물들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를 온전하게 보기 위해서는 분석을 정치 영역 너머 경제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확대해야 한다. 이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정치영역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철창에 갇혀 있거나 묻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공권력에 의해 (때로는 제도권 좌파 정당과의 협력 아래) 투옥되거나 사살당한 것이다. 각 나라에는 쓰러진 영웅들과 순교자들의 고유한 목록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안또니오 그람시, 체 게바라, 넬슨 만델라, 프레드 햄턴(Fred Hampton), 이브라힘 카이파카야(Ibrahim Kaypakkaya) 등등. 이와 다르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살해와 투옥이라는 가장 스펙터클한 것들 말고도 다른 억압 무기들이 많다. 전문화된 법을 통한 박해, 비밀공작, 검열, 지배적인 대중매체를 통해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창출하거나 아니면 사건을 왜곡하기, 지도자들을 유명인으로 만들어서 포섭하기. 모든 반란 집압 매뉴얼은 혁명적 지도자의 제거가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머리를 자르면 몸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도층이 왜 쇠퇴하는지를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늘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외적 원인에 초점을 두는 것은 운동의 진화에 대한 빈약한 이해를 가져온다. 변화의 진정한 동력은 내적이다. 운동 내부에서 반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중심적인 토대가 된 것이 내적 이유이다.

이 맥락에서 하나의 강력한 계기는 1960~70년대 페미니즘 조직들이 운동 내에서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도구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의식고양과 모임에서 모든 사람의 발언을 보장한 것은 정치적 과정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양성하고 모두가 관여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만다는 수단이었다. 페미니즘 조직들은 또한 예를 들어 전체의 허가 없이는 미디어에 아무도 발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성원들이 대표자나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 개인이 지도자나 대표자로 지명되면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 평등, 조직의 활력강화의 성취를 무너뜨릴 것이었다. 누군가가 지도자나 대변인으로 자청하거나 그렇게 지목되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녀는 “trashing”이라 불리는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때로는 비판과 고립의 몰인정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권위주의적인 정신이 있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민주주의를 창출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1960~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민주적 실천을 생성하고 발전시키는 이례적인 인큐베이터였다. 이 실천은 현재의 사회운동에 일반화되게 된다.

실천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대의제를 비판하는 이러한 경향은 1960~70년대의 다른 운동들에서도 번성했다. 이 운동들은 남성 입법자들이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백인의 권력구조가 흑인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운동의 지도자들이 조직을 대표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부했다. 운동의 많은 부문들에서 대의제의 해독제로서 참여가 장려되었고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가 중앙집중화된 지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오늘날 리더십의 쇠퇴를 탄식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미국 흑인정치의 역사를 반대사례로 지적한다. 1950~60년대의 시민권운동의 성공은 대부분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소속의) 흑인 남성 설교자들인 (마틴 루터 킹 2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의 지혜와 실력 덕분으로 돌려진다. 맬컴 엑스, 휴이 뉴턴(Huey Newton),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등과 연관된 <블랙 파워>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것으로 흑인 페미니즘 담론에서 발전되었으며 지도자를 미화하는 전통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소수 노선도 있다.

에리카 에드워즈(Erica Edwards) : “카리스마적인 지도층을 정치적 소망으로서 그리고 서사 및 설명의 메커니즘으로서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것(전자는 ‘우리에겐 지도자가 없어’라고 탄식하는 것, 후자는 흑인 정치의 이야기를 흑인 지도층의 이야기로서 말하는 것)은 ···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만큼이나 ··· 정치적으로 위험하다.”(([원주9] Erica Edwards, Charism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2, p. 12. For her explanation of the three types of violence, see pp. 20–21.))

에드워즈가 분석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층의 폭력’의 세 양태

① 과거를 허위적으로 제시함 (다른 역사적 주체들을 가림)

② 운동 자체의 왜곡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권위구조 창출)

③ 이성애규범적인 남성성(heteronormative masculinity) (카리스마적 지도에 함축된, 젠더와 성애에 대한 규제적 이상)

마르시아 채털린(Marcia Chatelain) : “소독처리가 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민권 이야기의 가장 해로운 영향은 카리스마적 남성 지도자 개인들이 사회운동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이는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원주10] Marcia Chatelain, “Women and Black Lives Matter: An Interview with Marcia Chatelain,” Dissent, Summer 2015, pp. 54–61, quote on p. 60.))

일단 주류 역사들 너머를 보면 미국 흑인 운동을 포함한 근대 해방 운동 전체에 걸쳐서 민주적 참여의 여러 형태들이 제안되고 실험되었고 오늘날 규범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2014년 이후 반복되는 경찰의 폭력에 대응하여 미국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강력한 항의 운동들의 연합인 <흑인들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는 지도에 대한 운동들의 면역체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BLM은 전옹적인 흑인 정치제도의 지도 구조와 기율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종종 비판받는다. 그러나 해리스(Frederick C. Harris)의 설명대로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흑인 정치를 지배해온 카리스마적 지도 모델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그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원주11] Frederick C. Harris, “The Next Civil Rights Movement?,” Dissent, Summer 2015, pp. 34–40, quote on p. 36.)) 이전 세대들이 가르친 중앙집중화된 지도는 이들의 생각으로는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BLM에는 지도자도 대변인도 없다. 맥케슨(DeRay Mckesson)이나 컬러스(Patrisse Cullors) 같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촉진자들(facilitators)의 넓은 네트워크가 거리에서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연결을 구축하고 때로 집단행동의 ‘안무’—Paolo Gerbaudo의 용어를 쓰자면—를 한다. 물론 네트워크내에 차이들이 존재한다. 일부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명시적인 정책목표와 ‘흑인의 점잖음’도 거부하고 저항과 분노의 격렬한 표현으로 나아가는 한편, 다른 일부 활동가들은 수평적 조직구조를 정책적 요구들과 결합하려고 노력한다. 2016년의 <흑인 생명 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 플랫폼이 후자의 사례이다. 달리 말해서 BLM 안팎의 활동가들은 민주적 조직을 정치적 효율성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시험하고 있다.

BLM 활동가들이 보여주는, 전통적 지도구조에 대한 비판은 젠더 및 성애 위계에 대한 거부와 강하게 중첩된다. 과거에는 시스젠더 흑인들이 운동의 전면에 부각되고 퀴어, 트랜스를 비롯한 소수자들은 뒷전에 있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반면 BLM에서는 여성들이 중심적인 조직화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세 명의 여성들— Garza, Cullors, and Opal Tometi—이 #BlackLivesMatter라는 해시태그를 만들어 낸 것이 종종 그 예로 들어진다.)

지도자의 젠더와 성애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운동에서 발전된 조직형태들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해방을 위해 흑인 여성들—그 가운데 다수가 퀴어이다—의 재능을 한데 모으는 운동이 지도자가 없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흑인 여성들은 매우 종종 보이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원주 16] Chatelain, “Women and Black Lives Matter,” p. 60)) BLM 운동은 과거로부터 (때로는 지하에 잠복했던) 민주적 경향들을 한데 모으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하는 장이다. 오늘날의 많은 운동들처럼 그것도 새로운 조직모델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전환의 징후를 보여준다.

오늘날 지도자들의 결핍을 탄식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종종 ‘사회적 지식인들’(public intellectuals)의 부족을 한탄한다. 때로 정치조직에서의 지도의 거부가 학자나 지식인에게 운동을 대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과 상응하기도 한다. 1968년 혁명 시에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이 ‘말을 잡고’ 발화를 했다. 이러한 ‘말을 잡기’(prise de parole, taking the word) 자체가 혁명을 구성했다. 그러나 발화를 하는 행동만으로는 무엇을 말할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정을 받는 지식인에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식인이 되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싸르트르가 주된 모델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이러한 대변 행동이 다른 목소리들을 익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1960년대 후반에 인식되었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사례가 있다. 그는 운동을 지지했고 운동에 대한 아도르노의 무근거한 비판을 공격했지만, 그 또한 운동을 개인주의 윤리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에 묶어놓음으로써 운동을 붕괴시켰던 것이다.(([원주 18]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the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과의 갈등에 대한 하버마스 관점에서의 설명으로는 Matthew Specter, Habermas: An Intellectual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p. 101–116 참조.)) 활동가들 자신들은 개인주의에 대항해서 집단적 기획을 표현하려 했고 (정당과 국가 관료제로 구성된) 순전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대항해서 피착취자의 진실과 혁명의 필연성을 표현하려 했다.

가장 총명한 지식인들은 이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운동을 지지할 때에는 대변인으로 행세하기보다 운동으로부터 배우려고 하거나 운동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했다. 들뢰즈, 푸꼬, 싸이드(Edward Said), 스피박(Gayatry Spivak), 버틀러(Judith Butler), 홀(Stuart Hall)이 그 좋은 사례들이다. 최고의 지식인들이 배운 근본적 교훈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이다. 이제 운동이 지식인들에게 가이드가 되어 정치적 방향을 표시해주어야 한다. 이미 1960년대 초에 트론띠(Mario Tronti)가 ‘당 지식인’의 역할이 끝났음을 이해했다. 이제 모든 이론적 지식은 실천 활동에 함입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적 지식인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So, let’s be done with public intellectuals!) 학자들이 상아탑에 갇혀 있어야 한다거나 잘 모르는 소리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재능과 의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공동연구 과정에 협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의사결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도 문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그 정치적 계보를 구축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국가와 우익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지만 더 중요하게는 운동 자체 내에서 방지되어왔다. 운동에서 권위와 수직성에 대한 비판은 매우 일반화되어서 이제 지도는 운동의 목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해방 운동은 더 이상 지도자를 산출할 수 없다. 아니, 지도가 운동과 양립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운동이 권위, 비민주적 구조들,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 대의메커니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운동이 머리 없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베어냈다. 지도에 대한 내적 비판은 이제 곧바로 조직화의 문제로 이어진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 오늘날 해방운동의 지도자들이 등장할 때에는 가면을 써야 한다. 가면을 쓴 부사령관 마르꼬스는 상징적이다. 그의 가면은 경찰과 군대가 알아보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사빠띠스따 공동체들의 민주주의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면은 사령관(subcommandante)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표시했으며 ‘마르꼬스’가 개인이 아니라 모든 종속된 민중의 자리를 나타냄을 강조할 수 있게 했다. “마르꼬스는 샌 프란시스코의 게이이며 남아프리카의 흑인이고 유럽의 아시아인이며 산이시드로(San Isidro)의 치카노이고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이고 산크리스토발(San Cristobal) 거리의 토착민이다.”(([원주 21] Subcomandante Marcos, 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 (EZLN) communique of May 28, 1994, reprinted in Zapatistas! Documents of the New Mexican Revolution, Autonomedia, 1995, pp. 310–311.))

그러나 가면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2014년 5월 25일 마르꼬스는 자신의 모습은 항상 운동을 위한 홀로그램일 뿐이었으며 이제 그만 존재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지도자의 가면조차도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

① 어떻게 위계 없는 조직을 구축할 것인가?

② 어떻게 중앙집중화 없는 제도들을 창출할 것인가?

여기에는 지속적인 정치적 틀에는 초월적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유물론적 직관이 담겨 있다. 즉 정치 조직과 제도에는 주권이 필요하지 않다.

이는 근대의 정치적 논리와의 심오한 단절을 나타낸다. ‘근대의 황혼기’의 빛이 근대 여명기의 빛을 닮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6, 17세기에 스피노자, 알투지우스(Johannes Althusius) 등은 주권 및 절대주의국가의 이론가들인 홉스, 보댕 등에 맞서 싸우며 대안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시했다. 수 세기 동안 군주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계급들이 각자의 힘을 시험하며 충돌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로 피지배 사회계급들이 군주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자유권들과 면제를 인정하는 법들과 문서들을 작성하게 만든 계급들이었다. 반대로 군주들이 그 사회계급들의 도전을 관리하고 다른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저항을 다스리려고 하면서 그 계급들에게 가하는 자극이 타원의 윤곽을 그리는 것을 돕는 것이다.”(([원주 24] Sandro Chignola, “Che cos’e un governo?,” http://www.euronomade.info/?p=4417. Chignola borrows the image of the ellipse from Werner Naf. [정리자] 근대 이전의 정치적 구도에서 근대의 정치적 구조로의 이동과 그 차이에 대해서는 맑스가 그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여러 번 언급한다. “정치적 계급들을 사회계급들로 변형시킨 것은 역사의 발전을 통해서이다. 기독교도들이 천국에서는 평등하지만 땅 위에서는 불평등하듯이 한 민족의 개인들은 그 정치세계의 천국에서는 평등하지만 사회의 속세적 실존에서는 불평등하다. 정치적 계급들의 사회적 계급(civil classes)으로의 실질적 변형은 절대 왕정 하에서 일어났다. 관료제가 국가 내의 다양한 신분들에 맞서 통합의 이념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왕정의 관료제와 병행하여 계급들의 사회적 차이가 정치적 차이로 남아있었다. 절대왕정의 관료제 내에서의, 그것과 병행하는 정치적인 요소였다. 프랑스 혁명이 비로소 정치적 계급들의 사회적 계급으로의 변형을 완성했다.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계급 구분을 단순한 사회적 구분―사적 삶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구분―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정치적 삶과 시민사회의 분리가 완성되었다.” “중세는 실제적 이분법의 시기이다. 근대는 추상적 이분법의 시기이다.”))

우리에게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근대 시기 유럽에서 벌어진 투쟁의 진실의 일부는 지금도 우리에게 유용하다. 우리는 근대적 주권을 반복하는 모든 지도형태에 저항해야 한다. 맞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에 알았던 것을 재발견해야 한다. 주권이 정치의 전체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비주권적 형태의 조직 및 제도들이 강력하고 지속적일 수 있다는 것을. ♣

 




네그리와 하트의 새 책 Assembly 서문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원문 :  Assembly: Heretical Thought (2017.0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새로 나온 책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embly: Heretical Thought의 서문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종종 소개할 생각이다.

서문의 소개에 앞서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평해본다..

총평

이전 저작 『공통체』(Commonwealth)에서의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 단순한 반복 즉 중복이 없이, 실천적인 방향으로 더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발전이란 ① 더 깊어진 구체화 혹은 더 자세한 분석 혹은 더 정밀하게 다듬기라고 할 수 있는 것 이외에 ② 새로운 제안도 포함된다. 굵직한 논점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십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조직과 제도에 대한 포기(“수평주의의 물신화”)로 이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의 전도(the inversion of the strategy and tactics)를 제안한다.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전도된다는 것인데, 한국의 ‘촛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다.

2) “constituent power”에 대한 논의를 다시 다듬어서 그것이 주권(sovereignty)―‘하나’로의 통합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힘이어야 함을, 그래서 “constituent consistency”(들뢰즈·가따리 개념의 차용)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take power, but differently”라는 말이 나타내는 바이다.

3)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협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활동의 차원으로, 즉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문제를 아래에서 보아야(from below) 함을 강조한다.

4) 금융과 화폐의 문제를 더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상품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르는 가치결정이 무너지고 그 대신 파생상품들”(derivatives)의 거래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자본의 가치의 척도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금융과 화폐를 자세히 분석하는 이유는 자본으로서의 측면 말고 화폐가 가진 다른 측면 즉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능력을 살려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발명하는 실천적인 목적에 있다.

5)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이 더 분명히, 따라서 더 간명하게 제시된다. 공적인 것이 사실은 사적인 것을 가리고 보호하는 도구로 등장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의 “주권적” 성격을 밝힌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은 공통적인 것과 사유재산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공통적인 것은 재산이 아니다”) 책 전체에 걸쳐서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매우 확연하게, 어찌 보면 이전보다 더 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개념화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6) 사회적 투쟁의 형태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직화의 유형으로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가 제시되고 그 무기로서 이전의 총파업의 새로운 형태―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맞는 형태―인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 제시된다. 물론 이는 모두 출발점들이지 그 자체로 충분한 대안들이 아니다.

7) 자본가들이 예전에 하던 기능―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금융의 형태로 생산과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본이 하지 않는 기능―인 생산 요소들의 결합을 이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음을 다중의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8) 무기에 대한 생각을 더 정밀하게 :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적이며 방어에의 적용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진정한 방어는 무기의 효율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고 주로 공동체의 힘에 의존한다. ‘정치적 힘은 총에서 생긴다’라는 유명한 말은 순서와 우선성을 잘못 말한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정치적 힘에서,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자라나올 것이다.”(270)

최종적으로 네그리·하트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① 엑서더스―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기존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거버넌스의 방향으로 개혁을 변형시키려고 노력

③ 헤게모니 전략―“constituent consistency”를 구성하여 새로운 사회를 제도화

로 제시한다.

 

Assembly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서문

 

여기서 시는 봉기에 버금간다.

― 에메 쎄제르

 

사회운동이 불의와 지배에 맞서 치솟았다가 전(全)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잠깐 장악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지기―이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회운동들은 독재자 개인들을 쓰러뜨리는 경우에도 새로운 대안들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사회운동들은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그 급진적 포부를 버리고 기존 제도에 흡수되었거나 강력한 억압에 패배 당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을 나타내는 운동들이 지속적인 변화를 성취하고 못했고, 새로운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세계 전역에서 우익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더 긴급해진다. 이 세력은 정상적 법절차를 정지키시고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와해시키며 광범한 감시활동을 하고 공포 분위기를 창출하며 인종 혹은 종교적 순수성을 사회적 귀속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이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추방의 위협을 가한다. 사람들은 이 우익 정부들의 행동에 항의한다. 이렇게 항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항의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 운동은 지속적인 사회 변형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행국면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치적 전제들 일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how to take power)를 묻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힘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을 잡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민주적 사회를 성취해야 하며, 결정적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을 산출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들은 리더십을 더러운 단어로 취급한다. 그럴 이유가 많다. 50년 이상 동안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수직적 형태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족쇄가 된다고 옳게 비판해왔다. 전위가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이 현실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더십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 지속적인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화의 거부로 전환되는 것, 수직성을 추방한 결과로 수평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리더 없는 운동도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주체성의 산출을 조직화해야 한다.

리더십의 핵심적 기능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성취할 새로운 메커니즘과 실천을 발명해야 한다. 리더십의 두 핵심적 기능은 의사결정과 ‘모이기’(assembly)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관에는 리더들이 멀리서 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이 다중과 연결되어 다중의 의지와 욕망을 나타내야 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일련의 변칙들을 낳는다. 다중을 모으는 리더들의 능력도 이런 모순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는 정치적 기업가가 되어야 하는데도 모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리더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민주적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형용모순으로 나타난다.

의사결정과 모이기는 중앙집중화된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중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함께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다. 만일 리더들이 이런 맥락에서 아직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그들이 생산적 다중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십의 제거가 아니라 수평적 운동과 수직적 리더십이라는 두 극의 관계의 전도이다.

자유와 평등의 조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함께 생산하는 것이 오늘날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로 가는 경로이다. [정치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의 결합]

정치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쳇바퀴를 돌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숨겨진 거처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직화, 효율성, 모이기, 의사결정의 문제들이 사회적 지형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만 우리는 영속적인 해결책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적 장들의 과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협력의 조건을 정하고 함께 의사결정하는 다중의 잠재력을, 사람들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연구함으로써만, 그 재질과 능력을 연구함으로써만 입증할 수 있다.

오늘날 생산은 이중적 의미에서 점점 더 사회적이 되고 있다. ① 협동과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들에서 점점 더 많이 생산 ② 생산의 결과가 상품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궁극적으로 사회 자체. 사회적 생산의 이 이중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재질과 능력이 양성되고 드러난다. 또한 여기서 다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들과 가장 심한 형태의 지배(domination)가 작동한다.(금융, 화폐, 신자유주의적 행정)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서의 핵심적 투쟁 하나는 공통적인 것즉 우리가 공유하고 함께 관리하는 지구의 부와 사회적 부를 놓고 벌어진다. 공통적인 것은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토대이자 주된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즉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하여 생산하고 우리가 생산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법이 두개 있다.

①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전유할 권리를 긍정한다. 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원칙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축적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의 추출(extraction)을 통해 기능한다. (석유 및 천연가스 추출, 거대한 채광, 단작 농업 +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태에서 생산된 가치―지식, 협력, 문화생산물 등―의 추출.) 금융이 이 추출과정의 꼭대기에 존재한다. 이 추출과정은 지구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회적 생태계를 파괴한다.② 다른 접근법은 다중은 이미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더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개방적인 채로 두려고 하고 부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이 입장에 서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변형하고 접근을 봉쇄하며 그 사용과 개발에 대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것이 미래의 생산성에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식에 더 많이 접근할수록, 더 많이 협력하고 소통할수록, 자원과 부를 더 공유할수록 더 생산적이다. 공통적인 것의 관리와 돌봄은 다중의 책임이며 이 사회적 능력은 자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게 상서롭지 못하다고 악마가 귀에 속삭인다. 신자유주의가 공통적인 것과 사회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흡수한 듯이 보이며, 화폐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상호관계와 세계와의 관계의 배타적 척도로 제시된다고 한다. 금융이 거의 모든 생산관계들을 지배하며, 생산관계를 전지구적 시장이라는 얼음물로 내던졌다고 한다. 악마는 계속해서 속삭인다. 정치적 역할의 전도도 기업가들이 과거에 자본가들이 자랑하던 시절과 같았다면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기업가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 자본가, 금융가, 펀드 매니저가 이제는 명령을 내리는 자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폐가 명령을 내리며 이들은 단지 가신들이고 행정가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미지의 바다를 누비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금융축적의 끊이지 않는 잔치를 주재하는 엉덩이 무거운 사제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힘도 재조직했다. 이례적인 폭력이 권력의 행사 안에 구조적으로 포함되었다. 경찰력은 빈자, 유색인, 비참한 사람들, 피착취자들을 사냥하는 민병처럼 되었으며 이에 상응하여 전쟁은 일국의 주권이나 국제법과는 무관한 전지구적 경찰력의 행사가 되었다. 예외의 정치로부터 모든 카리스마의 광택―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이 벗겨졌으며, 예외상태는 권력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불쌍한 기만당한 것들”이라고 우리의 악마는 결론짓는다. 힘있는 자가 반란자의 순진성에 대해 보내는 온갖 오만, 경멸, 생색의 태도를 지으면서.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다행히도 수많은 형태의 일상적 저항들이 있고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강력한 사회운동의 분출이 있다. 저들의 경멸 뒤에는 저항이 봉기(insurrection)로 발전하고 자기들이 통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권력은 결코 겉모습처럼 안전하거나 자기충족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들은 안다. 전능한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는 빈자와 종속민에게 겁을 주어 순종하게 하는 데 복무하는 우화일 뿐이다. 권력은 항상 힘의 관계이다. 더 정확하게는 많은 힘들의 관계이다. “종속은 지배와 함께 이원적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의 하나로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라나짓 구하 Ranajit Guha)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이 관계에 항상 관여하여 협상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갈등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존재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는 이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론이다―는 사회투쟁, 저항, 봉기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극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다수의 삶을 지배하면서 사회를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가치를 강탈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세계는 사회적 협력에 의해 구축되지만 지배계급에 의해 분할된 세계이다.

이렇듯 사회적 존재는 전체주의적 명령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일자’는 ‘둘’로 나뉘며(The One of power divides into Two) 존재론은 각자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상이한 관점들로 쪼개진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인식론적 분할 또한 나온다. 한편으로는 고정된 영속적 질서로 간주되어야 하는 진실의 추상적 긍정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에서 구축되는 아래로부터의 진실의 탐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종속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주체화즉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생산은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만들고 추구하는 힘이 진실의 표지(標識)이다. 주체화의 과정에서 진실과 윤리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리더층이 아직도 어떤 역할을 하려면 기업가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다중 내에서 ‘모이기’의 작동자가 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은 행복의 작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다중의 민주적 기업가정신/활동(a democratic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우리는 사회를, 공통적인 것을 다양한 형태로 생산하고 사용하는 광범한 이질적 주체성들 사이의 협력의 회로들로 볼 때에만,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상응하는 정치적 기업가정신의 강력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해방의 기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기업가정신의 덕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기업가 사회의 창출을 옹호하며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고 권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업가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영웅담이 공허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오늘날 주변에 기업가 활동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조직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을 발명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 그 사용, 그것에 대한 의사결정에의 참여를 위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업가정신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로 정치사상의 중심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개념들을 둘러싸고 투쟁하며 그 의미를 밝히거나 변형하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은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의 협력의 형태들과 다중의 정치세력으로서의 ‘모이기’ 사이를 연결하는 돌쩌귀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다른 저작에서 이미 이 프로젝트를 위한 경제적 주장 가운데 일부를 개진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단순화한 일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공통적인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고 있다. (2) 이에 발맞추어 노동이 변형되고 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은 협력, 사회적·과학적 지식, 돌봄, 사회적 관계의 창출에 점점 토대를 두고 있다. 협력관계를 활성화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은 자본가의 명령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자율을 부여받는 경향이 있다. (3) 노동은 또한 새로운 내포적(intensive) 관계들 및 생산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류의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디지털 알고리즘, “일반지성” 등―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하나의 과제는 다중이 사회적 생산의 필수적 수단인 고정자본 형태들을 재전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4)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은 대규모 산업에서의 노동의 착취에서 공통적인 것(지구와 사회적 노동)으로부터의 (대체로 금융 도구들을 통한) 가치추출로 이동하고 있다. 여기서 양적인 측면이 주된 측면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보면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이 가지는 질적 의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이후 새 단계, 즉 높은 수준의 자율협력산 노동의 커머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단계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이러한 생산양식과 노동력에서의 변형은 저항을 조직화하는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제 상황이 전도되어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자본으로부터 재전유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직화의 문제(그리고 수평적 운동의 수직화)가 여기에 공통적인 것의 “제헌화”(constitutionalization)의 문제와 함께 놓여있다. 사회적 투쟁과 노동자 투쟁의 목표로서, 또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형태의 제도화로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다중이 힘의 관계를 유리한 쪽으로 기울여서 궁극적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잡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운동이 사회를 변형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된다면, 운동은 또한 공통적인 것을 장악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부를 재편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다르게”라는 말은, 자유를 (평등 없이우파의 개념으로 제시하고 평등을 (자유 없이좌파의 제안으로 제시하는 위선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과 행복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은 권력을 잡음으로써 차이와 다원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르게”는 또한 다중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정체성들을 그리고 권력의 중앙집중성을 탈신비화할 독립적이고 비주권적인(nonsovereign) 제도들을 산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권을 물리치기 위해 권력에 맞서 전복적 투쟁을 행하는 것, 이것이 저 “다르게”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중이 부를 재전유하는 데로 이르는 길을 연다. 공통적인 것에 뿌리를 둔 길이다.

새 군주가 지평 위로 출현하고 있다. 다중의 열정에서 태어난 군주이다. 부패한 정책에 대한 분노,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끔찍한 수준에 대한 의분, 지구와 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고 느낀다. 분노와 의분은 결과를 낳지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절망이나 체념으로 바뀐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군주란 자유와 평등의 길, 모두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통적인 것을 모두의 손에 쥐어주는 과제를 제시하는 길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당 혹은 지도자들의 회의를 가리키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형태의 저항과 투쟁이 마디마디 이어져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군주는 일관된 배열로 움직이며 암묵적으로 위협을 담지하는 떼(swarm),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Assembly’(모이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함께 모이기와 정치적으로 함께 행동하기의 힘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붙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기에 대한 이론이라든가 모이기의 특수한 실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개념에 횡단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원칙들과 실천들의 광범한 그물망과 공명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사회운동에서 제도화된 평의회들에서 근대 정치의 입법의회들까지, 집회의 자유에서 노동조직에 핵심적인 연합의 자유까지, 종교 공동체들의 다양한 회중 형태들에서 새로운 주체성들을 구성하는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라는 철학적 개념까지. ‘모이기’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을 인식하는 렌즈이다.

이 책의 여러 지점들에서 우리는 요구들(calls)과 응답들(responses)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음과 답이 아니다. 응답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식이 아니다. 요구들과 응답들은 서로 열려진 대화의 형태로 주고받는다. 고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타일의 설교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스타일은 전체 회중의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지는 않다. 설교 방식에서는 요구하는/부르는 사람들과 응답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엄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진술을 하고 회중이 ‘아멘’하고 긍정하며 더 진행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역할이 평등하며 서로 교체될 수 있는 더 온전한 형태의 참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더 부합되는 것은 19세기에 상선들에서 흔했던 뱃노래들과 같은 부르고 화답하는 노동요들이다. 노래들은 시간을 보내고 노동을 동기화하는 데 유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하게 복종하는 노동요들도 딱 맞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볼 때 우리에게 더 영감을 주는 것은 농장의 밭에서 노예들이 부르는 <호, 에마, 호>(“Hoe, Emma, Hoe”) 같은 제목의 노래들이다. 서아프리카 음악 전통들에서 파생된 이 노예 노래들은 다른 노래들처럼 노동의 리듬을 유지했지만 또한 때로는 노예들이 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를 암호화해서 넣었다. 주인의 채찍질을 피하거나 작업과정을 전복시키거나 심지어는 탈출을 계획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메시지를 바로 옆에 서있는 주인도 모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서로를 발견하고 모일 시간이다. 마키아벨리가 종종 말했듯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서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