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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열어젖힌 새로운 전망

 



지난주 있었던 운동가 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사망은 이미 힘든 시기에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레이버는 겨우 59살이었고··· 그는 분명히 그의 앞에 더 많은 눈부신 책들을 내놓을 것이었고··· 다수의 위기들이 합류하는 때에 전체 체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의 사유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인간 사회를 공부한 학생으로서, 그는 인간 조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역할을 해 왔던 사회 조직의 구조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지식을 적용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병적 측면들을 대담하게 비판했으며 그 다음에는 진지한 대안들을 제안하고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는 통상적으로 대학의 학자가 경력 향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급진적인 활동 때문에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충돌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한 일이다. 그의 지적 탁월함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예일대학교의 통보가 있었을 때 4,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그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는 싸움에서 패배했고 어쩔 수 없이 영국의 더 푸른 들판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결국 런던정경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금융을 현저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재구성한 그레이버의 2011년 역작인 『부채 그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관료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인 『규칙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 자본주의적 위계가 만드는 무의미한 직업들에 대해 논한 『쓸데없는 직업』(Bullshit Jobs)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Toward an Anthropological Theory of Value: The False Coin of Our Own Dreams)은 그의 덜 알려진 초기 연구서 중 하나인데, 나는 ‘시장가격 = 가치’라는, 가치를 간단한 문제로 간주하는 방대한 경제 문헌들 사이에서 이 책이 보기 드문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연구로 인해 마침내 그 나와 나의 동료들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의 활동과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레이버와 함께 2016년에 가치의 의미를 주제로 워크숍을 공동조직했다. 워크숍에서 나온 보고서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가치를 다시 상상하기: 돌봄 경제, 커먼즈, 사이버공간, 자연으로부터의 통찰.”

그레이버는 진보주의자들과 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그 밖의 사람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있어서 특히 불리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가격에 기반을 둔 통상적인 가치론을 넘어서는 진지하고 공유된 가치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워크숍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분명히 밝혔고 일련의 전도유망한 연구 방향들을 나열했다. 새로운 가치이론은 새로운 경제운동이 힘을 들여 다루어야 할 주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나와 그레이버의 유일한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내가 많은 출처로부터 지금껏 들어온 것을 확인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별난 박식가였고 정말이지 진국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과감한 아이디어들이 학문적 가식이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굳어지게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지적 탁월함, 개인적 용기, 그리고 부조리를 포착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친구들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움직이는 진앙(震央)이었다. 그들은 각각 그레이버의 광범위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그레이버는 주위에 불꽃을 튀기며 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아낌없이 보답했다. 오큐파이운동(Occupy movement)의 구호인 “우리는 99%다”가 그레이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증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단지 “99%”라는 문구를 생각해냈을 뿐이라고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큐파이운동 조직 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이)다”를 생각해냈으며, 이는 위원회들이 곧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이 커졌을 때 그레이버는 자신이 “무정부주의 인류학자”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국한되는 데 반대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정체성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가 틀에 박힌 역할과 평판의 폭정을 거부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살아있고, 호기심 있고, 탐구하고, 모험적인 인간보다 과연 무엇이 더 만족스럽고 생산적이겠는가?

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책에서 이토록 기민한 판단과 신랄한 논평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부채(負債)에 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억한다. “나에게는 다음이 바로 부채가 가진 도덕적으로 사악한 측면이다. 즉 금융의 명령이 계속해서 우리 모두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순히 돈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약탈자와 같게 만드는 방식이다.”

또는 “세상의 궁극적인 숨겨진 진실은 세상이 우리가 만드는 무언가라는 점, 그리고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라는 점이다.”

또는 “누군가가 ‘자유시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때마다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좋은 생각이다. 그는 절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그레이버에 대한 논평이 있는 여러 곳에 쓰여있는 것의 많은 부분을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레이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뉴욕타임즈 부고 기사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가디언지에 쓴 논평을 읽어 보길 바란다.

나는 그레이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그의 깊고 정묘한 학식을 적용했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독창적인 경로들을 제안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별난 상상력과 진지한 목적을 섞어 항상 새로운 운동 전략을 세웠다. 진정성, 진지한 사고, 개인적인 아량 그리고 해학을 가지고 인간의 곤경에 대응하는 것보다 결국 무엇이 더 가치 있을 수 있겠는가?




쓰레기 경제학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에서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을 다룬 부분을 몇 개 발취하여 그 내용을 옮기거나 정리한 것이다.

[서언 : 갈림길에 선 경제와 경제이론]

우리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시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들과 증권소유자들을 구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부들이 구제금융과 ‘양적 완화’에 수조 달러를 지출하여 거대 채권자들과 투기자들을 악성 대출과 도박으로 손해를 입을 처지에서 구해주었지만, 공공 및 민영 기반시설은 붕괴되도록 방치되었고 중위임금(median wage, 근로자 임금 중간값)은 하강하고 있다. 연금 저축은 거덜이 났고 사회보장을 삭감하는 압박이 일고 있다.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이 이 모든 것의 커버스토리이다. 이 쓰레기 경제학은 자신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금융세력의 후원을 받아 소득과 부를 상층부에 몰아주는 식으로 재분배하며 19세기 고전경제학자들과 진보 시대(Progressive Era, 1890-1920)의 개혁가들이 주장한 정책들을 전도시키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진보적 과세는커녕 1%가 아니라 99%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 효과는 중산층을 부채에 빠뜨리면서 경제로부터 화폐가 빨려나가 1%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생기는 긴축 상태가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을 사유화하는 데 구실로 사용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이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이 정부의 제대로 된 기능들을 운영하기 위한 조세기반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부채에 묶인 지방 및 일국 정부들은 채권자들에게 공공 기반시설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유화의 핑계는 이것이 기본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넘겨진 공공 기반시설은 새로운 소유주들이 독점 가격을 매길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제공 가능한 기본 서비스의 감소를 낳았다. 미국에서 강제적으로 사유화된 오바마케어(Obamacare)는 가구들의 예산을 쥐어짜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 영국에서는 사유화된 철도와 물이 가장 심한 사례이다.

오늘날 사회는 봉건제의 유산과 귀족들·은행업자들·독점가들의 세습적 특권들로부터 해방되어 약속된 풍요로운 여가 경제로 나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금융 엘리트들은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유서 깊은 ‘공짜 점심’(불로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쓰레기 경제학’을 장려하고 있다. 그들이 경제 일반에 창출하는 부채 간접비용은 한 세기 전에는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금융 계층은 빚을 지는 것이 마치 자산 가격을 부풀림으로써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양 미화했다. 임금, 이윤, 지대(임대료)는 기하학적으로 늘고 있는 이자를 지불하는 데로 들어간다. 한편 국가 통계는 사람들의 주의를, 부채 서비스가 어떻게 가구 및 사업 소득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로부터 다른 데로 돌린다.

그 결과 나오는 금융 긴축 상태가 야기하는 고통은 결코 자연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시장’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의 이러한 전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이중어(Doublespeak)의 새로운 어휘를 통해 장려된다.[오웰의 『1984년』에서 ‘Newspeak’(신어)는 가상의 초국가 오세아니아Oceania의 공식 언어이다. ‘doublethink’(이중사고)와 합하여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이중사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다. ―정리자] 예를 들어 ‘개혁’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용되는 바로는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중산층을 창출하는 것을 촉진했던 진보 시대의 개혁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이 진보적 과세, (기본적인 경제적 서비스 비용을 낮추기 위한) 공공 기반시설 지출, 뉴딜 및 기타 (화폐와 금융을 약탈적 독점이 아니라 공공 유틸리티로 만드는) 입법이라는 점은 잊혀졌다.

더 현실에 기반을 둔 분석과 정책입안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 책은 경제학을 (그 어휘와 기본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온전한 학문분야로서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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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발췌 정리1]

「사기로서의 경제학」(“Economics as Fraud”)을 쓴 이래 나[허드슨]는 현실을 다루는 경제학과 ‘쓰레기 경제학’ 사이의 차이가 훨씬 광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글 「경제학 방법론은 이데올로기이며, 정책을 좌우한다」(“Economic Methodology is Ideology, and Dictates Policy”)는 어떻게 방법론이 내용을 결정하는지를 설명한다. 방법론이 오늘날의 주류가 규정하는 범위, 수학, 그리고 심지어는 통계조차도 만들어낸다. 쓰레기 경제학의 본질은 ‘경제’를 ‘시장’의 관점에서만 협소하게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상유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경제모델들은 오늘날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에서 부채가 가져오는 정치적·환경적·법적 파급효과들을 배제한다.

[기타 발췌 정리2]

쓰레기 경제학과 이 경제학이 사용하는 완곡어법 어휘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원인으로부터 (따라서 필요한 치유책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사고의 도구들을 제한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령 낙수 이론은 현실을 숨기는 어휘로 짠 외투로 자산소득자의 기생적 존재를 가린다. 많은 채무자들의 삶은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의 경제적 화신에 의해 장악되는 듯하다. 정치가들은 이주민들 또는 다른 소수민족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로비스트들은 임금노동자들과 중산층에게 그들이 빚에 구속된 상태에 있는 것은 높은 주택비용, 모기지에 의해 금융을 제공받는 교육 및 생활, 학자금 융자, 신용카드 빚 때문이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1%에게 높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업체들을 ‘과도하게 규제한다’(특히 맑은 공기, 건강한 식품, 정직한 회계를 증진하기 위한 규제)는 비난이 정부에게 가해진다.

[기타 발췌 정리3]

기만을 핵심으로 하는 ‘쓰레기 경제학’은 진보 시대의 실질적인 개혁을 전도시켜 신자유주의적 협정을 법, 과제, 무역규칙에 대한 ‘개혁’으로서 내세운다. 이른바 ‘전문가들’(기업의 로비스트들)은 경제를 민주적 정부의 손으로부터 빼내서 세계의 금융 중심들에 안겨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고 그에 대한 합리적 대안은 없는 양 진보를 재정의한다. 이 이데올로기적인 신냉전(New Cold War)은 미국의 통제 아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의해 집행된다. 월가와 그 위성(외곽) 금융기관들을 위하지 않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비(非)자유로 가는 길을, ‘타자’의 길을 좇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1세기 전에는 진보로 생각되었던 것을 전도시킨 것은 자유의 희화화이며 저열한 거짓말이다.

[기타 발췌 정리4 : ‘쓰레기 경제학항목의 설명]

‘쓰레기 경제학’이란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착취적인 제로섬 자산소득사냥 행위로서 서술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증진시키는 홍보활동을 가리킨다. 쓰레기 경제학은 자산소득자들(rentiers)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평행우주에 적절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공상과학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나 희곡에는 일관되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이 유사과학의 기준은 단지 그 전제들의 내적 일관성이지 세계의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아니다. 많은 가장 칭송받는 경제학자들은 가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해 선험적인 공리들로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금융 포퓰리즘의 ‘낙수’ 전략은, 상위 1%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나머지 99%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려면 생산적 활동과 약탈 행동을 구분하는 자산소득(rent, 금리, 임대료, 지대)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카고학파의 ‘합리적 시장’ 이론이나 래퍼 곡선(Laffer Curve), 한계효용이론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은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장기적인 것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경제의 큰 그림을 무시한다. 부채는 나중보다는 지금 소비하고 싶어 하는 성급한 소비자들이, 또는 장기적인 자본투자를 위해 차입함으로서 이윤을 만들어내려는 사업가들이 맺는 계약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준거틀에는 하나의 경기 주기에서 다음 주기로 이전되는 부채의 상승하는 총액을 분석할 여지가 없다. 공공 기반시설 지출 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정부 차입은 단지 경제적 이익 없는 조세로서, 경제에 짐이 될 뿐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정부 지출은 단지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사업체와 가구들에게 기반시설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어 주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건전한 화폐’는 정부가 아니라 은행들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제들의 목표는 화폐 정책과 주류 경제사상을 장악하여 그것을 계급 전쟁(99%와의 싸움)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류가 반복되는데도 성공이 널리 이루어진다면 그 뒤에는 항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가장 넓게 보면 (맑스가 말했듯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 이제 더 이상 이런 혹은 저런 정리(theorem)가 참인가 아닌가를 묻지 않고, 자본에 유리한가 해로운가, 편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만을 묻는다···. 사심 없는 탐구자 대신에 고용된 논객들이 들어섰다.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에 현재의 상태를 옹호하려는 흑심과 사악한 의도가 들어섰다. ”[원주: Marx, “Afterword” to the 2nd German edition of Capital (Vol. I, [1873], London, 1954), p.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