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 운동


  • 저자  :  정남영
  • 설명 : 2017년 5월 20일에 있었던 한국비평이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입니다. 이 발표 원고는 완결된 글이 아니라, 시간 절약을 위해 그대로 죽 읽으려고 작성된 스크립트 같은 글입니다. (물론 즉흥적인 생략·변경·보완은 가능하겠지요.) 각주에 넣은 긴 인용들은 발제 시간에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읽는 이가 참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삶형태를 위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 새로운 삶형태를 ‘대안근대’라는 이름과 연관시킨다면 (다른 여러 이름들이 가능합니다) ‘근대’가 어떤 형태의 삶형태를 나타내는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는 가장 간결하게는 자본(시장)과 국가의 이두체제가 지배하는 삶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안근대로의 이행이란 자본과 국가가 부과하는 삶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현하기에는 매우 힘든 엄청난 과제입니다. 근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극히 작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자본과 국가가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의 과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물론 옛 토대 위에서의 발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토대 자체의 발전 또한 있었다. 이 토대 자체의 최고의 발전(그 자기변형의 정점에서 피는 꽃, 그러나 항상 이 토대, 이 식물의 꽃이며, 따라서 꽃이 핀 후에는 그 결과로 시든다)은 그 토대 자체가 생산력의 최고의 발전과, 따라서 개인들의 가장 풍부한 발전과 결합될 수 있는 형태로 완결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더 이상의 발전은 쇠퇴로서 나타나며 새 토대에서 새 발전이 시작되는 것이다.((Marx, Karl,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540-41. 앞으로 이 책의 제목은 GR로 줄입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역사적으로 여러 단계의 변형을 거친 것이 사실이지만,((맑스도 이 저작의 여러 곳에서 장벽을 계속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의 능력을 지적합니다.)) 이 이름을 더는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존재하며 이 변형의 조건을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가 만들어놓는다는 것이 맑스의 요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이런 취지의 대목은 이 저작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맑스는 “새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GR, p. 706. 이 저작에서 ‘사회적 개인’이 등장하는 다른 대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들을 지배하는 자립적인 권력이 된 개인들의 사회적 상호관계는 자연력이나 우연으로,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이해되든 그 출발점이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의 필연적 결과이다.”(197) “일단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면 생산과 부의 초석이 되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지출되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에 의한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회적 존재인 덕분에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능력 즉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GR, 706) “일단 그렇게 되면, 그리하여 처분 가능한 시간이 대립적 실존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한편으로  필요노동 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를 척도로 삼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매우 급속히 이루어져서 (비록 이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적으로 마련되지만) 모두의 처분 가능한 시간이 증가할 것이다. 실질적 부는 모든 개인들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GR,708)))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형상의 변화를 줄곧 추적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입니다.(나중에는 하트와 함께) 네그리는 러시아 혁명기의 ‘전문적 노동자’에서 뉴딜 시기의 ‘대중적 노동자’―이 당시를 그는 ‘계획자 국가’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를 거쳐 ‘사회적 노동자’(자본이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된 시기) 형상을 포착해 냈으며, 정보혁명 이후 이른바 탈근대에서는 (개별적으로는 새로이 발생한 ‘인지 노동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가 생산의 네트워크들에서 생산을 하고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생산’과 그 생산자들인 다중(아직은 잠재적인 다중)의 형상을 포착합니다. 이 생산자로서의 다중은 맑스가 말한 ‘사회적 개인’에 매우 근접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맑스의 추론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게도((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분석한 책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현존과 함께 대안근대로 나아갈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 상응하는 거버넌스의 수립을 통한 대안근대로의 이행을 사유합니다. 네그리·하트는 새 책 Assembly에서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를 “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릅니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pp. 274-280.)))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오늘 소개할 것은 네그리와 하트의 대안근대 이행론이 아닙니다. 이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언급한 것은 이제부터 소개할 커먼즈 운동(commons movement)이 말하는 ‘커먼즈 이행’(commons transition)을 설명할 틀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새 책에서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을 언급했다면, 그들이 이 가운데 어디에 이 운동을 배치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새 책에서는 ‘커머닝’(commoning)에 대한 언급은 몇 군데 있어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물론 ‘커머너’(commoner)에 대한 언급은 Declaration(20)의 마지막 장 “Next : Event of the Commoner”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커먼즈의 창출 혹은 보존이라는 것만 놓고 보자면 ①에 위치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즉 기존의 제도들―의 외부에 구축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네그리·하트가 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사회운동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축소판으로 수립하는 것(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창출하는 소규모의 공동체)이긴 하지만요.((커먼즈 활동가인 볼리어도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애매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커먼즈 운동이 사회운동과 다르다고 합니다. David Bollier,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 http://minamjah.tistory.com/122))

그런데 사실 현재의 커먼즈 운동은 커머닝이나 커먼즈의 구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를 보면 위의 ‘세 경로’에 담긴 네그리·하트의 것에 못지않은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포부와 계획을 커먼즈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2P 재단의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의 결실로 작성된 이 책자(혹은 팸플릿?)는 커먼즈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견해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유력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소개하는 것이 이 발표의 주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주된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커먼즈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커먼즈와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정의 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의보다 역사가 먼저 오는 것이 커먼즈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커먼즈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으며 이후 그 우세함은 잃었지만 전(前)자본주의 시대까지 중요한 기능을 잃지 않았던 커먼즈는 산업자본주의에 들어와서 실질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P2P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다시 태어났고 전지구적 수준으로 그 규모가 확대될 수 있게 됩니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 p.12 참조. 이 책자는 이후 ’Primer’로 줄임.))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2009년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입니다.((분야가 다르지만 비교적 초기의 기여자 한 사람을 더 들자면 ‘커먼즈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naugh)일 것입니다.)) 오스트롬은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전통적 커먼즈는 규모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커먼즈 패러다임이 일반화되기는 힘들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커먼즈의 재탄생)이 이 비판을 시원하게 날려버립니다. 이후로 커먼즈 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과 결합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 Principles for the Transition to Postcapitalism, Zed Books Kindle Edition, 2017, Kindle Locations 334-336.)))

이로써 커먼즈 개념은 예전의 공유지와 같은 것이 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운동이 발전하면서 개념도 따라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단일한 커먼즈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채택되는 정의는 커먼즈를 ① 공유된 자원 ② 공동체 ③ 자원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운영하기(커머닝) 위한 일단의 규칙들을 모두 합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커먼즈는 물론 모든 종류의 물리적·무형적 자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커먼즈는 더 정확하게는 뚜렷한 공동체를, 자원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는 일단의 사회적 관행들·가치들·규범들과 결합시키는 패러다임으로서 정의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커먼즈는 ‘자원 + 공동체 + 일단의 사회적 프로토콜들’이다. 이 셋은 통합된, 상호 연관된 전체를 이룬다.” (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p. 15. [한국어본] 배수현 옮김,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갈무리, 2015.)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Kindle Location 351.))) (발표자도 이 유력한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공유지’라든가 ‘공유재/공통재/공통의 부’라고 옮기지 않고 ‘커먼즈’로 음역합니다.) 커먼즈의 생산양식을 따로 부각시켜 ‘P2P 생산’(혹은  ‘피어peer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커먼즈’를 추가하여 더 길게 쓰면 ‘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가 됩니다.((CBPP는 요하이 벤클러(Yohai Benkler)의 용어입니다.))

커먼즈는 노동조합처럼 어디서나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자원에 따라, 관리 규칙에 따라, 위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뉠 수 있으며 그 결과 극히 다양한 커먼즈가 가능합니다. 볼리어는 “커먼즈들의 은하계”(“a galaxy of commons”)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다시 커먼즈 이행이 제시하는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로 돌아갑시다.

 

① 엑서더스

커먼즈와 P2P의 세계는 자본 및 국가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자본 및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으로, 탈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먼즈 활동가들은 커먼즈를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출발점에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전이(phase transition)[대안근대로의 이행을 말합니다―인용자]의 전선에서 역사적 주체의 근간을 형성할 점증하는 수의 커머너들이 예시적인((예시적인(prefigurative): 미래를 미리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존함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데이터가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한 출발이다.”((Primer, P. 47)) 다시 발견된 혹은 더욱 강력하게 복원된 출발점입니다.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변화되었을 뿐 사라졌던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안근대의 출발점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 본 맑스의 견해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맑스는 현재와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상하지 못했으면서도 커먼즈의 현재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the old Germanic system”)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557.)) 커먼즈를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가장 새로운 것으로 본 것이죠. 또 있습니다.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고대적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혁명적 경향이 있다는 의혹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는 ‘고대적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는 ‘고대적’(archaisch)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엑서더스의 참된 의미는 출발점에 새로 서기일지도 모릅니다.

 

② 개혁

P2P 생산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커먼즈가 주변이 아니라 진정한 중심의 새로운 출발점이더라도 현재와 같이 아직은 자본(시장) 및 국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 둘과 관계를 끊고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커먼즈 활동가들이 구상하고 실천하는, 자본 및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개혁적’입니다. 커먼즈는 사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를 주변에서 돕는 제도들과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제도들이 국가와 자본의 해로운 측면은 걸러내고 유용한 측면은 남깁니다. 국가로부터 관료제를 제거하고 한때 복지국가가 담지했던 민중과의 ‘유대’(solidarity)를 보존합니다. 그래서 이 ‘유대’의 역할을 하는 ‘for benefit association’(지원 단체)을 커먼즈 주변에 제도화합니다. (주로 재단의 형태를 띱니다.)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커먼즈 이행 운동은 기존의 국가―“시장 국가”―를 커먼즈와 유대를 맺은 ‘파트너 국가’로 바꾸려 합니다.((실제 사례가 이미 존재합니다. 파트너 국가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는 ‘어번 커먼즈의 돌봄과 재활성화를 위한 볼로냐 조례’(Bologna Regulation for the Care and Regeneration of the Urban Commons)입니다. 그 핵심은 시민이 기안을 해서 제안하면, 시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례로 스코틀랜드 정부가 최근에 공유지들을 되사서 커머너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장점을 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 이행은 복지국가의 ‘재분배’를 모델로 삼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선분배(pre-distribution)를 통한 능력양성(empowerment)을 중심 원리로 합니다.((이 ‘능력양성’의 측면이 복지국가의 틀로서는 풀 수 없는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희한하게도 맑스가 대안근대의 분배방식에 대해서 말한 것과 통합니다.

“둘째 경우[자본주의 다음의 생산방식을 말합니다―인용자]에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 즉 공동체적 생산―생산의 토대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서 정립된다. 그래서 그가 창조하거나 그 창조작업을 돕는 생산물의 특수한 물질적 형상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의 노동으로 산 것은 특정의 특수한 생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에의 특정의 참여이다. 따라서 그는 교환해야 할 특수한 생산물이 없다. 자신의 생산물은 교환가치가 아니다. 생산물은 각자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특수한 형태[즉 화폐―인용자]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없다. 교환가치의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되는 분업 대신에 각자가 공동체적 소비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의 조직화가 발생한다.”((GR, 172.))

이렇게 선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가 점점 약화되는” 그러한 국가일 것이라는 말((Primer, p.35))에서도  국가에 대한 커먼즈 활동가들의 인식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는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세세히 분석하고 비판했던 근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데,((“The real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civil classes took place under the absolute monarchy. The bureaucracy asserted the idea of unity over against the various states within the state. Nevertheless, even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the social difference of the classes remained a political difference, political within and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Only the French Revolution completed the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social classes, in other words, made the class distinctions of civil society into merely social distinctions, pertaining to private life but meaningless in political life. With that, the separation of political life and civil society was completed.” (Karl Marx,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ch05.htm) 이러한 분리를 잇는 기능을 하는 것이 대의(代議)정치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머리를 몸에 잇는다고 시신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온전한 몸이 탄생해야 합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 분리의 극복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본에 대한 태도를 알아봅시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생산성과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유한한 자원―석유, 물, 광물, 땅 속의 영양소 등―을 마치 그것이 무한한 양 추출해서 시장 가치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무한한 자원―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비물질적 재화―에는 인공적으로 희소성((희소성(scarcity)은 자본의 가치화의 바탕이 되는 전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무형적인 디지털 재화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자본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을 전제하여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혁신에 법적·기술적 족쇄를 채우고 있습니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본의 착취 방식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extraction)이라는 방식입니다.((네그리·하트도 새 책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주된 방식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대하여 두 절 정도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문의 관련 대목입니다. 옮기지 않고 그대로 소개합니다. “Capitalist accumulation today functions increasingly through the extraction of the common, through enormous oil and gas operations, huge mining enterprises, and monocultural agriculture but also by extracting the value produced in social forms of the common, such as the generation of knowledges, social cooperation, cultural products, and the like. Finance stands at the head of these processes of extraction, which are equally destructive of the earth and the social ecosystems that they capture.” p.xv.)) 커먼즈 이행 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그 추출적 성격을 제거하고 커먼즈의 삶에 복무하는 ‘친구로서의 자본’(capital as a friend)으로 변형시키려 합니다.((‘친구로서의 자본’ 혹은 ‘생성적  형태의 자본’(generative forms of capital)과 비슷한 취지로 네그리·하트는 Assembly에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말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화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투여되는 화폐입니다. “In chapter 15 we will argue that this critique should lead us not to oppose money as such but instead to invent an alternative to capitalist money, that is, an alternative social technology for institutionalizing new social relations—a money of the common.” p.224)) 이런 경제를 ‘생성적’(generative)이라고 부릅니다.((생성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열린 협동조합주의’(open cooperativism)입니다. 이 경제를 양성하는 여섯 개의 전략이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① 풍요(↔희소성)에 기반을 둔 지식의 공유. ② 기여의 다양성 인정(↔ 분업, 전문화). ‘open value accounting’ 사용. ③ 공정하고 호혜적인 분배 : Copyleft licensing →CopyFair licensing으로. ④ 지속 가능성을 위한 오픈 디자인. 자동차의 사례: https://www.osvehicle.com/editselfdrivingcar/ ⑤ 폐기물의 감소. 자본의 요구가 아니라 실질적 욕구에 맞추어진 네트워크화된 생산. ⑥ 물리적 기반시설을 상호화하기(공동이용).)) 커먼즈 주변에 이런 기능을 하도록 설치된 것이 ‘commons-oriented entrepreneurial coalition’(커먼즈에 복무하는 기업가들의 연합)입니다. 이 기업가들은 커먼즈에서 생산된 가치들을 가지고 상업적 활동을 하지만 ‘커먼즈의 축적’에 우선적으로 복무해야 합니다. 시장에 물건을 팔 때에도 사람과 환경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커먼즈와 그 주변에 이렇게 설치된 제도들을 합해서 ‘커먼즈 생태계’(commons eco-system)라고 부릅니다.((Primer, pp. 19-22에서 이 생태계의 사례들인 Enspiral, Sensorica, Farm Hack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볼 수 있습니다.))

 

③ 헤게모니

커먼즈 생태계가 핵심적 요소이지만,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것의 구축에만 시야나 활동을 국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현실적으로 가하는 제한과 맞서기 위해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 운동은 정치적 장에 관여해야 합니다. 복지국가 모델의 최선의 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창조와 공동체에 의해 조직된 실천들을 촉진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정치’란 대의정치만이 아니라((스페인의 ‘도시자치연합’(municipal coalitions)의 경우 당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기존의 정당들을 포용하지만 그것들을 수직적인 당 구조보다는 다중이해관계자적(multi-stakeholder) 구조들로 전환시킵니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해서 담론을 여성화한 것도 특징적입니다. Primer, pp.28-29 참조.))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 즉 시민들이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권리들도 가리킵니다.) 이는 대안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분쇄합니다. 균형 잡힌 정치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시적 행동노선과 제도적 행동노선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절에서 보겠지만, 다행히도 이러한 정치적 접근법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Primer, p.24))

정치 관여에의 궁극적 목표는 ‘체제의 변화’(systemic change)입니다. “정책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 및 사람들의 욕구를 시장이나 관료제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체제로 이행하는 것입니다.((Primer, p.45)) 이를 위해 모든 수준―도시, 일국, 지역, 지구 전체―에서 대안적인 거버넌스를,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구축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Assembly of the Commons’가 그 계획에 속합니다. (실제로 2016년 11월에 첫 ‘European Assembly of the Commons’가 열린 바 있습니다.)((커먼즈들로 이루어진 정치체제를 ‘federation of the commons’라고 부른 사례도 있습니다. “A more fundamental question, however, is normative: what are our values, and how does this influence what futures we consider desirable? From the author’s vantage point, with respect to the value of the fullest expression of human empowerment, scenario four is clearly the most desirable. In this fourth scenario, a federation of the commons, citizens and communities are actively engaged in shaping the fabric of their lives and societies through a process of ‘deep democracy’ (Ramos, 2012). But others may find greater affinity with a different scenario. Paraphrasing Ashis Nandy (1992), one person’s utopia may be another’s tyranny.” Jose M. Ramos, The Futures of Power in the Network Era, http://eprints.qut.edu.au/62967/1/A05.pdf))

이렇듯 커먼즈 이행론은 디오니소스의 세 얼굴을 나름대로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것은 주로 Primer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주석에서 소개한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견해는 이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있다는 판단이나 커먼즈 고유의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대안근대로의 변형에서 커먼즈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생각 등은 오늘 소개한 이행론과 근본적으로 통합니다. 자기 나름의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제시하는 (발표자도 접하지 못한) 이론가들이 더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함께 커먼즈 운동은 그 실천과 이론이 더욱 더 풍성하게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이행만이 대안근대로 가는 유일한 경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커먼즈 중심이든 아니든) 자본과 국가의 이두체제를 벗어나서 자유로움, 공정함, 지속 가능성이 실현되는 삶, 정치·경제·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삶, 인간과 만물이 서로 동지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노력은 근대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영속화하려는 세력과 권력이나 재산을 놓고 투쟁하지 않습니다. 권력과 재산은 근대적 삶형태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아무리 잘 나누어도 근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안근대로 나아가는 노력은 근대적 삶형태에 다른 삶형태를 맞세우는 운동입니다. 이 두 삶형태의 대립은 전체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지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두 개의 상이한 전체―근대적 삶형태와 대안근대적 삶형태―의 대립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안근대로의 이행 혹은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인류세’(anthropocene)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이런 상태를 만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기에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경제학자도 있습니다.((데 안젤리스가 Omnia Sunt Communia,에서 원용한 것으로서 Moore, J. W. (2014). The Capitalocene, Part I: On the Nature and Origins of Our Ecological Crisis. Fernand Braudel Center, Binghamton University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주도해온 ‘원흉’이 미국과 영국이므로 인류세는 사실 ‘영미세’(anglocene)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역사가도 있습니다.((Peter Linebaugh, “Omnia Sunt Communia: May Day 2017”, http://www.counterpunch.org/2017/04/28/omnia-sunt-communia-may-day-2017/ 참조.))

이제 현재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넘어 이 ‘-세’(-cene)를 새롭게 바꿀 때입니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을 (잘 하든 못 하든) 하듯이, 이 일에 착수해야 이 일을 (잘 하든 못하든)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한 노력들이 바로 이러한 착수에의 자극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보다는 ‘무슨 일’에서 성공/실패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일은 생존하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일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일입니다. ♣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

선(先)분배(pre-distribution)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네그리와 하트의 새 책 Assembly 서문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원문 :  Assembly: Heretical Thought (2017.0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새로 나온 책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embly: Heretical Thought의 서문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종종 소개할 생각이다.

서문의 소개에 앞서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평해본다..

총평

이전 저작 『공통체』(Commonwealth)에서의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 단순한 반복 즉 중복이 없이, 실천적인 방향으로 더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발전이란 ① 더 깊어진 구체화 혹은 더 자세한 분석 혹은 더 정밀하게 다듬기라고 할 수 있는 것 이외에 ② 새로운 제안도 포함된다. 굵직한 논점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십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조직과 제도에 대한 포기(“수평주의의 물신화”)로 이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의 전도(the inversion of the strategy and tactics)를 제안한다.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전도된다는 것인데, 한국의 ‘촛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다.

2) “constituent power”에 대한 논의를 다시 다듬어서 그것이 주권(sovereignty)―‘하나’로의 통합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힘이어야 함을, 그래서 “constituent consistency”(들뢰즈·가따리 개념의 차용)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take power, but differently”라는 말이 나타내는 바이다.

3)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협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활동의 차원으로, 즉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문제를 아래에서 보아야(from below) 함을 강조한다.

4) 금융과 화폐의 문제를 더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상품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르는 가치결정이 무너지고 그 대신 파생상품들”(derivatives)의 거래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자본의 가치의 척도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금융과 화폐를 자세히 분석하는 이유는 자본으로서의 측면 말고 화폐가 가진 다른 측면 즉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능력을 살려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발명하는 실천적인 목적에 있다.

5)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이 더 분명히, 따라서 더 간명하게 제시된다. 공적인 것이 사실은 사적인 것을 가리고 보호하는 도구로 등장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의 “주권적” 성격을 밝힌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은 공통적인 것과 사유재산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공통적인 것은 재산이 아니다”) 책 전체에 걸쳐서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매우 확연하게, 어찌 보면 이전보다 더 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개념화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6) 사회적 투쟁의 형태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직화의 유형으로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가 제시되고 그 무기로서 이전의 총파업의 새로운 형태―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맞는 형태―인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 제시된다. 물론 이는 모두 출발점들이지 그 자체로 충분한 대안들이 아니다.

7) 자본가들이 예전에 하던 기능―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금융의 형태로 생산과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본이 하지 않는 기능―인 생산 요소들의 결합을 이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음을 다중의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8) 무기에 대한 생각을 더 정밀하게 :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적이며 방어에의 적용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진정한 방어는 무기의 효율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고 주로 공동체의 힘에 의존한다. ‘정치적 힘은 총에서 생긴다’라는 유명한 말은 순서와 우선성을 잘못 말한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정치적 힘에서,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자라나올 것이다.”(270)

최종적으로 네그리·하트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① 엑서더스―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기존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거버넌스의 방향으로 개혁을 변형시키려고 노력

③ 헤게모니 전략―“constituent consistency”를 구성하여 새로운 사회를 제도화

로 제시한다.

 

Assembly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서문

 

여기서 시는 봉기에 버금간다.

― 에메 쎄제르

 

사회운동이 불의와 지배에 맞서 치솟았다가 전(全)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잠깐 장악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지기―이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회운동들은 독재자 개인들을 쓰러뜨리는 경우에도 새로운 대안들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사회운동들은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그 급진적 포부를 버리고 기존 제도에 흡수되었거나 강력한 억압에 패배 당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을 나타내는 운동들이 지속적인 변화를 성취하고 못했고, 새로운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세계 전역에서 우익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더 긴급해진다. 이 세력은 정상적 법절차를 정지키시고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와해시키며 광범한 감시활동을 하고 공포 분위기를 창출하며 인종 혹은 종교적 순수성을 사회적 귀속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이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추방의 위협을 가한다. 사람들은 이 우익 정부들의 행동에 항의한다. 이렇게 항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항의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 운동은 지속적인 사회 변형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행국면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치적 전제들 일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how to take power)를 묻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힘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을 잡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민주적 사회를 성취해야 하며, 결정적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을 산출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들은 리더십을 더러운 단어로 취급한다. 그럴 이유가 많다. 50년 이상 동안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수직적 형태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족쇄가 된다고 옳게 비판해왔다. 전위가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이 현실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더십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 지속적인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화의 거부로 전환되는 것, 수직성을 추방한 결과로 수평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리더 없는 운동도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주체성의 산출을 조직화해야 한다.

리더십의 핵심적 기능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성취할 새로운 메커니즘과 실천을 발명해야 한다. 리더십의 두 핵심적 기능은 의사결정과 ‘모이기’(assembly)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관에는 리더들이 멀리서 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이 다중과 연결되어 다중의 의지와 욕망을 나타내야 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일련의 변칙들을 낳는다. 다중을 모으는 리더들의 능력도 이런 모순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는 정치적 기업가가 되어야 하는데도 모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리더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민주적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형용모순으로 나타난다.

의사결정과 모이기는 중앙집중화된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중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함께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다. 만일 리더들이 이런 맥락에서 아직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그들이 생산적 다중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십의 제거가 아니라 수평적 운동과 수직적 리더십이라는 두 극의 관계의 전도이다.

자유와 평등의 조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함께 생산하는 것이 오늘날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로 가는 경로이다. [정치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의 결합]

정치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쳇바퀴를 돌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숨겨진 거처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직화, 효율성, 모이기, 의사결정의 문제들이 사회적 지형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만 우리는 영속적인 해결책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적 장들의 과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협력의 조건을 정하고 함께 의사결정하는 다중의 잠재력을, 사람들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연구함으로써만, 그 재질과 능력을 연구함으로써만 입증할 수 있다.

오늘날 생산은 이중적 의미에서 점점 더 사회적이 되고 있다. ① 협동과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들에서 점점 더 많이 생산 ② 생산의 결과가 상품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궁극적으로 사회 자체. 사회적 생산의 이 이중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재질과 능력이 양성되고 드러난다. 또한 여기서 다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들과 가장 심한 형태의 지배(domination)가 작동한다.(금융, 화폐, 신자유주의적 행정)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서의 핵심적 투쟁 하나는 공통적인 것즉 우리가 공유하고 함께 관리하는 지구의 부와 사회적 부를 놓고 벌어진다. 공통적인 것은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토대이자 주된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즉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하여 생산하고 우리가 생산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법이 두개 있다.

①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전유할 권리를 긍정한다. 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원칙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축적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의 추출(extraction)을 통해 기능한다. (석유 및 천연가스 추출, 거대한 채광, 단작 농업 +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태에서 생산된 가치―지식, 협력, 문화생산물 등―의 추출.) 금융이 이 추출과정의 꼭대기에 존재한다. 이 추출과정은 지구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회적 생태계를 파괴한다.② 다른 접근법은 다중은 이미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더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개방적인 채로 두려고 하고 부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이 입장에 서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변형하고 접근을 봉쇄하며 그 사용과 개발에 대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것이 미래의 생산성에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식에 더 많이 접근할수록, 더 많이 협력하고 소통할수록, 자원과 부를 더 공유할수록 더 생산적이다. 공통적인 것의 관리와 돌봄은 다중의 책임이며 이 사회적 능력은 자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게 상서롭지 못하다고 악마가 귀에 속삭인다. 신자유주의가 공통적인 것과 사회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흡수한 듯이 보이며, 화폐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상호관계와 세계와의 관계의 배타적 척도로 제시된다고 한다. 금융이 거의 모든 생산관계들을 지배하며, 생산관계를 전지구적 시장이라는 얼음물로 내던졌다고 한다. 악마는 계속해서 속삭인다. 정치적 역할의 전도도 기업가들이 과거에 자본가들이 자랑하던 시절과 같았다면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기업가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 자본가, 금융가, 펀드 매니저가 이제는 명령을 내리는 자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폐가 명령을 내리며 이들은 단지 가신들이고 행정가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미지의 바다를 누비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금융축적의 끊이지 않는 잔치를 주재하는 엉덩이 무거운 사제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힘도 재조직했다. 이례적인 폭력이 권력의 행사 안에 구조적으로 포함되었다. 경찰력은 빈자, 유색인, 비참한 사람들, 피착취자들을 사냥하는 민병처럼 되었으며 이에 상응하여 전쟁은 일국의 주권이나 국제법과는 무관한 전지구적 경찰력의 행사가 되었다. 예외의 정치로부터 모든 카리스마의 광택―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이 벗겨졌으며, 예외상태는 권력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불쌍한 기만당한 것들”이라고 우리의 악마는 결론짓는다. 힘있는 자가 반란자의 순진성에 대해 보내는 온갖 오만, 경멸, 생색의 태도를 지으면서.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다행히도 수많은 형태의 일상적 저항들이 있고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강력한 사회운동의 분출이 있다. 저들의 경멸 뒤에는 저항이 봉기(insurrection)로 발전하고 자기들이 통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권력은 결코 겉모습처럼 안전하거나 자기충족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들은 안다. 전능한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는 빈자와 종속민에게 겁을 주어 순종하게 하는 데 복무하는 우화일 뿐이다. 권력은 항상 힘의 관계이다. 더 정확하게는 많은 힘들의 관계이다. “종속은 지배와 함께 이원적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의 하나로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라나짓 구하 Ranajit Guha)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이 관계에 항상 관여하여 협상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갈등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존재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는 이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론이다―는 사회투쟁, 저항, 봉기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극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다수의 삶을 지배하면서 사회를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가치를 강탈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세계는 사회적 협력에 의해 구축되지만 지배계급에 의해 분할된 세계이다.

이렇듯 사회적 존재는 전체주의적 명령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일자’는 ‘둘’로 나뉘며(The One of power divides into Two) 존재론은 각자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상이한 관점들로 쪼개진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인식론적 분할 또한 나온다. 한편으로는 고정된 영속적 질서로 간주되어야 하는 진실의 추상적 긍정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에서 구축되는 아래로부터의 진실의 탐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종속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주체화즉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생산은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만들고 추구하는 힘이 진실의 표지(標識)이다. 주체화의 과정에서 진실과 윤리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리더층이 아직도 어떤 역할을 하려면 기업가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다중 내에서 ‘모이기’의 작동자가 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은 행복의 작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다중의 민주적 기업가정신/활동(a democratic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우리는 사회를, 공통적인 것을 다양한 형태로 생산하고 사용하는 광범한 이질적 주체성들 사이의 협력의 회로들로 볼 때에만,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상응하는 정치적 기업가정신의 강력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해방의 기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기업가정신의 덕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기업가 사회의 창출을 옹호하며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고 권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업가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영웅담이 공허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오늘날 주변에 기업가 활동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조직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을 발명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 그 사용, 그것에 대한 의사결정에의 참여를 위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업가정신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로 정치사상의 중심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개념들을 둘러싸고 투쟁하며 그 의미를 밝히거나 변형하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은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의 협력의 형태들과 다중의 정치세력으로서의 ‘모이기’ 사이를 연결하는 돌쩌귀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다른 저작에서 이미 이 프로젝트를 위한 경제적 주장 가운데 일부를 개진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단순화한 일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공통적인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고 있다. (2) 이에 발맞추어 노동이 변형되고 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은 협력, 사회적·과학적 지식, 돌봄, 사회적 관계의 창출에 점점 토대를 두고 있다. 협력관계를 활성화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은 자본가의 명령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자율을 부여받는 경향이 있다. (3) 노동은 또한 새로운 내포적(intensive) 관계들 및 생산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류의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디지털 알고리즘, “일반지성” 등―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하나의 과제는 다중이 사회적 생산의 필수적 수단인 고정자본 형태들을 재전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4)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은 대규모 산업에서의 노동의 착취에서 공통적인 것(지구와 사회적 노동)으로부터의 (대체로 금융 도구들을 통한) 가치추출로 이동하고 있다. 여기서 양적인 측면이 주된 측면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보면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이 가지는 질적 의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이후 새 단계, 즉 높은 수준의 자율협력산 노동의 커머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단계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이러한 생산양식과 노동력에서의 변형은 저항을 조직화하는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제 상황이 전도되어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자본으로부터 재전유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직화의 문제(그리고 수평적 운동의 수직화)가 여기에 공통적인 것의 “제헌화”(constitutionalization)의 문제와 함께 놓여있다. 사회적 투쟁과 노동자 투쟁의 목표로서, 또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형태의 제도화로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다중이 힘의 관계를 유리한 쪽으로 기울여서 궁극적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잡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운동이 사회를 변형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된다면, 운동은 또한 공통적인 것을 장악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부를 재편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다르게”라는 말은, 자유를 (평등 없이우파의 개념으로 제시하고 평등을 (자유 없이좌파의 제안으로 제시하는 위선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과 행복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은 권력을 잡음으로써 차이와 다원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르게”는 또한 다중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정체성들을 그리고 권력의 중앙집중성을 탈신비화할 독립적이고 비주권적인(nonsovereign) 제도들을 산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권을 물리치기 위해 권력에 맞서 전복적 투쟁을 행하는 것, 이것이 저 “다르게”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중이 부를 재전유하는 데로 이르는 길을 연다. 공통적인 것에 뿌리를 둔 길이다.

새 군주가 지평 위로 출현하고 있다. 다중의 열정에서 태어난 군주이다. 부패한 정책에 대한 분노,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끔찍한 수준에 대한 의분, 지구와 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고 느낀다. 분노와 의분은 결과를 낳지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절망이나 체념으로 바뀐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군주란 자유와 평등의 길, 모두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통적인 것을 모두의 손에 쥐어주는 과제를 제시하는 길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당 혹은 지도자들의 회의를 가리키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형태의 저항과 투쟁이 마디마디 이어져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군주는 일관된 배열로 움직이며 암묵적으로 위협을 담지하는 떼(swarm),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Assembly’(모이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함께 모이기와 정치적으로 함께 행동하기의 힘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붙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기에 대한 이론이라든가 모이기의 특수한 실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개념에 횡단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원칙들과 실천들의 광범한 그물망과 공명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사회운동에서 제도화된 평의회들에서 근대 정치의 입법의회들까지, 집회의 자유에서 노동조직에 핵심적인 연합의 자유까지, 종교 공동체들의 다양한 회중 형태들에서 새로운 주체성들을 구성하는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라는 철학적 개념까지. ‘모이기’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을 인식하는 렌즈이다.

이 책의 여러 지점들에서 우리는 요구들(calls)과 응답들(responses)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음과 답이 아니다. 응답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식이 아니다. 요구들과 응답들은 서로 열려진 대화의 형태로 주고받는다. 고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타일의 설교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스타일은 전체 회중의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지는 않다. 설교 방식에서는 요구하는/부르는 사람들과 응답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엄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진술을 하고 회중이 ‘아멘’하고 긍정하며 더 진행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역할이 평등하며 서로 교체될 수 있는 더 온전한 형태의 참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더 부합되는 것은 19세기에 상선들에서 흔했던 뱃노래들과 같은 부르고 화답하는 노동요들이다. 노래들은 시간을 보내고 노동을 동기화하는 데 유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하게 복종하는 노동요들도 딱 맞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볼 때 우리에게 더 영감을 주는 것은 농장의 밭에서 노예들이 부르는 <호, 에마, 호>(“Hoe, Emma, Hoe”) 같은 제목의 노래들이다. 서아프리카 음악 전통들에서 파생된 이 노예 노래들은 다른 노래들처럼 노동의 리듬을 유지했지만 또한 때로는 노예들이 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를 암호화해서 넣었다. 주인의 채찍질을 피하거나 작업과정을 전복시키거나 심지어는 탈출을 계획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메시지를 바로 옆에 서있는 주인도 모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서로를 발견하고 모일 시간이다. 마키아벨리가 종종 말했듯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서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