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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대한 맑스주의적 경험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http://www.euronomade.info/?p=4146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성철
  • 설명 : 이 글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2014년 12월 18일-19일, 프랑스 낭테르(Nanterre)에서 개최된 콜로키움 Colloque Marx-Foucault에서 발표한 글이다. 원래의 발표문은 이탈리어로 쓰여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었고 위의 원문 링크에서 세 가지 버전의 글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글의 다른 영어 버전은 맑스와 푸꼬에 관한 네그리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 Marx and Foucualt (Polity Press, 2017)에 실려있다.(Ch.16 ‘Marx after Foucault: The Subject Refound’)

1.

여기서 네그리는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con e dopo Foucault)에 맑스를 읽은 경험을 제시한다. 이는 물론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에 맑스를 읽는 것은 푸꼬 이전에 맑스를 읽는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역사적 주체화’의 과정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읽음으로써 새롭게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읽었나? [* 이 대목은 네그리의 것이 아니고 추정·보완해 넣은 것] 노동자계급을 고정적인 것(객관적인 것, 가변자본)으로 보고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자본(불변자본/고정자본)과 객관적인 자본의 논리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경우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일정한 한도(임금투쟁)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움직인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존재의 창출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삶형태의 변형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익의 분배를 놓고 다투는 문제가 된다.)

  A) 역사적 주체화

푸꼬의 직관과 결론의 토대 위에서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의 고도로 역사화된 어조와 문체가 유물론적 접근법과 깔끔하게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맑스의 역사적 저작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읽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의 개념들을 현재에 열어놓음으로써 그 개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계보학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푸꼬의 접근법은 계급투쟁의 주체화가 역사적 과정의 동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강조하게 해주었다. 이 주체화의 분석은 항상 갱신되고 역사적 과정에서 개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형의 규정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이나 목적론에서 벗어나서 푸꼬가 제안하는 틀을 택하면, 역사적 주체화는 인과론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지만 규정력을 가진 장치로 간주된다. 마끼아벨리의 경우처럼 우리를 위한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맑스 내부에도 이런 고정성을 허물고 계급의 주체화를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다.

①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

『자본』에서 맑스는 절대적 잉여 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을 노동일 축소를 향한 노동계급 투쟁과 관련짓는다. 이처럼 맑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적 차원, 계급의 특수한 주체화는, 노동자의 주체성의 변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생산 구조의 존재론적 변형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요컨대, 투쟁이 존재론적 변형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②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

맑스가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에 대해 분석할 때 이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가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 이행의 서술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가능한 다양한 형태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역사적 변형 속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그는 착취의 범주들의 항상적인 재편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틀에서 우리는 가령 노동계급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뉴팩처’에서 ‘대규모 산업’으로 이행하고 이제 산업 자본주의와 다소 사회화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노동계급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공고화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중’ 개념이 ‘산 노동’의 현재의 규정을 ‘인지적’ 의미에서, 즉 특이하고 다수적이며 협동적인 것으로서 적실하게 서술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계급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계급투쟁

푸꼬의 관점에서 읽으면 맑스의 자본 개념은 푸꼬가 ‘힘들의 관계’(un rapporto di forza, a relation of forces)의 산물(prodotto)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작용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정의한 ‘potere’(power) 개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 주체화의 새로운 특징들―생산적이고 특이화된 인지적 힘들로서 저항적이며/이거나 능동적임―이 계급투쟁을 다시 자본주의적 발전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의 중심에 놓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종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목적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자. 오직 이 비유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으로서 계급투쟁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C)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

‘자기의 테크놀로지’(tecnologie di sé)라는 푸꼬의 관점에서 보면, 산 노동은 고정자본(capitale fisso)의 일정 몫을 전유할 때 그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단지 종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자본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며 그리하여 산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을 구성하면서 대응한다. 이 형상들은 고정자본의 일부를 전유하여 더 우월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인지노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초과’(eccedenza, excess)가 이 수준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따리의 신체성과 주체성의 기계적(macchinica, machinic) 변형이라는 통찰이 중요하다. 때로 들뢰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주체화의 적대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는 푸꼬의 직관적 통찰들을 강조함으로서 회복될 수 있다. 이 점점 더 핵심적이 되는 기계적 요소는 적대하는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에 속한다. 맑스적 담론의 이러한 발전은 푸꼬 이후에 가능하다. 푸꼬 이후에는 존재론적 차원이 계급관계의 배경이 아니라 생산적 기계이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적 헤게모니는 노동이 인지기계로 전환된 데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변형에서, 새로운 기술적 활력에서 나온다. 푸꼬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비록 고전 고대 시기와 연관되어 있지만, 새로운 인간학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주의나 정체성의 흔적이 없고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간(l’uomo dopo la “morte dell’uomo)을 그려보는 인간학이다. 푸꼬의 작업은 자본의 시초 축적과 함께 시작된 ‘인간들의 축적’(accumulazione degli uomini)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 노동의 기술적 구성에서는 생산적 신체들과 삶의 양태들(modi di vita)의 변형에 대해 생각하고 이 양태들이 생산수단이 된다는 점을 확연히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D) 코뮤니즘

푸꼬의 주체화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민주적 주체화를 합치시키는 과정(il processo che compone la produzione del comune e la soggettivazione democratica)에 다름 아니다. 즉 다중의 특이화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적 존재론은 공통적인 것의 개념을 회복한다.

 

2.

한 걸음 물러나 덜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으로 되돌아가보자. 우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자. 이 차이는 나중에 공통의 관점 속에 재배치될 것이다.

① 맑스의 경우 명령의 통일성이 주권적 권력의 형상에 담겨 있고, 통치(il goverbo)는 자본의 의지 안에 통일되어 있다. 반면에 푸꼬에게 권력의 통일성은 희석되어 있다. ‘통치성’(governamentalità)은 서로 다르고 분산된 권력들(potere)의 생산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이다.

② 맑스에게 사회적인 것의 (국가화는 아닐지라도) 자본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푸꼬에게 삶권력(il biopotere)은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그 확산이 다양한 발아에 의해 일어나고 권력의 구체적 형태들은 특이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사회화’이다.

③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조직된다. 이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 푸꼬에게서는 해방의 정치적 체제가 주체화에서 조직되고 자유로서 특이화된다. 그리고 생산에서 공통의 행복을 구축할 제한 없는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이 차이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① 맑스에게서 보이는 국가와 명령에 대한 유기적 관점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사회계급들의 역사적 분석에 의해 희석된다. 특히 정치경제 비판의 수준에서 이 유기적 관점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에서 상품의 사회적 유통의 분석으로 나아가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여기서 맑스는 (재)생산과정을 가치창출과정으로 재연결시킨 후 다시 임금의 분석으로 내려가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계급들과 그 삶의 양태들의 서술로 내려간다. 그에 따라 권력 메커니즘의 다양화와 확산이 광범한 공간을 설계하며 (이때 사회는 공장이 된다) 권력의 과정들이 증식하고 다양한 차이로 갈라지며 이 차이들 위에서 그 과정들은 말 그대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② 맑스는 시초 축적(accumulazione originaria)을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통치화’ 혹은 ‘국가의 사회화’로서도 제시한다.[↔ 자본화, 사회의 국가화] 로베르토 니그로(Roberto Nigro)는 포섭에 관해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혹은 삐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는 이러한 사회의 변형[즉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변형]에 대한 분석 속에서 항상 ‘생산된 주체’의 ‘생산하는 주체’로의 변형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이 변화는 푸코에게서 주체화라는 문제틀의 핵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③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푸꼬의 주체화이론에서의 존재론적 전복 사이의 차이와 관련해서는 『그룬트리세』의 코뮤니즘, 일반지성 및 사회적 개인에 대한 대목들을 가지고 양자의 유사성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유사성은 1978년 이후의 푸꼬의 강의들에서 더 분명해지며 필시 주위 사람들과의 토론의 결과요 E. P. 톰슨 같은 역사가들을 인정한 덕분일 것이다.

이 유사성들은 두 저자를 근대의 몇몇 주된 문제들(국가, 사회, 주체)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지만, 또한 둘을 새로운 존재론의 발전이라는 노선보다는 근대의 황혼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저자의 차이와 유사성을 강조할 때 1977-78년과 1978-79년 강의의 삶정치적(biopolitical) 전회에 도달하기까지의 푸꼬의 작업이 준거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캡처한 그림참조] 여기서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은 혼란스러운 채로 남아있고 개념들은 모호하게 취급된다. 맑스에게는 첫째와 둘째 사례에서 모든 담론적 강조가 특이화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추상’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반면 푸꼬는 그 반대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1977-78년 이후의 그의 강의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1984년 이후에 가능해졌듯이 그의 저작들과 강의들을 철학자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투사의 것으로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통치성, 삶정치, 주체에 대한 맑스와 푸꼬의 사상 사이의 피상적 합류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는 둘 모두 현재의 존재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푸꼬는 정치학과 윤리학의 절합에 있어서 진전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이 작업은 개인화 및 데까르트식 주체로의 회귀에 반대하며 주체의 집단적 구성 및 이것의 역사적 과정에의 함입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Noi, We)의 발굴(scavo, excavation)―나/우리 관계의 발굴―로서 제시되는, 생성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성(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제시되는, 주체의 ‘폐위’(destituzione, dethroning)로서 드러난다. ‘우리’는 다중이며 ‘나’(Io)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돌봄’(la cura di sé, ‘care of the self’)은 개인적인 실천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주디트 레벨의 말을 빌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형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권력에 대한 개인적 반응은 더더욱 아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의 ‘자기’(self)는 데까르트의 ‘나’가 아니다. 그렇기에 푸꼬가 그 탄생을 1978년에[『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서술한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에 의해 창출된 개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정의한 특이성이다.

윤리학은 존재와 함(fare, doing)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주체화 과정 내에서의 탈중심화는 이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견유주의가 승리하고 파레시아가 단순히 (진실을 말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지형(terreno di verita)으로서 상세히 개진된다. 그러나 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권력-저항이라는 짝(양자 사이는 비대칭적이다)만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의 존재론적 성격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한다. 이는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intransitività della libertà, the intransitivity of freedom)에 의해 드러난다. 이 요소는 권력관계에 종속될 때조차도 무조건적이다. 산 노동이 자본과의 관계 내에서 자동사적인 활력이듯이 말이다.((정리자주—‘자동사적 성격’이라고 번역한 ‘intransitività(이)/intransitivity(영)’에 대해 사실 푸꼬 자신이 사용한 표현은 영어로 intransigence 즉 ‘비타협적 성격’이다. 이는 그가 영어로 쓴 글인 ‘The Subject and Power’에 등장한다. 여기서 푸꼬는 권력(관계)과 지배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관계로서의 권력이란 타인의 행위에, 그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고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영향을 가하려는 행위인 한에서 권력의 행사는 원리상 자유로운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권력의 행사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 하는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력의 행사의 전제 조건인바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권력에 앞선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의 핵심에는 […] 의지의 반항(the recalcitrance of the will)과 자유의 비타협성(the intransigence of freedom)이 있다.” 한편 이 글이 후에 그의 글 모음집인 Dits et Ecrits 에 불어로 번역되어 실리면서 intransigence가 intransitivité로 옮겨졌고 종종 푸코의 자유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게 된 듯하다.))

진리는 새로운 존재를 산출하는 시적/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성된다. 가령 해방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 실천을 펼쳐낸다. 진리를 창조하는 자유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진리에의 욕망이라는 물음이 던져지자 푸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힘을 장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의 전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의 발전은 권력의 문법(그리고 실천)의 계속적인 재정식화를 낳는다. 고고학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계보학이 내일과 현재 사이의 가능한 차이를 실험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현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un’ontologia critica di noi stessi)―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의 범주들을 위기에 부칠 가능성을, 더 정확히는 그 필요성을 갖게 된다.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산 노동’의 새로운 질과 그 생산적 능력의 새로운 차원들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원들의 소진과 <나>와 <우리>의 관계, 즉 <우리>의 노동/활동 속에서의 <나>의 산출에 의해 결정되는 바의 ‘공통적인’ 지형의 출현이다.

역사, 윤리 그리고 정치적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열린 존재론의 장치(dispositif), 존재를 생산하는 장치이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마지막 결과들이 혁명적 좌파 내에서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 푸꼬가 발전시킨 입장을 [지금] 상기하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하다. 싸르트르와 대조적으로 푸꼬에게는 주체의 자유와 사실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존재론적 맥락의 필연적 결정과 그 열림, 즉 윤리적인 존재 및 함의 자유(freedom of ethical being and doing)가 존재한다.

 

4.

하이데거 이후로, 즉 탈근대에 존재론은 더 이상 주체의 토대(fondamento)를 이루는 장소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실천적·협동적 배치(agencement), 프락시스의 직물이다. 요컨대, 칸트 이래 확립된 초월적(transcendentale) 철학의 연속성을 가로막은 현재적 존재의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은 말 그대로 근대의 존재론과 그 데까르트적 뿌리(주체의 중심성)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삶의 양태’라는 새로운 물질성 위에 자리를 잡는다. 현실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던 인식론적 막(schermo, screen)은 여기서 분쇄된다. 하이데거의 작업은 이러한 지형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또한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적 노동이 그것의 생산물[즉 삶의 양태 혹은 인간]과 충돌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지형에서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인간에의 위협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기계들 및 테크놀로지 장치들에서 비로소 오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위협은 이미 인간을 그 본질에서 갉아먹고 있다. 몰아세움/닦달(Gestell)의 지배는 인간이 어떤 더 근원적인 탈은폐에로 귀의하여 더 원초적 진리의 부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위협해오고 있다.”[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생산적이지 않으며 테크놀로지는 생산을 비인간적 운명 속에 익사시키고 새로운 존재론의 발생에 왜곡의 징표를 남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황무지를 되돌려준다. 바로 여기서 주체의 유령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그 유령들이 다시 등장한다. 니체와 푸꼬는 이와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취하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발굴한다. 과거의 파편들, 현재의 밀도, 장차 올 것의 모험을 그 물질적 실재와 열린 시간성 속에서 다룬다. 그들은 존재론을 역사로 채우고 언어적 관계들과 수행적 장치, 계보적 재구축과 진실에의 의지들을 수립한다. 이것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 향하게 한다. 초월적 인식론은 옆으로 제쳐놓는다. 이 인식론은 더 이상 현재의 존재론을 위한 지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경우와는 달리 이 새로운 존재론에서는 삶의 공통적 맥동에 열려있는 결정적 분기가 발생한다. 존재의 산출은 심오함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현실성 속에서, 삶의 돌봄(cura della vita) 속에서 조직된다. 나는 ‘맥동’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생기론은 들어있지 않다. 우리는 생물학화된 혹은 자연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삶을 산다.

푸꼬에게 이러한 ‘현재의 존재론에 몰입되어 존재하기’(essere immersi in una nuova ontologia del presente)가 가장 높은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존재하기’(un essere comune)로서 특이성들의 상호적이고 다변적인 의존이 우리가 앎의 문제를 제기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형을 구성한다. 마슈레가 상기시켜주듯이, 푸꼬의 저작 출간의 맥락은 “전쟁 직후 시기의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의 완전한 갱신을 나타낸 거대한 논쟁의 계절이 시작된 때”이며 “이때 문학의 리얼리즘, 주체철학, 변증법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연속적인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이 동시에 문제 삼아졌다.” 이 문화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주권적 주체, 의식개념, 그리고 역사적 목적론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존재론을 집단적 실천의 직물이자 산물로서 파악함을 의미했다. 1970년대 중반, 푸꼬가 그 시점까지 쓴 것을 읽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의 느낌을 받았으며, 이것이 (객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열광과 주체에 대한 정신주의적 매료를 넘어서) 주체화를 향한 충동, 장차 올 것의 존재론적 구축(costruzione ontologica de l’a-venire)을 향한 충동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했다. 이러한 극복은 1970년대가 끝난 이후부터 일어나게 된다.

맑스에게서 우리는 동일한 형태의 존재론적 뿌리내리기와 대면한다. 역사적 현재에의/현재의 뿌리내리기(un radicamento nella/della presenza storica)이며 그 항상적인 재구성이다. 주체의 형이상학 같은 것은 없다. 그 존재론적 직물은 내가 지금까지 ‘새로운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러한 존재론적 직접성을 전제하는 것은 역사적 시기들의 차이를, 따라서 ‘삶형태들’(forme di vita)의 차이―예를 들어 맑스와 푸꼬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역사적 차이들, 여러 삶형태들의 차이]을 동질적 토대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건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된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①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본적 역사화 ②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인식 ③ 노동력, 즉 산 노동의 투쟁에서의 주체화 그리고 생산하는 신체들의 생산관계들의 변이와의 연동 ④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는 주체화를 정의하는 것.

 

5.

프랑스 맥락에서는 종종,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 방향에서, 존재론적 담론의 탈주체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이 지형에서 전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알뛰세르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매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 노선을 제안했다. 이제 알뛰세르가 이 지형에서 그의 비판을 심화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은 <주체>(Sujet)의 명령에 자유롭게 따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의 몸짓들과 행동들을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호명된다. 자신들의 종속에 의한 그리고 그 종속을 위한 주체 말고는 주체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체성을 그토록 해체시킴으로써, 그 어떤 가능한 정신주의의 나무도 베어넘김으로써, 알뛰세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에 이르렀다.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알뛰세르를 교정한다. “‘주체의 구성’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주체 없는 과정에서뿐이다.” 주체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은 반(反)휴머니즘의 무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형상으로 옮겨놓아질 수 없다. 이 비판이 표현하는 역사성, 활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즉 주체의 해체] 이후에 요구된 [새로운] 휴머니즘이 소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 현재의 존재론 안에서일 것이다.




비판, 변형, 사유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1981년 미떼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의 프랑스 대통령 당선 직후 에리봉(Didier Eribon)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싣기 위해 푸꼬와 나눈 대담의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디디에 에리봉

이 정부와 함께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미셸 푸꼬

우리는 찬성과 반대의 양자택일이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컨대 대면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정부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종속도 아니고 총체적 순응도 아닙니다. 정부와 함께 작업하면서도 말을 안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양자가 병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리봉

그럼 ‘비판자 미셸 푸꼬’ 이후에 이제 ‘개혁주의자 푸꼬’를 보게 되는 것인가요? 어떻든 ‘지식인들이 행하는 비판은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이 종종 가해져왔습니다만.

 

푸꼬

먼저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 대답하겠습니다. 지금 논의 대상에 오른 여러 문제들의 출현을 위해 작업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작업이 아무 것도 산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입니다. 당신은 20년 전에 사람들이 정신병과 심리적 정상성의 관계, 감옥의 문제, 의료권력의 문제, 양성 관계 등의 문제들을 오늘날처럼 숙고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다음으로, ‘개혁 그 자체’란 없습니다. 개혁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과 독립적으로 허공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변형을 실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 비판과 변형 사이에, ‘이론적’ 비판과 ‘현실적’ 변형 사이에 대립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물(사태)의 현재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비판의 본령이 아닙니다. 비판의 핵심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실천들이 어떤 유형의 증거들, 어떤 유형의 익숙함들, 즉 획득되었으나 반성되지 않는 사고방식들에 의존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의 유일한 심급으로 신성시하고 인간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인 어떤 것— 나는 사유를 말하고 있습니다—을 그저 구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를 그쳐야 합니다. 사유는 담론의 체계들과 구조들 너머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합니다. 사유는 종종 숨어있지만 항상 일상적인 행위들을 추동하는 어떤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제도들에도 소량의 사유가 항상 존재합니다. 조용한 습관에도 사유가 항상 존재합니다.

비판은 그 사유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데, 그리고 바꾸려는 데 그 본령이 있습니다. 사태가 사람들이 믿는 것만큼 분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자명하던 것이 더 이상 자명하게 여겨질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판을 행한다는 것은 너무 쉽던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된다면 비판은 (근본적 비판은) 그 어떤 변형에도 필수적입니다. 동일한 사유양태 안에 머무는 변형, 동일한 사유를 사물의 실재에 더 잘 맞추는 방식일 뿐인 변형은 피상적인 변형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는 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자마자 변형은 매우 절실한 동시에 매우 어렵고 또한 전적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판의 때가 따로 있고 변형의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변형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접근 불가능한 급진성에 갇힌 사람이 따로 있고 현실에 필요한 양보를 해야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나는 심층적인 변형의 작업이 연속적인 비판이 이루어지는 공개적이고 항상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리봉

그러한 변형에서 지식인이 프로그램을 짜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푸꼬

변형은 갈등, 대립, 투쟁, 저항이 존재하는 과정의 결과 말고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개혁은 무엇이지?’하고 처음부터 자신에게 말하는 것, 이것은 내 생각에 지식인이 추구할 목적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사유의 영역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사유의 해방이 이 변형을 사람들이 실행하고 싶을 정도로 충분히 절실하게 만드는 방향을 향하여, 그리고 현실 속에 깊이 각인될 정도로 충분히 실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향을 향하여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갈등을 더 가시화하고 그 갈등을 단순한 이해의 충돌이나 한갓 제도적 방해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 갈등과 충돌로부터 힘의 새로운 관계가 출현하는데 이 관계의 잠정적인 측면이 개혁이 될 것입니다.

개혁의 기획이 무엇이든 그 바탕에서 사유의 사유 자신에 대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사유의 양태들 즉 행동의 양태들이 실제로 변경되지 않는다면 그 기획은 항상 동일한 것이 될 행동 및 제도 양태들에게 잡아먹혀서 소화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압니다.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발표문
  • 설명 : 아래는 2018년 5월 2일 경의선공유지에서 열렸던 <2018 커먼즈네트워크 워크숍>의 기조발제문에 조금 더 손을 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출처 표시가 잘못된 주석 하나를 바로잡았고 본문과 주석에 몇 대목을 추가적으로 삽입했다. 추가된 부분은 전체 글의 흐름과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종의 방주로 간주되면 된다.

    말이 기조발제지 사실은 그 자리에 손님으로 가면서 맡은 것이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들이 초청한 것이라서 커먼즈 운동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항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작성했으나 상당히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커먼즈 운동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청중이 당연히 있었고 이 분들은 기조발제를 듣고 ‘뭔 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을 전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해서 많은 내용을 주석으로 내려서 나중에 텍스트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본문도 다 소화 못할까봐 읽을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미리 생각해서 갔는데 그나마 그렇게 준비한 부분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더 늘리더라도 여기에 올리면 누구라도 이 발제문을 찬찬히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먼즈 운동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선 이 블로그에 최근에 올려진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의 가장 최근의 대담을 참조하고 이에 덧붙여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49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안근대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커먼즈 운동을 포함한 여러 운동들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인데—이란 ‘역근세수’와 ‘환골탈태’의 과정이 몸과 정신에서 공히 일어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의 몸과 정신의 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온갖 근대적 물신들(굳어진 사고·감정·행동의 습관들)을 씻어내야 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록 조그만 것일지라도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유형의 습관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쉬운 말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근대적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신들을 싹 씻어낸 후에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11장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되기’의 소박함으로, 혹은 “풀과 순수한 물 조금”의 단순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파일에서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 안의 주석 두 개가 누락되었다. 한글파일을 그대로 전환한 pdf 파일을 아래 첨부한다.

    Download (커먼즈-운동과-삶정치-발제문수정확대판.pdf, PDF)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커먼즈 운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커먼즈 운동을 조금 소개해왔을 뿐 이 운동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저로서는 커먼즈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을 듯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미’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의 이론에 비추어 보는 것일 듯합니다. 제가 삶정치론을 나름대로 공부하며 다듬다가 커먼즈 운동을 알게 되었고((네그리·하트의 저작에서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게 되었으며, 둘째 번역서인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번역하면서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데이빗 볼리어(David Bolier)를, 그리고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던 공부와의 연관성 때문에 커먼즈 운동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커먼즈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커먼즈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삶정치론은 탈근대(여기서는 시기를 가리키며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68년 혁명 이후, 혹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난 이후를 말합니다)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즉 한편으로는 소외의 극단적 심화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일반화 가능성을 낳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둡니다. 소외의 극단적 심화란 삶권력(biopower)의 등장—가령 자본이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저항의 일반화란 이렇게 대립구도가 ‘권력 대 권력’의 구도((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구도로서 홉스 이후 거의 모든 정치학은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공식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가 아니라 ‘삶 대 삶권력’이 된 상황에서는 삶이 있는 모든 곳에 저항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소외의 문제를 가장 먼저 명시적으로 제기한 것은 맑스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근대주의자들(국가자본주의자들)로 전환되면서((‘소외’를 제시할 때의 맑스를 초기의 맑스, 즉 아직 미숙한 맑스로 보는 태도가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미숙하지 않다고 평가받을 여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한 일 가운데에는 자본의 논리와 관점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도 속합니다. 가령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레닌과 스위지(Paul Sweez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자본가들 사이의 내적 동학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노동자들의 불가피한 봉기로서 예측하는 것은 그저 이 동학의 설명되지 않은 부산물로서만 나타난다.”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p.191. 이 저작에는 이런 취지의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묻혀 버립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근대화 경쟁을 하는 구도(‘냉전’)는 바로 이러한 전환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성숙기의 맑스가 소외의 문제를 잊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소외’라는 제목이 딸린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내용상으로는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생산의 원래적 조건들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성들 사이의 자연적 과정을 통한 인간의 수의 점증하는 수의 재생산은― 이 재생산은 일면으로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전유로 나타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형성으로서, 객체들의 주체적 목적에의 종속으로 나타난다. 주체적 활동의 결과들과 저장고들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래 그 자체가 생산물이 될 수는 없다. 즉 생산의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있는 활동적인 인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 사이의 통일이 아니라, 따라서 자연의 전유가 아니라, 이 인간실존의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적 실존 사이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489. 이 외에 『자본론』 3권의 이곳저곳에서도 소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소외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성숙기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이는 곧 소외의 정점입니다—에서 자본주의를 즉 소외를 넘어서는 조건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자본의 한계를 말하는 여러 대목이 있는데 한 대목만 들어봅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Grundrisse, p. 749.))

맑스의 진의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소외’의 문제를 파묻어버린 것과는 달리, 20세기 중반부터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온 일련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푸꼬의 삶권력/삶정치론((푸꼬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실제 혹은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 달리 말하자면 권력을 사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파훼했습니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27.)), 들뢰즈·가따리의 삶의 철학((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의 철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생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발제의 편의상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들뢰즈·가따리가 ‘삶’(vie, life)라는 말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일단 쓰는 경우에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재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은 ‘삶의 평면’(a plane of life)과 동의어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대목은 그들의 가장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에도 몇 군데 나오지만짧지만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몇 페이지로 압축한 글 「내재성 : 하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이 계보가 푸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앞에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가 있습니다. ‘삶권력’, ‘삶정치’라는 말은 푸꼬가 만든 말인데, 푸꼬는 양자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네그리·하트에게서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립되는 ‘삶의 정치’라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발제문에서 ‘삶정치’는 기본적으로 네그리·하트의 사용에 따릅니다.)) 이 계보는 자본주의를 ‘삶권력’—삶을 장악한 권력—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소외의 문제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삶의 힘(삶의 활력)을 저항의 힘으로서 새로이 부각시킵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경우 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비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권력(자본가가 권력)에 권력(노동자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추구되었는데, 이제 삶정치에서는 ‘삶 대 권력’이 기본적인 적대관계를 구성합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권력이 삶을 목표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때 권력에의 저항은 이미 삶의 편에 서며 삶을 권력에 대립시킨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통제하는 데 몰두하는 체제에 대립시켜지게 된다. / (···) 외부로부터 오는 힘은 푸꼬의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활력주의(vitalism)가 아니던가? 삶은 권력에 대항하는 이 능력이 아니던가? ��병원의 탄생��부터 줄곧 푸꼬는, 삶을 죽음에 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활력주의를 창안한 비샤(Bichat)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에게만이 아니라 푸꼬에게도 인간의 죽음에 대항하는 힘들과 기능들의 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일단 인간적 훈육으로부터 해방되면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푸꼬는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Gilles Deleuze, Foucault, p.92. (인용자의 강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삶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놓겠습니다.((영어로든 대부분의 유럽어로든 양자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양자를 ‘bios’(삶)와 ‘zoe’(생명)라는 희랍어로 구분합니다.)) 삶은 존재론적 원리이자 힘(활력)입니다.((이기묘합(理氣妙合)입니다.)) 생명은 에고로서의 개체가 활력을 받아서 자신의 생물학적 실존을 유지하는 힘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개체들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주체성을 구성하고 그로써 하나의 온전하고 뚜렷한 삶의 형태를 개화시키는 힘입니다. 개체의 관점에서는 생명은 출발점이고 삶은 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령 D. H. 로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의의가 아니다.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이것이 최고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운명이다. 즉 미지의 것의 가장자리로 가서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이.((Lawrence. D. H.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441. 들뢰즈·가따리는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체화인 ‘개별 주체로의 개체화’와 ‘삶의 개체화’를 맞세운 바 있습니다. “··· 삶의 개체화는 주체(이는 삶의 개체화를 이끌거나 지탱해준다)의 개체화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평면’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공재의 평면 혹은 각개성(haecceities)들이 모여서 이루는 평면이다. 이는 오직 속도와 정동만을 안다. 후자의 경우는 형식들, 질료들, 주체들로 구성되는 전혀 다른 평면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261.))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의 차원에서의 일이며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은 삶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삶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영원’의 차원에 속합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여 더 설명하자면, 생명은 ‘코나투스’(conatus)에 해당하며, 삶은 ‘코나투스’에서 출발하여 ‘욕구’(appetitus), ‘욕망’(cupiditas)을 거쳐 ‘사랑’(amore,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코나투스(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고, ‘욕구’(appetitus)는 코나투스를 정신과 몸 양자와 연관시킨 것이며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구’입니다. ‘사랑’(amore)은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는지를 알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사유능력(행동능력)의 증가가 가져오는 정동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슬픔’입니다.))))으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 해당합니다. ‘코나투스’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듯이, 생명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삶은 아닙니다.((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이 출발점의 확보(생계수단의 획득)를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 동안 노동력을 팔아도 출발점에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곳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삶은 개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삶형태의 개화—가 목적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① 기존의 삶형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② 새로운 삶형태를 만개((저는 ‘만개’의 한자어 ‘滿開’에 ‘萬開’를 중첩시키고 싶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형태로 만개하다’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시켜야 합니다. 삶정치론은 이 두 가지를 해내는 힘, 이 삶의 힘을 ‘활력’이라고 부르며 권력에 대립시킵니다. 영어를 제외하고 활력과 권력을 따로 부르는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있습니다.

 

권력

활력

라틴어

potestas

potentia

불어

pouvoir

puissance

독일어

Macht

Vermögen

스페인어

poder

potencia

이탈리아어

potere

potenza

영어

power

power

활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이해는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힘은 존재론적으로 본원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그 다음에 옵니다. 권력은 이 달라지는 힘이 발휘되지 않도록, 즉 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 힘입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라는 푸꼬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Vol. 8, NO. 4 (Summer, 1982), P.790.)) 그런데 어떻게 막는 것일까요? 죽임으로써? 죽이는 권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합니다.((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의 경우에는 혹시 모르기에 “일반적으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철학』이라는 책에서 생명을 잃는 ‘외적 죽음’과는 다른 ‘내적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권력에 의해 노예화된 삶을 가리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이것이 바로 ‘내적 죽음’입니다. 현대의 삶권력은 바로 이 ‘내적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양산합니다.)) 그러나 ‘죽임’은 삶권력의 발휘 양태가 아닙니다.((죽이는 것은 개체(에고)의 생명을 취함으로써 그 개체가 하나의 삶형태를 만개할 가능성을 아예 자르는 것인데, 해당 개체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원적인 삶의 활력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활력이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활력이 현실화(육화)되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을 각각 ‘삶의 장’과 ‘현실화의 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삶의 장은 오직 변화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은 활력이 형태를 부여받아 육화되는 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에서 ‘지층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납니다. 지층화한 위계(수직적), 인과(수평적), 틀(3차원적)을 이루는 관계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정적으로 존속하면서 활력이 새로운 형태를 띠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형태로 반복되게 하는 것입니다.((A Thousand Plateaus, p.335.)) 이 지층화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삶권력입니다.

삶권력으로서의 자본은 삶의 활력이 산출하는 차이소(Δ, ‘삶의 잉여가치’ 혹은 ‘초과’((‘삶의 잉여가치’는 들뢰즈·가따리의 용어이고 ‘초과’는 네그리의 용어입니다.)))를 수량화하여 ‘가격’(교환가치)의 형태로 ‘경제’ 체계로 끌어들입니다. 수량화는 척도에의 종속을 전제하며 척도에의 종속은 지층화의 한 양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의 수량화가 필연적으로 (사용가치)의 동질화를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동질화를 동반하는 수량화는 활력의 늘 달라지는 힘을 덮고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달라지는 힘은 현실성의 층에서는 질적인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획이 계속되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공고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성)이 번성하게 됩니다(([추가]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욕망과 사고방식이 자본이 지향하는 방향에 부합하는 주체성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생산·재생산합니다.(증식/축적)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규칙—예컨대 가게에 들어가면 특정 액수의 돈을 물건과 바꾸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몸에 배고 정신에 뱁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동반하는 가치의 수량화(가격화)와 함께 개인들을 사적 소유자이자 교환자(노동자+소비자)로 정착시킵니다. 이는 개인들에 잠재하는 특이한 활력들을 (하이데거의 용어를 끌어다 쓰자면)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된 개인들은 협동과 공감의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경쟁과 배제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의외로 악영향이 큽니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인 많은 좌파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론과 방향이 더 옳다면서) 경쟁해온 것을 보세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서는 이렇듯 ‘배제적 이접’(들뢰즈·가따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활력들을 가둔 울타리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으니까요.[/추가])). 이로써 삶권력으로서 자본이 삶을 포섭하는 작업이 일정하게 완료되는 것입니다.((『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유명한 마쑤미(Brian Massumi)도 최근에 나온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에서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하는 일이 이 Δ를 측정 가능한 이윤/가격의 형태로 포획하는 것으로 봅니다.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

삶정치론의 목표는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단 ‘삶권력으로부터’라는 점에서 삶정치론은 커먼즈 운동과 명시적으로 상통합니다. 커먼즈 운동 또한 (오스트롬의 전통적인 공유지 연구에서부터) ‘국가와 시장(자본) 외부 혹은 너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통적인 공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 삶의 해방의 차원에서도 양자가 상통하는지는 삶정치론이 어떤 구체적 기획을 가지는지를 더 알아보고 커먼즈 운동의 구체적 기획과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삶의 해방’이란 말이 아직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정치론은 이론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하지는 못하며 반대로 커먼즈 운동은 실천적 운동이기에 그 운동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삶정치론의 기획에서 삶이 만개에 이르는 과정은 둘로 나뉩니다. ① 우선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삶권력이 워낙 삶 깊숙이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탈근대에 일어난 자본의 변형은 생산하는 다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삶권력의 포획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일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② 삶권력이 장악했던 그 자리(현실화의 장)에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두 단계 혹은 측면에 상응하여 네그리는 활력을 ‘가난’의 힘과 ‘사랑’의 힘으로 나눕니다. 가난은 권력을 텅 비운 상태(제로 지층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활력의

씨알이 잠재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이 씨알이 활력으로 전개되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삶정치론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형태로 더 구체화한 것이 ‘특이성들의 다중’, ‘공통적인 것’(the common) 그리고 ‘민주주의’ 3자의 관계입니다.

삶정치론의 주체는 ‘다중’입니다.((사실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성 혹은 주체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푸꼬에서 네그리에 이르는 삶정치론자들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양자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는 자본의 생산방식에 일어난 변형(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혹은 삶정치적 생산)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네그리는 그 이전에는 ‘전문 노동자’, ‘대중노동자’, ‘사회적 노동자’의 순서로 이러한 주체 형상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중 이전의 대표적 변혁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위치의 동일함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면, 다중은 자본에 고용되든 아니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서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루어집니다. 다중은 경계가 확정된 어떤 고정된 집단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다중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와 무관합니다.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다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만들고 나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다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다중 만들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다중의 형성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촛불’다중은 한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정된 형태로 남는 식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성들의 다중’ 즉 특이성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이 바로 자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개인’도 근대의 산물—커먼즈를 파괴한 그 근대의 산물—입니다. 커먼즈를 상실한 개별 인간들이 바로 ‘개인’들입니다.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민중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산산이 흩어져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발전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개인’은 “권력의 최초의 효과들 중 하나”입니다.((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5-1976, Translated by David Macey (New York: Picador, 2003) pp.29-30. 이 앞에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29.)) 이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쳐진(종획된) 정신과 몸의 구현물이며((이런 의미에서 소외의 한 양태입니다.)) 사적 소유의 주체입니다. 이제 ‘개인’은 ‘일자’가 되며 ‘정체성’에 정착합니다.((이렇게 개인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관입니다.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도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인간/자연으로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나누면 반드시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남/녀, 어른/아이, 중심/주변 등등의 나눔 짝들을 보세요.))

삶정치론은 여러 특이한 힘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공재하며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리로서의 개인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특이한 힘이란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이 그때그때 다른 것을 각개성(haecceity)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활력의 크기는 이 공재하는 힘들이 얼마나 협동적이냐에 따릅니다. 각 힘들의 Δ들은 사실 서로 상쇄될 수도 있는데 협동의 방식으로 네트워킹되는 경우에는 활력의 상호증가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공재하는 특이한 힘들은 각각 외부의 다른 힘들과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형태의 다중 만들기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어떤 커머너가 여러 커먼즈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핵심은 개인보다는 특이한 힘들 그것들의 협동적 관계입니다. 즉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힘이 그를 거쳐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다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다중’을 말하면 근대적 개인관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중을 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고정된 집단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다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이성, 특이한 활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시선의 일부가 늘 예의 ‘삶의 장’에 두어져 있고 거기서 활력을 받아오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다른 운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커먼즈 운동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필요상 한 커먼즈 내의 커머너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특이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장’에 접속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것이 무엇이든)에 그치는 운동이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커먼즈 운동과 연관된 이론가나 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궁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데이빗 볼리어의 Think Like a Commoner(한국어판 배수현 옮김『공유인으로 사고하라』갈무리 2015)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에 소개되는 베버(Andreas Weber)의 연구 —이는 ‘Enlivenment’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커머너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삶의 장’에 접속하는 훈련을 하는 것, 즉 사물을 포함한 주위세계와의 동지의식을 양성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 특이성(singularity)은 스피노자에게서 와서 푸꼬((푸꼬의 경우에는 가령 ‘다양체론’(‘모든 사물은 다양체이다’)이 특이성에 대한 인식에 속합니다. 믈론 더 파고 들어가면 이뿐만이 아니지만요.)), 들뢰즈·가따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네그리·하트에게 이어집니다.((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으로서의 특이성도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singularitas’, ‘singularity’, ‘singularité’, ‘특이성’ 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특이성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발제문에 거론한 철학자들 이전에 영문학 전통에서 ‘특이성’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들뢰즈 사유의 한 원천인 (소설가) 로렌스가 말하는 ‘individuality’는 그 내용은 특이성에 해당합니다.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identity’와 ‘selfhood’— 저는 각각 ‘열린 자아’, ‘닫힌 자아’라고 옮깁니다—가운데 전자는 특이성들에 열린 자아이고 후자는 하나로 단일하게 종획되어 닫힌 자아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문화전통에도 특이성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존재할 것입니다.)) 특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이며 이는 인간의 경우 ‘인격’으로 구현됩니다. 개체를 특이성들의 ‘공재’인 다양체로 보지 않고 단일하게 통일된 상태로 보는 것이 ‘정체성’, ‘인격’입니다.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관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양체이니까요.((‘인격’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을 보려면 http://minamjah.tistory.com/181?category=572143를 참조하세요. 『99개의 테제』에서 마쑤미는 ‘인격화’(personalization)을 개인의 활력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양상의 하나로 봅니다.)) [/추가]

그런데 특이성들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이루어 모여 있더라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조건으로 해서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것이 다시 갱신된 다중의 새로운 활동 조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통적인 것이 갱신되고 이와 함께 다중도 갱신됩니다.((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때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는 정동이나 제스처처럼 대부분 공통적이며, 만일 사적이거나 공적인 것이 된다면—즉 단어·어구·품사의 많은 부분이 사적 소유나 공적 권위에 종속된다면—표현·창조·소통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공통체』(사월의책 2014) 17-18면.))

공통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삶정치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네그리·하트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귀족제입니다. 선출된 소수의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처럼 통치의 한 방식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이 통치라면 ‘자기통치’입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일반의지’(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다중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의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절대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과연 다중을 구성하는 모두가 자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네그리와 하트는 “러시아 민중은 작업장에서 종속과 감독 그리고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도록 훈련받았으며, 직장에 상사가 있기에 정치에서도 상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견해((『공통체』 256면.))를 소개한 후에 ① 자본주의의 기술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생산의 방식— 삶정치적 생산—이 다중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② 혹시 아직 훈련이 덜 되었더라도 민주주의의 훈련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는 곳이며 민주주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커먼즈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삶정치론의 민주주의론은 그 복잡한 디테일을 덜고 나면 커먼즈의 민주주의와 바로 통하는 것입니다.((물론 사회 전체에는 아직 ‘지도층’이 건재합니다. 따라서 삶정치론이 비록 지도자의 부재를 지향할지라도 실제 현실에 지도자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를 향한 경향을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집회』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향을 ‘전략과 전술의 전도’에서 읽어냅니다. 과거에는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지난 촛불에서 일정한 만큼 목격했던 바입니다. 전체적인 방향 즉 전략을 결정한 것은 촛불다중이지 지도부들이 아닙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강한 친화성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커먼즈(commons)의 어휘상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표면상의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옮긴이] 이는 커먼즈 역사가인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말이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 p.5.))

여기서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란 삶정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이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부단히 공통적인 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통하고, “프로토콜”은 참여자 모두에 의한 거버넌스의 규칙이라는 점에서 다중의 민주주의와 통하며, “자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먼즈나 공통적인 것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공통재(common goods)를 포함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고 주체적 활동의 측면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커머너’(commoner)는 다중에 속한 한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네그리·하트도 『선언』(Declaration, 2012)에서 ‘커머너’와 ‘커머닝’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정치론에 들어와있는 용어처럼 설명합니다. 커머너의 커머닝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으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New York: Argo Navis Author Services, 2012). Declaration, p. 105. 이 대목은 조금 길지만 읽을 가치가 있기에 뒤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에 바라는 바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는 초기의 태도에서 진전된 것입니다. 2004년에 네그리·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용어를 피하고 ‘공통적인 것’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커먼즈라고 부르기를 꺼리는데, 커먼즈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적인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더 어색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그 철학적 내용을 더 부각시키며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한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2004) p.xv.))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9년이고 P2P재단은 2005년에 창립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블로그는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2004년의 네그리·하트로서는 커먼즈를 전자본주의적인 공유지 이외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커먼즈가 전통적인 공유지의 협소함—이것을 이유로 오스트롬의 커먼즈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에서 시원하게 벗어난 것은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입니다. 이로써 커먼즈 운동에 전지구적 차원이 부여되고, 이는 DG-ML(Design globally, manufacture locally)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P2P 생산양식의 더 구체화인 형태)을 다듬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점도 삶정치론과 묘하게 통합니다. 네그리·하트가 다듬어낸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나중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의 기술적 변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변형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커먼즈 운동이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는 다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개념으로서 다듬어지는 계기와 동일합니다.

흥미롭게도 네그리·하트는 가장 최근의 책 『집회』(Assembly, 2017)에서 ‘공유지의 비극’론과 함께 그것을 반박하는 오스트롬을 명확하게 거론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 96. 이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부의 사용과 부에의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통적인 것의 현대적 적합성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저작을 쓴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바르게도 거버넌스와 제도의 필요에 초점을 둔다. 오스트롬은 모든 부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황폐해지지 않게 보존되려면 공적 재산이 되거나 사유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공유지의 비극’류의 주장들 모두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녀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s)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이 관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는 반대한다. 집단적인 형태의 자주관리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규칙이 고안되고 수정되며, 또한 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시행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의 재산 배치.’”))

둘째 문장의 경우 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이후 커먼즈 운동이 규모의 한계를 부수고 발전하고 있는 지금 그 초석을 놓았을 뿐인 오스트롬(과 그녀의 연구의 대상인 전통적인 형태의 커먼즈)을 놓고 저렇게 비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커먼즈는 다중처럼 언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볼리어가 말했듯이 “커먼즈는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접근, 이용, 장기적 돌봄을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2014), p. 128.)) 그리고 그 규모는 지역 너머, 일국 너머, 대륙 너머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바우엔스 등의 커먼즈 활동가들 또한 네그리·하트처럼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의 포부가 네그리·하트의 포부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집회』에서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대목((Assembly, 15장 2절))과 「커먼즈 이행과 P2P 입문」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나중에 더 확장되어 http://commonstransition.org/commons-transition-p2p-primer/에 올려져 있습니다.)), 2017년 3월)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커먼즈의 (정치적) 확대를 말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움직임을 말한 것이므로 일단 정치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표에는 여기에 경제 영역의 유사성도 추가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삶정치

커먼즈 운동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작은 규모로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운동단체들, 엑서더스

커먼즈의 생산공동체 자체

국가와의 관계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가령, 민중의 ‘하인’이 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파트너 국가론 : 생산공동체를 국가의 법의 틀에서 합법화하는 비영리 지원단체들의 확장1)주석누락

(참고) 자본과의 관계

다중의 기업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헤게모니 전략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2)주석누락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경제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의회’(Assembly of the Commons)가 구상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국 사회의 범위 너머로 확대될 수 있다.

이 표를 보면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친화성이 그 차이를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저 표에서 ‘예시적 정치’라는 항목과 관련해서일 것입니다. 표에서 보듯이 네그리·하트는 운동단체들이 자체 내에서 수립하는 민주주의에 ‘예시적 정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한국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운동단체들의 경우에는 자체 내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촛불 다중의 수평성은 다중 자체가 이룬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다중이 막 형성되던 초기에 특정 운동단체가 지도하려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해외의 경우 1999년 씨애틀 이후에는 특히 소문자 ‘a’의 아나키스트들(anarchists)이 절차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newleftreview.org/II/13/david-graeber-the-new-anarchists 참조.))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 정치’는 필요하지만 예의 ‘세 얼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의 정치를 ‘예시적’이라고 부를 때 이는 단지 필요한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미래의 예시적 현존, 따라서 확대되어야 할 씨알로 보는 것입니다.

커먼즈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제의 예시적 형태들이 이미 존재한다. 커머너들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며 이미 커머닝을 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커먼즈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Michel Bauwens, Vasilis Kostakis, Stacco Troncoso, Ann Marie Utratel, “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p.47.))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고정된 조직화 형태를 모델로서 말하지 않고 미지의 상태로 두는 삶정치론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의 발명에 더 강조점을 둔다면, 커먼즈 운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조직 혹은 공동체 형태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고 말입니다.

[추가]

커먼즈 운동은 원리상으로 자본 너머를 지향하지만, 현재 자본에 ‘연루’된 현실을 무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쑤미가 「99개의 테제」에서 ‘창조적 이중성’(creative duplicity)이라고 부른 것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자본 너머’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깨우친다고 해서 바로 자본 너머로 나가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자본주의에 몸을 둔 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굳이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창조적 이중성’입니다.((마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루를 한탄하지 말고 즐기라. 교리상의 용감함으로 남을 비판하며 지배하지 말라. 창조적으로 유희의 장에 내려가 몸을 더럽히라.”(테제60, 주석c))) (깨우침과 그 이후의 실천을 합해서 ‘돈오점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점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돈오’의 비타협성을 고수하다가 활력을 탕진하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깨우침이고 뭐고 없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을 넘어설 만큼의 활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이고 협동하여 오랫동안 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점수’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슬기롭게 운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커먼즈 운동에서는 이러한 ‘점수’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성적 자본’ 혹은 ‘친구로서의 자본’은 시장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돈을 벌지만, 그 돈을 커먼즈의 축적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트너국가’론은 국가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가능하다면 커먼즈 운동을 돕는 곳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선보인 도시자치주의는 정당정치와의 창조적 관계를 실행합니다. 정당정치를 정당을 넘어선 연합의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점수’의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계속 창출될 것입니다.((스페인의 도시 커먼즈 운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대담으로 http://minamjah.tistory.com/233 참조.))

[/추가]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대안근대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형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커먼즈 운동가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맑스가 이미 한 말이 있습니다. 맑스는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 557.))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 혹은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출처 수정함]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이것이 맑스가 보는 커먼즈입니다. 사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그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을 넘어서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들 것이라고 추론해냄으로써 네그리에게 큰 영감을 준 바 있습니다.((네그리는 한때 감옥에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는데,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이 맑스와 스피노자의 저작들입니다. 네그리는 양자 모두 근대 속의 탈근대(나중에는 ‘대안근대’)로 꼽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맑스가—그에게 두 측면이 공존함으로 인해서—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네그리·하트가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에 상응하여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다듬어낸 것과 연관되며, 다른 한 측면은 커먼즈 운동의 새로운 부활과 연관됩니다.)

지금은 맑스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매우 안타까운데요, 사실 (삶권력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지만) 맑스가 가장 먼저 자본과 국가를 삶권력으로서 포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맑스를 잘 읽으면, 자본주의는 (아무리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사명((맑스는 자본의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인정합니다. [추가]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은 ··· 사물이 스스로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종식된 단계에 이르게 되자마자 완수”됩니다. Grundrisse, p.325.[/추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맑스의 자본 연구는 바로 이 ‘극복’을 위한 준비에 다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은 만개라는 자기목적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유로운 조건이라면 각 개인이나 집단이 이 출발조건에서 만개를 향해 나아가는 만큼이 그 성취입니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라도 모두가 만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억압적인 조건에서도 삶을 만개시키는 데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소수나 특출한 소수의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조건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 구성의 원칙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 조건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협소함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출발조건을 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 언론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인 양 위장했습니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출발조건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워킹머신과 같습니다. 열심히 걷고 뛰어야 그 위에 간신히 서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뒤로 쳐지고 맙니다. 출발조건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의 행태도 출발조건에 갇혀 있습니다. 만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내일의 출발조건, 내년의 출발조건, 후손의 출발조건을 확보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의 출발조건을 미리 확보하려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어리석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조건이 삶의 감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유리합니다. 한편으로는 희소성의 원칙에 갇히지 않는 부를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만)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환경의 실제적 경고도 존재합니다. 커먼즈 운동은 자급운동(출발점의 확보)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만개를 향한 운동, 진정한 삶의 가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정치론은 좋은 동지요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록1]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커머너’와 ‘커머닝’

중세 잉글랜드에서 커머너(commoner)는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세 신분―싸우는 계층(귀족), 기도하는 계층(성직자), 일하는 계층(커머너)―의 하나였다. 영국 등지에서 근대 영어의 용법에 보존된 ‘커머너’라는 용어의 의미[우리말로 ‘평민’]는 작위(爵位) 등의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 즉 보통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택하는 ‘커머너’라는 용어는 중세 잉글랜드로 소급되는 생산적 성격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커머너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기 때문에 ‘커먼’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공통적인 것에 입각하여 일하기 때문에 ‘커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빵 굽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방아 돌리는 사람 같이 직업을 가리키는 말을 이해하듯이 ‘커머너’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듯이, 커머너는 커머닝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을 만든다.

따라서 커머너는 비범한 과제―사유 재산을 모든 이의 접근과 향유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일,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되는 공적 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경우마다 공통의 부를 민주적 참여를 통하여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지속시키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하는 일―를 성취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렇다면 커머너의 과제는 빈자들이 자급할 수 있도록 들판과 강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음악,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수단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이 과제를 성취할 선결 조건들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사회적 유대를 창출할 능력, 특이성들이 차이를 통해 소통할 능력, 공포가 없는 상태가 가져다는 주는 진정한 안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커머너는 구성적 참여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개방적 공유에 기반을 둔 민주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고 필요한 주체성이다.

‘커머닝’의 행동은 공유된 부에의 접근과 자기관리만을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을 향하기도 해야 한다. 커머너는 투쟁하는 광범하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학생들, 노동자들,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 빈민, 젠더 및 인종과 관련된 종속과 싸우는 사람들 등―사이의 ‘연합’(alliances)를 창출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열거를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적 현실화의 실천으로서 형성되는 ‘연대’(coalition)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연대’는 다양한 집단들이 전략·전술상 함께하면서도 그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지어 분리된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의 ‘연합’은 전적으로 이와 다르다. 물론 커머닝은 정체성들((여기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라고 읽으면 됩니다.))이 부정되어 모두가 자신들이 밑바탕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쟁과정에서는 상이한 사회적 집단들이 특이성들로서 상호작용하며 상호교류에 의하여 계몽되고 고취되고 변형된다. 그들은 투쟁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저주파로 서로 말한다.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pp. 105-107 (밑줄은 인용자의 것)

[부록2]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물질대사의 단절’(맑스)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복지국가

선(先)분배(pre-distribution)—커먼즈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계몽주의적 이성/기능적 합리성

삶정치적 이성/공통적 감각

노동시간

삶의 시간

측정/척도

탈측정/척도 너머

이윤으로서의 잉여가치(경제적 잉여가치)

삻의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주체성

자유로운 주체성: 커머너, 다중

삶의 시간은 생계수단을 버는 시간

삶의 시간은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시간

인격, 합리적 개인

특이성

추출 대상으로서의 자연

동지로서의 자연

* 알림 : 몇 사람이 모여서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론에 대한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하는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minamjah.tistory.com/)의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 섹션의 글들을 가져오고 그 뒤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현재 제 블로그에도 저 말고도 다른 역자들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아직 구축 중입니다. 시간을 많이 못 내서(아니면 게을러서?) 아직 글들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URL은 http://commonstrans.net/입니다.

 




‘아래로부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77-83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로부터 볼 때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실로 광범한 해방 기획들의 입각점이며 우리의 분석에서 발전시킬 관점이다.

베버 : 권력(Macht, power)은 지배(Herrschaft, domination)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그래서 전자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반면 후자는 명령이 복종되어야 한다. 여기서 정당화의 문제 혹은 어떻게 명령이 동의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명령이 복종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필요가 나온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생각과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역행하는) ‘현실주의적’ 버전의 마키아벨리주의를 형성한다.

결국 베버는 관계로서의 권력이라는 정의를 무너뜨린다. 명령이 복종의 예시(豫示, prefiguration)로 찬양되면 저항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렌트 또한 유기적 권력관을 반박하려고 시도한다. 열려있는 정당성. 이 열려있음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다. 폭정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혁명, 항상적 변이, 구성적 힘을 말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국가이성은 폐쇄된 권위의 기능이자 그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반복적으로 하며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권력은 주체들의 손에 쥐어지며 아렌트에게 ‘진정한’ 실천은 공적, 정치적 행동이다. 능동적 삶은 시민적 삶에 완전히 관여하며 그 관계에서 무력해지지 않고 “inter-esse”(상호 존재하기/관심)를, 인간의 상호작용을 향한다.

근대적 권력정의로부터 나오는 데에는 베버와 아렌트로 충분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일자와 초월이 승리한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것은 군주에의 조언자로서의 마키아벨리라기보다는 ‘섭리의 꽁피당’(레이몽 아롱)이다. 베버가 제시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화 메커니즘들이며 대안적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관료적 기능의 기계적·객관적 성격이 나름의 주체성 생산 형태를 띠지만, 베버는 정동, 열정, 혁신조차도 추방한다.

마키아벨리의 본질적 요점은 권력을 관계로서 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이는 인식론적 입장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를 행하여 구축하는 정치적 궤적이다. 이것이 다중의 경로이다. 이 경로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자유의 도구로서 해석하는 동시에 자유를 민주주의의 산물로서 제시한다.

푸꼬가 근대의 지배적 권력관에 대한 도전을 현대적 세계의 조건으로 옮겨놓을 수 있게 해준다.

1979년 강의(『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의 방법론 설명: 주권자, 주권, 민중(민), 신민, 국가, 시민사회(the sovereign, sovereignty, the people, subjects, the state, and civil society)와 같은 관념들을 우선적이고 본래적인, 그리고 이미 주어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경로를 정의한다. 진실은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는 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축된다. 예를 들어 해방 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인 실천, 진실을 창조하는 장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정의에 기반을 둔다는 촘스키의 발언에 대한 푸꼬의 대답 : “저는 스피노자 식으로 당신에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힘을 갖기(take power)(([옮긴이] ‘take power’는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다’라고 옮기는데, 내용에서 보다시피 푸꼬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체적 힘’이라고 옮겼다.))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전복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그런 전쟁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이 푸꼬의 아래로부터의 힘(권력)이라는 인식론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푸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권력관―여기서는 주체가 저항을 허용받지 않는다―을 제안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푸꼬의 1960년대와 70년대 저작과 관련해서도 사실이 아니다. 푸꼬는 이 시기에 강한 구조주의적 틀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구조주의적 제한들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그는 모든 개체화하는 작업, 데카르트적 주체성을 되풀이하는 모든 작업에 맞서 논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체(subject)의 ‘해체’(destitution, 탈구성)를 통해 이를 성취했다. 이는 ‘우리’—나와 우리의 관계—를 생성(becoming)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체(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탐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푸꼬가 70년대에 미시권력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권력 개념을 일반화하는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에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형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에 기반을 둔 권력관이라는 점이다.

푸꼬의 작업은 1970년대의 주된 정치적 긴장이라는 상황에 위치시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작업은 공장에서 광범한 사회적 지형으로의 사회적 적대의 확대를 쫓았으며 투쟁의 주체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분석했다. 푸꼬는 완전히 이 작업에 몰입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맑스를 넘어갔다. 물론 (일부 활동가들이 채택하는 바대로)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버전들을 넘어가고 맑스주의를 사회적인 것 안에서 변용시켜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바로 이것이 ‘삶정치’ 개념이 궁극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들에서, 주체적인 것에서, 주체화에서 다시 채택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운동에서 발전했던 것은 푸꼬의 강의들에서,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반영되었다. 이 강의는 권력을 바라보는 구조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틀과의 단절을 명시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위”에 있는 자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그 지식이 변형되는 종속민의 입장에서 권력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있는 사람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더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다중의 사업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아래로부터’는 또한 정치적 궤적을 지칭한다. 즉 명령을 전복할 힘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할 능력을 가진 제도적 기획을 지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