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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3)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당신은 어셈블리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하기와 번역이 의미하는 바의 변화를 언급하고, 말들의 전유(appropriation)를 중요한 정치적 행위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중의 기업가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정립합니다. 하지만 200년 넘게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왔던 기업가성(entrepreneurship)’과 같은 용어를 그렇게 전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한 전유 행위를 통해 비판이 약화되고 구분들이 흐려질 위험은 없을까요?

답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책이 출간되자마자 특히 이 이슈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의 작업에서 늘 말들을 되찾고 재사용하며 그 의미를 전도시켜왔습니다. 가령, 아마도 ‘제국’은 정치학의 역사에서 가장 학술적이고 전통적인 용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윤리의 일부인 말들을 전유해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되기는커녕,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언어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전도(顚倒)의 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위한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들을 되찾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업가성을 말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 혹은 ‘다중의 기업가성’을 말합니다.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을 말하는 것은, 노동의 거부를 말하는 것과 같은 잠재성과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결국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힘은 이와 같은 재전유의 행위에 있으며, 이때 전도(顚倒)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다중에게 군주론끝부분에서 제시된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으라고,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중으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요구이지요. 이때 본질적인 것은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to take power differently)’는 말입니다. 이 말로 당신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공통적인 것혹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르게는 평등 없는 자유인 권리개념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좌파가 제안하는 자유 없는 평등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라는 정식화는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바,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다중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을 코뮤니즘(communism)’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통주의(commonism)’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연대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답 : 왜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지 않냐고요? 아마도 그 말이 최근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남용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공통적인 것의 정치 기획을 다시 ‘코뮤니즘’으로 부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마이클이 아니라 다중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담론에서 연대가 어디에 위치하냐고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연대가 있습니다. 연대는 우리 담론의 원리적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대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중 세 가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1) 고독, 홀로 됨의 거부에 있어서 질료인으로, 2) 생산하는 협력에 있어서 작용인으로, 3) 사랑에 있어서 목적인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이론적 구성 전체의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이 다름 아닌 연대에 있습니다. ‘공통주의(commontismo, commontism)’는 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홀로 생산할 수 없으며, 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안들은 연대의 제안, 혹은 홀로 됨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제안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대를 정의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공통적인 것을 향한 발본적 이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대를 향한, 홀로 됨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와 끔찍한 공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거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끝장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진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면, 이 끔찍한 고독을, 그러나 또한 이 거대한 열망을 알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막은 모든 면에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다음 질문이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작(前作)들에서처럼,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오큐파이 운동들이 다중의 반란을 증명한다는 낙관적인 생각, ‘가능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아마도 처음으로, 오큐파이 운동들이 시도한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당신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향 전환, 즉 초기의 낙관주의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혁명의 이념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작업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해결방안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난 10년 간 오큐파이를 비롯한 여러 운동들이 부딪혔던 한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 운동들이 스스로를 제도로 번역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시도하거나 실제로 제도를 형성했던 곳에서도 모두 운동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로부터 탄생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출발한 상황을 배반하고 만 포데모스(Podemos)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모든 논쟁들을 자세히 따라가본 후 포데모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략과 전술 사이의 관계의 역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오직 전술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낙관적이냐가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하려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커먼즈 운동의 한계들을 살피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권력 장악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권력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했듯이, 이것은 온전히 ‘권력을 다르게 잡기’에 관한 것, 그리고 이 발본적인 이행/역전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포퓰리즘을 다룹니다. ‘피플(people, 국민)’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피플’ 개념은 홉스의 논리, 주권과 재현(대의)에 관한 부르주아적 노선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피플은 다중을 훼손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오직 그 목적만을 가집니다. 피플의 논리에 따르면, 다중은 주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사라지는 단일한 피플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합니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원본 표지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홉스에 맞서, 단호하게 다중(multitudo) 개념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질서가 형성될 때에도 다중의 자연적 권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에서 증명하려고 했듯이, 그리고 『어셈블리』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는 ‘다중’과 ‘공통적’(comunis)이라는 개념을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와 민주주의의 전체 이슈를 압축합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상력, 사랑 그리고 주체성이야말로 특이성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공통적으로 되는 특이성과 주체성, 스스로를 새로이 창안되는 제도로 번역하는 특이성과 주체성은, 공통주의를 요약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 현재의 디지털·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관련하여, 당신은 또한 비판에 대해, 당신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기술비관주의(techno-pessimism)라 부르는 것에 대해 숙고합니다. 당신은 근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은 오직 대공장 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발전국면과만 유효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의 비판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 비판의 한계는, 낭만주의 시기에 혁명적 이념과 해방의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계몽과 근대적 사유의 뒤집어진 상(), 계몽의 변증법역시 사로잡혀 버리고만 그 역상(逆像)과 관계된 것일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한계는 해방적인 근대 사유와 자본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까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의 대안적 근대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주요 용의자들로 간주했는데요 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가 그들의 비판적 작업에 빚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주의의 발전과정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1944)의 결론들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극단들, 극단주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당신은 한계로 데려가고 당신은 거기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밀폐된 우주를 개념화한 것입니다. 노동자주의는 이 밀폐된 우주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것을 부수어 열 수 있는지를 자문(自問)했습니다. 노동자주의 시절에 우리는, 그들이 멈춘 곳에서 멈추지 않고, 밀폐된 우주, 자본주의의 우주, 도구적 합리성이 넘쳐나는 우주, 통제와 억압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주를 출발점으로 삼되, 이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의 세계이며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이 밀폐된 우주를 강제로 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주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이 일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기 위한 쇠지렛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자식이지만, 또한 그것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주의에서(그리고 『어셈블리』에서도 역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에 맞서 재발견했던 것은 존재론, 계급투쟁, 주체화의 가능성입니다. 1968년 이전의 마르쿠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작업입니다. 그는 아도르노의 학생이었는데 197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형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작업인 『구성과 계급투쟁』(Konstitution und Klassenkampf)(사후 1971년에 출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하려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의 담론은 정치적 행동, 해방, 총체적 착취와의 단절을 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비물질적·지적 노동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치 역시 이러한 발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는 메를로 퐁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기원한 기본틀을 현상학과 맑스주의의 교차 속에서 발견합니다.

 

: 당신이 지식인, 사상가, 연구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미래 세대에게 과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답 :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 내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모든 것을 연결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 그것은 내가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철학자로서도, 사회학자로서도, 때로는 심지어 직업 정치인으로서도, 말하자면 내가 수행한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적으로 나의 코뮤니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맡지 않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코뮤니즘이 다시 사람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통주의 투사야말로 지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

 

 




대담 : 정치의 새로운 중심으로서의 도시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 전역의 도시들에서 시민들이 (플랫폼들, 운동들, 국제적 네트워크들을 통해)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영향을 미치는 경로들을 창출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자치도시 플랫폼인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의 창립자인 쑤비라츠(Joan Subirats)는 도시들이 어떻게 불확실성을 다루고 새로운 유형의 보호를 제공하며 첨단 거대기업들이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소유하는 추세를 역전시키고 심지어는 난민 같은 문제에 대하여 국민국가들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이 글은 ‘어번 커먼즈’에 대한 일련의 글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린유러피안저널』(Green European Journal) 16호 「장안의 화제 : 유럽 도시 탐구」(“Talk of the Town: Exploring the City in Europe”)가 그 출처이다. 이 글에서 DIEM25의 마르씰리(Lorenzo Marsili)가 바르셀로나 자율대학의 통치 및 공공정책 연구원의 창립자이자 원장인 쑤비라츠를 인터뷰한다.

—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마르씰리: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라는 유령이지요. 당신은 당신이 바르셀로나에서 하는 일이 왜 그토록 상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쑤비라츠: 분명 다양한 요인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의 요인은 플랫폼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독점적인 디지털 자본주의로의 변형인데요, 국가는 여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빅 플레이어들(big players)이 투자펀드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부채와 긴축정책의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동시에 인구는 점증하는 어려움에 처하며, 불확실성,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미래에 무슨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감정입니다. 나의 생활수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러 해 전에 철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상품화를 향한 운동과 그에 맞서는 보호의 운동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요?

마르씰리: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호소합니다.

쑤비라츠: 네, 국가가 보호를 요청할 고전적인 장소입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외국인혐오적인 논리를 따르는 국가가 여전히 보호를 요청할 공간이며, 국가는 많은 경우 국경을 폐쇄하고 사회를 폐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본래 다릅니다. 도시는 개방될 목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우리는 도시의 공기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원주] ‘도시의 공기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Stadtluft macht frei)는 ‘일 년 하고도 하루’ 이상 도시 주거지에서 산 정착자들에게 자유와 땅을 제공한다는 법의 원리를 설명하는 독일 중세 속담이다.)) 도시는 기회와 가능성들이 모이는 공간이죠. 도시 당국이 국민국가보다 정책권한과 권력을 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도시 당국과 정치적 당사자들 사이의 근접성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훨씬 더 밀착되고 구체적인 종류의 보호가 제공됩니다. 몇몇 일들—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이 달라지고 호전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는 말입니다.

마르씰리: 폴라니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철학 교수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두 번째 운동인 보호 운동은 주로 여성, 소수자,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 반해서 서구의 남성, 백인 생계가장들을 역사적으로 보호했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운동, 즉 자율과 해방의 운동의 필요성을 도입합니다. 도시의 ‘보호’는 전통적인 국가의 보호와 어느 정도까지 다를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이 아다 꼴라우(Ada Colau) 요인, 바르셀로나 요인, PHA[주택담보 대출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플랫폼] 요인 및 반(反)퇴거 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PHA와 관련하여 특별한 유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PHA로 가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으며 그래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는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예요, 활동가가 되셔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PAH의 고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황을 함께 바꿀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이 PAH의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것은 서비스 제공의 과정이 아니라 해방의 과정입니다. PHA는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아웃소싱 논리—“와서 당신의 쟁점을 우리에게 위임하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생각을 옹호해줄 것이다”—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위임하는 접근법은 PAH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PAH는 사람들을 보다 활동적으로 만듭니다.

마르씰리: 어떻게 이것이 제도화됩니까? 이런 정치화 과정들, 활성화 과정들—이 과정은 공동 소유권 및 공동 관리와 더불어 결국 커먼즈 담론의 바탕을 이루죠—은 어느 정도까지 시의 정책들이 됩니까?

쑤비라츠: 이것[PHA]은 2015년 5월에 시작한 중요한 기획입니다. 선거 당시 <바르셀로나 엔 꼬무> 성명서에는 4가지 기본 사항들이 있었습니다.(([옮긴이] <바르셀로나 엔 꼬무>에 대해서는 <커먼즈로서의 도시>, <괴물 시대의 커먼즈(2)>, <커먼즈 이행과 P2P(5)>, <장벽에 맞선 도시들> 등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다른 곳에서 다른 유사한 플랫폼들이 이 사항들을 채택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제도의 지배권을 시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제도는 포획되어서 우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점차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증가 추세이고 기본적인 사회적 보호메커니즘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보호제공 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응을 요구하는 사회적 긴급사태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위임하지 않는, 보다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정책의 공동생산, 결정의 공동창조 등등이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사항은 우리가 정치부패와 정실인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급여는 삭감될 필요가 있고, 업무는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권한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정치가 한층 더 윤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씰리: 그러면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쑤비라츠: 첫째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두 번째 사항과 관련하여 확실히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회적 긴급사태에 응답하기 위한 보다 면밀한 정책들을 만드는 것이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첫 번째 사항—다른 유형의 정치에 필요한 사회제도를 회복하는 것—과 관련한 정당성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둘째로는, ‘혁신의 도시들’ 어느 곳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어려운 점은 사회제도를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고 정책의 공동생산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존 제도들의 전통, 일상 업무, 작업방식들이 우리의 접근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매우 19세기적이고 20세기적인 접근법이 기존 제도에 존재합니다. 그 제도는 디지털 방식 이전의 것인데, 여기서 집단지성을 포함하는 방법이 관여되는 ‘공동생산’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씰리: 실리콘 밸리의 거인들이 모든 데이터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화폐화하는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기술 주권을 거론하는 국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있습니다. 당신은 디지털 커먼즈와 관련하여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쑤비라츠: 우리는 자치도시 의회가 사용하는 사유화된 소프트웨어 기반을 바꾸는 일과 그 의회와 소프트웨어 공급자들 간에 이루어진 계약을 통해 이런 서비스에 사용된 데이터가 기업에 이전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스마트 시티>(Smart Cities)와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obile World Congress)의 중심지인 도시에서 기술혁신이 도시의 접근법을 반드시 바꾸도록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포럼에 못 미치는 사고방식을 바꾸면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혁신과 기술주권을 담당하는 위원을 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차•버스•지하철 모두에 사용될 수 있는 교통카드에 대한 새로운 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카드는 공급자가 제조할 것입니다. 계약서에는 공공 당국이 바르셀로나 전 주민들의 지역 대중교통 데이터를 관리할 것이라고 명시됩니다. 여기서 주권은 국가주권 같은 것이 아니라 에너지•물•식량•디지털 주권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공적인 우선사항들이자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르씰리: 주권이 너무 자주 국가주권과 동일시되어서 저는 ‘근접성의 주권’(sovereignty of proximity) 내지 ‘주권(체)들’(sovereignties)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헌법처럼 많은 헌법들이 “주권은 국민에게 속한다”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국민국가가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헌법에서도 도시의 역할은 여전히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실제적 법적 권한은 그 범위가 좁습니다. 새로워진 거버넌스의 중심에 도시를 두고자 하는 시도라면 권한의 배분을 바꾸기 위한, 일국 수준의 정치적 싸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쑤비라츠: 저는 자치도시들의 ‘책임 수준’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치도시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폭넓은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책임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자치도시들의 ‘권한의 수준’—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낮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지역 내에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바로 이 이유로 <바르셀로나 엔 꼬무>가 카탈로니아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조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카탈로니아 엔 꼬무>라고 부르는데 <카탈로니아 엔 꼬무>는 뽀데모스와의 연합이라는 논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카탈로니아 수준—여기서 교육과 의료 정책들이 결정됩니다—에서나 국가 수준에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수준에서는 우리의 권한이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동원력이 우리의 권한보다 한층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립은 법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카탈로니아에서 주택과 관련하여 권한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권한은 자율적인 카탈로니아 자치주 정부(Generalitat) 내지 국가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정치적 동원을 통해 주택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고 그곳에서 베를린•암스테르담•뉴욕과 함께 <에어비앤비>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정치적 동학 때문에 <에어비앤비>는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스페인•미국•네덜란드 국가는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을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생각에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씰리: 도시와 국가의 대립이 흥미롭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는 유럽 전역의 많은 도시들—바르셀로나는 그중 한 도시죠—이 난민들을 맞아들이기를 바라지만 그 도시가 속한 국가들은 종종 이것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스페인 정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도시가 단독으로 일정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그런 불복종 행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당신은 국가정부에 불복종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난민재배치에 관한 유럽 시책’을 따르고 있고 정작 국가정부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쑤비라츠네, 좋은 실례군요. 저도 그 일은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난민이라는 큰 문제는 풀지 못하겠지만, 확실히 실질적인 영향력보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시 수준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그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일이 말 뿐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유사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민간투자기금이 건물을 구입하는 능력에 대해 조치가 취해진 바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시의회는 합법적으로 법을 어길 수 없지만 여러 방식으로 투자 펀드가 이런 거래를 하는 것을 한층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몇몇 경우에 자치시의회는 건물이 투기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자체를 구입함으로써 이러한 매입을 좌절시키기도 했습니다.

마르씰리: 독일 정치가 슈반(Gesine Schwan)은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를 우회함으로써 유럽수준의 난민 재배치와 자치도시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한 가지 제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연합을 지배하는 여러 수준의 기관들은 ‘국민국가에서 유럽연합으로’ 구조에 따라서 대부분 조직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와 달리 ‘자치도시에서 유럽연합으로’라는 구조를 생각하면서 이 기관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네, 저는 이 영역에서 우리의 경험들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들 사이에서 서로 벤치마킹하고 서로 배우려고 만든 <유로시티>(EuroCities) 같은 조직들이 있습니다. 이동성/유동성, 사회정책 등등을 다루는 워킹그룹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지역수준에서 조직화하는 이런 접근법을 더 추진해야 하며, 국가를 제치고 유럽연합과 직접 대화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국가들이 유럽의 의사결정 구조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 일은 전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유럽연합에서 동맹을 맺더라도 그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루어질 수는 있습니다. 저는 유럽연합이 그런 조치를 취하기를 꺼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하나의 방법은 지역 당국들이 모여서 유럽 포럼을 창출하여 힘을 키우고 이 영역에서 도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씰리: 당신은 국민국가들에게나 유럽연합에게나 약간은 대항권력으로 작용하는, 혁신 도시들의 유럽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쑤비라츠: 저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르셀로나 자치도시 당국이 이미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바르셀로나는 사라예보를 11번째 행정지구로 삼았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 Strip)에서 일하는 자치도시의 기술 담당자들과의 매우 밀접한 관계를 포함해서 바르셀로나와 가자지구 사이에 강한 협동관계도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도시의 국제협력 전통이 자리를 확실히 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반으로 한 작업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는 특성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연히 거주하는 공간들을 지배하는 초국가적인 정치구조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 이론가인 바버(Benjamin Barber)는 시장(市長)들로 구성된 전지구적 의회를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전지구적 수준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인 제안입니다. 전지구적 정부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럽에는 적어도 유럽 정부의 시뮬라크럼인 유럽의회가 있습니다. 당신은 도시들이 모여서 유럽의회 같이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그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구성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애초에 기존의 기관들, 관료들, 조직들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간은 오히려 아래에서의 마주침(상호작용)을 기반으로 그리고 (나폴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영향을 끼쳤던 시장들의 합법성을 바탕으로 해서 작동해야 합니다. 그 공간은 위로부터 정치적 자산을 빨리 만들려는 어떠한 욕망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작용하는 과정으로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복원력이 있을 것이고 결국 강력해질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도시들이 할 역할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제가 다니면서 도시행정과 관련한 이런 아이디어의 옹호자 역할을 할 때 종종 제가 깨닫는 것은 자치도시에 보다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이런 사안을 다룰 직원과 사무실이 부족한 경우가 매우 잦다는 것입니다. 도시들이 전지구적으로 그리고 유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면 도시들은 관련 업무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쑤비라츠: 분명히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메트로폴리스 접근법을 더 강화한다면, 당신이 단점으로 언급한 것들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자치도시라는 용어가 항상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는 넓이가 600제곱킬로미터이고, 바르셀로나는 100제곱킬로입니다. 파리는 파리 시(the City of Paris)와 교외를 포함한 파리(Greater Paris)로 나뉩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시보다 ‘교외를 포함한 바르셀로나’라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150만 명의 거주자에서 350만 명의 거주자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권을 형성하는 25개 타운위원회는 국제적 과정을 육성하는 데 자원을 투자하기로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파리는 이미 이 일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파리에는 메트로폴리스적 차원이 있어서 그것을 더 강화할 수 있거든요. 직원과 선례가 부족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도시가 국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국가를 거쳐야 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상황은 메트로폴리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씰리: 본격적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거론하며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상위 100대 도시들이 전 세계 GDP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을 생산합니다. 2017년 6월에 바르셀로나는, 국가지도자는 점점 더 다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전지구적 과제들을 다룰 공동기획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 시장들을 한데 모아 전지구적 정상회담인 <대담한 도시들>(Fearless Cities)을 주최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어떤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제 생각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인 어젠다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고, 도시들을 아주 쉽게 끌어들여 연결시킬 수 있는 이슈들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분배 문제, (런던•시애틀•뉴욕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던) 최저임금 문제 및 주택•초등교육•에너지•물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분명히 경계들을 가로질러 세계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이슈들로 시작할 수 있으며 유럽 전역에서 과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권과 기관들에게 자극을 줄 것이고 우리는 좀 더 빨리 도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정책 분야의 결점들을 보지만, 이것은 정치체의 결점들을 부각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