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인가


  • 저자  :  Murray Bookchin
  • 원문 : Utopia, not futurism: Why doing the impossible is the most rational thing we can do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민서
  • 설명 : 아래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1978년 연설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연설에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자신을 환경론자•미래주의자가 아닌 생태론자•유토피언으로 소개하며 환경론과 생태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환경론은 자연을 장악하고 자연에 생산을 강요하는 반면에, 생태론은 자연과 인류의 진정한 조화를 믿으며 이 조화는 근본적으로 인간 서로간의 조화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에 편하도록 연설투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 연설은 여기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으며, 이 연설의 편집된 텍스트는 ‘원문’에 걸린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편집자는 Constanze Huther이다.)

  1. 미래주의란 무엇인가?

미래주의란 오늘날 존재하는 바의 현재가 미래로 투사된 것입니다. 이러한 투사는 양적인 관점에서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들이 다우주적 기업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 다우주적 기업을 우주에서 키우고 싶어 하며, 달을 식민화하고 화성은 물론 목성에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미래주의입니다. 이러한 미래주의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미래가 오늘 존재하는 현재와 아주 다르게 보이도록 현재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를 바꾸어 미래가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주의입니다.

우선 저는 지구를 우주선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반대합니다. 지구는 우주선(([편집자주] ‘우주선 지구(호)’는 1960년대를 시작하는 유행어로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이 UN에서 한 연설로 유명해졌고 유명한 발명가이자 사상가인 풀러(R. Buckminster Fuller)가 종종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 당시 생태론적 의식이 증가하면서 이 용어가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유한성과 세계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북친은 풀러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수도 있으며 풀러는 그 당시에 강연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이 아닙니다. 지구에는 밸브나 지구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온갖 종류의 레이더 장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가 우주선처럼 발사체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배관시스템(plumbing)도 없습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성장하고 발전하는 중입니다.

둘째로 제가 보기에 전자기술의 언어는 생태론의 언어와 대조됩니다. ‘입력’(input), ‘출력’(output), ‘플러그인’, ‘피드백’ 등의 어휘로 구성되는 전자기술의 언어는 미래주의의 언어이며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언어이고, 조작의 언어이자 대중사회의 언어입니다. 사실 문제는 언어라기보다는 그 뒤에 자리한 감성입니다. 미래주의 언어의 뒤에 있는 감성이 저를 괴롭힙니다. 미래주의의 언어와 감성에서는 사람들이 분자화되고 원자화되며 종내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로 축소됩니다. 생태계도 에너지를 돌리고 필요할 때 밸브를 틀고 잠그는 배관시스템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에너지가 생태계를 통해 이동하는지를 알아야 하므로 저는 이것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생태계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식물에게도 고유의 삶이 있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에너지만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기에 우리는 이것을 죽은 것(무생물)과 구별되는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식민화해야 한다고 느끼는 곳으로 우주선을 타고 나가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먼 우주와 관계하거나 별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도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우리 자신의 지역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폐허가 되어 침몰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저 바깥에 우주정거장을 쏘아 올리는 방법과 지구촌(a global village)(([편집자주] 북친은 현대 대중매체로 인해 우리가 ‘지구촌’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주장을 가리키고 있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어떤 공동체도 없이 원자화 상태에서 살면서 전지구적으로 전자적으로 서로 소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좋은 물리학, 좋은 기계학, 좋은 역학일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유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생태론은 아닙니다.

 

  1. 생태론이란 무엇인가?

생태론적인 것은 발달과 성장입니다. 발달과 성장의 경우에는 그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중에 그 목표로 발달•성장해 나아갔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성장은 사업적인 의미에서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잠재력의 성장, 인간정신의 성장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태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입력•출력•피드백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진짜 문제는 토론과 대화, 개성의 인정, 성장과 발달입니다.

지구가 우주선이라고 믿는다면, 우주선이 배관시스템인 것처럼 세상이 시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뉴턴 식의 사고방식인 것이죠. 더군다나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들어올릴 수 있는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거나(([편집자주] 역시 풀러를 비꼰 것인데, 풀러는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미래의 주택 모델로서 종종 홍보했다. [옮긴이] 지오데식 돔은 다면체의 면을 분할해서 구면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돔을 말하는데 표면이 삼각형의 구면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결코 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어떤 유형의 전자통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변화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발달과 성장의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생태론의 출발점은 장소를 사랑하기,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사람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직접적인 생태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릴 자연이 없는데도 우주의 일체성과 우주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기만이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 땅, 공동체 및 집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기만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없고, 집에 대한 감각이 없고, 유기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1. 생태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생태론과 관련한 저의 고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태론적이지 않은 것이 생태론적인 것으로 둔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론적인 문제들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들로 축소되는 정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온갖 부류의 기술자들이 전자기술의 지식을 통해, ‘노하우’를 통해, 그들의 ‘피드백’과 ‘입력’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곳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생태론으로 오인될 때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는 우리가 처한 조건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 미래주의와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전제하고 그것을 미래로 투사합니다. 그리고 숫자게임을 합니다. 이러한 숫자게임, 인구게임(population game, 개체수게임),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등 독일 파시즘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견해들이 오늘날 생태론의 이름을 달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생태론적∙비유기적인 인구생태학적 발상들은 전체주의적인 미래 비전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인간적으로 생각하라

중요한 것은 ‘작게 생각’하는 것(think small)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think human)(([편집자주] 이것은 슈마허(E. F. Schumacher)가 집필한 대단히 인기 있는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1973)에 대한 언급이다. 이 책은 1973년에 출판되었다.))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들입니다. 그리고 그 생태계들의 온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흙,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가 일정한 파수(把守)의 책임을 느끼는 흙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것만이 아니라 생태론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적합성만이 아니라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입니다. 죽은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자처럼 되어서, 사람들을 우주선에서 조작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전자기기를 통해 연결되는 물건들로 보거나, 또는 사람들을 뗏목이나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발로 차서 쫓아버리는 존재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에코파시즘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을, 이런 가치를 담은 단어들 혹은 개념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1. 유토피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토피아 전통으로, 단어의 가장 풍부한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전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토피언이 되는 것의 의미는 ‘상상력에게 권력을!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하라,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프랑스 학생들의 발언에 들어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에는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것, 즉 지구 자체의 파멸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한다는 것은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개념을 창출하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은 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주의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비교적 소수의 그룹들로 구성된 생태론적인 공동체를 개발하는 것, 땅을 재개방하고 유기적인 텃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재사용하며, 우리 모두가 참가해서 원예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농업을 개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② 서로를 알 수 있는 공동체, 즉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 이런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 주민회의에서, 유토피아주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제도적 구조들에서 둘러앉는 것이 선행되어 합니다.

③ 우리 고유의 테크놀로지들을 개발하는 것.

④ 수도꼭지를 수리하는 법을 스스로 알고, 나아가 스스로 공동체를 창출하는 법을 아는 것.

⑤ 풍부하게 다양한 인간존재가 되는 것. 우리는 농부-시민이 되어야 하고 시민-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⑥ 벤 프랭클린(Ben Franklin)도 18세기에 믿었던 그 이상(理想), 즉 우리가 인쇄할 수도 있고 인쇄한 것을 읽을 수도 있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⑦ 단지 변화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성장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

⑧ 단어들의 마법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개념의 마법과 풍부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생태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대화 및 창조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로고스(이성)가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유토피아입니다.

⑨ 푸리에의 전통으로, 뉴잉글랜드 마을회의의 풍성한 전통으로, 그 안의 건강한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 그 전통을 되찾고 새로운 유형의 연합주의를 배우는 것.

⑩ 미래 운동들을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사이의 새롭고 풍성한 의사소통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것.

⑪ 전자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생각하기. 시계와 물리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삶)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단지 작고 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⑫ 미래주의자•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론자•유토피언•예술가가 되기.

 

* 북친은 질의응답시간에 청중들로부터 다음 두 가지의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답했다.

  1. 기술에 반대하는가?

저는 테크놀로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테크놀로지의 쓸모가 아주 크다고 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테크노크라시, 다시 말해 기술자들에 의한 지배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에게 비인간적이고 그 규모에서 비인간적이며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과학기술 장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생태테크놀로지, 해방적인 테크놀로지, 또는 대안적인 테크놀로지—은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단순성과 소규모입니다. 저는 모든 곳에서 이 단순성과 소규모가 가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구석기시대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정치적 입장은?

모호한 철학적 원칙들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고 확고하게 제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비위계적인 형태의 공동체들, 식품 협동조합들, 동호회들, 이런 유형의 모든 조직들, 마을모임들이 미국 전역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처음에는 지역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어쩌면 국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연합할 때, 바로 이 조직체들이 직접적으로 본보기가 되거나 교육을 통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이 감성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듯 먼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이후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반동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뿐만 아니라 현상유지라는 이름의 관료체제와 더불어 진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로 편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관료체제 형태로 편성된다면 지구 자체의 파멸이라는 궁극적으로 같은 결과로 끝날 것이므로 우리가 태양열 발전을 사용하든 신경가스를 사용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화석연료 대신에 태양열에너지•풍력•메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존재하는 바로 그 다국적•기업적•위계적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변명거리가 될 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