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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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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


데이빗 볼리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여러 심대한 위기들에 대처하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난제에 직면한다. 변혁에 공격적으로 저항하는 현 체제가 부과하는 제한 내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구축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는 매력적인 대안들을 다듬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현할 믿을만한 전략들을 포착하는 것도 포함한다.

나는 패러다임이자 담론이고 윤리이며 일단의 사회적 실천들인 커먼즈(the commons)가 이 난제를 극복하는 일에서 매우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커먼즈는 정치철학이나 정책 과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살아있는 과정이다. 그것은 명사라기보다 동사이다. 커머닝(commoning)―공유된 자원을 관리하는 체제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상호지원, 갈등, 협상, 소통 그리고 실험의 행동들―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주된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생산(자급), 거버넌스, 문화 그리고 개인들의 관심이 혼합되어 통합된 하나의 체제로 된다.




나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는 이 글에서 커먼즈와 커머닝에 대한,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구축에 기여하는 데서 커먼즈와 커머닝이 가지는 거대한 잠재력에 대한 생생한 개관을 제공하려 한다. 나는 많은 커머너들(commoners)에게 활력을 부여하는 변화이론을 설명할 것이다. 특히 커머너들이 자본주의 시장들을 순화하고 자연의 파수꾼들이 되며 공유된 자원이 주는 혜택을 상호화하려고((‘상호화하다’는 ‘mutualize’의 번역어이다. 사실 좀 어색하다. 이 동사는 맥락에 따라 맞추어 옮기면 어색함이 사라진다. 현재의 맥락에서라면 ‘골고루 나누다’로 옮기면 무난하다. 다른 경우에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아래아 한글의 사전에는 ‘상호적으로 하다’라는, 마찬가지로 어색한 번역어가 등록되어 있다. OED사전을 보면 ‘서로 주고받다/ 교환하다,’ ‘똑같이 나누다,’ ‘평등하게 하다,’ ‘상호적 원칙에 따라 조직하다,’ ‘(회사를) 상호적 원칙에 따라 재편하다’의 의미들이 등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정밀하게 보면 사전에 등록된 것보다 더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단어는 거의 하나의 개념의 위치에 오른 것이라서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 번역하기가 난감하다. 명사는 그 개념만을 추출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맥락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는데 어느 맥락에 맞추어 옮길 것인가?····· 따라서 명사를 ‘상호화’로, 동사를 ‘상호화하다’로 일관되게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색함이 있지만, 이 어색함을 극복하면 우리말 ‘상호화(하다)’가 이전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진 말이 된다. ‘상호화하다’에 위에서 거론한 모든 의미가 포괄되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비극적이게도 대한민국은 한국어의 의미의 확대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왔다. 의미가 확대되지 않는 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시도하는 측면에 초점을 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어 신자유주의 경제와 정치체를 비판할 것이며, 커먼즈가 어떻게 생태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는지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며, 커머너들이 추구하는 주된 경제적·정치적 변화들을 서술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추구할 주된 수단을 서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현 ‘체제’를 구성하는 시장/국가 동맹체에 관하여 함축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커먼즈를 통한 자급과 거버넌스의 세계는 정치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러한 커먼즈의 세계는 무자비한 경제성장, 집중된 기업권력, 소비주의, 지속 불가능한 부채, 폭포수 쏟아지듯이 일어나는 생태파괴의 상호연관된 병리현상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커먼즈 운동의 목표들

 



커먼즈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이 성취하려고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진술해놓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물질적 의미에서나 정치적 의미에서나 그들의 ‘commonwealth’(공통의 부/공통체)를 되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옮긴이] ‘commonwealth’는 ‘공통의 부’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커머너들의 민주적인 공유자원관리 공동체―이것을 ‘공통체’로 옮긴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네그리·하트 지음 『공통체』를 참조하라―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국가가 자본과 함께 근대를 장악한 이후에 ‘commonwealth’는 ‘state’(국가)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공통체’로서의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다.)) 커머너들을 그들의 공유 자원―토지와 물에서 지식과 도시 공간들까지―을 사유화하고 시장화하는 만연된 행태들을 철회시키고 그 자원 및 공동체의 삶을 다스리는 데 더 많이 직접 참여할 것을 다시 주장하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어떤 자원들은 양도 불가능하게―시장에서 판매되지 못하게 하여 미래의 세대를 위해 보존되게― 만들기를 바란다. 시장 종획을 역전시키고 커먼즈를 재발명하는 이 기획은 국가규제가 일반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즉 자원을 남용하고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장 행위에 대한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를 성취하고자 한다.


참여의 조건은 각자 다르지만, 세계 전역의 수많은 활동가 공동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에 저항하고 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창출하는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여러 수준에서(지방적, 지역적, 일국적, 초국적 수준에서), 그리고 다양한 자원 도메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을 커먼즈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술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커머너들이 보기에 이 신념체계는 자원을 소진하는 시장경제의 엔진, 즉 생태계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며 공동체들을 약화시키고 개인들(특히 빈자와 약자들)을 수탈하는 체계의 엔진이다.


그러나 커머너들은,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종래의 정치와 규제를 자기방어 혹은 전진적 변화의 도구로 더 이상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거정치와 정책에 의해 추동되는 해결책들은 이 방면에 부패가 엄연히 존재하는 때에는 내적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커머너들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최선의 상황에서도 종래의 정치제도들은 법에 얽매어 있고 비용이 많이 들며 전문가들에 의해 추동되고 관료주의로 인해 유연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부패될 수 있는데, 이런 점들로 인해 이 제도들은 ‘아래로부터의’ 진지한 변화에 적대적인 도구가 된다.


커머너들은 정책에는 정치적으로 필요하거나 실행 가능한 만큼만 관여하고 자신들의 기획을 위해 보호받는 별도의 공간들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어왔다. 일반적으로 커머너들은 국가 당국에 자신들의 이익을 보증하거나 관리해달라고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삶의 영역들―도시들, 마을공동체들, 음식, 물, 땅, 정보, 기반시설, 신용과 화폐, 사회적 서비스 기타 등등―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과 통제권을 추구하기를 더 원했다. 독립적인 커머닝의 과정 자체에 여러 혜택들이 들어있다. 커머닝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예를 들어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지역식량자급, 협동조합들, 대안적 통화들―자본이 추동하는 시장에 대한 준독립적이고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안들을 창출한다.


커먼즈의 더 심대한 영향력은 문화적인 것일 수 있다. 커머닝은 사람들의 상호 연관 및 ‘자연’과의 연관을 다시 살린다. 커머닝은 새로운 열망들과 정체성들의 구축을 돕는다. 커먼즈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시민·유권자의 역할을 훌쩍 뛰어넘는 개인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건전한 문화적 가치들을 구현하고 책임과 권리를 모두 동반하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접하게 해준다. 시장 문화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침투하는 때에는 커머닝이 새로운 문화적 공간들을 가꾸고 내적·주체적 경험들을 양성한다. 시장 문화의 조작적인 브랜드 만들기 그리고 활력을 앗아가는 스펙터클들과 관계가 있기보다는 인간의 조건 및 사회적 변화와 훨씬 더 관계가 있는 공간들이요 경험들이다. 결국 커머닝의 실질적 의의는, 고정된 철학적 비전이나 정치적 과제가 핵심이 아니라 성공적인 커먼즈를 구축한데 참여하는 행동이 핵심이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커머너들은 “행동이 말보다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라는 개념예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커먼즈’가 의미하는 것

 


커먼즈라는 것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혼란스럽게 다가가는 것은 ‘커먼즈’라는 용어가 매우 많은 의미들을 가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용어의 정당한 용법에서 파생된 만큼이나 역사적 오점―‘커먼즈(공유지)의 비극’―에서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커먼즈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저 기술(記述)적인 것이 아니라 환기적이고 수행적이다. 즉 그 단어들은 정체성,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의 표식들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커먼즈의 전복적이고 전략적인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커먼즈’라는 단어의 뒤얽힌 현대적 용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십여 년 동안 교육받은 대중의 대다수는 커먼즈를 정부의 강제와 연관하여 실패한 관리체제로 간주해왔다. 이런 생각은 생물학자 하딘(Garrett Hardin)이 1968년에 쓴 유명한 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으로 소급될 수 있다. 학술지 『과학』(Science)에 실린 짧은 이 글에서 하딘은 자신의 가축의 방목을 제한하는 ‘합리적’ 인센티브를 가진 목부(牧夫)가 단 한 명도 없는 공유된 방목지의 우화를 제시했다.((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no. 3859 (December 1968): 1243.)) 그 불가피한 결과로 각 목부가 이기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공통의 자원을 사용할 것이고, 이것이 불가피하게 과다사용과 파멸로 이를 것이라고,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을 낳을 것이라고 하딘은 말한다. 그가 주장는 최선의 해결책은 해당 자원에 사적 소유권을 할당하는 것이다.



사실 하딘은 커먼즈(공유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픈액세스 체제 혹은 모든 것이 공짜인 무료입장의 체제를 서술하고 있다. 커먼즈에는 자원과 그 사용을 다스리는 뚜렷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커먼즈의 커머너들은 나름의 접근 및 사용 규칙들을 협상하고 책임과 권리를 할당하며 불로소득자들을 찾아서 벌을 주는 감시체제를 세우는 등 커먼즈를 유지하는 행동을 한다. 커먼즈 학자 하이드(Lewis Hyde)는 하딘의 “비극” 테제를 “소통하지 않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관리되지 않은 자유방임적 공유재의 비극”이라고 재치 있게 규정했다.((Lewis Hyde, Common as Air: Revolution, Art and Ownership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0), 44.))



인디애나 대학의 정치학자인 오스트롬 교수(Elinor Ostrom)는 주류경제학이 망각 상태에 처박아놓았던 커먼즈를 다시 구해내는 데 기여했다. 1970년대에서 2012년 사망하기까지에 걸친 그녀의 활동 기간 동안 오스트롬은 주로 빈민국의 시골에 자리 잡은 수백 개의 공동체들이 사실상 자연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여러 방식들을 기록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보아 커먼즈는 작동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잘 작동할 수 있었다. 오스트롬이 다루려고 한 중심적 논제는 “독립적인 상황에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불로소득, 회피 혹은 기회주의적 행동의 유혹에 직면해서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려서 지속적인 공동의 혜택을 획득할 수 있는가”였다.((Elinor Ostrom,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42.))



오스트롬의 획기적인 1990년 책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Governing the Commons)는 성공적인 커먼즈의 8개 핵심 “설계원칙들”을 포착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다른 책들은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의 기획과 의사결정에 힘을 주기 위해서 거버넌스(다스림)를 다양화하고 중첩화하는 방식들(즉 그녀가 “다원정치”polyarchy라고 부른 것)을 탐구했다.((Elinor Ostrom, Understanding Institutional Diversit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Joanna Burber, Elinor Ostrom et al., Protecting the Commons: A Framework for Resource Management in the Americas (Washington, DC: Island Press, 2001))) 이 작업으로 오스트롬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200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 구성된 노벨상 위원회는 현행의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화된 시장 거래들만큼이나 경제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롬의 연구는 경제적 분석과 거기서 커먼즈가 하는 역할의 재개념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그 다음 단계인 정치적 참여를 취하지 않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커먼즈에 관한 두 대비되는 수준의 담론, 즉 관리되지 않는 자원으로서의 커먼즈(하딘)와 사회적 제도로서의 커먼즈(오스트롬)를 살펴보았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주류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커먼즈를 하딘의 의미로, 즉 소유되지 않은 비활성 자원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 설정은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진화하는 사회적 활동임을, 즉 커머닝임을 인정하는 데 실패한다. 실제로 커먼즈는 자원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규칙들, 전통들, 가치들을 고안함으로써 자원을 관리하는 공동체로도 구성된다. 셋 모두가 필요하다.


요컨대, 커먼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셋째 수준의 담론은 인습적인 학계를 심란하게 하는데, 이는 이 담론이 논의 전체를 ‘경제인’(homo economicus)에 기반을 둔 익숙한 경제주의적 틀 바깥으로 몰고 가서 그들이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지리학 및 기타 ‘부드러운’ 인문과학들의 기발한 발상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가는 문을 열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단정한 양적, 기계론적 모델들을 구축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토록 많은 특이한 지역적·역사적·문화적·간주체적(intersubjective)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면 커먼즈에 대한 표준적·보편적 유형론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커먼즈 담론은 인간 실존과 사회적 조직의 엉망진창인 현실을 표준적인 경제학, 관료체제, 그리고 근대 자체의 가짜 도리(道理)와 세계관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 어떤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정한 접근·사용 및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집단적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한다는 점에 현실의 복잡성이 있다. 이는 수많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예를 들어 공동체 극장, 오픈소스 현미경 사용법, 인도주의적 구조를 돕기 위한 오픈소스 맵핑,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호의 베풀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커먼즈들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이러한 ‘세계를 만드는’ 공동체들 각각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들, 전통들, 역사, 간주체성에 의해 활성화된다. ‘안에서 보면’ 커먼즈는 그 하나하나가 다 사회적으로 고유하다.



일단 우리가 공통적인 문제의 존재론적 전제들을 인정하고 그 전제들이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사회적 현상의 새로운 우주론으로 진입하게 된다. 커먼즈와 환경 사이의 경계가 (사회생태론적 체계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흐려진다.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요인들이 일정한 커먼즈를 정의하고 어떤 요인들이 우연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서 골치 아픈 방법론적 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커먼즈를 총합적인 살아있는 체계로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패턴 언어’라는 발상과 같은 새로운 발견법들과 템플릿들이다.((David Bollier and Silke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Amherst, MA: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커먼즈의 존재론적 가변성은 경제학자들과 근대주의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불가해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커먼즈를 단지 자원으로서만 간주하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모든 것이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범주들―신자유주의적 시장 문화의 필수적 조건―로 산뜻하게 분류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듯하다.



그런데 커먼즈의 세계에서는 지역적이고 변별적이며 역사적인 것이 중요성을 가지는 인간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고유한 경험들, 토속적 전통들, 문화적 가치들, 지리가 인정되어야 하고 특권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몸으로 겪은 경험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더 나아가 그러한 특수성의 발생적이고 본래적인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언어인 동시에 사회·정치·경제적 기획이다. 토착민 커먼즈는 도시 커먼즈와는 매우 다를 것이며, 이 둘 모두 가령 위키하우스 디자인 공동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커먼즈들이다. 에스코바(Arturo Escobar)의 말을 빌자면, 커먼즈는 우리에게 “다원적 우주’(pluriverse)가 무엇인지 알려준다.((Arturo Escobar, “Commons in the Pluriverse,” in 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348–360.)) 새로운 세대의 진화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있듯이, 많은 극히 다양한 국지적 사례로 발현하는 공유된 DNA, 이것이 인간 종의 기저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왜 우리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은 이 사실을 반영할 수 없는가?


커먼즈 패러다임은 중요한 존재론적 문턱을 넘을 것을 우리에게 청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의 산업사회들에 사는 주류 정치와 경제의 행위자들은 문턱을 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권리’, ‘바이오문화적 프로토콜’, 지역 공동체들의 자결(무역협정들이 시장 투자에 대한 민주적 제약을 약화시키려고 하므로, 여기에 민족자결도 포함될 수 있다) 같은 생각에 대한 서양의 경멸에서 본다. 커먼즈는 시장가격과 사유재산화 너머에 있는 일련의 사회적 가치들에 이름을 붙인다. 커먼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정신을 이루는 경제학의 합리적 행동자 이론이나 신다윈주의적 적자생존 내러티브가 파악할 수 없는,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이며 경험적이고 간(間)세대적(intergenerational)이며 생태적이고 심지어는 우주적인 실재들을 존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커머너들은 생태계와 인간을 이러저러한 정도로 대체 가능하고 상품화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자유주의적인 관료제 국가와 재래식 과학의 세계관에 도전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우리의 노동이 구매·관리되는 ‘인간 자원’으로 취급되며, 꿀벌에 의한 가루받이는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자연의 서비스’로 간주되고, 심지어 생명체들도 특허를 낼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는 대상이다. 살아있는 체계들의 양도 불가능성과 그 본래적 (교역될 수 없고 공유되는)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커먼즈는 체제 차원의 변화, 그저 정치적이고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를 발본적으로 요구한다.

 


왜 커먼즈 담론이 중요한가

 


이렇게 커먼즈 담론의 현대사를 살펴본 것은 그것이 커먼즈 운동이 현실화하고자 하는 ‘변화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커먼즈의 언어는 우선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의 방향을 다시 잡아주기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시장 종획의 현실과 커머닝의 가치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조명하는 것을 돕는다. 커먼즈 언어가 없다면, 이 두 사회적 현실은 문화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으로, 적어도 주변화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커먼즈 담론은 종래의 정책담론이 무시하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도덕적·정치적 주장을 하는 길을 제공한다. 커먼즈의 개념들과 논리를 사용하면 자신들의 친화성과 공유된 과제목록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무리의 커머너들을 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지고의 가치들과 우선적 관심사들을 체계의 상이함의 관점에서 더 쉽게 천명할 수 있다. 커먼즈의 일관된 철학적 내러티브는 지적 섬세함 이상의 것으로서, 자본이 자연 대 노동, 노동자들 대 소비자들, 소비자들 대 공동체와 같은 식으로 이익들을 서로 상충시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커머닝의 언어와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피고용인’과 ‘소비자’라는 제한적인 사회적 역할을 넘어가서 전인적 인간들로서 더 통합된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변화에 대한 욕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자본이 구사하는 ‘분할하여 정복하기’ 전술에 굴복하지 않고, 시장 오용의 다양한 희생자들이 그들의 공통된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개발하며 새로운 유대관계를 가꾸고 (바라건대) 자본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효율적 대안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이 건설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통합적 비전을 제공한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서 커먼즈 담론이 가진 잠재력은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비용편익 분석 담론이 음침하게 빛나는 반대사례인데, 1980년대에 미국 산업은 이 분석 담론을 환경, 건강, 안전 규제를 위한 기본 방법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첫 수는 일단의 사회적·윤리적·환경적 정책들에 시장경제와 수량화의 언어를 이식함으로써 그 정책들을 무력화시켰다. 이 담론은 제정법의 많은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흐렸으며 규제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나는 커먼즈 담론을 이에 버금가는 종류의 인식론적 개입으로 본다. 우리의 공유된 부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가치들을 되찾는 체제 차원의 방법인 것이다.

 


경제학과 커먼즈

 



앞에서의 논의가 함축하듯이, 커먼즈 운동은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를 변화시키려 한다. 커머너들은 ‘시장’을 지구의 자연 체계 및 우리의 사회적 욕구와 어떻게든 동떨어져 있는 자립적인 ‘자연적’ 사회영역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생태적인 것, 경제적인 것을 통합하고자 한다.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획기적인 책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시장 문화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친족관계, 관습, 종교, 도덕, 그리고 공동체를 밀어내고 사회의 주된 질서구축 원칙이 되었는지를 설명했다.((Karl Polyani,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Boston, MA: Beacon Press, (1944) 2014).)) 이러한 변형은 이제 역전되어야 한다. 그 동안 족쇄가 풀려있었던 자본과 시장은 사회 속에 다시 함입되어야 하며, 사회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자본 투자, 금융, 생산, 기업권력, 국제무역 등이 사회적 욕구에 종속되어야 한다.



커먼즈 운동은 연대하는 운동들과 함께 탈자본주의적이고 탈성장적인 질서를 위한 제도들과 규범들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는 시장 기반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단색의 주류 문화(monoculture)에, 인간의 가능성들에 대한 (생산자/소비자 쌍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는 감각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같이 편집한 책 『커머닝의 패턴들』에서 우리는 상이한 인간 능력들과 사회적 형태들에 기반을 두는 수십 개의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커먼즈들의 윤곽을 그렸다. 공동체 숲들, 지역 통화들, 팹랩들(Fab Labs), 자치체 수자원 위원회들, 국지적 가족경작을 지원하기 위한 경작지 트러스트들, 생물다양성을 파수(把守)하기 위한 토착민 ‘바이오문화 유산’ 지역들, 퍼머컬처 경작, 커먼즈 기반 기획들에 행정적·법적 지원을 해주는 ‘범(汎)커먼즈’(omni-commons) 조직들 등등이 속한다.((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그러한 상호화된 자급체계들이 개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이 체계들은 만족을 모르는 시장의 요구에 복무하는,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유리한 대안들이 된다. (짧은 방주 : 법적·조직적 형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의 파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많은 협동조합들이 사이비 조합주의와 관리주의(managerialism)로 타락한 사례들을 보기만 하면 안다. 그렇더라도 그런 형태들은 더 나은 소비 형태들로 이동해갈 잠재력을 제공할 수는 있다. 비록 소비주의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에는 못 미치더라도 말이다.) 또한 퀘벡, 이탈리아, 일본에서 사회적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제공하는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 모델에도 희망이 있다. 협동조합 형태들이 사유재산화된 디지털 플랫폼들을 대체할 필요도 있다. 이 플랫폼들은 현재 페이스북, 우버, 리프트(Lyft), 에어비앤비, 태스크 래빗(Task Rabbit), 미캐니컬 터크(Mechanical Turk) 및 기타 ‘공유경제’ 벤처기업들(즉 미시대여와 즉석노동 시장들spot-labor markets)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 협동의 과실을 사유화·화폐화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들을 위해 협동조합 모델들을 발명하려는 대대적인 새로운 노력이 2015년 11월 9일 뉴욕시에서 열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컨퍼런스에서 개시되었다.((Platform Cooperativism conference website, http://platformcoop.net.))


세계 전역의 커머너들은 착취적인 사유재산화된 마켓 플랫폼들과 기업 구조들을 대체하려는 여러 중요한 제도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쎈소리카(Sensorica)나 엔스피랄(Enspiral)과 같은 오픈밸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이들은 기업가들과 사회적 성향을 가진 커머너들의 협동적 디지털 ‘길드’로서 기능한다.


◉ 상호혜택을 위한 구매클럽과 재편된 생산/공급망. 이탈리아에서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에 의해 개발된 의류생산체계와 커먼즈 기반의 트러스트를 통한 지역 식량공급망을 재발명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 커먼즈(he Fresno Commons).


◉ 국가가 소유한 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상호화하는, 국가의 면허를 받은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 (알래스카 영구 펀드Alaska Permanent Fund 및 피터 반즈Peter Barnes가 제안하는 새로운 모델들.)


◉ 코드를 자유롭게 공유하고 때로는 공동체의 존경 받는 원로들이 이끄는 제휴 재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오픈소스 프로그래밍 공동체들.


◉ 모듈 방식의 저예산 자동차, 농기구, 가구 및 기타 유형의 생산물들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율생산(peer production) 디자인 및 지역 제조 공동체들.



미래에는 ‘블록체인 원장’―이는 비트코인을 가능하게 만든 소프트웨어 혁신의 산물이다―덕분에 열린 네트워크에서 움직이는 분산된 자율적인 조직들이 가능하게 되리라고 많은 첨단기술 종사자들이 예측하고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개개의 디지털 파일(비트코인, 문서, 디지털 신분)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 기관 같은 제3의 보증인 없이 확인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조직된 집단들이 디지털 신분을 확증하는 능력이 민주화됨으로써 (그러면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커머너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그 구성원들에게 특정의 권리를 할당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새로운 종류의 분산된 자치 조직이 생기게 된다. 블록체인은 네트워크 기반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s)을 위한 초보적인 (궁극적으로는 세련된) 틀을 제공할 수 있는데, ‘스마트 계약’은 집단 거버넌스의 다능한 형태들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디지털 커먼즈의 참여자들 사이에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회계 기반시설(an accounting infrastructure)로서 쓰일 수도 있다.((비트코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면 http://p2pfoundation.net/Bitcoin; http://bollier.org/blog/blockchain-promising-and http://www.nytimes.com/2015/03/02/ business/dealbook/data-security-is-becoming-the-sparkle-in-bitcoin.html?_r=1 참조.))



그러나 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의 다수가 풀지 못한 중요한 문제는 신용과 소득에의 접근이다. 재래의 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은, 심지어는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조차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기업이 아닌 커먼즈에 대출을 해주는 것을 난감해 한다. 예를 들어, 오픈소스 디자인 및 제조 생태계(open source design and manufacturing ecosystem)는 은행에 담보물로 내놓을 지적 재산이 없다. 그래서 이곳의 생산물들―연비가 좋은 오픈소스 차량들, 값싸고 지역에서 부품을 구할 수 있는 농기구들―은 확대를 위한 자본을 구할 수 없다. 다행히도 거의 잊혀진 협동적 금융의 역사적 모델들이 많이 재발견되어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커먼즈를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DIY 신용제도들, 대안 통화들, 스페인의 고테오(Goteo)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들이 포함된다. 스웨덴의 JAK은행에 의해 개발된 것과 같은 이자 없는 신용이 지역 이행경제들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준비되고 있는 한편, 다른 이들은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크라우드에쿼티(crowdequity scheme) 제도를 탐구하고 있다.((David Bollier and Pat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 (Berlin, Germany: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기본적인 요점은, 금융 및 화폐와 관련된 탈자본주의적 비전이 일정치 않게나마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회계와 교환체계들(통화, 신용 포함)을 창출할 태세이다. 이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재래의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대출과 시장 기반의 생산이 낳는 병리현상들의 다수를 피해가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많은 기존의 금융기관들이 이 부상하는 부문을 보완하고 지원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노스다코타 주가 설립한 것과 같은 공공은행들은 매우 다양한 사회적·생태적 욕구에 낮은 비용의 신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개발 금융기관들과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있는 방카 포풀라레 에티가(Banca Populare Etica)와 같은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 또한 커먼즈 경제에 필요한 금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구 섞여있는 기획들을 한데 엮어서 커먼즈 지향적 금융의 더 통합적이고 발전된 기반시설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할 일이 남아있다. 그러나 재래의 은행과 금융제도가 자본주의의 모순의 무게 아래에서 내파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들과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이 새로운 협동적 선택들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세대의 상호적 금융이 큰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Bollier and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별도로 진행되지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커머너들은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정부의) 공적 통제력을 다시 회복하여 화폐가 상업적 대출업자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지 않고 공적이고 민주적으로 결정된 욕구에 복무하도록 사용될 수 있게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다.((Mary Mellor, Debt or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15); Mary Mellor, The Future of Money: From Financial Crisis to Public Resource (London: Pluto Press, 2010); Frances Hutchinson, Mary Mellor and Wendy Olsen, The Politics of Money: Towards Sustainability and Economic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03).))



시장과는 다른 간접적 호혜성에 기반을 둔, 커먼즈 기반 생산이라는 크고 다양한 영역이 하는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행들, 오픈소스 네트워크들, 함께 학습하는 공동체들, 예술가 커먼즈(이렇게 몇 개만 들겠다)에의 참여는 일반적으로 일대일 교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대한 개인적 헌신에 기반을 둔다. ‘같이 내고 공유하기’(pool and share) 접근법이다. 종종 ‘자발적 부문’ 혹은 ‘선행’으로 치부되는 이 (이반 일리치가 말한 의미의) 공생 공동체들은 사실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산하는 곳이다.((Ivan Illich, Tools for Conviviality (New York: Harper & Row, 1973).)) 이 공동체들은 인간적이고 저비용의 방식으로 돌봄과 연관된 많은 서비스들을 수행한다. 이는 정부의 프로그램들이나 시장은 누가 보아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커머너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제’는 경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그리고 자치가 혼합된 혼종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체계는 수십 개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더욱 투명하고 공동체에 의해 통제 가능하며 더욱 유연하고 지역의 특수한 욕구에 잘 부응하며 신뢰할 만하고 사회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커먼즈들은 또한 시장이 늘 창출하는 부정적 외부성들(the negative externalities)을 창출할 가능성이 낮다.



커머너들의 큰 과제는 그 모델들을 연합시켜 더 크고 협동적인 사회적 생태계들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커머너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를 파트너로 삼아서 커머닝을 위한 법적 틀들, 기술적 지원, 더 나아가 간접적 보조금을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일국 정부들은 (기업 엘리트들과의 역사적 동맹관계로 인해서) 이 길에 감히 나서기를 꺼려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들이 커먼즈 기반의 혁신들을 배양하는 데 핵심적 발동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최근에 열린 국제 컨퍼런스인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참여한 도시 커머너들의 튼실한 다양성에 의해 충분히 확인된 점이다.((David Bollier Website, “The City as Commons: The Conference,” http://www.bollier.org/blog/city-commons-conference.))


여기서 절차와 관련된, 전략적 함축을 가진 단상을 끼워 넣겠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국가의 법과 공공정책(하향식 체계들)이 ‘체제 차원의 변화’를 성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 도구들은 종종 필요하지만, 오늘날 네트워크화된 세상에서는 그 효율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현재 당파심에 기인한 정체(停滯)현상과 높은 법률 장벽에 의해 마비되어 있는 재래의 정치제도들을 통해서 변혁을 성취하기란 극히 어렵다.




이 현실을 넘어서, 정부들의 도구성 자체가 종종 비효율적이며 느리고 부당하다. 2014년 책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에서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중앙집중화된 명령 및 통제를 행하는 관료체제들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들을 열거하고 있다.((David Graeber, The Utopia of Rules (Brooklyn, NY: Melville House, 2015).)) 좌파의 독특한 실패는 인간에게 가능한 규모의 실제로 기능하는 대안들―시민 주도성, 참여, 혁신능력을 긍정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일상적으로도 의미와 영향을 가지는 ‘강한 민주주의’를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이다.(([옮긴이] 이것이 누구의 통찰이라는 것인지 원문에 나와 있지 않다. “strong democracy”는 Benjamin R. Barber의 저서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2003)의 핵심 개념이다.))



전진하는 길 하나 : ‘다음 체제’는 관료제가 잘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에서의 수평적 협동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정부를 재발명하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 거버넌스, 상향식 참여를 통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커먼즈 제도들을 만드는 문제이다. 경제적·기술적 트렌드들은 명백히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벤클러(Yochai Benkler)가 『네트워크의 부『(The Wealth of Networks)에서, 리프킨(Jeremy Rifkin)이 그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Zero Marginal Cost Society)에서, 그리고 보웬스(Michel Bauwens)가 P2P재단의 위키와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들에서 기록하고 있는 현실이다.((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5), http://public.eblib.com/choice/publicfullrecord. aspx?p=3419996; Jeremy Rifkin,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The Internet of Things, the Collaborative Commons, and the Eclipse of Capitalism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4); See P2P Foundation, “Michael Bauwens,” http://p2pfoundation.net/Michel_Bauwens/Full_Bio.)) 네트워크 기반의, 혹은 네트워크로부터 도움을 받는 커먼즈는 참여를 통한 통제 및 이익의 상호화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매우 필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할 수 있다. 관료제를 네트워크 기반의 커먼즈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는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많은 ‘정부 2.0’ 실험들이 이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서술된 많은 커먼즈 기반 혁신들이 가진 큰 미덕은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정부나 정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혁신들은 재래의 정치적 장소들을 우회할 수 있다. 물론 법, 정책, 정부조달이 커먼즈 부문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시장 기득권자들을 특권화하고 커머닝을 범죄화하는 몇몇 기존의 정부 정책들은 말할 것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커먼즈에 대한 재정 지원은 중요하고도 아직 충족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그렇더라도 커먼즈 기반의 자급 및 서비스 체제들은 혁신적인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거대한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소규모의 복제 및 연합(smaller-scale replication-and-federation)을 통해서 성장한다.

 


사회, 환경, 정치체에의 파급효과

 


위에서 스케치된 경제/자급의 비전은 명백히 불평등, 생태계, 젠더 및 인종 관계, 그리고 정치체에 미칠 광범한 영향을 함축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필자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제안할 것이다.


부와 소득 불평등.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가 부채와 이윤추구에 의해 추동되는 시스템에 의해 충족되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움직이는 커먼즈를 통해 충족될 수 있을 때, 신자유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기괴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커머닝의 요점은 결국 욕구를 위한 물자조달을 탈상품화하거나 상호화하여 모두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대안화폐 전문가인 고 마그릿 케네디(Margrit Kennedy)는, 시장에서 팔리는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 가운데 무려 50%가 부채에 해당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만일 어떤 가족이 재래의 시장과 신용에의 의존성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생활비용이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으며 약탈적 기업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탈상품화와 상호화가 다음과 같은 많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① 토지를 시장에서 빼내서 주택비용을 줄이는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 ② 고이율과 부채에의 노출을 감소시키는 협동적 금융 대안들, ③ 비용을 줄이고 질을 높이기 위해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④ 공유된 기반 시설(에너지, 수송, 인터넷 접근,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 ④ 소프트웨어 코드, 데이터, 정보, 과학연구, 창작물들을 위한 커먼즈 기반의 개방된 제도들.



사회적 정의와 인종 및 젠더 평등. 커먼즈 패러다임은 다양한 인종, 민족, 혹은 젠더 문제들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그 틀이 거버넌스, 자급, 사회적 협력에 더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먼즈 패러다임은 포용성과 사회적 유대에 예리하게 집중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그러나 반드시 실현시켜 주지는 않는) 형식적인 법적 권리들을 넘어설 수 있다. 시장은 인간의 욕구에 진정하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시장에게 중요한 것은 소비 수요이다. 돈이 없는 누군가가 소비 수요를 표현하면, 그것은 주변적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커먼즈는 민중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바쳐져 있으며, 사회적으로 참여적이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공동체들이 협동조합을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존엄과 존중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듯이,((Jessica Gordon Nembhard, Collective Courage: A History of African American Cooperative Economic Thought and Practice (State College,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14).)) 커먼즈도 사회적 제도로서 사회적 욕구, 공정, 존중에 핵심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커먼즈 역사가(歷史家)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 아이들, 가족들의 경우 “탄생, 양육, 이웃 그리고 사랑이 사회적 삶의 시작이다. 과거의 커먼즈는 전적으로 남성들만의 장소가 아니었다. 사실 커먼즈는 매우 종종 여성들과 아이들의 욕구가 우선시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업 ‘슬럼가들’에서부터 이러쿼이 연맹(the Iroquois confederation),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욕구’만이 아니라 의사결정과 책임성도 여성들에게 속했다.”((Peter Linebaugh, “Stop, Thief!” Onthecommons.org, April 14, 2014, http://www.onthecommons.org/magazine/stop-thief.))


커먼즈에서 ‘돌봄 노동’―이를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은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불렀다―이 주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 시장과 경제는 보통 ‘돌봄 경제’―안정되고 건전하며 보람이 있는 삶에 필수적인 가족의 삶과 사회적 공생의 세계―를 무시한다. 시장경제는 이를 시장 영역의 외부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채워지는 본질적으로 무상의 자원으로 간주한다. 아무런 지위가 없으며 따라서 무시되거나 마음대로 착취될 수 있는 ‘전(前)경제적인’ 혹은 ‘비(非)경제적인’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 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이 희생되는 것은 커머너들, 식민화된 사람들 그리고 자연이 겪는 희생과 주목할 만하게 유사하다. 이들 모두가 자본가들이 의존하는 중요한 비(非)시장 가치를 창출한다. 그런데 시장은 일반적으로 이 가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1980년 유엔 보고서는 상황을 강렬한 간결함으로 이렇게 진술했다. “여성은 세계 성인 인구의 50%를, 공식적 노동력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모든 노동시간의 거의 3분의 2를 담당하지만 세계 소득의 10분의 1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 미만을 소유하고 있다.”



독일 작가인 프라에토리우스(Ina Praetorius)는 최근에 그녀의 글 「돌봄 중심 경제―당연시 되던 것을 새롭게 재발견하기」(“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에서 ‘돌봄 노동’이라는 페미니즘적 테마를 훨씬 더 큰 철학적 화판에 투사하여 새롭게 다루고 있다.((Ina Praetorius, “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 Heinrich-Boll-Stiftung 7 (April 2015), https://www.boell.de/en/2015/04/07/carecentered-economy.)) 프라에토리우스는, 새로운 구조적 우선사항들을 상상하여 경제제도들과 행위들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돌봄’의 중요성이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커먼즈는 시장 외부에 있는 돌봄을 가치창출의 필수적 범주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명백하게 기여할 수 있다.


생태계 파수. 개별 자연자원 커먼즈의 단점들이 무엇이든, 그 참여자들은 그 단점들을 거스르지 말고 그것들을 안고 일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시장과 달리 커머너들은 ‘환경’을 대상이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틀을 이루는, 살아있는 역동적인 체계로 본다. 커머너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자연 체계들을 과도하게 착취하게 하는 인센티브를 일반적으로 기업들보다 훨씬 덜 가지고 있으며, 집단적 이익을 위해서 자연의 파수꾼으로 행동할 인센티브를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숲, 어장, 방목지, 지하수, 야생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자연자원 커먼즈들은 주변적 위치에 있는 나라들의 시골지역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예를 들어 <커먼즈 디지털 도서관>(the Digital Library of the Commons, http://dlc.dlib.indiana.edu/dlc)의 자료들 참조.)) 이 커먼즈들은 또한 ‘선진’ 세계에서 실행되는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화된 농업보다 훨씬 더 생태적으로 친화적이다. 그런데 세계 전역에서 20억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커먼즈에 의존하여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데도, 주도적인 경제학 교과서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있다. 시장 활동이나 자본축적이 일어나지 않고 단지 가족 용도의 생산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Paul A. Samuelson and William D. Nordhaus, Economics, 17th edition (New York: McGraw-Hill, 2001); Joseph E. Stiglitz and Carl. E. Walsh, Economics, 3rd edition (New York: W. W. Norton, 2002); “Securing the Commons: Securing Property, Securing Livelihoods,” International Land Alliance website, http://www.landcoalition.org/global-initiatives/securing-commons.))



이 커먼즈들에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화폐 형태의 보상이 아니라 ‘정동 노동’이다. 인도의 지리학자 니러 씽은 이 용어로 커먼즈 기반의 숲 관리를 지칭했다. 여기서 자기와 주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생물리학적(biophysical) 환경과 서로 엮여있다.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중요한 자원의 파수꾼이 되는 것에 긍지와 즐거움을 느낀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에서 정동 노동은 중요하다. 정동 노동은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며 환경과의 연관을 변화시킨다. 씽의 말로 하자면, “정동 노동은 지역 주체성들을 변형시킨다.”((Neera Singh, “The Affective Labor of Growing Forests and the Becoming of Environmental Subjects: Rethinking Environmentality in Odisha, India,” Geoforum 47 (2013): 189–198.)) 이것이 새로운, 생태를 더 배려하는 유형의 경제를 구축하는 기반이다.



정치체와 거버넌스. 어떤 유형의 정치체가 커먼즈들의 드넓은 우주를 관장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는 국가의 성격과 역할의 발본적인 변화가 함축되어 있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국가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극명해지고 그것이 공중의 불신을 낳은 까닭에, 국가는 더 상향적인 커먼즈 기반의 기획들이 번영하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힘을 이전할 필요가 있다. 나의 동료인 보웬스(Michel Bauwens)는 커먼즈의 형성과 발전을 도울 ‘파트너 국가’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바 있다.((David Bollier Website, “Michael Bauwens: Here’s What a Commons-Based Economy Looks Like,” http://bollier.org/blog/michel-bauwens-heres-what-commons-based-economy-looks)) 커먼즈 친화적인 정치체는 ‘메타경제적인 네트워크들’을 개발하여 여러 행동분야들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테크놀로지, 디자인, 소프트웨어, 제조업 분야의) 열린 지식 네트워크들은 농업 및 생태 지속 가능성을 다루는 사람들과 건설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국가가 열린 네트워크들에 관하여 계몽된 의식을 가지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들은 점점 더 네트워크화된 지성과 정치적 정당성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 네트워크들을 통해 움직이는 커머너들은 자신들의 기여를 존중하고 지원해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는 단지 추측될 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상향식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가 중요하고 복잡한 대상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많은 사례들을 보았다. 2011년의 아랍의 봄 투쟁과 오큐파이 및 M15운동과 같은 몇몇 사례들은 매우 일시적이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 위키피디아(8만 명 이상의 편집자들) 그리고 라 비아 캄페씨나(La Via Campesina)―농민들을 국제적으로 조직하였다―와 같은 거버넌스 기획들은 더 지속적이다. 종종 새로운 종류의 ‘미시적 행위자들’이 필요한 ‘거시적 제도들’을 탄생시켜서 새로운 종류의 거버넌스를 발전시키는 데 추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개되는 모습들은 진화 과학에서 이루어진 몇몇 심오한 발견들과 지난 세대에 일어난 복잡계 과학의 부상에 상응한다. 양자 모두 상향식 사회조직 형태들 및 거버넌스 형태들의 실재가 정당함을 확인해준다. 분산되고 자기조직되어 있으며 협동적인 거버넌스 형태가 가장 안정되고 탄력적인 거버넌스 형태들 가운데 속함을 광범한 경험적 연구들이 확인해준다. 이 주제는 웨스턴(Burns H. Weston)과 같이 쓴 나의 책 『녹색 거버넌스』(Green Governance, pp. 112–130)에서 더 상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의 공동체들이 중앙의 최고 권위나 관료층의 직접적 통제 없이도 상위의 더 복합적인 형태의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거버넌스의 상향식 이론으로서의 ‘창발’(emergence)인 것이다.((Weston Burns and David Bollier, Green Governance: Ecological Survival, Human Rights and the Law of the Commo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창발은 만일 충분히 정의되고 유리한 일단의 매개변수들과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국지적 상황들에 기반을 둔 안정된 형태의 자기조직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는 생물학적·화학적 체계들이 줄곧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촉매적 특징들이 “무상의 질서”(order for free)를 발생시키는 것이다.(([옮긴이] ‘order for free’는 카우프만(Stuart Kaufmann)이 자신의 책 At Home in the Universe: The Search for Laws of Self-Organization and Complex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에서 제시한 아이디어이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저절로 생기는 질서’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본 : 국형태 옮김,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 복잡계 과학이 낳은 이러한 통찰은 수많은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에 관한 오스트롬의 발견과 부합한다. 효과적인 거버넌스는 형식적인 국가법에 구현되고 입법자들, 규제자들, 법원들을 통해 관리되는 획일적인 일반 규칙들의 포괄적 그리드를 통해 부과될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적응 조건’(fitness conditions)이 존재한다면 거버넌스는 적절한 규모의 능동적 참여 및 동의와 함께 자연적으로 저절로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보충(subsidiarity)의 원칙(([옮긴이] ‘보충의 원칙’(the principle of subsidiarity)은 가톨릭교회에서 발생한 사회조직 원칙이다. OED에 따르면 이 원칙은 “중앙 권위는 보조적 기능만을 해야 하며 더 직접적인 혹은 국지적인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과제들만을 수행한다”(a central authority should have a subsidiary function, performing only those tasks which cannot be performed effectively at a more immediate or local level).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비록 요즘 목격하다시피 현실에서 지켜지기보다는 헌법 조문에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과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옮긴이]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이란 모든 것들이 규모의 차이에 관계없이 다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Sim Van der Ryn, Stuart Cowan, Ecological Design, Tenth Anniversary Edition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자연의 과정들은 본래적으로 규모 연결적(scale linking)이다. 에너지와 물질이 규모를 가로질러 흐르는 데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청록조류(blue-green algae)에서 배설된 산소는 흰긴수염고래에 의해 흡수되며 다시 이 고래에 의해 배설된 이산화탄소를 참나무가 먹는다. 전체적 사이클들이 유기체들을 극히 효율적인 재생 체계로 연결시키는데, 이 체계는 1억분의 1 미터(광합성의 규모)에서 1만 킬로미터(지구 자체의 규모)까지, 규모가 10배 커지는 도약을 17번을 행한다.”(p. 51)))이 중요하다.







물론 네트워크 기반의 거버넌스 체제와 정치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민족국가 거버넌스의 역기능을 넘어가려면 정치체라는 생각 자체가 진화할 필요가 있다. 비록 기업들이 표면상으로 공익에 복무할 허가장을 국가에게 받아왔지만, 앞으로 커머너들의 테크놀로지 플랫폼들이 국가의 권위를 보완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커먼즈가 더 우세해지고 성숙해져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의 지원과 협조를 필요로 하게 되면 새로운 거버넌스 형태들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구축될 새로운 정치체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구질서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하게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론

 


커먼즈 운동은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박동치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명확한 청사진을 펼치거나 그 미래를 예측하기란 어렵다. 미래의 패러다임은 전진적인 공동창조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미 커먼즈 이념의 확장력과 자기복제력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극히 다양한 집단들에 의해서 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8개의 나라에 있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커머너들이 2015년 10월에 300개 이상의 행사로 구성된 2주 동안의 커먼즈 축제를 주최했다.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재개념화하고 있는 도시 활동가들도 있다. 공적 공간들과 해안 토지들의 종획에 맞서 싸우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커먼즈의 ‘지중해 상상계’(Mediterranean imaginary)를 발전시키는 그리스인들도 있고, 민족식물학적이고 바이오문화적 전통들을 방어하는 토착민들도 있으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을 고안하기 위해 움직이는 디지털 활동가들도 있다. 커먼즈 언어와 틀이 뜻밖의 새로운 협력작용과 연대 형태들의 발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커먼즈는 핵심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만 투과성 경계를 가진 메타담론으로서 정치의 세계, 거버넌스의 세계, 경제의 세계, 문화의 세계에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하게도 커먼즈는 또한 근대와 연결된 소외에 대해, 그리고 인간적 관계와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는 국가도 시장도 현재의 상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커먼즈 패러다임은 점점 더 합류하고 있는 수백 개의 현재 기능하는 사례들로써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깊은 철학적 비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체제 변화에 대한 행동지향적 접근법인 만큼, 모든 것은 현실적 및 잠재적 커머너들이 지속적인 에너지와 상상으로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달려있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익명의 <비가시 위원회>(Invisible Committee)는 “반란은 역병이나 산불처럼 불씨가 처음 타오른 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선형으로 번지는 과정이 아니다. 반란은 음악의 형태를 띤다. 그 초점들은 시간과 공간상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떨림의 리듬을 부과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 그 리듬이 많은 공명을 산출하고 있는 커먼즈 운동이 움직이는 거대한 여정을 묘사해준다.



2015년 11월((http://thenextsystem.org/에 발표된 것은 2016년 4월 2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