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P2P 경제가 가능하다면, 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컴퓨터에 사용되는 지식·소프트웨어·코드가 자기조직적인 개인들의 공동체에 의해 피어생산(peer produce)되는 것처럼 영적 경험과 통찰이 공동생산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영성(spirituality)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관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영적 관점과 영적 실천은 새로운 사회문화적 복잡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의식의 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함의는 심대하다.

영성과 종교는 항상 그것들이 태어나고 뿌리내린 사회구조의 특징을 담지한다. 새로 출현하는 종교들이 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종종 사회구조의 부분적 변형을 재현하더라도, 주류 사회논리에 뿌리내리고 그 논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헤게모니적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가톨릭과 불교교단의 조직구조와 이념에 강한 봉건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개신교가 출현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그리고/혹은 민주주의적 형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종종 “뉴에이지 영성”(New Age Spirituality)이라 불렸던 것이 상품화된 영적 경험이 판매될 수 있는 시장에 맞춰 고안된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가톨릭과 불교교단이 각각 로마의 정치질서와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가치창조와 가치분배의 새 모델로 나타난 피어생산 역시 영적 조직과 영적 경험의 새로운 형태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피어생산 혹은 ‘P2P’는 개방적 투입과 참여적 절차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과정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는 산출물을 누구나 커먼즈(공통재)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정의는 P2P 영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다수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 영적 공동체는 그 기본적 규칙과 지침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 둘째 중앙의 기획과 신념을 부과할 수 있는 미리 수립된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영적 지식은 저작권이 부여되거나 사유화될 수 없다.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다른 모든 낡은 형태들과 구분되는 P2P 영성의 핵심적인 긍정적 윤리적 가치는 “잠재력 균등성”(equipotentiality)이라 불려온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잠재력 균등성은 모든 인간 존재가 가진 자신의 자질을 개발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 자질들은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데 모두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잠재력 균등성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영적 형태를 오염시킨 순위매기기 방법론에 대한 필수적 해독제이다. 스페인의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자인 호르헤 페레르(Jorge Ferrer)에 따르면 “비교하는 마음”은 언제나 서로 간에 더 높거나 더 낮게 순위를 매기게 되는 위계의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통합적인 체화된 영성은 쉽사리 경쟁·대립·시기·질투·대결·증오를 낳는, 비교에 기반한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순수한 활력으로 조화롭게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상호증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레 출현할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욕구와 결핍을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비교하는 마음을 중지하는 것이 영적 집단들에 역설적으로 그토록 퍼져 있는 광범위한 위계적 상호작용 양식을 해체할 것인데, 이 집단들에서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다른 이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몇몇 특권적 측면들에서 우등하거나 열등하다고 본다.”

이와 달리 모든 각각의 개인들은 다양한 속성·강함·약함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 각각에서 다른 이들보다 못할 수도 있고 나을 수 있다. 핵심은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최고의 기술과 자질이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어생산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와 같은 것이 P2P 영적 프로젝트에도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성취를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하는, 한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초월적 자질인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음악가나 예술가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영적 성취를 존중받을 만한 특별한 기술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사조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의 일을 맡는 솜씨 좋은 선생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선생들은 기술적 조력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재능있는 동료들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영적 탐구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존 헤런(John Heron)이 발전시킨 “협동적인 영적 탐구 집단들”이 이러한 방법론의 실제적인 좋은 사례이다. 이 집단들에서 영적 탐색은 영적 경험이 쉽게 출현하도록 하는 특정한 실험들과 명령들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에 미리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험 많은 선(禪) 선생을 초청하여 명상 수행을 이끌도록 할 수는 있지만,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은 그들의 상호 이해와 배움을 키우고자 집단 내 다른 이들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위계적 집단의 영적 실천과 달리 특정 경험의 선험적 타당성이란 없으며 다른 경험들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험이 존중되며 집단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경험의 일부가 된다.

과거에는 영적 탐구자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이에서 즉 수평적·공통적 측면이 대체로 위계 속에 통합되어 있던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들과 종종 꽤나 자기도취적이었던 더 개인주의적인 뉴에이지 버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됐는데, 후자의 버전들은 (종종 돈과 교환되는) 영적 경험의 획득에 기초하지 수평적 관계에는 미약하게만 근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P2P 영성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공동생산을 존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내가 ‘기여적’(contributory)이라 부르는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각 영적 전통을 가부장제, 배타적 진리론 같은 특정 시대와 연관된 가치들에 영향받는 특정한 사회틀 내의 일단의 명령들로 이해한다. 동시에 각 전통은 우리와 우주의 관계에 관한 특정 진리를 표현하는 심적·영적 실천의 중요 부분 또한 포함한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최소한 이러한 실천들에 부분적으로나마 노출되는 것을, 아울러 다른 이들로부터의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피드백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는 홀로 착수할 수 없는 탐색이며,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이들과의 공유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전통이 거부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비판적으로 경험되고 평가된다. 기여적인 영적 실천가는 스스로를 특수한 전통에 빚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가 그 전통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전통들에 다가가며 그것들을 개별적·집단적으로 경험하고 다른 이들과 경험을 교환하는 영적 탐구 집단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집단들을 통해서 영적 경험의 새로운 집단적 신체가 탐구하는 영적 공동체 및 개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공동으로 창조될 수 있다. 영성의 공동생산에 P2P 거버넌스와 P2P 소유관계를 더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시적 실천들을 발명할 수도 있다. 새로이 출현하던 기독교 문명의 뿌리가 된, 새로운 기독교 주체성을 발명했던 가톨릭 수도승처럼 P2P 영적 실천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P2P에 기반하고 커먼즈로 향해있는 사회를 공동으로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귀결은 공동으로 만들어낸 실재일 것이다. 이 실재는 예측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지식의 커먼즈에로 이끄는,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접근일 것이라는 점이다.




커먼즈 이행과 P2P (3)



 

P2P와 커먼즈 경제를 가속화하는 10개의 방법

 

그러면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이 현재의 경제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래의 10개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생산 공동체들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공유된 자원을 바탕으로 살림을 창출할 수 있는 윤리적 기업가 연합에서 이루어지는, 새로 출현하는 실천들에 대한 우리의 연구의 결과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새로운 윤리적 경제의 복원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들을 강조한다. 이 10개의 아이디어는 이미 일정 형태로 실행되고 있지만 더 광범하게 사용되고 통합될 필요가 있다. 아래의 표는 세 부문을 담고 있다. ① 자유로움―개방되고 공유 가능하며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음 ② 공정함―모든 인간들과 사회적으로 유대를 맺음 ③ 지속 가능함― 우리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며 자연을 파수하고 복원하는 일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임.

1. 공유된 지식에 기반을 둔 개방된 사업모델을 실천하기.자유로움공유될 수 있는 것을 공유하기. (희소한 자원으로부터만 시장가치를 창출하기.) 이 공유된 커먼즈를 바탕으로 혹은 그와 병행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2. 열린 협동조합주의를 실천하기.공정함 협동조합들은 커먼즈 친화적인 시장 조직들이 취할 수 있는 잠재적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핵심은 기여하는 커머너들을 위한 살림을 생성할 수 있는 탈기업적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3. 기여에 기초한 공개 회계를 실천하기.공정함 기여에 기초한 회계 및 이와 유사한 해결책들은 훨씬 더 광범한 공동체에 의해 공동창출된 가치를 기여자들 가운데 소수―시장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이 포획하는 상황을 피한다. 공개 회계는 또한 가치의 (재)분배가 모든 기여자들에게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한다.
4. 카피페어 라이선스를 통해 공정한 분배와 이익공유를 보장하기.공정함 지식 공유를 허용하면서 상업화의 권리에 대해서는 호혜(상호성)의 응답을 요구하는 카피페어 라이선스의 사용이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내화하고 있는 윤리적 경제 조직들을 위한 동등한 활동의 장을 창출할 것이다.
5. ‘커먼페어’(commonfare)((‘복지’를 의미하는 ‘welfare’의 앞 세 글자 부분을 ‘common’으로 대체한 것이다. 한 웹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커먼페어‘는 ‘공통적인 것의 복지’(welfare of the common)로 풀어 쓸 수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협동에 기반을 둔 참여적 형태의 복지 공급”이다. (http://pieproject.eu/))를 통해 유대를 실천하고 삶과 노동의 위험을 완화시킨다.공정함한때 복지국가(welfare state)에 함입되어 있던 중요한 유대 메커니즘들이 붕괴되고 있다. 분산된 유대 메커니즘들 즉 ‘커먼페어’의 관행을 재건하는 것이 긴급하다.
6. 오픈소스 순환경제를 위해서 개방적이고 지속 가능한 디자인들을 사용하기.지속 가능함계획된 노후화는 오류가 아니라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들의 특징이다. 지속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개방되고 지속 가능한 디자인들을 사용하는 것이 윤리적 기업가 조직들에게 크게 권장된다.
7. 열린 공급망과 개방된 회계를 통해 생산의 상호조정을 향해 움직이기.지속 가능함네트워크의 실질적 생산현실이 열린 공급망을 통해 공통의 지식이 될 때에는 과잉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
8. 코스모-지역화(cosmo-localization)를 실천하기.지속 가능함“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가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원리이다. 지식은 전지구적으로 공유되고 생산은 요구에 의해, 실질적 욕구에 기반을 두고, 분산된 공동작업 공간들과 미시공장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9. 물리적 기반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지속 가능함기계들을 포함한 우리의 생산수단이 공동으로 사용되고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자립적으로 소유될 수 있다. 플랫폼 협동조합들, 데이터 협동조합들, 그리고 분산된 소유권의 ‘페어셰어’(fairshares) 형태들이 생산의 기반시설들을 공동으로 전유하는 것을 돕는 도구들이 될 수 있다.
10. 생성적 자본을 공동으로 사용하기.지속 가능함생성적 형태의 자본은 추출적 은행들에 지불되는 복리 이자에 기반을 둔 추출적 화폐공급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세계, 인류 그리고 환경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유롭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실천들에 의해서 추동되는 경제체계이다.




커먼즈 이행과 P2P (2)



 

2.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P2P 경제를 형성하는가?

‘economy’(경제)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은 가내 자원의 관리를 가리킨다. 건강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돌봄 지향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더 큰 규모로 확대하여 네트워크화된 공동체들이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의 자원을 파수하는 경제로 만들 수 있을까?

 

생산양식으로서의 P2P의 역사

 

관계에 기반을 둔 P2P의 동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해왔으며 원래 유목적인 수렵채취 사회에서 우세한 관계형태였다. 그 후 부족들의 연대로 구성된, 씨족에 기반을 둔 사회형태에서는 상호성이 P2P를 제치고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나중에는 전자본주의 국가들과 제국들을 특징짓는 위계에 기반을 둔 자원배분이 우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과정 내내 커먼즈와 P2P 논리는 유럽 봉건제나 아시아 제국들의 경우에서처럼 매우 중요한 기능들을 보유했다.

 

일단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하자 (그리고 나중에는 국가사회주의 제체들에서) P2P와 커먼즈 동학은 실질적으로 주변화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풍성한 P2P 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커먼즈와 P2P는 그 동학이 결합되면 전지구적 수준으로까지 규모가 커질 수 있는 부활을 맞고 있다. 이러한 비전에 따르면 커먼즈와 P2P는 국가와 시장 기반 모델들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복잡한 사회적 인공물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P2P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관계들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의 출현을 낳았다. 이는 법학자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가 만들어낸 용어로서 가치를 창조하고 분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리킨다. P2P 기반시설은 개인들로 하여금 소통하고 스스로 조직하고 궁극적으로는 비(非)경합적 사용가치를 지식·소프트웨어·디자인의 디지털 커먼즈라는 형태로 공동으로 창조할 수 있게 해준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오픈소스 기획들, 아파치 HTTP 서버, 모질라 파이어폭스(Mozilla Firefox)나 워드프레스, 그리고 위키하우스, 렙랩(RepRap), 팜핵(Farm Hack)과 같은 오픈디자인 공동체들을 생각해보라.

 

핵심 개념 :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에서는 기여자들이 열린 기여 시스템들을 통해서 공유된 가치를 창조하며, 참여 실천들을 통해서 공동의 작업을 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공유 자원들을 창조한다. 열린 투입, 참여적 과정, 커먼즈 기반 산출로 구성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주기이다.

 

가치창조의 새로운 생태계로서의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은 우리에게 가치창조의 새로운 생태계의 출현을 보여준다. 이 생태계는 세 단체로 구성된다. ① 생산 공동체 ②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③ 비영리 지원단체.

이 급속히 발전하는 생산양식을 남김없이 서술하기는 불가능한데, 아래의 표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생태계들의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잘 알려진 사례들 가운데 다섯을 설명해준다.

 

생산 공동체리눅스모질라GNU위키피디아워드프레스
기업가 연합Linux
Professional Institute,
Canonical 등
Mozilla corporation 등Red Hat, Endless SUSE 등Wikia Company 등Automatic Company 등
비영리 지원 단체리눅스 재단모질라 재단프리 소프트웨어 재단위키미디어 재단워드프레스 재단

이제 이 단체들 각각과 그 특성들을 서술해보자.

 

 

1. 생산 공동체

 

생산 공동체는 어떤 기획에의 기여자들 전부로 구성되며 그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조정하는 방식을 포함한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보수를 받을 수도 있고 생산되는 사용가치에 대한 특수한 관심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유될 수 있는 자원을 생산한다.

 

 

2. 기업가 연합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은 공통의 자원에 기반을 두고 시장을 위한 부가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이윤이나 생계의 확보를 시도한다. 기여자들은 참여하는 기업들에 의해 보수를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커먼즈 자체는 시장의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희소하지 않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기업가들, 공동체, 그리고 (이것들이 의존하는) 커먼즈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생성적(generative)이냐 아니면 추출적(extractive)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극을 가리키지만 현실에서 모든 조직들은 두 극을 일정 정도로 포함하게 된다. 생성적 관계와 추출적 관계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례는 산업형 농업과 퍼머컬처의 차이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토양이 더 메말라지고 덜 건강해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토양이 더 비옥해지고 건강해진다.

추출적 소유생성적 소유
1. 금융적 목적: 단기간에 이윤을 극대화하기1. 삶의 목적 : 장기적으로 삶의 조건들을 창출하기
2. 부재 구성원 : 소유가 기업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2. 토착 구성원 : 소유가 당사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
3. 시장에 의한 거버넌스 : 자본시장에 의한 자동조종 통제3. 사명에 의해 통제되는 거버넌스 : 사회적 사명에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한 통제
4. 카지노 금융 : 주인으로서의 자본4. 이해관계자 금융 : 친구로서의 자본
5. 상품 네트워크 : 가격과 이윤에만 초점을 두는 교역5. 윤리적 네트워크 : 생태적·사회적 규범들을 집단적으로 유지

추출적 기업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며 보통 생산 공동체의 유지에 충분한 재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한 사례가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같이 창조하는 공동체들―페이스북은 그 가치창조와 실현에서 이 공동체들에 의존한다―과 이윤을 나누지 않는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교환에서 수익을 징수하지만 수송이나 숙박 기반시설의 창출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다. 이 조직들은 사용되지 않는 자원들을 이용하는 서비스들을 개발하지만, 추출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이 경쟁적 사고방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시스템에의 참여자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으로 임대를 하기 위해 새 건물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에 덧붙여, 추출적 기업들은 매우 많은 사회적 혹은 공적인 기반시설들(가령 우버의 경우에는 도로들)을 무임승차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달리 생성적 기업가들은 그들이 같이 생산하고 같이 의존하는 공동체들과 커먼즈를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최선의 경우는 기업가들의 공동체가 생산 공동체와 실제로 동일한 집단인 경우이다. 기여자들이 생계를 버는 수단들을 직접 구축하는 한편, 커먼즈를 산출하고 잉여를 자신들의 복지와 (그들이 공동으로 산출하는) 전반적인 커먼즈 체계에 재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생성적인 공동체들이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meta-economic networks))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다.

핵심 개념 :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

공동체 지향적 사업에서부터 그 사업에 의해 향상되는 공동체들에 걸쳐 있는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커먼즈를 생성하는 협력적인 유대(紐帶) 구조들과 결합시키는, 친화성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들이다. 상호신용체계, 아이들 돌봄 협동조합, 공동체 은행, 새 생산물 배급센터들, 교육, 그리고 법 상담소 등이 결합된 연합체계를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사회 지향적 기획들에서 함께 작업하는 두드러진 사례들로는 까딸로니아 통합 협동조합(the Catalonian Integral Cooperative, CIC, 스페인 까딸로니아), 상호부조 네트워크(the Mutual Aid Network,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현재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대 중이다) 그리고 엔스파이럴(Enspiral, 뉴질랜드, 현재 모든 곳에서 복제되고 있다)이 있다. 엔스파이럴에 대해서는 아래 사례연구를 참조하라.


3.
비영리 지원단체

 

셋째 단체는 비영리 지원단체이다. 많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생태계들이 생산 공동체들과 기업가 연합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의 기반시설을 뒷받침하고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을 위한 능력을 강화할 독립적인 거버넌스 단체 또한 포함한다.

 

이 단체들은 보통 비영리인데,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과정 자체를 지도적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의 지원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은 위키피디아 생산자들의 생산을 강제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기획들의 기반시설과 네트워크들을 종종 관리하는 프리&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재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NGO나 비영리 조직들은 희소성을 원리로서 ‘인정하는’ 세계에서 움직인다. 이들은 문제를 포착하고 자원을 찾으며 이 자원을 지도의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할당한다. 커먼즈와 연관된 지원단체들은 풍요의 관점에서 움직인다. 이들은 문제들을 인지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기여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체들은 기여 공동체들과 기업가 연합으로 하여금 (당면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하는)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과정에 관여할 수 있게 해주는 협동 기반시설을 유지한다. 지원단체들은 라이선스제도를 통해 커먼즈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과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갈등을 관리하는 것을 돕고 기금을 모으며 커먼즈에 필요한 일반적 능력구축을 (가령 교육이나 자격증명을 통해) 촉진한다.

 

 




커먼즈 이행과 P2P (1)



 

1.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커먼즈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동학으로서 출현했다. 시장 및 국가가 사회 조직화의 두 방식이라면, 커먼즈는 그와 병행하는 사회 조직화의 셋째 방식이다. 커먼즈와 P2P(Peer 2 Peer)가 함께, 시민사회의 욕구와 실천 그리고 시민사회가 거하는 환경에 기반을 둔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중앙집중적으로 계획된 낡은 체계들이나 경쟁을 명령하는 시장경제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이제부터 이 개념들을 탐구할 것이다.

커먼즈란 무엇인가?

데이빗 볼리어가 서술한 바로 커먼즈는 사용자들의 공동체가 그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다스리는 공유된 자원을 가리킨다. 커먼즈에는 물과 땅 같은 자연의 선물들만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나 지식 같은 공유된 자산들 혹은 창조적 작품들도 포함된다.

커먼즈의 영역은 두 사람이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경합적 재화와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고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비경합적 재화나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다. 재화나 자원의 두 유형은 물려받거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커먼즈 학자이자 활동가인 헬프리히(Silke Helfrich)에 따르면 커먼즈는 적어도 다음 네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자원. 여기에는 물질적 자원과 비물질적 자원 모두가 속하며 보호가 필요하고 많은 지식과 노하우가 요구된다.
2. 번영관계들을 조성하고 심화시키는 사회적 과정. 이 과정들은 지속적으로 파수(把守)되고 재생산되며 보호되고 커머닝을 통해 확대되어야 할 복잡한 사회생태학적 체계들의 일부를 구성한다.
3. 새로운 생산적 논리와 과정에 초점을 둔 새로운 생산양식.
4. 커먼즈와 커머닝을 세계관으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

한 사례가 위키피디아이다. 자원(보편적 지식), 공동체(저자들과 편집자들), 공동체가 마련한 일단의 규칙들과 프로토콜들(위키피디아의 내용과 편집 지침들)이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즈는 이 셋 모두로부터 출현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속하는 다른 사례는 미국 오리건 주의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 )이다. 여기서도 자원(숲), 공동체(벌목꾼들, 생태학 과학자들, 삼림 감시원들, ‘분수령 위원회’) 그리고 일단의 규칙들과 준칙들(숲을 지속 가능하게 공동 관리하기 위한 헌장)이 발견된다.

한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하므로, 커먼즈 전체를 총괄하는 목록이란 없다. 커먼즈 전체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 커먼즈들―어장에서 어번 커먼즈에 이르는, 공유된 부의 많은 형태들을 포함한다―의 방대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여 번영한다.

P2P란 무엇인가?

커먼즈가 ‘무엇을’이라면, P2P는 ‘어떻게’로 간주될 수 있다.

P2P―—“peer to peer”, “people to people”, or “person to person”—는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peers)이 서로 자유롭게 협동하여 공유된 자원의 형태를 띤, 그리고 커먼즈의 형태로 유통되는 가치를 창조하는 관계의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컴퓨팅 용어로서 P2P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네트워크 참여자들’(peers) 사이의 합의를 통한 연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컴퓨팅체계를 가리킨다. 이는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컴퓨터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오디오·비디오 파일 공유가 P2P 파일공유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인터넷의 심층적 기반시설의 일부―예를 들어 데이터 송신 기반시설―가 P2P라고 불려왔다.

이 컴퓨터들 뒤에 인간 사용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용자들은 일정한 테크놀로지적 도구를 사용하여 서로 더 쉽게 그리고 전지구적 규모로 일대일로 상호작용하고 관여할 수 있다.

P2P 용어들 및 정의들에 대한 언어적 혼란이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서로 통신하는 컴퓨터들)과 관계 동학(소통하는 사람들)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이 P2P 인간관계를 촉진하기 위해서 완전히 P2P적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비트코인을 위키피디아나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기획들과 비교해보라. 이들 모두가 P2P 동학을 이용하지만, 그 방식과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다르다.

P2P 협동은 종종 허가 없이 이루어진다. 즉 기여하기 위해서 다른 참여자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P2P 체계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여자들과 기여에 열려있지만, 작업의 질과 포괄성은 보통 위키피디아의 경우처럼 일군의 유지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서 ‘사후에’ 결정된다.

또한 P2P는 개인들 사이의 특별한 상호성은 없고 개인들과 집단적 자원 사이의 상호성만을 포함하는 자원할당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널리 사용되는 GNU GPL 라이선스 아래 배포되는 기존의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두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지만, 당신의 최종적 생산물이 동일한 종류의 라이선스 아래 사용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협동하는 인간이 사용하는 상호연결된 컴퓨터들의 P2P 네트워크들은 활발한 공유된 기능들을 커먼즈에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P2P는 디지털 영역과 첨단테크놀로지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 핵심은 비(非)강제적이고 비(非)위계적인 관계들이며 그 자질들은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 아래는 원 문서의 이 위치에 삽입된 그림입니다.


 

P2P와 커먼즈, 이 둘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P2P와 커먼즈의 관계는 전자가 커먼즈에 기여하는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서 작동하는 관계이다. P2P는 공동으로 관리되는 공유된 자원(커먼즈)의 창출과 유지에 기여하는 능력을 구축함으로써 ‘커머닝’ 행동을 촉진한다.

요컨대 P2P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두드러진 패턴을 표현하며, 커먼즈는 이 관계 동학으로 작동하는 구체적인 ‘무엇’(자원), ‘누가’(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그리고 ‘어떻게’(미래 세대를 위해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자원을 파수하는 데 사용되는 프로토콜)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시민사회의 기반을 P2P 동학과 커먼즈 실천에 두면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안정된 환경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커먼즈 이행의 목적이다.

1장 끝




커먼즈와 P2P (그림설명)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작업의 물결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작업의 물결

최근에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물결이 일었다. 새로운 책들이 출판되고 공개행사들과 현장 활동들이 있었다. 각각의 노력은 다소 상이하지만, 모두가 도시 거버넌스의 우선권과 논리를 커머닝의 원리를 향하는 방향으로 다시 정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통한다.

나는 특히 『예일 법과 정책 평론』(Yale Law and Policy Review)에 실린 새 학술논문 「커먼즈로서의 도시」(“The City as a Commons”)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드햄 로스쿨(Fordham Law School) 교수 포스터(Sheila R. Foster)와 이탈리아의 법학자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가 공동으로 쓴 이 논문은 탐구와 행동주의라는 새로 출현하는 분야에서 획기적인 종합을 이룬 글이다. 68쪽에 해당하는 이 논문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개념화하는 데서 맞닥뜨리는 주된 철학적·정치적 과제들을 배열하고 271개의 각주에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커먼즈가 더 포괄적이고 공정한 형태의 ‘도시 만들기’의 가능성을 여는 프레임이자 일단의 도구들로서의 역할을 할 잠재성”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도시들이 시민들이 공통재로서 요구할 수 있는 자원을 사유화하거나 독점적 공적 규제로써 통제하지 않으면서 그 자원을 다스리거나 관리하는 문제를 부각시킬 잠재력을 커먼즈는 가지고 있다.”

저자들은 도시에 있는 커먼즈 자원의 역사와 현재 상태를, 그리고 공원보존위원회(park conservancies)(([옮긴이] 공원의 보존을 담당하는 공적 기구이다.)),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 지분제한형 조합주택(limited equity cooperative housing)과 같은 거버넌스의 대안적 양태들의 부상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도시 커먼즈의 비극”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는 커먼즈를 자원으로만 보는 데서 발생하는 유한한 자원의 과도한 착취에 대해서) 쓰면서도, 도시 환경에서의 “커먼즈의 산출”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연다. 이들은 핵심 문제가 단지 재산의 소유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적극적 협동과 관계를 양성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생산되는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활동의 결과이며 사람들이 자원에 접근하고 그 자원을 사용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이들은 쓴다. “많을수록 즐겁다”는 원리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커먼즈는 도시를 위한 가치의 풍요로운 발생처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기고 적절한 정책과 지원책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최근에 출판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저작은 라모스(Jose Ramos)가 편집한 선집 『커먼즈로서의 도시: 정책모음집』(The City as Commons: A Policy Reader)이다. pdf 파일로 무상으로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책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창출하기 위한 정책 옵션들과 전략들에 초점을 맞춘 34개의 기고문들을 담고 있다. 다루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도시계획, 공공도서관, 공동체 통화, 시간은행, 플랫폼 협동조합, “코즈모-로컬리즘”(cosmo-localism)(([옮긴이]전지구적으로 분산된 지식 및 디자인 커먼즈들과 지역화된 가치생산의 결합이 가진 잠재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actionforesight.net/cosmo-localism-and-the-futures-of-material-production 참조)), “시민조합토지”(civic union land), 오픈 데이터, 도시 커먼즈 보호 갱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 커머닝, ‘조세체납 사유재산'(([옮긴이] 재산을 소유한 시민이 세금을 내지 못한 경우 그 부채를 이윤을 노리는 민간투기업자에게 조세선취특권(tax lien)의 형태로 팔지 않고 시의 관리 아래 두어 공공재로서 사용하는 등 도시 커먼즈를 보호하는 것과 연관되는 주제이다)) 등이다.

바로 지난주에 커먼즈에 대한 책이 또 한 권 나왔다. 브리턴(Tessy Britton)이 쓰고 앤더슨(Amber Anderson)이 삽화를 넣은 『그림이 있는 참여도시 가이드』(The Illustrated Guide to Participatory City)이다. 접근하기 쉽고 재미있는 이 책은 ‘참여 문화’가 어떻게 도시를 되살리고 더 탄력 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소규모 참여 기획들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이 기획들이 다 합쳐지면 많은 더 크고 서로 얽힌 사회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낸 영국의 프로젝트인 <참여 도시>(Participatory City)는, 실질적인 참여의 규모를 (연구가 가리키는 대로) 변형에 유익함을 가져오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현재 큰 “시범 지구”(demonstration neighborhood)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참여 도시>는 현재 5년 동안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20만 내지 30만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나 자신도 커먼즈로서의 도시 전선에서 활동해왔다. 9월 1일에는 암스테르담의 문화시민센터인 빠크회스 데 즈베이헤르(Pakhuis de Zwijger)에서 이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이후에 이 분야의 전문가들 네 명―랩겁(LabGov)의 이아이오네(Chris Iaione), 커먼즈 네트워크의 해머스틴(David Hammerstein), 바흐 쏘사이어티(Waag Society)의 스티커(Marleen Stikker), HvA의 마요어(Stan Majoor) ―으로 이루어진 토론단이 활발한 토론을 했다. 2시간 15분짜리 비디오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도시를 다르게 보는 방법론적 도구들을 제공하는 <도시 르네상스 연습>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는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의한다.

도시는 공통체(commonwealth)(([옮긴이] ‘commonwealth’는 ‘common’과 ‘wealth’가 조합된 단어로서, 말 그대로 직역하면 ‘같이 잘 살고 있음’의 의미인데, 실제로는 ‘공공복지’(public welfar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국가’(stat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공동체’(community)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이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으나 현재의 맥락에서는 논외로 해도 무방하다.) 옥스퍼드영어사전의 다음 예문에서 로크는 자신이 ‘commonwealth’를 ‘공동체 일반’이라는 의미로 사용함을 말하고 있다.

1690 J. Locke Two Treat. Govt. ii. x. §133 By Commonwealth, I..mean, not a Democracy, or any Form of Government, but any independent Community which the Latins signified by the word Civitas.

다음 예문에서는 더 구체화된 의미의 공동체, 즉 민주적 원리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라는 의미가 제시된다.

1583 Sir T. Smith’s De Republica Anglorum i. x. 10 A common wealth is called a society..of a multitude of free men collected together and vnited by common accord & couenauntes among themselues. (* ‘u’와 ‘v’를 바꾸어 읽으면 된다.)

네그리와 하트의 저서 Commonwealth 에서 ‘commonwealth’는 그저 일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확연하게 기반을 둔 공동체로서 ‘커먼즈’(commons)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the private)과는 당연히 다르고 ‘공적인 것’(the public)과도 다르다. 그래서 이 Commonwealth의 한국어 역자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 ‘공통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여기서도 이 번역어를 사용했다.)) 이며 공유된 자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과 집단적 실천에 기반을 둔 협동적 환경이다. ‘커머닝’은 도시 조직화의 구성적 과정으로서, 공동체들을 수립하고 재생산하며 경계들·프로토콜들·분배원칙들을 확정한다. 도시 커먼즈는 소진되고 노후화되고 강탈될 수 있는 물질자원과 관계자원(relational resources)을 공히 관리하는 잡종제도(hybrid institutions)이다. 커먼즈는 언제나 보호되고 되찾아지고 갱생되어야 한다.

나는 이 주제가 다음번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정말로 보고 싶다. 나는 11월 17일에 내가 기조연설을 하는 바르셀로나의 ‘스마트 시티 엑스포’(Smart City Expo)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정리자 주석]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새로운 경체체제만이 할 수 있다

 

올해 초 세계의 미디어들은 2월에 지구 전체의 기온 기록이 충격적일 정도의 차이로 깨졌다고 보도했다. 3월 또한 모든 기록을 깼다. 6월에 텔레비전 스크린들은 파리의 홍수, 센 강이 둑을 넘어 도로로 범람하는 모습으로 뒤덮였다. 런던에서 난 홍수로 인해 물이 지하수로 시스템을 통해 코번트 가든(([정리자]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은 영국 런던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쇼핑 및 관광 명소이다. ))의 심장부까지 흘러들었다. 런던 남동부의 도로들은 2미터 깊이의 강이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면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화석 연료가 우리들을 죽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둘러싸고 합의가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클린에너지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석 연료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점증하는 깨달음은 우리의 의식에 결정전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클린에너지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기후변화를 막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과학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서 100% 클린에너지를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힘찬 발걸음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를 가정하는 이 시나리오조차도 기후 재난을 피해가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 가스 방출의 약 70%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30%는 여러 원인에서 온다. 삼림파괴가 큰 원인이다. 산업화된 농업도 역시 큰 원인인데, 이는 이산화탄소를 용해시킬 정도로 토양의 질을 퇴화시킨다. 그 다음으로 가축사육이 큰 원인이다. 이는 매해 9천만 톤의 메탄가스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산화질소의 세계 총량의 대부분을 배출한다. 이 가스들 둘 다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더 크다. 세계의 모든 자동차, 열차, 비행기, 배를 합친 것보다 가축사육 하나가 지구온난화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시멘트, 강철, 플라스틱의 생산이 온실 가스의 또 다른 주된 원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쓰레기 매립이다. 쓰레기 매립은 세계 총량의 16%라는 엄청난 양의 메탄을 대기 중에 뿜어낸다.

기후변화에 관한 한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무슨 종류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에너지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100% 클린에너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우리가 화석 연료로 하던 그 일일 것이다. 더 많은 숲을 제거하고, 더 많은 가축사육을 하고 농업 산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시멘트를 생산하고 더 많은 매립지를 쓰레기로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양의 온실 가스를 대기 중으로 펌프질해 올릴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 체제가 부단한 성장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이것을 문제삼을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비(非)화석 연료에서 오는 30%의 온실 가스는 고정적이지 않다. 매해 대기 중에 더 많은 온실 가스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열대 삼림이 2050년이면 완전히 파괴되어 2000억 톤의 탄소 폭탄을 대기 중에 방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세계의 상층토(topsoil)는 60년 이내에 영양분이 고갈되어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방출할 것이다. 시멘트 산업이 방출하는 양은 매해 9% 이상 늘고 있다. 쓰레기 매립은 눈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100년 쯤이면 하루에 1100만 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는 현재의 3배이다. 클린에너지의 사용은 이런 일을 늦추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후운동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화석연료에 집중했던 것이다. 더 심층에 있는 것, 즉 우리의 경제적 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논리를 지적했어야 하는 데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GDP 성장이라는 광범한 과제에 연료를 대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우리의 경제 체계가 추출, 생산, 소비의 수준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지구 경제가 매해 3% 이상 성장하도록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한다. 큰 회사들이 총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치이다. [개별 회사들의 이익은 이 총이익을 능력대로 나눈 몫이 될 것이다.―정리자] 이는 20년 마다 세계 경제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려야 함을 의미한다. 차들도 두 배, 어업도 두 배, 탄광업도 두 배, 아이패드도 두 배. 그 다음 20년에는 이미 도달한 두 배에서 또 다시 두 배로 늘려야 하고.

우리의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이 경제 성장을 물질적 스루풋(material throughput)(([정리자]기업 경영에서 스루풋(throughput)은 ‘투입’(input)에서 ‘산출’(output)까지의 과정을 가리킨다. 현대 경제는 생산지와 소비지(판매지점 근처)가 다르므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구성하는 물질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물질적 스루풋’이 된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동하는 거리가 지구적 규모이다.))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거는 없다. 지구상의 물질 추출과 소비는 1980년 이해 94% 증가했으며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추산으로는, 2040년이 되면 세계의 선박·비행기·트럭을 사용한 수송거리가―그리고 수송되는 물질이―거의 정확하게 GDP의 성장률에 보조를 맞추어 지금의 두 배 이상이 된다고 한다.

클린에너지는 중요하지만 우리를 이 악몽에서 구해주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바꾸면 가능하다. 사람들은 GDP 성장이 더 나은 세상을 창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빈곤을 줄이지 않으며 그 ‘외부성’(externalities)(([정리자]‘외부성’(externalities)은 상품생산이 시장의 외부에서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 외부성과 부정적 외부성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맥락상 외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국한되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학교 근처에 있는 화상경마장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폐해―부채, 과다노동, 불평등, 기후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GDP 성장을 진보의 주된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하며, 이는 올해 말에 모로코에서 비준될 기후변화협약의 일환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새로운 지구 경제를 상상하는 데 쏟을 때이다. 생태 발자국을 적극적으로 축소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최대화하는 경제를. 이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매우 낮은 소비 수준을 가진 높은 수준의 인간 발전을 이루는 데 이미 성공했다. 사실 리즈 대학 경제학자인 대니얼 오닐(Daniel O’Neill)이 물질적 탈성장(degrowth)이 높은 수준의 인간 복지의 발전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입증한 바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클린에너지로 전환하는 한에서는 현재의 상태대로 지속할 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으나, 이는 위험하게 단순화된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위기를 물리치려면 심층에 있는 원인과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 저자 제이슨 히켈은 <더 룰즈>(The Rules)에 속해 있다 <더 룰즈>는 활동가들, 예술가들, 농업가들, 농민들, 학생들, 노동자들, 디자이너들, 해커들, 몽상가들 등의 세계적 네트워크로서 지구의 내러티브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 민주주의 그리고 기본소득

* 다음은 7월 8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완결된 글은 아니고 단상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실제 발표는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없어서) 앞의 그림 한 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그 당시 들으러 오신 분들은 이 발표문을 통해 누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한글본을 먼저 작성하고 나중에 영어본을 작성했는데, 영어본은 정확히 일대일 대응되는 번역이 아니라 내용상으로 조금 더 다듬어진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본을 앞에 놓습니다. 한글본은 손을 더 보는 게 좋은데, 이미 잔치가 끝나니 손이 안 가네요;;;; 한글본은 주석 위치가 미주로 되어있는데,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주석을 반드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결된 논문이라면 본문에서 상세히 다루었을 대목들을 주석에 자료처럼 배치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정남영-발표문영문>

Download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정남영-발표문영문그림보완.pdf, PDF)

 

<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

Download (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pdf, PDF)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0월 9일자로 게시된 글 “Highly Recommended: Capra & Mattei’s The Ecology of Law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옮긴이 : 정백수

커먼즈 기반의 법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중요한 새 책이 막 나왔다! 『법의 생태론―자연 및 공동체와 조화되는 법체계를 위하여』(The Ecology of Law: Toward a Legal System in Tune with Nature and Community)』는, 앞으로 많은 환경 문제들을 풀려면 법 자체를 다시 개념화해야 하며 커머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과학과 법 분야에서 각각 모험적 정신이 돋보이는 카프라(Fritjof Capra)와 마테이(Ugo Mattei)의 작업의 결과이다. 카프라는 물리학자이자 체계이론가(systems thinker)로서 1975년에 그의 책 『물리학의 도』(The Tao of Physics)로 처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이 책은 근대 물리학과 동양 신비주의를 연결하고 있다. 마테이는 이탈리아의 잘 알려진 커먼즈 법이론가이자 국제적인 법학자이며 커먼즈 활동가로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스팅스 법과대학과 투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있는 키에리(Chieri) 타운의 부시장이다.

 

『법의 생태론』은 법의 역사를 과학적·기계론적 세계관의 산물―만일 우리가 생태적 재난을 비롯한 많은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극복해야 하는 유산―로서 야심차고 거시적으로 서술한다. 이 책은, 근대적 사고방식(사유의 템플릿) 자체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심각한 근본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근대적 사고는 개인들이 집단의 안녕과 생태적 안정에 가하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지고의 행위자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근대는 또한 세계를 관찰 가능한 인과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단순화된 기계론적 관계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보며, 주체성·돌봄·의미와 같은 더 섬세한 삶의 차원들을 무시한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이에 대한 교정으로서 법에 의해 인정되는 일단의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을 제안한다. (이때 법은 그 자체로 전통적인 국가법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두 세련된 재야 이론가들이, 커머닝에 기반을 두며 새로운 종류의 ‘생태법’(ecolaw)에 의해 보호받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개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경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자연과학과 법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사점들을 스케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법 모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공유된 개념들을 반영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크, 베이컨, 데카르트, 그로우셔스(Hugo Grotius)1, 홉스가 그려낸 우주론적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세계를 원자론적 개인들과 기계론적 원리들이 지배하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질서로 보았다. 이런 세계관이 경제학, 사회과학, 공공정책, 그리고 법에서 계속적으로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생태론』이 가진 대담함은 근대의 병리학이 어떻게 오늘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 세계관이 많은 생태적 재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어떻게 막고 있으며,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학이 어떻게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 요소인가를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카프라와 마테이에 따르면, 근대는 사유재산과 국가 주권의 신성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실재의 ‘객관적인’ 자연적 재현으로 간주되는 질서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 ‘개인’과 ‘집단’의 구분 또한 실재의 자명한 서술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커먼즈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극히 환원론적이며 우리를 오도한다는 것을 안다. 커머닝은 인간들이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데 더 통합된 범주들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실제 경험상으로 개인들은 집단 내에 삶의 자리를 잡고 있으며 다른 개인들과 협력함으로써만 발전하고 번영한다. 마찬가지로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혼합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 근대에 전형적인 양자택일의 구도(‘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일종의 합의된 사회적 허구이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사유의 (오도하는) 범주들을 긍정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법은 개별 시민에게 부과되는 외적 한계는 없으며, 개인 각각은 ‘합리적 행위자’로서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추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자연을 향상시키며 가치를 창조하고 인간의 진보를 더 진척시키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는 미친 듯 날뛰어 지구를 파괴하기에 이른 사회적 DNA이다. 근대의 세계관에서는 역사도 없고 사회적 참여도 맥락도 없는 고립된 행위자들인 개인들이 변화의 주된 동인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마음껏 자신만을 생각하고 쾌락을 즐길 허가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계속적으로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위험한 자본주의적·자유방임적 망상이다.

 

그렇다면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거나 새로운 일단의 정책을 입안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심층적 전제들과 대면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법에서 전과 다른 자연관과 인간관을 반영하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카프라와 마테이는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를 기계로 보는 패러다임에서 세계를 상호의존의 네트워크로 보는 체계론적이고 생태론적인 패러다임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은 ‘저 외부에’ 객관적 실재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법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질서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법은 항상 커머닝의 과정이다라고 쓰면서 법이 커머너들의 공동체들에서 출현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통찰이 우리가, ① 법을 권력과 폭력(국가)으로부터 분리할 것, ② 공동체들을 주권자로 만들 것, ③ 소유권을 생성적인(generative)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세 가지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생태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법의 생태론』을 관통하는 풍성한 통찰의 가닥들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저자들이 한 주장의 풍미를 같이 맛보는 데 머물기로 하자.

최종적인 무질서로 달려가는 데 대한 가장 중요한 구조적 해결책은 법을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들에 되돌려줌으로써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 사이에 일정한 조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만일 법의 본성이 지역의 조건들과 근본적 욕구들을 반영하면서 진화하는 공통적인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관심을 쏟을 것이다. 사람들은 법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조직된 유관 집단의 손에 계속해서 쥐어져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법을 만들고 사용하는 주체들인 것이다.

 

문화와 진정한 시민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혁명인 법에 대한 생태론적 이해는 위계와 경쟁을 법적 질서의 ‘올바른’ 내러티브로 보는 사고를 극복한다. 이 생태론적 이해에서는 네트워크라는 은유,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개방된 공동체라는 은유를 통해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개별적인 권리들·의무들·권한들·힘과 법 사이의―복합적인 관계들을 포착하려고 한다.

 

커먼즈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법을 입법하고 시행한다. 그들은 모든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초연해 있으며/있거나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삶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이의 인위적 구분을 극복한다. 여기서 법의 해석은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단적 의미를 공유하는 일로서 수행한다. 법은 권력과 폭력에의 의존으로부터 분리되면 언어, 문화 혹은 기예와 같은 것이 된다. 법은 집단이 서로 소통하고 스스로에 대해 결정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1. Hugo Grotius :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