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애하는 친구 질케 헬프리히(1967-2021)를 추모하며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In Remembrance of My Dear Friend Silke Helfrich, 1967-2021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2021년 11월 10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커머너 질케 헬프리히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녀의 동료 데이비드 볼리어가 작성한 글이다. 

질케 헬프리히와의 우정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협력 작업이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힘들다. 질케와의 우정 및 협력 작업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oell Foundation)의 멕시코와 카리브해 지부의 책임자로서 20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한 최초의 커먼즈 활동가 대회에서 시작했다. 질케는 나를 연사로 초대했다. 우리가 매우 다른 세계에서 살았음에도 둘 다 커먼즈가 자본주의적 인클로저에 맞서 소프트웨어에서 시작하여 종자와 토지 그리고 그 이상의 것에 이르는 우리의 공유된 부를 방어하기 위한 효과적 체계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느슨한 파트너십은 2년 후인 2008년까지는 실제로는 구체화되지 못했는데 2008년에 우리 둘은 활동가 커머너들의 드물었던 또 다른 초기 회합인 엘리베이트(Elevate) 축제에 참석했다. 이 인디음악과 정치문화를 위한 축제는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서 4일간 열렸다. 높이 170미터인 슐로스베르크언덕(Schlossberg Hill)의 단단한 바위를 실제로 깎아 만든 행사장에서 나는 막 피어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프로젝트(Creative Commons Project)에 대한, 과학 커먼즈와 역사 커먼즈 기획들(the Science Commons and History Commons initiatives)에 대한 열정적 발표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근대성의 스펙터클’(The Spectacle of Modernity)에 대한 해석인, 리믹스(remix) 예술가 D.J.스푸키(D.J.Spooky)의 혼을 일깨우는 공연을 접했다.

 

이 싹트고 있는 커머너들의 국제적 하위문화가 덜 탐구된 약속의 옥지(玉地)임이, 탐색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미스터리임이 내게는 분명해졌다. 나는 실제로 탐색했다. 다음날 채식식당 긴코(Ginko)에서 점심을 하면서 질케와 나는 다음 하려는 일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그 후 13년 간 놀랍게도 우리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하게 됐다. 공식적 직업이나 제도적 관여가 없는 상황으로 우리는 때로는 불안정했지만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우리는 커먼즈에 관련된 모든 것에 참여하는 사람이자 인류학자이며 활동가이자 전략가이며 협력자이자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람이고 또 그것을 대중화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질케와 나는 커먼즈를 전통적인 학적 방식으로, 즉 그저 경제적 자원이나 재산으로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커먼즈를 자본주의적 시장/국가 체계를 변형할 수 있는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치·문화·법·윤리의 성격을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커머닝이 얼마나 재구성할 수 있는가였다. 수십 년간 주류정치로부터 효과 없는 미적지근한 성과를 경험한 다음 우리가 생각한 것은 질러버려!였다.

그래서 열린 의제와 원초적인 호기심―진정한 창의성에는 낙관주의적 순진함이 필수적이다―으로 우리는 커먼즈를 재발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괴테의 유명한 발언이 우리의 세찬 작업 신념을 보여준다.

모든 주도적 행위(및 창조)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리가 하나 있다. 우리가 확고하게 헌신하는 순간에 섭리 또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한 무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발상과 멋진 계획들이 죽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온갖 종류의 일이 일어나 우리를 돕는다. 그 결정으로부터 사건들이 콸콸 흘러나와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치리라고 꿈꿀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예기치 않은 일들, 만남들, 물질적 도움들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일어나게 된다.

괴테는 기억하기 좋은 말로 조언했다. “할 수 있는 일이나 꿀 수 있는 꿈이라면 무엇이든 시작해라. 대담함에는 천재성과 힘, 마력이 있다. 지금 시작해라.”

당시 우리는 위 인용문을 몰랐지만 우리는 실로 저 인용문대로 했다. 우리의 작업은 해방적이었고 새로운 활동 영역을 열어젖혔다. 나의 작업 파트너이자 조력자, 공동 조사자, 검증자인 질케를 못 만났다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정말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창조했다. 혹은 적어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독일민주공화국(구 동독)의 농장에서 자랐고 라이프치히에서 사회과학과 로망스어 교육을 받은 질케는 1960년대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으로 양육된 나와 관점이 꽤 달랐다. 그녀는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의 통일 그리고 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끔찍한 확대를 체험했다.

반면 나는 소비자 옹호자 랠프 네이더(Ralph Nader), 할리우드의 제작자이자 활동가 노먼 리어(Norman Lear)와 함께 일하며 일류 정치 교육을 받았다. 워싱턴의 정치와 공익 운동에 몰두하면서 말이다. 문화적·지적·정치적으로 너무도 상이한 세계에서 왔지만 우리는 커먼즈에 대한 강고한 열정과 그 잠재력에 대한 기묘한 감각을 공유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차이가 내가 폭발적 창의성으로서 경험했던 것에 기여했다.

참으로 충격적이게도 우리의 길고도 기묘한 여행은 질케의 연인인 자크가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한 지난주 충격적 종말을 고했다. 질케는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 중 11월 10일 아침 알프스에서의 일일 하이킹을 위해 떠났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에 수색팀은 그녀가 ‘통행불가지역’에서 치명적 사고를 당했다고 고지했다.

그 소식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말도 할 수 없었고 멍해졌다. 너무도 지적이고 유능한 활동가이자 끝없는 에너지를 가진 생기 있고 관대한 여성인 이 소중한 친구를 내가 더 이상 줌(Zoom)으로 부를 수 없다니. 펼쳐지고 있는 ‘커먼즈 세상’을 그녀의 기민한 판단과 경험 없이 내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질케의 돌연한 떠남이 아주 분명히 보여준 것은 그녀가 오늘날의 커머닝의 세계에서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믿을 만하게 그려보는 탐색작업에 나서는 데 있어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친애하는 동료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그녀의 특별한 인격, 혼융된 재능에 관해 숙고하고 싶다. 15년 동안의 우정과 조언, 지지가 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죽음으로 상심이 클 클라라(Clara), 폴(Paul), 자크(Jacques), 지나(Gina), 닉(Nick), 카이(Kai)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싶다.

*                      *                      *

가장 믿지 못할 일은 질케와 내가 4,000마일 떨어져 살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독일 예나에서 (더 최근에는 노이데나우Neudenau 마을에서) 살았고 나는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Amherst)의 시골 대학 마을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몇 년 간 우리 둘 다 평범한 직장이나 안정적인 제도적 지원이 없었다. (2017년부터 나는 슈마허신경제센터Schumacher Center for New Economics에서 일하고 있다. 질게는 뵐 재단을 떠난 후 소속된 곳이 없는 ‘자기 고용’(self-employed) 상태를 유지했다.)

2008년 그라츠(Graz)에서의 모험 이후 우리는 커먼즈를 조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슈테판 메레츠(Stefan Meretz)와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는 3일간의 휴양을 위해 커먼즈 연구자와 활동가로 이루어진 드림팀을 소집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 미셸 바우웬스(Michel Bauwens), 볼프강 작스(Wolfgang Sachs) 등 많은 이들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일단 저지르니 섭리가 웃으면서 우리 방향대로 사태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독일 백작인 지속가능산림감독관 헤르만 하츠펠트(Hermann Hatzfeldt)를 찾았는데, 하츠펠트는 1550년에 지어진 그의 교외 거주지 크로토프성(Crottorf Castle)을 다종다양한 국제 커머너의 회합에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커머너들이 다른 종류의 미래를 숙고하기 위해서 성의 대형홀에 모인다는 기발한 생각이 좋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즉흥적 액티비즘과 문화변화에 대한 우리의 실험이 시작됐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말했듯 우리는 행복을 쫓을 때 구현되는 ‘보이지 않는 도움’에 의존했다. 동시에 독립적 활동가로서 우리는 다루기 힘든 이데올로기적·제도적 뒤얽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P2P재단(Peer to Peer Foundation)의 설립자이자 태국 치앙마이에 기반을 둔 벨기에 활동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가 질케 및 나와 함께 커먼스전략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 CSG) 결성에 참여했다. (미셸은 2018년 CSG를 떠났다.) CSG는 실제 조직이라기보다는 이름이자 대담한 열망의 표현에 가까웠는데 그것은 사실 CSG가 단지 세 개인의 느슨한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한 재정 지원이나 법적 지위가 없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커먼즈 패러다임 및 담론의 잠재력을 날카롭게 알아보았다. 통찰·직관·저술을 교환하며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커먼즈 프로젝트의 진전을 추적했다. 우리는 파리·베를린·암스테르담에서 혹은 우리의 발표 일정이 겹치는 곳이면 어디서든 만나 소식을 교환하고 전개되고 있는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우리의 특이한 협력을 묘사하는 것은 이 협력이 질케의 주목할 만한 강건함 즉, 탐색하고 종합하는 그녀의 지적 능력, 친구를 사귀는 그녀의 재능, 실천적 활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부각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발표 초청, 자문 초청을 받았고 컨퍼런스, 워크숍, 공개 담화를 다니며 수개월을 보냈다. 커머너 친구들과 지인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질케는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커먼즈 세상’에서의 선구적 사태전개에 대해 직접 체험으로 배웠고 이 겉보기에는 주변적인, 기묘한 세계에 대한 그녀의 그리고 우리의 웅대한 이해를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파리, 몬트리올, 아프리카의 불어를 사용하는 커머너들,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연계된 커머너들,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활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집중된 지점들을 대체로 잘 알았다. 그녀는 유럽의 주요 커머너들을 알았고 아프리카·동남아시아·세계사회포럼의 활동가들·학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이후의 많은 활동은 우리가 조직한, 향후 중대한 영향을 미친 두 국제 커먼즈 컨퍼런스를 통해 가능해졌다. 2010년과 2013년에 각각 열린 컨퍼런스는 모두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과의 협력과 재단의 국제정치부 수장 하이케 뢰슈만(Heike Loeschmann) 및 이사장 바바라 운뮈시흐(Barbara Unmüßig)의 지원 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두 컨퍼런스는 스스로를 커머너라고 생각하거나 커머너이고자 하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사람들을 결집시켜서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사람들은 커먼즈에 대한 자신들의 직관을 입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가 확산되었다. 커먼즈가 담론으로 성장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편 CSG는 2012년과 2021년 사이에 12번 이상의 소규모 ‘딥다이브’ 모임들을 별도로 주최했다. 이 모임들은 미리 마련된 답이 없는 난해한 전략적 물음들을 적절한 시기에 검토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커머닝이 어떻게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건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2016년), 디지털 플랫폼이 협동주의를 촉진하는 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2014년),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어떻게 연계되고 합류될 수 있는지(2014년), 존재론적 믿음이 현대 정치의 숨겨진 동인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2019년) 등을 다룰 수 있는 주요 전문가를 초청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함께 우리는 대안적 가치이론이 가치와 가격을 동일시하는 표준적 경제이론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2016년 딥다이브 모임을 주선했다. 불과 몇 달 전인 2021년 9월 우리는 주류 정책이 어떻게 커머닝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유럽의 커머너 정치인과 정치권의 온라인 모임을 주선했다.

지금까지 질케와 나의 가장 담대한 협력은 우리의 세 권의 책, 즉 두 권의 선집『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 , 2012)와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 2015), 그리고 커먼즈를 야심차게 사회체계로 재개념화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 있는커먼즈의 전복적 힘』(Free, Fair and Alive: The Insurgent Power of the Commons , 2019)이었다. 뵐 재단과 하이케 뢰슈만으로부터 세 권의 책 전체에 대한 중요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두 선집은 동시대 커먼즈의 풍부한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우리는 커먼즈가 중세적 삶의 유물이나 이상하리만치 글로벌 싸우스에 잔존하는 후진적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커먼즈가 시장/국가 체계에 대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견고한 일단의 대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서도 질케의 예리한 판단력과 훌륭한 가르침 그리고 개인적 우정이 엮어낸 전지구적 그물망이 우리가 실타래를 함께 푸는 데 기여했다.

2016년 질케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대중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커머닝을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두  공편 선집의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세 번째 책을 함께 쓰려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목격했던 커먼즈의 실증적 다양성을 더 정확히 기술하기 위한 웅장한 이론적 종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표준적 경제학마냥 커먼즈를 단순히 소유되지 않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사회적 형태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공유지의 비극’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와 그의 패턴 언어(pattern language) 방법론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는 커먼즈를, 근대적인 시장 개인주의, 시장 경제학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사회적 형태로 설명하려했다. 커먼즈는 ‘존재변화’(OntoShift)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커머닝의 농밀한 관계성을 인지하고 개인적/집단적, 합리적/비합리적, 이기적/이타적이라는,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원적 관계들을 배제하는 존재변화를 통해서만 말이다. 

이는 우리가 커먼즈를 사유하는 데서 중요한 돌파구였다. 여기서도 질케는 미지의 영역으로 우리를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은 유쾌하면서도 진을 뺀, 미친 3년간의 전력 질주의 결과였다. 

일전에 우리는 베를린 교외의 친구 집에 모여 한 주를 보내면서 매일 같이 열다섯 시간을 얘기하고 논쟁하며 글을 썼다. 반복되는 “커머닝의 패턴”은 무엇일까? 그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가 본 것과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쓴 것이 어떻게 아귀가 맞을 수 있을까? 종내 ‘삼중적 커머닝'(Triad of Commoning)이라 불리게 된 것이 바로 우리 숙고의 결과였다.

다른 사례로 나는 네덜란드 아른헴(Arnhem)에서 열린 컨퍼런스 이후 며칠을 쥐어짜 다수의 커먼즈의 특징으로 본, ‘관계성 자산’(relationalized property)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따져볼 수 있었다. 우리가 깨달았던 것은 커머닝의 현실이 재산권 인식론을 통해서는 혹은 시장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전제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경제학 용어가 허용하는 논리·기풍과는 다른 논리·기풍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질케의 단호한 투지와 결단, 창조적인 즉흥적 활동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지적·실천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휴양지에서 딥다이브 모임을 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빈 방에서 잤고 함께 요리했고 설거지했다. 

한번은 한동안 서로 만나지 않은 미셸과 나, 그녀가 커먼즈전략그룹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그녀가 『오야』지(Oya magazine) 친구들을 설득해 북해의 외딴 독일 마을로 우리를 초대했다. 또 다른 경우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친구를 설득해 토스카나 교외의 한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엇갈린 여정 이후 만나 서로의 논의를 뒤따라갈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는 커머너들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피렌체 중심부의 니디아치 정원(the Nidiaci Garden)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렇게 우리의 모험은 계속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전개와 새로운 친구들이 무슨 일인지 언제나 나타나 우리의 일을 진척시켰다.

질케와 나는 우리의 책을 쓰느라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일전에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영화 제작진이 깊이 토론하는 우리를 촬영했는데, 이는 나중에 우리 책의 짧은 홍보 영상이 되었다. 이를 통해 질케와 내가 “함께 생각한” 방식을 알 수 있다. 

혹은 베를린 커먼즈 컨퍼런스 직후 촬영된, 리믹스더커먼즈(Remix the Commons)가 제작한  2010년의 이 짧은 비디오를 보면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질케의 설명을 확인할 수 있따. 

커먼즈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일단 그리 되면 그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성장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이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 운동을 하는 사람이 프리 하드웨어 운동을 하는 사람과 자리에 앉아 함께 얘기를 나누면, 그리고 커먼즈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진정 친밀한 어떤 것임을 깨달으면, 그 생각이 씨앗처럼 심어지며 사람들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직접 맡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종 공동작업을 하면서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조종하는 우리 자신의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그녀의 말도 안되는 여행 일정과 색다른 만남을 뒤따라가고자 고군분투하면서 나는 여행이나 독서를 하는 중에 그녀에게 보고하고는 했다. 나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은행가들을 막 만났다거나, 커먼즈 커리큘럼 개발에 관심이 있는 대학원과 협의하고 있다거나, 가장 재미있는 박사과정생을 만났다거나,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을 번역하기 위해 커머너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번역가 팀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받고는 했다.

이것이 또 하나 주목할 점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언어에 유창해서 그녀는 전 세계의 매우 광범위하고 다방면의 커머너 그룹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열정·재능·신념·활력을 가진 질케가 만성적으로 과로하고 빈번히 지쳐했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쓰는 데 너무도 관대했고 유망한 프로젝트를 몹시도 돕고 싶어했다. 그녀는 꽉 찬 스케줄에 초조해 하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조치를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었다. 독일이 자정일 때 (미국 동부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내게 전화하면서 그녀는 종종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나는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것이 근대 커먼즈를 탐험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임을 안다. 하지만 질케가 ‘통행불가지역’을 탐색하는 문제로 당황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겠다. 그녀는 항상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문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거나 밑으로 파고들거나 변형시키고자 했다. 그녀의 헌신의 깊이는 놀라웠다. 그녀의 대담하고 생기 있는 마음은 너무나도 전율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솔직한 우정은 선물이었다. 나는 그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