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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아래로부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77-83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로부터 볼 때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실로 광범한 해방 기획들의 입각점이며 우리의 분석에서 발전시킬 관점이다.

베버 : 권력(Macht, power)은 지배(Herrschaft, domination)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그래서 전자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반면 후자는 명령이 복종되어야 한다. 여기서 정당화의 문제 혹은 어떻게 명령이 동의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명령이 복종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필요가 나온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생각과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역행하는) ‘현실주의적’ 버전의 마키아벨리주의를 형성한다.

결국 베버는 관계로서의 권력이라는 정의를 무너뜨린다. 명령이 복종의 예시(豫示, prefiguration)로 찬양되면 저항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렌트 또한 유기적 권력관을 반박하려고 시도한다. 열려있는 정당성. 이 열려있음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다. 폭정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혁명, 항상적 변이, 구성적 힘을 말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국가이성은 폐쇄된 권위의 기능이자 그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반복적으로 하며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권력은 주체들의 손에 쥐어지며 아렌트에게 ‘진정한’ 실천은 공적, 정치적 행동이다. 능동적 삶은 시민적 삶에 완전히 관여하며 그 관계에서 무력해지지 않고 “inter-esse”(상호 존재하기/관심)를, 인간의 상호작용을 향한다.

근대적 권력정의로부터 나오는 데에는 베버와 아렌트로 충분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일자와 초월이 승리한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것은 군주에의 조언자로서의 마키아벨리라기보다는 ‘섭리의 꽁피당’(레이몽 아롱)이다. 베버가 제시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화 메커니즘들이며 대안적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관료적 기능의 기계적·객관적 성격이 나름의 주체성 생산 형태를 띠지만, 베버는 정동, 열정, 혁신조차도 추방한다.

마키아벨리의 본질적 요점은 권력을 관계로서 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이는 인식론적 입장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를 행하여 구축하는 정치적 궤적이다. 이것이 다중의 경로이다. 이 경로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자유의 도구로서 해석하는 동시에 자유를 민주주의의 산물로서 제시한다.

푸꼬가 근대의 지배적 권력관에 대한 도전을 현대적 세계의 조건으로 옮겨놓을 수 있게 해준다.

1979년 강의(『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의 방법론 설명: 주권자, 주권, 민중(민), 신민, 국가, 시민사회(the sovereign, sovereignty, the people, subjects, the state, and civil society)와 같은 관념들을 우선적이고 본래적인, 그리고 이미 주어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경로를 정의한다. 진실은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는 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축된다. 예를 들어 해방 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인 실천, 진실을 창조하는 장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정의에 기반을 둔다는 촘스키의 발언에 대한 푸꼬의 대답 : “저는 스피노자 식으로 당신에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힘을 갖기(take power)(([옮긴이] ‘take power’는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다’라고 옮기는데, 내용에서 보다시피 푸꼬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체적 힘’이라고 옮겼다.))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전복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그런 전쟁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이 푸꼬의 아래로부터의 힘(권력)이라는 인식론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푸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권력관―여기서는 주체가 저항을 허용받지 않는다―을 제안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푸꼬의 1960년대와 70년대 저작과 관련해서도 사실이 아니다. 푸꼬는 이 시기에 강한 구조주의적 틀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구조주의적 제한들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그는 모든 개체화하는 작업, 데카르트적 주체성을 되풀이하는 모든 작업에 맞서 논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체(subject)의 ‘해체’(destitution, 탈구성)를 통해 이를 성취했다. 이는 ‘우리’—나와 우리의 관계—를 생성(becoming)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체(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탐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푸꼬가 70년대에 미시권력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권력 개념을 일반화하는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에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형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에 기반을 둔 권력관이라는 점이다.

푸꼬의 작업은 1970년대의 주된 정치적 긴장이라는 상황에 위치시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작업은 공장에서 광범한 사회적 지형으로의 사회적 적대의 확대를 쫓았으며 투쟁의 주체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분석했다. 푸꼬는 완전히 이 작업에 몰입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맑스를 넘어갔다. 물론 (일부 활동가들이 채택하는 바대로)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버전들을 넘어가고 맑스주의를 사회적인 것 안에서 변용시켜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바로 이것이 ‘삶정치’ 개념이 궁극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들에서, 주체적인 것에서, 주체화에서 다시 채택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운동에서 발전했던 것은 푸꼬의 강의들에서,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반영되었다. 이 강의는 권력을 바라보는 구조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틀과의 단절을 명시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위”에 있는 자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그 지식이 변형되는 종속민의 입장에서 권력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있는 사람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더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다중의 사업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아래로부터’는 또한 정치적 궤적을 지칭한다. 즉 명령을 전복할 힘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할 능력을 가진 제도적 기획을 지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