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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의 렌즈를 통해 정치를 다시 상상하기



 

여러 우파 민족주의 운동들의 출현—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의 신나치주의자들, 유럽 전역의 반(反)이민 시위들—은 제 나름의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원과 맥락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전체로 보아 그 운동들은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위해 기꺼이 생각해 볼 선택지들이 자본주의적인 정치문화에서 줄어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보다 건강한 대안적 비전들은 왜 그토록 드물고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발생시킨다.

정치 엘리트들과 그들의 동지인 기업가들은 현재 존재하는 바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심충적인 모순들을 어떻게 화해시킬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자유 시장 원칙의 고전적인 적들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조차 낡은 세계관과 일단의 정치 전략들 안에 갇혀 있어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실속이 없는 일처럼 들린다. 잘 알려진 그들의 진보서사—즉 정부 개입과 재분배로 증대되는 경제적 성장이 실제로 작동하여 사회를 한층 안정적이고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도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아래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정치•거버넌스•법을 다시 상상하기 위한 새롭고 실천적인 렌즈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커먼즈는 공유된 부를 관리하기 위한 자기조직화된 사회 체제가 그 핵심이다. 커먼즈는 “비극”이기는커녕 책임과 혜택을 상호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으로서 매우 생성적이다. 커먼즈는 숲, 농지, 물의 성공적인 자기관리에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과 오픈 액세스 학술 저널에서, 그리고 “세계-지역적” 디자인과 제조 시스템에서 볼 수 있다.

2008년 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인 담론을 유포시켰던 많은 합의 신화들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성장은 널리 혹은 공평하게 공유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빈민, 노동계급, 심지어 중산층도 부자들이 누리는 생산성 향상분, 세금 우대 조치나 주식 가치 상승분을 그다지 나눠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모든 경제활동 참여자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심해지는 부의 편중은 새로운 전지구적 금권지배체제를 창출하고 있으며, 지배세력은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폐단들에 무관심한 동시에 민주적인 과정을 지배하고 타락시키기 위해 그들의 재산을 이용하고 있다. 시장/국가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반적인 비판의 맥락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과제가 좌파나 우파로부터 현재 제공되는 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정치적인 상상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약탈을 일삼는 시장과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거나 길들이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거버넌스와 자급(自給) 계획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지난 50년간 자본주의가 무자비하게 발생시킨 반(反)생태론적, 소비자 적대적, 반(反)사회적인 ‘외부효과들’(externalities)의 홍수를 국가의 규제로 완화하는 데 실패한 것은 주로 자본가의 힘이 국민국가와 시민 주권의 힘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좌파는 다시 데운 케인스주의, 부의 재분배 및 사회적 프로그램들이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다.

문화 비평가인 더글라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저는 경제를 고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경제는 고장 나있지 않습니다. 불공평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경제는 감독관인 자본가들이 의도한 대로 대체로 작동하고 있다. 시민들은 민주적 절차들이 부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민주정치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자주 무산되기 때문에 종종 절망한다. 국가 관료 체제들과 심지어 경쟁력 있는 시장들도 많은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다룰 능력이 없다. 기후변화•불평등•기반시설 및 민주적인 책임감에 관하여 ‘시스템’이 줄 수 있는 것의 한계는 매일매일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짐에 따라 정치적 주권과 정당성이 앞으로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타당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비전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된 이데올로기 논쟁들이 계속해서 공적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심층적인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늘 존재하던 다수의 의견 차이들을 끝없이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프로젝트가 구체화되고 성장할 조건이 정말로 거의 없다. 새로운 비전이 사회 개선론적 개혁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면 그 비전이 숨을 쉴 여지, 그 자체의 자주적인 논리와 윤리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어야 한다.

『더네이션』(The Nation)지에 실린 최근 글에서 내가 설명한 것처럼 반란 서사와 프로젝트들은 실제로 상당히 풍부하다. 무엇보다도 기후 정의, 협동조합, 이행도시들, 지역 식품 시스템, 대안적 금융, 디지털 통화,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 오픈디자인과 오픈매뉴팩처링(Open Manufacturing)에 초점을 맞춘 운동들이 자율적인 거버넌스와 자급이라는 새로운 탈자본주의 모델들을 개척하고 있다. 단편적이며 다양할지라도 이 운동들은 공통의 테마—이윤이 아니라 가정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과 소비, 상향식 의사 결정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유된 부의 파수(把守)—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가치들 전부 커먼즈의 핵심에 해당한다.

현재로서는 이 운동들이 주류 매체와 정당들에게 거의 무시당한 채 문화 비주류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운동들이 온전함과 실질을 갖추고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오로지 이곳, 주변부에서 이 운동들은 정당들, 정부 기관들, 상업적 매체, 자선 단체, 학계, 산업과 비영리 단체가 결탁한 복합체의 따분한 편견들과 자기중심적인 제도상의 우선순위를 피할 수 있었다.

사회를 변형시키는 변화를 위한 공적인 상상력은 왜 이토록 위축되어 있는가?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기성 기관들이 그들의 브랜드 평판과 기관의 특권을 관리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대담하고 새로운 기획과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한편,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들은 규모가 너무 작고 사소하거나 비정치적이어서 중요성을 띨 수가 없는 것으로 보통 무시된다.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들은 또한 주류 행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힘, 어포던스(affordance, 개별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구조적인 능력) 그리고 도덕성을 구축하기 위해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작농 그룹 <라비아깜뻬시나>(La Via Campesina)의 등장, 토착민들 사이의 초국적 협력, 우버와 에어앤비에 대한 공유 대안을 촉진하는 플랫폼 협동조합 및 ‘벼증산시스템’(System for Rice Intensification, 농부들 스스로 개발한 일종의 오픈소스 농업)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활동가들은 자신들을 특권•평판•간접비용을 유지해야 하는 위계적인 조직들에 속해서 활동하는 존재로 보기보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개방되어 유동적인 환경에서 유연한 행위자로서 활동하는 존재로 본다. 네트워크에 의해 추동되는 행동주의는 그들에게 활동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자기조직화하고 연계시키며, 재능을 가진 자발적인 참가자들을 끌어들이고, 창조적인 반복을 빠른 주기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준다.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관례적인 정책과 정치과정을 삼가고 자기조직화된 창발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 생태학적으로 말하자면,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오픈 디지털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이용권”(利用圈, catchment areas)을 창출하려고 노력한다. 즉 (물, 식물, 토양, 유기체 등등) 수많은 흐름들이 합류하여 활기찬 에너지가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상호의존적인 지대를 발생시키는 지형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복잡성 이론과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학자인 마가렛 위틀리(Margaret Wheatley)와 데보라 프리즈(Deborah Frieze)는 다음과 같이 쓴다.

지역의 개별적인 노력들이 네트워크로서 서로서로 연결되고 실천 공동체로서 강화될 때, 갑작스럽고 놀랍게도 새로운 체계가 대규모 수준에서 나타난다. 영향력을 가진 이 체계는 개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자질과 능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체계가 출현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체계의 속성이다. 하지만 일단 체계가 존재하면 개인들도 그 속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발생하는 체계는 계획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가능한 것보다 더 큰 힘과 영향력을 항상 갖고 있다. 창발은 삶이 급진적인 변화를 창출하고 사물들을 적절한 규모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다.

선거 정치와 전통적인 경제학을 신봉하는 보수집단은 창발의 역동적인 힘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정책 구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는커녕 창발 원리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힘들어한다. 보수집단은 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② 위키피디아식 협력과 지식 집성체의 속도와 신뢰성, 그리고 ③ (오큐파이 운동,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와 뽀데모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그리고 그리스의 시리자 등등)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자기조직화에 촉매가 된 소셜 미디어의 힘으로 가능해진 상향식 혁신을 한결같이 과소평가했다. 전통적인 경제•정치•권력의 보수적인 신봉자들은 탈중심화되고 자기조직화된 네트워크의 생성적인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제도적 통제와 정치적 분석이라는 시대에 뒤진 범주들을 적용한다. 마치 “말이 끌지 않는 마차들”이라는 말을 통해 자동차의 악영향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낡은 좌우 스펙트럼—이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서 “시장”과 “국가”가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반영한다—을 고수하는 대신에, 거버넌스•생산•문화의 새로운 추진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서사를 맞아들일 필요가 있다. 내 개인적인 작업의 경우, 나는 농부들, 어부들, 대도시 시민들과 인터넷 사용자들이 자본주의 기계의 먹이가 되어버린 공유 자원을 되찾고자 그리고 나름의 거버넌스 대안을 마련하고자 시도할 때 거기서 커먼즈의 엄청난 잠재력을 본다. 이런 식으로 커먼즈는 패러다임이자 담론이며 일단의 사회적 실천이자 윤리이다.

지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커먼즈는 모든 것의 시장화와 상품화, 자원의 약탈과 사유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부패에 도전하는 다양한 운동들을 위한 일종의 포괄적인 메타담론 역할을 해왔다. 커먼즈는 커머너처럼—협동적이며 사회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에 함입되어 있으며 장기적인 환경파수에 관심이 있고 우리의 지구를 구성하는 다원 세계를 존중하는 커머너처럼—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한 언어와 윤리도 제공해왔다.

진정으로 체계 변화를 현실화하려면 우리는 일부 과거 회고적인 개념들과 어휘에서 해방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부상하고 있는 자급 모델과 자율적인 거버넌스에 관하여 새롭게 탈자본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독려할 필요가 있다. 펼쳐지는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여러 지도자들과 정책을 선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꿀지를, 새롭게 공유된 지향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직할지를 그리고 커먼즈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어떻게 고양시킬지를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