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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과연 자립적인 영역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3장 뒤에 달린 글 “Against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정치적인 것의 자립성에 반대하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의 의미심장한 대표자 가운데 하나는 ‘Primat der Politik’(정치의 우선성) 테제의 레닌이다.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국가권력의 쟁취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귀결을 낳았다. 물론 레닌의 이러한 입장이 당시의 소련의 혁명 전통을 모두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블로그의 보그다노프 관련 글들(특히 http://minamjah.tistory.com/193)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치 영역과 사회·경제 영역이 분리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 공적인 영역(국가)과 사적인 영역(자본)의 짝이 사회적 삶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오늘날 우리가 대안근대의 새로운 삶형태를 그리는 데 필수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고 정치와 사회·경제의 연결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이 글은 엄밀한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은 이해하기 쉽게 ‘정치영역의 자립성’으로 옮기기로 한다.

 

 

정치 영역의 자립성에 반대하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좌파를 구원할 힘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저주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영역의 자립성’이란, 정치적 의사결정이 사회경제적 삶의 압박으로부터, 사회적 필요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전통적 자유주의]

오늘날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주장하는 가장 명민한 이론가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자유주의 사상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특히 정치 영역에 경제적 합리성을 부과한 것)로부터 구원할 수단으로 본다.

웬디 브라운(Wendy Brown) : 신자유주의는 사회정치적 삶을 경제적 계산에 종속시킨다.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있었다—케네스 애로우(Kenneth Arrow). 이런 경우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시장논리의 지배(자유시장에 기반을 둔 경제적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한 방법이다. 권리, 자유, 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아렌트와 공명하는 바가 많으며 적어도 밀(John Stuart Mill)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들 가운데 최고는 진솔하고 귀중한 노력을 보여주지만 민주주의 기획에는 부적절하다.

① 불평등과 비자유의 사회경제적 원천을 공격하지 않는다.

②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만 고려되는 한 민중의 자치능력이 영원히 모호하게 남는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고결하지만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나타난다.

 

[좌파]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측면(사유화, 탈규제)을 비판하고 국가 및 공적 통제의 귀환을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맞서서 케인즈적 혹은 사회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재천명하고 그럼으로써 금융과 기업의 괴물 같은 힘을 제어하고자 한다. Paul Krugman, Alvaro Garcia Linera, Thomas Piketty 같은 이론가들에게서 이런 주장이 보인다. 이들은 우리의 우군이고 (국가와 공적 권위의 문제를 잠깐 제쳐놓으면) 그들의 목적에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 케인즈적 혹은 사회주의적 국가에 대한 호소는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20세기에 기반을 두었던 사회정치적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노조들과 노동계급 조직들은 완전히 망가졌고 조합주의적으로 되었으며 복지구조도 알맹이가 다 빠져나갔고 전문직 연합들(과 시민들 자체)도 향수를 낳을 정도로 산산이 흩어졌다. 희망을 버리고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투항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다중의 생산과 재생산의 삶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조직과 협력의 능력을 인식하면서) 대안적인 출발점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수 지식인 집단]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전위적 형태로 주장하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다. 이 주장은 종종 오늘날의 수평적인 사회운동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된다. 지젝은 바디우를 따라서 “새로운 주인의 형상이 필요하다···좌파의 새처(Thatcher)이다. 새처의 제스처를 반대 방향으로 되풀이할 지도자이다”라고 언명한다.((Slavoj Zizek, “The Simple Courage of Decision: A Leftist Tribute to Thatcher,” New Statesman, 17 April 2013, http://www.newstatesman.com/politics/politics/2013/04/simple-courage-decision-leftist-tribute-thatcher)) 우리는 지젝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는다. 즉 어떤 좌파 지도자를 궁극적 권위의 지위에 올리자는 제안으로 읽지 않는다. 그의 언명들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좌절(그의 이 말은 Zuccotti Park, Tahrir Square, Puerta del Sol이 경찰에 깨끗하게 진압된 2013년 초에 나왔다)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의 형성에 대한 독단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생각들(우리는 이에 공감하지 않는다)에 의해 활성화된 자극적 몸짓들로 이해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에는 중앙 권위와 전통적 지도층을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회운동에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긍정하는 이런 여러 주장들은 신자유주의의 권위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홀려있다는 사실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주권이 좌파의 힘을 복원하는 처방이라는 믿음도 공유한다. 신자유주의가 전통적인 주권적 권력을 붕괴시킨 것은 맞다. 이는 2008년 이후 유럽에서 전지구적 자본이 위기를 관리해오고 금융자본의 지도자들이 부채 국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유럽 나라들에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해온 것을 보기만 해도 안다. 유럽 사회는 화폐의 권력이 창출한 위계적 기준들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금융자본은 대의정치의 전통적 구조들과 일국 정부들의 기능에 대응할 필요를 벗어던진 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맞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정치영역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은 곧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사고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다른 선택사항이 있다. 사회의 비주권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조직화가 가능하다. 정치영역의 자립성을 부활시키는 대신에 정치영역이 사회영역으로 다시 흘러들어가고 사회영역에 의해 회수되어야 한다. 정치적 합리성과 정치적 행동은 사회적·경제적 삶의 회로들에 항상 완전히 함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역설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시위와 사회운동이 정치영역의 자립성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킬수록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정치영역으로의 복귀’를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이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이 아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주권적 정치권력을 사회적 지형에서 민주적 실험들과 발전들을 완결하고 공고화 하는 필연적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리 코뮌 노동자들의 이중구속(double bind)을 돌아보게 된다. 파리 코뮌 노동자들은 ① 중앙위원회를 해체하고 의사결정력을 모두에게 분산시킨 오류는 패배를 낳지만 ② 중앙위원회를 해체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전체 기획의 민주적 성격을 부정할 것이라는 이중구속에 잡혀 있었다.

우리의 정치적 대안들은 이 이중구속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 기획이 효과적으로 되는 데는 주권이 필요하지 않다. 비주권적 정치적 제도들 및 민주적 조직의 효율성과 그것을 뒷받침할 기존의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 이후의 장들에서 우리가 수행할 과제이다.

 

좌파 개념은 17세기 청교도혁명 신기군의 맹세에서 혹은 프랑스 혁명의 테니스코트 맹세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고 자유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고결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저 기획들과 오늘날 좌파라고 명목상으로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신좌파가 50년 전에 시작한 물음을 다시 한 번 재개하는 것이 이치에 닿을까? 좌파는 오늘날의 사회적 투쟁들에 기반을 둔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좌파라는 개념 자체가 뒤에 남겨져야 할 어떤 것인가?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든 아니든 오늘날의 운동은 새롭게 시작할 필요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할 필요를 여러 번 확인했다. 대안지구화 투쟁에서 보인 분배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서든, 지중해의 봄에서 보인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서든. 어떻든 분명한 것은 정치영역의 자립성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진보적 혹은 혁명적 기획을 양성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주된 장애물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