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페미니즘과 혁명: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보며


  • 저자  :  Julie Matthaei(([옮긴이] 줄리 매사이(Julie Matthaei) :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 경제학 교수. 페미니즘 경제학과 젠더•인종•계급에 관련된 정치경제학을 가르친다. 그녀는 <미국연대경제네트워크>(U.S. Solidarity Economy Network)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이며, 근간 도서 『불평등에서 연대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경제를 공동으로 창출하기』(From Inequality to Solidarity: Co-Creating a New Economics for the Twenty-First Century)의 저자이다.))
  • 원문 : “Feminism and Revolution: Looking Back, Looking Ahead (2018.06) / CC BY-NC_ND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민서

 

반세기 전에 ‘제2물결’ 페미니즘이 퍼지고 난 후 페미니즘 운동은 점차 더 포괄적이고 조직적으로 되었다. 초기에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진정한 여성해방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한때 페미니스트와 반계급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곧 그들 역시 인종•민족성•성적 지향성 및 여타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의 원천들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인정하는 이론과 실천을 확장하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 도전에 응하는 것이,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뿌리를 두고 있고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그리고 여타 운동들과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연대정치를 낳았다. 중요하게도 이 새로운 정치는 연대경제에서 새로운 실천과 사회제도를 창출함으로써 개인들이 급진적인 사회변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확고하고 포괄적인 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억압을 없애는 ‘거대한 이행’에 필요한 더 큰 연대정치와 연대경제를 구축하는데 여전히 필수적이다.

 

1. 서론

누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싸움을 이끌 것인가? <거대한 이행 기획>(The Great Transition Initiative, GTI)은 세상을 공정하고 지속가능하게 바꿀 수 있는 “전지구적 시민운동”의 출현을 10년이 넘도록 확인했다. 이 운동이 하나의 온전한 운동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인데, 과거 50년에 걸친 페미니즘의 진화가 귀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미국 맑스주의-페미니스트이자, 반인종차별주의자 및 생태경제학자로서 나는 이론과 실천 측면에서 이 진화의 일부분이었다. 1970년대 초 제2물결 페미니즘에 꼭 필요한 부분으로서 우리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억압적인 시스템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을,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를 극복하지 않고는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단지 여성다움이라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나 노동계급 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맑스주의적 계급정치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었다.

곧 우리와 여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렌즈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성에 맞닥뜨렸다. 젠더•계급•인종•섹슈얼리티•민족성 등등의 정체성들은 상호간에 결정하고 있다는 통찰력이 새로운 개념인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낳았다. 일부 사람들은 정체성과 억압의 형태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분열을 초래하는 것으로 판명되리라고 우려했지만 분열에서 시작한 것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즉 연대정치를 낳았다. 연대정치는 운동들을 가로질러 그리고 운동들 내부에서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고 어떤 성공적인 전지구적 시민운동에라도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사실 이 동학은 현장의 다양한 사회 운동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고 연대경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실천과 제도의 발전에 영감을 주고 있다.

 

2. 페미니즘, 맑스주의와 만나다

1970년대 초에 제2물결 페미니즘(참정권 획득에 초점을 맞춘 제1물결과 대조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미국과 그외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일었다. 의식을 고양하는 집단에서 만난 여성들은 풀뿌리 조직들을 형성하여 사무직 조직화에서부터 미디어 개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페미니즘 투쟁에 참여했다. 주류 페미니즘 조직들은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데, 그리고 유급노동자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 및 기회를 획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는 또한 활동적인 좌파인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되었으며 그들은 자본주의와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을 발판으로 삼으면서도 이를 비판했다.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의 이론적 틀이 자본가들이 여성을 노동자로서 억압하는 것을 분석하지만 가정과 일터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상적으로는 노동계급 운동을 혁명적으로 표현하는 노동조합이 여성들의 평등과 관련하여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19세기에 노동조합들은 여성을 고임금직에서 배제하고 가정에 묶어두는 것을 옹호했다. 전통적인 남성들처럼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스주의와 연결될 때에는—전통적인 아내들처럼—그들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했다.((원주1. 미국에서 나온 두 주목할 만한 선집들로는 Zillah Eisenstein, 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9)와 Lydia Sargent, Women and Revolution: A Discussion of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Boston: South End Press, 1981) 참조. 영국에서는 Annette Kuhn and AnnMarie Wolpe, Feminism and Materialism: Women and Modes of Production (London: Routledge, 1978)가 유사한 주제들을 탐구했다.))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또한 맑스주의의 혁명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맑스주의 이론은 노동자들을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주체로 보고, 계급투쟁을 그 발동기로 보았으며,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목표로 여겼다. 이 변화의 비전이 너무 강력해서 소련에서 민주주의의 개탄스러운 부재가 분명해진 이후에도 초기의 맑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스트들은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과 함께 조직화하는 것을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 주도의 혁명을 쟁취한 이후로 연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남성 좌파들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의 조직화는 노동계급을 갈라놓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본주의를 영속시킬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혁명 이후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으며 맑스주의나 더 나은 사회주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페미니즘이 고조되자 근본적인 변화를 느꼈고 사회주의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두 가지 진실을 보았다. 다시 말해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우리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로 미룰 수도 없었다. 가정주부들은 유급노동자로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결혼에서 겪던 젠더 억압에서 풀려나와 고용주에 의한 계급 및 젠더 억압을 겪게 되었다. 젠더 불평등과 지배구조가 페미니즘 운동으로 어떻게든 없어지더라도 여성들은 계속해서 노동자로서 억압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실행된 바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여성의 억압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여성들의 경험에 기초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겪은 경험은 미국의 좌파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성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사회주의-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페미니즘적·반(反)계급주의적 조직화에 몰두했고 탈자본주의적, 사회주의-페미니즘적 체제라는 한층 폭넓은 비전 쪽으로 나아가는 데 몰두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버클리•시카고•뉴헤이븐에서의 사회주의-페미니즘적 여성들의 연합을 창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자본주의를 페미니즘적•반계급주의적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그곳에 한데 모였다.((원주2.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여성을 다룬 것으로는 Hilda Scott, Does Socialism Liberate Women?: Experiences from Eastern Europe (Boston: Beacon Press, 1974) 참조. 사회주의-페미니즘 조합의 발생에 대해서는 “The Berkeley-Oakland Women’s Union Statement,” in 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 ed. Zillah Eisenstei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9) 참조.))

우리는 맑스주의 이론을 좀 고쳐서 여성의 경제적 위치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데 더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가사노동 논쟁’에서 우리는 집안일이 생산적 노동이 되어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아닌지를 검토했다(논쟁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의 유물론 분석—‘생산과 재생산의 양식’을 구체화하는 분석—을 사용하여 가정관리와 육아라는 여성의 무급 노동을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의 일부로서, 따라서 혁명적인 조직화에 핵심이 되는 것으로서 분석했다. 이 논의들은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하는 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논쟁이 하나의 이론적 틀을 중심으로 한 합의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여성의 무급 돌봄 노동을 경제적·사회적 삶의 핵심적인, 그러나 저평가된 측면으로서 부각시키고 확증했다.((원주3. Julie Matthaei, “Marxist-Feminist Contributions to Radical Economics,” in Radical Economics , eds. Susan Feiner and Bruce Roberts (Norwell, MA: Kluwer-Nijhoff, 1992), 117–144. 이 생각들은 가령 Nancy Folbre, The Invisible Heart: Economics and Family Values (New York: New Press, 2001)에서 더 발전된다.))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사회 전반적인 계급 억압 및 젠더 억압이 현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때는 두 가지가 일제히 작동하고 다른 때에는 자본주의 발전이 결혼한 여성들을 유급노동자로 끌어들일 때처럼 그 둘이 서로를 침식한다.((원주4. Heidi Hartmann,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Towards a More Progressive Union,” in Women and Revolution , 1–42와 Ann Ferguson and Nancy Folbre, “The Unhappy Marriage of Patriarchy and Capitalism,” Women and Revolution , 313–338 참조.)) 두 억압 모두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두 갈래 운동에 의해 분석되고 극복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지배에 저항하는 여성을 조직화하고 계급지배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조직화함으로써 서로 엮여있는 두 가지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이중의 투쟁을 주장했다. 이런 유형의 분석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둘 다를 공존하면서 서로 얽혀있고 억압적인 시스템으로 인정하는 분석—이 ‘이중체계이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체계이론을 채택하면서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혁명이나 체계 변화에 대한 맑스의 기본적인 분석을 받아들여 확장했다. 우리는 경제적 변형을 억압받는 집단에 의한 투쟁으로 추동되는 혁명 과정으로 바라보는 맑스의 견해에 찬성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를 여성으로 대체했지만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계급투쟁을 혁명의 핵심적 측면으로 받아들였고 여성을 두 번째 피억압 집단으로 노동자에 포함시켰다. 우리는 여성들이 해방되기 위해 급진적인 변형을 필요로 하는 두 개의 억압 시스템—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을 개념화했다.

 

3. 상호교차성과 정체성에 기반을 둔 혁명적 정치의 붕괴

이중체계이론이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하이픈을 녹여버리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그리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곧 유색인 반(反)인종주의 여성들의 분명한 도전에 직면했다.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 내지 여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 정치라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개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의 인종주의를, 특히 백인 여성들이 지도자 지위를 독점하는 것과 백인 여성들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들’을 정의하는 것을 지적했다.((원주5. 선구적인 책들에는 Cherie Moraga and Gloria Anzaldua, This Bridge Called My Back (London: Persephone Press, 1981)과 bel hooks, Feminist Theory: From Margin to Center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1984)가 포함된다.))

설상가상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도 페미니즘 운동에서 동성애 공포증에 항의하고 있었다. 두 집단은 백인과 이성애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종차별주의와 동성애 혐오에 반대한다고 솔직하게 자기입장을 밝힐 것과 그들의 실천, 강령 및 이론에 이러한 입장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성의 억압을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연결시키는 에코페미니즘은 맑스주의-페미니즘적 담론에 또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추가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되기의 확장으로서 생태운동에 참가할 것을 여성들에게 호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요청에 따랐다. 풍부한 내용의 좌파 에코페미니즘적 분석이 발전했다.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자연의 죽음』(The Death of Nature)에서 자연의 지배는 서구 과학이 출현할 때 여성의 대상화 및 여성에 대한 지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7 뛰어난 저서인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에서 마리아 미스(Maria Mies)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는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을 공급하는 것을 중심으로 운동들의 연합을 제안하면서 계급, 젠더, 남/북, 흑인/백인 그리고 인간/자연 사이에 일어나는 지배와 폭력을 상호연결된 현 세계체제의 부분들로서 종합적으로 분석해냈다.((원주7. Maria Mies and Vandana Shiva, Ecofeminism (London: Zed Books, 1993).))

지구상의 선진지역(Global North)과 지구상의 후진지역(Global South) 사이의 분할 또한 대두되었다. 유엔이 정한 ‘여성을 위한 10년’(United Nations Decade for Women, 1975–1985) 동안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세 번의 전 세계 회의에서 함께 모였다. 우선사항에서의 엄청난 차이들이, 특히 노동력과 재생산권에서의 평등권에 중점을 두는 선진지역 여성들과 신식민주의와 가난을 우려하는 후진지역 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이런 차이들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은 초국적 페미니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노력할 때 여성 문제에 관한 그들의 관점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계급지배(남북 문제)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원주8. Valentine Moghadem, Globalizing Women: Transnational Feminist Networks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5).))

관점을 넓히는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중요한 페미니즘 개념인 상호교차성이, 즉 인종•젠더•계급•민족 및 우리의 ‘자연’관조차 상호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생겨났던 것이다.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활동가이자 법학자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ee Crenshaw)가 이 용어와 가장 관련이 있지만, 이 개념의 배후에 있는 사고는 인종•계급•민족•섹슈얼리티 등의 차이를 가로질러 함께 페미니즘을 조직하고자 하는 다양한 여성 집단들의 경험에서 나왔다. 그들은 여성다움에 대한 공통의 경험― 가시적으로 명백하거나 조직화의 중심 원리가 될 수 있거나 요구 창출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공통적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인종•계급•섹슈얼리티•국가 등을 가로지르면서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이나 노동계급이 겪는 경험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각 경험은 독특한 차원의 억압에서 나오지만 다른 차원들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엘리자베스 스펠먼(Elizabeth Spelman)이 언급하듯이 젠더•인종•계급은 정체성이라는 목걸이의 ‘팝비즈’(([옮긴이] pop beads :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장난감용의 구슬들로서 자유롭게 꿰었다 분리했다 할 수 있다.))가 아니다.((원주9. Elizabeth Spelman, Inessential Woman: Problems of Exclusion in Feminist Thought (Boston: Beacon Press, 1988).))

상호교차성의 인식은 맑스주의-페미니즘과 페미니즘적 조직화 일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류 페미니즘 및 맑스주의-페미니즘의 기반이었던 정체성 정치—여성은 남성에 의해 그리고 남성과 비교해서 억압받고 있다는 사고—는 여성의 경험을 분할하고 계층화하는 다른 형태의 억압들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억압 체계들을 간과하는 것은, 백인이며 이성애자이고 선진지역에 사는 중산층의 전문직 여성의 경험과 욕구에 특권을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계급, 인종-민족, 남-북 및 여타 형태의 불평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있었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민족•계급•성정체성이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만날 때에 이 차이들이 드러나고 여성들을 계층화하고 분열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들에게 재계에서 성공하는 법을 조언하는 페이스북 최고 경영자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의 책 『린 인』(Lean In)에 관한 페미니즘 논쟁을 생각해 보라. 이 책은 많은 교육을 받고 경제적 지위가 향상된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유리 천장을 깨는’ 법에 대해 알려주지만 이 성공 공식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노동계급과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공식이다. 한 좌파 페미니스트 블로거가 말했듯이, 페미니즘적 노력에서 우선해야 할 것은 유리 천장(([옮긴이] 유리 천장(琉璃 天障, glass ceiling)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을 깨는 것이 아니라 ‘집의 지하실이 물에 잠기고 있는’ 가난한 여성들을 옹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원주10. Laurie Penny, “Don’t Worry about the Glass Ceiling—the Basement is Flooding,” New Statesman , July 27, 2011, https://www.newstatesman.com/blogs/laurie-penny/2011/07/women-business-finance-power.))

상호교차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단순한 정체성 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성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경험이 없다면 (이는 분명히 사실이다) 여성들은 조직화를 통해 가부장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동질적 계급을 구성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조직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젠더와 인종을 가로지르는) 동질적 계급을 구성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 젠더 억압의 경험은 변화를 위한 투쟁에서 다른 차이의 선들을 가로질러 여성들을 한데 모으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다른 불평등들이 존재하는 정반대되는 양극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다양하게 억압받고 있는 여성들을 정체성에 기반을 둔 별개의 집단으로 분열시킨다. 이 집단들 각각의 내부에서 갈등이 더 일면서 더 심화된 분열을 조장한다. 페미니즘의 갈래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분열이 바로 페미니즘의 새로운 ‘제3물결’을 정의하는 특징이 되었다. 백인남성 좌파들의 악몽—페미니즘이 사회주의 운동을 갈라놓고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운동과 혁명적인 체계 변화에 대한 비전의 토대인 정체성 정치가 와해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다른 역사적 변화들과 동시에 일어났다.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1979년과 1980년에 각각 반혁명을 시작했다. 노동계급과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새처가 보인 반응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였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서 한 첫 행동은, 오늘날에도 미국 노동역사에서 그 파문들이 계속되는 악명 높은 사건인 항공 교통 관제사 조합의 파업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1990년대가 되면 찰스 코크(Charles Koch)와 다른 우파 기부자들—이들은 케인스 학설과 정부규제를 거부했고 ‘자유시장’을 수용했다—이 자금 지원을 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힘을 얻어 자본이 의기양양하게 지배하게 되었다.((원주11. Nancy MacLean, Democracy in Chains: The Deep History of the Radical Right’s Stealth Plan for America (New York: Viking, 2017).))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의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노조조직률은 조립라인의 해외 이전과 하향경쟁에 굴복하여 급속하게 하락했다. 소련의 민주주의 실패 및 해체 그리고 가차 없는 정치적 공격에 직면한 노동운동의 쇠퇴와 함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널리 인용되는 자신의 책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1992)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맑스주의, 사회주의 및 맑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이 모두 구식이 된 것이었다.

 

4. 연대정치의 부상

제3물결을 특징짓는 페미니즘의 분열로 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정체성에 기반을 둔 다른 사회 운동과의 연계를 통해 좀 더 복잡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즉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연대정치’가 부상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페미니스트들, 특히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에게 상호교차성이 제기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페미니즘의 실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인 우리는, 우리의 운동 내부와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른 형태의 억압들 또한 인정하지 않거나 뿌리 뽑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을 한데 모아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남성들의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투쟁으로 바라보는 정치를 넘어서, 우리의 운동들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경제와 사회로부터 모든 억압의 형태들—가부장제, 인종주의, 계급 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증, 장애자차별, 신식민주의, 종(種)차별주의 등—을 끝내고자 하는 연대정치를 향할 필요가 있다. 이 부상하는 연대정치는 모든 불평등의 형태를 해체하고자 하는 공유된 목적을 갖고 모든 불평등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연대정치는 페미니즘 운동만이 아니라 일차원적 견해의 부적절성에 부딪혀 상호교차성의 문제와 씨름하는 다른 사회운동들 안에서도 발전해왔다.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이 핵심적 전환은 또 다른 형태의 연대정치가 각 사회운동 내부가 아니라 사회운동들 사이에 유대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발생했다. 전 세계 사회운동과 NGO 단체들은 노동자•여성•환경 그리고 지구상의 후진지역을 사정없이 파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싸우기 위해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에서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이 ‘운동들의 운동’은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전투’에서 전지구적으로 이목을 모았고 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의 다른 회의들에 대한 항의로 계속 이어졌다. 2001년에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환경운동, LGBTQ 운동, 평화운동, 농민운동, 토착민운동 및 여타 사회운동들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모토 아래 제1차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에서 모여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전지구적이고 지역적인 조직화의 물결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 운동의 핵심 원리는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연대정치였다.((원주12. “World Social Forum Charter of Principles” 2002, http://www.universidadepopular.org/site/media/documentos/WSF_-_charter_of_Principles.pdf의 제10 원칙 참조.))

이런 식으로 연대정치는 페미니즘 (그리고 다른 사회 운동) 내부에서 그리고 이 운동들을 한데 모으는 ‘운동들의 운동’ 내부에서 발전해오고 있다. 개인과 조직들이 계속해서 구체적인 초점—특정 억압 유형(젠더, 인종, 계급 등) 내지 특정 쟁점(식량, 의료서비스, 재생산의 자유, 기후변화)—을 가지면서도 점점 더 이 초점을 모든 억압형태에 저항하는 공통의 투쟁 양상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다. 따라서 맑스가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 마음에 그렸던 동질적인 산업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포괄적인 혁명의 주체, 즉 서로 연결되고 상호적으로 결정하는 일단의 사회 운동들이 등장했다. 이 변혁 주체는 어떤 쟁점을—그저 특권계급에 속하는 소집단이 아니라—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쟁점을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특징짓는 다수의, 상호의존적인 불평등 및 억압형태들을 해체하고 변형하는 과제에 부합시킨다.

여기서 연대정치의 세 가지 양상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연대정치는 여성 운동 같은 정체성 정치에 기반을 둔 운동들로 하여금 그 리더십과 정책형성에서 억압받는 하위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손을 뻗쳐 그들을 끌어들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체면치레처럼 보일지라도 성심으로 실천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지배적인 소집단(예를 들어, 이성애자인 전문직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직의 이론들 및 강령에서 특권 때문에 발생하는 편견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둘째, 목표대상이 지배집단—즉 “남성들(혹은 1% 혹은 백인들)은 적이다”—에서 특정한 구조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영속시키는 사회적 개념들, 관행들 및 제도들로 바뀐다. 이것은 정체성 정치 집단들이 상호교차성과 씨름할 때 이 집단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 혐오증과 인종차별주의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레즈비언들은 동성애 혐오증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성애적 여성들을 보게 되고 유색인 여성들은 인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백인여성들을 목격한다. 미국에서 경찰의 만행에 대응하여 등장했고 인종의 정체성 정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옮긴이] BLM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폭력과 제도적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다. BLM은 경찰에 의한 흑인의 죽음, 인종 프로파일링, 경찰의 가혹행위,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 안의 인종간 불평등 같은 광범위한 사안들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항의집회를 연다. [위키피디아] ))은 구성원들의 상당 부분이 백인 ‘동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과정의 훌륭한 예에 해당한다.

셋째, 연대정치는 서로 다른 운동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 운동 내부의 서로 다른 갈래들 사이에서도 연합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억압들의 상호교차성은 불가피하게 정체성 정치 집단, 예를 들어 ‘여성들’ 내부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되풀이한다. 억압받는 소집단들이 내부에서 세계와 자신들에 관한 해방적인 인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들, 위원회들 및 조직들을 스스로 창출하고, 그 다음에 여타의 섞여 있지만 대부분 백인/중산층/이성애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집단과 함께 연합하여 공유된 페미니즘적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일이다.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에는, 그 문제가 풀리려면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다양한 층의 시민들에 의해 접근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구조적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주요 사회운동들이 점차 알게 되면서 이 사회운동들 사이에서의 연합 또한 발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취임한 다음 날 열린 <여성 행진>(The Women’s March)은 정체성 정치와 연대정치 사이의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였다. ‘여성들의’ 행진으로서 그것은 명백히 정체성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또한 연대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성 행진’의 조직화를 시작한 것은 백인여성들이지만 그들은 ‘전국 공동 의장들’(National Co-Chairs) 및 ‘조직가들’(Organizers)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을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이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를 지키는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 서 있다”라고 주장한 ‘여성 행진’의 선언문에서 상호교차성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이 가장 주목 받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통합원리는 “젠더정의는 인종정의이자 경제정의이다”였고, 이민자의 권리, 시민권, LGBTQ의 권리, 장애자 및 노동자들의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리와 환경정의에의 헌신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시민권, 노동, 기후행동 조직들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여성 행진’의 후원자들은 페미니즘을 서로 연결되고 상호간에 힘을 주는 ‘운동들의 운동’의 일부로서, 즉 연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그러한 종류의 운동으로서 자리매김했다.((원주13. “Women’s March 2017,” accessed August 30, 2017, https://www.womensmarch.com.))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은 <여성 행진>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감을 고취하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전 대륙에 있는 60개국에서 이루어진 600개가 넘는 후속 여성 행진들에서 행진한 여성들의 수는 총 5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원주14.Together We Rise: The Women’s March: Behind the Scenes at the Protest Heard Around the World (New York: Dey Street Books, 2018), 215 –216.))

 

5. 연대정치에서 연대경제로

상호교차성과 씨름함으로써 페미니즘과 여타 진보적인 사회 운동들은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불평등과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에 이르게 되었다. 연대정치가 경제적•사회적 변형을 위한 강력한 도구인 것은 모든 사회적 실천과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유형의 불평등을 인지•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선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상호교차성의 관점에 기반을 두고 특정 사회문제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은 페미니즘 연대정치의 훌륭한 한 예로, 세 명의 흑인여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국가 폭력을 끝내려는 데 집중하면서도 우머니즘적,(([옮긴이] ‘우머니즘’(womanism)은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흑인여성들 및 여타 주변화된 집단의 여성들의 역사와 경험에 관해서 보여준 한계의 발견에 기반을 둔 사회이론이다.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In Search of our Mother’s Gardens: Womanist Prose)에서 ‘womanist’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퀴어/트랜스적 관점 또한 긍정했다.((원주15. www.Blacklivesmatter.com/about/ 참조.))

연대정치는 자연스럽게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억압이 한 사람의 경험에서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관행 내지 제도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인식은, 억압적인 관습과 제도가 경제적•사회적 총체 내부에서 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체계적인 방식에 대한 이해로 진화한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의 경우, 경찰의 만행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 학교 시스템과 감옥산업복합체(the prison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비판으로 진화했다.

페미니즘(과 여타) 연대정치의 발전에서 다음 단계로 취해야 할 중요한 행동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과 그곳에 도달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다. 그런 비전에는 연대정치를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 및 여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포괄적인 사회체계 변형의 비전이 없던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지배적인 시스템 내부에서 동등한 기회요구― 가령 남성들이 독점한 경제적 위계의 상부에 여성들이 진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규칙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으로 축소되고, 노동력에서의 차별과 재생산권의 결여로만 여성의 억압을 규정한다. 최악의 경우에 이 접근법은 페미니즘을 ‘유리 천장을 깨는 것’, 즉 소수의 여성들이 남성들이 하는 대로 일을 함으로써, 거의 항상 이런 방식으로 최고의 자리에 접근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여성의 상호교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성차별에 인종 및 계급차별을 추가해서, 가령 유색인 여성이 높은 급여를 받는 기술직에 진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조차 우리는 아직도 경제의 기본적인 구조를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구조는 여성과 그 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긴 하지만 ① 경제 위계의 밑바닥에서 여성이 받는 부족한 임금 ② 가족을 돌보는 무보수 노동의 착취와 예속 ③ 소수의 소유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생산 시스템 조직화 ④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생태계 파괴라는 여러 중요한 면에서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을 비판하고 뛰어넘으며 체계 차원의 경제적 변형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적 변형의 다른 비전, 즉 연대경제 운동이 출현했으며 현재 탄력을 받고 있다. 성장세를 타고 있는 이 운동은 1990년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했고 특히 ‘새로운 경제’(New Economy) 운동, ‘쑤막 까우쎄이’/‘부엔 비비르’(Sumak Kawsay/Buen Vivir)(([옮긴이] ‘쑤막 까우세이’(Sumak Kawsay)는 스페인어 ‘buen vivir’에 해당하는 케추아어이다. 영어로는 ‘good living’, ‘well living’의 의미이다.)) 및 ‘공동체 경제’ (Community Economy) 운동과 겹쳐지는 세계사회포럼 운동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원주16. 연대경제에 대한 개관들로는 Allard, Jenna, Carl Davidson, and Julie Matthaei, Solidarity Economy: Building Alternatives for People and Planet (Chicago: Changemaker, 2008), Emily Kawano, Thomas Neal Masterson, and Jonathan Teller-Elsberg, Solidarity Economy I: Building Alternatives for People and Planet (Amherst, MA: Center for Popular Economics, 2010) 그리고 Peter Utting’s edited collection,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 Beyond the Fringe (London: Zed Books/UNRISD, 2015) 참조. <사회적 연대경제 증진을 위한 대륙간 네트워크>(the Transcontinental Network for the Promotion of the Social Solidarity Economy, RIPESS, www.ripess.org)와 <미국 연대경제 네트워크>(the US Solidarity Economy Network, www.ussen.org)도 훌륭한 참조처이다.))

연대경제의 틀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내부에 이미 현존하는 해방적인 경제활동과 제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합적인 신흥 ‘연대경제’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연대경제에서 기본적인 통합 기준은 경제적 실천이나 제도에 의해 구체화된 가치들이다. 연대적 가치의 목록에는 협력, 모든 차원에서의 공평, 정치적•경제적 참여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 및 다양성/다원주의가 포함된다. 이 틀은 어떤 특정한 관습이나 제도가 모든 가치 혹은 어떤 특정한 가치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연대경제에 기반을 둔 이 차원들 각각은 스펙트럼 상의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체계변형을 위한 투쟁에는 우리의 경제활동과 제도들이 이 스펙트럼 위에서 불평등에서 연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포함된다.

모든 부류의 협동조합들(노동자•소비자•생산자 협동조합)이 연대경제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포괄하듯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소비패턴을 촉진하도록 노력한다면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목표 쪽으로 투자가 이동할 것이며 기업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재설계될 것이다. 공동체 텃밭에서부터 버려진 공장이나 땅의 인수 및 공동체 통화 창출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표적 실천들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인 경제제도의 실패에 대응하여 한데 모이면서 생긴 것이다. 본질적으로 연대경제는 경제에서의 연대정치를 표현한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의 혁명관과는 대조적으로 연대경제의 틀은 자본주의의 혁명적인 전복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에 사회 전반에 걸친 경제적 변형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북돋운다. 연대경제는 자본주의적인 제도와 나란히 시장 내부에서 심지어 그 제도 내부에서도 번성하고 있다. 긍정적인 체계적 변화에 참여하여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식들은 넘치도록 많다. 이런 유형의 변화에 적절한 용어가 혁명/진화(r/evolution)인데, 체계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면에서 혁명적이지만 점진적으로 일어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이다. 이 변화가 다차원적이고, 다부문적이며 다층적(미시적이고 거시적)이기 때문이다.

 

6. 페미니즘과 연대경제

연대경제의 틀은 심층적으로 페미니즘적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특성을 가지는 경쟁―이기기 위한, 다시 말해 다른 남자들을 ‘능가하’거나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은 기업가•농부•노동자로서 돈을 추구하는 경제에서 서로 경쟁함으로써 가족을 부양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백인) 남성의 이상형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부와 권력을 가진 꼭대기의 경제적 계층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기업은 노동자, 소비자 및 생태계의 요구를 냉담하게 무시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의 형태로 이 편협한 물질주의적인 이기심이라는 에토스/정신을 구현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무급노동과 평가 절하된 노동으로, 또는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저임금 서비스 일로 한정되었다.

연대경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경제의 핵심구조에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여성의 일을 투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경제활동은 자본가의 부를 증가시키도록 구조화된다. 기업의 소유주와 경영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사실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생계를 빼앗기고, 소비자들은 조종당하고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게 되며 환경은 파괴된다. 이 모두가 사업의 정상적인 일부분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많은 페미니즘 경제학자들이 공언한 것처럼 경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또한 경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비인간 생물 사이에서 상호간에 배려하는 유익한 관계를 촉진해야 한다. 연대라는 용어를 부각시키는 연대경제의 틀은 연대정치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시스템의 이런 핵심적인 측면을 긍정한다.

이와 연관하여 경제의 주체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연대경제를 페미니즘 프로젝트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는 중상류층 백인들 가운데 남편/가장으로서 남성 경제인과 아내/어머니/주부로서 여성 경제인으로 경제의 주체를 양극화한 것에 기반을 두었다. 전형적인 남성 경제인의 노동은 생계비를 버는 일이었다. 즉 적어도 가족 임금을 벌고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며 경쟁력 있는 소비에 지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장’에서의 유급노동이었다. 전형적인 여성 경제인의 노동은 육아를 포함해서 가정에서 무급 노동을 직접 하거나 감독함으로써 남편과 가족을 돌보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연대경제의 주체에게는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최고의 측면들이 혼합되어 있다. 일과 사업활동은 생계 수단, 자기표현 및 자기 개발(초개인주의와 경쟁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적인 남성성을 뛰어넘는 긍정적인 형태의 남성성)의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사회 및 세상에 봉사하고 도움이 되는(자기 예속을 수반하지 않는 긍정적인 형태의 여성성) 길이 된다.

결과적으로 돌봄 노동 자체의 관행을 변형시키는 것은 연대경제와 ‘거대한 이행’을 깨닫는 데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으로 권위적인 자녀양육을 통해 지배와 종속의 두 역할이 산출되며 이는 다시 전통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적이고 권위적인 회사에서 재생산된다. 불평등한 지배와 복종 관계는 아내 위에 남편 그리고 아이들 위에 부모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교사가 지도하고 평가하는 학교에 다니고 그 후에는 상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직장에 다닌다. 우리가 경제를 상호적으로 유익하고 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면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남을 지배하라거나 종속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법, 자립하는 법 및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돌보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부모들은 위세를 부리는 존재(전통적인 아버지)이거나 굴종적인 존재(전통적인 어머니)이기보다 그들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모형화함으로써 가르칠 필요가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전통적인 돌봄 노동과 저임금의 돌봄 일에 재정적 지원을 해 줄 것을 주장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보살피기•양육•돌봄을 사회를 변형시키는 페미니즘의 렌즈 밑에 둘 필요가 있으며 체계 차원의 변화를 꾀하는 우리 일의 일부로서 우리 모두가 그 일을 더 잘하도록 도와줄 혁신적인 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

 

7. 결론

진정한 페미니즘—모든 여성을 해방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연대정치, 연대경제 및 혁명/진화로, <거대한 이행 기획>에서 설명된 것처럼 전지구적 시민운동으로 거침없이 이어진다. 여성과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계속해서 이것을 긍정하고 연대정치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이 온전히 페미니즘적이고자 한다면 혁명적/진화적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모든 진보적인 운동은 반드시 눈을 크게 뜨고 상호교차성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며 조직 내부에서 그리고 조직화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형태의 불평등—남성 지배 및 젠더 억압을 포함해서—을 뿌리 뽑는데 전념해야 한다.

‘운동들의 운동’은 새로운 세계 극장에서 주연배우이지만 아직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저항에서 구성으로, 우리가 반대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찬성하는 것으로 렌즈를 계속해서 바꾸어야 하며 전 세계 많은 연대경제의 사례들로 우리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역사상 이 시기의 페미니스트들과 모든 진보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임무는, 진보적인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시너지 효과를 가진 연계된 대열에 동참하도록 고무하기 위해서 혁명적/진화적인 전진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