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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관계


  • 저자  :  Antonio Negri, Carlo Vercellone
  • 원문 : “The Capital-Labour Relation in Cognitive Capitalism”(2007)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Carlo_Vercellone/publication/23530684_Il_rapporto_capitalelavoro_nel_capitalismo_cognitivo/links/55f2d64808ae1d9803921c27/Il-rapporto-capitale-lavoro-nel-capitalismo-cognitivo.pdf?origin=publication_detail )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운데 자본-노동 관계는 발본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 이 변형은 생산양식, 계급구성, 소득의 임금, 지대, 이윤으로 분배의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①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르는 과정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상기해보고 ② 현재의 노동을 자본-노동 관계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형론적 요소들을 분석한 다음 ③ 지대(자산소득)의 점증하는 중심적 역할이 왜 전통적인 적대, 즉 이윤과 임금 사이의 대립에 토대를 둔 적대의 조건들을 낡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대중노동자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형은 그람시가 1930년대에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서술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그러나 그에 비견할 중요성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전환점의 기원과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시기에 포디즘적 성장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 논리의 성취였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산업자본주의의 다음의 네 가지 주된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① 지식 형태들의 사회적 분극화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② 고정자본 및 관리조직화에 함입된 노하우들의 헤게모니 ③ 테일러주의 표준에 종속된 물질 노동의 중심성 ④ 소유와 기술 발전의 주된 형태로서의 고정자본의 전략적 역할

포디즘의 위기와 함께 이 경향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출발점은 대중노동자[포디즘 시대의 노동자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셈블리라인 앞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된다.―정리자]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토대를 부수고 복지국가의 보장과 서비스들의 엄청난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이는 포디즘과 양립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 결과 임금관계에 대한 화폐적 제한이 약화되고 생산의 지적 활력의 집단적 전유라는 강력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대적 동학을 통해 대중노동자는 포디즘 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노동의 존재론적 변형의 요소들을, 즉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을 자본의 심장부에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일반지성의 집단적 노동자라는 형상을 구축하고 지식의 추동적 역할에 기반을 둔 경제의 구조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구축했다. 그 결과로 노동의 인지적 차원과 확산된 지적 능력의 구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노동 관계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열렸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생과 성격을 적절히 특징지으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①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출현의 핵심 추동자는 산 노동의 힘에 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형성은 인지자본주의의 발생에 선행하고 그것과 (논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대립된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이 지식의 생산의 집단적 조건들을 기생적인 방식으로 흡수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재구조화를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일반지성의 사회에 각인된 해방의 잠재력을 질식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지적·비물질적 노동의 생산적 가치가 우세해지고 자본의 가치화의 중심축이 지대(자산소득)’를 수단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강탈하는 데 있으며 지식이 상품으로 변형되는 축적 체제이다.

② 정보혁명의 이론가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의 노동의 변형을 규정하는 요소는 정보통신테크놀로지(ICT)의 주도적 역할에 기반을 둔 기술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이론가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잊고 있다. ㉠ ICT는 살아있는 앎(un sapere vivo)이 없으면 정확하게 기능할 수 없다. 정보취급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conoscenza)’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는 노동이 없는 자본과 같다. ㉡ 따라서 ICT 혁명의 주된 창조력은 자본이 추동하는 동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의 수립에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생산의 연계 형태들로서 기업에 대한 대안과 동시에 시장에 대한 대안을 나타낸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특징들

 

1)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그리고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전도

인간에게 구현되는 무형의 요소가 자본의 성장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 확산된 지적 능력

이는 다시 네 개의 주된 함축을 가진다.

㉠ OECD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개발 실험실들이 지식 기반 경제의 추동부문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집단적 생산에 상응하며, 이 생산은 전통적으로 북지국가의 공통의 제도들(건강, 교육, 공적 및 대학연구 등)에 의해서 발현된다. OECD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때 우리는 이 제도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은폐는 삶정치적 통제와 복지제도들의 상업적 식민화가 인지자본에서 하는 역할과 연관이 있다. 건강, 교육, 훈련 및 문화는 생산의 점증하는 부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 여기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와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전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 예전에 불변자본이 수행했던 본질적 기능들의 일부를 이제 노동이 수행한다(생산의 조직화 수준에서 그리고 경쟁력과 지식향상에서 주된 요인으로서).

㉢ 노동력의 형성과 재생산의 조건들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나라의 부’의 원천은 점점 더 기업의 벽들보다 더 상류에 있는 협동에 놓여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지식 생산을 엘리트 노동이나 전문가 부문의 특권으로 보는 지식이론이 모든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가 이 부문에 상응한다. 그래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시간들(tempi sociali)의 체계 전체로 확대된다.

㉣ 복지국가가 제공한 이른바 고급 서비스들은 노동의 인지·소통·정동의 차원이 우세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발전할 수 있는 활동들에 상응한다. 이러한 자주관리 형태들은 사용자들을 긴밀하게 관여시키는 식으로 서비스들을 공동생산하는 데 기반을 둔다.

 

2) 인지적 분업, 노동계급 그리고 임금관계의 표준적 조건들의 탈안정화

둘째 특징은 테일러주의적 분업에서 인지적 분업으로의 이행이다. 이제는 생산의 효율이 각 과제에 필요한 작업시간의 축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형태에 의존하고 학습, 혁신, 연속적 변화의 동학에의 적응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다가성에 의존한다.

지식생산 및 데이터처리와 연관된 활동들의 확산은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을 포함한 모든 경제부문들에서 일어난다. 노동에서의 자율성의 일반화된 진전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전일적이지는 않다. 어떤 부문에서 몇몇 국면들은 인지원칙들에 따라 조직될 수 있고 다른 국면들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적 혹은 신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화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양적 수준에서 (적어도 OECD 국가들에서는) 자본의 가치창출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지노동이다. 따라서 인지노동은 필요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메커니즘들과 단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3)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인지적 차원의 성장이 자본-노동 교환을 지배하는 표준적 원칙들의 이중적 탈안정화를 어떻게 가져오는지를 강조해야 한다.

㉠ 한편으로 노동생산물이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전문지식 내에서의 활동에서는 이전의 임금계약 조건들이 문제시된다. 이전의 조건이란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주장을 임금을 받음과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연구나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같은 활동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된 물질적 생산물로 결정(結晶)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머릿속에 함입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의 인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회사가 왜 지적 재산권을 변경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문지식의 형태들을 전유하고 그것들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한편, 포디즘적 임금계약 규범을 구조지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과 동시성이 오늘날에는 크게 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에너지 패러다임에서는 임금이 인간의 시간의 잘 정의된 일부를 회사가 획득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대해 지불한 가격이었다. 회사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로부터 최대한 가능한 양의 잉여노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들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전문지식의 강탈과 일의 시간과 기능의 경직된 규정을 통해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원칙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되는 에너지의 단순한 소비로 축소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노동통제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식과 임금노동자의 생애를 가동하고 능동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기업의 목표들을 내화할 할 필요, 결과를 낼 의무, 고객들로부터의 압력은 순전히 불안정성과 연관된 억압과 함께 자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발견한 주된 수단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여러 형태들 또한 자본이 총체적인 종속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무상으로 이익을 얻어낼 도구이다. 불안정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지 않으며 고용계약에 통합되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며 양화되기 어려운 노동의 성장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포디즘 시기의 생산적 노동시간 개념과 임금 개념을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지식 자본주의에서 불안정성과 노동의 관계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단편화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와 같다는 발견을 설명해준다.

바로 같은 논리가 노동력의 탈숙련 과정이 왜 이제는 대대적인 지위 격하―이는 특히 여성들과 젊은 대학졸업자들에게 해당된다―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지위 격하란 보수와 고용의 조건들이 노동활동의 배치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숙련에 비해서 탈가치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3원 공식의 위기 : 지대(자산소득) 경제와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생산양식에서의 변형은 잉여가치 포획 및 소득분배 형태에서의 파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두 가지를 연구해야 한다.

1)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임금메커니즘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임금 메커니즘은 소득에의 접근이 낡은 포디즘적 체제 즉 고용의 유무에 달려있어서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실질임금의 정체와 생활조건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여, 시민권과 연결된) 객관적 권리들에 기반을 둔 사회적 혜택의 총량과 그 수혜자의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체계에서 워크페어국가(Workfare State) 체계로의 이동이다. 후자에서는 화폐로 환산하면 매우 낮고 강한 조건들에 종속된 복지혜택에 대한 강조가 수혜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2) 지대(rent)[전통적인 번역어를 따라서 일단 ‘지대’로 옮기지만, 노동이 아니라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 일반을 가리킨다―정리자]의 강력한 귀환.

지대는 잉여가치를 포획하고 공통적인 것을 탈사회화하는 주된 도구이다. 지대의 이러한 귀환의 의미와 핵심 역할은 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생산의 사회적 조직의 수준에서 작용한다. 지대와 이윤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의 적합성이 점점 더 감소한다. 구분의 이러한 흐려짐은 금융의 힘이 기업들의 거버넌스의 기준을 주주들을 위한 가치창출에 따라서만 재형성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마치 노동에서의 협력의 자동화가 화폐라는 추상적이고 유연하며 이동적인 형태의 자본의 자동화의 평행 운동에 의해 대응되는 듯하다. 이는 자본의 소유와 관리의 점증적 분리를 낳은 역사적 과정과 비교할 때 새로운 질적 도약이다. 인지자본주의 시기에는 베버적 기업가(기업의 소유와 관리 기능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다)라는 목가적 유형이 확연히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갤브레이스(Galbraith)의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혁신의 프로그래밍과 노동의 조직화에서 맡은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가져온다―의 불가역적 위기에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금융 및 투기 기능을 발휘하는 데 그 주된 전문성이 있는 관리에 자리를 내준다. 그 동안에 생산 조직화의 실제적 기능들은 점증적으로 피고용인들에게 할당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개별 회사들의 수준(여기서 우리는 절대지대에 관해 말할 수 있다)에서나 기업과 사회의 관계의 수준에서나 공히 관찰될 수 있다. 사실 회사들의 경쟁력은 내적[회사 내적] 경제들이 아니라 외적 경제들에 점점 더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영토의 인지 자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산잉여들을 포획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적 규모에서는 이것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사회의 일반적 전진’에서 나오는) 이 ‘무상의 선물’을 이윤의 정상적 원천으로부터 구분하고자 ‘지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지식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 양 무상의 혜택을 얻어낸다. 잉여가치의 이 부문이 바로 비옥한 땅의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차별지대에 비견된다.

㉡ 다른 한편, 현재의 지대의 발전은 종획의 역사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생의 바탕에 놓인 순수한 형태들과 기능들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지대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의 산물이다. 이 사유화가 자원의 인공적 희소성의 창출을 통해 생성되는 이윤을 수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재산의 투기로부터 오는 지대와 1980년대 이래 화폐와 공공부채의 사유화 덕분에 금융위기에서 그리고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해체시키는 데서 주된 역할을 한 금융지대를 한데 모으는 공통적 요소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재생산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산권을 강화하고 지식과 생명체들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주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법칙의 위기와 일반지성 시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의 또 하나의 발현을 본다.

임금, 지대, 이윤 사이의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계급구성 및 노동시장을 극히 이중적으로 분할하는 정책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첫째 분할부문은 종종은 노동력 가운데 (기업금융서비스, 특허를 노리는 연구활동,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전문적인 법활동 같은) 인지자본주의의 기생적인 활동에 고용되는 더 수입이 좋은 특권화된 소수이다. 이 이른바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자본 지대의 마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그 자격과 능력이 명시적으로 인정된다. 더 나아가 이들의 보수에는 금융자본의 배당금과 연금기금과 민영보험들의 체계와 연관된 보호 형태들로부터 오는 이익의 점증하는 몫이 포함된다.

둘째 부문은 그 자격과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지 노동 범주는 지위 격하라는 무거운 과정을 겪는다. 이 부문은 새로운 인지노동의 분야에서 가장 불안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 개인 서비스들의 발전과 연관된 새롭게 표준화된 서비스들의 신테일러주의적 기능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동시장과 소득분배의 이중화는 집단적 복지 서비스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현대 가정의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상업적 서비스들을 확대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대(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인지 지대, 임금 지대 등)는 소득의 분배와 인구의 사회적 계층분화에서 점점 더 전략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결과는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모래시계형’ 사회의 창출이다. 물론 가치의 창출이 이제는 임금노동자들의 창조성, 다재다능함, 발명의 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본이 노동에게 생산조직화에서의 점증하는 자율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실제로 이미 자율을 양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방법들을 선택하는 수준에 국한시키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결정하는 힘을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떼어내느냐 하는 것,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제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합의 동학 및 노동의 자기조직화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정복은 생산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소비의 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대안적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결정적 요소인 듯이 보인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생산(produzione dell’uomo per e attraverso l’uomo)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모델이다. 일반지성의 생산에서 주요 고정자본이 인간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 개념으로 가치법칙과 3원 공식(threefold formula, 임금-지대-이윤)의 위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보장소득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이며 1차적인 것으로 이해된 소득이다. 즉 이는 재분배로서가 아니라 가치 및 부의 생산의 점증하는 집단적 성격의 긍정으로서 이해된 소득이다. 이것이 자본으로부터 지대가 포획하는 가치의 일부를 빼냄으로써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임금관계가 부과하는 화폐적 제한의 약화는 상업주의와 종속된 노동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노동형태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




[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




[맑스] 신용과 자본의 한계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자본과 그 한계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읽기’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한 일련의 강의 가운데 7강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이전 강의(6강)까지 논의된 자본의 장벽들

[생산]

  1.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을 뺀 부분이므로 필요노동이 그 장벽이다.
  2.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비율은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통(교환)]

  1. [사용가치의 측면] 생산물에 대한 욕구가 장벽이다. →유통영역의 확대, 시장의 개척.
  2. [교환가치의 측면] 교환되어야 할 잉여등가물이 필요하다. →생산부문의 확대가 필요.

[노동자]

  1.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오는 소비능력 이상의 소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다.
  2. 생산력의 발전 등에 의한 필요노동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교환능력(소비능력)을 떨어뜨린다.

[유통시간]

  1. 유통시간은 자본의 가치창출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신용
  2. 유통시간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은 자본 자신의 기반인 교환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므로, 스스로를 지양하려는 노력이다.

신용과 자본의 한계

I.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신용에 관한 논의 (펭귄 영어본 659-660, 670-671, 한국어본 2권 후반부)

 

맑스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신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지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1. 신용과 유통시간

“따라서 유통 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이다.” 지난번 강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시간(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잉여가치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경향이 신용을 발생시킨다. “이 경향이 신용 및 신용의 장치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1. 신용과 자본의 양적 한계 혹은 개별성의 극복

이와 동시에 맑스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개별 자본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는 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개별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그 양적 장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자본 일반’과 같은 말이다. 맑스는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말은 전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1. 가공架空자본(의제擬製자본)과 자본의 집중

이어서 맑스는 이러한 경향의 최고의 결과로서

① 가공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영어로 그냥 ‘fictitious capital’라고 썼으나 자본론에서는 ‘Das fiktive Kapital’라고 되어 있다.]

② 자본의 집중, 즉 중앙집중화하는 개별 자본들에서 자본의 개별적 다수성이 부정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1.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

이어서 맑스는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를 설명한다.

① 신용은 화폐를 단순한 형식적 계기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며 그리하여 자본 즉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변태(형태변환)를 매개한다. 이렇듯 화폐 자체가 유통의 산물이듯이, 신용도 유통의 새로운 산물이다. [신용은 동시에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교환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미리 당겨’ 쓰는 것이란 오고 감이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교환의 경우에는 화폐가 구매의 수단 즉 유통수단이지만 신용의 경우에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② 다른 한편, 자본은 유통시간 자체에 생산시간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즉 유통(시간)을 매개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화폐로서, 자본으로서 정립된다. [이는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의 자립화를 낳게 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며, 다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분할에는 참여한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분석되지 않고, 자본론 3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정리] 생산시간과 유통시간

① 유통시간은 자본이 자본으로서 특수한 운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통시간 동안 자본은 형태의 변화(변태)를 거친다.

② 생산시간은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과정 중의 자본이며, “노동으로부터 그 산 영혼을 흡수하는 창조적 자본”이다.

 

  1. 자본의 분할운용

실제로 생산시간이 유통시간에 의하여 중단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본이 분할되어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이 생산국면에 있을 때, 다른 부분은 유통국면에 있게 된다. 결국 활동 중인 자본은 전체가 아니라 1/x이다. 혹은 특정의 자본이 예를 들어 신용에 의하여 두 배로 늘어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마도 상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원래의 자본에게는 유통시간이 마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대신 들어선 자본은 유통시간을 거쳐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소유주이냐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의 자본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a와 b가 각각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흡수하고 나서 a와 b로 나뉜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망상들은 신용을 신비화하는 자들―이들이 채권자들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채무자들이다―사이에 잦다.”

 

  1. 화폐, 유통시간 그리고 신용

우리가 자본과 그 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화폐의 도입이 발견이 아니라 전제인 사회적 발전단계에 있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히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형태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만큼, 그런 만큼 화폐는 자본의 유통을 가속화하기보다 지연한다. 화폐는 유통수단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자본의 실현된 가치라는 측면에서나 공히 유통비용에 속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유통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된 노동시간인 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환의 질적인 계기―자본의 자기자신으로의 복귀, 즉 독립적인 가치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한에서 그렇다. 어떤 측면에서도 화폐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① 한 측면에서 화폐는 가치를 나타내는 귀금속 형태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의 공제를 나타낸다.

② 화폐는 유통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노동을 들여야 되는 것 즉 노동의 산물인 한에서 화폐는 자본에 대하여 생산공비로 나타난다.

★ 여기서 맑스가 매우 정밀하게, 그러나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게 말하는 바의 골자는, 가치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흐름은 그것이 화폐와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한에서는 지연된다는 말이다. 신용은 바로 이 지연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용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가령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매개의 상당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는 유통의 경비이기 때문에 자본의 노력은 화폐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노동시간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유통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과거로부터 이월된 직접적 실재로서의 화폐를 지양하고 그것을 단지 자본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양된 것으로, 순전히 잠재적인(rein Ideelles)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로 향한다.”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가 자본의 유통에 장벽이었는데, 자본은 이를 신용을 통하여 지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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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본론』에서의 신용에 관한 논의

[『자본론』 3권 27장, 30, 31, 32장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직접 인용의 경우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참고하되, 독어본을 기준으로 조금씩 고쳐서 옮겼다.]

 

1. 신용의 필연성  

이윤율균등화(운동)를 매개한다.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일반화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를 낳는 데 기여한다. 󰡔자본론󰡕 3권 10장 참조.

 

2. 유통비용 절감

1)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인 한 유통비용의 하나가 된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① 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②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가속화

ㄱ. 더 소량의 화폐 혹은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행업의 기술)

ㄴ. 신용이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하여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가 가속화된다.

③ 지폐에 의한 금화의 대체

2) 신용은 유통(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시키며 그와 함께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이 된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된다.

1) 생산규모와 기업의 거대한 팽창

2) 자본 →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부터 자본을 지양하는 것이다.”

3) 기능자본가의 단순한 관리인으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소유자―화폐자본가―로의 전환.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자본소유는 이제 현실적인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 및 관리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윤(···)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의 단순한 전유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산수단의 자본으로의 전환으로부터 즉 생산수단이 현실적인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소외)으로부터,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현실적으로 생산과정에서 활동하는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까지 이르는) 개인에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이 자본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 및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양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첫 눈에 명백하게도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창립자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 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4. 주식회사 제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이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 모든 척도들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인정되고 있었던 모든 해명근거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은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 절제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Die Expropriation)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대립적인 형상으로, 즉 소수가 사회적 재산을 전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5. 협동조합공장(Die Kooperativfabriken, co-operative factories)

[이는 오늘날의 자주관리에 해당한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연합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인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이 소극적으로/음성적으로(negativ)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positiv)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의 발달―그리고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자본소유의 잠재적 지양”

 

6. 자본의 역사적 과제와 신용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화는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정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벽이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돌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사적 과제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7.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①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

②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다.

이를 맑스는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이라고 한다.

 

8. 생산과정의 발달, 신용, 투기

더욱이 최초의 거래가 상품가격의 등락을 노리는 투기에 의해 촉발되면 될수록 환류는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 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2) 따라서 신용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그 결과로 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점점 더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멀리 떨어진 시장을 위한 대규모 생산은 생산물 전체를 상업의 수중에 맡긴다. 그러나 국민의 자본이 두 배가 되어 상업이 자기 자신의 자본으로 국민의 총생산물을 구매하여 그것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은 필수적이며, 신용의 규모는 생산의 가치량의 증대에 따라 증대하고, 신용의 기간은 판매시장이 멀어짐에 따라 연장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긴다. 즉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또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시키게 된다.

 

9. 공황의 궁극적 원인

실제로는 생산에 투하된 자본의 보충은 비생산적 계급의 소비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은 부분적으로는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은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윤을 낳는 한에서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

 

10. 산업순환과 투기

불황국면에서 생산은 이전이 순환에서 도달하였던, 그리고 지금 그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수준 이하로 감소한다. 번영국면―중간단계―에서 생산은 그 기술적 토대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 과잉생산과 투기의 국면에서 생산은 생산력을 그 최대한도로 긴장시키며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장벽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1. 모든 공황의 바탕

그리하여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단순히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황은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어음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매매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매매가 사회적 필요를 훨씬 능가하여 팽창하는 것이 결국 모든 공황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진정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축적

그러나 화폐자본가는 모든 이윤(그가 얻어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모든 이윤)을 먼저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미 화폐자본의 축적―진정한 축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축적―을 보게 되며, 그것은 특수한 부류의 자본가들(화폐자본가․은행업자 등등)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재생산과정의 진정한 확대에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확장에 따라 증대할 수밖에 없다.

 

13. 화폐자본의 축적이 언제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축적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로, 화폐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화폐형태(새로운 자본투자를 개시하는 화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리]

자본의 분리, 분할, 특수화의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① 시초 축적 : 생산수단의 생산자로부터의 분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의 분리)

② 생산적 자본(혹은 산업자본)의 내적 분할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③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업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상품의 화폐와의 교환(C-M)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④ 화폐거래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유지(부기), 화폐의 보관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상품거래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⑤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 분리 : 재생산과정(생산 +유통)으로부터의 분리.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이자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은행.

⑥ 지대소득자 계층(rentiers) :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토지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대’의 형태로 가져감. [현대에는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산(부동산, 주식, 증권 등)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더 광범한 자산소득자(불로소득자) 층이 형성됨.]

⑦ 소유와 기능의 분리(주식회사) :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본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일종의 이자 같은 형태(배당금)로 잉여가치를 가져감.

→ 사회적 소유의 형성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한도 내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함.

⑧ 신용과 그 이중성 : 자본주의를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