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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




[맑스] 신용과 자본의 한계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자본과 그 한계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읽기’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한 일련의 강의 가운데 7강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이전 강의(6강)까지 논의된 자본의 장벽들

[생산]

  1.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을 뺀 부분이므로 필요노동이 그 장벽이다.
  2.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비율은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통(교환)]

  1. [사용가치의 측면] 생산물에 대한 욕구가 장벽이다. →유통영역의 확대, 시장의 개척.
  2. [교환가치의 측면] 교환되어야 할 잉여등가물이 필요하다. →생산부문의 확대가 필요.

[노동자]

  1.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오는 소비능력 이상의 소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다.
  2. 생산력의 발전 등에 의한 필요노동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교환능력(소비능력)을 떨어뜨린다.

[유통시간]

  1. 유통시간은 자본의 가치창출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신용
  2. 유통시간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은 자본 자신의 기반인 교환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므로, 스스로를 지양하려는 노력이다.

신용과 자본의 한계

I.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신용에 관한 논의 (펭귄 영어본 659-660, 670-671, 한국어본 2권 후반부)

 

맑스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신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지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1. 신용과 유통시간

“따라서 유통 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이다.” 지난번 강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시간(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잉여가치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경향이 신용을 발생시킨다. “이 경향이 신용 및 신용의 장치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1. 신용과 자본의 양적 한계 혹은 개별성의 극복

이와 동시에 맑스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개별 자본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는 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개별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그 양적 장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자본 일반’과 같은 말이다. 맑스는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말은 전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1. 가공架空자본(의제擬製자본)과 자본의 집중

이어서 맑스는 이러한 경향의 최고의 결과로서

① 가공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영어로 그냥 ‘fictitious capital’라고 썼으나 자본론에서는 ‘Das fiktive Kapital’라고 되어 있다.]

② 자본의 집중, 즉 중앙집중화하는 개별 자본들에서 자본의 개별적 다수성이 부정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1.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

이어서 맑스는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를 설명한다.

① 신용은 화폐를 단순한 형식적 계기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며 그리하여 자본 즉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변태(형태변환)를 매개한다. 이렇듯 화폐 자체가 유통의 산물이듯이, 신용도 유통의 새로운 산물이다. [신용은 동시에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교환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미리 당겨’ 쓰는 것이란 오고 감이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교환의 경우에는 화폐가 구매의 수단 즉 유통수단이지만 신용의 경우에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② 다른 한편, 자본은 유통시간 자체에 생산시간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즉 유통(시간)을 매개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화폐로서, 자본으로서 정립된다. [이는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의 자립화를 낳게 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며, 다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분할에는 참여한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분석되지 않고, 자본론 3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정리] 생산시간과 유통시간

① 유통시간은 자본이 자본으로서 특수한 운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통시간 동안 자본은 형태의 변화(변태)를 거친다.

② 생산시간은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과정 중의 자본이며, “노동으로부터 그 산 영혼을 흡수하는 창조적 자본”이다.

 

  1. 자본의 분할운용

실제로 생산시간이 유통시간에 의하여 중단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본이 분할되어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이 생산국면에 있을 때, 다른 부분은 유통국면에 있게 된다. 결국 활동 중인 자본은 전체가 아니라 1/x이다. 혹은 특정의 자본이 예를 들어 신용에 의하여 두 배로 늘어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마도 상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원래의 자본에게는 유통시간이 마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대신 들어선 자본은 유통시간을 거쳐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소유주이냐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의 자본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a와 b가 각각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흡수하고 나서 a와 b로 나뉜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망상들은 신용을 신비화하는 자들―이들이 채권자들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채무자들이다―사이에 잦다.”

 

  1. 화폐, 유통시간 그리고 신용

우리가 자본과 그 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화폐의 도입이 발견이 아니라 전제인 사회적 발전단계에 있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히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형태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만큼, 그런 만큼 화폐는 자본의 유통을 가속화하기보다 지연한다. 화폐는 유통수단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자본의 실현된 가치라는 측면에서나 공히 유통비용에 속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유통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된 노동시간인 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환의 질적인 계기―자본의 자기자신으로의 복귀, 즉 독립적인 가치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한에서 그렇다. 어떤 측면에서도 화폐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① 한 측면에서 화폐는 가치를 나타내는 귀금속 형태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의 공제를 나타낸다.

② 화폐는 유통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노동을 들여야 되는 것 즉 노동의 산물인 한에서 화폐는 자본에 대하여 생산공비로 나타난다.

★ 여기서 맑스가 매우 정밀하게, 그러나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게 말하는 바의 골자는, 가치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흐름은 그것이 화폐와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한에서는 지연된다는 말이다. 신용은 바로 이 지연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용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가령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매개의 상당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는 유통의 경비이기 때문에 자본의 노력은 화폐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노동시간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유통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과거로부터 이월된 직접적 실재로서의 화폐를 지양하고 그것을 단지 자본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양된 것으로, 순전히 잠재적인(rein Ideelles)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로 향한다.”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가 자본의 유통에 장벽이었는데, 자본은 이를 신용을 통하여 지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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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본론』에서의 신용에 관한 논의

[『자본론』 3권 27장, 30, 31, 32장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직접 인용의 경우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참고하되, 독어본을 기준으로 조금씩 고쳐서 옮겼다.]

 

1. 신용의 필연성  

이윤율균등화(운동)를 매개한다.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일반화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를 낳는 데 기여한다. 󰡔자본론󰡕 3권 10장 참조.

 

2. 유통비용 절감

1)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인 한 유통비용의 하나가 된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① 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②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가속화

ㄱ. 더 소량의 화폐 혹은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행업의 기술)

ㄴ. 신용이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하여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가 가속화된다.

③ 지폐에 의한 금화의 대체

2) 신용은 유통(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시키며 그와 함께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이 된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된다.

1) 생산규모와 기업의 거대한 팽창

2) 자본 →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부터 자본을 지양하는 것이다.”

3) 기능자본가의 단순한 관리인으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소유자―화폐자본가―로의 전환.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자본소유는 이제 현실적인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 및 관리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윤(···)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의 단순한 전유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산수단의 자본으로의 전환으로부터 즉 생산수단이 현실적인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소외)으로부터,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현실적으로 생산과정에서 활동하는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까지 이르는) 개인에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이 자본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 및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양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첫 눈에 명백하게도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창립자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 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4. 주식회사 제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이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 모든 척도들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인정되고 있었던 모든 해명근거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은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 절제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Die Expropriation)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대립적인 형상으로, 즉 소수가 사회적 재산을 전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5. 협동조합공장(Die Kooperativfabriken, co-operative factories)

[이는 오늘날의 자주관리에 해당한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연합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인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이 소극적으로/음성적으로(negativ)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positiv)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의 발달―그리고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자본소유의 잠재적 지양”

 

6. 자본의 역사적 과제와 신용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화는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정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벽이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돌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사적 과제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7.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①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

②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다.

이를 맑스는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이라고 한다.

 

8. 생산과정의 발달, 신용, 투기

더욱이 최초의 거래가 상품가격의 등락을 노리는 투기에 의해 촉발되면 될수록 환류는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 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2) 따라서 신용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그 결과로 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점점 더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멀리 떨어진 시장을 위한 대규모 생산은 생산물 전체를 상업의 수중에 맡긴다. 그러나 국민의 자본이 두 배가 되어 상업이 자기 자신의 자본으로 국민의 총생산물을 구매하여 그것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은 필수적이며, 신용의 규모는 생산의 가치량의 증대에 따라 증대하고, 신용의 기간은 판매시장이 멀어짐에 따라 연장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긴다. 즉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또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시키게 된다.

 

9. 공황의 궁극적 원인

실제로는 생산에 투하된 자본의 보충은 비생산적 계급의 소비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은 부분적으로는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은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윤을 낳는 한에서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

 

10. 산업순환과 투기

불황국면에서 생산은 이전이 순환에서 도달하였던, 그리고 지금 그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수준 이하로 감소한다. 번영국면―중간단계―에서 생산은 그 기술적 토대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 과잉생산과 투기의 국면에서 생산은 생산력을 그 최대한도로 긴장시키며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장벽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1. 모든 공황의 바탕

그리하여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단순히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황은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어음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매매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매매가 사회적 필요를 훨씬 능가하여 팽창하는 것이 결국 모든 공황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진정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축적

그러나 화폐자본가는 모든 이윤(그가 얻어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모든 이윤)을 먼저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미 화폐자본의 축적―진정한 축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축적―을 보게 되며, 그것은 특수한 부류의 자본가들(화폐자본가․은행업자 등등)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재생산과정의 진정한 확대에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확장에 따라 증대할 수밖에 없다.

 

13. 화폐자본의 축적이 언제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축적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로, 화폐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화폐형태(새로운 자본투자를 개시하는 화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리]

자본의 분리, 분할, 특수화의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① 시초 축적 : 생산수단의 생산자로부터의 분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의 분리)

② 생산적 자본(혹은 산업자본)의 내적 분할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③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업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상품의 화폐와의 교환(C-M)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④ 화폐거래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유지(부기), 화폐의 보관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상품거래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⑤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 분리 : 재생산과정(생산 +유통)으로부터의 분리.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이자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은행.

⑥ 지대소득자 계층(rentiers) :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토지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대’의 형태로 가져감. [현대에는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산(부동산, 주식, 증권 등)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더 광범한 자산소득자(불로소득자) 층이 형성됨.]

⑦ 소유와 기능의 분리(주식회사) :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본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일종의 이자 같은 형태(배당금)로 잉여가치를 가져감.

→ 사회적 소유의 형성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한도 내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함.

⑧ 신용과 그 이중성 : 자본주의를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함.




아마추어 계급 혹은 웹의 예비군


  • 저자  :  바실리스 코스타키스 (Vasilis Kostakis)
  • 원문 :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 (2009)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Rethinking Marxism에 실린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의 논문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2009)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한 것이다. (초록抄錄은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정리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고문헌을 표시하지 않았다. 참고문헌을 보려면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초록

이 글은 웹의 새로운 버전에 의해 개시된 컴퓨터 산업의 변형을 다룬다. Tim O’Reilly (2006)에 따르면 사회적 웹 혹은 웹 2.0의 출현은 아마추어들이 웹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되면서 아마추어 계급의 형성과 새로운 착취 방식을 낳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서 웹 2.0의 기능은 아마추어들의 자발적 기여를 착취하고 가치화하는 것이다. 이 논문의 바탕에 되는 주장은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보여주며 아마추어들의 역할이 어느 한 쪽의 우위가 결정되는 데 작용한다는 것이다.

Key Words: Web 2.0, Amateur Class, Exploitation, Netarchists, Commons

 

웹 2.0과 집단 지성 및 창조성의 착취는 서로 엮여 있는 개념들이다. 웹 1.0의 내부에서 출현한 웹 2.0은 사회적 창조성, 협동 그리고 사용자들 사이의 정보공유를 촉진한다. 그 참여구조는 사용자들이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가치를 추가할 수 있게 한다. 웹 2.0의 출현은 eBay, Facebook, Flickr, MySpace, del.icio.us와 YouTube 같은 막대한 이윤을 발생시키는 기업을 낳았다. 이 기업들은 집단지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웹 2.0에 들어있는 일단의 참여활동과 도구들에 돈을 댄다.

그레엄(Paul Graham)에 따르면 웹의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역할이 있다. 전문가(professional), 아마추어. 최종 사용자이다.((D. Kleiner and B. Wyrick. 2007. InfoEnclosure 2.0. Mute. http://www.metamute. org/en/InfoEnclosure-2.0 (accessed 21 December 2007).)) 여기에 ‘해커’를 추가할 수 있다. 해커는 전문가의 특징(깊고 전문화된 지식)과 아마추어의 특징(낭만주의)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해킹을 제한을 받지 않는 순수한 실험적 활동으로 보는 워크(McKenzie Wark)에 따르면 해커는 사적 소유의 형태 너머에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적 아마추어”이다.((M. Wark, A hacker manifesto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아마추어와 해커의 핵심적 차이는, 전자는 플랫폼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되고 전문가들(해커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다)의 도움이 없으면 자유의 잉여―즉 진정한 커먼즈―를 산출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추어가 플랫폼 소유자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자도 아마추어 계급에게 의존한다. 사업에 가치를 추가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해커나 전문가가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아마추어 계급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아마추어 계급의 계급으로서의 형성이 웹 2.0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웹 1.0에서는 전문가, 해커, 최종 사용자의 역할이 정해진 반면 아마추어가 들어설 구체적인 공간이 없었다. 웹 1.0의 탁하고 복잡한 성격으로 인해 아마추어가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웹 1.0의 미로 속에서도 생산에 참여하고 싶은 잉여 인구가 있었는데, 이 웹 1.0의 예비군은 아직 아마추어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 느슨한 아마추어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아직 능력이 비물질적 생산에 참여할 정도로 진전되지 못한 아마추어들은 웹 2.0에도 존재하며 웹 2.0 노동인구의 잠재적 부분을 이룬다. 이 잠재적 부분은 아직 온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에 통합되지 않고 있다. 아마추어들은 직장―플랫폼들―에 위계의 형태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형태로 배치된다. 다른 한편 플랫폼들은 잉여 인구를 착취하기 위해 손쉬운 형태로 변형된다. 앞으로 새 버전의 웹은 해커나 전문가들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작은 돈을 받더라도 웹 생산에 참여할 큰 열성을 가진 아마추어들을 더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마추어는 금전상의 이득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고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가 시간에 창조를 하지만 (그리스어로 ‘아마추어’를 의미하는 ‘ερασιτέχνης’는 ‘애호가, lover’를 의미하는 ‘εραστής’와 ‘기예, art’를 의미하는 ‘τέχνη’가 합해진 것이다) 그 지식은 해커나 전문가처럼 전문화되어 있지 않다. 맑스는 인간의 자유에 채워진 족쇄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화폐라고 주장한다. 아마추어는 통상적인 인식과 단절하며 이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일어난다. 아마추어는 인간 노동의 소외된 본질인 화폐를 그 자체 목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마추어 계급의 생산은 화폐의 논리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유·존중·사회화·인정 같은 가치들에 기반을 둔다. 워크가 말하는 해커처럼 아마추어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창조한다. 둘 다 집단적 노동, 혁신, 자유의 옹호자들이다. 아비드슨은 아마추어가 참여하는 경제 유형을 ‘윤리적 경제’―인간들이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주체들이 서로 연결되는 질서를 창출하는 경제―라고 부른다.((http://www.p2pfoundation.net/Introduction_to_the_Ethical_Economy)) 이와 달리 근대 기업 자본주의는 윤리적으로 건전한 사회질서와 양립될 수 없다고 한다.

웹 2.0은 아마추어들의 예비군을 착취하는 조건을 창출했다. Flickr, MySpace, Facebook, del.icio.us와 YouTube가 그 대표적인 웹 플랫폼들이다. 이들은 아마추어들의 능력과 창조성에 대한 욕망을 활성화하여 포획한다. 아마추어의 자발적 참여가 플랫폼 관리자들에게서 (잉여) 가치로 변형된다. 아마추어들에게 생산수단이 이용가능해지지만 플랫폼들은 기업이 계속적으로 소유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새로운 표현이다. 산업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전문가들)이 보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판매한다. 창조·자부심·충족감은 느끼지 못한다. 회사는 부유해진다. 더욱이 생산과정이 경쟁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소외된다. 경쟁에 기반을 두지 않는 웹 2,0의 지적 생산에서는 아마추어들이 (때로 소액의 보수를 받고) 창조·소통·사회화·자부심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기업들은 이로부터 (주로 광고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2007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페이스북의 1.6% 지분에 해당하는 주식을 2억4천6백만 달러에 샀으며, 1년 후에 구글은 유튜브를 16억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보수가 거의 지불되지 않는 아마추어들의 웹 생산에서도 자본은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에서 자본 축적은 항상 자본의 자기확장에 충분한 수 이상의 노동 인구, 즉 과잉 인구를 발생시킨다고 맑스는 『자본론』에서 말했다. 그런데 아마추어 생산에서는 임금 의존성이 없으며 따라서 추가적으로 아마추어를 착취할 때 한계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래서 넷지배자들(netarchists 혹은 netocrats)―플랫폼들을 소유한 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려고 한다. 예비군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은 충분히 성취될 수 있는 목표이다. 넷지배자들은 그 투기적 성격 때문에 커먼즈 영역의 강화를 위한 여러 계획들을 위임받기에는 위험하다. 플랫폼을 소유하는 자본가들의 착취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커먼즈 영역의 창출과 강화의 이름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마추어들과 해커들의 손에 달려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우리에게 소통이 결핍된 것이 아니다. 사실 소통이 너무 많다.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창조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라고 썼다.((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108.)) 아마추어들은 창조하고 저항하지만, 그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 있다.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이 필연코 투쟁의 전술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웹의 생산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사회 계약이 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사회 계약 2.0’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생산과 소유의 새로운 의미들 및 방식들(피어 생산peer production과 피어 소유peer property)이 포괄되며, 이것들이 실질적 커먼즈 영역의 창출에 기여한다. 피어 생산에서 의사결정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참여와 협력에서 이루어진다. 이 생산양식은 등가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 생산이나 위계적 구조에 기반을 둔 계획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어 소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나 GPL과 같은 법적 형태 아래에서 자원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공동체적 공유의 형태를 띤다. 피어 소유는 사적 소유나 국가소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소유형태들이 배제적인(‘나의 것이면 당신의 것이 아니다’) 반면에 피어 소유는 포함적이다(‘나의 것일지라도 당신의 것도 될 수 있다’). 국가는 민중(국민)을 대신해서 공적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반면에, 피어 소유에서는 민중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관리한다. 즉 커먼즈이다. 따라서 피어 3요소(피어 생산, 피어 소유, 피어 거버넌스)에 기반을 둔 진정한 커먼즈가 넷지배 플랫폼들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 커먼즈에서는 집단적 지성과 사회적 창조성의 관리가 ‘넷지배적 이데올로기’―이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불린 바 있다((Barbrook, R., and A. Cameron. 1995. The Californian ideology. Alamut, August. http://www.alamut.com/subj/ideologies/pessimism/califIdeo_I.html (accessed 31 arch 2008).))―에 의해 추동되는 사적인 영리 기업들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넷지배자들은 참여를 포용하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를 인류 미래의 유일한 지평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 행한 넓은 범주화와 일반화가 특수한 사례들에서 해석의 오류를 낳을지도 모른다. 나[코스타키스]는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아마추어들이 어느 쪽이 우세한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정하게나마 조명했기를 바란다. 아마추어들이 창조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일정한 권리들을 플랫폼의 소유자들에게 양도해준 듯 보일 수도 있다. 넷지배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여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비물질적 가치의 생산이 임금 의존성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질서를,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생산하는 아마추어들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홍수 속에서 커먼즈의 강화를 향하는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은 성취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 이상의 것이다. “사회 변화의 핵심적 동인으로서 공유 및 커먼즈 공동체들의 지속적인 강화”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Michel Bauwens, “The social Web and its social contracts: Some notes on social antagonism in netarchical capitalism”, Re-public. http://www.re-public.gr/en/ p261 (accessed 25 July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