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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현재로 돌아가다

‘1852년 이래 양봉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혁신’이라고 떠벌려진 플로우하이브(Flow Hive)는 2015년에 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양봉업자의 꿈의 제품으로 선전되었다.

“꼭지를 돌리고 순수하고 신선하며 깨끗한 꿀이 벌집 밖으로 바로 흘러나와 단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세요,” 그 웹사이트는 떠벌린다. “지저분하지 않고, 요란 떨 것 없고, 비싸지 않은 설비—게다가 벌들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포브스』(Forbes), 『와이어드』(Wired), 그리고 『패스트컴패니』(Fast Company)에 실린 열렬한 제품평의 도움으로 인디고고(Indiegogo)(([옮긴이] Indiegogo: 앞에서 말한 크라우트펀딩 싸이트이다.))에 선전된 플로우하이브는 꿈처럼 작용했다. 제품을 론칭하기 위해 7만 달러를 목표로 했는데, 글을 쓰는 시점에 6백만 달러 이상이 모였다.(([옮긴이] 2017년 11월 24일 현재 $13,287,603이다.))

너무 좋아서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가? 슬프게도 사실이다.

플로우하이브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자연 양봉업자들은 플로우하이브의 접근법을 ‘벌에 적용된 밀집사육(battery farming)’이라고 불렀다. 플로우하이브의 설계의 핵심부에 있는 모듈형 플라스틱 벌집(comb)은 벌을 사랑하는 인간들에게는 편리할지도 모르지만, 이럴 경우 벌들의 복지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커스턴 브래들리(Kirsten Bradley)가 설명했듯이, 플로우하이브의 벌집은 벌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들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정연하다. 그냥 맡기고 놔두면 벌들은 계절과 그 당시 군체의 특정 욕구에 따라 벌집을 구성하는 방들의 사이즈를 정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그 안에서 방들이 중앙 기관의 기능을 하는 초유기체의 일부인 것이다. 벌집은 벌들의 집이며 화학적으로 실현되는 그들의 소통체계를 뒷받침해준다.

환경에 적응하는 밀랍 벌집을 인공 플라스틱 벌집으로 대체하면 기능이 고갈된, 때로는 유독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표준화된 방들을 강요하면 벌들은 벌집 전체에 걸쳐서 수벌들을 기르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위의 벌 개체군들 사이에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되고 복원력이 감소된다.

플로우하이브의 발명자들은 벌 군체를 살아있는 복잡한 체계로 생각하지 않고 생산기계의 구성요소들로, 그래서 그 기계 안에서 이윤과 효율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되는 존재로 상상한 듯하다.

플로우하이브는 살아있는 건강한 체계들에서 요소들과 전체 사이의 상호연관을 방해하는 설계법에서 나온 수많은 인간의 발명품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부단히 질서와 통제를 추구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살아있는 것보다 우위에 놓고, 건강한 살아있는 체계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과 어긋나는 이상화된 해결책들을 부과한다. 우리는 역동적이고 항상 변하는 현실 세계의 생태와는 종류가 다른 완전하고 정태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해결책들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습관은 물리적 체계들의 엔지니어링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 자체에 대한 일부 비전들이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었다.

최근까지 보존연구는 연구단위로서의 개별 종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서식지 파괴가 개체의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종들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생태학자 제인 메멋(Jane Memmott)이 설명했듯이, 모든 유기체들은 적어도 다른 하나의 종에 중요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혹은 포식자나 먹이로서 혹은 꽃가루 매개자나 씨앗 전파자로서 연결되어 있다. 각 종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함입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종의 멸종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연달은 이차적 멸종을 유발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지를 우리는 이제야 막 이해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1980년대 이래 과학적 발견들이 그 어떤 유기체도 진정으로 자율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확인했다.

가이아 이론, 체계론적 사고, 복원력 과학에서 연구자들은 우리 지구가 상호의존하는 생태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물망임을 보여주었다. 근대 시기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사고를 형성해왔던 죽은, 기계론적 대상은 잘못 이해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초현미경적 바이러스들, 효모들, 개미들, 이끼들, 점균(粘菌)들 그리고 균근(菌根)들에서 나무들, 강들, 기후체계들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출현했다. 모든 자연현상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의 본질이 바로 우리를 포함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분자·원자·바이러스의 수준에서 인류와 ‘환경’은 말 그대로 서로 융합되어 당연하게도 생물학적 연합체를 구성한다.

비록 우리의 문화는 이 숨겨진 연관들을 파악하도록 우리를 잘 준비시켜주지는 않지만, 이 지식은 말 그대로 삶에 긴요하다.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같은 과학자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살아있는 것들—그리고 비(非)생물들—사이의 숨겨진 연관에 대한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카프라가 제기한 문제를 훌륭하게 이어받은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그의 책 『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에서 세계가 거시적 수준—대기, 대양, 지각(地殼)—에서만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다. 플랑크톤과 박테리아는 물방울의 핵 역할을 함으로써 구름의 형성에 기여한다. 균근은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협동한다.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 신호는 개미 군체로 하여금 초유기체로서 행동하게 한다.

공진화(co-evolution), 즉 바이오문화적 파트너관계의 형성이 바로 우리의 풍요로운 지구가 번성하는 방식으로 판명되었다고 하딩은 말한다. 우리가 이 관계들을 파열해오긴 했지만, 지금 다리를 놓아서 지구가 다시 한 번 건강하고 자기규제적일 수 있게 만들기에 늦지는 않았다.

이 과학적 발견들은 다른 누구보다 줄곧 철학자들의 화두였던 물음, 즉 ‘정신이 어디서 끝나고 세계가 어디서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준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경체계를 신체를 두뇌에 연결시키는 일단의 메시지 전달 케이블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미화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신과 세계의 경계는 구멍이 숭숭 나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인간 정신은 신경과 연관된 만큼이나 호르몬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의 사고와 경험은 두개골 안의 두뇌의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피부에 의해 울타리 쳐져 있지도 않다. 우리의 물질대사와 자연의 물질대사는 분자·원자·바이러스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신적 현상인 우리의 사유는 두뇌의 활동으로부터만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티드 락웰(Teed Rockwell)이 “신경체계신체환경을 포용하는 단일한 통합된 체계”라고 부른 것에서도 출현한다.

이 새로운 관점이 가진 중요성은 심대하다.

만일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두개골 상자 안에 똑딱거리는 시냅스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환경들에 의해서도 형성된다면 사유 자체와 자연 세계 사이의 분할—이는 바로 근대적 사상 전체를 뒷받침했던 분할이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근대 시기 전체에 걸쳐서 우리 자신을 자연 ‘위에’ 세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우리는 지금 근대 과학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

생태적 네트워크에는 사물들도 포함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물들이 생명이 없고 거칠며 활기가 없다고 인식하도록 배웠다. 자연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소풍 가기에 좋은 곳이다. 우리는 이런 세계상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땅·바다를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고 쓰레기로 채운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물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 ‘물활론(物活論)자들’(hylozoists)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물질이 살아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았다.

로마의 현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대작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물질과 에너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 또한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본래 역동적이라고 믿었다. 『도덕경』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연속적인 흐름과 변화에 함입되어 있다.

불교 텍스트들에는 ‘흐름’과 ‘머물지 않음’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무상(無常)과 부단한 운동의 상태에 있는 우주를 환기시킨다.

17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실존을 연속체로서, 신체·정신·생각·물질의 분리될 수 없는 얽힘으로서 파악했다. 그리고 바로 70년 전에 모리스 메를로뽕띠는 세상 안에 존재하기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기, 세상과 관계를 갖기,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세상을 모든 차원에서 인식하기를 옹호했다.

물질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말하자면 열-산업 경제(thermo-industrial economy)의 불[火]과 연기에 의해 흐려진다. 화석 연료가 19세기 이래 경제성장을 그토록 강력하게 추동하였기에 우리는 이 모델이 자원제한으로 인해서 한정된 지속기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야에서 놓쳤다.

이제 이 제한이 피부에 느껴지는 때이므로 이러한 생각들 가운데 다수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새 유물론’ 운동의 사유가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물질세계와 우리의 관계는 더 존중되고 기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확연한 중심이나 가장자리가 없는 방대한 상호연관의 분산된 그물망”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사물들’에 들어있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도—그녀의 말로 하자면 “우리의 쓰레기의 부름”에 응답하면서—물질의 진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리고 인간의 신체의 외부와 내부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힘들에 끈기 있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옹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내버린 것들, 쓰레기, 오물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다면 우리의 낭비적 소비패턴은 바뀌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철학자 피터 그래턴(Peter Gratton)은 “때로는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사람들이 무언가 깊은 것을 찾고 있다”고 해학적으로 말한다. 그는 묻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될 때 어떤 정치적·윤리적 귀결이 따르는가? 박테리아는 생명체로 간주되는가바이러스는로봇은생태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이거나 심지어 ‘그럴지도 모른다’라면,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세계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혁신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변화와 혁신은 더 이상 정밀하게 구축된 ‘비전들’을, 그리고 어떤 미래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거창한 디자인으로 그려지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약속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의 풍요로운 맥락에서 서로서로 그리고 생물권과 다시 연결될 때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제안이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복잡계들이 변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따르자면, ‘큰 것’을 형성하는 ‘작은 것’의 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심대한 변형은 다양한 변화들, 개입들, 그리고 종종은 작은 파열들이 일정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계론적 사고로부터 배웠다. 예측하기는 불가능한 어떤 순간에 체계가 변곡점 혹은 상전이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체계 전체가 변형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거듭거듭 확인해주는 가르침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드가 모렝(Edgar Morin)은 이렇게 썼다. “모든 거대한 변형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신념체계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실이 그것이 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아니다.”

생태철학자 조애너 메이씨(Joanna Macy)는 이 새 이야기의 등장을 ‘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식에서의 심대한 전환이며 우리가 식물·동물·공기·물·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의 각성이다.

이 이야기에는 영적 차원이 존재한다. (메이시는 불교학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과도 일치한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이 말한,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시·예술·철학에 의해서만큼 과학에 의해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되면, 지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죽어있는 자원의 저장소로 다가오지 않는다. 반대로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토양, 살아있는 체계들, 그리고 우리가 이것들이 재생성되도록 도울 수 있는 방식들 사이의 상호의존이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경제활동의 ‘근거’를 나타낸다.

이 새 이야기는 설계(디자인)에 대한 진취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며, 한 체계의 요소들 사이의 연관들과 상호작용들에도 이산(離散)된 구성요소들에 기울이는 것과 적어도 같은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플로우하이브에서 보았듯이 생산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에 들어있는 위험은, 그것이 (벌 군체나 초유기체와 같은) 공동체가 만일 건강하고 복원력을 갖춘 상태로 남아있으려면 항상 변해야 하는 상황에 너무 경직된 틀을 부과한다는 점이다.

점증하는 세계적 운동은 인간이 만든 세계를 새로운 렌즈를 통해 보고 있다. 자연적·사회적 생태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 운동들은 새로운 구성요소들을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원료를 추출하는 것을 맨 먼저 생각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자산—이른바 ‘순 현재자산’(net present assets)—을 보존·파수·복원하는 방식들을 찾고 있다.

설계자들과 제조자들은 이 운동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설계자들은 어떤 상황에 참신하고도 존중하는 시선을 집중하여 그 상황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명백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질적·문화적 자질들을 드러내는 매우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재생성적 설계는 지어진 세계를 얼어붙은 대상들의 풍경이 아니라 상호작용하고 서로 의존하는 생태들의 복합체로서 다시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