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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정치의 새로운 중심으로서의 도시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 전역의 도시들에서 시민들이 (플랫폼들, 운동들, 국제적 네트워크들을 통해)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영향을 미치는 경로들을 창출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자치도시 플랫폼인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의 창립자인 쑤비라츠(Joan Subirats)는 도시들이 어떻게 불확실성을 다루고 새로운 유형의 보호를 제공하며 첨단 거대기업들이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소유하는 추세를 역전시키고 심지어는 난민 같은 문제에 대하여 국민국가들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이 글은 ‘어번 커먼즈’에 대한 일련의 글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린유러피안저널』(Green European Journal) 16호 「장안의 화제 : 유럽 도시 탐구」(“Talk of the Town: Exploring the City in Europe”)가 그 출처이다. 이 글에서 DIEM25의 마르씰리(Lorenzo Marsili)가 바르셀로나 자율대학의 통치 및 공공정책 연구원의 창립자이자 원장인 쑤비라츠를 인터뷰한다.

—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마르씰리: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라는 유령이지요. 당신은 당신이 바르셀로나에서 하는 일이 왜 그토록 상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쑤비라츠: 분명 다양한 요인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의 요인은 플랫폼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독점적인 디지털 자본주의로의 변형인데요, 국가는 여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빅 플레이어들(big players)이 투자펀드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부채와 긴축정책의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동시에 인구는 점증하는 어려움에 처하며, 불확실성,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미래에 무슨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감정입니다. 나의 생활수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러 해 전에 철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상품화를 향한 운동과 그에 맞서는 보호의 운동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요?

마르씰리: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호소합니다.

쑤비라츠: 네, 국가가 보호를 요청할 고전적인 장소입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외국인혐오적인 논리를 따르는 국가가 여전히 보호를 요청할 공간이며, 국가는 많은 경우 국경을 폐쇄하고 사회를 폐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본래 다릅니다. 도시는 개방될 목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우리는 도시의 공기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원주] ‘도시의 공기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Stadtluft macht frei)는 ‘일 년 하고도 하루’ 이상 도시 주거지에서 산 정착자들에게 자유와 땅을 제공한다는 법의 원리를 설명하는 독일 중세 속담이다.)) 도시는 기회와 가능성들이 모이는 공간이죠. 도시 당국이 국민국가보다 정책권한과 권력을 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도시 당국과 정치적 당사자들 사이의 근접성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훨씬 더 밀착되고 구체적인 종류의 보호가 제공됩니다. 몇몇 일들—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이 달라지고 호전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는 말입니다.

마르씰리: 폴라니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철학 교수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두 번째 운동인 보호 운동은 주로 여성, 소수자,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 반해서 서구의 남성, 백인 생계가장들을 역사적으로 보호했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운동, 즉 자율과 해방의 운동의 필요성을 도입합니다. 도시의 ‘보호’는 전통적인 국가의 보호와 어느 정도까지 다를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이 아다 꼴라우(Ada Colau) 요인, 바르셀로나 요인, PHA[주택담보 대출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플랫폼] 요인 및 반(反)퇴거 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PHA와 관련하여 특별한 유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PHA로 가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으며 그래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는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예요, 활동가가 되셔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PAH의 고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황을 함께 바꿀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이 PAH의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것은 서비스 제공의 과정이 아니라 해방의 과정입니다. PHA는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아웃소싱 논리—“와서 당신의 쟁점을 우리에게 위임하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생각을 옹호해줄 것이다”—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위임하는 접근법은 PAH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PAH는 사람들을 보다 활동적으로 만듭니다.

마르씰리: 어떻게 이것이 제도화됩니까? 이런 정치화 과정들, 활성화 과정들—이 과정은 공동 소유권 및 공동 관리와 더불어 결국 커먼즈 담론의 바탕을 이루죠—은 어느 정도까지 시의 정책들이 됩니까?

쑤비라츠: 이것[PHA]은 2015년 5월에 시작한 중요한 기획입니다. 선거 당시 <바르셀로나 엔 꼬무> 성명서에는 4가지 기본 사항들이 있었습니다.(([옮긴이] <바르셀로나 엔 꼬무>에 대해서는 <커먼즈로서의 도시>, <괴물 시대의 커먼즈(2)>, <커먼즈 이행과 P2P(5)>, <장벽에 맞선 도시들> 등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다른 곳에서 다른 유사한 플랫폼들이 이 사항들을 채택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제도의 지배권을 시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제도는 포획되어서 우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점차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증가 추세이고 기본적인 사회적 보호메커니즘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보호제공 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응을 요구하는 사회적 긴급사태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위임하지 않는, 보다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정책의 공동생산, 결정의 공동창조 등등이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사항은 우리가 정치부패와 정실인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급여는 삭감될 필요가 있고, 업무는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권한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정치가 한층 더 윤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씰리: 그러면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쑤비라츠: 첫째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두 번째 사항과 관련하여 확실히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회적 긴급사태에 응답하기 위한 보다 면밀한 정책들을 만드는 것이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첫 번째 사항—다른 유형의 정치에 필요한 사회제도를 회복하는 것—과 관련한 정당성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둘째로는, ‘혁신의 도시들’ 어느 곳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어려운 점은 사회제도를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고 정책의 공동생산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존 제도들의 전통, 일상 업무, 작업방식들이 우리의 접근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매우 19세기적이고 20세기적인 접근법이 기존 제도에 존재합니다. 그 제도는 디지털 방식 이전의 것인데, 여기서 집단지성을 포함하는 방법이 관여되는 ‘공동생산’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씰리: 실리콘 밸리의 거인들이 모든 데이터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화폐화하는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기술 주권을 거론하는 국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있습니다. 당신은 디지털 커먼즈와 관련하여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쑤비라츠: 우리는 자치도시 의회가 사용하는 사유화된 소프트웨어 기반을 바꾸는 일과 그 의회와 소프트웨어 공급자들 간에 이루어진 계약을 통해 이런 서비스에 사용된 데이터가 기업에 이전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스마트 시티>(Smart Cities)와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obile World Congress)의 중심지인 도시에서 기술혁신이 도시의 접근법을 반드시 바꾸도록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포럼에 못 미치는 사고방식을 바꾸면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혁신과 기술주권을 담당하는 위원을 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차•버스•지하철 모두에 사용될 수 있는 교통카드에 대한 새로운 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카드는 공급자가 제조할 것입니다. 계약서에는 공공 당국이 바르셀로나 전 주민들의 지역 대중교통 데이터를 관리할 것이라고 명시됩니다. 여기서 주권은 국가주권 같은 것이 아니라 에너지•물•식량•디지털 주권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공적인 우선사항들이자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르씰리: 주권이 너무 자주 국가주권과 동일시되어서 저는 ‘근접성의 주권’(sovereignty of proximity) 내지 ‘주권(체)들’(sovereignties)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헌법처럼 많은 헌법들이 “주권은 국민에게 속한다”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국민국가가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헌법에서도 도시의 역할은 여전히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실제적 법적 권한은 그 범위가 좁습니다. 새로워진 거버넌스의 중심에 도시를 두고자 하는 시도라면 권한의 배분을 바꾸기 위한, 일국 수준의 정치적 싸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쑤비라츠: 저는 자치도시들의 ‘책임 수준’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치도시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폭넓은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책임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자치도시들의 ‘권한의 수준’—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낮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지역 내에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바로 이 이유로 <바르셀로나 엔 꼬무>가 카탈로니아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조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카탈로니아 엔 꼬무>라고 부르는데 <카탈로니아 엔 꼬무>는 뽀데모스와의 연합이라는 논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카탈로니아 수준—여기서 교육과 의료 정책들이 결정됩니다—에서나 국가 수준에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수준에서는 우리의 권한이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동원력이 우리의 권한보다 한층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립은 법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카탈로니아에서 주택과 관련하여 권한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권한은 자율적인 카탈로니아 자치주 정부(Generalitat) 내지 국가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정치적 동원을 통해 주택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고 그곳에서 베를린•암스테르담•뉴욕과 함께 <에어비앤비>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정치적 동학 때문에 <에어비앤비>는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스페인•미국•네덜란드 국가는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을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생각에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씰리: 도시와 국가의 대립이 흥미롭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는 유럽 전역의 많은 도시들—바르셀로나는 그중 한 도시죠—이 난민들을 맞아들이기를 바라지만 그 도시가 속한 국가들은 종종 이것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스페인 정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도시가 단독으로 일정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그런 불복종 행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당신은 국가정부에 불복종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난민재배치에 관한 유럽 시책’을 따르고 있고 정작 국가정부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쑤비라츠네, 좋은 실례군요. 저도 그 일은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난민이라는 큰 문제는 풀지 못하겠지만, 확실히 실질적인 영향력보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시 수준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그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일이 말 뿐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유사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민간투자기금이 건물을 구입하는 능력에 대해 조치가 취해진 바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시의회는 합법적으로 법을 어길 수 없지만 여러 방식으로 투자 펀드가 이런 거래를 하는 것을 한층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몇몇 경우에 자치시의회는 건물이 투기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자체를 구입함으로써 이러한 매입을 좌절시키기도 했습니다.

마르씰리: 독일 정치가 슈반(Gesine Schwan)은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를 우회함으로써 유럽수준의 난민 재배치와 자치도시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한 가지 제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연합을 지배하는 여러 수준의 기관들은 ‘국민국가에서 유럽연합으로’ 구조에 따라서 대부분 조직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와 달리 ‘자치도시에서 유럽연합으로’라는 구조를 생각하면서 이 기관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네, 저는 이 영역에서 우리의 경험들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들 사이에서 서로 벤치마킹하고 서로 배우려고 만든 <유로시티>(EuroCities) 같은 조직들이 있습니다. 이동성/유동성, 사회정책 등등을 다루는 워킹그룹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지역수준에서 조직화하는 이런 접근법을 더 추진해야 하며, 국가를 제치고 유럽연합과 직접 대화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국가들이 유럽의 의사결정 구조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 일은 전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유럽연합에서 동맹을 맺더라도 그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루어질 수는 있습니다. 저는 유럽연합이 그런 조치를 취하기를 꺼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하나의 방법은 지역 당국들이 모여서 유럽 포럼을 창출하여 힘을 키우고 이 영역에서 도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씰리: 당신은 국민국가들에게나 유럽연합에게나 약간은 대항권력으로 작용하는, 혁신 도시들의 유럽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쑤비라츠: 저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르셀로나 자치도시 당국이 이미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바르셀로나는 사라예보를 11번째 행정지구로 삼았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 Strip)에서 일하는 자치도시의 기술 담당자들과의 매우 밀접한 관계를 포함해서 바르셀로나와 가자지구 사이에 강한 협동관계도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도시의 국제협력 전통이 자리를 확실히 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반으로 한 작업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는 특성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연히 거주하는 공간들을 지배하는 초국가적인 정치구조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 이론가인 바버(Benjamin Barber)는 시장(市長)들로 구성된 전지구적 의회를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전지구적 수준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인 제안입니다. 전지구적 정부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럽에는 적어도 유럽 정부의 시뮬라크럼인 유럽의회가 있습니다. 당신은 도시들이 모여서 유럽의회 같이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그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구성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애초에 기존의 기관들, 관료들, 조직들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간은 오히려 아래에서의 마주침(상호작용)을 기반으로 그리고 (나폴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영향을 끼쳤던 시장들의 합법성을 바탕으로 해서 작동해야 합니다. 그 공간은 위로부터 정치적 자산을 빨리 만들려는 어떠한 욕망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작용하는 과정으로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복원력이 있을 것이고 결국 강력해질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도시들이 할 역할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제가 다니면서 도시행정과 관련한 이런 아이디어의 옹호자 역할을 할 때 종종 제가 깨닫는 것은 자치도시에 보다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이런 사안을 다룰 직원과 사무실이 부족한 경우가 매우 잦다는 것입니다. 도시들이 전지구적으로 그리고 유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면 도시들은 관련 업무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쑤비라츠: 분명히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메트로폴리스 접근법을 더 강화한다면, 당신이 단점으로 언급한 것들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자치도시라는 용어가 항상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는 넓이가 600제곱킬로미터이고, 바르셀로나는 100제곱킬로입니다. 파리는 파리 시(the City of Paris)와 교외를 포함한 파리(Greater Paris)로 나뉩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시보다 ‘교외를 포함한 바르셀로나’라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150만 명의 거주자에서 350만 명의 거주자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권을 형성하는 25개 타운위원회는 국제적 과정을 육성하는 데 자원을 투자하기로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파리는 이미 이 일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파리에는 메트로폴리스적 차원이 있어서 그것을 더 강화할 수 있거든요. 직원과 선례가 부족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도시가 국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국가를 거쳐야 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상황은 메트로폴리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씰리: 본격적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거론하며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상위 100대 도시들이 전 세계 GDP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을 생산합니다. 2017년 6월에 바르셀로나는, 국가지도자는 점점 더 다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전지구적 과제들을 다룰 공동기획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 시장들을 한데 모아 전지구적 정상회담인 <대담한 도시들>(Fearless Cities)을 주최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어떤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제 생각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인 어젠다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고, 도시들을 아주 쉽게 끌어들여 연결시킬 수 있는 이슈들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분배 문제, (런던•시애틀•뉴욕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던) 최저임금 문제 및 주택•초등교육•에너지•물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분명히 경계들을 가로질러 세계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이슈들로 시작할 수 있으며 유럽 전역에서 과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권과 기관들에게 자극을 줄 것이고 우리는 좀 더 빨리 도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정책 분야의 결점들을 보지만, 이것은 정치체의 결점들을 부각시킬 것입니다.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를 역사화하는 것, 즉 커먼즈의 진화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래는 최초의 예비적 시도이다.

우선 커먼즈를 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데이빗 볼리어 등이 부여했으며 엘리너 오스트롬을 비롯한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서 나온 정의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따르면 커먼즈는 공유된 자원을 그 사용자들 그리고/혹은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체들이 그 규칙 및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소유하고/소유하거나 공동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커먼즈는 ‘사물’, 활동(자원의 유지와 공동생산을 하는 커머닝), 그리고 다스림(거버넌스)의 방식의 결합이다. 이는 사적 형태의 자원관리 및 공적/국가적 형태의 자원관리와 구분된다.

그런데 커머닝을 자원의 결실을 분배하는 네 가지 양식 중 하나로, 즉 하나의 ‘교환양식’(mode of exchange)으로 보는 것도 유용하다. 이는 의무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 기반의 재분배 시스템과도 다르고 상품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과도 다르며 특수한 존재자들 사이에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선물(膳物)경제와도 다른 교환방식이다. 커머닝은 자원을 한데 모으기(pooling)/공동으로 사용하기이며, 이를 통해 개인들은 생태계 전체와 교류한다.

관계를 규정하는 여러 문법들, 특히 피스크(Alan Page Fiske)의 『사회적 삶의 구조』(Structures of Social Life)에 제시된 것이 이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피스크는 권위의 서열화(서열에 따른 분배), 동등하게 응답하기(선물에 선물로 응답할 사회적 의무로서의 선물 경제), 시장에서의 가격매김, 그리고 공동체적 공유라는 네 가지를 구분해낸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世界史の構造)는 교환양식의 진화를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훌륭한 시도이다. 초기의 부족적·유목적 형식의 인간 조직에서는 ‘한데 모으기’가 주된 양식이었다. ‘소유하기’는 유목민들에게는 반(反)생산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물경제는 더 복잡한 부족적 배치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특히 농경으로의 정착 이후에 가장 강해진다. 선물과 답례의 사회적 의무가 사회를 창출하고 관계를 평화롭게 한다. 계급사회의 등장과 함께 ‘권위의 서열화’ 혹은 재분배가 우세해지며,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에서 시장 체제가 우세해진다.

이제 이것을 문명의 역사, 즉 계급의 역사에 맞춘 가설로 다시 정식화해보자.

자본주의 이전에 출현한 계급사회들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커먼즈들이 존재했다.(([옮긴이] ‘commons’는 ‘means’(수단, 방법)처럼 단수로도 쓰이고 복수로도 쓰인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자연자원 커먼즈들로서 오스트롬 학파의 연구대상이 된 것들이다.(([옮긴이] 밑줄 강조는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이 커먼즈들은 문화적으로 전승된 더 유기적인 커먼즈(민속 지식 등)와 공존했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사회들은 매우 착취적이었지만 사람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구조적으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유럽 봉건주의에서 농민은 공유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및 시장체제가 처음에는 도시 내의 하부체계로서 출현하고 진화하면서 둘째 형태의 커먼즈, 즉 사회적 커먼즈가 중요해진다. 서양 역사에서는 수공업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연대제도인 길드 시스템이 중세의 도시들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복지’(welfare)시스템이 공동으로 이용되고 자율적으로 관리되었다. 시장 기반의 자본주의가 우세해지면서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여기서 자연자원 커먼즈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가 구축될 필요가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 소비조합, 공제조합 등을 커먼즈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사회적 커먼즈를 관리하는 법적 형태로서 간주될 수 있다.

복지국가에서는 이 커먼즈들 대부분이 국유화되며 (즉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며) 더 이상 커머너들 자신들에 의해서 관리되지 않는다. 사회안전제도들이 민주적 정치체에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커먼즈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복지국가의 위기와 함께 ‘커먼페어’(commonfare)(([옮긴이] ‘welfare’가 ‘잘 살기’를 의미한다면, ‘commonfare’는 ‘공동으로 살기’를 의미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풀뿌리 유대시스템들이 다시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지제도의 신자유주의화와 관료화는, 공적인 부문(국가)과 커먼즈의 파트너관계에 기반을 둔 복지제도의 재(再)공통화(re-commonification)에 대한 요구를 야기하는 충분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터넷의 출현, 특히 웹의 발명 (웹브라우저는 1993년 10월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래 우리는 셋째 유형의 커먼즈인 지식 커먼즈의 탄생과 급속한 진화를 목격하고 있다. 분산된 컴퓨터 네트워크들은 P2P 동학의 보편화를 가능하게 했다. 즉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peers’)이 공유된 지식 자원(지식, 프리 소프트웨어, 공유된 디자인들)의 공동의 창출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열린 기여 체계들을 가능하게 했다. 지식 커먼즈는 인지 자본주의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즉 지식이 생산과 경쟁에서의 장점의 일차적 요인이 되는 동시에 ‘사유재산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대안―지식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이 생산요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본주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인지 혹은 네트워크 기반의 자본주의가 특히 지식 노동자들의 경우 봉급 기반의 노동을 무너뜨리고 불안정노동을 보편화하는 바로 그 만큼,(([옮긴이] 원문 “To the degree that cognitive or network-based capitalism undermines salary-based work and generalized precarious work, especially for knowledge workers, these knowledge commons and distributed networks become a vital tool for social autonomy and collective organisation”에서 “generalized”는 ‘generalizes’의 오류로 보고 고쳐서 옮겼다.)) 이 지식 커먼즈와 분산된 네트워크들은 사회적 자율과 집단적 조직화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지식에의 접근이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더 안정된 생계를 창출할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지식 커먼즈들은 일반적으로 자본과 서로 의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의 새로운 층인 ‘넷지배’ 자본(netarchical capital)은 커먼즈와 인간의 협력으로부터 직접 가치를 추출한다.(([옮긴이] 넷지배 자본은 지적 재산의 소유나 미디어 벡터의 통제에 의존하지 않고 참여 플랫폼들의 개발과 통제에 의존하는 자본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wiki.p2pfoundation.net/Netarchical_Capitalism 참조.))

그러나 우리는 지식이 물질적 실재의 재현이며 따라서 지식 커먼즈의 출현은 생산양식과 분배양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놓을 가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한 국면, 즉 ‘디지털’(즉 지식)과 물리적인 것(the physical)의 증가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피지털(phygital)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최초의 장소는 어번 커먼즈이다. 나는 네 달 동안 벨기에의 헨트 시에서 보낼 기회를 가졌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급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영역(식품, 주거, 수송)에서 거의 500개에 달하는 어번 커먼즈들을 찾아냈다.(([원주] 자급활동에 따라 분류된 커먼즈의 디렉터리로는 네덜란드어로 된 싸이트 http://wiki.commons.gent 참조.))

우리의 큰 발견은 어번 커먼즈들이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커먼즈 공동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커먼즈들이 다음의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 열린 생산공동체

2) 커먼즈의 기반시설을 유지하면서 이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반시설 조직

3) 커머너들의 사회적 재생산(즉 그들의 생계)을 확보하기 위해서 커먼즈와 시장/국가 사이를 매개하는 (최선의 경우에) 생성적인 생계 조직.

적어도 두 개의 연구에 따르면(([원주] 그 중 하나는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며, 무어(Tine De Moor)가 2013년 8월 30일 <역사적 관점에서의 집단적 행동 연구소>(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한 「협력인」(“Homo Cooperans”)이라는 제목의 강연 텍스트를 실은 소책자이다. http://www.collective-action.info/sites/default/files/webmaster/_PUB_Homo-cooperans_EN.pdf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를 대상으로 한다. Burgercollectieven in kaart gebracht. Van Fleur Noy & Dirk Holemans. Oikos, 2016: http://www.coopkracht.org/images/phocadownload/burgercollectieven%20in%20kaart%20gebracht%20-%20fleur%20noy%20%20dirk%20holemans.pdf)) 급격한 성장의 국면을 거쳐가고 있는 이 어번 커먼즈들은 (지난 10년 동안 10배 성장했다) 우리가 보기에 커먼즈의 더 나아간 발전을 위한 전제로서 한층 더 심화된 새로운 물질적 실현의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비물질적, (공동)생산됨/전승됨이라는 두 축을 따라 네 유형의 커먼즈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오스트롬이 연구한 커먼즈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물질적 커먼즈(자연자원)이다. 문화나 언어 같은 물려받은 비물질적 커먼즈는 보통 인류의 공통 유산이라는 각도에서 고찰된다. 지식 커먼즈들은 공동으로 생산되는 비물질적 커먼즈이다. 마지막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커먼즈라는 대체로 그 사례를 찾기 힘든 범주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전통적으로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자본을 위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이라는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그 논리를 한번 보자.

토지가 주된 생산요인이었던 전자본주의적 계급형성체에서 자연자원은 커먼즈 생계에 필수적이었으며, 커먼즈가 토지와 연결된 자연자원의 공동 관리라는 형태를 띤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토지와 생산수단에의 접근에서 분리된 자본주의에서는 커먼즈가 ‘사회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회적 커먼즈는 노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연대제도이다. 자본의 지배 동안 생산을 상이한 토대 위에서 조직하려는 시도들이기도 하다. 즉 생산과 소비를 위한 협동조합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인지 자본주의의 시기에 지식은 생산과 부 창출의 주된 자원이자 요인이 되며, 지식 커먼즈는 그 논리적 결과이다. 그러나 안정된 봉급을 받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이 지식을 ‘먹을’ 수는 없다. 따라서 커먼즈는 또한 도시 기반시설과 자급 시스템의 형태를 띠며,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물리적·물질적 커먼즈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잠재적으로 현재의 종합국면에 적합한 생산양식의 형태이다. 필요한 생태적 이행 및 사회적 평등의 제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장과 국가가 실패한 시기에는 커머닝 기반시설이 자원과 서비스에의 접근을 보장하는 데 필요하게 된다. 접근의 불평등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인간의 물질적 생산이 생태계에 남기는 발자국을 줄이는 매우 힘있는 수단으로서도 그렇다.

따라서 현재의 어번 커먼즈 및 생산 커먼즈들은 현 체제의 문제―물질적 생산에서의 사이비 풍요가 지구를 위태롭게 함과 아울러 지식 교환에서의 인위적 희소성이 해결책의 확산을 방해하고 있다―를 풀어줄 새로운 체제의 맹아적 형태들이다.

인지 자본주의의 지식 커먼즈들은 탈자본주의 시기의 생산적 커먼즈로 이행하는 과도적 형태일 뿐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지식 커먼즈에 의해 형성되고 모델화되는 이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커먼즈(따라서 ‘피지털’)에서는 생산수단 자체가 공동의 이용을 위해 한데 모은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공유된 전지구적 지식자원(예를 들어 공유된 디자인들 같은 것이 있으며 ‘모든 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고 공유된다’는 규칙을 따른다)과 지역에서 협동적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미시적 공장들(‘모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라는 규칙을 따른다)이 결합되는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DGML: design global, manufacture local) 생산 및 분배양식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옮긴이] ‘DGML’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797 참조.))

· 프로토콜 협동조합주의 : 바탕이 되는 비물질적이고 알고리즘적인 프로토콜들이 공유되어 오픈소스가 된다. 카피페어(copyfair) 원칙을 따른다(자유롭게 공유되지만 상업화는 상호성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 열린 협동조합주의 : 커먼즈 기반 협동조합들은 사회 전체를 위해 공통의 재화를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자본주의’와는 구분된다. 플랫폼 협동조합들에서는 플랫폼 자체가 커먼즈이며 요구될 수 있는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관리하는 한편 추출적인 넷지배 플랫폼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는다.

· 열린 기여기반 회계 : 모든 기여를 인정하는 공정한 분배 메커니즘들이다.

· 열린 공유된 공급망 : 상호 조정을 가능하게 한다.

· 배타적이지 않은 형태의 소유 : 생산수단이 생태계 내의 모든 참여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으로 점유·운영된다.

우리 견해로는 현재 어번 커먼즈들의 급속한 성장의 파도는 앞으로 올 더 거대한 파도, 즉 탈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치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할, 규모가 커진 물질적 커먼즈들의 출현의 파도를 예시한다. ♣




커먼즈 이행과 P2P (4)



 

3. 커먼즈 정치란 무엇인가?

 

커먼즈와 P2P는 우리 시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생태적 위기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고 우리의 사회적·생태적 안녕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가?

 

왜 우리에게 P2P 정치가 필요한가?

거의 40년이 된 신자유주의는 최근 브렉시트나 트럼프의 당선에서 보듯이 현대 서구 정치의 우선회에 의해 뒤집어졌다. 긴축 정치, 복지국가에 대한 약탈, 그리고 증가하는 시민들의 소외는 이해할 만한 좌절을 낳았고 이것을 우익 포퓰리즘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참여는 익숙한 것(후기 단계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느린 죽음과 예측할 수 없는 것(놀랍게 부상하는 대안 우파/극우)의 급속한 발생 사이의 선택에 국한되는 듯 보였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선거무대와 국가정치의 구조적 제한들은 체제 내에서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큰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P2P 동학을 활용하고 커먼즈를 구축하는, 친화성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들과 공동체들이 그 숫자와 가시성의 측면에서 부상하고 있다. 소규모 혁신들이 거버넌스, 농업, 서비스 공급, 과학, 연구 및 개발, 교육, 금융, 통화(通貨)의 분야들에서 진정하게 지속 가능한 자원관리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결속을 모델화하고 있다. 장소에 기반을 둔 이러한 노력들은 인터넷의 사용을 통하여 세계 전역에서 기록·복제되어 그 원천이 되는 지식 커먼즈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예시적 접근법들이 합리적인 대안을 구축하는 데 들어갈 핵심 요소들이긴 하지만, 이 접근법들은 보통 기존의 체제의 제한 내에서 발전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종획을 통해서나 아니면 더욱 우선회하면서 점점 더 권위적이 되고 배타적이 되는 우파 정치를 통해서나 시민들이 기대하거나 열망하는 ‘정상성’(normality)―일자리 안정, 연금, 실업지원, 공정한 노동시간과 조건―은 계속 침식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로 위에서 서술한 저 생산 공동체들의 작동을 위해 가용하다고 생각되는 공간도 불가피하게 위축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 운동은 정치 영역에 관여해야 한다. 복지국가 모델의 최선의 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써, 사회적 가치창출과 공동체에 의해 조직되는 실천을 촉진하는 정치로써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대의정치만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 즉 일반 시민들의 실행할 수 있는 권리들도 가리킨다.) 이는 대안들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정치적 경로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잘못된 이분법을 부순다. 균형 잡힌 정치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예시적 행동노선과 제도적 행동노선이 모두 필요하며, 다행히도 이러한 정치적 접근법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특징들이 어떻게 시민사회의 조직을 형성할 수 있고 거버넌스의 방법과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총체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보자.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원리들이 커먼즈 정치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이전 장(「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P2P 경제를 형성하는가?」)에서 우리는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생태계는 보통 세 단체―① 생산 공동체 ②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③ 비영리 지원단체들―를 통해 발현됨을 보았다. 이 세 요소가 만일 더 광범한 사회로 확대되어 적용된다면 어떻게 나타날지 상상해보자.

CBPP 생산 공동체 기업가 연합 비영리 지원단체
사회적 삶 시민 사회 시장 조직들 국가

우리가 보았듯이, 지원단체들은 자신들이 속한 생태계의 공동의 이익에 복무한다. 이 단체들은 기반시설에 대한 요구를 책임지며 적절한 도메인들에 구속력 있는 규칙들을 부과할 수 있다. 이 단체들은 개인들 사이의 계약에 기반을 두지 않으며 상이한 이해관계자들로 구성된 자율적으로 다스려지는 제도들이다. 이 단체들은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국가를 미시적 수준에서 속사(速寫)로 찍은 사진에 해당한다.

이것을 거시적 수준에 적용하면 커먼즈 중심 사회에서 ‘파트너 국가’로 진화한 국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국가 당국이 커먼즈 기반 기여 체계들을 위한 기반시설들을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시민 사회에 의한 직접적 가치창출을 국가 영토의 규모에서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 국가 측의 행동을 촉진하는 것은 미래의 온전한 파트너 국가를 예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시민-커머너들과 그들의 사회운동은 기존의 국가형태를 파트너 국가형태로 전환시킬 것이다. 이 국가는 시민들의 개인적·집단적 자율을 인정할 것이다. 마치 시민권 운동, 참정권 운동, 노동 및 여성운동들이 그 동안 국가를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응하도록 강제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불평등한 계급 사회에 사는 한 국가에 기반을 둔 메커니즘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운동들―이 경우에는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으로의 전환에서 출현하는 운동들―은 국가에 압박을 행사할 것이다. 만일 이 사회운동들이 대세가 되면, 이것이 현재의 ‘시장 국가’(market state)에서 커먼즈 부문의 이익을 대변하는 ‘파트너 국가’로의 변형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이 국가와 커먼즈 기반 시민 사회가 인간의 평등의 재출현을 위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므로, 국가는 사유화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점차 “공통화”(commonified)될 것이며 철저하게 변형될 것이다.

이는 전부가 아니면 아예 포기하는 식의 제안이 아니며, 모든 종류의 규모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 사회의 거시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체제 차원의 변화는 결국에는 이러한 새로운 형세(configuration) 아래에서의 새로운 사회 조직화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전략은 기존의 형세 내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적(reformist)이지만, 혁명적이기도 하다. 현재의 추출적 체제가 어떤 시점에서는 새로운 형세로의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거칠 것이 틀림없다는 이해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혁명적 개혁’은 기존의 체제에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겠지만, 또한 그 체제를 변형할 조건을 창출하기도 한다. 기본 소득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기본 소득은 노동이 상품화될 필연성을 부술 수 있으며 커먼즈를 산출하는 자발적인 활동을 향하는 시간과 노력을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파트너 국가라는 우리의 비전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 경향에 기반을 둔다. 이 경향을 포착해 그려주기 위해서, 현재의 정치적 현실에서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논리가 어떻게 참신하고 실행 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하는 새로운 네트워크화된 정치운동들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어번 커먼즈의 발생

세계 전역의 진보적 도시들이 커머닝을 가능하게 하고 커머닝에 힘을 부여하고 있다. 이 ‘반란 도시들’(Rebel Cities)은 시민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지도하기보다는 커머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관련되는 일을 직접 관리하는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헨트(Ghent), 볼로냐,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벨로오리존테(Belo Horizonte), 나폴리, 몬트리올, 릴, 마드리드, 브리스틀 같은 도시들은 각 지역 맥락에서 적절한 많은 행동들 외에도, 투명성 높이기, 시민들이 참여하는 예산책정을 가능하게 하기, 사회적 돌봄 협동조합들의 창출을 촉진하기, 공터를 공동체 정원으로 바꾸기, 기술과 도구를 공유하는 프로그램들을 공동창출하기를 실행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이 주도하는 자치도시연합들(municipalist coalitions)일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744의 ‘어번 커먼즈의 발생’ 부분도 참조하라. 서로 겹치는 내용도 있다.)) 여러 자치도시연합들이 스페인의 읍들과 도시들에서 출현했으며 모든 주요 인구 중심지들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노력들을 다 합쳐서 보면 , 커먼즈 논리가 P2P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민주적·참여적 관계들과 결합되면 오늘날의 정치 장(場)에서 새로운 목적의식을 되살리고 불어넣을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목전의 과제는 출현하는 새로운 정치 운동을 현지의 동학(local dynamics)의 특징들을 보존하면서도 더 높은 복잡성의 수준―지역적(regional), 일국적, 초국적 수준―에서 발전시키는 데 있다.

[* 스페인의 자치도시연합들에 대한 사례연구는 주석에서 밝힌 다른 게시글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생략함.]

 

커먼즈 이행 :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거버넌스의 정치적 어휘를 구축하기((이 절의 내용도 http://commonstrans.net/?p=744의 ‘커먼즈 이행 :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거버넌스의 정치적 어휘를 구축하기’ 부분과 겹친다. 조금씩 다르게 쓴 부분들도 있는데, 이 다르게 쓰기 자체가 인식을 정밀하게 다듬으려는 노력의 표현이므로 이 점을 생각하면서도 비교하여 읽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물론 같은 원문을 다르게 번역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원문을 늘 똑같게 번역하라는 법은 없으므로 이 또한 번역자의 그때그때마다의 노력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커먼즈의 상상계는 정치적 과정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공동체들의 창조성과 참여에 관여함으로써 효과적인 정치 행동에 쓰일 수 있는 일체감을 양성할 수 있다. 커먼즈의 통합적 내러티브는 시장국가와 시장경제의 협소한 관료주의 외부에서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권유한다.

윤리적 시장들의 경우에서처럼, 커먼즈 이행을 정치 장에 적용하는 것은 세 구분되는 진보적 경향들의 최선의 실천들을 활용하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정치적 내러티브―개방성(해적당), 공정성(신좌파), 지속 가능성(녹색당)―의 창출을 수반한다. 우리 시대의 과제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구축하는 최적의 플랜은 이 세 경향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을 포함한다.

커먼즈는 본성상 포용적이기 때문에 정치에 적용되었을 때 해당 개인들과 공동체들에 의한 풀뿌리 수준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 새로운 내러티브는, 기존의 제도들만이 아니라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시민사회 조직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이미 존재하는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최선의 실천들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 실천들을 어떻게 확대하고 개선하여 지속적인 문화적 변화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몇몇 요점들을 제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