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팬데믹의 교훈: 주목할 만한 세 편의 글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Lessons from the Pandemic: Three Notable Essays” (2020. 8. 30) / http://www.bollier.org/blog/lessons-pandemic-three-notable-essay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




바우엔스,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 테제에 대한 비판



 

전도된 사회적 다윈주의로서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옮긴이] ‘enlivenment’에 대한 설명은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참조.))테제에 대한 비판

 

우리는 안드레아스 베버의 뛰어나고 재미있는 글 「살림: 자연, 문화, 정치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 Heinrich Boell Foundation, 2012)를 다음 게시글로 재출판할 것이다.

나는 위 텍스트의 내용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의 주체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세상에 관한 우리의 사유와 느낌-사유에서 생명 및 의식과 다시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그 책의 취지에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베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에 기고한 글, 특히 「낭비의 경제: 커먼즈의 생물학」(“The Economy of Wastefulness: The Biology of the Commons”)이 그 증거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수십억 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커먼즈 경제 즉 생물권(biosphere)이 있다. ···…나는 자연이 탁월한 커먼즈 패러다임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이, 압도적일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커먼즈 원칙에 따라 함께 살아왔다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주장은 한층 더 복잡하다. 나는 자연 내부에서의 생태학적인 관계들도 커먼즈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자연과정을 경제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 이미 문제이지만, 어떻게 ‘경제학’을 정의하는지에 따라 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커먼즈 경제’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확장인 것 같다. 오스트롬 학파와 그 이후 커먼즈 운동은 커먼즈를 항상 그 사용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공유재(a common pool resource)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그 거버넌스의 민주적인 성격(그것이 아무리 넓게 정의되더라도)을 강조한다. (공유 자원의 독재적 관리는 사실상 사용자들을 수탈할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오픈 액세스 자원들은 커먼즈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즉 “생물권”에 그러한 거버넌스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대담한 가설이며 자연 속의 사용자들이 실제로 그런 민주적인 협력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만물의 국회’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베버는 우리의 자연관이 빅토리아 영국의 인간관에서 유래되었다는, 바꾸어 말해서 문화의 투사(投射)라는 매우 가치 있는 주장을 한다.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빅토리아 산업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그러한 이론 중 일부를 변경해서 자연 변화와 발전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에 적용했다. 그 여파로 “생존투쟁,” “경쟁,” “성장”, “최적화” 같은 개념들이 암암리에 자기이해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 즉 사회는 생물학적•과학기술적•사회적 진보가 개인 이기심의 총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경쟁에서 환경에 적합한 종들(강력한 기업들)은 틈새(시장)를 개척하고 그들의 생존율(수익)을 증가시키는 데 반하여 약한(덜 효율적인) 종들은 멸종한다(파산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경제와 자연의 형이상학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기보다 사회가 자신의 고유한 전제들에 관해 가지는 견해이다. ······우리는 생물학과 경제학의 이런 연합을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이데올로기가 다시 사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관점에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베버의 판단에 충분히 동의한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우리의 사회 조직의 성격에 대하여 이런 결론들을 도출한다.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황야를 배제했다. 즉 자기성취적이고 그 어떤 존재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으며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종획되지 않은 자연을 배제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 가운데 경쟁과 최적화라는 원칙을 넘어가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일반적인 정당성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멋진 환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생존투쟁에서 작동하는 심층적인 힘들에 대한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잘 맞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협력은 기본적으로 자원경쟁에서의 전략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자연 그 자체는 커먼즈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임에서는 독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픈 소스이다. 유기체 영역의 본질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모든 것에 열려있는 유전 정보의 소스코드이다. ···…죽음에 이른 모든 개체는, 햇빛이라는 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체들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선물로서 자신을 내놓는다.

(······)

생태계 커먼즈에서 수많은 별개의 개체들과 서로 다른 종들은 서로 다양한 관계—경쟁과 협동, 협력과 포식(捕食), 생산성과 파괴—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들은 한 가지 상위법을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촉진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어로서 “커먼즈”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세계를 묶어주는 요소를 나타낸다. 자연을 그 진정한 질의 측면에서 커먼즈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사회적 삶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삶에서—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연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 생산적인 관계를 이루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커먼즈 경제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

  따라서 커먼즈 개념은 자연과 사회/문화 사이에 있다고 상정되는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통합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할을 없앤다.

나의 이의제기는, 이 설명에는 빠진 것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전도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설명에는 창발(emergence)이 빠져있다. 즉 복잡성(complexity)을 가진 새로운 층들이 새로운 실재와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빠져있다. 삶(생명)은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고, 의식도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며 인간 문화 또한 그렇게 한다. 각각의 창발적인 층은 비록 그 층보다 앞서는 어떤 층에 함입되어 있고 그 선행하는 층의 제약을 받아야만 할지라도, 혁신과 ‘새로운 자유’(예컨대 동물은 자신의 의지로 이동할 수 있지만 식물은 이동할 수 없다)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는 인간문화와 그 선택들은 자연법칙에서 파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적인 것에 함입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연 전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안드레아스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연은 “경쟁과 협동이고 협력과 포식”이다. 인간사회는 이런 충동들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베버가 커먼즈로 보는 자연 속의 포식관계가 인간의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충동을 알고 인식해야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충동을 조절한다. 인간의 영역 외부에서 자연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커먼즈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커먼즈는 인간의 법이다. 커먼즈는 사회와 자원이 여러 선택들 사이에서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비전이다. 자연에는 소유(재산) 개념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소유(재산) 개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개념을 적용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리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연이 우리에게 포식이 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예를 들어, 약탈적인 충동을 관리하고 승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함입시킬 수 있는 만큼은—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커먼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된 자연주의, 즉 반(反)다윈주의이다. 안드레아스 베버 입장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베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최근에 인간이 발견한 것, 즉 자연 또한 협동체계라는 것과 우리가 자원을 커먼즈로서, ‘자연의 특성’으로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에 투사한 다음 “하하, 자연은 커먼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커먼즈임에 틀림없다”라고 결론 내린다. 사실 자연과 사회 둘 다 다양하고 우리는 자연과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하여 민주적인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은 계몽의 기획이었고 안드레아스 베버가 진술하듯이 일면적이었으며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살림’은 필요한 보완요소이다. 하지만 전도된 투사 메커니즘을 실행하는 ‘살림’은 그런 요소가 아니다.

우리의 ‘살림’은 자연의 이상화, 자연 신비주의, 인간 중심적 투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안드레아스에게 미안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커먼즈가 아니며 오직 인간만이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도입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