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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있는 버섯



 

세상 끝에 있는 버섯

 

더 공들일 필요가 없는, 무너져 내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생존과 협동의 동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관계의 모든 측면과 자연세계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서 삶은 어떻게 존속하고 번성할 수 있는가?

 

인류학자 안나 칭에게 이에 대한 대답은 북미에서 주로 자라지만 일본에서 진미로 높이 평가되는 겸손한 송이버섯의 신기한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버섯들이 수확·분류·수송되어 팔리는 사회적·상업적 시스템―이는 그 과정에서 선물(膳物) 경제와 전지구적 상품망을 혼합하고 있다―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교수인 칭이 『세상 끝에 있는 버섯 ― 자본주의의 폐허에서의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에서 바로 이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적 파괴와 다종(多種) 풍경 내에서의 협동적 생존―지구에서 삶을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것―사이의 관계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라고 소개된다. 평범한 버섯의 이례적인 생태적 삶과 상업적 여정을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심층적인 동학을 탐구하는 것—이는 훌륭한 구상이다.

 

이 책은 매우 놀라운 민족지학(誌學)이다. 송이버섯은 이 버섯 종이 어떻게 스스로를 위한 생존전략을 짜는가―이 경우에는 나무들 및 기타 식물들·미생물들과의 공생관계로 진입하는 것이 전략이다―만을 보여주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이 버섯은 다양한 맥락에서 그것을 취하고 훔치고 선물로 주거나 판매하는 사람들과 일종의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왜 양식으로는 키울 수 없는 야생 버섯인 송이버섯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일까? 칭 교수는 이 버섯을 거의 폐허가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인간이 맞이하는 운명의 대리물로 보기 때문이다. 이 강인하고 꾀바른 버섯은 파열된 생태계나 폐허가 된 풍경들에서 자라는 경향을 가진다. 마치 세계 전역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현재 세계 전체를 장악하고 있고 약탈적이기 일쑤인 자본주의 체제 및 황폐화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북방의 풍경들에서 자라는 숨은 버섯인 송이버섯은 황폐한 장소들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돕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 버섯들은 불안정성을 다루는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매우 희한하게도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미국 북서부의 태평양 연안 지방에서 버섯을 따는 사람들은 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온 피난민들, 미국 퇴역 군인들, 떠돌이 빈민들이다. 이들은 정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연의 열린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더 좋아해서 정규 직업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버섯 따는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일한다”라고 칭은 쓰고 있다. “이들은 회사에 고용되어 있지 않다. 임금도 없고 혜택도 없다. 버섯 따는 사람들은 단지 발견한 버섯들을 판매할 뿐이다. 버섯이 나오지 않는 해에는 이들이 헛되이 비용을 들일 뿐이다. 판매용 야생버섯 채취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한 생계의 표본적 사례이다.” 가령 오리건에서 수확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 이 버섯들은 도매상들에게 팔리고 이들이 재빨리 버섯들을 분류업자들에게 수송하면 분류업자들이 그것들을 분류하여 일본으로 수출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일본의 거대한 시장에서 고급 고객들이 열심히 이 버섯들을 사는데, 보통 선물로 주기 위해서이다.

 

칭은 미래를 이해하는 데 주된 축이 되는 경향이 있는, ‘진보’에 대한 통상적인 서사들을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맑스주의적인 것이든 모두 거부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를 적절히 분석하는 가운데 “많은 종들이 때로는 조화도 정복도 없이 함께 사는, 교란에 기반을 둔 생태”의 자본주의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버섯무역을 연구하는 것은 계몽적이다. 투자자들이 오늘날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간과 자연을 “마치 삶의 얽힘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취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외를 통해 인간과 사물들은 유동자산이 된다. 인간과 사물은 그 삶의 세계로부터 빼내어져 거리(距離)를 무시하는 수송을 통해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삶의 세계에 속하는 다른 자산과 교환될 수 있다.” 칭의 주된 메시지는, ‘진보 내러티브’ 전체가 불안정한 생존이 이루어지는 패치들(patchs)(([옮긴이] 패치(patch)는 원래 하나의 생태계 내의 이질적인 장소들을 가리킨다. 칭은 이 말을 그 생산물이 하나의 통합된 물류로 끌려 들어오게 되는 분산된 지역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환해서 사용하고 있다.))의 어지러운 집합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송이버섯이 이용하는 삶전략이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수집재화축적(salvage accumulation)을 필요로 한다.(([옮긴이] ‘salvage’는 해난·화재 등에서 재화를 건져내기 혹은 그렇게 건져낸 재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폐품의 회수나 회수되는 폐품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과거에 고물상들이나 넝마주이가 하던 일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salvage’가 의미하는 것은 난파선의 재화나 폐품 같은 협소한 것이 아니다. 자본의 내·외부에 존재하는 재화를 여러 ‘패치들’을 가로질러 수집하는 것, 혹은 그러한 재화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한 패치에서 다른 패치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현대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칭은 자본주의에 대한 포괄적이고 단일한 비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세계는 온통 패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즉 얽힌 삶의 방식들의 개방된 배치들의 모자이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점은 자본주의 성장 패러다임에 의해 가려진다고 한다. 따라서 칭은 (버섯에게도 인간에게도) 그 모든 개별성과 덧없음의 조건에서 불안정성(precarity)을 띠는 현실을 제시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기계의 대체 가능한 부품들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특이하며 즉흥적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비판들이 인정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도 분명 이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역적이고 독특한 것을 계속되는 자본축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투입물로 “옮겨놓는” 것이다.

 

칭은 “공급망이 대륙들만이 아니라 각종 표준들을 가로질러 뱀처럼 앞뒤로 꿈틀거리는” 오늘날의 경제는 그 어떤 단일한 합리성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공급망은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식들에 의존한다. 마치 페이스북이 사회적 공유에 의존하고 에어비앤비와 우버가 집과 차를 시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람들의 사생활을 식민화했듯이 말이다. 칭에게 “자본주의적 형식들과 비자본주의적 형식들은 주변자본주의적(pericapitalist) 공간들(([옮긴이] pericapitalist spaces : 칭이 만든 용어로써 자본주의의 안과 바깥에 동시에 속해있는 공간들을 가리킨다.))에서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혼탁한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더 나아간 투자를 위해 자산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칭은 묻는다. 짧은 대답은, 자본축적이 “수집재화축적”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문명과 진보는 폭력을 통해 획득되는 가치에의 접근을 은폐하고 돌려말하기 위한 메커니즘들임이 드러났다. 고전적인 재화수집이다. 오늘날의 전지구적 공급망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강제된 노동, 위험한 작업장, 유독한 대체 재료, 그리고 무책임한 환경절단과 환경덤핑(environmental gouging and dumping)이다.

 

『세상 끝에 있는 버섯』은 메마른 사회과학 논문이 아니다. 그 시적인 표현과 사회현실의 섬세한 묘사로 인해 이 책은 종종 소설처럼 읽힌다. 깔끔한 결론도 없으며 그저 일련의 삽화들, 분석들, 관찰들이다. 궁극적인 요점은 새로운 거대 서사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대립물로서 경직되게 분할하는 사고방식을 넘어간다면,

 

모든 피조물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인간들은 협소하게 상상된 합리성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밤의 속삭임에 속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은 진실한 동시에 우화적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런 엉망진창의 상태에서도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고 어떻게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세상 끝에 있는 버섯』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불안정한 버섯채취자들의 생존기술을 서술한다면—이는 창의력, 헌신, 당당한 자율의 이야기이다—그 다음 단계는 더 나아가 ‘어떻게 불안정한 커머너들이 커먼즈를 통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것이다. 칭이 맞다. 일단 시장/진보 서사가 표지 이야기(은폐하는 덮개)임이 폭로되고 나면 일련의 다른 서사들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