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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기


  • 저자  :  제이콥 스트링어(Jacob Stringer)
  • 원문 : “Own Everything! Together” (2017.10.24)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옮긴이 : 정백수
  • 글쓴이 제이콥 스트링어는 주택운동 활동가이고 협동조합운동가이며 비상임 기자이다. 자신의 집단 조직화 경험으로 인해 그는 조직화 형태와 정치적 내러티브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곳에 가면 그의 글들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기

 

우리는 격렬한 정치적 동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페인에서 미국까지 허튼 짓에 열심인 정부들을 보면, 지금이 우리에게 닥친 체계 차원의 실패(system failures, 구조적 실패)의 증거를 직시하기에 좋은 때인 듯이 보인다. 부유한 나라들에서 수백만 명이 푸드뱅크에 간다거나, 아니면 어엿한 주택을 마련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체계 차원의 실패를 드러낸다. 정신병이 유행병처럼 도는 것이 체계 차원의 실패를 드러낸다. 기후변화를 다루지 못하는 무능력이 체계 차원의 실패를 드러낸다. 정부와 정부 기관들에 대한 항존하는 분노―이는 투표장소로 유도되도록 되어 있지만 대체로 효과를 보지 못한다―가 체계 차원의 실패를 드러낸다.

 

왜 체계들이 실패하고 있는가?

눈에 띄는 실패는 우리의 문제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자들이 대규모 사회를, 즉 ‘우리’를 관리하는 데 있다. 이는 너무 커서 필요에 따라 변화에 적응할 능력이 없는 관리체제이다. 우리가 ‘무겁게’ 관리되는 사회에서 산다는 점은 충분할 정도로 자주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로 의미하는 바를 즉각 이해한다. 관리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는 잘 관리되고 때로는 잘 관리되지 못한다. 그런데 특정의 시점에서 전자의 상태가 후자의 상태에 자리를 내주게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일종의 통제력 상실감이 우리를 사로잡게 된다. 우리는 통제력을 되찾아야겠다고 느끼게 된다. 어떻게 되찾을지, 누가 표적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지도층이나 정당들이 우리에게 힘을 되돌려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체계들에서 자본이 인간을 발전과정의 파편들인 양 도외시하면서 우리의 도시들을, 우리의 삶 자체를 재편하는 우세한 힘이 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 해결책으로 우리는 늘 더 나은 관리를 제시받는다. 우리는 더 나은 관리자들을 찾아서 계속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우발적 아나키스트>(Accidental Anarchist)의 칸 로스(Carne Ross)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향식으로는 성공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복잡한 체계에서 살고 있다. 관리자들에게 잘못된 일을 한다고 혹은 잘못된 관리자라고 혹은 (우리를 둘러싼 이 거대하고 역동적인 네트워크들에서)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그런 거대한 체계에서는 의도가 항상 상실된다. 부를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이전하는 관리자들도 있고 그 반대를 시도하는 관리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관리자는 어떤 시점에서는 실패하는데, 종종은 그들이 이미 한 좋은 일을 치명적으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새로운 방향으로 사고하기 시작할 때인지도 모른다. 관리되기를 청하기를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관리로부터 탈출하기

이는 사고방식의 심대한 전환과 새로운 제도들을 필요로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이전의 정치적 주장들은 민중은 관리되어야 한다고 전제했다.(([옮긴이] “사람들은 노동할 때 우두머리가 필요하게끔 훈련받기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도 우두머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주장을 떠올려보라. “현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은 (…) 예속, 통제, ‘관리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원주: V. I. Lenin, State and Revolution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 p. 43.] 오늘날의 삶정치적 생산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노동할 때 우두머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함께 소통하고 협력하는 타인들로 구성된 확장적 망을 필요로 한다. 우두머리는 점점 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장애물이 될 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공통체』(사월의 책), 482쪽.)) 4, 5년마다 이루어지는 선거들이 관리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자치의 형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관리자들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4, 5년마다 이루어지는 선거만으로 우리가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불합리성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당신의 집이나 차의 소유와 관련해서만 한 해에 수십 번의, 심지어는 수백 번의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당신의 정부를 소유하는 데 이보다 더 적은 횟수의 결정이 필요할 수 있겠는가?

왜 내가 소유(권)(ownership)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는가? ‘소유’는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소유권을 느끼도록’ 장려받는 경우처럼 모호하고도 눈 속이는 용법으로 사용되지,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반적인 언어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한때 소유에 대해 말했으나, 사적 소유와 국가의 중앙집중적 소유 사이의 이분법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 이분법을 잡아서 사적 소유를, 혹은 때로는 제멋대로인 가짜로 자유로운 시장에서 보이는, 둘이 혼합된 형태들을 선전했다. 소유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치열한 토론을 오랫동안 가져보지 않은 듯이 느껴진다. 이런 토론을 통해 새로운 제도들이 어떻게 우리를 현재의 체계 차원의 실패 너머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할 수도 있다.(([옮긴이] 원래 소유는 생산(노동)과 분리되지 않았었다. “소유란 원래···노동하는 (생산하는, 혹은 재생산하는) 주체가 그 자신의 것인 생산․재생산 조건과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런데 소유와 노동이 분리되면서 먼저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가 들어선다. (자본주의 이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내 노동의 산물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다시 타인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 즉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바뀐다(‘내 노동의 산물 가운데 임금을 제외한 부분은 자본가의 것이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자들, 즉 우리가 지금 경제학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 사적 소유의 두 형태를 혼동한다고 비판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이 글의 저자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가 기반을 둔 국가 소유는 그것이 생산자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한 사적 소유의 연장에 불과하다. 자본가 집단의 소유가 관료 집단의 소유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소유라는 말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면, 통제력이 그 핵심이며 이 통제력이 바로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과 관련하여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소유권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사기이며, 통제력을 가질 때 비로소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다. 논리적 결론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능한 한 많은 부분에 대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이 결론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 르페브르(Lefebvre)와 하비(Harvey)가 말한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실제적 의미를 파보면 그것은 ‘도시를 소유할 권리’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공적 공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택, 에너지원, 데이터 기반시설, 식량공급, 그리고 물론 일터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비는 말한다.

 

함께 소유하기의 문화

이는 어렵게 들린다. 사실 어렵다. 우리의 세상을 소유하는 것은 그것을 관리하는 문제들 일부를 공유하는 것이리라. 우리의 세상은 매우 크다. 너무 많은 것이 있고 우리의 수도 너무 많다. 그런데 관리는 항상 하향적이며 체계들 전반을 통제하는 데 관여하지만, 이와 달리 소유권이라는 틀은 다양한 규모에서 작동한다.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령 대기의 소유가 관련된 경우)에 우리는 모두 참여하게 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세부에 집중해야 하는 경우에는 훨씬 더 지역화된 소유권 형태를 구상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발언권을 가진다. 이런 식이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소유하는 것들은 우리 개인들 각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적으로 우리 개인들 각각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옮긴이] 일반적으로 법적 권리에 따르는 ‘소유’와 실제로 물건을 사용하는 ‘점유’는 개념상 구분이 되지만, 여기서의 저자처럼 ‘소유’를 ‘통제(력)’의 관점에서 보면, 양자의 관계는 두 개의 통제력 사이의 관계가 된다. 푸꼬가 물신화된 권력(Power)―가령 국가―을 ‘힘들의 관계’(relation of forces)로 해체시킨 것을 생각해보라.))

하나의 출발점은 인터넷이 가능하게 하는 협동에서 그리고 복제에 드는 한계비용이 거의 영(零)에 가까운 온라인 조건에서 생겨난 디지털 커먼즈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진정한 디지털 커먼즈가 분산시키는 것은 통제력이다. 이 커먼즈들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개인의 혹은 기업의 소유권을 탈중심화하는 메커니즘들이다. 위키미디어(Wikimedia) 재단은 편집에 대한 통제와 함께 문자 그대로 소유권을 개방한다. 이 재단이 이 둘을 다 한다는 사실이 왜 위키피디아가 작동하며 왜 우리가 위키피디아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미래의 제도들이 어떨지에 대한 실마리들을 제공한다.

또 하나의 출발점은, 만일 어떤 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상식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별로 급진적인 생각이 아니다.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적 소유도 계획의 법칙이 부과되면 굽혀 양보하지 않는가. ‘양보’는 나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에 행하는 것이 공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 그래서 이 가장 사적인 소유권 형태에 대해서 일정 수준의 공적 통제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영국,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계획의 규칙이 무너진 곳에서는 지방 정부들과 계획 시스템들이 놀랄 정도로 비민주적이다. 그러나 그 심층 원칙은 확립되어 있다. 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들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환경에 대해 일정 종류의 집단적·민주적 통제를 가져야 하며 이는 개인적인 양태와 민주적인 양태가 혼합된 형태를 띨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소유권과 민주주의는 긴밀하게 겹친다. 함께 소유하기는 결정의 주체가 바로 우리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함께 결정하게 되어있는 곳에 민주주의를 발생시키는 과정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자는 외침은 민주적 사회에 대한 요구이다.

복잡한 소유권 주장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소유권의 혼합이 가능하다는 생각, 상이한 유형의 소유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상이한 규모의 집단들이 서로 중첩되는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모두 사적인 것과 국가[공적인 것―옮긴이]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것으로 구상된 것들이다. 최근 영국 노동당의 의뢰를 받은 보고서 「대안적 소유 모델들」(“Alternative Models of Ownership”)은 세 가지 형태의 소유를 제안한다. 노동자 협동조합, 도시 및 공동체 소유, 민주적 책임이 증가된 국가 소유. 그런데 많은 이들에게 오늘날 새로운 커먼즈를 세우도록 영감을 준 옛날의 커먼즈는 종종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매우 복잡한 소유권과 사용 구조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전(全)범위 소유권(full spectrum ownership)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구축을, 즉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우리에게 부여하도록 고안된 무한히 다양한 소유 유형들과 서로 중첩되는 소유권 형태들의 구축을 목표로 해야 한다.

새로운 디지털 커먼즈로의 연결은 단지 영감의 차원의 것이 아니다. 새로 출현하는 테크놀로지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토론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고 있다. 대만과 스페인의 급진적 도시들은 현재 입법과정에의 대중의 열렬한 참여를 실험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이 뒤를 따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능력 또한, 누가 무엇에서 발언권을 가질 것인가를 가려내고 소유권 다발을 가장 최근의 것으로 유지하여 특정의 이슈에 의해 실제로 영향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데 열쇠가 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향하여

도시를 (그리고 모든 것을) 소유할 권리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의 실제 사례를 보기 위해 주택문제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사적으로 소유되는 집 대 공적으로 소유되는 집’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개인이 소유권을 갖지만 주위의 공동체도 (재판매 가격이나 임대를 규제하기 위해서) 권리를 갖는 제도들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러면 전체 도시 혹은 나라가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들(community land trusts)의 네트워크처럼 될 것이다. 특권의 섬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역적(regional)·일국적 소유체들도 국지적 장소에서 일정한 권리들을 행사할 것이다. 이 또한 계획 시스템이 현재 작동하는 방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않지 않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관료적 지방 당국을 닦달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하는 중앙 정부보다는 거리나 동네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수준에 철저하게 민주적인 단체들이 수립되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 소유하기의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는 환상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그 동안 학교나 일터에서 배운 것은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제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얻는 것을 생각해보라. 함께 소유하기는 함께 사는 것이며, 관리가 우리에게 부여한 원자화된 사회를 버리는 것이고, 돌봄이 더 왕성하고 고립시키기가 덜한 사회를 창출하는 것이다. 더 공생공락(共生共樂)적인 세상이 우리가 통제력을 되찾을 때 부산물로서 얻어지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함께 소유하기 문화가 낳을  잠재적으로 최고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가 아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공히 형성되고 있다. 고맙게도 우리는 전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고도 이 방대한 기획에 착수할 수 있다. 협동조합들의 세계는 세상을 함께 운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상적인 훈련장이 되어왔다. 협동조합의 급진적 잠재력은, 자본의 지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제하는 세상에 대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데 있다. 협동조합들은 관계에 의존하는 소유에 의해 결속된 살기 좋은 체계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급진적인 운동가들도 함께 소유하기의 문화를 주장하는 것을 활동의 내용으로 삼기 시작했다. 나는 런던에서 임차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조직 구성에 관여하고 있다.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소유하기의 문화를 두 가지 방식으로 활동 내용 안에 포함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 우리는 계획된 임대인조합 자체가 그 조합이 돕는 대상인 사람들에 의해서 소유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진정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적 구조에 의해 보증되는데, 구성원들이 상호지원 네트워크 내에서 자신들의 싸움을 개시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우리는 누가 재산을 통제하는가라는 핵심 이슈를 회피하지 않는다. 임차인들이 통제력을 더 갖고 지주들은 덜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이는 집이라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시키는 일에 해당한다. 그래서 임차인들이 소유하는 임차인조합은 통제력의 재분배, 소유권의 재분배를 집단적으로 성취하는 길로 간주될 수 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함께 소유하기를 각종 운동들에서 지역의 경제활동과 정당 건설을 포함하는 우리의 기획들에 엮어 넣을 수 있다. 지방 정부 수준에서 몇몇 급진적인 도시들의 사례가 있다. 그러나 우리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부를 향한 전진은 고통스럽도록 느리다. 만일 우리가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한 듯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기술 프로젝트들에서, 식량재배 프로젝트들에서, 운동 플랫폼들에서 우리 자신을 함께 소유하는 사람들로서 인식하고 우리의 세상에 대해 전범위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자신들이 지금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기 시작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함께 일하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소유하기의 문화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엮어 넣는 것은 우리가 이웃들과의 그리고 우리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더 많은 시간을 지출함을, 상관이나 부하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의 사람들로서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지출함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는 세상을 향한 여정은 긴 것이 될 수밖에 없지만, 더 통제할 수 있고 더 공생공락적인 세상에서 살기 시작하기 위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