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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래플(Paul Krafel)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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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플은 유명한 학자나 이론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다. 미국의 어느 시골의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사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부른다. ‘삶의 황금서'(golden Book of Life)를 자연에서 읽어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는 어느 날 야간 하이킹 도중, 잠깐 잠이 들어 꾼 꿈에서 이 ‘삶의 황금서’를 건네받는다.

이 책에는 삶의 모든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건네졌을 때 그것은 이 실제성(realness)의 아우라로 황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책이었다. 나는 경이로워하며 이 무거운 책을 받아들었고 축복받았다는 느낌으로 책을 열었다. 거기에, 바로 거기에 우주의 모든 지혜가, <삶>(Life)의 모든 대답들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나는 책장들을 넘기며 책장에 표시된 것들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계시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좌절감을 주리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실제로 존재해, 대답이 거기 있어서 읽으면 되지만 읽을 수 없을 뿐이야’라는 느낌이었다. 실제성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것을 못 앍는 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 그의 삶은 이 책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자연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표행(飄行)]를 좋아하지만, 이는 인간 사회와는 다른 곳으로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으로서의 자연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삶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아니 모든 생명체들이 협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들의 총체를 그는 <더 커먼즈>(The Commons)라고 부른다.

이 모든 일의 결과를 나는 <더 커먼즈>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구 시스템을 계속적으로 상승시켜서 더 많은 삶을 뒷받침할 수 있게 하는 <삶>의 구조들과 기능들 전부이다. 커먼즈는 나의 글레이셔베이 물음[“육지에 출현한 생명이 육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인용자]에 대한 대답의 핵심이다. <삶>의 출현이 지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삶>은 흐름의 비율을 바꾸는 작업을 해서 산소가 들어있는 대기, 담수, 비옥한 토양, 숲이 축적되도록 했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해수면, 대기화학, 표층토양, 지하수, 숲, 해변, 영구 동토층―은 모두 상위수준의 역동적 평형이며, 심층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유입과 유출의 상대적 균형들의 표현이다. 바로 이 상대적 균형을 생명이 수억 년에 걸쳐서 변화시켜온 것이다. <더 커먼즈>는 현재 ··· 화성의 대기와는 달리 열역학적 평형보다 상위에 있는, 생명에 의해 창출된 모든 것들이다.

이렇게 그의 지혜의 정점에 <더 커먼즈>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크래플이 자기 나름대로 깨달은 바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는 문장의 맨 앞이 아닌데도 ‘The Commons’라고 ‘t’를 대문자로 쓰는 경향이 있다. ‘c’는 물론 항상 대문자이다.)

내가 크래플을 알게 된 것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주목의 맥락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블록체인이 가진 P2P 가능성에 주목을 하다가 홀로체인(Holochain)을 알게 되었고 홀로체인에 관한 슈티(Matthew Schutti, 홀로체인 홍보이사[Director of Communications])의 비디오 두 개(Holochain: Interview with Matthew Schutte, Director of Communications (HOT Cryptocurrency I부II부)를 보게 되었다. 이 비디오의 뒷부분에서 슈티는 크래플의 책 Seeing Nature와 기술적으로 결코 뛰어나게 구현되지 않은 비디오 Upward Spiral을 소개했는데 나는 이 비디오를 찾아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크래플의 홈페이지(http://krafel.info)로 가서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으며 당장 그의 책 Seeing Nature를 주문했고 거기 html파일로 올려져 있는 웹북 Roaming Upward를 즉시 읽기 시작했다. (백수의 좋은 점이 이러한 ‘즉시’가 매우 자주 가능하다는 데 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공유의 여러 방식 가운데 즉시 가능한 것이 그 핵심 내용을 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크래플의 지혜가 소개에 값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비극적 상황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희망’의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비록 시스템 이론, 생태과학을 말하고 열역학법칙을 말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심오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매우 알기 쉽고 직관적인 전달방식으로서 기능한다. 실제로 그의 지혜는 10여 개의 요결로 압축할 수도 있는데(가령, ‘위치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삶은 표행이다’ 등), 이는 푸꼬가 말년에 주목했던 견유주의(Cynicism)가 모든 군더더기 교리들은 다 빼버리고 오직 삶의 실천에 직결되는 요결만으로 그 철학을 압축한 것과 비슷하다. (크래플에게 견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따라서 트래플의 지혜를 소개한다면 이는 다중이 자신의 정치인 삶정치를 스스로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래플의 지혜는 말하자면 삶정치론과 협동 가능한 사유의 표현인 것이다.

(홀로체인에 대한 글이 이 블로그에 한, 두 개 올라 있기는 한데 블록체인과 제대로 비교한 것은 아직 없다. 사실 여기에 대해 준비한 꼭지가 두. 세 개 있는데, 바빠서 아직 완성하여 올리지 못했다.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홀로체인이 어떻게 블록체인과 같고 다르며, 왜 우리가 홀로체인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글―번역이든 정리든―을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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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플은 남들 사는 대로 따라 살다가 보니 대학 졸업 전 몇 주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 장 “The Next Morning”에서 현재 자신이 60대 후반이라고 한다. 책의 1장을 보면 대학 졸업한 해 혹은 그 다음 해가 선거가 있던 1972년이라고 하니 아마 2019년 현재 거의 70이 다 되었을 듯하다.) 그는 당시 닉슨을 낙선시켜 월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맥거번(George McGovern)을 도왔는데, 선거에서 닉슨이 당선하고 게다가 실연까지 겹쳐서 의기소침한 상황이었다. 이러던 그에게 전환의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한 마리 새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혼합 사료 판매)을 도와서 트럭으로 사료를 여기저기 운반해주었다. 그는 운반하고 나서 오면서 자신이 트럭을 너무 빨리 몰아서 ‘내가 혹시 자살 충동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다. 딱 하나, 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던, 왈룰라(Wallula) 절벽[워싱턴 주의 왈라왈라Walla Walla 카운티 소재]으로의 하이킹이었다. (그는 그 근처를 수백 번 지나다녔다고 한다.) 그는 얼마 후에 이 하이킹을 실행한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결심에서이다. 그리고 절벽의 암붕(ledge)에 배열해서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새들을 보게 된다.

나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 고개를 가장자리 너머로 구부렸다. 곧 새들 각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깝게 왔다. 희한한 작은 새들―머리는 회색이고 깃털이 갈색인, 그러나 날개를 파닥거릴 때에는···분홍색? 나는 새들이 파닥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되자 점점 더 작은 지역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때 새들 가운데 하나가 겨우 3피트 정도 아래에 착지했다. 몇 인치 안 되는 그 새의 길이와 그 암붕에 나의 의식이 집중되었다. 분홍색 속깃털의 가장자리들이 빠끔 보였다. 새는 머리를 한 쪽으로 기울이고 한 쪽 눈으로 아래를 훑어보며 바람에 날린 씨앗들을 찾고 있었고 다른 쪽 눈으로는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아마 나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는 날개를 완전히 접고는 암붕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에 응하여 내 뱃속에서도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 새와 잠깐 동안 연결된 이 경험으로 인해 크래플은 우울증이 사라졌으며, Birds of North America란 책을 사서 자기가 본 새가 어떤 새인지 알아낸다. 그 새는 ‘rosy finch’였다. 한영사전에 보면 ‘갈색양진이’라고 되어있는데, 한국과는 환경이 다른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한국의 갈색양진이와 똑같지는 않을 수 있다.

이제 크래플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바로 ‘새 관찰’(이것을 영어로 ‘bird watching’이라고 하고 ‘birding’이라고도 한다)이다. (새 관찰에 대해서는 잭 블랙 주연의 영화 The Big Year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삶>의 황금서’도 새를 관찰하고 다니다가 꾼 꿈에서 건네받은 것이다.

새를 관찰하러 다니면서 삶에 대한 크래플의 믿음은 점점 확고해진다. 다음은 새를 관찰하러 다닌 던 중 크래플이 그 갈색양진이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놀라운 몇 개월 동안에 나는 종종 왈룰라 협곡의 저 갈색양진이를 생각해보곤 했다. 저 새가 나의 삶을 바꾸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저 새가 삶에 대한 믿음처럼 보이는 것을 순간적으로 계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애초에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그 새는 그저 날개를 접고 그 암붕을 폴짝 뛰어내렸다.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의 배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 새의 몰두(its commitment)의 무심한 완벽함에 반응하여 내가 붙들고 매달려 있던 어떤 암붕을 놓아버리고 뒤따랐던 것이다. 진공으로 떨어질 때 내가 이전에는 펴보지 못했던 날개가 스쳐가는 대기에 의해 펴지고 나의 풋내기 정신이 비상했다.

이 설명에 동원된 단어들은 단어들과는 무관한 어떤 것을 설명하느라고 여러 달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새는 머리에 와닿은 새가 아니라 배에 와닿은 새였던 것이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우리의 문화에서는 거론되지조차 않는 나의 핵심 내의 어떤 강력한 부분을 움직였고 나의 삶은 바뀌었다. 이것이 내가 살기 시작한 세상이다. 새 한 마리의 낙하로도 바뀔 수 있는 세상.

크래플은 ‘새 관찰’을 하는 동안 가령 새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를 줄 아는 노인 같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점점 깊어지는 측면이다. 새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연과의 기운의 교류 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유콘 지역에 갔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거기서 북극 여름의 놀라운 햇빛에 일광욕을 하며 며칠 동안 죽치고 있었다. 햇빛. 햇빛, 햇빛은 정신과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햇빛 속에서 나는 무언가 냐의 눈과 정신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계속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이전에는 그렇게 순수한 형태로 경험한 적이 없는 어떤 것, 내가 받은 교육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는 그저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 앉아있는데 이렇게 강렬하고, 이렇게 흡족할(this enough) 수 있다는 점에 놀라워한다. 이렇듯 크래플은 자연에서 직접 배우기 시작한다. 데날리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에 머물 때 삼림관리원(/레인저)이 나무에 난 표시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래플은 이 이야기는 책에서 읽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책은 우리에게 그것이 없으면 간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어휘’ 가운데 일부를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 이야기 자체는 그 장소에 거한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직접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크래플은 이어서 세상이 그저 조각들이 아니라 그 조각들이 서로 어울려 논리적 이야기를 이루며 이는 패턴을 찾음으로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 대한 지혜의 일부와 그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며, 예의 ‘<삶>의 황금서’는 바로 이렇게 직접적 조우를 통해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이 경험으로 인해 크래플은 디날리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의 “a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가 되고 싶어 하게 되고 얼마 후에 실제로 채용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