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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관계


  • 저자  :  Antonio Negri, Carlo Vercellone
  • 원문 : “The Capital-Labour Relation in Cognitive Capitalism”(2007)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Carlo_Vercellone/publication/23530684_Il_rapporto_capitalelavoro_nel_capitalismo_cognitivo/links/55f2d64808ae1d9803921c27/Il-rapporto-capitale-lavoro-nel-capitalismo-cognitivo.pdf?origin=publication_detail )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운데 자본-노동 관계는 발본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 이 변형은 생산양식, 계급구성, 소득의 임금, 지대, 이윤으로 분배의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①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르는 과정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상기해보고 ② 현재의 노동을 자본-노동 관계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형론적 요소들을 분석한 다음 ③ 지대(자산소득)의 점증하는 중심적 역할이 왜 전통적인 적대, 즉 이윤과 임금 사이의 대립에 토대를 둔 적대의 조건들을 낡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대중노동자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형은 그람시가 1930년대에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서술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그러나 그에 비견할 중요성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전환점의 기원과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시기에 포디즘적 성장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 논리의 성취였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산업자본주의의 다음의 네 가지 주된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① 지식 형태들의 사회적 분극화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② 고정자본 및 관리조직화에 함입된 노하우들의 헤게모니 ③ 테일러주의 표준에 종속된 물질 노동의 중심성 ④ 소유와 기술 발전의 주된 형태로서의 고정자본의 전략적 역할

포디즘의 위기와 함께 이 경향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출발점은 대중노동자[포디즘 시대의 노동자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셈블리라인 앞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된다.―정리자]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토대를 부수고 복지국가의 보장과 서비스들의 엄청난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이는 포디즘과 양립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 결과 임금관계에 대한 화폐적 제한이 약화되고 생산의 지적 활력의 집단적 전유라는 강력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대적 동학을 통해 대중노동자는 포디즘 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노동의 존재론적 변형의 요소들을, 즉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을 자본의 심장부에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일반지성의 집단적 노동자라는 형상을 구축하고 지식의 추동적 역할에 기반을 둔 경제의 구조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구축했다. 그 결과로 노동의 인지적 차원과 확산된 지적 능력의 구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노동 관계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열렸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생과 성격을 적절히 특징지으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①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출현의 핵심 추동자는 산 노동의 힘에 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형성은 인지자본주의의 발생에 선행하고 그것과 (논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대립된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이 지식의 생산의 집단적 조건들을 기생적인 방식으로 흡수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재구조화를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일반지성의 사회에 각인된 해방의 잠재력을 질식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지적·비물질적 노동의 생산적 가치가 우세해지고 자본의 가치화의 중심축이 지대(자산소득)’를 수단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강탈하는 데 있으며 지식이 상품으로 변형되는 축적 체제이다.

② 정보혁명의 이론가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의 노동의 변형을 규정하는 요소는 정보통신테크놀로지(ICT)의 주도적 역할에 기반을 둔 기술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이론가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잊고 있다. ㉠ ICT는 살아있는 앎(un sapere vivo)이 없으면 정확하게 기능할 수 없다. 정보취급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conoscenza)’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는 노동이 없는 자본과 같다. ㉡ 따라서 ICT 혁명의 주된 창조력은 자본이 추동하는 동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의 수립에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생산의 연계 형태들로서 기업에 대한 대안과 동시에 시장에 대한 대안을 나타낸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특징들

 

1)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그리고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전도

인간에게 구현되는 무형의 요소가 자본의 성장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 확산된 지적 능력

이는 다시 네 개의 주된 함축을 가진다.

㉠ OECD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개발 실험실들이 지식 기반 경제의 추동부문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집단적 생산에 상응하며, 이 생산은 전통적으로 북지국가의 공통의 제도들(건강, 교육, 공적 및 대학연구 등)에 의해서 발현된다. OECD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때 우리는 이 제도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은폐는 삶정치적 통제와 복지제도들의 상업적 식민화가 인지자본에서 하는 역할과 연관이 있다. 건강, 교육, 훈련 및 문화는 생산의 점증하는 부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 여기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와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전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 예전에 불변자본이 수행했던 본질적 기능들의 일부를 이제 노동이 수행한다(생산의 조직화 수준에서 그리고 경쟁력과 지식향상에서 주된 요인으로서).

㉢ 노동력의 형성과 재생산의 조건들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나라의 부’의 원천은 점점 더 기업의 벽들보다 더 상류에 있는 협동에 놓여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지식 생산을 엘리트 노동이나 전문가 부문의 특권으로 보는 지식이론이 모든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가 이 부문에 상응한다. 그래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시간들(tempi sociali)의 체계 전체로 확대된다.

㉣ 복지국가가 제공한 이른바 고급 서비스들은 노동의 인지·소통·정동의 차원이 우세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발전할 수 있는 활동들에 상응한다. 이러한 자주관리 형태들은 사용자들을 긴밀하게 관여시키는 식으로 서비스들을 공동생산하는 데 기반을 둔다.

 

2) 인지적 분업, 노동계급 그리고 임금관계의 표준적 조건들의 탈안정화

둘째 특징은 테일러주의적 분업에서 인지적 분업으로의 이행이다. 이제는 생산의 효율이 각 과제에 필요한 작업시간의 축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형태에 의존하고 학습, 혁신, 연속적 변화의 동학에의 적응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다가성에 의존한다.

지식생산 및 데이터처리와 연관된 활동들의 확산은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을 포함한 모든 경제부문들에서 일어난다. 노동에서의 자율성의 일반화된 진전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전일적이지는 않다. 어떤 부문에서 몇몇 국면들은 인지원칙들에 따라 조직될 수 있고 다른 국면들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적 혹은 신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화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양적 수준에서 (적어도 OECD 국가들에서는) 자본의 가치창출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지노동이다. 따라서 인지노동은 필요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메커니즘들과 단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3)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인지적 차원의 성장이 자본-노동 교환을 지배하는 표준적 원칙들의 이중적 탈안정화를 어떻게 가져오는지를 강조해야 한다.

㉠ 한편으로 노동생산물이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전문지식 내에서의 활동에서는 이전의 임금계약 조건들이 문제시된다. 이전의 조건이란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주장을 임금을 받음과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연구나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같은 활동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된 물질적 생산물로 결정(結晶)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머릿속에 함입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의 인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회사가 왜 지적 재산권을 변경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문지식의 형태들을 전유하고 그것들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한편, 포디즘적 임금계약 규범을 구조지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과 동시성이 오늘날에는 크게 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에너지 패러다임에서는 임금이 인간의 시간의 잘 정의된 일부를 회사가 획득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대해 지불한 가격이었다. 회사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로부터 최대한 가능한 양의 잉여노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들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전문지식의 강탈과 일의 시간과 기능의 경직된 규정을 통해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원칙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되는 에너지의 단순한 소비로 축소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노동통제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식과 임금노동자의 생애를 가동하고 능동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기업의 목표들을 내화할 할 필요, 결과를 낼 의무, 고객들로부터의 압력은 순전히 불안정성과 연관된 억압과 함께 자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발견한 주된 수단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여러 형태들 또한 자본이 총체적인 종속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무상으로 이익을 얻어낼 도구이다. 불안정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지 않으며 고용계약에 통합되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며 양화되기 어려운 노동의 성장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포디즘 시기의 생산적 노동시간 개념과 임금 개념을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지식 자본주의에서 불안정성과 노동의 관계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단편화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와 같다는 발견을 설명해준다.

바로 같은 논리가 노동력의 탈숙련 과정이 왜 이제는 대대적인 지위 격하―이는 특히 여성들과 젊은 대학졸업자들에게 해당된다―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지위 격하란 보수와 고용의 조건들이 노동활동의 배치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숙련에 비해서 탈가치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3원 공식의 위기 : 지대(자산소득) 경제와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생산양식에서의 변형은 잉여가치 포획 및 소득분배 형태에서의 파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두 가지를 연구해야 한다.

1)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임금메커니즘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임금 메커니즘은 소득에의 접근이 낡은 포디즘적 체제 즉 고용의 유무에 달려있어서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실질임금의 정체와 생활조건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여, 시민권과 연결된) 객관적 권리들에 기반을 둔 사회적 혜택의 총량과 그 수혜자의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체계에서 워크페어국가(Workfare State) 체계로의 이동이다. 후자에서는 화폐로 환산하면 매우 낮고 강한 조건들에 종속된 복지혜택에 대한 강조가 수혜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2) 지대(rent)[전통적인 번역어를 따라서 일단 ‘지대’로 옮기지만, 노동이 아니라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 일반을 가리킨다―정리자]의 강력한 귀환.

지대는 잉여가치를 포획하고 공통적인 것을 탈사회화하는 주된 도구이다. 지대의 이러한 귀환의 의미와 핵심 역할은 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생산의 사회적 조직의 수준에서 작용한다. 지대와 이윤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의 적합성이 점점 더 감소한다. 구분의 이러한 흐려짐은 금융의 힘이 기업들의 거버넌스의 기준을 주주들을 위한 가치창출에 따라서만 재형성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마치 노동에서의 협력의 자동화가 화폐라는 추상적이고 유연하며 이동적인 형태의 자본의 자동화의 평행 운동에 의해 대응되는 듯하다. 이는 자본의 소유와 관리의 점증적 분리를 낳은 역사적 과정과 비교할 때 새로운 질적 도약이다. 인지자본주의 시기에는 베버적 기업가(기업의 소유와 관리 기능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다)라는 목가적 유형이 확연히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갤브레이스(Galbraith)의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혁신의 프로그래밍과 노동의 조직화에서 맡은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가져온다―의 불가역적 위기에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금융 및 투기 기능을 발휘하는 데 그 주된 전문성이 있는 관리에 자리를 내준다. 그 동안에 생산 조직화의 실제적 기능들은 점증적으로 피고용인들에게 할당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개별 회사들의 수준(여기서 우리는 절대지대에 관해 말할 수 있다)에서나 기업과 사회의 관계의 수준에서나 공히 관찰될 수 있다. 사실 회사들의 경쟁력은 내적[회사 내적] 경제들이 아니라 외적 경제들에 점점 더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영토의 인지 자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산잉여들을 포획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적 규모에서는 이것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사회의 일반적 전진’에서 나오는) 이 ‘무상의 선물’을 이윤의 정상적 원천으로부터 구분하고자 ‘지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지식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 양 무상의 혜택을 얻어낸다. 잉여가치의 이 부문이 바로 비옥한 땅의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차별지대에 비견된다.

㉡ 다른 한편, 현재의 지대의 발전은 종획의 역사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생의 바탕에 놓인 순수한 형태들과 기능들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지대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의 산물이다. 이 사유화가 자원의 인공적 희소성의 창출을 통해 생성되는 이윤을 수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재산의 투기로부터 오는 지대와 1980년대 이래 화폐와 공공부채의 사유화 덕분에 금융위기에서 그리고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해체시키는 데서 주된 역할을 한 금융지대를 한데 모으는 공통적 요소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재생산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산권을 강화하고 지식과 생명체들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주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법칙의 위기와 일반지성 시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의 또 하나의 발현을 본다.

임금, 지대, 이윤 사이의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계급구성 및 노동시장을 극히 이중적으로 분할하는 정책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첫째 분할부문은 종종은 노동력 가운데 (기업금융서비스, 특허를 노리는 연구활동,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전문적인 법활동 같은) 인지자본주의의 기생적인 활동에 고용되는 더 수입이 좋은 특권화된 소수이다. 이 이른바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자본 지대의 마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그 자격과 능력이 명시적으로 인정된다. 더 나아가 이들의 보수에는 금융자본의 배당금과 연금기금과 민영보험들의 체계와 연관된 보호 형태들로부터 오는 이익의 점증하는 몫이 포함된다.

둘째 부문은 그 자격과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지 노동 범주는 지위 격하라는 무거운 과정을 겪는다. 이 부문은 새로운 인지노동의 분야에서 가장 불안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 개인 서비스들의 발전과 연관된 새롭게 표준화된 서비스들의 신테일러주의적 기능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동시장과 소득분배의 이중화는 집단적 복지 서비스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현대 가정의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상업적 서비스들을 확대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대(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인지 지대, 임금 지대 등)는 소득의 분배와 인구의 사회적 계층분화에서 점점 더 전략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결과는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모래시계형’ 사회의 창출이다. 물론 가치의 창출이 이제는 임금노동자들의 창조성, 다재다능함, 발명의 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본이 노동에게 생산조직화에서의 점증하는 자율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실제로 이미 자율을 양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방법들을 선택하는 수준에 국한시키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결정하는 힘을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떼어내느냐 하는 것,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제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합의 동학 및 노동의 자기조직화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정복은 생산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소비의 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대안적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결정적 요소인 듯이 보인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생산(produzione dell’uomo per e attraverso l’uomo)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모델이다. 일반지성의 생산에서 주요 고정자본이 인간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 개념으로 가치법칙과 3원 공식(threefold formula, 임금-지대-이윤)의 위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보장소득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이며 1차적인 것으로 이해된 소득이다. 즉 이는 재분배로서가 아니라 가치 및 부의 생산의 점증하는 집단적 성격의 긍정으로서 이해된 소득이다. 이것이 자본으로부터 지대가 포획하는 가치의 일부를 빼냄으로써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임금관계가 부과하는 화폐적 제한의 약화는 상업주의와 종속된 노동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노동형태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