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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로서의 다중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 가운데 맨 뒤에 달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9장 다중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무엇보다도 다중에 속한다.(([정리자 주] ‘entrepreneurship’은 가장 포괄적으로는 기업가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며 ‘존재’에는 정신, 의지, 행동, 사고방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용어의 잘 알려진 우리말 옮김은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맥락에서는 이를 채택하지만 이 옮김이 잘 안 맞는 맥락에서는 가령 ‘기업가활동’과 같은 식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이 가진 협력을 통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능력을 가리킨다. 다른 많은 용어들처럼 이 말도 왜곡되었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두 경로 즉 간접적 경로와 직접적 경로를 통해 살펴본다. 전자는 징후적 독해로서 슘페터의 기업가론을 다루어 다중의 협력적 힘을 자본이 계속 강탈함을 밝힐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기업가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다중의 잠재력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로는 존재론적 독해로서 다중의 생산적인 힘을 직접 살펴보면서 다중의 리더십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리더십이 의미하는 바에 이런 맥락에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기업가가 되는가

 

기업가는 일이 되게 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의 본질은 기존의 노동자들, 아이디어들, 기술들, 자원들, 기계들 사이에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창출하는 것이다. 즉 기업가는 새로운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s)(([정리자 주]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이다.))를 창출한다. 이 배치는 역동적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은 단지 ‘변화에 적응하는 대응’만을 추구한다. 진정한 기업가는 ‘창조적 대응’을 수행한다.

 

결합의 본질은 협력이다. 생산성 증가의 열쇠가 기계 체계들과 연계된 노동자들의 협력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는 맑스에 가깝다.

 

맑스는 협력이 생산성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을 변형하고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노동자가 계획된 방식으로 다른 노동자들과 협력할 때, 그는 그의 개인성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그의 유적 능력을 발전시킨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1976, volume 1, p. 447.)) 인류의 힘은 협력 속에서 실현된다. 새로운 사회적 존재가, 새로운 기계적 배치가, 인간·기계·아이디어·자원 등등의 새로운 구성이 이 과정에서 창출된다.

 

슘페터가 잘 알고 있듯이, 기업가는 보수가 지급되는 협력 즉 노동자들의 협력 이외에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협력 즉 방대한 사회적 장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후자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력 혹은 폭력이 필요하다. 맑스도 협력을 감독하는 자본가를 전략을 지시하는 전쟁터의 장군에 비유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은 항상 무력의 위협 아래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슘페터의 비유는 기업가가 부과하는 협력이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서 (보수를 받든 안 받는 모든 인구에게) 효과를 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간다. 사회적 노동은 보수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특수한 생산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포디즘 모델의 위기 시에 외부화(+ 공장의 분산, 복합산업지대들의 구축)로 이어졌던 가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의 소프트웨어 테크놀로지 파크들까지, 북부 이탈리아와 바바리아의 혁신적 생산센터들에서 멕시코와 중국의 자유무역지대들 및 수출가공지대들까지, 방대한 사회적 장의 생산력을 관할하는 이 기업가적 ‘결합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업가들은 누구인가? 『경제발전의 이론』(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의 1911년 초판에는 들어있으나 나중 판에서는 삭제된 대목에서, 슘페터는 새로운 결합 및 기업가정신에 기반을 두어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눈다. ① 관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쾌락주의적’인 대중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다. ② 예리한 지성과 민활한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볼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다. ③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행동한다. 이들은 쾌락주의적 평형을 싫어하며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힘, 명령하고 지배하는 힘, 그리하여 ‘성공적인 행동’으로 이르는 힘, 특별히 빛나는 지성이 없이도 그렇게 하는 힘이다. 여기서 슘페터가 기업가정신은 리스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에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행동인’(Man of Action), 즉 복종을 요구하는 인격체이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슘페터는 노동자, 농민, 장인 등으로 이루어진 대중을 쾌락주의적이고 수동적이고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제시하는 것이다.

 

슘페터의 ‘행동인’의 인간학은 분명 조야하지만, 미디어가 주도한 오늘날의 기업가 열풍에서, 특히 닷컴들과 스타트업들의 디지털 세계에서 분명하게 공명된다.

 

그러나 그가 1934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개정했을 때 그는 기업가라는 영웅적 형상을 버린다. 그는 이제 기업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의 바람직함을 납득시키고 자신의 지도에 대한 확신을 창출하는 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창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 그는 그에게 돈을 대줄 은행가만 납득시키면 된다. 금융의 점점 더 강력해지는 지배가 기업가를 대중의 동의를 얻는 지도자에서 은행가에게 청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폐, 금융, 재산의 힘 및 그것이 배치하는 경제적 강요가 전통적인 권위와 동의의 방식을 대체했다.

 

40년대에 들어와서 슘페터는 대기업에 조직된 재산과 소유조차도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의 동의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재산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생명력을 빼낸다···. 탈물질화되고 탈기능화된 부재자 소유는 재산의 활력적인 형태처럼 인상을 강하게 주어 도덕적 충의를 끌어내는 식이 아니다. 결국 진정으로 사업을 지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거대 기업의 안에든 바깥에든.”(([원주]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Harper, 1942, p. 142.)) 이 시점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진하는 유일한 길은 중앙집중화된 계획임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슘페터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그는 대중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생산적 협력이 분산된 다중심적 회로들의 형태로 사회적 장 전체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결합들이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서 점증적으로 조직되고 유지되고 있다. 고정자본을 재전유할 잠재력과 함께 다중이 생산적 협력의 생성과 실행에서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생산이라는 전장에 장군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군대가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방향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택할 수 있는 옵션

① 내적 지배 : 노동기율로 환원,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에 순응하도록 강요, 가령 디지털 테일러주의 같은 것으로 민중의 지성·창조성 및 사회적 능력의 삭감.

② 외적 지배 : 상대적 자율성을 띠며 사회가 생산하는 가치를 외부에서 추출. 금융.

 

 

다섯 번째 요청 : 다중의 기업가정신

 

슘페터의 생각에는 다중의 기업가, 즉 사회적 협력의 자율적 조직화가 잠재해있다.

 

생산양식이란 삶형태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의 형태의 생산을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사회적 생산에서는 상품보다도 사회 및 사회적 관계들이 생산과정의 직접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고 삶형태를 재생산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노동의 생산양식이 바로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등장하는 장(場)이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①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기업가가 되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빠져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활성화하는 협력의 메커니즘들과 관계들이다. 개인적으로 당신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이미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가하는 위협을 내화하고 순치하려는 시도이다.

② 또 하나 제거해야 할 신비화는 사회적 기업가정신이다. 이는 때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좌파 정치가들에 의해 지지된다. 사회적 신자유주의. 자선.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사회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기업가정신의 연계는 공동체 네트워크들과 자율적 협력양식들을 파괴한다.”

 

다중의 기업가는

①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이다.

②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

③ 사유재산의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와 공통적으로 되어야 한다.

 

생산적 협력의 네트워크들, 생산·재생산의 사회적 성격, 다중의 기업가로서의 능력들—이것들이 전략적 힘의 견고한 토대들이다.

 

 

사회적 생산→사회적 연합 →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

 

생산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① 과정이 협력적이다.

② 생산의 결과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 자체이다. ‘인간생성적’(anthropogenic) 혹은 ‘삶정치적’(biopolitical)

 

이 두 의미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곧바로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적 소유는 ① 그것이 생산을 낳는 협력의 관계를 봉쇄하고 ② 생산의 결과인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 생산에 점점 더 족쇄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가는 경로는 직접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를 천명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행동 기획들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생산이 창출한 잠재력은 사회운동들과 노동투쟁의 결합이 실현될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적 형태이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들이 연대하거나 사회적 연합(social union)이라는 형태의 혼합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정의가 극히 모호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 sindacalismo social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원주]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La torsione neoliberale del sindicato tradizionale e l’imagginazione del ‘sindicalismo sociale’: Appunti per una discussione,” http://www.euronomade.info/?p=2482. 또한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eds, Sindacalismo sociale, DeriveApprodi, 2016, especially their introduction 참조.)) 노동투쟁과 사회운동의 교차 혹은 교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합주의는 한편으로는 노동 조직화의 힘을 회복하고 일부 기존 노조들의 보수적 행동을 극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수명과 효과를 강화할 희망을 제공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해묵은 관계를 전복한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경제투쟁(노조 투쟁)은 부분적이고 전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이 이끄는 정치투쟁과 연대하여 지도를 받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가 제안하는 양자의 연대는 전술과 전략의 관계를 뒤섞는다. 경제적 운동이 구성된 힘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를 ①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안정되고 발전된 조직 구조에 입각할 수 있게 하며 ② 노조의 투쟁을 임금과 직장을 넘어서 노동계급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대할 뿐만 아니라[사회적 영역의 확장] 노조들의 경직된 위계구조와 낡은 투쟁방식을 사회운동의 동학으로 부수게 해준다[방법의 쇄신].

 

영어권에서 사회적 연합의 고전적 사례는 1900년 남아프리카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3자 연합이다 : ①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②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③ the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1997 : Reclaim the Streets와 Liverpool 부두노동자들

· 1999 시애틀: Teamsters and Turtles(환경단체들) 사이의 짧은 협력

· Federation of Metal Workers(FIOM)과 교육, 건강 등의 부문의 풀뿌리 연합들(COBAS) 같은 이탈리아의 일부 역동적 노조들, 그리고 미국의 the 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이 계속 사회운동 연합을 실험해왔다.(성공의 정도는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적 연합주의도 변해야 한다. 이전에는 노조와 사회운동의 사이의 외적 연대 관계를 추구했는데, 이제는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내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조직화와 사회운동을 단지 친밀한 유대를 가진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보고 노동의 지형이 점점 더 삶형태의 지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를 이렇게 새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직장을 넘어가는 넓은 틀에서 사회적 생산·재생산을 이해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 자체가 이제는 공장이다. 더 정확하게는 공동으로(in common) 생산된 공간이며 미래의 공통적인 것의 생산·재생산의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수단과 삶형태에 동시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생산 및 재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가 불가분하게 엮이어 있음을 보여준다. 투쟁들은 ‘공통적인 것에의 동등하고 개방된 접근 + 공통적인 것의 집단적 자주관리’를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구축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이는 탈자본주의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2013년 헬스케어 예산삭감에 대항한 “marea blanca”(‘white wave’) 시위와 2015년 자치도시 선거에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여러 큰 도시들에서 헬스케어 및 기타 사회적 서비스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목적을 가진 선거연합들이 승리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선이 존재한다.

 

사회적 연합주의의 주된 무기는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다.조직된 노동거부는 처음부터 노동조합의 힘의 기반이었다. 노동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 지형에서 역사적이고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틀 안에서는 비고용 노동자들, 비임금 가사노동, 불안정 노동자들 및 빈자가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 공급의 중단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오래 전에 거부의 전략이 모든 사회 집단은 아니더라도 광범한 집단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적어도 순종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궁극적으로 누구나 자발적인 노역의 공급을 중단하고 사회 질서를 파열하는 위협을 가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 즉 공통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기반이 되고 생산적 협력의 회로들이 사회 전역에 확대된 시대인 오늘날에는 거부의 힘이 사회적 지형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다. 사회 질서의 파열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지는 구분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합주의가 여는 잠재력이다. 두 전통 즉 ① 노동운동의 산업생산 차단 ② 사회운동의 사회 질서 파열의 전통이 합쳐져서 화학변화를 일으켜 폭발적 혼합물을 창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총파업이라는 생각이 새로운 의미, 더 강력한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총파업은 거부일 뿐만 아니라 긍정이기도 해야 한다. 즉 협력의 회로들과 사회적 생산의 잠재적으로 자율적인 관계들—이 관계들은 임금노동의 내부와 외부에 공히 존재하며 공유하는 사회적 부를 사용한다—을 드러내는 기업가정신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네그리와 하트의 새 책 Assembly 서문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원문 :  Assembly: Heretical Thought (2017.0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새로 나온 책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embly: Heretical Thought의 서문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종종 소개할 생각이다.

서문의 소개에 앞서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평해본다..

총평

이전 저작 『공통체』(Commonwealth)에서의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 단순한 반복 즉 중복이 없이, 실천적인 방향으로 더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발전이란 ① 더 깊어진 구체화 혹은 더 자세한 분석 혹은 더 정밀하게 다듬기라고 할 수 있는 것 이외에 ② 새로운 제안도 포함된다. 굵직한 논점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십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조직과 제도에 대한 포기(“수평주의의 물신화”)로 이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의 전도(the inversion of the strategy and tactics)를 제안한다.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전도된다는 것인데, 한국의 ‘촛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다.

2) “constituent power”에 대한 논의를 다시 다듬어서 그것이 주권(sovereignty)―‘하나’로의 통합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힘이어야 함을, 그래서 “constituent consistency”(들뢰즈·가따리 개념의 차용)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take power, but differently”라는 말이 나타내는 바이다.

3)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협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활동의 차원으로, 즉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문제를 아래에서 보아야(from below) 함을 강조한다.

4) 금융과 화폐의 문제를 더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상품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르는 가치결정이 무너지고 그 대신 파생상품들”(derivatives)의 거래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자본의 가치의 척도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금융과 화폐를 자세히 분석하는 이유는 자본으로서의 측면 말고 화폐가 가진 다른 측면 즉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능력을 살려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발명하는 실천적인 목적에 있다.

5)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이 더 분명히, 따라서 더 간명하게 제시된다. 공적인 것이 사실은 사적인 것을 가리고 보호하는 도구로 등장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의 “주권적” 성격을 밝힌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은 공통적인 것과 사유재산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공통적인 것은 재산이 아니다”) 책 전체에 걸쳐서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매우 확연하게, 어찌 보면 이전보다 더 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개념화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6) 사회적 투쟁의 형태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직화의 유형으로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가 제시되고 그 무기로서 이전의 총파업의 새로운 형태―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맞는 형태―인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 제시된다. 물론 이는 모두 출발점들이지 그 자체로 충분한 대안들이 아니다.

7) 자본가들이 예전에 하던 기능―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금융의 형태로 생산과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본이 하지 않는 기능―인 생산 요소들의 결합을 이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음을 다중의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8) 무기에 대한 생각을 더 정밀하게 :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적이며 방어에의 적용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진정한 방어는 무기의 효율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고 주로 공동체의 힘에 의존한다. ‘정치적 힘은 총에서 생긴다’라는 유명한 말은 순서와 우선성을 잘못 말한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정치적 힘에서,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자라나올 것이다.”(270)

최종적으로 네그리·하트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① 엑서더스―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기존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거버넌스의 방향으로 개혁을 변형시키려고 노력

③ 헤게모니 전략―“constituent consistency”를 구성하여 새로운 사회를 제도화

로 제시한다.

 

Assembly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서문

 

여기서 시는 봉기에 버금간다.

― 에메 쎄제르

 

사회운동이 불의와 지배에 맞서 치솟았다가 전(全)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잠깐 장악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지기―이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회운동들은 독재자 개인들을 쓰러뜨리는 경우에도 새로운 대안들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사회운동들은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그 급진적 포부를 버리고 기존 제도에 흡수되었거나 강력한 억압에 패배 당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을 나타내는 운동들이 지속적인 변화를 성취하고 못했고, 새로운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세계 전역에서 우익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더 긴급해진다. 이 세력은 정상적 법절차를 정지키시고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와해시키며 광범한 감시활동을 하고 공포 분위기를 창출하며 인종 혹은 종교적 순수성을 사회적 귀속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이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추방의 위협을 가한다. 사람들은 이 우익 정부들의 행동에 항의한다. 이렇게 항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항의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 운동은 지속적인 사회 변형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행국면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치적 전제들 일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how to take power)를 묻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힘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을 잡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민주적 사회를 성취해야 하며, 결정적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을 산출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들은 리더십을 더러운 단어로 취급한다. 그럴 이유가 많다. 50년 이상 동안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수직적 형태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족쇄가 된다고 옳게 비판해왔다. 전위가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이 현실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더십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 지속적인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화의 거부로 전환되는 것, 수직성을 추방한 결과로 수평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리더 없는 운동도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주체성의 산출을 조직화해야 한다.

리더십의 핵심적 기능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성취할 새로운 메커니즘과 실천을 발명해야 한다. 리더십의 두 핵심적 기능은 의사결정과 ‘모이기’(assembly)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관에는 리더들이 멀리서 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이 다중과 연결되어 다중의 의지와 욕망을 나타내야 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일련의 변칙들을 낳는다. 다중을 모으는 리더들의 능력도 이런 모순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는 정치적 기업가가 되어야 하는데도 모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리더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민주적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형용모순으로 나타난다.

의사결정과 모이기는 중앙집중화된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중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함께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다. 만일 리더들이 이런 맥락에서 아직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그들이 생산적 다중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십의 제거가 아니라 수평적 운동과 수직적 리더십이라는 두 극의 관계의 전도이다.

자유와 평등의 조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함께 생산하는 것이 오늘날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로 가는 경로이다. [정치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의 결합]

정치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쳇바퀴를 돌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숨겨진 거처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직화, 효율성, 모이기, 의사결정의 문제들이 사회적 지형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만 우리는 영속적인 해결책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적 장들의 과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협력의 조건을 정하고 함께 의사결정하는 다중의 잠재력을, 사람들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연구함으로써만, 그 재질과 능력을 연구함으로써만 입증할 수 있다.

오늘날 생산은 이중적 의미에서 점점 더 사회적이 되고 있다. ① 협동과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들에서 점점 더 많이 생산 ② 생산의 결과가 상품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궁극적으로 사회 자체. 사회적 생산의 이 이중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재질과 능력이 양성되고 드러난다. 또한 여기서 다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들과 가장 심한 형태의 지배(domination)가 작동한다.(금융, 화폐, 신자유주의적 행정)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서의 핵심적 투쟁 하나는 공통적인 것즉 우리가 공유하고 함께 관리하는 지구의 부와 사회적 부를 놓고 벌어진다. 공통적인 것은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토대이자 주된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즉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하여 생산하고 우리가 생산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법이 두개 있다.

①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전유할 권리를 긍정한다. 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원칙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축적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의 추출(extraction)을 통해 기능한다. (석유 및 천연가스 추출, 거대한 채광, 단작 농업 +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태에서 생산된 가치―지식, 협력, 문화생산물 등―의 추출.) 금융이 이 추출과정의 꼭대기에 존재한다. 이 추출과정은 지구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회적 생태계를 파괴한다.② 다른 접근법은 다중은 이미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더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개방적인 채로 두려고 하고 부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이 입장에 서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변형하고 접근을 봉쇄하며 그 사용과 개발에 대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것이 미래의 생산성에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식에 더 많이 접근할수록, 더 많이 협력하고 소통할수록, 자원과 부를 더 공유할수록 더 생산적이다. 공통적인 것의 관리와 돌봄은 다중의 책임이며 이 사회적 능력은 자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게 상서롭지 못하다고 악마가 귀에 속삭인다. 신자유주의가 공통적인 것과 사회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흡수한 듯이 보이며, 화폐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상호관계와 세계와의 관계의 배타적 척도로 제시된다고 한다. 금융이 거의 모든 생산관계들을 지배하며, 생산관계를 전지구적 시장이라는 얼음물로 내던졌다고 한다. 악마는 계속해서 속삭인다. 정치적 역할의 전도도 기업가들이 과거에 자본가들이 자랑하던 시절과 같았다면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기업가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 자본가, 금융가, 펀드 매니저가 이제는 명령을 내리는 자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폐가 명령을 내리며 이들은 단지 가신들이고 행정가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미지의 바다를 누비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금융축적의 끊이지 않는 잔치를 주재하는 엉덩이 무거운 사제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힘도 재조직했다. 이례적인 폭력이 권력의 행사 안에 구조적으로 포함되었다. 경찰력은 빈자, 유색인, 비참한 사람들, 피착취자들을 사냥하는 민병처럼 되었으며 이에 상응하여 전쟁은 일국의 주권이나 국제법과는 무관한 전지구적 경찰력의 행사가 되었다. 예외의 정치로부터 모든 카리스마의 광택―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이 벗겨졌으며, 예외상태는 권력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불쌍한 기만당한 것들”이라고 우리의 악마는 결론짓는다. 힘있는 자가 반란자의 순진성에 대해 보내는 온갖 오만, 경멸, 생색의 태도를 지으면서.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다행히도 수많은 형태의 일상적 저항들이 있고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강력한 사회운동의 분출이 있다. 저들의 경멸 뒤에는 저항이 봉기(insurrection)로 발전하고 자기들이 통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권력은 결코 겉모습처럼 안전하거나 자기충족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들은 안다. 전능한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는 빈자와 종속민에게 겁을 주어 순종하게 하는 데 복무하는 우화일 뿐이다. 권력은 항상 힘의 관계이다. 더 정확하게는 많은 힘들의 관계이다. “종속은 지배와 함께 이원적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의 하나로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라나짓 구하 Ranajit Guha)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이 관계에 항상 관여하여 협상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갈등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존재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는 이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론이다―는 사회투쟁, 저항, 봉기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극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다수의 삶을 지배하면서 사회를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가치를 강탈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세계는 사회적 협력에 의해 구축되지만 지배계급에 의해 분할된 세계이다.

이렇듯 사회적 존재는 전체주의적 명령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일자’는 ‘둘’로 나뉘며(The One of power divides into Two) 존재론은 각자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상이한 관점들로 쪼개진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인식론적 분할 또한 나온다. 한편으로는 고정된 영속적 질서로 간주되어야 하는 진실의 추상적 긍정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에서 구축되는 아래로부터의 진실의 탐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종속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주체화즉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생산은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만들고 추구하는 힘이 진실의 표지(標識)이다. 주체화의 과정에서 진실과 윤리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리더층이 아직도 어떤 역할을 하려면 기업가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다중 내에서 ‘모이기’의 작동자가 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은 행복의 작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다중의 민주적 기업가정신/활동(a democratic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우리는 사회를, 공통적인 것을 다양한 형태로 생산하고 사용하는 광범한 이질적 주체성들 사이의 협력의 회로들로 볼 때에만,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상응하는 정치적 기업가정신의 강력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해방의 기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기업가정신의 덕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기업가 사회의 창출을 옹호하며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고 권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업가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영웅담이 공허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오늘날 주변에 기업가 활동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조직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을 발명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 그 사용, 그것에 대한 의사결정에의 참여를 위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업가정신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로 정치사상의 중심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개념들을 둘러싸고 투쟁하며 그 의미를 밝히거나 변형하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은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의 협력의 형태들과 다중의 정치세력으로서의 ‘모이기’ 사이를 연결하는 돌쩌귀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다른 저작에서 이미 이 프로젝트를 위한 경제적 주장 가운데 일부를 개진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단순화한 일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공통적인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고 있다. (2) 이에 발맞추어 노동이 변형되고 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은 협력, 사회적·과학적 지식, 돌봄, 사회적 관계의 창출에 점점 토대를 두고 있다. 협력관계를 활성화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은 자본가의 명령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자율을 부여받는 경향이 있다. (3) 노동은 또한 새로운 내포적(intensive) 관계들 및 생산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류의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디지털 알고리즘, “일반지성” 등―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하나의 과제는 다중이 사회적 생산의 필수적 수단인 고정자본 형태들을 재전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4)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은 대규모 산업에서의 노동의 착취에서 공통적인 것(지구와 사회적 노동)으로부터의 (대체로 금융 도구들을 통한) 가치추출로 이동하고 있다. 여기서 양적인 측면이 주된 측면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보면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이 가지는 질적 의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이후 새 단계, 즉 높은 수준의 자율협력산 노동의 커머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단계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이러한 생산양식과 노동력에서의 변형은 저항을 조직화하는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제 상황이 전도되어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자본으로부터 재전유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직화의 문제(그리고 수평적 운동의 수직화)가 여기에 공통적인 것의 “제헌화”(constitutionalization)의 문제와 함께 놓여있다. 사회적 투쟁과 노동자 투쟁의 목표로서, 또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형태의 제도화로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다중이 힘의 관계를 유리한 쪽으로 기울여서 궁극적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잡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운동이 사회를 변형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된다면, 운동은 또한 공통적인 것을 장악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부를 재편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다르게”라는 말은, 자유를 (평등 없이우파의 개념으로 제시하고 평등을 (자유 없이좌파의 제안으로 제시하는 위선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과 행복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은 권력을 잡음으로써 차이와 다원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르게”는 또한 다중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정체성들을 그리고 권력의 중앙집중성을 탈신비화할 독립적이고 비주권적인(nonsovereign) 제도들을 산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권을 물리치기 위해 권력에 맞서 전복적 투쟁을 행하는 것, 이것이 저 “다르게”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중이 부를 재전유하는 데로 이르는 길을 연다. 공통적인 것에 뿌리를 둔 길이다.

새 군주가 지평 위로 출현하고 있다. 다중의 열정에서 태어난 군주이다. 부패한 정책에 대한 분노,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끔찍한 수준에 대한 의분, 지구와 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고 느낀다. 분노와 의분은 결과를 낳지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절망이나 체념으로 바뀐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군주란 자유와 평등의 길, 모두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통적인 것을 모두의 손에 쥐어주는 과제를 제시하는 길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당 혹은 지도자들의 회의를 가리키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형태의 저항과 투쟁이 마디마디 이어져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군주는 일관된 배열로 움직이며 암묵적으로 위협을 담지하는 떼(swarm),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Assembly’(모이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함께 모이기와 정치적으로 함께 행동하기의 힘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붙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기에 대한 이론이라든가 모이기의 특수한 실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개념에 횡단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원칙들과 실천들의 광범한 그물망과 공명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사회운동에서 제도화된 평의회들에서 근대 정치의 입법의회들까지, 집회의 자유에서 노동조직에 핵심적인 연합의 자유까지, 종교 공동체들의 다양한 회중 형태들에서 새로운 주체성들을 구성하는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라는 철학적 개념까지. ‘모이기’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을 인식하는 렌즈이다.

이 책의 여러 지점들에서 우리는 요구들(calls)과 응답들(responses)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음과 답이 아니다. 응답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식이 아니다. 요구들과 응답들은 서로 열려진 대화의 형태로 주고받는다. 고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타일의 설교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스타일은 전체 회중의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지는 않다. 설교 방식에서는 요구하는/부르는 사람들과 응답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엄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진술을 하고 회중이 ‘아멘’하고 긍정하며 더 진행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역할이 평등하며 서로 교체될 수 있는 더 온전한 형태의 참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더 부합되는 것은 19세기에 상선들에서 흔했던 뱃노래들과 같은 부르고 화답하는 노동요들이다. 노래들은 시간을 보내고 노동을 동기화하는 데 유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하게 복종하는 노동요들도 딱 맞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볼 때 우리에게 더 영감을 주는 것은 농장의 밭에서 노예들이 부르는 <호, 에마, 호>(“Hoe, Emma, Hoe”) 같은 제목의 노래들이다. 서아프리카 음악 전통들에서 파생된 이 노예 노래들은 다른 노래들처럼 노동의 리듬을 유지했지만 또한 때로는 노예들이 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를 암호화해서 넣었다. 주인의 채찍질을 피하거나 작업과정을 전복시키거나 심지어는 탈출을 계획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메시지를 바로 옆에 서있는 주인도 모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서로를 발견하고 모일 시간이다. 마키아벨리가 종종 말했듯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서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