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지구적 봉기



저자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 이미 추운 바깥은 더욱더 추워지고 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TV를 켜놓고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소파 위에 아늑하게 앉아있다. 또 두드린다. 앞문을 두드린 다음 옆문을 두드리고 다시 뒷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창문도 두드리고 지붕도 두드리며 벽도 두드린다. 이것들이 이토록 얇다는 것을 누가 알았던가. ···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문을 두들길 수 있는가?

집은 바로 신자유주의체제(혹은 이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바로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항의운동들이다. 지난 9월부터 지구의 거의 전역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알제리,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이집트, 프랑스, 독일, 기니, 아이티, 온두라스,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레바논, 네덜란드, 스페인, 수단, 영국, 그리고 짐바브웨 등. 이 투쟁들은 서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명분이나 구성의 면에서 서로 이질적이어서 그런지 저자는 이것들을 통합된 현상으로서 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개인 돈지갑 문제“pocketbook issues”를 원인으로 본 『뉴욕타임스』의 해석은 제외해 버린다.)

표면상으로는 이 운동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란에서는 50% 유가 인상이 원인이었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이 환경규제에 항의하여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홍콩에서는 범죄자를 중국 대륙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 불을 붙였다. 칠레에서는 교통비 인상이 불을 붙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억압적 범죄 법안이, 레바논에서는 모든 품목에 부과하는 새 조세 공지가 촉발제였다.

항의운동의 조직화는 일부는 조합과 정당에 의한 것이지만 다수는 지도자가 없는 수평적 종류의 것이다. 전체를 포괄하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없으며 전위당이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를 가르고 있던 ‘좌우’라는 축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곳의 민주적 열망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우익들과 미국 정부도 홍콩, 이란, 볼리비아의 시위들이 보인 민주적 열망에는 응원을 보냈다. (볼리비아의 경우는 어쨌든 모랄레스를 전복시킨 쿠데타 이전에는 그랬다.) 좌파 가운데 더 교조적인 사람들은 홍콩과 이란 항의운동 뒤에 제국주의적 개입이 있다고 보면서도 지구상의 모든 다른 민중운동의 유산을 긍정했다.

바리케이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를 보면 공통성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칠레에서는 지하철요금 3% 인상―이로 인해 교통요금이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월급의 21%가 되었다―에 대한 분노로 인해 민중이 개인돈지갑 문제에 발끈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긴축으로 진이 빠져있고 저임금, 긴 노동시간, 부채에 의해 쥐어짜이고 부유층의 탐욕과 맹목성에 신물이 나 있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릴 태세가 되어있다. 

이집트에서는 9월에 수천 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재무부장관이 “이집트 경제개혁의 과실이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라고 탄식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부과한 조치로 인해 실제로 인플레가 3년에 걸쳐 60% 상승했으며 수백만 명을 가난에 빠뜨렸다. 

엘리트 집단의 인식과 대중의 경험 사이의 분리는 근본적인 만큼이나 광범위하다. 최근에 민중봉기가 일고 있는 나라들 모두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모두 단 하나의 경제모델에 의해서 수십 년 동안 지배되어왔다. 이 모델에서 성장은 다수에게는 궁핍화를 의미했고 자본은 하수(下水)가 아래로 흘러가는 것만큼 확실하게 미국과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칠레가 악명 높은 최초의 실험실이었다. 피노체트 암살단이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팀을 이루어 운좋은 자, 신중하지 못한 자, 눈이 먼 자들이나 좋다고 할 ‘경제적 기적’을 창출하는 일을 했다. 볼리비아에서 민중이 11월 10일의 쿠데타를 좌절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이와 유사한 신의 행동(즉 기적의 창출)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압도적 불균형을 보존하는,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는 미시적으로는 도시 수준에서 작동하고(가령 공공교통체계의 쇠퇴), 거시적으로는 전지구적 규모로 작동한다(각국 엘리트 집단이 다국적기업 및 국제금융기관들과의 공모하여 노동력을 저렴하게 유지하고 부를 기성의 세력에게 한정시키는 것).

2000년대 초에는 중국 자본과 석유·광물·농산물 같은 상품의 높은 가격으로 인해서 가난한 나라들에게도 선택지들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연결된 ‘개혁’의 덫들―공공 부문의 삭감으로 이루어지는 긴축 정책, 국가 소유 자원의 사유화, 노동보호를 위한 제도들을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철폐하기―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부들이 승리했고 가난과 불평등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상품 붐은 꺼졌고 중국 경제는 멈추었으며 국제통화기금이 똑같은 해결책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각국의 엘리트 집단은 화폐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국의 국민을 난도질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지내왔다. 3월에 에콰도르의 대통령 모레노(Lenín Moreno)는 42억 달러의 대부를 받기로 국제통화기금과 계약했으며 10월에는 그 요건으로서 공공부문 임금과 연료보조금을 삭감했고 그 결과 경유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 이것에 촉발되어 주로 에콰도르 토착민들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모레노는 곧 자본을 도피시키고 긴축재정안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레바논에서는 수상 알하리리(Saad al-Hariri)가 110억의 대부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외국 대부자들이 요구하는 적자감축 종합대책의 일부로서 (연료, 담배, 인터넷 메시징 서비스를 통해 전화하기에 매기는) 새로운 소비세들을 공지했다. 레바논 인구의 무려 4분의 1이 참가한 12일 동안의 항의 투쟁 이후에 하리리는 사임했다. 그러나 투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이와 동일한 모델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란은 40년 동안 미국의 제재에 의해 타격을 입어서 긴축 조치를 시행하는 데로 돌아섰다. 그들은 그들이 약속했던 경제적 만병통치약을 제공하는데 실패했으나, 적어도 엘리트 집단을 보호하고 소모품으로 간주되는 계층에 고통을 전가할 수는 있었다. 저항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의자들의 요구는 원래 촉발제가 되었던 것을 훨씬 넘어서 거의 모든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홍콩에서 시위자들은 범죄자 송환법의 철회로는 ‘충분’ 근처에도 못 온다고 보았으며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 또한 원했다. (시의회 의석의 반수는 은행가들, 제조업자들, 개발업자들로 이루어진 ‘직능 선거구의 유권자들’functional constituencies에 의해 직접 선출된다. 불평등과 주택비용은 세계 어느 곳보다 높다.) 칠레에서 항의자들의 요구는 교통요금 인상을 철회하는 데서 피노체트 시기의 헌법을 폐지하는 데로 확대되었다. (두 요구 다 이룰 듯하다. 피녜라는 요금인상을 철회했으며 새로운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에 동의했다.)

레바논에서 항의자들은 그들의 운동을 혁명으로 간주할지 말지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다. (베이루트, 홍콩, 칠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사유화된 곳에 속한다.) 수단에서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 정부가 “국제 대부(貸付) 기관들의 제안으로”(『뉴욕타임스』) 밀 및 연료 보조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봉기가 30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권을 뒤엎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직도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티에서도 항의운동은 1년도 더 전에 모이즈(Jovenel Moïse)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연료 가격을 인상했을 때 시작되었는데, 항의자들은 곧 미국이 후원하는 모이즈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줄곧 이 요구를 해오고 있다.

아이티에서만이 아니라 에콰도르에서 짐바브웨에 이르는 적어도 12개 나라에서 항의운동은 휘발유 가격의 인상에 의해 점화되었다. 기후변화 때문에 우리가 화석연료 사용을 즉시 중지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지만, 이 나라들에서의 연료 가격 인상이 이산화탄소 방출의 삭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종종 대부를 에너지보조금 삭감과 연동시키며, 연료세는 공공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채택하는 역행적이지만 쉬운 방법이다. 이 두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서 가진 자들을 구제하는 전술들이다.

한편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항의운동이 기후정책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하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거나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경우처럼 취하는 정책들이 고통이 고르게 분담되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우 농민들은 살충제와 질소 방출에 대한 제한 조치에 수천 대의 트랙터로 고속도로를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경우 환경에 대한 고려로 제정된 연료세가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과 결합되어 1년 이상의 거리투쟁이 일게 되었다.

어느 쪽을 보든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첫째, 기후위기를 다루려는 시도일지라도 주민들의 압도적 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면 실패하게 되어있다. 둘째, 이 기본적 욕구에는 음식, 건강관리, 주택만이 아니라 존엄과 유대도 포함된다. 현 체제는 존엄과 유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체제이다.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는 많은 봉기들은 TV 뉴스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달 초에 소설가 에데(Dominique Eddé)는 레바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들에 대해, “마치 수십만의 외로운 사람들이 끝이 없는 듯한 겨울잠을 자고 난 후 깨어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발견한 것”과 같다고 썼다. 보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이같이 민중이 깨어 주위를 둘러보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삐께띠가 서술한 것보다 더 나쁘다

 



삐께띠의 통계의 문제는 그것이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매우 낮추어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득에만 시야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소득을 벌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 이득(capital gains)을 거두어들이며, 자본 이득은 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보고는 되는데, IRA가 10년 정도마다 자본 이득에 대한 연구를 할 뿐이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나라들은 아예 자본 이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 않으며 그래서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삐께띠의 작업의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이는 그의 책을 잘 읽는다면 알 수 있다―부의 격차가 소득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며 이는 부자들의 조세회피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큰 기업들이 구글과 애플인데, 애플의 소득 전체가 미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로 이런 점이 삐께띠에게는 빠져있다. 소득 통계에서 빠져 있는 또 하나는 재산이 실제로 범죄와 사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삐께띠에게 좋은 점은 그가 프랑스 소설가들이나 영국 소설가들이 경제학보다 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끄의 19세기 소설들이 재산을 버는 방법은 결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발자끄는 모든 큰 재산의 뒤에는 큰 절도가 있다는 말도 했다. 『포브스』(Forbes)에 그 목록이 나온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의 최고 부자들은 장담컨대 소득을 저축해서 이런 부를 만들지 않았다. 더 높은 소득을 번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기와 내부 뇌물수수로 재산을 훔쳤다. 미국에서 큰 재산이 형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마이어스(Gustavus Myers)가 쓴 『미국의 거대한 재산의 역사』(History of the Great American Fortunes)는 철도건설용으로 불하된 토지에서, 의회 의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그리고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큰 재산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큰 재산은 자연자원, 토지, 공적 도메인을 사유화함으로써 형성된다. 부와 소득의 집중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1980년 이후의 시기, 삐께띠가 보여주는 이 시기는 바로 새처, 레이건, 옐친이 대표하는 사유화의 시기이다.

삐께띠는 격심한 불평등의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토론을 출발시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불평등이 생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단지 재산 일반에 세금을 매기는 해결책은 (이것은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치는 면이 너무 넓은 해머와 같다. 특정 종류의 부, 특정 종류의 재산 형성이 약탈적인데, ‘경제적 렌트’(economic rent)―지대(land rent), 자연자원 렌트(natural resources rent), 독점 렌트(monopoly rent), 혹은 금융부문이 벌어들이는 종류의 돈―가 바로 그것이다.[J is for Junk Economics에서의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렌트’는 시장가격이 본래적 경비(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모두 경제적 렌트이다.―정리자] 삐께띠의 책은 이것을 논의하지 않고 마지막에 부에 과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맞지만, 어떻게 과세를 할 것인가, 무엇이 경제를 성장하게 만들기에 최고로 좋은 종류의 세금인가는 미래의 또 하나의 책의 주제로 남아 있다. 삐께띠가 논의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는, 재산을 형성하는 데서 부채가 하는 역할이다. 1980년 이래 형성되기 시작된 부의 대부분은 1980년 이후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증가된 부채 레버리지 때문에 생겼다. 점점 더 많은 은행신용이 투입되어 부동산 가격, 주식 가격, 증권 가격, 모든 종류의 가격을 올렸다. (미술품 가격 상승도 이와 병행했다.)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소득에 대한 부채의 비율의 증가가 일어났다. 이 부채상태와 순가치(net worth)는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가구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자산은 집인데, 이 집 또한 큰 액수가 대출 담보로 잡혀 있으며, 기본적으로 99%가 1%에게 이자를 지불한다. 내가 보기에 금융 부문에서 가속화되어 온 것은 1%가 99%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빚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집을 사고, 교육을 받고, 기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사는 데로 접근하는 지점을 우리가 통제한다. 우리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집을 사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차도 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충분한 이자를 매길 것이다. 당신들이 버는 돈을 사실상 다 우리에게 이자로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기업사냥꾼들은 기업을 공격하여 더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불하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실상 실질적 부가 해체되고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 혹은 가공적 부(fictitious wealth)라고 불리던 것―모두 기본적으로 부채 레버리지를 통한 부이다―이 증가한다.

도금시대(Gilded Age)[원래 미국의 1880년대와 1890년대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일반화되어 사업가들·은행가들(‘강도남작들’robber barons)이 경제를 망치면서 부를 축적하는 시대를 가리킨다.―정리자]가 막 시작되었다는 삐께띠의 결론은 맞지만 그의 논리는 내가 따르는 논리가 아니다. 그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것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스미스는 가장 빨리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높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즉 높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고 낮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삐께띠는 수익률(rate of return)을 말하는데,[삐께띠가 말하는 자본수익률(rate of return on capital)은 이윤, 배당금, 이자, 지대 및 기타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을 말한다.―정리자] 미국 및 여러 나라들에서 가장 큰 부문은 부동산 부문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부동산 부문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다. 억만장자들이 부동산을 개인적 자선으로 운영한다는 식이다. 소득을 올린다면 소득세를 내야 할 것이고 신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렌트(임대료)가 거의 모두 이자로 지불되거나 감가상각 비용으로 책정된다. 그래서 삐께띠가 준거하는 것은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Earnings Before Interest, Tax,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이 아니라 그 한 부분, 즉 세금 빼고 이자 빼고 감가상각비와 무형자산상각비를 빼고 신고된 수입이다. 부동산 다음으로 부를 많이 축적한 곳은 석유산업이다. 이들도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세금을 면하게 해주는 감모공제(depletion allowance)가 있거나, 아니면 이들의 모든 소득은 해외에서, ‘편의치적선’(flags of convenience)[상선의 소유주가 자신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 선박을 등록하는 것―정리자] 나라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 이득을 포함한 실질적 총수입은 삐께띠가 보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둘째, 가령 미국의 국민소득계정(National Income and Product Account : NIPA)을 보면 1년 전 미국의 모든 기업이윤의 40%가 은행들, 즉 금융부문에서 거둔 것이다. 이 수익은 기본적으로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이다. 성장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금융서비스는 서비스가 아니다. 노상강도가 현금자동인출기 앞에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서 ‘돈을 내놓거나 목숨을 내놓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실제로 당신의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금융 활동과 부동산 투기가, 월가에, 은행 경영자들 및 기업경영자들에게 지불되는 이 모든 돈이 정말로 성장인지 아니면 가공자본의 형성과 병행하는 일종의 가공적 성장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 통계는 점점 더 허구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의 소득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기업 세금담당 회계사들에 의해 통계가 작성되고 있을 정도이다. 호주의 탄광 부문에서는 호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1년에 수십억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이 소득을 한 푼도 벌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기 의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이다. ‘신고전주의’는 ‘반(反)고전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은행들이 하는 일은 저축을 대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거나 자산가격을 부풀리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서 크루그먼은 대체로 우파 쪽에 의해서 그들이 총애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찬양된다. 그가 경제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했다면, 그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없고 불로소득 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크루그먼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훨씬 더 많이 받고 훨씬 더 많은 소득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심지어 통계에 대해서도 틀렸다. 그가 전문적인 은행 로비스트임을 기억하라. 그는 은행에서 돈을 받는다. 그는 은행들을 규제하려는 정부에 대항하는 싸움에 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이슬란드로 갔다. 은행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가 은행의 로비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 월가의 소득을 보자. 미국의 조세법 아래에서는 월가의 소득은 실질적으로 일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아니다. 그들은 스톡옵션과 증권투기로 대부분의 돈을 번다. 이는 자본 이득으로 간주되며 정상적인 소득처럼 과세되지 않고 훨씬 더 낮게 과세된다. 이는 가공적인 관점, 무엇이 소득이고 무엇이 소득이 아닌가를 회계사의 눈으로 보는 관점이다. 세금담당 회계사들은 정부에 엄청난 돈을 먹여 납세(소득세)신고서의 범주들을 왜곡하고 마치 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 형태의 부를 가시적인 부동산과 대조적으로 비가시적 부라고 부른다. 부유한 자들의 생각은 그들의 부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눈에 뜨인다면 세금이 매겨질 것이고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삐께띠가 한 것은 이 부를 가시화한 것이다. 적어도 그는 부 통계에 의해 ‘보라, 저기 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이 부를 획득했는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부에 대응하는 몫이 소득에서 발견되는 정도를 반영하는 소득세 명세서뿐이다. 이는 마치, 열쇠를 떨어뜨렸는데 떨어뜨린 곳을 보지 않고 빛이 있는 곳을 보는 것과 같다. 그가 작업할 통계자료는 소득세 기록뿐이며 그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작업을 해놓았다.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통계를 다시 처리하여 풀어내고 무엇이 그 뒤의 실제 현실인지를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 월가와 금융 경영자들로 하여금 소득을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 이득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들의 계약은 매우 분명하다. 기업경영자의 소득은 주식 가격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스톡옵션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주식가격에 기반을 둔 보너스를 받는다면 그들은 기업의 수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기업의 소득을 받고 새로운 장비와 설비에 투자하는 대신에,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는 대신에, 더 많이 생산하는 대신에, 자본 투자 대신에 단지 자기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데 돈을 사용할 것이다. 주식을 매입하면 주식 가격이 올라가고 그들은 ‘보라, 나의 회사 경영이 어떻게 주식가격을 올렸는지를, 그러니 나에게 더 높은 보수와 스톡옵션과 보너스를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본 이득, 이 공짜 점심(불로소득)에 과세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의 왜곡을 낳고, 이것이 삐께띠가 다룬 통계를 산출한다.

▷ [삐께띠의 책이 맑스의 『자본론』을 계승한 것(“a retake of Marx’s Das Kapital”)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홍보상으로는 그렇게 부를 수 있으나 이 책은 맑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맑스의 『자본론』은 감가상각(depreciation)에 기반을 둔다. 사유화와 사기를 의미하는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맑스이다. 삐께띠의 분석은 (그의 부모가 트로츠끼주의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맑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① 감가상각은 자본 투자, 건무, 장비 기술에 들어가는 비용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신고되는, 소득에서 공제하는 회계항목이다. 이는 원래 투자된 자본의 양을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서 투자된 자본에 추가되는 이윤과는 다르다. 허드슨의 책 J is for Junk Economics의 ‘감가상각’ 항목의 한 대목은 이렇다. “감가상각은 칼 맑스에 의해 처음 가치이론에 추가되었다. 맑스는 께네Quenay의 경제표를 비판하면서 께네가 곡물 가운데 종자로 따로 떼어 자본비축고를 유지하고 다음 해 파종에 쓸 몫을 무시했음을 지적했다.” ② 흥미롭게도 허드슨의 아버지도 트로츠끼주의자이며, 허드슨이 태어난 미니애폴리스는 당시 미국 유일의 트로츠끼주의 도시였다.― 정리자]

▷ [맑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법칙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보다 더 오해된 것은 없다. 맑스가 말한 것은 자본이 생산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에 비해 증가할수록 이윤보다는 감가상각의 형태로 회수되는 자본이 양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맑스는 비용회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농주의자들과 께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께네의 경제표는 경제에서 소득의 순환, 지주들이 받은 지대의 순환을 말한다. 지주들은 일부는 소비하고 일부는 지출하는데, 여기서 빠진 것은 지대소득에서 새 종자 곡물을 사는 데 지출되어야 하는 양이다. 맑스는, 공장제 생산을 하는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기계가 있는 공장을 짓는 데 백만 달러를 쓰고 그것으로 이윤을 창출할 것이라면 투자된 백만 달러에 대한 이윤(5%, 즉 1년에 5만이라고 치자)만 얻는 것이 아니라 백만 달러도 회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장과 장비가 마모되거나 노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정되는 가격에는 이윤분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된 자본의 회수분도 포함된다. 그래서 맑스가 이윤율 저하를 설명하는 대목을 직접 읽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책 『거품과 그 너머』(Bubble and Beyond, 2012)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에 대해서,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허드슨이 말하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전문분야의 틀 내에서의 것이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4장 「법칙 그 자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점진적 발달의 표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이윤율 저하 경향이란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의 자본주의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생산자의 생산능력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는 소외의 형태로 즉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자본(화폐자본)의 물신화를 낳는다.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에서는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이 이와는 다른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자본을 넘어가는 과정이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데, 맑스가 늘 말한 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본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조건도 생산자의 높아진 생산 능력 이외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는 ‘사회적 개인’과 ‘일반지성’을 말하는데, 전자는 생산능력이 높아진 주체성(생산자)의 특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 능력이 기계(맑스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디지털 장비들이 여기서 말하는 ‘기계’의 주된 구성부분이 될 것이다)를 통해 구현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 『공통체』등의 저작에서 이미 충분히 말해놓았다.―정리자]

[감가상각에는 과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부동산의 경우에는 더 기괴하다. 미국에서는 부동산의 가치가 상승하는 동안에도 건물이 실제로 가치를 상실하는 척할 수 있다. 건물에 수명이 있어서 건물주가 자본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동산(이는 실제로 토지를 의미한다)이 기계처럼 마모되거나 컴퓨터처럼 노후화되는 양 말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사는 뉴욕시에는 건물이 오래될수록 더 가치가 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소득의 약 10%를 건물의 유지보수에 지출한다. 그런데 건물주들은 건물이 닳아 없어지는 양 감가상각을 적용하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이윤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회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건물을 완전히 감가상각한 다음에 그것을 서로 팔거나 자신이 다시 사서 전체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같은 건물이 계속해서 닳아 없어지는 양 계속해서 감각상각한다. 계속 교체되는 소유주들은 이에 대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허드슨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 부의 격차에 대한 분석으로서 아직도 타당하다고 보는 것 같다는 말에 대해]

맑스는 캐시플로(cash flow) 일부의 구성에 대해서 말했다. (캐시플로는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이다.) 캐시플로 내에서는 자본이 기계를 사용하여 더 자본 집약적이 되는 정도로 감가상각의 역할이 이윤에 대비하여 상승한다고 맑스는 말했다. 따라서 핵심은 자본의 회수와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의 관계이다.[여기서 끊겨서 다소 불명확한데, “자본의 회수”라고 했을 때에는 불변자본의 회수로 이해하고,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은 가변자본이 낳은 이익인 이윤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정리자]

 

① return of capital  자본의 회수  투자한 자본양이 회수되는 것. 부채의 경우라면 원금이 회수되는 것에 해당한다.
② return to capital  자본 수익 투자한 자본양보다 증가한 양. 부채의 경우라면 이자에 해당한다.
③ capital gains 자본 이득 ‘자본’(capital)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나 사실은 생산에 자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자산의 가격이 오름으로써 얻은 이득을 가리킨다.
* 여기서 ‘자본’의 두 유형/두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증식되는 자본이다. 전자의 전형은 산업자본이고 후자의 전형은 대부자본이다. (산업자본도 화폐의 형태로 차입되므로 ‘화폐자본’이라는 말은 너무 넓다.) 흥미롭게도 위의 ‘자본 이득’의 경우처럼 ‘자본화’(capitalization)도 생산과는 무관한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맑스의 『자본론』3권에 나온다. “가공자본의 형성은 자본화(capitalization)라고 불린다.(Die Bildung des fiktiven Kapitals nennt man kapitalisieren.) 모든 규칙적인 주기의 수입은, 평균이자율로 대출된 자본이 낳을 수입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평균이자율을 기초로 자본화될 수 있다. (···) 이리하여 자본의 현실적인 가치증식 과정과의 모든 연관은 그 최후의 흔적까지 모두 없어지고, 자본은 자신의 힘에 의해 저절로 증식된다는 관념이 확고하게 된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노동자가 있고 당시 이자율이 5%라면 2백만 원을 이자로 계산했을 때 원금은 2백만 원에 20을 곱한 4천만 원이다. 이제 이 노동자는 4천만 원을 가진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모든 개인을 기업가로 만드는 것은 오르도자유주의(독일에서 발생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사상)의 목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시대가 이런 ‘자본화’에 기반을 둔 사고가 만연되어 있고 ‘자본화’ 세력이 주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회라면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시대는 맑스가 본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가치증식(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된 것―의 시대일 것이다. 허드슨이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이다.

## 이 세상에 현재 존재하는 화폐들의 양을 직관적으로 가시화한 사이트를 보려면 http://money.visualcapitalist.com/worlds-money-markets-one-visualization-2017/로 가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