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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열어젖힌 새로운 전망

 



지난주 있었던 운동가 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사망은 이미 힘든 시기에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레이버는 겨우 59살이었고··· 그는 분명히 그의 앞에 더 많은 눈부신 책들을 내놓을 것이었고··· 다수의 위기들이 합류하는 때에 전체 체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의 사유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인간 사회를 공부한 학생으로서, 그는 인간 조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역할을 해 왔던 사회 조직의 구조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지식을 적용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병적 측면들을 대담하게 비판했으며 그 다음에는 진지한 대안들을 제안하고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는 통상적으로 대학의 학자가 경력 향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급진적인 활동 때문에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충돌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한 일이다. 그의 지적 탁월함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예일대학교의 통보가 있었을 때 4,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그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는 싸움에서 패배했고 어쩔 수 없이 영국의 더 푸른 들판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결국 런던정경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금융을 현저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재구성한 그레이버의 2011년 역작인 『부채 그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관료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인 『규칙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 자본주의적 위계가 만드는 무의미한 직업들에 대해 논한 『쓸데없는 직업』(Bullshit Jobs)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Toward an Anthropological Theory of Value: The False Coin of Our Own Dreams)은 그의 덜 알려진 초기 연구서 중 하나인데, 나는 ‘시장가격 = 가치’라는, 가치를 간단한 문제로 간주하는 방대한 경제 문헌들 사이에서 이 책이 보기 드문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연구로 인해 마침내 그 나와 나의 동료들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의 활동과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레이버와 함께 2016년에 가치의 의미를 주제로 워크숍을 공동조직했다. 워크숍에서 나온 보고서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가치를 다시 상상하기: 돌봄 경제, 커먼즈, 사이버공간, 자연으로부터의 통찰.”

그레이버는 진보주의자들과 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그 밖의 사람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있어서 특히 불리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가격에 기반을 둔 통상적인 가치론을 넘어서는 진지하고 공유된 가치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워크숍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분명히 밝혔고 일련의 전도유망한 연구 방향들을 나열했다. 새로운 가치이론은 새로운 경제운동이 힘을 들여 다루어야 할 주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나와 그레이버의 유일한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내가 많은 출처로부터 지금껏 들어온 것을 확인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별난 박식가였고 정말이지 진국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과감한 아이디어들이 학문적 가식이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굳어지게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지적 탁월함, 개인적 용기, 그리고 부조리를 포착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친구들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움직이는 진앙(震央)이었다. 그들은 각각 그레이버의 광범위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그레이버는 주위에 불꽃을 튀기며 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아낌없이 보답했다. 오큐파이운동(Occupy movement)의 구호인 “우리는 99%다”가 그레이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증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단지 “99%”라는 문구를 생각해냈을 뿐이라고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큐파이운동 조직 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이)다”를 생각해냈으며, 이는 위원회들이 곧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이 커졌을 때 그레이버는 자신이 “무정부주의 인류학자”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국한되는 데 반대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정체성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가 틀에 박힌 역할과 평판의 폭정을 거부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살아있고, 호기심 있고, 탐구하고, 모험적인 인간보다 과연 무엇이 더 만족스럽고 생산적이겠는가?

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책에서 이토록 기민한 판단과 신랄한 논평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부채(負債)에 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억한다. “나에게는 다음이 바로 부채가 가진 도덕적으로 사악한 측면이다. 즉 금융의 명령이 계속해서 우리 모두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순히 돈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약탈자와 같게 만드는 방식이다.”

또는 “세상의 궁극적인 숨겨진 진실은 세상이 우리가 만드는 무언가라는 점, 그리고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라는 점이다.”

또는 “누군가가 ‘자유시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때마다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좋은 생각이다. 그는 절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그레이버에 대한 논평이 있는 여러 곳에 쓰여있는 것의 많은 부분을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레이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뉴욕타임즈 부고 기사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가디언지에 쓴 논평을 읽어 보길 바란다.

나는 그레이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그의 깊고 정묘한 학식을 적용했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독창적인 경로들을 제안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별난 상상력과 진지한 목적을 섞어 항상 새로운 운동 전략을 세웠다. 진정성, 진지한 사고, 개인적인 아량 그리고 해학을 가지고 인간의 곤경에 대응하는 것보다 결국 무엇이 더 가치 있을 수 있겠는가?




금융 대 경제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유튜브 동영상 Finances vs Economy, Credit vs Money (2012년 3월)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2012년 2월 이탈리아의 리미니(Rimini)에서 ‘현대 화폐 이론’(Modern Money Theory)를 주제로 열린 1회 이탈리아 풀뿌리 경제학 대회(the first Italian grassroots economic summit)에서 마이클 허드슨이 한 발제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 발제의 영어 스크립트는 https://neritam.com/2012/05/19/modern-money-theory/ 에서 볼 수 있다.

[마이클 허드슨]

저는 중앙은행과 상업은행(commercial bank)의 차이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이에 앞서 Stephanie Kelton이 현대화폐이론의 기초를 설명하는 발제를 했다.―정리자] 중앙은행이 화폐를 창출하고 상업은행(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은행)은 신용을 창출한다고 합니다. 2008년 이후 3년 동안 우리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폐창출과 신용창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임금은 지난 30년 동안 하락했고 소비자 물가와 상품가격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있었습니다. 이자율이 20%에서 오늘날의 4분의 1%로 떨어지면서 역사상 최대의 증권시장 가격 상승이 일어났습니다. 부동산 가격, 증권가격, 주식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그 결과 부의 가치(대부분의 부는 인구의 1%가 소유하고 있습니다)가 임금에 비해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계급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래의 고용주(자본가)와 고용인(노동자)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금융과 경제 사이의 전쟁입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신용은 노동을 고용하는 자본투자에 들어갑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업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할 때 이는 부에 대한 청구권의 창출이고 모기지 부채의 창출이며 기업 부채의 창출이고 개인적인 부채 및 학자금 융자의 창출, 신용카드 부채의 창출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상업은행 신용창출은 중앙은행의 화폐창출과 다릅니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창출할 때에는 장기적이고 공적인 목적에서 그렇게 합니다. 정부지출과 공적 기반시설에의 자본투자에 재정을 댑니다. 역사 전체에 걸쳐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공적 기반시설―도로, 통신 시스템, 철로, 상수 및 하수 시스템 등―에의 자본투자는 모두 제조업에의 자본투자 전체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에서 뉴욕시의 부동산 가치는 미국 제조업 전체의 설비의 가격보다 높습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는 이런 차이를 무시합니다. ‘MV = PT’[Money×Velocity = Price×Transaction]라는 공식이 있습니다. 화폐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오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말하는 가격 수준은 소비자 물가와 상품가격만을 포함합니다. 교과서 어디에도 신용공급과 자산(부동산, 주식 및 증권)의 가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 경제에서 신용의 99%는 이 금융 청구권들에 지출됩니다. 매일 국민총생산 전체와 맞먹는 양이 뉴욕 어음교환소와 시카고 상업거래소를 통과합니다. 지불의 방대한 양이 금융부문에 속합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늘어난 은행대출 전체가 다른 금융기관에 대출한 것입니다.

교과서는 은행들이 산업에 대부하여 기계를 구입하고 공장을 지어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하는 행복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허구입니다. 미국 경제에서 모든 증가된 자본투자는 은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잉여금(retained earnings)에서 옵니다. 은행들은 새로운 자본투자를 낳기 위해 대부하지 않습니다. 모기지, 자본금, 부동산, 이미 존재하는 자산을 담보로 대부하지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해 대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부화폐를 말할 때 우리는 경제에 박차를 가하는, 경제성장과 새로운 투자를 촉진하는 정부지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정부투자 및 중앙은행 화폐창출의 기능은 민간은행의 기능과는 매우 다릅니다. 정부의 화폐는 그야말로 부채입니다.[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정부가 빚을 지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정리자] 당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리라[이탈리아의 통화―정리자]는 부채입니다. 지폐도 부채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무도 그 상환을 생각하지 않는 부채입니다. 이를 상환한다는 것은 호주머니에 통화가 남아있지 않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의한 화폐와 신용의 창출을 이렇게 공익서비스(public utility)로 보는 이론이 현대 화폐 이론(Modern Monetary Theory)이다.―정리자]

상업적 부채[공익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부채―정리자]는 상환을 전제로 하며 이자를 낳습니다. 이 상업적 부채가 늘어나자―모기지, 기업에의 은행대출, 기업사냥을 위한 부채 등―엄청난 부채 간접비용이 경제에 큰 부담으로 지워집니다. 상업은행들이 더 많이 대부하면 할수록 이 부채의 간접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이자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부채를 갚는 데 지출되는 화폐는 재화와 서비스에 지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업은행들이 부채를 창출할 때에는 재화와 서비스에 지출되던 소득이 부채서비스 비용을 지불하는 데로 돌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채디플레이션(debt deglation)입니다. 부채디플레이션이 오늘날처럼 오래 진행되면 금융자본주의의 후기 단계인 부채디플레이션 단계, 긴축 단계로 들어서는데, 바로 유럽이 오늘날 이 단계에 와 있습니다.

화폐에 대한 이 모든 전문적인 논의에는 정치적 측면이 있습니다. 정부가 화폐를 창출한다면, 혼합된 경제, 즉 사적 자본투자와 공적 자본투자가 혼합된 경제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럽의 모든 나라들과 미국을 부유하게 만든 경제입니다. 경제에 비용가격[이윤을 붙이지 않은 가격―정리자]으로 공급될 공적 기반시설에 정부가 투자하여 그 기반시설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화폐를 창출할 수 없게 되면, 경제에 필요한 모든 신용이 상업은행들에 의해 창조되게 되면, 상업은행의 신용창조가 부채 디플레이션을 낳으며, 정부가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재정을 댈 수 없다면, 상업은행들은 ‘좋아, 그러면 파시오’하면서 기반시설을 사유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아일랜드에서 보고 있고, 아이슬랜드에서 본 것입니다. 이렇게 금융이 기반시설을 가로채는 일은 상업적 은행업자들이 중앙은행이 신용을 창조하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기반시설은 은행의 방대한 양의 새로운 대부를 통해 구매됩니다. 그래서 상업은행의 정치적 전략은 맨 먼저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화폐를 창출하지 못하게 하고 그 다음에 정부들이 (이자 없는 부채를 내지[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말한다―정리자]) 말고 상업은행들로부터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상업은행들에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부들은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서 기반시설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그 결과 오늘날 은행업자들이 과거에는 군사침략을 통해 이루었던 재산탈취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전쟁입니다. 금융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벌이는 전쟁입니다. 노동뿐 아니라 산업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에 대해서 벌이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도구는, 정부의 화폐창출이 인플레이션을 낳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난 30년 동안 여기 이탈리아에서 물가가 그다지 오르지 않았고 임금이 그다지 오르지 않았으며 오른 것은 주택가격이고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평생 갚을 빚을 져야 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학생들은 교육을 받아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십년 갚을 빚을 져야 합니다. 100년 전에는 정부가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지도록 재정을 대는 것이 이상(理想)이었는데 말입니다.

교과서들은 마치 경제가 빚 없이 실질적 교환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것을 교과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상업은행의 신용창조와 권력 장악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보들레르는 사회가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악마가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악마의 가장 교묘한 책략은 당신이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La plus belle des ruses du diable est de vous persuader qu’il n’existe pas.”)는 보들레르의 Spleen de Paris의 “Le Joueur généreux”(「관대한 도박꾼」)에 나온다.―정리자] 금융 부문은, 은행들이 부풀리고 있는 가격이 자산 가격, 부동산 가격, 증권 및 주식 가격임을 당신이 보지 못하고, 상업은행들의 역할은 사회 위에, 노동 위에, 산업 위에 군림하는 부의 권력을 증가시켜 은행업자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지배계층―19세기 후반에 비판을 받은 지주들보다 훨씬 더 큰 부담을 사회에 지우는 지배계층―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점을 당신이 보지 못하는 지점에서 승리합니다.

200년 동안 고전경제학은 산업자본주의로부터 봉건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 잔재란 세습 귀족계급의 사적 토지소유와 상업은행들이었습니다. 상업은행들은 정부로 하여금 빚을 지게 하고 그 다음에 담보권을 행사하여 부채를 독점과 교환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무역회사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 독점을 누린 영국은행 등. 미국에서도 철도를 통해 유사하게 독점이 창출되었는데, 철도 건설용 불하 토지의 사유화를 통해 최대의 토지소유자들이 나옵니다. 발자끄는 그의 소설에서 모든 가족 재산 뒤에는 종종은 발견되지 않는 거대한 절도가 존재한다고 쓴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경제학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절도, 자본 이전(移轉),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s)을 마치 그것이 생산적인 양, 마치 모든 소득이 근로소득인 양 취급합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는 ‘국민소득 및 생산계정’(NIPA)을 발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대(임대료)는 토지소유자들(집주인들)의 소득으로 되어있고 이자는 은행업자들의 소득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금융 부문은 모든 신고된 기업소득의 40%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설비에 투자되어 노동을 고용하는 산업자본으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빠져나와 금융자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금융자본이 대출되어 이자를 받고 그 이자를 다시 대출하며 이것이 반복되어 미국인들이 복리의 마법이라고 부른 기하급수적인 증가가 이루어집니다. 복리의 증가는 너무 커서 그 어떤 정부의 지불 능력도 훨씬 넘어섭니다. 그 결과는 채무불이행이 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유럽과 미국은 금융 부문이 자산을 탈취하고 공적 도메인, 공기업, 도로, 방송 시스템, 항구 등을 사유화하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자산을 사유화할 때에는, 가령 도로를 사유화할 때에는 ‘구매자들’이 이자를 지불해야 하며 배당금을 지불하고 회사 경영진에게 엄청난 액수의 봉급을 주며 증권인수업자에게 금융 수수료를 지불하고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제공하며, 그런 다음에는 이 공공서비스의 가격을 가능한 한 최고의 자산소득를 끌어내는 지점까지 올립니다. 경제는 통행료 징수로 전환됩니다. 통행료 징수소를 주택에 접근하는 곳, 도로에 접근하는 곳, 전화 시스템에 접근하는 곳, 신용카드에 의한 지불에 사용될 돈을 위한 신용에 접근하는 곳에 설치합니다. 갑자기 우리는, 경제를 작동시키는 비용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특권에, 금융 부문에, 그리고 자산소득자(rentiers)라고 불리던 층―이들은 단지 얻어낼 것을 청구할 뿐이며 부를 자신들의 수중으로 빨아들입니다―에 지불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생산과 소비로 이루어지는 현실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실제로 쇠퇴했습니다. 지금 경제에서 모든 성장은 자산소득자 부문으로, FIRE 부문(finance, insurance and real estate)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는 간접비용에서 일어납니다. 지금은 이 부문에 법시스템과 독점시스템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과서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새에 예전에 산업자본주의로서 분석되던 것이 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금융자본주의는 100년 전에 생각했던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산업에 자금을 대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 기생과 간접비용에 자금을 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치 부자가 되는 길은 빚을 져서 그 돈으로 가격이 부풀어 오를 자산을 사는 것인 양 제시됩니다. 부동산이나 공기업의 가격이 오를 때, 이는 실제로 가치가 증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택이나 재산은 은행이 대출해주는 만큼의 값을 가지며, 대출조건이 느슨해지면 경제의 지불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자산 가격에 생기게 됩니다. 마감 기한이 여지없이 옵니다. 금융 자본주의는 거품 경제로 전환됩니다. 은행들이 채무불이행을 그리고 연쇄적 지불의 단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은 ‘돈을 빌려서 부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갚을 수 없으면 은행에서 돈을 더 빌리고, 그저 그만큼 이자를 추가한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가 바로 이런 식의 상황이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 갚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채는 삭감되어야 했습니다.

정부의 중앙은행 화폐창출로부터 상업은행 신용창출로의 이러한 전환의 필연적 결말은 파산, 부채의 삭감입니다. 나의 분석의 기저에 있는 기본 전제는 ‘갚을 수 없는 부채는 갚게 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내가 아는 월가의 모든 분석가들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갚지 않는가?’입니다. 은행들로 하여금 담보권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갚지 않는가? 오늘날 미국의 모든 부동산의 4분의 1에는 그 가치보다 더 많은 돈이 담보대출로 걸려있습니다. 이는 자택소유자의 4분의 1―거의 1천만 명입니다―이 자신의 재산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날드 트럼프도 그럴 겁니다. 물론 골드만삭스도 나쁜 투자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들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부자들의 빚만이 갚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99%가 부자에게 진 빚만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경제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부자가 되는 길은 실제로는 돈을 빌려 가격이 오르기를 희망하는 재산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미국,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에서처럼 가격이 붕괴하게 되더라도 부채는 그대로이며 네거티브 에쿼티(negative equity) 상태[집값에서 부채를 제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상태―정리자]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재산이 채무자에게서 채권자에게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돈을 버는 길은 인구의 99%로 하여금 1%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빚을 지는 것이 돈을 버는 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 역사적 시기는 결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령 앨런 그린스팬(Alan Greenspan)이 미국의 자택소유자들에게 집의 가치를 담보로 돈을 빌리라고, 빚을 지라고, 집을 돼지저금통이라고 생각하고 임금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하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라고 말했을 때, 이런 쓰레기 경제학에 속아서 그렇게 합니다.

미국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돈을 들여야 하고, 이전에는 공적으로 지원되던 것에 돈을 들여야 하는 사이에, 은행들은 갑자기 교육을 금융화하고 공적 부문을 금융화하며 심지어는 기업 부문과 산업 부문도 금융화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증권시장은 산업에 자금을 대고 부채가 아닌 자기자본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즉 산업투자를 해서 노동을 고용할 수단으로서 제시됩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증권시장은 기업사냥꾼들과 경영권 매수를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 회사를 사고 그 회사가 얼마나 이윤을 만들어낼지 계산하여 그 이윤을 은행업자들에게 지불하는 것, 마치 부동산 투자자들이 건물을 사듯이 회사를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든 이탈리아 혹은 유럽의 투자자든 부동산 투자자들이 상업적 재산을 구매하기를 원할 때, 그들은 얼마나 많은 임대료 수익이 생길지를 계산합니다. 그들은 서로 입찰하여 경합합니다. 담보를 얻기 위해, 그 재산을 구매하기 위해 가장 많은 임대료를 은행에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이 낙찰을 받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돈을 사용하기’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저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행들이 컴퓨터 키보드로 입력하여 새로 창출한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행들은 대출자를 위해 은행계좌에 대출액을 적어 넣음으로써 (대출자는 담보 부채든 아니면 개인 부채든 차용증서에 그 이자를 갚겠다고 서명을 합니다) 자유롭게 화폐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은행들은 이런 화폐창출이 인플레이션을 낳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부의 화폐창출만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상업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컴퓨터에 가서 전자적으로 화폐를 창출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보았듯이 상업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데도 왜 정부의 화폐창출은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말을 듣고 상업은행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행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이득[capital gain, 사업에 의한 이득이 아니라 자산의 가격이 올라서 거둔 이득을 말한다.―정리자]을 거두기를 바라면서 모든 자산소득(rent)과 모든 기업 이윤을 은행에 내게 함으로써 돈을 법니다.

미국에서 기업사냥꾼들과 부채를 통해 기업을 매수하는 회사들은 비용절감, 임금삭감, 정리해고, 다른 나라로의 아웃소싱을 통해, 그리고 특히 연금기금을 탈취하여 그것으로 은행 빚을 상환하여 부채를 삭감하고 자기자본을 늘림으로써 자본이득을 거둡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자란 도시 시카고에서 부동산 투기자인 쌤 젤(Sam Zell)이 돈을 빌려 최대의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을 샀습니다. 그는 ‘사원 주식소유 플랜’을 약탈했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그에게 <시카고 트리뷴>을 살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갚았습니다. 그는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이 소유한 야구팀인 <시카고 컵스>를 팔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회사를 매우 잘못 경영하여 회사가 파산했으며 그 바람에 사원 주주들이 쓸려나갔습니다. 사원들은 그가 그들의 돈을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에 한 연설에서 ‘사기는 없다, 모두 합법적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시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시장의 ‘자유’는 금융 세력이 탈취할 자유, 분식회계를 할 자유, 빌 블랙(Bill Black) 교수가 말하는 일[블랙은 회사나 조직을 통제하는 자가 자신이 통제하는 회사나 조직을 사기를 치는 ‘무기’로 사용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통제 사기’(control fraud)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정리자]을 할 자유로 재정의되었습니다.

사기가 돈을 버는 데 본질적으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경제를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부자가 되는 길을 돈을 훔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 부자가 되는 길을 돈을 빌려서 가치가 상승할 재산을 사는 것이고 경제를 위축시키고 공적 도메인으로부터 재산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발자끄 같은 소설가나 보들레르 같은 시인이 교과서에 나오는 노벨상을 탄 경제학자들보다 경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인가요? 왜 교과서를 보기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러가야 하는 것인가요?

오늘 우리가 이 모임에서 하려는 것은 실제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고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행 우주 대신에 현실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쌔뮤얼슨(Paul Samuelson)은 미국에서 학생들을 세뇌하는 데 사용되는 자신의 교과서의 시작 부분에서 경제 이론의 기준은 그 공리들의 일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을 때 들은 말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에는 불신을 정지시켜야 합니다.[‘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불신의 기꺼운 정지)라는 말의 출처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S. T. Coleridge)의 Biographia Literaria(1817)로서 시에서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포용적으로 대하는 태도로서 말한 것이다.―정리자] 공상과학소설을, 작가가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등장인물들을 믿어야 합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를 보러갔다 나올 때에는, ‘잠깐, 무언가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쌔뮤얼슨이 하지 않은 말은 이 전제들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우지 않고 다른 행성에서 평행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듣습니다. 정부도 없고, 사기도 없고, 전체 경제가 실질적 교환에 의해서 작동하고, 부채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아무도 돈을 상속받지 않으며,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소득과 부를 일해서 버는 그런 평행 우주 말입니다. 실제 현실은 이와 반대인데, 이는 오늘날 소설에서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현실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 1년, 2년을 가고 10년, 20년을 가며 이제 한 세기가 지난다면, 그리하여 경제에 대한 거짓된 상이 그려진다면, 그 배후에 이익을 보는 특수한 세력이 있다고 확신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거짓된 상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지원을 받아 일어납니다. 은행업 부문이 대학들에서 가르쳐지고 신문에서 널리 전파되며 은행의 후원을 받는 정치가들이 말하는 쓰레기 경제학을 지원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마치 화성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와는 다른 종류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들고자 했고 공중에 속하는 것을 탈취하려는 금융 계층은 없는 척 하고자 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에 의한 중앙은행 화폐창출과 경제의 축소, 긴축, 낮은 임금, 낮은 산출량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은행 신용창출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귀결됩니다. 그리스가 당하는 것을 여러분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신들의 항구와 땅과 관광지역들과 상·하수도 시스템을 주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사용료를 물리고 당신들이 연금으로 받아가기를 기대하는 돈의 규모를 줄여 우리가 쓸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죠.

과거에는 이런 일을 하려면 군대가 필요했는데, 오늘날에는 군대 없이 행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은행들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허구적인 상을 믿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