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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Assmebly의 1장 3절 “Leaderless movements as symptoms of a historical shift”(‘역사적 전환의 징후로서의 지도자 없는 운동’)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오늘날 운동에 지도자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산발적인 일도 아니다. 대의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에의 열망으로 인해서 사회운동 내에서 위계적인 구조들이 전복되고 해체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지도 문제는 심오한 역사적 변형의 징후이다. 근대적 조직형태들이 파괴되었지만 적절한 대체물들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를 온전하게 보기 위해서는 분석을 정치 영역 너머 경제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확대해야 한다. 이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정치영역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철창에 갇혀 있거나 묻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공권력에 의해 (때로는 제도권 좌파 정당과의 협력 아래) 투옥되거나 사살당한 것이다. 각 나라에는 쓰러진 영웅들과 순교자들의 고유한 목록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안또니오 그람시, 체 게바라, 넬슨 만델라, 프레드 햄턴(Fred Hampton), 이브라힘 카이파카야(Ibrahim Kaypakkaya) 등등. 이와 다르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살해와 투옥이라는 가장 스펙터클한 것들 말고도 다른 억압 무기들이 많다. 전문화된 법을 통한 박해, 비밀공작, 검열, 지배적인 대중매체를 통해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창출하거나 아니면 사건을 왜곡하기, 지도자들을 유명인으로 만들어서 포섭하기. 모든 반란 집압 매뉴얼은 혁명적 지도자의 제거가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머리를 자르면 몸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도층이 왜 쇠퇴하는지를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늘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외적 원인에 초점을 두는 것은 운동의 진화에 대한 빈약한 이해를 가져온다. 변화의 진정한 동력은 내적이다. 운동 내부에서 반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중심적인 토대가 된 것이 내적 이유이다.

이 맥락에서 하나의 강력한 계기는 1960~70년대 페미니즘 조직들이 운동 내에서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도구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의식고양과 모임에서 모든 사람의 발언을 보장한 것은 정치적 과정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양성하고 모두가 관여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만다는 수단이었다. 페미니즘 조직들은 또한 예를 들어 전체의 허가 없이는 미디어에 아무도 발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성원들이 대표자나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 개인이 지도자나 대표자로 지명되면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 평등, 조직의 활력강화의 성취를 무너뜨릴 것이었다. 누군가가 지도자나 대변인으로 자청하거나 그렇게 지목되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녀는 “trashing”이라 불리는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때로는 비판과 고립의 몰인정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권위주의적인 정신이 있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민주주의를 창출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1960~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민주적 실천을 생성하고 발전시키는 이례적인 인큐베이터였다. 이 실천은 현재의 사회운동에 일반화되게 된다.

실천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대의제를 비판하는 이러한 경향은 1960~70년대의 다른 운동들에서도 번성했다. 이 운동들은 남성 입법자들이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백인의 권력구조가 흑인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운동의 지도자들이 조직을 대표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부했다. 운동의 많은 부문들에서 대의제의 해독제로서 참여가 장려되었고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가 중앙집중화된 지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오늘날 리더십의 쇠퇴를 탄식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미국 흑인정치의 역사를 반대사례로 지적한다. 1950~60년대의 시민권운동의 성공은 대부분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소속의) 흑인 남성 설교자들인 (마틴 루터 킹 2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의 지혜와 실력 덕분으로 돌려진다. 맬컴 엑스, 휴이 뉴턴(Huey Newton),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등과 연관된 <블랙 파워>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것으로 흑인 페미니즘 담론에서 발전되었으며 지도자를 미화하는 전통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소수 노선도 있다.

에리카 에드워즈(Erica Edwards) : “카리스마적인 지도층을 정치적 소망으로서 그리고 서사 및 설명의 메커니즘으로서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것(전자는 ‘우리에겐 지도자가 없어’라고 탄식하는 것, 후자는 흑인 정치의 이야기를 흑인 지도층의 이야기로서 말하는 것)은 ···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만큼이나 ··· 정치적으로 위험하다.”(([원주9] Erica Edwards, Charism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2, p. 12. For her explanation of the three types of violence, see pp. 20–21.))

에드워즈가 분석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층의 폭력’의 세 양태

① 과거를 허위적으로 제시함 (다른 역사적 주체들을 가림)

② 운동 자체의 왜곡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권위구조 창출)

③ 이성애규범적인 남성성(heteronormative masculinity) (카리스마적 지도에 함축된, 젠더와 성애에 대한 규제적 이상)

마르시아 채털린(Marcia Chatelain) : “소독처리가 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민권 이야기의 가장 해로운 영향은 카리스마적 남성 지도자 개인들이 사회운동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이는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원주10] Marcia Chatelain, “Women and Black Lives Matter: An Interview with Marcia Chatelain,” Dissent, Summer 2015, pp. 54–61, quote on p. 60.))

일단 주류 역사들 너머를 보면 미국 흑인 운동을 포함한 근대 해방 운동 전체에 걸쳐서 민주적 참여의 여러 형태들이 제안되고 실험되었고 오늘날 규범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2014년 이후 반복되는 경찰의 폭력에 대응하여 미국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강력한 항의 운동들의 연합인 <흑인들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는 지도에 대한 운동들의 면역체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BLM은 전옹적인 흑인 정치제도의 지도 구조와 기율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종종 비판받는다. 그러나 해리스(Frederick C. Harris)의 설명대로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흑인 정치를 지배해온 카리스마적 지도 모델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그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원주11] Frederick C. Harris, “The Next Civil Rights Movement?,” Dissent, Summer 2015, pp. 34–40, quote on p. 36.)) 이전 세대들이 가르친 중앙집중화된 지도는 이들의 생각으로는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BLM에는 지도자도 대변인도 없다. 맥케슨(DeRay Mckesson)이나 컬러스(Patrisse Cullors) 같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촉진자들(facilitators)의 넓은 네트워크가 거리에서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연결을 구축하고 때로 집단행동의 ‘안무’—Paolo Gerbaudo의 용어를 쓰자면—를 한다. 물론 네트워크내에 차이들이 존재한다. 일부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명시적인 정책목표와 ‘흑인의 점잖음’도 거부하고 저항과 분노의 격렬한 표현으로 나아가는 한편, 다른 일부 활동가들은 수평적 조직구조를 정책적 요구들과 결합하려고 노력한다. 2016년의 <흑인 생명 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 플랫폼이 후자의 사례이다. 달리 말해서 BLM 안팎의 활동가들은 민주적 조직을 정치적 효율성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시험하고 있다.

BLM 활동가들이 보여주는, 전통적 지도구조에 대한 비판은 젠더 및 성애 위계에 대한 거부와 강하게 중첩된다. 과거에는 시스젠더 흑인들이 운동의 전면에 부각되고 퀴어, 트랜스를 비롯한 소수자들은 뒷전에 있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반면 BLM에서는 여성들이 중심적인 조직화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세 명의 여성들— Garza, Cullors, and Opal Tometi—이 #BlackLivesMatter라는 해시태그를 만들어 낸 것이 종종 그 예로 들어진다.)

지도자의 젠더와 성애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운동에서 발전된 조직형태들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해방을 위해 흑인 여성들—그 가운데 다수가 퀴어이다—의 재능을 한데 모으는 운동이 지도자가 없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흑인 여성들은 매우 종종 보이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원주 16] Chatelain, “Women and Black Lives Matter,” p. 60)) BLM 운동은 과거로부터 (때로는 지하에 잠복했던) 민주적 경향들을 한데 모으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하는 장이다. 오늘날의 많은 운동들처럼 그것도 새로운 조직모델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전환의 징후를 보여준다.

오늘날 지도자들의 결핍을 탄식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종종 ‘사회적 지식인들’(public intellectuals)의 부족을 한탄한다. 때로 정치조직에서의 지도의 거부가 학자나 지식인에게 운동을 대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과 상응하기도 한다. 1968년 혁명 시에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이 ‘말을 잡고’ 발화를 했다. 이러한 ‘말을 잡기’(prise de parole, taking the word) 자체가 혁명을 구성했다. 그러나 발화를 하는 행동만으로는 무엇을 말할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정을 받는 지식인에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식인이 되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싸르트르가 주된 모델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이러한 대변 행동이 다른 목소리들을 익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1960년대 후반에 인식되었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사례가 있다. 그는 운동을 지지했고 운동에 대한 아도르노의 무근거한 비판을 공격했지만, 그 또한 운동을 개인주의 윤리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에 묶어놓음으로써 운동을 붕괴시켰던 것이다.(([원주 18]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the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과의 갈등에 대한 하버마스 관점에서의 설명으로는 Matthew Specter, Habermas: An Intellectual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p. 101–116 참조.)) 활동가들 자신들은 개인주의에 대항해서 집단적 기획을 표현하려 했고 (정당과 국가 관료제로 구성된) 순전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대항해서 피착취자의 진실과 혁명의 필연성을 표현하려 했다.

가장 총명한 지식인들은 이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운동을 지지할 때에는 대변인으로 행세하기보다 운동으로부터 배우려고 하거나 운동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했다. 들뢰즈, 푸꼬, 싸이드(Edward Said), 스피박(Gayatry Spivak), 버틀러(Judith Butler), 홀(Stuart Hall)이 그 좋은 사례들이다. 최고의 지식인들이 배운 근본적 교훈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이다. 이제 운동이 지식인들에게 가이드가 되어 정치적 방향을 표시해주어야 한다. 이미 1960년대 초에 트론띠(Mario Tronti)가 ‘당 지식인’의 역할이 끝났음을 이해했다. 이제 모든 이론적 지식은 실천 활동에 함입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적 지식인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So, let’s be done with public intellectuals!) 학자들이 상아탑에 갇혀 있어야 한다거나 잘 모르는 소리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재능과 의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공동연구 과정에 협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의사결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도 문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그 정치적 계보를 구축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국가와 우익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지만 더 중요하게는 운동 자체 내에서 방지되어왔다. 운동에서 권위와 수직성에 대한 비판은 매우 일반화되어서 이제 지도는 운동의 목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해방 운동은 더 이상 지도자를 산출할 수 없다. 아니, 지도가 운동과 양립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운동이 권위, 비민주적 구조들,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 대의메커니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운동이 머리 없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베어냈다. 지도에 대한 내적 비판은 이제 곧바로 조직화의 문제로 이어진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 오늘날 해방운동의 지도자들이 등장할 때에는 가면을 써야 한다. 가면을 쓴 부사령관 마르꼬스는 상징적이다. 그의 가면은 경찰과 군대가 알아보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사빠띠스따 공동체들의 민주주의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면은 사령관(subcommandante)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표시했으며 ‘마르꼬스’가 개인이 아니라 모든 종속된 민중의 자리를 나타냄을 강조할 수 있게 했다. “마르꼬스는 샌 프란시스코의 게이이며 남아프리카의 흑인이고 유럽의 아시아인이며 산이시드로(San Isidro)의 치카노이고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이고 산크리스토발(San Cristobal) 거리의 토착민이다.”(([원주 21] Subcomandante Marcos, 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 (EZLN) communique of May 28, 1994, reprinted in Zapatistas! Documents of the New Mexican Revolution, Autonomedia, 1995, pp. 310–311.))

그러나 가면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2014년 5월 25일 마르꼬스는 자신의 모습은 항상 운동을 위한 홀로그램일 뿐이었으며 이제 그만 존재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지도자의 가면조차도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

① 어떻게 위계 없는 조직을 구축할 것인가?

② 어떻게 중앙집중화 없는 제도들을 창출할 것인가?

여기에는 지속적인 정치적 틀에는 초월적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유물론적 직관이 담겨 있다. 즉 정치 조직과 제도에는 주권이 필요하지 않다.

이는 근대의 정치적 논리와의 심오한 단절을 나타낸다. ‘근대의 황혼기’의 빛이 근대 여명기의 빛을 닮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6, 17세기에 스피노자, 알투지우스(Johannes Althusius) 등은 주권 및 절대주의국가의 이론가들인 홉스, 보댕 등에 맞서 싸우며 대안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시했다. 수 세기 동안 군주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계급들이 각자의 힘을 시험하며 충돌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로 피지배 사회계급들이 군주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자유권들과 면제를 인정하는 법들과 문서들을 작성하게 만든 계급들이었다. 반대로 군주들이 그 사회계급들의 도전을 관리하고 다른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저항을 다스리려고 하면서 그 계급들에게 가하는 자극이 타원의 윤곽을 그리는 것을 돕는 것이다.”(([원주 24] Sandro Chignola, “Che cos’e un governo?,” http://www.euronomade.info/?p=4417. Chignola borrows the image of the ellipse from Werner Naf. [정리자] 근대 이전의 정치적 구도에서 근대의 정치적 구조로의 이동과 그 차이에 대해서는 맑스가 그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여러 번 언급한다. “정치적 계급들을 사회계급들로 변형시킨 것은 역사의 발전을 통해서이다. 기독교도들이 천국에서는 평등하지만 땅 위에서는 불평등하듯이 한 민족의 개인들은 그 정치세계의 천국에서는 평등하지만 사회의 속세적 실존에서는 불평등하다. 정치적 계급들의 사회적 계급(civil classes)으로의 실질적 변형은 절대 왕정 하에서 일어났다. 관료제가 국가 내의 다양한 신분들에 맞서 통합의 이념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왕정의 관료제와 병행하여 계급들의 사회적 차이가 정치적 차이로 남아있었다. 절대왕정의 관료제 내에서의, 그것과 병행하는 정치적인 요소였다. 프랑스 혁명이 비로소 정치적 계급들의 사회적 계급으로의 변형을 완성했다.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계급 구분을 단순한 사회적 구분―사적 삶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구분―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정치적 삶과 시민사회의 분리가 완성되었다.” “중세는 실제적 이분법의 시기이다. 근대는 추상적 이분법의 시기이다.”))

우리에게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근대 시기 유럽에서 벌어진 투쟁의 진실의 일부는 지금도 우리에게 유용하다. 우리는 근대적 주권을 반복하는 모든 지도형태에 저항해야 한다. 맞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에 알았던 것을 재발견해야 한다. 주권이 정치의 전체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비주권적 형태의 조직 및 제도들이 강력하고 지속적일 수 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