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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농업에서 오픈액세스 운동이 중요한가



 

오픈액세스(OA)를 중심으로 한 서구 담론은 대체로 학술계에 한정되어 왔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친구와 동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더 이상 학교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또는 온라인 논문 검색을 하다가 “정보이용 비용을 지불하려면 여기를 클릭하라”는 최후의, 사용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메시지에 도달했을 때 오픈액세스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은 이제 지식을 공유하는 무료 플랫폼을 제공한다. 우리 대다수가 학술적인 연구물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혹은 사회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가? 사회는 전 세계 과학•문학•예술의 성과에의 접근을 동력으로 하여 전진하지 않는가? 그 연구가 공적으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오픈액세스 운동을 추진하는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만약 우리가 학술계로부터 이 관심사를 이동시켜 자연•사회•테크놀로지처럼 상아탑을 넘어선 영역에, 궁극적으로는 이 영역들의 교차점인 농업에 적용한다면, 이 관심사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자원공유는 어떻게 생물다양성에 영향을 미치는가? 지식교환이 어떻게 공동체 복원력(resilience)을 추진하는가?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해서 가능하게 되는 정보에의 접근이 어떻게 불충분하게 대의된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 및 억압받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는가? 인구가 증가하는 지구를 먹여 살리는 능력은 어떻게 열린 문화에 달려있는가? 과거로 돌아 가보자.

2001년 12월 <열린사회 연구소>(Open Society Institute)는 오픈액세스를 홍보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서 그 당시에 프리 온라인 스칼라십(Free Online Scholarship)이라 불렸던 회의를 주최했고, 부다페스트 오픈엑세스 기획(the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에서 그 운동의 잠재력을 명확히 밝혔다. 오픈액세스 운동의 역사는 오픈액세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매체인 월드와이드웹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인터넷의 출현과 더불어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정보교환의 유례없는 가능성들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하면서 디지털 영역에 더 적합한 출판 모델을 만드는 대신에 우리는 인쇄용으로 개발되었던 바로 그 관행들을 적용했다. 한때 출판비용을 충당하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던 것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별 비용이 들지 않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그 선두주자인 오픈소스처럼, 오픈액세스는 사용자들이 적절한 출처를 밝히고 자유롭게 내용을 복사•수정 또는 배포할 수 있는 라이선싱을 장려한다. 대부분의 전문분야에서 저자들은 출판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오픈액세스로 출판을 한다고 해도 수익을 잃는 일은 없다. 하지만 오픈액세스 문헌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에 자유롭게 생산하거나 유지할 수는 없다. 오픈액세스의 큰 과제는 어떻게 학술적인 연구가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최종 사용자, 즉 독자를 위해 접근 비용과 장벽들을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훌륭한 많은 모델들이 제안되기는 한다. 그러나 ‘오픈~’ 운동은 오픈리포지터리(open repository)와 오픈저널을 열심히 후원하는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합적인 경제모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오픈액세스 운동은 학술연구물에 자유롭게 접근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학술연구의 구축과 개선을 위한 플랫폼으로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비용을 분산시키는 경제적 모델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존재한다.

하지만 “오픈/개방”의 에토스는 인터넷보다 심지어 우리 현대 문화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으며 중요하게도 라이선싱이 핵심은 아니다. 모두가 소유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진 농업 유산에 분명한 개방성의 증거가 보인다. 자연수분(受粉)(open pollination)은 식물들이 통제된 절차가 아닌 바람•벌레들•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번식하는 방법으로 그로 인해 광범위하게 다양한 유전자적 특징을 지닌 식물들이 생겨난다. 자연수분에서 보이는 유전물질의 끝없는 혼합이 식물의 전반적인 활기를 증가시키고 자연의 풍부함을 재생시킨다. 이것이 생태계의 생명 기능이며 적응과 진화의 기본 요소들이다. 그로부터 생기는 ‘잡종강세’(hybrid vigor)는 체계 전체의 복원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공생 균근 네트워크들(Mycorrhizal networks)(([옮긴이] 균근(mycorrhizal fungi)은 버섯 균사체와 식물 뿌리 사이의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공생 균근 네트워크는 개별 식물들을 함께 연결하고 물, 탄소, 질소와 다른 영양물과 미네랄을 옮기는 균근이 창출한 지하 균사 네트워크이다.)) 혹은 흔히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이라고 불리는 것이 점점 관심을 끌고 있는데, 여기서는 균류(菌類)가 개별 식물들을 서로 연결하고 물•탄소•질소 및 기타 영양물뿐만 아니라 정보를 옮기는 일을 한다. 자연은 우리가 지금껏 상상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열려있으며 그 개방성이 진화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 같다.

개방성의 긴 역사는 전 세계 수많은 전통 문화에도 있다. 종종 집단적으로 계승되고 구전(口傳)으로 공유되며 행정적•지리적 경계선들 너머로 퍼진 지역 지식은 농부들이 종자를 저장하고 종자를 교환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농업과 생물다양성 보존의 근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이루어져 왔다. 소유자가 불분명한 우리 농업 문화유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저작권•특허권•육종자권(breeders’ rights)이 토착 종자의 확산을 방해하고 지역 지식의 지속적 보호를 저해한다. 환경•농업•사회•문화•테크놀로지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자연적•인간적인 체계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독창성에 강박되는 것은 미숙한 일인 듯하다.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독창적이기 위해서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우리의 농업 유산은 우리 모두를 위해 차려진 잔칫상이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그 유산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오픈액세스 운동은, 공적으로 연구비를 받는 학술연구와 학문은 페이월(paywall)(([옮긴이] 유료 동의를 거치도록 해서 인터넷 내용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을 종종 페이월이라 부른다. 학술 논문들은 대체로 페이월의 대상이며 학술 논문들을 구독하는 학술 도서관을 거쳐서 연구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뒤에 갇힌 상태로 있어야 하고 제한적인 라이선싱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사유 생산물(a proprietary product)이라는 전제를 ‘공익’—사회에 이익을 주고 적절한 재사용을 위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전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선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랜 전통과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합류하여 유례없는 공익이 가능하도록 했다. 연구와 지식을 위해 과학자들과 학자들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학술지에 그들의 연구 결실을 출판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이 가능하게 만든 공익은, 동료의 평가를 거친 학술지들이 전 세계에 배포되고 모든 과학자들•학자들•교사들•학생들 및 기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자유롭고 제한 없이 그 학술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가리킨다.

개방성의 특성은 공동 창조, 공동체 소유 및 각자의 성공과 실패를 거름삼아 만들어가기이다. 개방성은 개인 소유자에서 공동체—즉 전체 체계의 안녕을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체계—로의 이동을 요구한다. 이는 다른 어디보다도 농업분야에 더 적중하는 말이다. 기원전 10,000년 무렵에 일어난 농업혁명 이후로 농업은 인간 사회와 자연의 교차점이었다. 농업의 역사는 파괴와 약탈로 가득하지만 재생과 치유의 역사로 존재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농업생태학—사회적•환경적 생태계들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생태론적인 농업 실천을 가리키는 용어—은 본질적으로 상리공생(相利共生)적이다. 사실상 농부들은 결과에 배타적으로 집중하기보다 농업 생태계의 전반적인 안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 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때 사회적•환경적 복원력이 생긴다.

 

개방성에서 자율성 찾기

개방성의 옹호자들은 우리에게 개방성은 개발 방법론이고, 공유와 협동은 번성하는 상리공생적인 생태계에서 그렇듯이 우리의 경우에도 사회적 유대를 낳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규제되지 않은 정보를 공유할 때 그 정보는 개선되며 한층 신뢰할 수 있게 되어 그 이후에 인류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개발주의적 관점은 대부분 정반대 접근법을 택한다.

국제개발은 대다수가 하향식이다. 자선—오늘날 우세한 가난 해결법—은 공동체들을 자기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참여자들로 생각하기보다 수동적인 수혜자들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식량 생산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법인 산업형 농업은 농부들을 장기간에 걸친 상호 의존성의 체계에 가두고 지구를 먹여 살린다고 허위적인 주장을 하면서 사회적인 계층화를 강화하는 경제모델을 추종한다. 대규모 단일경작 및 사유화된 화학제품과 방법으로 추진되는 산업형 농업은 기후변화에의 최대 기여자로서 현재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3 정도를 발생시키고 있다. 전 세계에서 번성하는 산업형 농업은 영농인 교육서비스와 국제개발업자들을 통해 가속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농촌의 생계를 파괴하고 있다. 사유(私有)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하향식의 사고방식)은 가난한 농업 공동체에 기술과 “전문적 지식”을 옮기는 선의의 개발 기관들 사이에서조차 널리 퍼져 있다. 이 “혁신들”이 거의 지속가능하지 않고 농부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혁신들은 대부분 비용이 너무 비싸고 지역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하는 자연세계는 농부들이 처한 수시로 변동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들과 더불어 영농(營農)을 지식 기반 숙련기술, 지략(智略)과 문제 해결 능력에 뿌리를 둔 다차원적인 전문업으로 만든다. 농부들은 주변 경관들, 가족들, 농지들, 공동체들 및 지역들과 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이 그 전 체계를 관리해야 한다. 더군다나 농업의 방대한 범위는 토양•물•에너지의 보존을 포함하며, 교란을 최소화하고 잠재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생태적인 관계들을 관리—통제가 아니라—하는 것을 포함한다. 농사는 생계이므로 농부들은 이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단일 작물, 단일 생산물이나 단일 소득원천에 결코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작물•토지사용•수입원천을 다양화하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농부들은 생산도구와 종자 같은 유전자 자원을 보존해야 하고 할 수 있을 때마다 지역 자원들을 활용해야 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농업부문에서 노동인구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토지에의 접근을 막는 엄청난 장벽에 부딪히며 농삿일 말고도 자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이러한 광범위함이 농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일이 고되고 지식 집약적인 전문업으로 만든다. 슬프게도 농부들은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일부이기 때문에 정보부족이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 지역 전체가 사유화에 기반을 둔 관행을 채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정보 접근성 부족은 농부들의 자율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개방은 환경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농사는 자원 집약적이지 않고 지식 집약적이다. 건강한 농업생태계의 기본 요소인 지역 지식은 해당 장소와의 깊은 협력작용을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된다. 공동체의 복원력에서 시간이 행하는 역할이 최근에 꽤 주목을 받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땅과 관련하여 실험하고 혁신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땅을 경험하는 농부보다 자연환경에 더 능숙한 사람은 없다.

만약 농부가 끊임없이 바뀌는 조건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복잡한 체계를 관리해야 한다면 그녀는 친구나 이웃과 상의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과학기술을 장소의 특수성에 맞도록 변경하고 개선하고 지역화하는 그녀의 능력이 필수적이듯이, 농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그리고 종자들—를 전달하는 농부의 능력도 필수적이다.

지역에의 이러한 맞춤들—또는 일을 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이제 이 분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지역혁신들(local innovations)이라고 부른다. 주류 산업부문의 사유화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지역혁신들은 다면적인 맥락에서 만들어지고 생겨나므로 대체로 한 장소의 범위를 고려한다. 요컨대 지역혁신들은 복원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역 농업기획들을 지원하는 국제적인 다수이해관계자 네트워크인 <프롤린노바>(PROLINNOVA)(([옮긴이] <프롤린노바>(PROmoting Local INNOVAtion=PROLINNOVA)는 생태학적으로 농업과 자연자원관리를 지향하고 남녀농부들이 농업연구와 지속가능한 생계를 위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는 혁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역혁신은 정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보통 각자의 기획에 따라 지역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한다—을 찾거나 개발하는 과정이다.

•지역혁신은 이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 지역에 새로운 농업기술 또는 일을 조직하는 방식들이다.

혁신들이 효과적이고 복원력이 있으며 농업 공동체에서 자랑거리로 판명된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혁신들이 현대과학과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향식 개발모델에서 공동체들•개발업자들•자선가들 사이에서의 참여관계를 우선시하는 모델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에의 집착을 떨치고, 아니 정말이지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우리의 정의 자체를 바꾸어서 다른 앎의 방법들을 수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 연구와 개발은 현실세계의 실천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연구와 개발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들과 함께 지식과 공동체 안녕을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

다행히 인터넷이 학문의 성격을 바꾸고 있으며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새롭고 포괄적인 작업 방식들을 촉진하고 있다. 일례로 동료평가(peer review)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비밀리에 판단을 내렸던 동료평가는 이제 공개적으로 조직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의 기록은 이기심이나 편향된 논점들을 드러냄으로써 학문을 개선할 수 있다. 이 열린 과정이 학력주의(품질 관리의 메커니즘)의 개념 자체를 바꾸고 디지털 지평에서 평등의 횃불이 된다. 앎의 다른 방식들과 공식적인 학문을 통합함으로써 연구의 신뢰성―즉 지식에의 주장들(knowledge claims)을 스스로 바로잡고 테스트하고 승인하는 과학의 능력―을 크게 개선한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이다.

 

디지털 시대에 지식은 비경합적이다

인터넷의 탄생은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했으며 인터넷은 이제 잠재적인 평등화 메커니즘 역할을 한다. 인터넷은 또한 지식을 비경합적으로 만들었다. 이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지식에 접근해도 다른 사람이 그 지식에 접근하는 능력이 손상되지 않는다.

학술 문헌—이는 예전에는 (한 번에 소수의 사용자들만이 접근했으며 사용에 따라 마모되는) 책•학술지•비디오 같은 물리적인 대상들 안에 저장되었다—은 이제 무한한 디지털 공간의 일부이다. 이 공간에서 지식이 고갈될 위험은 없다. 이것이 디지털 정보를 비경합적으로 만들며 우리에게 유례없는 개방성을 실현할 기회를 준다.

하지만 바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사용자들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은 서구의 몇몇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영토들에 재빨리 집중되었다. 한때 모든 사람에 의해 민주적으로 형성되는 위치에 있는 탈중심화된 기반 시설이었던 것이 대다수의 지역들과 인구들을―이 지역들과 인구들이 최대의 이득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경우조차도―주변화해온 것이다. 전 세계 후진국들에서 인터넷 접근을 통제하는 것은 주로 정부들이며 몇몇 정부는 인터넷을 언론의 자유, 항의, 그룹 조직화를 억압하기 위한, 심지어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 내지 기타 소수자들을 엄중히 단속하기 위한 무기로서 사용한다.

개방성은 포괄적인 인터넷 거버넌스 모델—차이와 무관하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모델—의 열쇠가 된다. 다른 장애물로는 과도한 특허등록처럼 개방적인 개발 모델에 크게 방해가 되는 것도 있다.

특허권, 육종자권 및 기타 지적 재산권은 혁신 체계에 심각한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산업농업 모델이 사유화된 테크놀로지—나중에 수수료를 받고 제공될 경쟁력 있는 지식의 집합체—에 뒤이어 생겨났다. 몇몇 농약 제품들은 식물과 동물 유전자로 특허를 얻었다. 바로 이 유전자들은 공개된 유전자 혼합을 통해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이제 자연의 살아있는 유기체의 유전자 구조를 소유하고 있으며 냉담할 정도로 잔인하게 이 “재산”의 보호를 수행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농부들은 그들의 일의 대상인 식물과 동물들을 집단적으로 번식시켰고 보호했으며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주었다. 현재 시행중인 지적재산권은 이 시스템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사실 지적재산권은 대규모 농업 독점체들, 산업 국가의 무역협정들과 배타적인 시장들에 복무함으로써 이 시스템들을 훼손한다. 결과적으로 시골경제가 고통을 겪고 생물다양성이 감소하며 농부들은 자율성을 박탈당한다.

농업 분야의 지적재산권은 두려워하고 의존적이며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일부 농부들은 영리목적의 회사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훔쳐 특허권을 얻을까봐 두렵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길 꺼린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토착 농부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식민주의의 긴 역사 속에 뒤엉켜 일어난, 지식의 부정 유용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제인 앤더슨(Jane Anderson)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 공공성, 개방성과 커먼즈의 에토스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응어리를 적절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재산에서 ‘공적 [이익]’이라는 개념 자체가 식민지 맥락에서 획득된 토착경험들과 상충되는 포용과 대표성 개념을 전제로 한다.

‘공적인 것’이 종종 차별적이었기에 개방성이 주변화된 사람들 모두에게 긍정적인 힘으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공개된 나의 지식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지?”라고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이것은 개방성을 크게 문제 삼는 것이지만, 사안의 복잡성을 재검토할 기회이기도 하다. 사유화에 기반을 둔 개발 모델과 지식 체계를 전복하고 개방된 틀을 택하는 것은 사회적•환경적 정의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런 갈등 해소가 생물군계(biome)에 대한 수용력과 복원력을 유지하는 지구의 능력을 결정할 것이다.

문화적 가치 체계들의 다양성, 광범위한 불평등 그리고 토착 주민들과 국민국가들 사이의 종종 해결되지 않은 주권 정치를 고려할 때, 우리는 지역 농부들을 혁신과정으로 끌어들여서 이들이 혁신과정을 사회환경적•문화적 현실에 연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류의 성공은 모든 사람의 인간다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진보는 사회정의•환경파수•시민자유 및 지역적·비판적 관점을 도외시하고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농업생태학—퍼머컬처(permaculture)(([옮긴이] 퍼머컬처(permaculture)는 생태농업으로 자원 유지·자족(自足)을 꾀하는 농업 생태계를 추구한다.)), 바이오다이나믹 농업(([옮긴이] 바이오다이나믹 농업(Biodynamic agriculture)은 유기농 농업과 매우 비슷한 대안농업의 한 형태이자 원예•식품•식생활에 대한 전체론적•생태학적•윤리적 접근법이다. 바이오다이나믹 농업의 원칙과 실천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실천적 제안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920년대 초부터 많은 농부들과 연구자들의 협력을 통해 발전되었다.)) 내지 재생성적 농업의 모습을 띠든지 아니면 또 다른 모델의 모습을 띠든지 간에—은 자연 과정을 모방하고 사회적•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농업체계를 공들여 만드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제 진보는 앞날을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생물체를 연결하는 정보와 자원을 공유하는 저 아래의 균류 네트워크 쪽을 가끔씩 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토지균등분할론자들과 옹호자들이 인식할 때이다. 이것이 오픈소스 패러다임이고 농업생태학은 그 에토스에 뿌리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