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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


1990년대에 중부 오리건 주의 많은 지역 사회가 ‘삼림 전쟁’으로 인해 분열됐다. 환경운동가들은 미국 산림청을 관리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수십 년간 벌목 회사들에게는 공유림(公有林)을 모두 베어 내고, 나무 단일재배를 시작하고, 산간에 생태학적으로 해로운 길을 건설하도록 허용되었다.

연방법원 판사가 미국의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지역에서 시행 중인 벌목 작업을 사실상 중지시킨 명령을 내린 1991년에 환경운동가들이 승소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점박이올빼미가 많은 논쟁의 초점이었던 동안, 알을 낳기 위해 상류로 헤엄치는 태평양의 연어를 포함한 전체 생태계가 위험에 처해있었다.

종종 소송과 정부의 명령 외엔 다른 방도가 없고 1991년 소송은 분명히 필요했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여파다. 산림청은 숲을 단순히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야생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는 대신에 주목할 만한 협력적 거버넌스 실험을 착수시켰다.

이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은 의회 정치, 산업 로비 활동, 분열을 초래하는 공적 태도 등에 의해 움직이는 관료주의적 절차의 표준적인 체제에 의지하지 않고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을 관리하는 ‘유역 협의회’(watershed council)를 만들었다. 20년 뒤, 이러한 열린 커머닝 과정은 숲 생태계를 주목할 만하게 복원했는데, 이는 정치와 형식적인 법률 제도에 의해 추진된 이전의 숲 관리 체제에 대한 암묵적인 고발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이자 감독인 앨런 호닉(Alan Honick)이 ‘환경윤리를 위하는 산림청 직원 모임’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한 30분짜리 훌륭한 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Seeing the Forest”, Alan Honick, 2015)에 나온다. 호닉은 어떻게 보호구역 외부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숲 대부분을 오리건 주의 공유지(公有地)가 포함했는지를 기록한다.

이 숲들은 복잡하고 아주 오래된 생태계였다. 특히 캐스케이즈(Cascades) 서쪽 지역이 그러한데, 그곳에서는 태평양 폭풍우가 가져다주는 습기가 풍부하고 다양한 온대성 우림을 만들어냈다. 수백 종의 동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이 서식지에 의존했다.

40년 동안 이 숲들은 산업체들이 사유지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벌목되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자리가 싹 베어진 다음에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들의 단일재배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그 나무들이 충분한 크기가 되면 모두 베어지고 다시 다른 나무들이 심어질 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계속 반복된다.

1991년 소송의 여파로 들끓는 적대감과 소송이 다시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일자리 대 환경’이라는 낡고 친숙한 서사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부가 중재하고 해결해야 할 분쟁이었다.

그러나 오리건 주는 새로운 공간과 공유된 서사를 개시하는 ‘북서부 숲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싸이유슬로 유역 협의회’(The Siuslaw Watershed Council)는 숲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열린 원탁회의에 초청하여, 숲을 어떻게 관리하고, 벌목 회사, 환경운동가, 레저어획인, 지역공동체, 여행자 등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해결하거나 완화할지 논의하도록 했다. 결과는 모두의 동의에 기반을 뒀다.

어떤 환경운동가는 벌목 산업의 대표와 결코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의 집단으로서 앉아서 이야기하는 과정은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행동 경험이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과거의 차이는 차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이었다. 협의회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산림청 직원이 설명했듯이) 어떻게 기금을 쓸지를 포함하여 싸이유슬로 숲과 관련하여 ‘법에 버금가는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이 과정은 하천에서 연어를 복원하는 공유된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남아있지만 모든 이들은 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정치나 법률 제도를 통해 ‘승리’하기보다는 실행가능한 해결책 찾기를 지향한다.

이 과정의 한 장점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관료적·법률적인 한계를 건너뛰기 위해서 비공식적인 합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연어의 일생은 시내의 상류에서부터 바다에 이르는 전체 유역을 가로지르는데, 그 넓이는 산림청의 토지를 훨씬 넘어서 많은 사유지와 공동체 토지를 포함한다. 유역 협의회는 이런 관할 문제 중 일부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이 관료적으로 운영되는 과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계획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그 계획에는, 흔히 법적 폭력, 많은 돈, 문화 양극화가 만연한 규제적인 과정들에 들어있다고는 말하기 힘든 내장된 합의와 정당성이 있다.

유역 협의회는 산림청이 전형적인 관료체계로서 행동하지 않게 할 가능성이 높은 모든 종류의 해결책을 착수시킬 수 있었다. 협의회는 도로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오래된 벌목 도로를 사용중지시키는 한편 선택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숲의 간벌(間伐)(([역자 주] 한국 산림청 산림임업용어사전 참고 http://www.forest.go.kr/newkfsweb/kfi/kfs/mwd/selectMtstWordDictionary.do?&pageIndex=1&searchWord=&searchType=&wrdType=&searchWrd=&mn=KFS_02_08_06_05_01&wrdSn=93))을 감독했다. 협의회는 연어가 상류로 이동할 수 있도록 시내를 닮은 지하수로를 만드는 등 시내와 유역의 생태적 기능을 회복시켰다. 물고기들이 죽은 나무들이 있는 서식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죽은 나무들은 시내 바깥으로 끌어내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타 등등.

2012년에 큰 폭풍이 숲을 강타했을 때 시내와 도로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적었다. 실제로 대단히 강력했던 1996년 폭풍의 충격보다 훨씬 적었다. 물론 이러한 효과적인 숲 관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뉴스’로서 자격을 얻을 만한,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사진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

호닉의 절제되고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열린 협력의 잠재성에 관해 강력히 주장한다. 열린 협력은 숲만큼 크고 생물물리학적인 것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시장 개인주의자들도 커머닝을 통해 근본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 ♣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 저자  :  Tim Dunlop

  • 원문 :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 (책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에서 저자 자신이 발췌한 대목들임) (2018.08.28)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가디언』지 편집자 설명] 자신의 새 책 『모든 것의 미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크고 대담한 생각들』(The Future of Everything: Big audacious ideas for a better world)에서 저자 팀 던롭(Tim Dunlop)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태짓는 방대한 기술적 전환을 살펴보면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는 데 이 전환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그는 미디어, 부의 창출, 노동, 교육, 그리고 통치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정부의 활동방식을 고치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투표에 의한 선출)를 임의선출(sortition)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을 뽑을 때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의회의 구성원을 선거로 뽑지 말고 적어도 그 일부는 임의적으로 뽑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이 나랏일의 운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그 효과로 정치와 통치가 변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도 선거권을 우리의 근본적 권리의 하나로 제시한다. 민중(국민)의 의지가 선거로 표현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오히려 민중의 의지를 침식해버렸다. 이제 민중의 의지를 회복할 제도가 필요한데, 임의선출이 바로 그 제도이다.

 

선거의 기원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기인 18세기로 소급한다.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선거를 엘리트 세력이 정치적 과정에 통제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성인들만이 선거권을 가졌다. 이런 제한을 싸워서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는 엘리트들이 ‘민주적’ 과정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퇴보해버렸다. 선거에서 뽑힐 시간과 자원을 가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된다면 다음 선거에 한번 출마해 보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일국의 수준으로 확대할 때 제기되는 첫 물음은 ‘우리 일반 시민들이 진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데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부터 엘리트들은 ‘군중의 지배’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대해 표현된다. 소셜 미디어는 민주적 군중의 무질서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민중의 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썰리번(Andrew Sullivan)은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민중의 의지와 권력의 행사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놓은 것을 찬양한다.

 

민중의 의지를 이렇게 얕보는 세력은 시민참여를 배제하는, 아니면 시민참여가 극히 어렵거나 불편한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참여결핍을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주류 제도에서 배제되고 통치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부터 배제된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의 새 플랫폼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현한다. 이 상대적으로 덜 규제되는 형태의 공적 표현은 분명 내용 없는 교류로 퇴락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일반인들의 참여의 부적절함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다. 이렇듯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실제적 참여를 배제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운전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이 신뢰를 잃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체제가 ‘보통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설계된 데 있다. 물론 선거에는 참여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정당의 통제 아래 있고 정당은 고유의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시 다른 주체들, 특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정치가들은 일단 당선되면 말로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국민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이로 인해 과정 전체가 시민의 관점에서는 소극(笑劇)이 된다.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실린 「제안된 상원 선거방식 변화가 호주의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다」(“The proposed Senate voting change will hurt Australian democracy”)라는 글에서 정치학자 드라이젝(John Dryzek)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의 연방 의회는 오늘날 ··· 안건을 숙의하는 곳이 아니라 여러 당에 속하는 정치가들이 대부분 의례적으로 자신의 말만 해대는 극장이다. 당 정치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드라이젝이 보기에 훌륭한 숙의의 본질은 참여한 사람들이 견해를 바꿀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진정한 숙의는 민중이 동등한 주체로 모여서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는 모든 사실적·정서적 요소들을 터놓고 다룰 때에만 생긴다. 당 정치로 인해 정치가들은 이러한 숙의의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나는 ‘시민의회’(People’s House, 민중의회)라 불리는 새로운 의회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곳이 상원이나 하원과 다른 것은 그 의원들이 임의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성인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회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배심원들이 범죄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듯이, 시민의회의 의원들은 입법과 관련하여 숙의하고 투표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의 정치체들에서는 시민 배심단,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혹은 기타 형태의 엘리트-대중 논의와 관련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의로 선출된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론조사는 정보에 기반을 둔 대중의 견해를 얻기 위해서 선출된 참여자들끼리 광범한 논의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 회사에서 임의로 선출한 참여자들을 이틀 동안 한 장소에 모아놓고 소집단을 이루어 서로 토론을 하거나 여러 견해들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게 한다.

 

1998년에 ‘호주가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한 공론조사가 행해졌다. 이 조사를 행한 기관―Issues Deliberation Australia―에 따르면 “호주인들은 참여할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 원래의 목표보다 47명 많은 347명이 최종 선출되어 10월 22일 캔버라(Canberra)에 도착했다.”

 

이 숫자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다룰 문제가 중요하며 논의의 자리가 믿을 만하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가진 것에 기뻐했으며 확신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받는 정보에 기꺼이 도전하려고 했다.

 

이런 포럼들이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더 평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포럼들은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참여자들 사이에 신뢰와 존중의 생성을 촉진하는 협동과 숙의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을 그저 무식하기만 한 존재로 보고, 시민들은 전문가들을 우월한 지식에서 나오는 힘을 주장하기만 하는 엘리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포럼은 서로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경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로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일반인 청중이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교훈은, 이것을 우리의 거버넌스 과정의 더 공식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유리되어 있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치 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일반인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경제와 대의제는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이런 분할을 넘어서 한데 모이기 위한 것이다. 임의선출은 기본 개념상 매우 직접적인 것이며, 그것을 가령 호주 상원에 다른 힘들을 그냥 둔 채로 도입하여 선거를 대체하는 것은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변화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수준에서는 그 잠재적 효과가 폭발적이다. 정당들과 그 많은 로비스트들의 힘이 일거에 삭감될 것이다. 미디어가 정치를 취재하는 방식도 변형될 것이다. 입법과정의 적어도 일부에 대한 통제력이 인구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질 것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방식으로 민중에게 힘이 부여될 것이며 우리의 정치 제도가 공통적인 삶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힘의 주된 원천이 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게 배웠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배운 것을 빨리 토해낼수록 더 좋다. 진정으로 대표적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를 원하면 그 정부를 선거가 아니라 임의선출을 통해 구성해야한다.




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괜찮다. 죽지 않는다.

 

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괜찮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잘 해나갈 뿐만 아니라 삶도 더 나아질 것이다.

페이스북이 수백만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돈을 받고 팔았거나 유출했거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번 달에 나온 폭로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과연 떠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여기서 말하건대, ‘할 수 있다.’

나는 CNN에서 “우리는 고객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품입니다”라고 선언하고 나서 2013년에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다. 페이스북은 캠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에게 방어벽이 뚫린 것도 아니고 해킹당한 것도 아니다. 페이스북 플랫폼은 프로그램되어있는 바로 그 작업을, 즉 우리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우리의 심리적 트리거(방아쇠)를 포착한 다음 우리의 행동을 조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용자들이 마침내 깨닫고 있듯이 페이스북도 페이스북으로부터 데이터를 구입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전문가들도 당신의 비밀이나 성생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당신의 심리적 취약성을 추론할 수 있는 기초데이터(raw data)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특정 상품을 구입하게 하거나 이런 저런 후보자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술은 우리의 고등한 뇌기능들을 의도적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성(논리)과 공감을 거치지 않고 파충류의 생존본능으로 직행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비유적인 묘사와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신경증(노이로제)은 맹점(盲點)과도 같다. 일단 소셜 미디어 심리학자들에게 포착되기만 하면 그 맹점들은 우리 뇌의 한층 충동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는 판이 된다.

페이스북은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공포라는 방아쇠를 당겨서 우리의 움직임을 촉발할 수 있다. 네트워크의 기술들은 우리의 이성이나 공감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가장 심층에 자리 잡은 두려움에 호소한다. 그 전술들—싸우거나 도망가라. 죽이거나 죽어라—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뇌간들—파충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뇌 부분—을 겨냥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술이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담론에 끼친 영향을 목격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실질적인 일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소셜 미디어로 전달된 유일한 자극일 경우 우리는 결국 영구적인 편집증과 분노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만 해도 재미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엄청난 유해물질이며 위협이다. 민주주의는 정보와 사고력을 가진 민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보다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고 싶어서든 단순히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당신이 당신에게 진 의무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건대, 당신은 할 수 있다. 괜찮을 것이다.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사실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더 낫다.

우선, 당신이 잊으려고 애쓰면서 지난 40년을 보냈던 2학년 때 친구들이 당신에게 연락을 하지 못할 것이다. 슬픈가? 그럴지도 모른다. 주소 및 이메일이 있는, 도덕적으로 덜 부패한 온라인 디렉토리로 이동할 때까지 당신이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찾아내느라 더 힘든 시간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당신 삶 속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현실 세계의 상호작용은 온라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와 연대를 이룩할 수 있게 한다. 수십만 년에 걸친 인간의 진화는 얼굴을 맞대는 소통을 지향해왔다. 이것이 소셜 미디어 사용으로 방출되는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대신에 옥시토신 같은 친사회적 호르몬이 혈류 속으로 방출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만일 십대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연락할 수 없다면 그들은 결국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할 것이다. 십대들이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적게 하면 할수록 그들이 침울해하거나 자살을 저지를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페이스북을 탈퇴할 시 수반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부수적인 이점이다.

페이스북의 유용한 기능은 쌍방향의 전화번호부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소통하게 해주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자신을 심리조작에 그토록 취약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동일한 유용성을 얻을 방법은 많다.

당신이 친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페이스북이라면 그것은 이미 문제이다. 당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이런 제약을 용인하는 것은 접촉보다 신호가 오고가는 데 가치를 두는 시스템을 묵인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메일•스카이프•페이스타임을 여전히 할 수 있고 웹페이지, 아이클라우드, 포토 스트림을 통해 사진을 공유할 수 있으며 구글 그룹과 라이브 행아웃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 훨씬 더 중요하고 보람 있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만나는 것에 대한 대체물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벗어난 모든 시간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관계들을 무너뜨리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기업에 복종하지 않고 그러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기로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당신의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릴 의도가 있는 기업들과 민주주의와 인간본성에 대한 당신의 신념을 무너뜨릴 의도가 있는 정부들이 가하는 지속적인 심리적 학대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당신은 어두운 곳을 나와서 햇빛 속으로 걸어들어 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북을 압박하는 것은 또한 당신보다 특권을 덜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페이스북과 같은 사회 연결망을 통해 그들이 은밀히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데이터에 의해 영향을 받을 주택 담보대출이 있는 사람들, 가석방 심리 중인 사람들 및 이민자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최근에 중국은 어떻게 중국 국민들의 소셜 미디어 접속과 ‘좋아요’가 직업과 비자 발급 자격을 결정하는데 사용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고 혹자는 말하겠지만,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자유 국가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미련 없이 페이스북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공통적인 것, 민주주의 그리고 기본소득

* 다음은 7월 8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완결된 글은 아니고 단상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실제 발표는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없어서) 앞의 그림 한 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그 당시 들으러 오신 분들은 이 발표문을 통해 누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한글본을 먼저 작성하고 나중에 영어본을 작성했는데, 영어본은 정확히 일대일 대응되는 번역이 아니라 내용상으로 조금 더 다듬어진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본을 앞에 놓습니다. 한글본은 손을 더 보는 게 좋은데, 이미 잔치가 끝나니 손이 안 가네요;;;; 한글본은 주석 위치가 미주로 되어있는데,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주석을 반드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결된 논문이라면 본문에서 상세히 다루었을 대목들을 주석에 자료처럼 배치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정남영-발표문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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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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