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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엔스,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 테제에 대한 비판



 

전도된 사회적 다윈주의로서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옮긴이] ‘enlivenment’에 대한 설명은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참조.))테제에 대한 비판

 

우리는 안드레아스 베버의 뛰어나고 재미있는 글 「살림: 자연, 문화, 정치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 Heinrich Boell Foundation, 2012)를 다음 게시글로 재출판할 것이다.

나는 위 텍스트의 내용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의 주체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세상에 관한 우리의 사유와 느낌-사유에서 생명 및 의식과 다시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그 책의 취지에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베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에 기고한 글, 특히 「낭비의 경제: 커먼즈의 생물학」(“The Economy of Wastefulness: The Biology of the Commons”)이 그 증거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수십억 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커먼즈 경제 즉 생물권(biosphere)이 있다. ···…나는 자연이 탁월한 커먼즈 패러다임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이, 압도적일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커먼즈 원칙에 따라 함께 살아왔다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주장은 한층 더 복잡하다. 나는 자연 내부에서의 생태학적인 관계들도 커먼즈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자연과정을 경제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 이미 문제이지만, 어떻게 ‘경제학’을 정의하는지에 따라 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커먼즈 경제’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확장인 것 같다. 오스트롬 학파와 그 이후 커먼즈 운동은 커먼즈를 항상 그 사용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공유재(a common pool resource)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그 거버넌스의 민주적인 성격(그것이 아무리 넓게 정의되더라도)을 강조한다. (공유 자원의 독재적 관리는 사실상 사용자들을 수탈할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오픈 액세스 자원들은 커먼즈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즉 “생물권”에 그러한 거버넌스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대담한 가설이며 자연 속의 사용자들이 실제로 그런 민주적인 협력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만물의 국회’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베버는 우리의 자연관이 빅토리아 영국의 인간관에서 유래되었다는, 바꾸어 말해서 문화의 투사(投射)라는 매우 가치 있는 주장을 한다.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빅토리아 산업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그러한 이론 중 일부를 변경해서 자연 변화와 발전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에 적용했다. 그 여파로 “생존투쟁,” “경쟁,” “성장”, “최적화” 같은 개념들이 암암리에 자기이해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 즉 사회는 생물학적•과학기술적•사회적 진보가 개인 이기심의 총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경쟁에서 환경에 적합한 종들(강력한 기업들)은 틈새(시장)를 개척하고 그들의 생존율(수익)을 증가시키는 데 반하여 약한(덜 효율적인) 종들은 멸종한다(파산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경제와 자연의 형이상학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기보다 사회가 자신의 고유한 전제들에 관해 가지는 견해이다. ······우리는 생물학과 경제학의 이런 연합을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이데올로기가 다시 사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관점에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베버의 판단에 충분히 동의한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우리의 사회 조직의 성격에 대하여 이런 결론들을 도출한다.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황야를 배제했다. 즉 자기성취적이고 그 어떤 존재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으며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종획되지 않은 자연을 배제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 가운데 경쟁과 최적화라는 원칙을 넘어가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일반적인 정당성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멋진 환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생존투쟁에서 작동하는 심층적인 힘들에 대한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잘 맞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협력은 기본적으로 자원경쟁에서의 전략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자연 그 자체는 커먼즈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임에서는 독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픈 소스이다. 유기체 영역의 본질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모든 것에 열려있는 유전 정보의 소스코드이다. ···…죽음에 이른 모든 개체는, 햇빛이라는 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체들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선물로서 자신을 내놓는다.

(······)

생태계 커먼즈에서 수많은 별개의 개체들과 서로 다른 종들은 서로 다양한 관계—경쟁과 협동, 협력과 포식(捕食), 생산성과 파괴—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들은 한 가지 상위법을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촉진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어로서 “커먼즈”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세계를 묶어주는 요소를 나타낸다. 자연을 그 진정한 질의 측면에서 커먼즈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사회적 삶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삶에서—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연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 생산적인 관계를 이루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커먼즈 경제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

  따라서 커먼즈 개념은 자연과 사회/문화 사이에 있다고 상정되는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통합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할을 없앤다.

나의 이의제기는, 이 설명에는 빠진 것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전도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설명에는 창발(emergence)이 빠져있다. 즉 복잡성(complexity)을 가진 새로운 층들이 새로운 실재와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빠져있다. 삶(생명)은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고, 의식도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며 인간 문화 또한 그렇게 한다. 각각의 창발적인 층은 비록 그 층보다 앞서는 어떤 층에 함입되어 있고 그 선행하는 층의 제약을 받아야만 할지라도, 혁신과 ‘새로운 자유’(예컨대 동물은 자신의 의지로 이동할 수 있지만 식물은 이동할 수 없다)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는 인간문화와 그 선택들은 자연법칙에서 파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적인 것에 함입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연 전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안드레아스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연은 “경쟁과 협동이고 협력과 포식”이다. 인간사회는 이런 충동들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베버가 커먼즈로 보는 자연 속의 포식관계가 인간의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충동을 알고 인식해야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충동을 조절한다. 인간의 영역 외부에서 자연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커먼즈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커먼즈는 인간의 법이다. 커먼즈는 사회와 자원이 여러 선택들 사이에서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비전이다. 자연에는 소유(재산) 개념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소유(재산) 개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개념을 적용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리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연이 우리에게 포식이 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예를 들어, 약탈적인 충동을 관리하고 승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함입시킬 수 있는 만큼은—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커먼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된 자연주의, 즉 반(反)다윈주의이다. 안드레아스 베버 입장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베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최근에 인간이 발견한 것, 즉 자연 또한 협동체계라는 것과 우리가 자원을 커먼즈로서, ‘자연의 특성’으로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에 투사한 다음 “하하, 자연은 커먼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커먼즈임에 틀림없다”라고 결론 내린다. 사실 자연과 사회 둘 다 다양하고 우리는 자연과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하여 민주적인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은 계몽의 기획이었고 안드레아스 베버가 진술하듯이 일면적이었으며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살림’은 필요한 보완요소이다. 하지만 전도된 투사 메커니즘을 실행하는 ‘살림’은 그런 요소가 아니다.

우리의 ‘살림’은 자연의 이상화, 자연 신비주의, 인간 중심적 투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안드레아스에게 미안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커먼즈가 아니며 오직 인간만이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도입할 수 있다. ♣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데이빗 볼리어의 논평



 

구조 변혁의 과제를 밝혀주는 순간

 

적어도 좀 분명해진 것은 있다. 신비화와 합리화가 증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의 당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정면으로 직시해야 할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들 다수를 밝혀준다.

대부분의 대선 이후 논평이 트럼프와 워싱턴의 정계개편에 집중되었지만, 나는 더 큰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와 대의민주주의 자체로부터의 구조적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양자 모두 거버넌스와 삶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서 신뢰를 잃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질서―주류 정치에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회 혁신의 튼실한 영역―의 윤곽은 초점이 선명하게 잡혀있지 않다.

정치에 경험이 없으며 나라의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해 아무런 진지한 생각이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편협한 자의 당선은 미국 헌정제도 및 그 두 주요 정당의 역기능을 드러내준다. 까불어대고 욕설을 퍼붓는 선거운동이 엄청난 TV시청률에 기여를 했지만, 이는 민주적 협의와 거버넌스의 관점에서는 소극이었다.

어떻게 이와 다를 수 있었겠는가? 18세기 후반에 분가루 바른 가발을 쓴 엘리트들이 고안한 이 훌륭한 제도는 21세기의 현실에 의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는 이제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스펙터클과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자기지시적 거품이다. 정치는 오락계의 한 분야로서 합리적인 토의와 의미 있는 인간적 대화에 복무하기보다는 정서적 자극이나 편견에 복무하는 극도로 조작된 가상공간이다.

정당들은 이 기괴하고 모더니즘적인 도깨비 집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현실적 장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진정한 민주적 참여를 양성하는 일은 향수 어린 환상인 것이다. 이제 뒤돌아 볼 때, 터무니없는 이전의 리얼리티 쇼 스타가 이 무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인 일이다. 이는 헐리웃에서의 오랜 경험이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가로서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이것이 ‘민주주의’인 체 하지는 말자. 이는 로마의 서커스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한계 이외에도 버락 오바마의 뒤를 이으려고 한 것이 불운이었다. 오바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약속하며 대통령직에 올랐는데, 일단 당선되자 그의 전임자인 부시의 낡은 신자유주의 교리로 재빨리 개종했다. 부시의 추악한 군사 및 반(反)테러 정책들도 이어받았다.

물론 오바마는 인종주의적인 공화당원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대통령직 자체를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의 지도력을 제한했다. 그렇더라도 오바마가 소득불평등, 기후변화, 금융업계의 부패, 사회 및 환경에 해로운 무역협정들과 싸우는 데서 그다지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일단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자 케이크는 거의 다 구워져 있는 상태이고 그가 제공할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책이란 거의 없었다.

8년 후 힐러리는 사실상 동일한 것의 연장인 점진적/점증적 개혁(incremental reforms)을 약속했다. 그녀는 버니 샌더스의 반란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나이브한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힐러리와 긴밀하게 협조하는 민주당전국위원회는 버니의 놀라운 선거운동을 무대 뒤에서의 온갖 종류의 개입을 통해 은밀히 방해했다. 힐러리는 샌더스의 선거운동을 무로부터 솟아오르게 한, 체제변화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샌더스가 사라지자,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의 포퓰리즘적 진공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세부사항들을 결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화당원들이 워싱턴 정치를 지배하게 되겠지만, 양 정당은 이제 박살난 상태이다. 트럼프는 일인 정당으로서 일관된 정치철학도 없고 자기 이외에는 신뢰할 만한 충성을 보이는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공화당은 그 분파들(재계, 복음주의자들, 노동계급) 사이에 여전히 많은 깊고 해결되지 못한 분열을 안고 있다. 민주당은 더 진보적이거나 포퓰리즘적인 이념들을 포용하기를 거부하는 보수적 사고방식에 여전히 얽매여있다.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정치와 탈성장의 가능성들을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힐러리의 패배는 딸린 짐이 너무 많은 역전(歷戰)의 정치인의 패배 이상의 것이다. 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긴 계보(카터, 듀카키스, 고어, 케리, 클린턴)가 팔아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적 비전의 거부이다.

트럼프가 해고된 노동자들의 문제, 산업이 버린 중서부 도시들의 문제를 개선할 진지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단순화된 헛소리들조차도 오바마와 힐러리가 한 겉만 번드르르한 공허한 약속들―번영을 다시 찾을 방식들로서의 경제성장, 무역협정, 첨단 테크놀로지, 교육 및 직업 재훈련―보다 더 진심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런 방식들로는 번영을 다시 찾을 수도 없고 다시 찾은 적도 없다. 자본의 구조적 요구가 사람들에게 어엿하고 안정된 삶을 가져다주는 경제적·사회적 정책의 능력을 줄곧 압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낙수효과에 의존하는 경제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것이 민주당의 경제 비전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신물 나는 상투적인 약속들이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만할 것일 수 있겠는가? 트럼프와 샌더스 (그리고 그 외곽에서는 엘리자벳 워런) 모두가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점을 외침으로써 인기가 높아졌다. 오바마는 월가를 기소하는 데 실패하여 그 거대한 범죄를 용인함으로써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금융부문의 온건한 입법개혁만을 간신히 해냈으며 소비자 금융감시에 대한 요구에 저항했다. 매회 25만 달러를 받고 월가의 회사들에게 수십 번의 연설을 한 힐러리는 변화의 신뢰할 만한 옹호자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미지의 영토에 들어서는 셈이다. 미국의 두 정당들은 파열되어 혼란 상태에 처했다. 선거과정은 불평등한 인종문제에서 기후변화 및 환경에 이르는 긴급한 요구들에 진지하게 응할 수 없다. 거버넌스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교착, 불신, 그리고 적에게 유리한 것은 다 없애버리는 식의 당파심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뉴스매체는 진지한 저널리즘이나 민주적 제도의 방어보다 시청률을 높여주는 스펙터클을 더 좋아한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합의된 틀로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유럽과 그 이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틀과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더 큰 논의로 가는 문턱에 우리가 서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양태의 민주적 거버넌스와 자기조직화를 제공하는―진정한 참여와 권한과 책임을 허용하는 이러저러한 규모의― 커먼즈가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커먼즈와 국가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적어도 처음에는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히 도시 수준에서는 풍요로운 결실을 낳는 혁신노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불가피하다. ① 세계 전역에서 온갖 종류의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이 시장(市場)이나 정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많은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규모와 정교함의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② 기존의 정치구조―거대 정당들, 국민국가와 관료제, 많은 틀에 박힌 시장들, 국가와 손을 잡고 있는 금융산업―는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제도는 일을 처리하는 낡고 역기능적인 방식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기존의 제도들 외부에서 스스로를 자기조직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이 가지게 되면서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의 긴장은 더 심화될 것이다. 망가진 경제/정치 제도를 지원하는 쪽으로 납세자들의 돈과 법적 특권을 맹목적으로 퍼붓는 정부가 커먼즈와 파트너가 되어 커먼즈를 지원하기 시작할 날은 언제일까? 우리는 자원추출적·약탈적·생태파괴적이며 이익의 할당에서 불공정하도록 애초에 구조화된 정치경제를 넘어가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에서 사용된 말들로 보아서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괴물 같고 분열적인 사회적 격동을 견뎌야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우리는 소중한 민주적 제도와 전통에 대한 유례없는 공격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미 당선 후 둘째 날에 백인우월주의적이고 반(反)이주민적이며 반(反)유태인적인 위협행동들이 트럼프를 외치며 일고 있다. 추방을 두려워하는 이주민들과 소수민족들은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나는 곧 다가 올 격동의 시대가 커머너들로 하여금 많은 기획들을 가속하도록 자극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하나씩하나씩, 이 지역에서 다음 지역으로, 그리고 그물 같이 연결된 동맹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원하는 구조 변혁을 펼쳐나갈 용기, 지혜, 결단, 상호지원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