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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 저자  : Peter Linebaugh, Sasha Liley
  • 원문 : Peter Linebaugh on the Long History of Pandemics (https://kpfa.org/episode/against-the-grain-april-8-202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Pacifica radio>의 프로그램 ‘Against the Grain’에서 2020년 4월 8일에 있었던 싸샤 릴리(Sasha Liley)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인터뷰 내용을 (약속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상황에서 라인보가 30년 전인 1989년에 쓴 팸플릿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인터뷰 당사자들에 의해 읽기 좋게 편집된 텍스트는 정리자가 알기에 현재로서 없으며, 정리자가 직접 팟캐스트를 듣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내용 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도록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미 정리해서 옮겼으니 서로 교차해서 참조할 수 있다.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싸샤 릴리(Sasha Liley)
인간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바이러스들과 기생체들이 인간을 괴롭혀왔습니다. 계급사회의 출현 이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에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기생체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가 피터 라인보(Perter Linebaugh)는 HIV 에이즈라는 유행병이 도는 와중에 이 역사를 추적한 바 있습니다. 라인보는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메이데이의 완결되지 않은, 진실하고 진정하며 놀라운 역사』(The Incomplete, True, Authentic, and Wonderful History of May Day) 등의 저자입니다. 가장 최근의 저서로는 『뜨겁게 불타는 붉고 둥근 지구』(Red Round Globe Hot Burning)가 있습니다. 라인보, 당신은 1989년에 <ACT UP>(the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민중의 힘을 촉발하기 위한 에이즈연합)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는데요,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라고 이름을 정한 팸플릿을 쓰게 된 맥락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
저는 보스턴에서 <ACT UP>이 한창 투쟁을 하는 가운데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저는 역병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 자체가 우리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세계사에 일어났던 10개의 역병들을 간단히 알아보는 일이, [COVID-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해온 싸움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질병을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동성애혐오증적 방식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데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성되는 공포가 불안정과 공포의 조건에서 번성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연결고리입니다.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역병이 도는 때는 민중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때이지만 동시에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대 그리스, 이집트로 가서 이 점에 대해 고찰합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이러한 사회 질서의 전복 가능성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민중이 겪는 공포, 혼란 그리고 가난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요.

라인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핵심은 전염병, 역병, 팬데믹이 치명적이라는 점, 즉 인간 개인들, 가족들, 공동체들을 파괴하며 때로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역병들은 사회적 삶의 재생산이라는 기획 일체와 필수적인 연관을 가집니다. 그래서 전염병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역사적인 힘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전염병들에 대한 여러 대응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령 대략 2000년 전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간의 질병 유전자풀이 지중해 지역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최초로 혼합된 것이지요. 아마도 이는 대륙간 통상의 한 측면일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종교들이 (일신론적 종교들입니다) 형성되었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기축시대’(axial age)를 말할 때 그는 이 종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Achsenzeit(Axial Age)’라는 말은 1949년 출간된 야스퍼스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 처음 등장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사이에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에서 병렬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등장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에는 도시국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도 형성되고 있었지요. 이때에는 사람들이 전염병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이 질병들을 발생시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박테리아도 알지 못했고 바이러스도 알지 못했으며 세포생물학도 없었습니다. 수천 년을 지나 바로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야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도시 전체가 지워져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위기에서 그에 대한 여러 계급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를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로 이끈 허스턴(Zola Neale Hurston)은 파라오와 맞선, 지팡이를 든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허스턴이 말하고 싶은 것은 역병·기근·기아를 마음대로 부리는 파라오를 물리치는 모세의 힘, 그의 대항마법(counter-magic)입니다. 이 대항마법은, 흑인 민속지식에 대한 허스턴의 지식에 따르면, 모세가 파라오의 마구간지기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 마구간지기는 이 마법을 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모세에게 공짜로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멘투(Mentu)가 해주는 ‘도마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들에게 전염병들을 아래로부터 보기를 권하기 위해, 파라오나 벼락을 던져대는 야훼를 제시하는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 보기를 권하기 위해 ‘lizard talk’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lizard talk’는 허스턴의 소설에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①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크게는 세상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작게는 인간의 여러 행동들에 대한 논평). ② 멘투가 도마뱀이 해주듯이 해주는 이야기(이야기의 내용은 ①과 같다). ③ 멘투가 해준, 도마뱀(및 기타 동물들)도 이러저러한 말을 한다는 이야기. 나중에 (멘투는 이미 죽고 없는 때이다) 모세는 ‘기억들의 보관자’(keeper of memories)인 ‘수염난 도마뱀’을 찾아간다. (이때 모세는 예전의 멘투처럼 도마뱀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모세는 우연히 만난 늙은 도마뱀에게 ‘수염난 도마뱀’이 시나이 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나이 산을 찾아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가 ‘수염난 도마맴’에게 들을 ‘liard-talk’는 기독교의 정사에 나오는 야훼에게서 받은 십계명과 대조될 터이다. 전자는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지식을 나타내고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지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마구간지기의 이름인 ‘멘투’를 다시 언급하게 되니 반갑군요. 제 의도는 지상의 힘, 우리 인간의 힘, 우리의 공통적인 힘이 지배자들의 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도 잘 모르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말입니다. 이는 팬데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물론 팬데믹에 대한 지식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여러 모습의 멘투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경험에서도 오지요. 어떻든 저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을 겪는 다중과 지배계급을 대조시키는 것, 힘의 두 형태를 대조시키는 것. 그것이 역사적인 역병들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라오를 다룬 다음, 투키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역병들을 다루고, 로마 시대의 역병들을 다루며 물론 중세의 중앙 유럽을 강타한 큰 역병들을 다룹니다. 이런 식으로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라인보=도마뱀=멘투]

제가 <ACT UP>에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은 <ACT UP>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ACT UP>의 현장 활동가들은 발견·조사를 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으며, 그 자신들이 깊이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치료를 낳을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공보건의 커먼즈’(the commons of public health)의 주된 원리입니다.

릴리
우리가 사회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함께 모여야 하는데, 무심코 행한 사회적 상호작용조차도 바이러스를 퍼지게 할 수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팬데믹의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모순입니다.

라인보
네, 정말 큰 모순입니다. 에이즈위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 그리고 이전의 전염병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도시봉쇄(lock-down)는 아니지만―집에 있으면서 외출을 자제해야 하고 공동체적 관계들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간호,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기, 죽은 사람들을 묻기와 같은 일들은 아무리 끔찍한 인간의 위기상황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애를 베푸는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은 대중모임의 금지나 기타 형태의 공동체적 활동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애의 엄청난 재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상업활동은 종종 가장 최소로, 혹은 가장 나중에 정지되지요.

릴리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팬데믹의 시기에 특징적인 것은,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고대 역사를 되돌아보며 말했듯이 상이한 이념들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아래로부터의 지식과 같은 것도 있고 반대로 우리를 일종의 숙명론이나 현실수용적 태도로 몰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뜻하는 것은 가령 당신이 언급한, 옛날의 종교들이 팬데믹 시기에 한 복합적인 역할들 같은 것입니다.

라인보
네, 그러죠. 계급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억압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도 적용되고 전염병들에도 적용됩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위로부터 사고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뉴스에서 들은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지는 멘투를 다시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팸플릿은 종교의 사회학이 아니며 분명 포괄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ACT UP>의 활동에 고취되고 역병의 역사를 다룬 맥닐(William McNeill)의 책[Plagues and Peoples, 1976]에 촉발되어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뉴요커』(The New Yorker)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이 우리가 읽을 책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동안 책을 읽으라는 거지요. 학자인 저도 책을 읽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은 도시를 도망칠 여유가 있던 부유한 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 부유한 층에 대해서 쓴 작품입니다. 『데카메론』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든 각본작가들의 책꽂이의 사전 옆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100개의 플롯들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위해 다시 다듬기 위해서죠. 이 이야기들은 선페트스(bubonic plague)가 돌고 있던 1340년대에 동포 인간들을 놔두고 피렌체를 도망친 사람들이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단으로서 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오락으로 의도된 형태의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에요. 물론 이 이야기들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대단한 이야기들이죠.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유행병의 문학은 도피의 문학이라고 썼습니다. 문학창작가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보수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대응은 그것이 존재할 경우에는 언제나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이런 동학을 거론했습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이 생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상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인보
물론이죠, 저도 넷플릭스(Netflix) 앞에 딱 붙어 있습니다만, 이는 저에게 특별히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공공보건 전문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저는 가령 핫스팟이 되고 있는 여기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계속 알려줄 수 있는 공공보건 간호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알싸이드 박사(Dr. Abdullah Al Said)가 COVID-19와 연관된 더 심층적인 하부구조 차원의 광범한 유행병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 공급의 거부, 삶에서의 안전의 거부, 주택의 거부가 바로 이 하부구조 차원의 유행병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저장소(fresh water reserve)가 있는 미시건 주인데 디트로이트에서는 물공급이 끊겼고 플린트에서는 물에 납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디트로이트 시 당국은 2014년부터 수도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들에 수돗물의 공급을 끊었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왔다. 한 미시건 지역 뉴스잡지의 2020년 3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2019년에만 23,000 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차단되었다. 시당국은 COVID-19 국면에서도 처음에는 이 물공급차단(water shutoffs) 정책을 유지하려 했는데, 손을 씻는 것이 COVID-19의 확산을 막는데 필수적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확정된 견해로 인해서 정책을 바꾸어 3월 9일에 수돗물 서비스를 재개했다. 월 25달러를 내면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수도료 지불은 팬데믹 국면 이후로 연기된다. 디트로이트 시장은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공급중지가 재개된다고 말했다. 한편 2014년 플린트 시는 수원을 디트로이트의 물(휴런Huron호)에서 플린트강물로 바꾸었는데, 물에 부식방지제를 넣지 못하여 오래된 관의 납이 침출되어 공급되는 물로 섞여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중금속 신경독을 발생시켰고 10만 명 이상이 주민들이 납에 노출되었다. 이와 관련된 본 블로그의 글로 http://commonstrans.net/?p=859 참조.]

이는 그저 악행이거나 사고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물에 대한 요구를 짓밟은 의도적 범죄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 신선한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 지붕으로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COVID-19의 가속적인 확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알싸이드 박사는 (그는 디트로이트보건국의 국장을 지낸 바 있으며 존경받는 전염병학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저도 과거의 역병들을 훑어보면서 각 역병이 그 당시에 인간이 창출한 사회·경제적 구조들과 특수한 연관을 가진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도시의 거주지이든 상업자본주의든 심지어는 미국과 같은 거대한 부르주아 공화국이든 말이죠.

아시다시피 미국은 인종주의 및 강도질[무엇보다 백인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을 가리킨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곳입니다. 인종주의와 강도질은 흑인들이 당시 수도인 필라델피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1793년 황열병이 돌던 때에 생겨나서 매우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때 흑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아픈 사람들을 간호했으며 시체들을 매장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면역력을 얻거나 황열병에서 살아남아서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로 악마화되었습니다.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은 1950년대에 오면 매카시즘의 ‘빨갱이’로 대체된다.] 이때 아이티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한창이었죠.

릴리
막 언급하신 시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8세기 말에 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황열병의 발발이 그 때의 정치를 아래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어떻게 형성했나요?

라인보
먼저 위로부터 일어난 일을 보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도시에서 도망쳤고요, 해밀턴(Alexander Hamilton)도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이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수도를 떠났어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군사 공화국을 보존하여 오하이오강 계곡(the Ohio river valley)을 포위하고 애팔래치아산맥을 넘고 포타와토미족(Potawatomi)[미시시피강 상부와 오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쇼니족(Shawnee)[오하이오 계곡 지역에 살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및 기타 그곳에 사는 많은 부족들로부터 땅을 훔치는 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황열병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흑인들을 악마화했던 것입니다.

이때는 세계사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두 일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 하나는 황열병이 강타하기 몇 달 전인 1793년 2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특정 주에서 다른 주 또는 영토로 도망간 노예의 반환을 규정한 법]이 조지 워싱턴의 서명으로 통과된 일입니다. 이로써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미국 전체의 노예들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확대되었습니다. 둘째는, 1793년 봄에 일어난 일인데요, 조면기(the cotton gin)의 발명입니다.[발명가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했으며 1794년에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술이 면화체제의 남부로의 확대, 인도의 면화생산의 파괴, 이집트와 오토만 제국의 면화생산의 파괴를 가능하게 하고 영국에서의 공장체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제 아래로부터 일어난 일을 봅시다. 우리 모두 1793년 황열병 발발 시 멘투가 누군지 알 것입니다. 한때 노예였던 압살롬 존스(Absalom Jones)와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입니다. 앨런은 아프리카감리교감독교회(AME Church,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만들었고 이 교회는 그 이후 일종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형태로서 존속했습니다. [존스와 앨런은 감리교에서 설교를 하도록 승인받은 흑인 목사 가운데 속했다. 존스와 앨런은 Free African Society (FAS)를 창립했으나, 1794년 이후 일의 방향이 달라서 각기 다른 길을 갔다. 둘은 평생 친구로서, 협력자로서 남아있었다.] 이는 백인우월주의가 가진 인종주의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배격당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분명 황열병의 결과로 아래로부터 일어난 다른 움직임들도 있을 것입니다.

릴리
남·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에 가져온 전염병이 끼친 엄청난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이른바 신세계의 발견과 남·북아메리카를 재형성하는 데서 질병과 정복이 교차하는 모습에 대해서요?

라인보
1420년과 1600년 사이에 14개의 유행병이 멕시코를 유린했고 17개가 페루를 강타했습니다. 대부분 천연두였습니다. 정복된 지 10년 만에 멕시코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1620년쯤에는 200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천연두 및 다른 두 전염병이 저지른 집단학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배운 것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광산에 가두고 과도하게 노동을 시킨 것이 이러한 거대한 말살을 거들었다는 점, 그래서 천연두의 확산과 착취의 형태들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매더(Cotton Mather)는 뉴잉글랜드에서 1616-1617년에 돈 전염병이 “저 해로운 자들을” 숲에서 몰아냈다고 했습니다. 집단학살에 전염병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이런 일은 한 세기 후인 1760년대에 앰허스트(Amherst) 장군에 의해서도 벌어졌는데, 그는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인 곳의 원주민들을 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로 잔뜩 감염시킨 자선 담요들을 원주민들 사이에 배포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전염병은 전쟁의 도구, 지배계급의 도구, 집단학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이런 부분을 보면 끔찍하고 극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계급파괴에 다시 한 번 굴복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꼭 붙잡아 기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계급파괴’라고 할 때 이는, 온갖 형태의 지배계급이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자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이른바 유럽과 아메리카의 최초의 조우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릴리
그것은 또한, 당신이 말한, 황열병에 의한 죽음과 노예상태와 광산에서의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죽음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회가 일종의 환경결정론[전염병은 자연적 환경에 의한 것이지 인재가 아니라는 생각]의 관점에서 전염병들을 받아들이도록 형성되어온 것으로 고대부터의 역사를 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결정들)의 역할을, 사태의 사회적 맥락을 잊을 수 있고, 이른바 자연적 재해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서 사회·정치적 맥락이 결정적임을 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라인보
물론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거시기생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시기생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사회·경제적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릴리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상기시켜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유행병들이 지배층의 정치와 지배층의 대응들을 형성해온 역사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당신이 “우리 자신의 코뮤니즘의 상실된 역사”라고 부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라인보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 삶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생존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건커먼즈에의 접근, 공기·물·주택의 커먼즈(공통재)에의 접근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이는 지배계급이 준 선물이 아닙니다.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해 모두가 향유해온 커먼즈입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지배체제 아래에서, 최근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수 세기 동안, 더 최근에는 우리의 생애 동안 강탈된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물, 주택, 신선한 공기를 뺏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긴 공급사슬로부터 생기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급사슬에서는 동력사슬톱에 굴복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에 굴복하는 숲으로부터 새로운 식품이 요구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태지대들이 파괴되면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들의 일부가 파괴됩니다. 이와 함께 예전의 숙주를 잃은 미시기생체들이 생기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최근에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 글을 실은 네 명의 과학자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by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이들은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우리, 즉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병 방어능력이 수십 년 동안의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공립학교들, 공립병원들, 공공주택, 물에 대한 권리, 공기에 대한 권리가 갑자기, 혹은 단계적으로, 혹은 부채라는 교활한 형태로 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미시기생체들에 취약해진 것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난주만 해도 공기가 좀 신선해진 틈을 타서 트럼프가 자동차에 대한, 내연기관에 대한 오염통제와 관련된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공기가, 우리의 폐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을 틈타서 몰래 해치운 것이죠. 이는 정말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파괴를 심화시킬 뿐입니다. 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이 네 명의 저자들, 이 전염병학자들 썼듯이 삼림과 그 생태의 파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폐만큼이나 삼림이라는 지구의 폐도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아마존의 파괴와 볼쏘나로(Bolsonaro)[브라질의 현 대통령]의 무지한 권력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릴리
이 팬데믹이 전지구적 위기가 되면서 일시적으로든 어떻든 다른 전지구적 위기, 즉 기후위기를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지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나 재택근무 등의 조치들이 자동차의 사용을 크게 막고 탄소방출 수준을 낮추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당신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오신 것으로 압니다만.

라인보
현 국면은 아이러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정치가들이 많은 수의 홈리스들에 눈물을 흘리는 반면 많은 호텔들이 손님이 없어서 연방정부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기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고 폐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으며 탄소방출과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현 국면은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집으로부터 쫓아내는 일의 중지를 원하며 부채의 탕감을 원합니다. 우리는 단일건강보험자체제(single payer health system)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주자들을 억류 상태에서 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이미 일부 수감자들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학자금 대출금의 탕감을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전반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맥락에서의 일입니다. 바삐 서두르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하늘에 비행기가 없고 거리에 차가 없다고 썼습니다. 물론 이는 비상조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가 새로운 세계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의 세계, 더 차분한 세계, 바삐 서두르는 조급함이 없는 세계, 모든 시간이 사업의 시간이 되는 일이 없는 세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수감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합니다. 이런 가능성들을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능성들은 바로 우리의 창문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릴리
팬데믹을 겪으면서야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것이 좀 놀랍습니다. 세상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쉽다고 종종 (필시 너무 많이)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자본주의는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상상력의 위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의 와중에서 (이 측면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 일상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고 어떤 일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어떤 일이 사용가치들을 창출하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돌봄노동, 쓰레기처리, 식량을 재배하고 공급하기―이런 일들은 중요한 반면 다른 일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상위 10%로의 부의 대대적인 집중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력적인 가능성의 순간입니다. 몇 달 만에, 불안과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런 순간이 온 것이죠.

라인보
물론입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아시다시피, 메이데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달 말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저는 1886년 시카고에서 전염병이 했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는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의 때였지요. 참, 이제는 옛날 일이네요. 요즘 누가 8시간 이상 노동을 하나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갑자기 0시간 노동을 강제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0시간 노동을 하는 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앞에서 저는 독서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우리는 정말로 속도를 늦추고 더 생각하기 시작할 수, 더 잘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나 연방정부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돌보는 일을 하려고 하며 저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이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노동을 중단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을 보호하는 도구로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총기판매점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바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적인 공포 속에서 사는 자들의 삶의 한 편린일 뿐입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음을 보는 것이 이토록 쉬운 때에 공포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릴리
물론 지금과 같은 순간에 우리가 맞서 투쟁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전염병을 인종화하는 경향, 질병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트럼프가 이런 경향에 부채질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인보
18세기 말에 개발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체제인 백인우월주의의 중심 개념인 인종 개념의 큰 부분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상이한 기생체들, 질병들과 연결되면 이것이 더 나아가 인종 개념을 구성할 요소들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저의 저작이나 다른 이들의 저작이 보여준 바지만, 이런 과정들 가운데 ‘타자의 악마화’를 포함한 다수가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하여 일어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냄새와 연관되고 때(dirt)와 연관되고 불결함과 연관되었습니다. 이렇듯 지배계급의 차별적 순결 코드가 모든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바로 이로부터 인종과 백인우월주의라는 변종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제 이것이 그 추한 고개를 다시 쳐들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가 알기로···[‘없는 듯합니다라는 말을 하려다 생략한 것으로 추정됨]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매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멘투들과 민중에 의해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신선한 물을 요구하는 엄청난 투쟁을 보세요. 디트로이트는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올리언스도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도시들은 흑인 문명의 수도들이며, 이로부터 모두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간접적인 것 말고는 지배계급[백인들]의 반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흑인 친구들과 동지들은 매우 옳게도 다소 걱정하고 조심하며 지냅니다.

릴리
당신이 언급한, 그리고 책에서 많이 다룬 메이데이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몇 주 후면 메이데이가 오는데요, 우리가 억압받지 않는 세상,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전과 관련하여 메이데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라인보
메이데이는 위대한 재생산의 순간, 지구의 재생산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위의 생명체들에서, 식물들이나 동물들에서 봅니다. 메이데이는 5월이고 봄이요 삶의 부활입니다. 또한 근대 세계의 역사에서, 끝없는 노동과 고역에 맞서 투쟁해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놀이와 투쟁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메이데이는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군사주의나 전체주의의 행사로서 퍼진 것이 아니라 집단성의 행사로서 퍼졌습니다. 올해의 메이데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전이 될 듯합니다. 확신컨대, 이 도전으로부터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것입니다. 되풀이하건대, 메이데이는 지구상의 기쁨의 순간이요 재생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는 출산이 고통을 동반하듯이 투쟁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거시기생체들에 맞서는 것입니다.((메이데이에 대한 라인보의 상세한 설명을 보려면 도서출판 갈무리의 신간 『메이데이』(2020)를 참조하기 바란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4/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9-10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지난번에 이어서 9-10절의 내용정리를 올린다.  이번에도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을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보기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보기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보기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보기
 5. The Columbian Exchange 보기
 6. “The Death Carts Did More…” 보기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보기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보기

 9.“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1.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 볼셰비즘과 스페인 인플루엔자(“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빠르고 파괴적이었던 팬데믹은 스페인 인플루엔자였다. 그 세 번의 유행 가운데 최초의 것은 1918년 3월 캔자스에서 시작되어 가을과 겨울에 한층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형태로 재발하였다. 이 전염병은 그 규모나 파괴성뿐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다른 유행병들과 구분되는데, 그것은 이후 세대들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기억상실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를 연구한 역사가는 이렇게 요약한다. “다른 무엇도 ― 어떤 감염도, 어떤 전쟁도, 어떤 기근도 ― 그토록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한 해 만에 2,200만에서 3,0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미국에서 50만 명이 죽었으며, 떠다니는 바이러스 시험관과 같은 조건에 젊은이들을 처박아놓고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으로 실어날랐던 미군함들이 인플루엔자를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로 옮겼다. 그 후 바이러스는 유럽 제국주의의 해로(海路)를 따라 라틴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인도(여기서 1,200만 명이 죽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태평양의 섬들로 퍼져갔다. 남북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스페인 인플루엔자의 연령별 사망률 곡선은 ‘U’가 아니라 ‘W’ 모양에 가까웠는데, 이는 어리거나 나이 든 사람들보다 젊은이들이 이 병에 더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성은 공식적인 거시기생체 기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이들이 생산, 재생산, 전쟁에 있어서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생산과 재생산이 걱정거리였다.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공화당 상원의원]는 군수품 공장들의 생산성을 걱정했다. 1918년 3월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가운데 1,000명이 병에 걸렸다. 필라델피아 조선소들의 공정률은 군수업자들 놀라게 할만한 속도로 하락했다. 미해군의 40%가 감염되었다. 37개의 생명보험사들이 그해 주식배당을 생략하거나 축소했다. 거시기생체들과 미시기생체들이 건강한 젊은이들의 신체를 두고 치명적인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obblies)에 대한 검열과 정치적 억압은 전염병에 대한 지식의 발달과 치료법들의 전파를 방해했다. 미국의 공공보건정책은 야만적인 법집행을 통해 모든 형태의 소통을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사추세츠주 브록턴(Brockton)의 소녀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에 맞춰 줄넘기를 함으로써 격리조치에 대응했다.

나에게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은 엔자(Enza)였어요
창문을 열자
엔자가 날아 들어왔지요(in-flew-Enza).

(소녀들의 노래는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도마뱀 이야기’였다. 1970년대에 오면 인플루엔자에 대한 연구가 새들의 이주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말이다.)

대규모 모임은 금지되었다. 공중전화부스에 자물쇠가 걸렸다. 공용 식수대(食水臺)는 폐쇄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은행 창구 직원들은 손 씻는 물을 가져다 놓았다. 애리조나주 프레스콧(Prescott)의 지방자치조례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어떤 신문에서 한 제안을 받아들여 악수를 범죄화했다. 미군 공중위생국장은 “지상(地上)에서 문명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W’의 중간 부분이 높아졌고[즉 청년 사망자가 더욱 증가했고] 그 결과 저 유명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에 속하는 절망한 미국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를 제외하면 누구도 스페인 독감에 대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대대적인 사회적 거부인가? 남성우월주의인가? 스페인 독감이 동반한 “심각한 체계적 우울”의 여파인가? 중요하지만 대답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다.

캐서린 앤 포터는 시대와 ‘새로운 남자’의 탄생과 ‘새로운 여자’를 종합했다. 남자들은 휴대용 술병을 들고 다녔고 ‘새로운 여자’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알코올과 니코틴, 이것은 1790년대 이래로 전염병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이었다. 전쟁채권으로 돈을 모으려는 정부의 움직임만이 집회 허용의 유일한 이유가 되었으며, 그러한 집회는 “아플 때까지 주라(Give ‘till it Hurts)”는 슬로건 아래 개최되었다. 군인과 ’새로운‘ 여자 모두에게 주어진 표어는 ‘희생’이었다. 돈을 주라, 너의 시간을 주라, 너의 노동을 주라, 너의 삶과 생명을 주라.

1918년 인플루엔자에 대한 항체를 찾으려는 미국의 노력이 거둔 한 가지 성과는, 보스턴 하버 디어(Deer)섬의 죄수들을 상대로 행해진 실험의 재앙적 결과들을 통해 인간은 실험용 동물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학자들은 다른 것도 발견했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정신, 연구, 지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우리의 피 안에 존재한다.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모든 인플루엔자 전염병은 “우리의 면역혈청에 발자국을” 남긴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스페인 인플루엔자가 한창인 상황에서 여성투표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인플루엔자에 대한 보상으로 투표권을 주는 거래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민지배를 받은 민족들의 자결권을 포함한 저 유명한 ‘14개 항’은 스페인 독감의 초기에 발표되었다. 전염병이 끝나갈 무렵 그는 파리에서 제국주의적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리자 쉬엄쉬엄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거부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볼셰비즘과 경쟁하고 있단 말이요.”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Pale Horse, Pale Rider)에서 캐서린 앤 포터는 이렇게 썼다. “더 이상 전쟁도 전염병도 없고, 육중한 포화들이 멈춘 후의 멍한 적막만이 감돈다. 그늘이 드리운 소리 없는 집들, 텅 빈 거리들, 죽음처럼 차가운 내일의 빛. 이제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렇다. 제정(帝政)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시간이, 아랍혁명을 위한 시간이, 남아프리카에서의 반란을 위한 시간이, 봄베이[현(現)뭄바이] 직물 노동자들의 기동(起動)을 위한 시간이, 아이티 반란을 위한 시간이, 멕시코 혁명을 위한 시간이, 베를린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위한 시간이, 포틀랜드 총파업과 피츠버그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을 위한 시간이, 가비(Marcus Garvey)의 범아프리카주의를 위한 시간이. 건강이란 이러한 파업, 반란, 봉기, 혁명 들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조립라인, 남아프리카의 금광, 봄베이의 스웻숍(sweatshop),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벨파스트의 조선소, 크론슈타트의 야금공장, 세계 곳곳의 슬럼들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거시기생체의 흡혈의 대상이 되었던 전세계의 숙주들이 ‘항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혁명들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도마뱀 이야기’가 실천되었던 것이다.

이에 맞서 거시기생체는 야만적인 억압으로 반격해왔다. 러시아의 침략행위들, 인도 펀잡(Punjab)주 암리차르(Amritsar)에서의 학살, 아이티와 털사(Tulsa)에서 이루어진 지상-공중 합동 공격, 시카고에서의 인종폭동, 백악관의 KKK,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가 그 사례들이다.

 

  1. 나의 투쟁과 터스키기(Mein Kampf & Tuskegee)

나치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미국의 인종정책을 칭찬하고 독일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20년대 히틀러와 나치는 매독에 대한 집착을 미국 의학계와 공유했다.

19세기에 미국에서 발전한 인종주의적 의학은 질병에 대한 면역성, 취약성, 상대적 심각성 등에서 인종들 간에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인종주의적 의학은 흑인들이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성적으로 문란함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인구조사 결과 19세기 후반에 흑인들의 출생률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자, 일부 의사들은 이것을 노예해방이 흑인종의 소멸을 낳는다는 인종주의적 믿음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매독은 “전형적인 흑인의 질병”으로 여겨졌다. 어떤 의사는 흑인이 “악명높게도 매독에 흠뻑 젖어 있는 인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백인 전문가들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섹스를 교육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9세기말-20세기초의 “사회적 위생”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공중보건국 내에 성병전담부서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성병 클리닉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건강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의 이러한 구조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적 의학의 치명적 가정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치 역시 매독을 피억압 소수자들, 즉 유대인들과 연결했다. 히틀러는 매독을 “유대인의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매독은 민중을 오염시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혔다. 히틀러는 도시의 성적 자극물들(영화, 광고판, 쇼윈도우 등)을 비난했으며, 이를 매독, 그리고 자신이 “유대화(Jewification)”라 부르는 과정과 연결지었다. 그 이름과 기원이 유럽의 정복활동, 대규모 이주, 노예제, 여성혐오적 가족정책과 분리될 수 없는 질병인 매독은, 이번에는 ‘청결’의 이름으로 매독환자의 ‘안락사’, 강제이주, 노예노동, 집단수용소 등을 제도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주의적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나치가 독일 의회에서 다수당이 된 해인 1932년에 미국 공중보건국은 “터스키기 흑인 남성 비치료 매독 관찰 실험(Tuskegee Study of Untreated Syphilis in the Negro Male)”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공식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집단학살 정책” ― 1972년 실험의 진실이 폭로되었을 때 한 비평가가 한 말 ― 을 실행했다. 앨라배마주 메이컨(Macon) 카운티에 거주하던 600여 명의 흑인 남성이 기만당해 실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이따금 더운 음식을 제공받고 뷰익(Buick, 자동차 브랜드)을 타고, 장례 보험을 보장받는 등의 ‘혜택’을 받고 실험에 참여했는데, 이 실험은 흑인 남성 매독 환자의 사망률이 백인 매독 환자의 사망률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

피실험자들은 자신들이 매독에 걸렸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도 매독에 감염되었다. 실험은 목표, 수단, 테크닉 모두에서 인종주의적이었다. “정부 소속 의사들”은 매독 3기 단계에 있는 흑인 남성들의 사망률이 통상 신경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고 믿어졌던 백인 남성 환자들의 경우보다 더 높은 심혈관계 발병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피실험자들은 가축처럼 취급받았다.

메이컨 카운티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나치 집단수용소와 유사해졌으며, 나치의 실험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듯이 저 실험들 역시 ‘남부 예외주의’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터스키기의 피실험자들이 북부로 이주하면 클리블랜드, 뉴욕, 디트로이트의 공중보건국 관리들 역시 치료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협조’를 제공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리고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 일을 금지하는 공중보건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터스키기 실험은 40년 동안 계속됐다. 나치 의사들에 대한 재판과 그 결과로 도출된, 인간 대상 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The Nuremberg Code)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도 공중보건국 관리들은 멈추지 않았다.(40년대 후반 미국 정부는 나치 의사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인간 대상 실험 규제에 관한 1964년 헬싱키 선언도 터스키기 프로젝트를 멈추지 못했다. 이 ‘연구’를 멈춘 것은, 나치를 피해 도망친 부모를 둔 내부고발자의 노력과 마틴 루터 킹과 로자 파크스의 변호사였던 프레드 그레이(Fred Gray)의 법률적 노력의 결합이었다. 물론 1972년의 그들 뒤에는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혁명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이 실험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1997년에 이르러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소수의 생존자와 다수 사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사과했다.]

심지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1988년 2월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의 책임자 앤써니 파우치(Anthony Fauci) 박사는 에이즈 백신을 테스트하기 위한 대규모 인체 실험을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자이르(Zaire)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에이즈 연구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로버트 라이더(Robert W. Ryder) 박사는 같은 달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 ― 이것은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요 ― 은 수천 명의 에이즈 감염자들을 추적 연구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낮기 때문이죠.”

그러한 연구는 특정한 경제적·인구학적 맥락에서 수행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세계은행>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세계은행>은 아프리카에서 인구억제정책을 장려했으며, “낡은 방식들”에, 즉 자신들의 토지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거시기생체적 농업산업에 방해가 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수를 줄이고자 했다.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유용하다. 국제의료기구들은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다는 인상을 서구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에이즈, 아프리카, 인종주의』(Aids, Africa and Racism)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구 의사들은 아프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모아놓고 다른 모든 의학적 가능성은 배제한 채 그들이 에이즈를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의사들은 자국에서 적용되는 윤리적 제약들 없이 소규모의, 신뢰할 수 없는 혈청역학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이 연구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믿었다. 이들은 어째서 혈청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질병의 증상을 보이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는커녕 의문을 품지조차 않았다. 이 의사들은 에이즈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파리 여행에서 수집해서 냉장고 바닥에 두었던 오래된 혈액 샘플들을 꺼내서 신뢰할 수 없는 테스트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또 다른 스토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서구 대중들에게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이것은 메이컨 카운티의 소작인들, 필라델피아의 자유로운 흑인들, 아이티의 황열병, 히스파니올라섬(Hispaniola)의 양치기 ‘매독’, 심지어는 투키디데스와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이것은 인종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일단 흑인은 더럽고, 병이 들끓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고, 어떤 식으로든 금방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생기면, 집단학살을 제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치의 “최종적 해결책”이 계획되고 터스키기 실험이 한창이던 1939년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은 1918년 이후 세계를 휩쓸었던 범아프리카주의에 몰두하여 모세 이야기를 멘투와 그의 “멋진 도마뱀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다시 썼다. 그때에 비하면 아프리카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졌다.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물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이 도움은 악어의 눈물을 동반하는 도움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을 구실로 우리의 질병을 관리하는 얼간이들에 맞서 우리 자신의 ‘도마뱀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도움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더 섞이고 교류할수록, 함께 음식을 먹고 잠을 잘수록 우리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파괴하는 미시기생체들이 거시기생체의 눈에는 ― 그것들이 혹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 신이 보낸 선물처럼 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거시기생체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우리가 ‘도마뱀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다. 이제 거시기생체들은 우리가 정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을 위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적 무질서’를 대가로 치르지 않고는 저 집단학살을 위한 미시기생체들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