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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사멸 3.0



 

국가의 사멸 3.0

 

며칠 전에 우리는 프랭크 파스콸레(Frank Paquale)의 주목할 만한 발표를 소개했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우버 혹은 에어비앤비와 같은 새로 등장한 ‘넷지배’(netarchical) 기업들이 이전에 ‘국가’와 ‘정부’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공적 권력—그 책임성이 때로는 매우 미미했을지라도—을 그가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함을 보여주었다. 이 효과는 토큰화된 경제(the tokenized economy)의 출현 및 성장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 경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토큰 경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발자들과 창조계급이 시장 가치를 주식보유자들로부터 재포획하고 분산된 플랫폼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新)길드 체제를 창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토큰들은 실로 플랫폼들에서 디자인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시장가치를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큰 기반 기획들은 시장 경제의 추출적 기능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며 그 분산된 다자인에도 불구하고 멱함수 법칙(power law)의 동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등하기만 한 구조들은 희소한 자원을 위한 경쟁으로서 디자인된다면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과두제를 향해 진화한다(멱함수 법칙에 의한 집중, 즉 반복될 때마다 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앙집중화된 넷지배 플랫폼들과 비트코인 및 기타 많은 (모두는 아니다!) 토큰 기반 블록체인 응용태들과 같은 이른바 ‘분산된’ 아나키즘적-자본주의적 구조들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책임성 없고 비민주적인 사적 ‘화폐’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진보적 도시들과 쇠퇴하는 국민국가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초국적 권력을 가진 ‘기업 주권체들’(corporate sovereigns)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새로 출현하는 국민 포퓰리즘[우익 포퓰리즘]의 권위적인 해결책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복지 지향적인 국민국가를 부활시키고자 할 뿐인 좌익 포퓰리즘의 시도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특히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맥락에서 그렇다.

 

어떤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안쪽에는 밝은 희망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국가의 ‘사멸’을 둘러싸고 좌파의 해방론적 전통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에 새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곧바로 철폐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 대신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철폐하는 것은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군사화된 지배계급의 거친 권력(준군사적 군대 등)으로 대체하자는 처방일 뿐이라고, 내 생각에는 옳게,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상한 것이, 노숙자들이 경찰의 저지가 없이 빈 집을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소유자 계급이 고용한 준군사적 군대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국가의 사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점진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사회민주주의 버전)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국가기능을 점차적으로 대체한다는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는 맑스가 그의 2단계론에서 표현한 바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교환논리와 국가의 역할에 의해 공히 특징지어지면, 둘째 단계만이 별도의 국가기능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역설은 이 더 근본적인 시나리오의 메아리가 기업 주권체들과 자유방임주의적 정신을 가진 토큰 경제의 전술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유화된 상호화’ 모델이 가진 우월한 효율(즉 공급과 수요를 효과적으로 서로 맞추는 사적인 플랫폼들), 사용자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과 인간의 행위를 은근히 자극하는 능력, 그리고 이 플랫폼들에서 ‘잉여 가치’를 직접 빨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이전에 공적 부문이 담당했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라이드셰어링이 대중교통과 경쟁한다든지 아니면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공유가 규제를 받는 호텔 등을 대체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세계 전체가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나 기타 권리들은 사유재산의 절대적 권리를 통해 부식되고 있다.

 

‘국가의 사멸’은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적 시나리오에만 속하지 않는다. 사실 넷지배 플랫폼들의 침탈적이고 규제 받지 않는 관행들은 국가의 디스토피아적 해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P2P재단의 우리들은 더 나은 미래, 해방적 힘들이 환경 및 평등 문제를 풀어가면서 관료화된 국가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하도록 이 과정을 해킹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로 도시 삶의 사회적·환경적 평형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주도하는 기획들에서 이미 기능적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거버넌스와 소유의 협력적 형태들은 잉여를 스스로의 발전에 할당할 수 있고 기여자들의 생계를 창출하는 데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협력적 생태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면) 넷지배 플랫폼들을 협력 능력에서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의 최근의 보고서 『어번 커먼즈 이행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에서 개괄한 바 있다.

 

우리의 지도그리기와 플랑드르의 헨트(Ghent) 시의 500개의 어번 커먼즈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했듯이, 거의 모든 자급체계들(이동성, 주택 등)이 현재 아직은 주변적이지만 점증하는 새로운 커먼즈 중심적 대안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지역들처럼 헨트와 플랑드르에서도 커먼즈 기반 기획들이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그러나 사유화된 플랫폼들과 달리 이 기획들은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며 종종은 단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단편화를 해결할 것인가? 다음은 이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다.

 

 

 

· 모든 자급체계에 대해서 그런 자급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저장소가—무니라이드(MuniRide)와 페어비앤비(FairBnB) 유형의 해결책을 위한 일종의 깃허브(github)가—있다고 상상하자.

· 이 해결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들, 협동조합들, 심지어는 노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P2P 혹은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을 전지구적 규모로 키우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 지역적으로, 가령 도시나 바이조이역의 수준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연합들은 다중이해관계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창출한다. 이 플랫폼들은 전지구적 소프트웨어 저장소들을 사용하지만 이 저장소들을 지역의 맥락과 필요에 맞추며 또한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써 공통의 코드 베이스(code base)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플랫폼의 모든 잉여는 원거리 소유자들의 배당금으로서가 아니라 기반시설의 공동개발과 모든 기여자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재투자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넷째 층은 교환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산이다. 실로 이 단계에서 어번 커먼즈들은 재화를 다양하게 분배하지만 재화 자체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서술한 전지구적 커먼즈가 마이크로팩토리들(microfactories, 초소형 공장들)을 통해 재분포된 지역에서의 생산과 부합하는,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생산체계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이크로팩토리들은 열린 협동조합들이기도 하다. 즉 자신들의 구성원들로부터 가치를 포획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혜택을 주는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전념하는 협동조합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사유화된 플랫폼과 추출적 토큰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자연에 남기는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토큰을 기여상의 정의를 위해 다시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협력적 상호화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반시설의 상호화가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며, 이는 지식의 완전한 공유를 보장하면서도 보상의 더 정당한 분배와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성공의 열쇠는 초지역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의 공간적 혹은 지리적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역(local), 도시, 바이오지역의(bioregional) 기획들은 그 사용자 기층에 가까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교환한다.

· 그러나 초-지역적, 초-국가적 지식 베이스들을 사용한다.

· 참여자들은 지역의 수준에서 생산하지만 초-국가적이고 평등한 지식-길드들과 전지구적 이고 초국적인 덕행적(entredonneurial)(([옮긴이] ‘entredonneurial’은 ‘중간으로부터 취하는’(‘taking from in between’)이라는 의미를 가진 ‘entrepreneur’에 대응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으로서 ‘중간에 주는’(‘giving to the in between’)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전까지 일단 ‘덕행적’이라고 옮긴다.))연합들을 조직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진보적 다수의 역할은 이 지역적, 초-국가적 기반시설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환경적으로 균형을 갖춘 지속적인 자급체계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자급체계들은 그—이 경우에는 민주적이기도 한—기능적커먼즈 거버넌스 덕택에 사유화되고 추출적인 초국적 권력구조들을 수행의 측면에서 능가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영토의 수준에서 메타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파트너국가로 변형되어야 한다. ‘파트너국가’는 현재의 국가장치를 하루아침에 마법적으로 변형할 것을 필요로 하는 이행이 아니다. 이는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연계를 통해 관리되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적 거버넌스 배치를 진보적 연합들이 승인하고 촉진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파트너국가는 또한 커먼즈 지향적 대안에 공감하고 그것을 지원할 공무원들과 정치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행정 구조의 모든 틈새 영역에 모든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다. 파트너 타운들, 도시들, 바이오지역들, 혹은 더 광범한 초국적 구조들을 생각해보라. 공적 영역과 커먼즈가 연계한 협력적 형태의 자급이 개시되고 성장하는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참여에 뿌리를 둔 더 민주적인 형태들에 의해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능들을 사멸시키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우리가 국민국가보다는 새로운 초-국가적 구조들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실로

 

1.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국가-국민이 하나로 통합된 구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발굴한 이중 운동의 논리가 적용된다.

2. 시장 기능이 국가와 시민의 규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때면 언제나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것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함입시키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낳았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초-국가화된 자본의 경우에 국민국가의 규제는 미미해졌으며 우익의 국민 포퓰리즘과 좌익의 사회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을 실질적으로 다시 잡으려면 초-국가적, 초-지역적 수준에서의 대항-헤게모니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은 소식은 이 힘이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P 동학과 커먼즈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기타 전지구적 생산공동체들이 부상하고 있다.

· 전지구적 기업가 연합이 이 오픈소스 지식 베이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수가 의식적으로 생성적인 연합이 되어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커머너들의 생계에 대한 지원을 생성하고자 한다.

· 도시들의 (그리고 협동조합들, 노동조합들, 윤리적 자본의) 전지구적 연합은 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공통의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여 이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전지구적 기반시설들을 떠맡는 전지구적 트러스트들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사멸 3.0이다. 즉 국민국가 수준 너머에서 수립된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능적 거버넌스이다.




바우엔스,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 테제에 대한 비판



 

전도된 사회적 다윈주의로서 안드레아스 베버의 ‘살림’(([옮긴이] ‘enlivenment’에 대한 설명은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참조.))테제에 대한 비판

 

우리는 안드레아스 베버의 뛰어나고 재미있는 글 「살림: 자연, 문화, 정치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 Heinrich Boell Foundation, 2012)를 다음 게시글로 재출판할 것이다.

나는 위 텍스트의 내용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의 주체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세상에 관한 우리의 사유와 느낌-사유에서 생명 및 의식과 다시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그 책의 취지에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베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에 기고한 글, 특히 「낭비의 경제: 커먼즈의 생물학」(“The Economy of Wastefulness: The Biology of the Commons”)이 그 증거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수십억 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커먼즈 경제 즉 생물권(biosphere)이 있다. ···…나는 자연이 탁월한 커먼즈 패러다임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이, 압도적일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커먼즈 원칙에 따라 함께 살아왔다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주장은 한층 더 복잡하다. 나는 자연 내부에서의 생태학적인 관계들도 커먼즈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자연과정을 경제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 이미 문제이지만, 어떻게 ‘경제학’을 정의하는지에 따라 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커먼즈 경제’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확장인 것 같다. 오스트롬 학파와 그 이후 커먼즈 운동은 커먼즈를 항상 그 사용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공유재(a common pool resource)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그 거버넌스의 민주적인 성격(그것이 아무리 넓게 정의되더라도)을 강조한다. (공유 자원의 독재적 관리는 사실상 사용자들을 수탈할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오픈 액세스 자원들은 커먼즈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즉 “생물권”에 그러한 거버넌스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대담한 가설이며 자연 속의 사용자들이 실제로 그런 민주적인 협력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만물의 국회’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베버는 우리의 자연관이 빅토리아 영국의 인간관에서 유래되었다는, 바꾸어 말해서 문화의 투사(投射)라는 매우 가치 있는 주장을 한다.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빅토리아 산업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그러한 이론 중 일부를 변경해서 자연 변화와 발전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에 적용했다. 그 여파로 “생존투쟁,” “경쟁,” “성장”, “최적화” 같은 개념들이 암암리에 자기이해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 즉 사회는 생물학적•과학기술적•사회적 진보가 개인 이기심의 총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경쟁에서 환경에 적합한 종들(강력한 기업들)은 틈새(시장)를 개척하고 그들의 생존율(수익)을 증가시키는 데 반하여 약한(덜 효율적인) 종들은 멸종한다(파산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경제와 자연의 형이상학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기보다 사회가 자신의 고유한 전제들에 관해 가지는 견해이다. ······우리는 생물학과 경제학의 이런 연합을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이데올로기가 다시 사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관점에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베버의 판단에 충분히 동의한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우리의 사회 조직의 성격에 대하여 이런 결론들을 도출한다.

경제에 기반을 둔 자연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황야를 배제했다. 즉 자기성취적이고 그 어떤 존재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으며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종획되지 않은 자연을 배제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 가운데 경쟁과 최적화라는 원칙을 넘어가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일반적인 정당성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멋진 환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생존투쟁에서 작동하는 심층적인 힘들에 대한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잘 맞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협력은 기본적으로 자원경쟁에서의 전략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자연 그 자체는 커먼즈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임에서는 독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픈 소스이다. 유기체 영역의 본질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모든 것에 열려있는 유전 정보의 소스코드이다. ···…죽음에 이른 모든 개체는, 햇빛이라는 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체들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선물로서 자신을 내놓는다.

(······)

생태계 커먼즈에서 수많은 별개의 개체들과 서로 다른 종들은 서로 다양한 관계—경쟁과 협동, 협력과 포식(捕食), 생산성과 파괴—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들은 한 가지 상위법을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촉진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어로서 “커먼즈”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세계를 묶어주는 요소를 나타낸다. 자연을 그 진정한 질의 측면에서 커먼즈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사회적 삶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삶에서—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연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 생산적인 관계를 이루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커먼즈 경제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

  따라서 커먼즈 개념은 자연과 사회/문화 사이에 있다고 상정되는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통합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할을 없앤다.

나의 이의제기는, 이 설명에는 빠진 것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전도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설명에는 창발(emergence)이 빠져있다. 즉 복잡성(complexity)을 가진 새로운 층들이 새로운 실재와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빠져있다. 삶(생명)은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고, 의식도 물질에 새로운 규칙을 가져오며 인간 문화 또한 그렇게 한다. 각각의 창발적인 층은 비록 그 층보다 앞서는 어떤 층에 함입되어 있고 그 선행하는 층의 제약을 받아야만 할지라도, 혁신과 ‘새로운 자유’(예컨대 동물은 자신의 의지로 이동할 수 있지만 식물은 이동할 수 없다)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는 인간문화와 그 선택들은 자연법칙에서 파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적인 것에 함입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연 전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안드레아스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연은 “경쟁과 협동이고 협력과 포식”이다. 인간사회는 이런 충동들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베버가 커먼즈로 보는 자연 속의 포식관계가 인간의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충동을 알고 인식해야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충동을 조절한다. 인간의 영역 외부에서 자연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커먼즈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커먼즈는 인간의 법이다. 커먼즈는 사회와 자원이 여러 선택들 사이에서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비전이다. 자연에는 소유(재산) 개념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소유(재산) 개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개념을 적용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리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연이 우리에게 포식이 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예를 들어, 약탈적인 충동을 관리하고 승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함입시킬 수 있는 만큼은—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커먼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도된 자연주의, 즉 반(反)다윈주의이다. 안드레아스 베버 입장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베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최근에 인간이 발견한 것, 즉 자연 또한 협동체계라는 것과 우리가 자원을 커먼즈로서, ‘자연의 특성’으로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에 투사한 다음 “하하, 자연은 커먼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커먼즈임에 틀림없다”라고 결론 내린다. 사실 자연과 사회 둘 다 다양하고 우리는 자연과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하여 민주적인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은 계몽의 기획이었고 안드레아스 베버가 진술하듯이 일면적이었으며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살림’은 필요한 보완요소이다. 하지만 전도된 투사 메커니즘을 실행하는 ‘살림’은 그런 요소가 아니다.

우리의 ‘살림’은 자연의 이상화, 자연 신비주의, 인간 중심적 투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안드레아스에게 미안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커먼즈가 아니며 오직 인간만이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도입할 수 있다. ♣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의 역사와 진화

 

커먼즈를 역사화하는 것, 즉 커먼즈의 진화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래는 최초의 예비적 시도이다.

우선 커먼즈를 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데이빗 볼리어 등이 부여했으며 엘리너 오스트롬을 비롯한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서 나온 정의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따르면 커먼즈는 공유된 자원을 그 사용자들 그리고/혹은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체들이 그 규칙 및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소유하고/소유하거나 공동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커먼즈는 ‘사물’, 활동(자원의 유지와 공동생산을 하는 커머닝), 그리고 다스림(거버넌스)의 방식의 결합이다. 이는 사적 형태의 자원관리 및 공적/국가적 형태의 자원관리와 구분된다.

그런데 커머닝을 자원의 결실을 분배하는 네 가지 양식 중 하나로, 즉 하나의 ‘교환양식’(mode of exchange)으로 보는 것도 유용하다. 이는 의무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 기반의 재분배 시스템과도 다르고 상품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과도 다르며 특수한 존재자들 사이에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선물(膳物)경제와도 다른 교환방식이다. 커머닝은 자원을 한데 모으기(pooling)/공동으로 사용하기이며, 이를 통해 개인들은 생태계 전체와 교류한다.

관계를 규정하는 여러 문법들, 특히 피스크(Alan Page Fiske)의 『사회적 삶의 구조』(Structures of Social Life)에 제시된 것이 이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피스크는 권위의 서열화(서열에 따른 분배), 동등하게 응답하기(선물에 선물로 응답할 사회적 의무로서의 선물 경제), 시장에서의 가격매김, 그리고 공동체적 공유라는 네 가지를 구분해낸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世界史の構造)는 교환양식의 진화를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훌륭한 시도이다. 초기의 부족적·유목적 형식의 인간 조직에서는 ‘한데 모으기’가 주된 양식이었다. ‘소유하기’는 유목민들에게는 반(反)생산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물경제는 더 복잡한 부족적 배치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특히 농경으로의 정착 이후에 가장 강해진다. 선물과 답례의 사회적 의무가 사회를 창출하고 관계를 평화롭게 한다. 계급사회의 등장과 함께 ‘권위의 서열화’ 혹은 재분배가 우세해지며,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에서 시장 체제가 우세해진다.

이제 이것을 문명의 역사, 즉 계급의 역사에 맞춘 가설로 다시 정식화해보자.

자본주의 이전에 출현한 계급사회들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커먼즈들이 존재했다.(([옮긴이] ‘commons’는 ‘means’(수단, 방법)처럼 단수로도 쓰이고 복수로도 쓰인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자연자원 커먼즈들로서 오스트롬 학파의 연구대상이 된 것들이다.(([옮긴이] 밑줄 강조는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이 커먼즈들은 문화적으로 전승된 더 유기적인 커먼즈(민속 지식 등)와 공존했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사회들은 매우 착취적이었지만 사람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구조적으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유럽 봉건주의에서 농민은 공유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및 시장체제가 처음에는 도시 내의 하부체계로서 출현하고 진화하면서 둘째 형태의 커먼즈, 즉 사회적 커먼즈가 중요해진다. 서양 역사에서는 수공업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연대제도인 길드 시스템이 중세의 도시들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복지’(welfare)시스템이 공동으로 이용되고 자율적으로 관리되었다. 시장 기반의 자본주의가 우세해지면서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여기서 자연자원 커먼즈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가 구축될 필요가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 소비조합, 공제조합 등을 커먼즈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사회적 커먼즈를 관리하는 법적 형태로서 간주될 수 있다.

복지국가에서는 이 커먼즈들 대부분이 국유화되며 (즉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며) 더 이상 커머너들 자신들에 의해서 관리되지 않는다. 사회안전제도들이 민주적 정치체에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커먼즈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복지국가의 위기와 함께 ‘커먼페어’(commonfare)(([옮긴이] ‘welfare’가 ‘잘 살기’를 의미한다면, ‘commonfare’는 ‘공동으로 살기’를 의미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풀뿌리 유대시스템들이 다시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지제도의 신자유주의화와 관료화는, 공적인 부문(국가)과 커먼즈의 파트너관계에 기반을 둔 복지제도의 재(再)공통화(re-commonification)에 대한 요구를 야기하는 충분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터넷의 출현, 특히 웹의 발명 (웹브라우저는 1993년 10월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래 우리는 셋째 유형의 커먼즈인 지식 커먼즈의 탄생과 급속한 진화를 목격하고 있다. 분산된 컴퓨터 네트워크들은 P2P 동학의 보편화를 가능하게 했다. 즉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peers’)이 공유된 지식 자원(지식, 프리 소프트웨어, 공유된 디자인들)의 공동의 창출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열린 기여 체계들을 가능하게 했다. 지식 커먼즈는 인지 자본주의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즉 지식이 생산과 경쟁에서의 장점의 일차적 요인이 되는 동시에 ‘사유재산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대안―지식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이 생산요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본주의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인지 혹은 네트워크 기반의 자본주의가 특히 지식 노동자들의 경우 봉급 기반의 노동을 무너뜨리고 불안정노동을 보편화하는 바로 그 만큼,(([옮긴이] 원문 “To the degree that cognitive or network-based capitalism undermines salary-based work and generalized precarious work, especially for knowledge workers, these knowledge commons and distributed networks become a vital tool for social autonomy and collective organisation”에서 “generalized”는 ‘generalizes’의 오류로 보고 고쳐서 옮겼다.)) 이 지식 커먼즈와 분산된 네트워크들은 사회적 자율과 집단적 조직화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지식에의 접근이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더 안정된 생계를 창출할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지식 커먼즈들은 일반적으로 자본과 서로 의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의 새로운 층인 ‘넷지배’ 자본(netarchical capital)은 커먼즈와 인간의 협력으로부터 직접 가치를 추출한다.(([옮긴이] 넷지배 자본은 지적 재산의 소유나 미디어 벡터의 통제에 의존하지 않고 참여 플랫폼들의 개발과 통제에 의존하는 자본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wiki.p2pfoundation.net/Netarchical_Capitalism 참조.))

그러나 우리는 지식이 물질적 실재의 재현이며 따라서 지식 커먼즈의 출현은 생산양식과 분배양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놓을 가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한 국면, 즉 ‘디지털’(즉 지식)과 물리적인 것(the physical)의 증가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피지털(phygital)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교직이 일어나는 최초의 장소는 어번 커먼즈이다. 나는 네 달 동안 벨기에의 헨트 시에서 보낼 기회를 가졌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급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영역(식품, 주거, 수송)에서 거의 500개에 달하는 어번 커먼즈들을 찾아냈다.(([원주] 자급활동에 따라 분류된 커먼즈의 디렉터리로는 네덜란드어로 된 싸이트 http://wiki.commons.gent 참조.))

우리의 큰 발견은 어번 커먼즈들이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커먼즈 공동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커먼즈들이 다음의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 열린 생산공동체

2) 커먼즈의 기반시설을 유지하면서 이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반시설 조직

3) 커머너들의 사회적 재생산(즉 그들의 생계)을 확보하기 위해서 커먼즈와 시장/국가 사이를 매개하는 (최선의 경우에) 생성적인 생계 조직.

적어도 두 개의 연구에 따르면(([원주] 그 중 하나는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며, 무어(Tine De Moor)가 2013년 8월 30일 <역사적 관점에서의 집단적 행동 연구소>(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한 「협력인」(“Homo Cooperans”)이라는 제목의 강연 텍스트를 실은 소책자이다. http://www.collective-action.info/sites/default/files/webmaster/_PUB_Homo-cooperans_EN.pdf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를 대상으로 한다. Burgercollectieven in kaart gebracht. Van Fleur Noy & Dirk Holemans. Oikos, 2016: http://www.coopkracht.org/images/phocadownload/burgercollectieven%20in%20kaart%20gebracht%20-%20fleur%20noy%20%20dirk%20holemans.pdf)) 급격한 성장의 국면을 거쳐가고 있는 이 어번 커먼즈들은 (지난 10년 동안 10배 성장했다) 우리가 보기에 커먼즈의 더 나아간 발전을 위한 전제로서 한층 더 심화된 새로운 물질적 실현의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비물질적, (공동)생산됨/전승됨이라는 두 축을 따라 네 유형의 커먼즈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오스트롬이 연구한 커먼즈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물질적 커먼즈(자연자원)이다. 문화나 언어 같은 물려받은 비물질적 커먼즈는 보통 인류의 공통 유산이라는 각도에서 고찰된다. 지식 커먼즈들은 공동으로 생산되는 비물질적 커먼즈이다. 마지막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커먼즈라는 대체로 그 사례를 찾기 힘든 범주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전통적으로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자본을 위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이라는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그 논리를 한번 보자.

토지가 주된 생산요인이었던 전자본주의적 계급형성체에서 자연자원은 커먼즈 생계에 필수적이었으며, 커먼즈가 토지와 연결된 자연자원의 공동 관리라는 형태를 띤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토지와 생산수단에의 접근에서 분리된 자본주의에서는 커먼즈가 ‘사회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회적 커먼즈는 노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연대제도이다. 자본의 지배 동안 생산을 상이한 토대 위에서 조직하려는 시도들이기도 하다. 즉 생산과 소비를 위한 협동조합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인지 자본주의의 시기에 지식은 생산과 부 창출의 주된 자원이자 요인이 되며, 지식 커먼즈는 그 논리적 결과이다. 그러나 안정된 봉급을 받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이 지식을 ‘먹을’ 수는 없다. 따라서 커먼즈는 또한 도시 기반시설과 자급 시스템의 형태를 띠며,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물리적·물질적 커먼즈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잠재적으로 현재의 종합국면에 적합한 생산양식의 형태이다. 필요한 생태적 이행 및 사회적 평등의 제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장과 국가가 실패한 시기에는 커머닝 기반시설이 자원과 서비스에의 접근을 보장하는 데 필요하게 된다. 접근의 불평등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인간의 물질적 생산이 생태계에 남기는 발자국을 줄이는 매우 힘있는 수단으로서도 그렇다.

따라서 현재의 어번 커먼즈 및 생산 커먼즈들은 현 체제의 문제―물질적 생산에서의 사이비 풍요가 지구를 위태롭게 함과 아울러 지식 교환에서의 인위적 희소성이 해결책의 확산을 방해하고 있다―를 풀어줄 새로운 체제의 맹아적 형태들이다.

인지 자본주의의 지식 커먼즈들은 탈자본주의 시기의 생산적 커먼즈로 이행하는 과도적 형태일 뿐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지식 커먼즈에 의해 형성되고 모델화되는 이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커먼즈(따라서 ‘피지털’)에서는 생산수단 자체가 공동의 이용을 위해 한데 모은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공유된 전지구적 지식자원(예를 들어 공유된 디자인들 같은 것이 있으며 ‘모든 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고 공유된다’는 규칙을 따른다)과 지역에서 협동적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미시적 공장들(‘모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라는 규칙을 따른다)이 결합되는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DGML: design global, manufacture local) 생산 및 분배양식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옮긴이] ‘DGML’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797 참조.))

· 프로토콜 협동조합주의 : 바탕이 되는 비물질적이고 알고리즘적인 프로토콜들이 공유되어 오픈소스가 된다. 카피페어(copyfair) 원칙을 따른다(자유롭게 공유되지만 상업화는 상호성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 열린 협동조합주의 : 커먼즈 기반 협동조합들은 사회 전체를 위해 공통의 재화를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자본주의’와는 구분된다. 플랫폼 협동조합들에서는 플랫폼 자체가 커먼즈이며 요구될 수 있는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관리하는 한편 추출적인 넷지배 플랫폼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는다.

· 열린 기여기반 회계 : 모든 기여를 인정하는 공정한 분배 메커니즘들이다.

· 열린 공유된 공급망 : 상호 조정을 가능하게 한다.

· 배타적이지 않은 형태의 소유 : 생산수단이 생태계 내의 모든 참여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으로 점유·운영된다.

우리 견해로는 현재 어번 커먼즈들의 급속한 성장의 파도는 앞으로 올 더 거대한 파도, 즉 탈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치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할, 규모가 커진 물질적 커먼즈들의 출현의 파도를 예시한다. ♣




Equipotentiality


  • 다음은 미셸 바우엔스의 ‘Equipotentiality'(잠재적 균등성) 개념에 관한 정백수의 설명이다.

 

Equipotentiality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는 P2P 관계가 ‘등가의 법칙’(law of equivalence’)을 극복하는 원리로서 미셸 바우엔스가 제시하는 개념이다. 아래 두 사이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https://blog.p2pfoundation.net/harry-walker-on-a-anthropology-of-the-common/2015/07/10

https://wiki.p2pfoundation.net/Equipotentiality

‘등가의 법칙’이란 맑스라면 ‘일반화된 교환의 법칙’이라고 불렀을 것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되는 데 작용하는 법칙이다. 가따리는 ‘일반적인 등가물로서의 자본’ 혹은 ‘일반적인 등가관계’라는 말로서 자본의 핵심을 표현하곤 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는 상업적 교환을 삶의 핵심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 팽크스(Pancks)를 등장시켜서 그 인물의 다른 잠재된 요소(이는 ‘보시바라밀’에 버금가는 것이다)가 발현되어 (물론 상황의 악화도 한몫한다) 이 사고방식을 파훼하는 방식으로 이 법칙을 비판했다.

상품들 사이의 교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품들의 질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양에서의 차이만 확정하여 교환비율을 정해야 한다. 이 교환비율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교환가치이며 교환가치의 내적 실체를 이루는 것이 (고전적인 자본주의에서는) 가치(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다. 교환가치가 현실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가격이다. 상품들은 바로 이 가격에 따라 서로 교환된다. 이러한 등가관계는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면서 인간의 사회적 삶 전체에 퍼지고 심지어는 사회적 삶에 영향을 받게 마련인 인간의 정신에도 새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상품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들이 일정한 비율로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환상적 생각 속에서 살게 된다. 이 환상은 근대를 구성하는 독특한 물신의 하나로서 대안 근대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된다. 따라서 대안 근대를 향하는 운동은 이 등가의 법칙의 극복이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직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상당한 양의 임금과 교환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이것이 굳어져 물신(物神)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가령 무조건 모두에게 일정 양의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 같은 기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림이 있을 수 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상품화된 노동과 교환된 임금으로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관계가 존재한 시기는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노동자는 생각조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바우엔스의 생각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위에 제시된 첫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바우엔스는 P2P 관계가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equipotentiality’가 바로 이 등가의 법칙을 극복하는 원리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어떤 기획에 협력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 어떤 권위도 협력의 능력을 미리 판정할 수 없으며 기여를 통한 협력의 질은 나중에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동료들(peers)의 공동체에 의해 판정됨을, 즉 ‘공동체의 비준’을 받음을 의미한다. 잠재력 균등적 기획에서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기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모듈[기획을 구성하는 부분들―옮긴이]을 자율적으로 선택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능력들의 다양한 집합으로 간주되는데, 이 능력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특정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한 순위가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우엔스는 인류학자 해리 워커(Harry Walker)가 「공통적인 것의 인류학」(“Anthropology of the Common”)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등가의 법칙’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강연의 내용은 볼리어의 블로그에서도 소개되었으며 여기에 옮겨져 있다.

 

[위에 제시된 둘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여기서 바우엔스는 찰스 리드비터(Charles Leadbeater)가 요하이 벤클러의 설명을 요약한 것을 인용한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이 서로 연계하는 방식에 대한 벤클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협동의 원료는 창조적 재능이다. 그런데 창조적 재능은 극히 가변적이다.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각기 다르며 또 각기 다른 식으로 잘한다. 외적으로는, 가령 시간이나 움직임 연구에 의해서는 누가 더 효율적인 창조적 노동자인지를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에 대해서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언제 창조될 필요가 있는지를 자세히 밝히는 상세한 직무기술서와 계약서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은 ‘때 맞춰’ 배달될 수 없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은 창조성과 질을 평가하는 어려움을 의사결정을 개인들과 소집단으로 탈중심화(분산)함으로써 해결한다. 이들은 무슨 일에 집중해야 할지를 무엇이 행해질 필요가 있고 그들의 숙련된 기술은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한다. 이미 직원이 잘 배치되어 있거나 당신의 기여가 별로 표가 나지 않는 기획에 집중하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 동료들의 눈을 속이기는 매우 어렵다. 당신이 하는 기여가 일정 기준에 실제로 못 미치면 그들이 곧 발견할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집중한다. 훌륭한 중추적 디자인 규칙들이 전체가 합쳐지도록 해준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에서의 일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상이한 과제에 스스로를 분산시킬 때 이루어지며,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동료들에 의한 열린 평가에 맡겨서 질을 유지하고 생산물은 모듈로서 디자인되어서 개인들의 기여가 쉽게 서로 맞춰지도록 한다.

중간에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은 생략하고 마지막으로 바우엔스가 인용하는 조지 페러(George Ferrer)의 대목을 우리말로 옮긴다.

통합적이고 육화된 정신성(spirituality, 영성)이 비교에 기반을 둔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은 경쟁, 겨룸, 시기, 질투, 갈등 그리고 증오를 쉽게 낳는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진정한 강력한 잠재력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서로 풍요롭게 하기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출현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욕구와 결핍을 서로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현재 우세한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는 역설적이게도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들에도 매우 확대되어 있다―에서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전체적으로든 특정의 특권적 측면에서든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는데, 만일 비교하는 정신을 [전원 내리듯이―옮긴이] 끈다면 이런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해체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만이나 정신적 나르시시즘은 말할 것도 없고 참되지 못하고 보람 없는 관계들을 낳는) 이 위계적 모델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양한 숙련과 노력의 영역에서 (지적, 정서적, 예술적, 기계적, 인간관계적 등) 자신들보다 우월한 동시에 열등하며 이 숙련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높거나 더 낫지 않다는 의미에서 동등한 존재로 경험하는 ‘나-너’ 방식의 조우에 자연스럽게 길을 내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조우를 단순하게 동등하기만 한 것으로 평범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면 인간의 평등을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의미와 자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의 상호작용에 가져올 것이다. 모두가 우리로부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진정으로 열려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인의 통합적 발전은 “사랑의 수평화”를 낳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나 겨루는 상대로 보기보다 내재적 차원에서나 초월적 차원에서나 ‘신비’(Mystery)의 특유한 육화로 볼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줄 수 있고, 우리 또한 그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볼 것이다. ♣




미셸 바우엔스 서울 초청 강연

Main theme

There are alternatives to the more commercial forms of the sharing economy, which are based on the urban commons and the communities that support and use them. Michel Bauwens will explain the experience of the 500 urban commons in Ghent, as well as his proposals to the city for new public-commons institutions to facilitate the cooperation between citizens and their city.

 

Keyword

#P2P foundation #Commons #Peer production #Platform Cooperativism #Sharing economy #Sharing city #Open cooperativism

Date : September 19(Tue) 5 PM ~ 7PM
Venue : Seoul Social Economy Center (684, Tongil-ro Eunpyeong-gu Seoul)
Language : English, Korean

 

Program time table

* The Fourth Wave of Commoning, transforming cities through urban commons by Michel Bauwens

* Round Table with Guest speakers- Michel Bauwens & Gibin Hong

* QnA